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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경(聖號經)을 때로는 십자 성호경(十字聖號經)이라고도 하는데, 거룩한 십자(十字)를 그으면서 외우는 기도문이란 말이다. 우리가 어떤 기도문을 바치든지 이 성호경으로 시작하고, 끝날 때도 언제든지 성호경으로 끝낸다. 성호경은 비단 기도할 때뿐 아니라, 밥 먹기 전과 밥 먹은 다음, 잠자기 전과 아침에 일어난 다음, 이 밖에도 갖가지 일을 하기 전과 한 후에 언제나 바치는, 기도문 중에서 가장 짧지만 가장 요긴한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의 의미는, 우리가 모든 일을 하되 우리의 힘이나 우리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성부(聖父). 성자(聖子).성령(聖靈)의 이름으로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부.성자.성령은 하느님께서 세 분이란 뜻이 아니고, 하느님은 한 분이시나 성부.성자.성령의 세 위격(位格)을 가지고 계시다는 말이다. (三位一體) |
주님의 기도
그리스도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직접 일러 주신 기도문이고 보니, 기도문 중에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뛰어난 기도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신 말씀으로 성경에서 뽑은 기도문이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가까이 가 청하기를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 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였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줄 모르는 제자들에게 지금 우리가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이것은 마태오 복음 6장 9절에서 13절에 이르기까지 기록되어 있는 성경 말씀이다.
"주님의 기도"는 "사도 신경"과 더불어,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오래 된 기도문이며, 옛날에는 예비 신자들이 영세 직전에 "주님의 기도"를 외워 두었다가, 영세 전례 때에 비로소 하느님을 참아버지로 부르는 "주님의 기도를 공공연하게 바쳤었다. 그리고 그 때 신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영성체 준비 기도로 바치기도 했었다. 그래서 오늘에도 미사 때 영성체하기 전에 "주님의 기도"를 사제와 함께 바친다. "주님의 기도"는 또 어떤 경우에 (예컨대, 연도문이나 모든 성인들의 호칭 기도 끝에서와 같이)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바치는 때가 있는데, 이것은 같은 정신과 같은 생각으로 같은 기도를 바치는 신도들의 일치를 의미한다.
"주님의 기도"의 구성을 보면, 하느님을 부르는 말과 그 다음 우리가 요구하는 일곱 가지 요청으로 되어 있다.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다음 네 가지는 우리 영혼과 육신을 위한 기도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가 사람과 이야기할 때 먼저 상대방을 부른 다음 다른 이야기를 하듯이, 이제 하느님과 이야기하고자하니 먼저 하느님을 부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느님을 부르되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그 때 사람들의 특별한 관습이다. 하느님은 물론 안 계신 곳 없이 곳곳에 다 계시나, 하늘을 특별히 말하는 이유는, 그때 사람들은 하느님은 하늘에만 계시는 줄로 알았고, 또 하늘은 높은 곳이니, 높은 곳에 계시는 그 분은 세상의 모든 것보다 높으신 분이라는 것을 뜻할 뿐 아니라, 하늘은 장차 우리가 하느님을 영원히 뵈올 우리의 본고향인 천국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아버지"라 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한 것은, 그 때 유대 백성들이 자기 나라의 하느님만을 찾고 있었으므로, 이것을 반대해서 하느님은 어느 특정한 나라의 하느님만이 아니시고, 모든 사람들의 공공 아버지라는 뜻에서 "우리"라는 말을 썼다. 하느님께서는 태초에 우리 인간을 만드셨으니까, 우리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시고, 보호하여 주시는 아버지와 같으시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다른 말로 "아버지"라고 부른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우리는 높은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조심성 있게 부른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면, 이에 따라 그의 이름도 존경을 받는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거룩하신 분이니까, 그분의 이름도 거룩하게 빛나야 함은 당연하다.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존경하고 찬미해서, 그 이름의 거룩하심이 모든 이에게 나타나도록 기도하는 구절이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느님의 나라"라고 하면, 우리는 세 가지 모양으로 알아 듣는다. 첫째로 성인 성녀들이 복락을 누리는 천국(天國)을 말하고,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세우신 보이는 교회를 말하며, 셋째로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착한 마음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와 우리의 마음을 뜻한다고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루가 17, 21)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잡고, 모든 이가 아버지의 뜻대로 착한 마음으로 살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보이는 하느님의 나라, 즉 당신의 교회가 점점 자라서 하느님을 모르는 많은 이가 하느님의 나라인 교회를 알고, 뭇 백성이 하느님을 공경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가 이룩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오시며"라는 말의 뜻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대한다." 또는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의 집으로 간다."는 뜻이다. 혹은 "어디에 이르다", "미치다"라는 뜻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나라가 하늘로부터 이 세상에 미치도록 기도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통을 당하셨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인간을 죄에서 살리고자 하심이 그 분의 뜻이었다. 십자가를 택하신 하느님의 뜻은 곧 "사랑"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신다. 지금 천국에서는 모든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천국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듯이,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도 오시어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신다. 다시 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여러 가지의 죄악을 끊어 버리고 하느님을 참아버지로 공경 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니, 우리는 이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제는 영혼과 육신 생활에 필요한 것을 빈다. "일용(日用)할 양식(糧食)"은 매일 우리가 쓰고 있는 식량을 말하는데, 이 말은 비단 매일 먹는 양식뿐 아니라 영혼 생명에 필요한 양식, 즉 우리 영혼에 필요한 하느님의 은혜와 영혼 생명을 길러 나가는 성체(聖體) 성사도 말한다. 이것 외에도 현세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 현세의 모든 생활 필수품이 우리 힘으로만 마련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일용할"ㅡ이 말씀으로 우리는 하루 먹을 양식만을 찾을 것이지 10년, 20년 먹을 양식을 찾는 욕심쟁이는 되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 것을 가르치신다. 그러니까 영혼, 육신의 생명을 위한 모든 것을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노력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 기도로써 도움을 청해야 한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여기서는 우리가 범한 죄의 용서를 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남이 우리에게 범죄했을 때 우리가 먼저 그를 용서해 주어야만 비로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고는 아무리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애원해 보았자 헛된 일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 못한 이를 용서해 준다는 조건하에서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들어 보자.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 14-15). 얼마나 똑독하게 말씀하셨던가! 특히 다음 말씀은, 우리 형제들간에 화목하지 않고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결코 받아들이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하다.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 23-24).
하느님께 기도하고자 할 때, 형제들과 마음 상한 일이 생각나면, 먼저 가서 화해를 하고, 기도하란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형제와 우리의 이웃들과 먼저 화목하지 않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은 진정한 기도의 태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유혹(誘惑)"이란 말은 유인(誘引)이란 말과도 같은 의미를 가지는데, 남을 꾀어서 나쁜 길로 인도한다는 말 이다. 여기의 유혹은 시련, 고통, 어려움을 다 포함한다. 이 기도문은 얼핏 보기에 하느님께서 마치 우리를 유혹하시는 분같이 생각되나, 그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결코 우리를 나쁜 것에로 이끌지 않으신다. 우리를 유혹하는 물건은 세상의 체면, 욕정으로 기울어지는 육신과 악마들이다. 이것들이 우리를 유혹할 때, 하느님께서는 다만 그것을 그냥 내 버려 두실 뿐이다. 왜 버려 두시느냐 하면, 우리가 이 유혹과 싸워서 공로(功勞)를 세울 수 있도록 하시고자 함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우리가 이겨 낼 수 없는, 말하자면 우리에게 벅찬 유혹을 허락치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유혹에 떨어져 죄를 짓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것을 물리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혹을 당할 때, 그것을 따르지 않고 물리치면 죄가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공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도무지 죄악의 유혹조차 당하지 않도록 기도하기보다, 우리가 당하는 유혹을 물리칠 하느님의 은혜를 빈다. 즉 유혹에 떨어져 범죄하지 않고, 이것을 극복해서 공로를 세우는 힘을 주시도록 빈다.
악에서 구하소서
악(惡)은 항상 우리 언저리에 있는 모든 흉측한 죄악을 일컫는다. 불행히도 우리의 부주의와 태만으로 우리가 이런 악에 떨어졌을 때, 거기에서 건져 주실 것을 빌면서 "주님의 기도"를 끝낸다. |
성모송
"성모송(聖母頌)"은 "주님의 기도" 다음으로 중대하고 완전한 기도문이다. 예수님을 낳은 마리아는, 거룩하신 예수님을 낳았으니 거룩하신 어머니시다. 거룩하신 어머님께 바치는 기도문이기에 "성모송"이라 한다.
"성모송"은 13세기에 벌써 모든 교우들에게 알려졌으며, 성 비오 5세 교황이 이것을 성무 일도(聖務日禱 성무일도는 사제들 또는 수도자들이 매일 바치는 기도책이다.)에 삽입하게 되자, 더욱 널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성모송"은 "묵주(로사리오) 기도"에 많이 사용되고 있으며, 때로는 병자와 마귀를 쫓는 데에도 바쳐지는 기도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 시작부터 "또한 복되시도다!"까지를 말한다. 이 것은 하늘의 천사가 마리아께 축하의 인사말을 한 것과,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 되심을 알고 인사한, 두 인사의 말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사말은 다음과 같다.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루가 1, 28). 이것은 천사의 인사 말씀이다. 다음 엘리사벳의 인사 말씀은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루가 1, 42)이다. 이 말은 성모님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찬사의 말씀이다. 그리하여 우리도 마리아를 극구 찬양하기 위해, 이 인사말을 성모송에 넣었다.
둘째 부분: 그 나머지 부분이다. 이것은 마리아에게 전달을 구하기 위해 교회에서 만든 기도문인데, 16세기 중간 카니시오 성인 때 벌써 널리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은총(恩寵)"은 하느님께서 공으로 주시는 은혜인데 우리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하느님의 도우심이다. 천주(天主) 성자의 어머니가 되시기로 특별히 뽑힌 여인이신지라, 하느님의 은총을 담뿍 받으셨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인류의 원조(元祖)가 저지른 "인류의 죄"에 물들지도 않았고, 또 자신이 지은 죄도 없다. 죄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는 마리아이시다. 죄 없으신 하느님을 낳을 분이시니, 응당 어떤 죄도 없어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은총이 가득하신", 이 말에서 우리는 마리아께서 인류의 죄도 없으신 특전의 특전을 받은 오직 한 사람임을 넉넉히 알 수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마리아는, 모든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모든 천사들보다 위에계신다. 그러기에 하늘의 천사가 그에 맞갖은 축하 인사를 올렸다.
기뻐하소서 "기뻐하소서!" 함은 축하하는 예의 인사를 말한다. "마리아님! 당신은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받으셨으니, 당신께 축하를 드립니다."의 뜻이다. 우리는 학교에 입학하거나 졸업하게 될 때, 또는 새해를 맞이할 때도 서로 축하 인사를 주고받는다. 하물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기로 간택되셨으니, 으레 축하를 받으셔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래서 하늘의 천사까지 마리아에게 축하 인사를 드려 기쁨을 같이한다.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죄의 그림자도 없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충만하신 마리아이시니까, 하느님과 사랑으로써 일치하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느님과의 일치에 어떤 장애물도 없을 뿐 아니라, 하느님을 잉태하실 마리아이시고 보니, 하느님과 한가지로 계시는 분이시다.
여인 중에 복되시며 마리아는 하느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 이와 같이 복된 속에서 하느님과 더불어 계시는 마리아는, 이 세상 어떤 여인도 받을 수 없는 최대의 특전을 받았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시므로, 세상 모든 여인 가운데 뛰어난 여인이시다.
태중의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태중(胎中)"은 뱃속이란 뜻인데, 당신의 배에서 나신 당신 아들 예수님도 역시 복을 받으셨다. 이것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하느님을 낳은 거룩한 어머니 마리아"란 뜻이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았으니 예수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지, 어떻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된단 말인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르는 소리다. 어머니가 낳은 아들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는 "대통령의 어머니"가 되듯이, 마리아가 낳은 예수는 하느님이시니까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물론 대통령의 어머니가 "대통령의 직"을 낳지는 않았듯이, 마리아도 "예수의 천주성"을 낳지는 않았다.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우리가 살면서 일하는 지금과, 그리고 우리가 죽을 그 때, 죄인(罪人)인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 빌어 주십시오."라는 뜻이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 마리아에게 성모송을 만들어 기도를 바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가톨릭에서는 마리아에게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성인 성녀들께도 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빌어 주소서" 하는 말에 주의해야 한다. 마리아와 기타의 성인.성녀들은 직접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힘이없기 때문에, "주님의 기도"에 있어서와 같이 직접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대신해서 하느님께 빌어 달라고 간구할 뿐이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느님께 직접 구하기에는 어려움을 우리 스스로 느낀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직접 무엇을 청하기가 어려울 때는 어머니를 통해서 청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청해서는 안 될 것이, 어머니가 청했기에 되는 일이 흔히 있다. 우리가 성모님께 비는 것도 이와 똑같다.
그러니 천주교회의 기도문을 자세히 살펴보라! 하느님께 대한 기도문에는 언제든지 직접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지만, 마리아나 성인. 성녀께 바치는 기도문에는 언제나 간접적으로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을 혼동하지 말고, 그 까닭을 알아야 하겠다. |
영 광 송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기도문이다. "영광(榮光)이란 말은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예컨대 "이런 자리에 불러 주셔서 대단히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한다. "영광"이란 말은 "올바로 알아준다"는 뜻이다 그이를 그이답게 알아 모실 때 "영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의 전능과 인자와 영원성, 절대성을 그대로 알아서 높이 모신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래서 기도서에 보면 "주님, 영광 받으소서."란 구절이 자주 나온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문을 여기서 설명하는 작은 영광송, 미사 때 외우는 대영광송(大榮光頌) 두 가지 가 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한마디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뜻이지만, 하느님의 삼위 일체(三位一體)를 들어 다 알아 들을 수 없는 신(神)의 신비를 영광으로 찬미하라는 뜻이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영광이 성부.성자.성령께로 돌아가되, 태초에 삼위께서 누리시던 것과 같이 지금도 그래도 영광이 있을 것이며, 또한 언제든지 마침이 없이 영원히 있어지기를 비는 기도문이다. |
사도신경
사도 "사도(使徒)"는 예수께서 친히 가르치신 열두 제자를 이르는 말이다. 오늘의 주교(主敎)들이 옛날 사도 무리에 속하는 분들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초대 교회의 첫 주교들이다.
신경 우리가 믿어야 하는 신앙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신경(信經)"은 라틴 말로 "상징(Symbolum).표시.신분.증명서.계약서"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3세기 성 치프리아노가 처음으로 이 말을 쓰기 시작했다. 그 까닭은, 이 믿음 조항을 입으로 고백함으로 곧 천주교 신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신분 증명서 또는 상징.표시가 되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신경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교회에서 쓰고 있는 것은 세 가지 신경뿐이다. 그 첫째는 "사도 신경"이요, 둘째의 것은 아타나시오 성인의, 성삼 교리(聖三敎理)가 골자로 되어 있는 "성 아타나시오 신경"이며, 셋째의 것은 "니케아ㅡ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다.
여러 개의 신경이 생기게 된 까닭은, 옛날부터 가톨릭 신앙 개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자, 이들을 거슬러 우리의 산 신앙을 말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신경을 외우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 내려오는 가톨릭의 참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표시가 된다.
"사도 신경"에는 열두 개의 믿음 조항이 들어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열두 사도가 하나씩 만든 것이므로 사도 신경이라 한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사도들이 예수님께 배운 것을 그리고 그들이 믿고 그들이 전해 준 교리 중에 가장 바탕이 되는 믿음 조항이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에 "사도 신경"이라 한다. 이것은 직접 예수님으로부터 내려오고 있는 교리이기 때문에, 성경과 성전(聖傳)에 그 토대를 두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와 함께, 초대 교회 때부터 있었던 기도문이며, 특히 신입 교우가 세례(洗禮)를 받을 때, 천주교의 참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표시로서, 이것을 성세 예절 중에 공식으로 바쳐 내려오고 있다. 오늘도 그러하다. 이것은 가톨릭의 믿을 교리 편의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도 신경"의 내용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믿음이 아니다. 미국 뉴욕에 갔다 온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뉴욕에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102층 집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미국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미국 이야기를 하는 그이가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면, 비록 우리 눈으로 보지는 못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말을 믿는다. 그렇다면 절대로 속일 수 없는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믿지 못하겠는가! 우리가 사람의 말도 믿을진대,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도 신경"의 내용을 믿지 않는다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천지(天地)"는 하늘과 땅을 의미하는 말인데, 여기서는 하늘과 땅만을 뜻하지 않고, 이 세상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의미한다. "창조주(創造主)"란 세상 만물을 아무 것도 없는 데서 만드신 어른이란 뜻이다.
"나는 하늘과 땅,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천주 성부를 믿는다." 즉 우리는 하느님이 한 분이심을 믿고, 또한 하느님께서 아무 것도 없던 거기에서, 재료도 없이 만물을 만드신 것을 믿는다. 물론 세 위를 가지신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신 것이나, 성부를 우리를 만드신 아버지와 같이 생각해서, 흔히 성부께서 창조 사업을 한 것으로 말한다. 집이 있으면 집을 지은 사람이 있고 그림이 있으면 그림을 그린 사람이 있듯이, 이 넓은 우주, 해와 달, 별 그리고 온갖 식물 동물, 이것들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이것을 만드신 우주의 창조주, 조물주가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외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외동아들이란 말이다. "예수"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세상을 구속하시는 분(救世主)" 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기름으로 거룩해진 임금 혹은 대사제(大司祭)라는 말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가진 하나밖에 없는 성부의 아들을 믿는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동정(童貞)"은 아이의 몸이란 뜻으로 처녀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천주 제삼위(第三位)이신 성령의 힘으로, 처녀인 마리아에게 잉태(孕胎)되어 사람이 되셨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자녀의 잉태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만 되는 것이 자연 법칙이지만, 예수는 하느님이시니까, 사람과 달리 천주스런 방법으로, 즉 성령의 힘으로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다니, 도무지 알아듣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본시오 빌라도"는 그 때 그 지방 총독의 이름이다. 그가 총독의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잡혀 십자 (十)모양으로 된 형틀에서 죽으셨다. 그 때의 형법에는, 십자가형의 사형이 가장 중한 것이었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예수는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았다고 하나, 이것은 터무늬없는 소리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으셨고, 거룩한 시체는 땅에 묻혔었다. 이것을 믿는다.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원조(元組)들이 죄를 지은 다음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까지는 천당문이 닫혀 있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명을 받들어 착하게 산 구약의 성조(聖組: 예컨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모세...)들은, 천당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천당문을 열 때까지 어떤 곳에서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곳을 "저승(古聖所:고성소)이라고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그분의 육신은 땅에 묻히시고, 그분의 영혼은 저승에 가시어, 그 때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구약의 성인들을 위로하셨다.
예수님은 죽으신 지 사흘째 되던 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즉 죽은 모든 사람들 속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금요일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금요일.토요일을 거쳐 주일 아침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것이 예수 부활(復活)이다. 사람은 아무리 좋은 약을 가지고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그러나 죽어 땅에 묻힌 예수님은 다시 살아났으므로, 이것은 곧 당신은 사람이 아니요 하느님이심을 드러낸다. 그리고, 즉시 부활하시지 않은 것은, 참으로 죽으셨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도 나중에 부활될 수 있다는 보증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신 사실을 믿는다.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호른편에 앉으시며 "오른편에 앉으시며"라 함은 성부님 바른편에 높은 자리를 정해 앉으신다는 말이다. 하느님이신 성부께서는 바른편 왼편이 없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가득히 누림을, 그 때의 풍속대로 말했을 따름이다. 즉 제일 높은 사람의 바른편에 그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앉았었다. "앉으시며"라 함은, 예수님께서 마치 임금이 어좌에 앉음과, 심판관이 판석에 앉음같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가지시고 천국 어좌에 앉으시어, 공심판 때 심판관이 되실 것을 뜻하기도 한다.
예수님은 부활 후 40일에 하늘에 올라가시어 성부님 바른편에 앉으셨는데, 이것을 예수 승천(昇天)이라 한다. 하늘에 오르신 것은, 첫째, 세상에서 모든 고난을 받고, 그 보답으로 하늘에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요, 둘째는, 천당에 우리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함이요, 셋째는, 우리를 위해 성부께 도움을 구하시기 위해서이고, 넷째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시기 위함이다.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성부의 영광을 누리시다가, 세상 마칠 때 하늘의 구름을 타고 세상 만민을 심판하러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로부터"라 함은 성부 바른편의 높은 어좌로부터 심판관으로 오신다는 말이다. "산 이"라 함은 세상이 끝나는 그 때 까지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도 한번은 죽었다가 살아나게 마련이다. "죽은 이"라 함은, 세상이 만들어진 이래 죽은 모든 선자, 악자를 다 말한다. 이밖에 다른 뜻으로, "산 이"라 함은 은총 지위에 있어 천국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뜻하고, 죽은 이라 함은 대죄(大罪)중에 있어 지옥을 차지할 사람을 말한다.
심판관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는 만인 앞에서 각자의 선행과 악행을 판단하시어, 착한 이는 천당으로, 악한 이는 지옥으로 각각 판결하실 것을 우리는 믿는다.
이것은 많은 사람 앞에서 되는 것이므로 공심판(公審判)이라 하고, 사람이 죽은 다음 하느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받는 심판을 사심판(私審判)이라 한다.
성령을 믿으며 천주 삼위(三位)의 한 분이신 성령께서 참으로 계심과, 성부 성자와 같이 하느님이심을 믿는다.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보편된 교회(敎會)"란 서양 사람이나 동양 사람이나, 세상 모든 사람이 다 믿을 수 있는 천주교회를 말한다. 천주교회는 거룩하신 하느님이 세우신 것이니까 거룩한 교회이며, 하느님은 또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시므로, 이 교회는 모든 이가 믿어야 하는 보편된 교회임을 우리는 믿는다.
"성인"이라 함은, 세상에서 하느님을 열심히 공경하고, 남에게 좋은 표양을 주어 거룩하게 산 분들이, 죽은 다음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 그가 확실히 천국에 있다는 것이 판명된 다음, 교회에서 "성인"이라고 특별히 선언한 분을 일컫는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인은 천당, 연옥, 은총 지위에 있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통공(通功)"은 공(功)을 서로 서로 통한다는 말이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는, 공이 많은 자가 공이 적은 자를 공으로 도와 줄 수 있고, 힘이 모자라 공이 적은 자는 힘 있는 자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교회", 즉 "모임"은 넓은 뜻으로 천당.연옥.세상 이 세 가지 모임을 말한다. 그러니까, 천당에 있는 영혼은 불쌍한 세상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하느님께 기도한다. 이리하여 이 세 모임은 서로서로 도와 주고 있는데, 이것을 모든 성인의 통공이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다.
죄의 용서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첫째 이유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자 함이다.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 하실 수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예수께서 당신 사업을 세상 마칠 때까지 맡아 보는 기관으로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 안에 죄를 용서하여 주는 권리를 주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구속 사업은 헛된 일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23) 하시면서 똑똑히 죄를 용서하는 권리를 주셨다. 이것을 모르는 이들은 흔히, 천주교회에서는 사람이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고 한다.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우리는 교회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권리로써 죄를 용서하여 줌을 믿는다.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한평생 산 다음 그 육신이 죽지만, 나중에 세상이 끝나는 날,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 자기의 영혼과 결합한다. 이것이 육신 부활이다. 의학 박사는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 생명을 만드신 그분은 없었던 생명을 만드신 분이기에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 그분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육신과 영혼이 다시 결합된 사람은 이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게 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죽기를 싫어한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죽지 않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바람은, 죽은 육신이다. "이리하여 그들은(악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쫓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 (마태 25, 46) 하셨으니, 그 때 죄인은 지옥에서 영원한 벌 중에서 살 것이고, 선인은 천당에서 영원한 복락 속에서 살 게 될 것이다. 또 이르시기를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요한3, 16) 하셨으니, 우리는 이것을 희망으로 삼고 하느님을 공경한다. 우리가 마땅히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할진대, 이 모든 것이 착하신 하느님의 말씀이고 보니, 굳이 믿을 따름이다. |
반성 기도
하루의 생활을 간단히 반성(反省)하는 기도문이다. 우리는 매사에 있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하루 동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의무를 소홀히"함으로 죄를 범했다.
우리가 죄를 범하는 데는, 첫째, 생각으로 죄를 범하고, 둘째, 말로써, 셋째, 행동으로 죄를 범하고, 그리고 해야 할 것을 소홀히 함으로 죄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이상 네 가지 문제를 특별히 반성하고 "그 가운데 버릇이 된 죄"를 살펴서 나쁜 버릇을 버리고 좋은 습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
고백 기도
우리가 지은 죄를 고백(告白)하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고백 기도"라고 한다. 이는 교회가 만든 준성사(準聖事: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주시기 위해서 만드신 일곱 가지 성사가 있는데 이 성사를 본받아 교회에서 만든 의식을 준성사라고 한다.) 이므로, 이것을 바치는 사람의 열심과 정성에 따라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기도문이다.
그러기에 미사가 시작되는 때와, 죄의 용서를 받는 고해 성사 때 이 기도를 바친다. 자기가 죄인임을 스스로 알고 겸손되이 바치는 진실한 죄인의 기도문인 "고백 기도"는 8세기 이후부터 기도문의 형태를 가지게 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일정한 기도문 없이, 몸을 깊숙이 굽혀 죄를 고백했었다. "고백 기도"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하느님과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부분이고, 둘째는 천사들과 성인들에게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도록 도움을 청하는 부분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과 우리가 죄를 고백하되, 먼저 전능(全能)하신 하느님께 죄를 고백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를 지어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렸기 때문이다.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우리는 언제나 가족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 하느님께 일차적으로 죄를 짓지만 다음으로 형제들에게 죄를 범했으니 형제들 앞에서의 죄 고백은 당연하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이제 죄를 고백하려고 생각해 보니, 과연 죄가 많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럼 심히 많은 죄를 어떻게 지었단 말인가? 우리는 죄를 세 가지 모양으로 짓는다. 즉 첫째로는, 나쁜 생각을 마음에 두어 입으로 나쁜 말을 하든지 거짓말을 하여 말로써 죄를 짓고, 둘째는, 나쁜 짓을 하여 행동으로써 죄를 짓게 되고, 셋째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 우리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도 죄가 된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 "제 탓이요" 할 때 가슴을 쳐야 한다. 가슴을 치는 까닭은, 내가 지은 죄는 나의 잘못으로 된 것이지 남의 탓이 아니며, 또 내가 잘못했으니, 바로 내 자신이 그 죄를 뉘우치고, 아파한 다는 뜻으로 가슴을 친다. 흔히 사람들은 크게 일을 잘못했을 때 가슴을 치면서 후회하고 답답해 한다. 이것과 마찬가지다.
그럼 왜 가슴을 세 번 칠까? 그 까닭은, 우리가 세 가지 모양으로, 즉 생각이나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죄를 지었고 의무를 소홀히 해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것을 각각 후회하면서 아파한다는 뜻으로 세 번 친다.
그러므로 간절히 바라오니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우리가 지은 많은 죄를 알아내어 고백했고, 또 그것이 나의 탓이라는 것도 알아서 후회하고 아파했다.
이러고 보니, 죄인인 내가 하느님께 기도하기에는 스스로 부당함을 느끼고, 죄인인 나를 위해서 하느님께 기도해 주실 것을 비는 뜻에서 성인, 성녀들을 불러 하느님께 전구해 달라고 기도한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 자비는 크게 사랑하고 크게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한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악과 허물을 용서하시어 없애 주시고, 당신께 죄를 고백한 우리를 불쌍히 생각하셔서 우리의 죄를 없이하시고, 우리를 천당 영복으로 이끌어 주소서 하는 기도문이다. |
통회 기도
우리가 지은 죄를 뉘우치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통회(痛悔)기도"라고 한다. 이것은 죄를 참회하는 아름다운 기도문이기에, 천주교회에서 죄를 사하는 고해 성사 때 이것을 사제 앞에서 외운다.
하느님, 제가 죄를 지어 우리는 누구든지 하느님 앞에 죄인이다. 마음으로 뉘우치기 전에 먼저 범죄의 사실을 인정해야 되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랑받으셔야 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사오니 악을 저지르고 선을 소홀히 한 모든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나이다. 죄를 범했다는 것은 곧 상대방의 사랑과 은혜를 배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상대방의 사랑과 은혜를 사랑과 은혜로 받아들이지 못했을 때 우리는 죄 의식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실제로 하느님께 상처가 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적인 표현이고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느님의 신성에 누를 끼쳤다는 뜻이다. 악을 저지른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고, 선을 소홀히 한 것은 하느님 앞에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주님의 은총으로 속죄하고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주님의 은총으로 보상을 치른다는 뜻이다.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며 죄지을 기회를 피하기로 굳게 다짐하오니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범죄의 기회를 미리 피하는 것이다. 나약한 인간이기에 범죄의 기회가 있으면 죄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예로부터 성인들은 범죄의 기회를 미리 피하라고 가르친다.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를 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십자가의 수난은 전 인류의 죄를 씻고도 남음이 있다.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속죄를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죄를 십자가의 수난으로 용서해 달라는 뜻이다. |
삼 덕 송
"덕(德)" 이란 죄를 피하고 착한 일을 오랫동안 되풀이해서 이루어진 좋은 습관을 말한다. 덕행에는 여러 가지 있으나, 그 중에서도 특히 사람을 직접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것이 신덕(信德). 망덕(望德), 애덕(愛德)이다. 그래서 이것을 향주덕(向主德)이라고도 한다. "송(誦)"은 외워 바친다는 뜻이다. 신덕송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기도문이다. 우리가 믿되, 한번 기분이 좋아서 기분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고, 확실한 믿음의 근거를 두고서 믿지 않을 수 없게 된 습성을 신덕이라고 한다. 이 신덕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주시는 은혜로 되는 것이다. 전 세계 10억이나 되는 신자들이 한결같이 빵 형상으로 된 성체(聖體)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어떻게 사람의 힘이라고 하겠는가? 우리가 구령하기에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신덕이다. 왜냐하면, 확실한 믿음이 없이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진리의 근원이시며 그르침이 없으시므로 이 말씀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이유를 찾게 된다. 즉 하느님은 모든 진리(眞理)의 근원(根源)이시고 그르침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믿는 것은 아는 것과 다르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이 지구가 해를 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없고, 다만 그것을 말씀하시는 선생님의 권위를 보고서 믿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 것도 우리가 그 교리 내용을 다 알아듣기 때문이 아니며, 그것이 우리 구미에 맞기 때문도 아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는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진실의 권위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이것이 곧 믿음이다. 진실하신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우리를 속이지도 않으시고 또 스스로 속을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권위를 보아서 믿는다.
계시하신 진리를 교회가 가르치는 대로 굳게 믿나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믿되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하는 대답을 가르쳐 준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계시하신 진리" 이다. "계시(啓示)"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진리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과 성전을 통해서 우리에게 직접 하늘 나라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는데, 그것을 계시라 하고, 이 계시된 진리(眞理), 즉 참 진리의 길을 교회가 권위 있게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교리를 교회는 틀리지 않게 한결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알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이를 받아 들인다.
망덕송 우리가 하느님을 희망하고 바라는 덕을 망덕(望德)이라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믿을 때는 반드시 어떤 것이 이루어지리라는 희망을 걸고 믿게 된다. 그러므로 망덕송은 신덕의 내용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자비의 근원이시며 저버림이 없으시므로 우리가 망덕을 가져야 하는 이유를 말한다. 왜 우리가 희망을 걸고 믿는가 하면, 하느님은 자비의 근원이시고 우리를 저 버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대로 해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통하여 주실 구원의 은총과 영원한 생명을 바라나이다 우리가 무엇을 희망하고 바라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여기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를 주시겠다고 했으니, 약속하신 대로 이 은혜를 주실 것을 바란다. 하느님의 은혜가 없이 우리의 힘만으로는 구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 세상이 지난 다음 후세에 가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즉 천국의 영원한 복락을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란다.
하느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사람들은 흔히 주겠다고 약속만 하고 주지 않는 수가 있으나, 하느님은 절대로 그렇지 않으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 온 희망을 걸고 굳게 바라야 한다. 바라지도 않는 자에게는 하느님께서 은혜를 주실 리 없기 때문이다.
애덕송 하느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사랑"이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도 이르기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사랑을 드러내는 애덕송(愛德誦)은 모든 덕행의 중심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근원이시며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할 첫째 이유이다. 하느님은 모든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한없이 좋으시므로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며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좋으시기에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둘째 이유이다. 꽃밭에 피어있는 꽃이 아름답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 흘러나온, 아름다움의 샘이신 하느님께서는 과연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 하는 것이다. "마음을 다하여" 하는 것은 마음속으로부터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되 누구보다도, 부모보다도, 형제보다도, 애인보다도, 국가보다도, 세상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최대로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다음으로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둘째 번 대답이다. 첫째는 하느님을, 둘째로는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뜻이다.
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하느님의 물건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물건은 이 세상 만물이다. 그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천사와 사람인데, 이것을 우리는 다른 것보다 더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집주인을 사랑한다면 그 집안의 모든 가족들도 동시에 사랑하게 되는 것과 같이 하느님을 사랑하니까 하느님의 한 가족이 될 사람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집주인에 대한 사랑과 다른 가족들에 대한 사랑이 같아서는 안되듯이, 사람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게 대한 사랑과 같아서는 안 되고 구별이 있어야 함 은 말할 것도 없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함은 자기 몸과 똑같이 사랑하란 말은 아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마태 7, 12) 하신 말씀대로,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말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남에게 베푸는 정도로 남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신. 망. 애덕 중 신덕과 망덕은 이 세상에서만 있을 수 있고, 천국에 가면 안개같이 사라진다. 그러나 천국에서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니까, 애덕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 (Ⅰ코린 13, 13) 라고 하였다. |
봉헌 기도
"봉헌(奉獻) 기도"는 지금까지의 모든 기도문의 총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문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오롯이 바치는 내용이기 때문에 "봉헌 기도"라고 한다.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바치기 전에 우리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사랑의 동물인데, 이것은 오로지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이요, 우리는 또한 동물이 할 수 없는 하느님 공경을 할 수 있다는 특권도 받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육신과 영혼을 동시에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만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 하셨나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창조된 것과 영혼을 가지게 된 것은, 오로지 주님을 사랑할 줄 알고 하느님을 알아 공경함으로써 더 큰 사랑을 받기 위한 것이고, 다음으로는 다 같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인간에게 사랑과 의리를 바치기 위함이다.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나는 비록 죄인이지마는, 즉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지마는 이제부터는 하느님이 주신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바치겠다는 뜻이다.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 주소서
마치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제물(祭物)이 되시어 천주 성부께 바쳐진 것처럼, 우리의 모든 행위도 오로지 하느님을 찬미하고 봉사하는 뜻으로 하여 하나의 제물로 드리겠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 주소서 하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아름다운 기도문이다.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은 아니다. 우리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생명이 아니다. 그분이 주신 것이다. 깡그리 공짜로 주셨으니 우리도 그분께 우리의 모든 삶을 바쳐서 그분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목적이다. 주신 그분께 모든 것을 바쳐서 영원한 보화를 받는 기도문이다. |
삼종 기도
삼종은 종을 세 번 친다는 말이다. 이 기도를 바치라는 표시로써 종을 세 번씩 친다. 이 종소리를 듣고 외우는 기도라해서 "삼종 기도"라 한다.
삼종은 이렇게 친다. 즉 먼저 땡! 땡! 땡! 세 번 치고, 약간 쉬었다가 다시 땡! 땡! 땡! 세 번 치고, 또 약간 쉬었다가 땡! 땡! 땡! 세 번 친 다음 계속해서 댕그랑…친다. 종을 세 번씩 치는 이유는, 예수님의 강생 구속 도리가 셋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삼종을 세 번씩 침으로 다른 종소리와 구별지어 삼종기도 종소리임을 알리는 편리한 점도 있다.
삼종 기도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나?
예수님이 탄생하신 팔레스티나 성지(聖地)를 외교 백성들이 차지하고 있을 때, 이것을 되찾기 위해서 11세기에 십자군 이란 군대가 일어났다. 십자군이 성지 회복을 위해 떠날 때, 이들의 승리를 위해서 성당 종을 세 번 치면 기도를 바치라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십자군의 시대가 지난 다음에도 그 때 교우들은 그 아름다운 관습을 그대로 이어받아 기도를 바쳤다. 그래서 이것이 13세기부터는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위 만종(晩鐘)이라 해서 저녁에만 바쳤던 것이, 차차 아침에도 바치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정오에도 바치게 되었다 한다. '밀레'의 "만종"이란 것이 바로 저녁 삼종을 말한다. 그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우들이 밭에서나, 공장에서나, 길에서나 삼종 소리를 들으면 일하던 것을 중단하고 삼종기도를 바치는 것은, 가톨릭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기도의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종이 있는 성당이면 언제든지 하루에 적어도 세 번은 삼종 종소리가 울린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나이다. "마리아께 아뢰니"함은, 천사가 마리아께 어떤 사실을 알려 드린다는 말이다. "잉태(孕胎)"는 아이를 밴다는 뜻이다.
하늘의 천사가 마리아께 구세주의 탄생을 미리 알려 주었다. 이래서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이 마리아의 태(胎)속에 배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으로 예수님이 잉태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전능한 힘에 의해서, 남자의 간섭이 전연 없이, 마리아의 몸을 빌려 잉태되셨다. 그래서 마리아는 처녀로서 예수를 낳았다.
일종은 예수님이 탄생할 것을 알리는 말씀이다. 일종이 끝나면 성모송을 한 번 바치고 이종을 시작한다.
성모송을 외우는 것은, 삼종 기도가 그리스도의 탄생과 성모님을 중심으로 되어 있기에, 마리아께 대한 기도문을 바치는 것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모송에는 또한 천사의 인사말이 들어 있어, 삼종기도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게 하소서.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시는 성모님의 지극한 겸손과 순명의 정신이 엿보인다. 성모께서 천사의 아룀을 겸손되이 받아들인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3월 25일 우리는 주의 탄생 예고 축일을 지내고 있다.
일종과 이종에 나타나는 주의 탄생 예고의 장면이 루가 복음 1장 26절 이하에 잘 나타나 있다. 천사와 마리아 사이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천 사: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마리아: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 사: "성령이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마리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몸은 처녀입니다…." 이 말은, 처녀인 당신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니 깜짝 놀라 하시는 말씀이니, 이것으로써도 마리아가 처녀의 몸이었다는 것이 똑똑히 드러난다. 그 후에도 마리아는 계속해서 처녀로 사셨기에 평생 동정 (平生童貞)이라 한다.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저희 가운데 계시나이다. "말씀"은 성부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사도 요한이 쓴 복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어려운 삼위 일체의 문제인데, 여기서 자세히 말할 수는 없고, 간단히 요약해서 말한다면, 천주 성부의 뜻이 성자를 통해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의 생각이 말로써 표현되듯이, 천주성부의 뜻을 성자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분이기 때문에 성자를 "말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 말씀이 우리와 같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같이 계시게 되었다는 뜻이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마리아가 낳은 예수께서 하느님이시므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시다. 그런 높은 지위에 있는 성모님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저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서 미리 약속하신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문이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데, 중개자인 천사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심을 알았다는 뜻이다.
성자의 수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에게 내려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어 마지막 부활로써 승리를 거두셨다. 우리의 최후 승리도 이후에 우리의 부활로써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들이 생활 원칙을 찾을 수 있다. 즉 우리가 마지막으로 바라는 우리의 부활도 십자가의 고통을 거치지 않고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없이는, 다시 말하면 세상의 여러 고통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 없다. 세상에서 당하는 우리의 고통이 이 다음 우리 부활의 영광으로 변하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고통을 얼마나 잘 참아 받아야 할 것인가! 고통은 부활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로서, 범죄한 인간과 선하신 하느님과를 서로 화해해 주는 역할을 한다. 원조들의 범죄로 땅에서 천국으로 가는 다리가 끊어졌다. 이 끊어진 다리를 다시 놓는 분이 곧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께서 놓으신 다리를 거치지 않고는 결코 천국에 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모든 천상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고 우리의 구령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만든 기도문의 대부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라고 끝맺는다. |
부활 삼종 기도
"부활 삼종 기도"를 전에는 "희락(喜樂) 삼종경" 이라고했는데, 이것은 기쁨을 드러내는 기도문이라는 뜻이다. 교회가 가장 기뻐하는 때는 부활 시기이다. 그래서 부활 삼종 기도는 가톨릭 달력에 표시되어 있는 대로 예수 부활 대축일부터 성령 강림 대축일까지 바치되, 기쁨을 드러내는 기도문이기 때문에 늘 일어서서 바쳐야 한다.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모후(母后)" 란 말은 왕(王)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왕들의 왕이신 그리스도를 낳았으므로 모후라고 말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는 "하느님을 찬미하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 말이다. 알렐루야는 부활 시기에 많이 외우는 기도문이다. 마리아께서 그리스도를 잉태하셨으니 기뻐하심이 마땅한 일이다.
태중에 모시던 아드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나이다. 마리아께서 낳으신 아들 예수께서, 당신이 죽은 다음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겠다고 미리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으니 기뻐하시란 뜻이다.
저희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역시 여기서도 성모님은 우리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중개자로 나타나신다. 우리를 대신해서 빌어 달라는 내용이다.
동정 마리아님, 기뻐히사며 즐거워하소서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나이다 당신 아들 예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으니, 이제는 십자가의 수난을 다 씻어 버리고 어머니로서의 마음의 상처도 다 씻어 버리고 기뻐하시란 뜻이다.
기도합시다 하느님,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온 세상을 기쁘게 하셨으니 그리스도의 부활은 온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왜냐하면, 부활은 죄악. 마귀. 죽음에 대한 완전한 승리의 표시이며, 또한 우리 부활의 보증이 되는 까닭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던들 우리의 믿음은 헛될 것이고, 우리의 영생(永生)에 대한 희망조차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자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의 도움으로 영생의 즐거움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우리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 마리아의 전달을 구하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는 것이다. |
식사 전 기도
주님, 은혜로이 내려주신 이 음식과 음식은 생명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음식을 통해서 생명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우리 생명도 하느님이 주셨고 생명을 위해서 먹는 음식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오곡 백과 모든 것이 우리의 생명 때문에 있는 것이고 이것을 끼니마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곡식이 익지 않고 과일이 여물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일 년 사 계절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그래서 식사하기 전에 우리의 생명과 연관된 음식의 축복과 함께 우리의 축복을 기원한다. |
식사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우리가 받은 생명도 우리가 누리는 세상의 모든 것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산다는 것도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이다. 오늘 먹은 이 음식이 새 생명을 위해서 필요한 바, 이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해야 한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십시오" (콜로 3, 17).
주님의 이름은 찬미를 받으소서 이제와 영원히 받으소서 이름은 그 사람의 인격을 상징한다. 하느님의 이름은 곧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경의가 포함된다. 이름을 찬미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찬미한다는 뜻이다. 식사가 끝나고 생명으로 가득 찬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찬미를 드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느님의 자비로 평화의 안식을 얻게 하소서 식사 후에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가 있다. 식사와 생명은 연결되어 있듯이 죽은 영혼들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야 하는 것과도 연결이 된다. 살아 있는 우리가 연옥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우리의 기도가 없이는 연옥 보속이 빨리 풀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의 기도로 승천한 영혼은 천국에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한몫을 하는 이른 바 "성인 통공"의 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
아침 기도
하느님, 저를 사랑으로 내시고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의 사랑을 나누고 전하심이다.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 넘쳐 사랑의 물방울이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이 곧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이다. 사랑은 영원한 것ㅡ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목말라한다. 사랑하는 부인이 옆에 있고 사랑하는 남편이 그리고 자녀들이 옆에 있어도 우리는 사랑의 갈증을 느낀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원한 사랑은 하느님만이 채워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인류 창조가 시작되었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저에게 영혼 육신을 주시어 인간은 창조된 목적은 주님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참으로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다. 우리의 전 존재가 주님의 것이기에 주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한다. 성서에서는 가장 귀중한 계명이 주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침 기도에 주님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서 "주님을 섬기고 사람을 도우라"라는 기도로 시작한다.
저는 비록 죄가 많사오나 주님께 받은 몸과 마음을 오롯이 도로 바쳐 찬미와 봉사의 제물로 드리오니 어여삐 여기시어 받아 주소서 나는 비록 부족한 존재이지만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나의 작은 희생의 제물을 바쳐 하루의 일과를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오늘 하루의 모든 일과를 주님께 오롯이 바치는 각오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우리 주 하느님께 권능과 영광 지혜와 굳셈이 있사오니 찬미와 감사와 흠숭을 영원히 받으소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일과가 하느님의 영광으로 일관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당할 모든 것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치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전능하신 하느님, 오늘도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의 평화로 이끌어 주소서 오늘 하루 종일 내가 해야 할 일과 말들이 주님의 뜻에 따르는 것이 되어 결과적으로 기쁨과 평화로 일과가 끝나기를 바란다. 흔히 우리는 자기 감정대로 또는 자기 기분대로 말을 하고 행동을 해서 하느님과 이웃에게 잘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저녁 기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에 잠들기 전에 오늘의 과오를 반성하는 기도이다. 특히 "버릇이 된 죄"를 깨닫도록 기도한다. 예컨대 자주 마음의 죄를 범한다든지 습관적으로 신경질을 내어 주위 사람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나쁜 버릇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은 그 자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처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모습이 달라진다. 잘못한 다음 그것을 반성하고 뉘우쳐서 새로운 삶으로 발전해야 한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그 날의 모든 것을 청산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인들은 이렇게 교훈한다.
"오늘 하루가 너에게는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 얼마나 좋은 교훈인가! 하루가 끝나고 반성하게 되면 잘한 것보다 잘못된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저녁 기도는 하루의 생활을 반성하고 이어서 "통회 기도"를 바친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 그리고 그분의 계명인 사랑의 실천을 다짐하면서 향주 삼덕(신덕송, 망덕송, 애덕송)의 기도를 바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하루도 이미 저물었나이다 이제 저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주님을 흠숭하며 지금 이 순간까지 베풀어 주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나이다 오늘 하루가 무사한 것에 대한 감사의 기도이다. 천사 성인들을 나열하는 것은 역시 그리스도의 큰 공동체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업적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지켜 주소서 끝으로 주님의 축복을 받아 오늘 밤도 죄를 짓지 않고 주님의 은총으로 행복한 밤이 되기를 주님께 강복을 청하면서 저녁 기도는 끝난다. 사제들이 바치는 성무 일도의 끝기도의 강복은 이렇게 마감한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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