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 혁명 ----------------------------- 김평일
튀니지의 나라꽃인 재스민의 이름으로 지어진 민주시민혁명, 재스민 혁명으로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에 부는 민주시민혁명의 불씨가 매섭다. 한번 일어나면 이산 저산으로 옮겨 붙는 산불처럼 튀니지에서 이집트로 리비아로 계속 옮겨 붙는다. 인간의 양심에서 발로되는 민주시민혁명은 종교 문명권에 관계없이 꽃피는 위대함을 보인 것이다.
유럽인들은 민주화가 예수님의 가르침이신 만인 평등에 그 뿌리가 있어 다른 문명권에서는 꽃피기 어렵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전혀 다른 문명, 군사부(君師父)에 대한 충효(忠孝) 장유(長幼)의 서열 위계질서가 수직적인 유교문명권, 대한민국에서, 1960년 4월19일 민주시민혁명이 발발하였을 때, 전 세계는 유교권의 첫 시민혁명을 보고 놀라워했다.
4.19 이전 한국과 민주화는 "쓰레기통의 장미"처럼 아니 어울린다고 영국언론에서 비아냥거렸다. 4.19 혁명 이전 1950년대 우리 사회는 북한처럼 수직 사회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왕실의 혈통으로 사실상 군왕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탄신일(생일)엔 전차를 온통 꽃으로 치장한 꽃전차가 서울 복판에 경축 퍼레이드를 벌렸다. 공무원은 일본인 총독부 사람처럼 국민 위에 군림하여 관청에 드나들 땐 저절로 몸을 낮추던 때가 50년대이었다. 국가 공권력 뿐 아니라 일반 직장에서도 사용자 앞에 노동자 인권은 전혀 없었다. 마치 지주와 소작인의 사이처럼 해고 되고 고용되는 일이 "엿장수 맘대로 식"이었다.
그런 대한민국에 4.19 혁명은 우리 국민 모두가 체험한 신선한 충격이었다. 계급이 타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승만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 하셨고. 그분의 오른팔이라는 이기붕국회의장은 일가족이 자살하는 엄청난 파괴를 경험한 것이다.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라는 유행어가 이 때 생겼다. 누구나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는 까닭에 1960년 한해는 전 국민의 자유가 지나쳐 방종의 행태로, 전국은 과격한 군중집시(集會示威 : 당시엔 데모라 했음)가 하루도 쉬지 않았으니, 그 혼란은 기막힐 정도 이었다. 오죽하면 초등학생들이 "데모를 그만하자"는 데모를 벌였을까.
이러한 방종의 군중집회는 국민적 거부감까지 주어져, 1961년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거부감 없이 국민들이 환영하는 계기가 되었다. 4.19가 보약이라면 5.16은 다이어트라고 할까 역사의 흐름과 경험은 대한민국의 건강을 살리는 방향으로 굴러갔다. 1960년 당시 사회적 혼란은 사실상 북한이 남한을 충분히 적화 시킬 수 있던 절호의 기회였다.
5월16일 군사 쿠데타를 혁명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5.16을 굳이 혁명이라고 부른다면 자유와 방종을 성찰하는 혁명, 그리고 경제 개발계획을 1,2,3차 5개년 계획으로 대성공시킨 경제 혁명이라 할 수 있다. 5.16 직전, 우리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은 7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비참했던 나라였으니까-.
그러나 4.19 정신은 장막 뒤에 숨어 버리고 그 이후 위정자들은 고래(古來)의 통치의식을 버리지 않아 국민적 갈등은 점점 심화 되어 갔다. 어느 나라나 국민 소득이 5000달러를 넘어가는 시기에 큰 변화가 온다고 한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선언된 6.29 선언이 선언된 6월 29일을 4.19 혁명의 완성 일이라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4.19부터 6.29의 27년간의 혁명은 유교 문화권에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참 시민혁명이었다. 일본도 민주국가라 하지만 그들은 서구를 무조건 흉내 내자는 탈아주의(脫亞主義 : 아시아 탈피 유럽화)로 서구 민주주의를 복사 했을 따름이다.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쓰레기통의 장미"로 불리던 우리 민주화는 쓰레기보다 더한 썩은 물에 연꽃으로 피어났다. 북아프리카 회교국의 민주 혁명을 재스민 혁명이라 부른다면 27년간 시민의 힘으로 이룩한 우리나라 민주화를 연꽃 혁명으로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