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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씨의 유례 서촉, 연안 명씨(西蜀, 延安明氏) 서촉(西蜀)은 고대 중국(中國)의 진(秦)나라 서쪽에 속해있던 지명이다. 원(元)나라가 기울어 가는 1362년(고려 공민왕 11) 사천성(泗川省) 성도(成都)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하(夏)나라를 세웠던 명옥진(明玉珍)의 아들 명승(明昇)은 1366년(고려 공민왕 16)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王位)를 계승하여 현군(賢君)으로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371년(공민왕 20) 명(明)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의 세력에 굴복하고 이듬해 어머니 팽씨(彭氏)와 함께 가족 27명을 거느리고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였다. 고려에서는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여 국빈(國賓)의 대우를 하였고, 집과 노비를 내려 왕족(王族)으 지위를 지켜주었다. 그는 송도(松都)의 북부(北部) 이정리(梨井里:흥국사 북쪽 산밑)에 정착(定着)하고 총랑(摠郞) 윤희종(尹熙宗)의 딸과 혼인하여 살면서 아들 4형제를 낳아 우리나라 명씨(明氏)의 시원(始原)을 이루었다. 명승(明昇)은 이성계(李成桂)와 친분을 맺어 두터운 교분으로 자주 바둑을 즐겼으며, 그의 어머니 팽씨(彭氏)는 이태조(李太祖)가 등극할 때 용포곤의(龍袍 袞衣:임금이 입던 정복, 황색이나 적색의 비단으로 지으며 가슴과 두 어깨에 발톱이 다섯 개 달린 용의 무늬를 금실로 둥글게 수 놓았음)를 지어 올려 태조가 감읍(感泣)했다고 한다. 태종(太宗)때에 승(昇)은 화촉군(華蜀君)에 봉군되어 충훈세록(忠勳世祿)의 예우를 받았으며, 영조조(英祖朝)에 와서는 그의 후손들에게 병역과 납세를 면제토록 하였다. 그로부터 명씨(明氏)는 문호(門戶)를 대하(大夏)의 왕(王)인 명옥진(明玉珍)을 시조(始祖)로 삼고 선조(先祖)의 원향지(原鄕地)인 서촉(西蜀)을 본관(本貫)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게 되었으며, 명승의 아들 자헌공(資憲公) 의(儀), 총랑공(摠郞公) 현(俔), 부사공(副使公) 준(俊), 시랑공(侍郞公) 신(信)의 후예들이 전국 각지에 분산 세거(世居)하면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였다. 명씨(明氏)의 본관(本貫)은 서촉(西蜀)을 비롯하여 연안(延安), 해주(海州), 황해(黃海), 한양(漢陽), 양산(陽山:옥천지방), 태안(泰安) 등 24본(本)까지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한 핏줄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여, 황해도(黃海道) 연안(延安) 은 자헌공 의(儀)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던 지역으로 선조(先祖)의 유적이 있는 곳이기도 하여 일부에서는 아직도 관향(貫 鄕)을 연안(延安)으로 쓰고 있으나 1986년에 간행된 명씨대동보(明氏大同譜)에서는 서촉과 연안의 합본(合本)으로 되어 있다. 명씨의 인맥을 살펴보면 6세손 진사(進士) 극겸(克謙)의 맏아들 광계(光啓)가 임진왜란 때 평택 현감(平澤縣監)으로 창의(倡義)하여 중봉(重峰) 조 헌(趙憲)의 의병(義兵)과 합세, 유명한 금산(錦山)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후손 정구(廷耉)는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보령 현감(保寧縣監)을 지냈다.한편 광계의 증손(曾孫) 천득(天得)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자현(自賢)은 훈련원 첨정(訓練院 僉正)을 역임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를 거쳐 용양위 부호군(龍 衛副護軍)을 지낸 치상(致庠:광계의 11세손)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그밖의 인물로는 고종(高宗) 때 효자(孝子)로 유명했던 우진(祐鎭)과 연안 군수(延安郡守)로 선정(善政) 을 베풀었던 범석(範錫)이 뛰어났다. 이외에도 법무부차관 등을 지낸 분이나 학계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교수님들이 많이 계시고 해남에 세거하고 있는 명씨 후손 중에서는 명수근이 중앙정보부의 부이사관을 지냈으며, 현재 가장 괄목하게 활략하고 있는 후손은 명현관으로 해남군수로 봉직하고 있다. 할아버지 손 중에서는 명인제가 법원서기관으로 공직생활을 마치고 현재 대전에서 법무사로 활동 중이다. 고모님 쪽에서는 큰고모님의 큰아들 백호진이 광주 KBS 기술국장을 보임받아 봉직 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는 겉으로 드러난 것이며 후손들이 근검한 생활을 하며 자신의 분수에 맞게 올바르고 가문을 빛내는 삶을 영위하고 있으니 앞서 거명한 사람들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고 오히려 아름다울 것이다.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고 가문의 전통과 명씨 자손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세상에 이익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며 가정과 사회에 이바지 하는 귀중한 동량이 되시길 기대합니다. 현재는 최근래에 명씨는 1960년 국세조사(國稅調査) 당시 14, 452명, 1975년에는 3,840가구로 집계되었고,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서촉 명씨는 2,725가구, 11,837명, 연안 명씨는 2,506가구, 10,6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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