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평초등학교가 개교하고 첫 행사인 학예회, )
1952년 4월, 아직 휴전협정이 체결되기도 전해에
우리 언니는 백전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여
4km도 더 되는 길을 걸어서 나이 많은 당고모와
집안의 아저씨들이 데리고 학교를 다녔어요.
북에서는 아직 전쟁 중이었지만
남쪽에서는 모진 현실 속에서도 시집가고 장가도 들고
아이들이 태어나 자라기도 했지요.
그해 가을에 백전초등학교에서 운동회라는 것을 하여서
우리 집 첫딸인 언니의 운동회를 구경하기 위하여
모처럼 햇팥을 넣은 찰밥을 하고 고구마와 밤이랑,
삭혀서 달게 된 감이랑 추석에 남겨두었던 송편을 새로 쪄서 싸고
모처럼 잔치 같은 기분에 들떠 온 가족이, 3살이 되는 내 동생까지도
백전 초등학교까지 운동회 구경을 갔답니다.
일제 때 지어져 큰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이 학교를 다니셨다는
백전 국민하교는 어린 내게는 너무 놀라운 것이었다고 기억이 되네요.
기와를 이은 학교 건물들의 크기도 놀랍지만
엄청나게 큰 마당(운동장), 하늘을 뒤 덮은 각색 깃발들이랑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함성은 소름이 끼칠 만큼 감동적이었어요.
우리 언니는 이런 학교를 다니는구나!
언니는 아무 경기에도 상을 따지 못했지만
언니가 신발을,(갈색 고무신이었는데 그 시절 우리는 그것을 “반구두”라고
불렀어요.)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그날은 아주 즐거운 날이었어요.
그 시절 반구두라고 우리가 불렀던 검은 남자고무신에 하얀 테두리를 한
신발이 달리기를(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지만) 할 때 벗겨져서
아이들이 신발을 벗어두고 경기를 하러 나갔기 때문에
언니가 신발을 잃어 벼려서 언니는 많이 울고 어른들은 걱정을 하면서
한참을 신발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해가 저물었는데 언니는
겨우 남의 신발을 빌려 신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어요.
1학년 가을 운동회를 치르고 초겨울에
가까운 물나드리에 분교가 세워져
1, 2학년이 내려오게 되었다고 언니는 아주 좋아했지요.
내가 처음 대평 국민학교를 가 본 것은
언니가 겨울 방학을 끝내고 아직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이라 기억되네요..
전날 밤부터 언니는 자기네 학교를 보여 주겠다고
아침을 빨리 먹고 어머니 모르시게
종오네 살구나무 모퉁이에 먼저가 있으라고 했지요.
그렇게 해서 언니는 나를 데리고
대단한 것을 내게 보여 주려는 냥 물나드리 물방았간 앞 흙다리를 건너
학교라는 곳을 데리고 갔어요.
나 역시 요즘 아이들 같이 똘똘할 리 없는
- 앞산에 망태지고 올라가는 사람이
동촌 어르신인지, 노단이 양반인지 구별이 되는-
토끼 발맞추는 산골 동네서 자란
여섯 살 배기 가시나인지라 이렇게 먼 길을
언니만 의지하고 따라 나선 것은 보통 일일 수 없었지요.
언니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약간 딴청을 부리면서
우리 학교에 다 왔어 라고 말하면서 멈춘 곳은
우리 집 타작마당한 마당 한편에 있는 초가집,
마루만 없을 뿐이었지
우리 동네에서 흔히 보는 초가집이었어요.
동쪽으로 난 측면의
죽(竹) 살문을 디딤돌 두 계단을 딛고
문턱을 넘어 뛰어 내려야하는 교실이라는 데는
방 구둘을 뜯어낸 바닥이라 깊은 흙바닥이었고
그기에 두 사람씩 앉는 책상이 있고 도깨비 의자가 둘씩 놓여있었지요.
앞쪽에 흑판이 있고 양쪽 벽에 한지를 바른 봉창(封窓)이 간격을 맞추어
몇 개, 앞쪽에 판자로 만든 땅에 서부터 달린 미닫이문은
나로서는 처음 보는 문의 모양이었고요.
나의 실망스러움이란...
그럼에도 나는 먼저와 있는 낮선 학생들 때문에 주눅이 들어
언니 곁에 가만히 고개 숙이고 있을 수밖에,
1학년과 2학년이 한 교실에서 공부를 한대요.
조금 있으니 청년 한사람이 추시계를 가져다가 흑판 옆에 걸고 나가더라고요.
선생님인가 생각하였더니 학교의 소사라고 언니가 대단한 것을
알려 주는 냥 일러주었지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지고 우리 동네 사는 언니보다 한 살 많은
연자네 오빠, 1회 선배 최 영기, 우리 친척 조카인 진평이도 왔어요.
왜 그런지 민망한 마음이 되어 알은체도 못하고 있는데
그들 역시 멀뚱하게 처다만 보고 말더라고요.
뭐가 잘 못되었는가?
그런데 웬 밀나래미(밀집)처럼 비쩍 마르고 키가 큰 여학생이
우리 곁으로 와서는 곱지 않은 눈을 해가지고 아래위를 훑어보겠지요.
언니를 힐끗 쳐다보니 예의 그 딴청 부리는 시늉을 하고 있는데
“야! 아무개야, 야 누고? 네 동새이가?”
그 밀라래미가 시비쪼로 얼러댔어요.
언니는 아무 말이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니 ....
“야, 가시나야, 와 사람이 묻는데 대답이 없노?”
“그래, 내 동새이다”. 언니는 모기소리마냥 작은 소리로 겨우 대답을 했어요..
내가 처음 경험한 대평국민학교는
이렇게 망연자실한 것이었지요.
그 키가 큰 여학생은 하도꼬라고 불리던 대평초등학교 1회 선배셨지요
물론 내가 입학하고 난 뒤 내게 좋은 선배셨고요.
나는 전쟁이 끝난 다음 2년 지나서 대평 국민학교에 입학했어요.
할아버지께서는 언문(한글)으로 내 이름 석 자를 익혀주셨지요.
어머니께서는 누런 종이에 넓은 칸이 가로로 쳐진 셈본 공책을 사다가
1, 2, 3, 4를 익혀 주셨는데 무난하게 100까지 익힐 수 있었어요.
문제는 하나 둘을 세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더라고요.
열까지는 잘 세는데 열 셋을 지나면 수열이 혼동이 되어
수수비로 손등이 벌겋게 붙도록 어머니께 맞으면서
겨우 백을 헤아리고 입학을 했지요.
요즘 아이들에 비교하면
행복한 편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위의 사진은 내가 입학하기 1년 전
초대 김 환용 교장선생님께서 부임하시고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이 승만 대통령의 생신 기념으로
1,2,3 학년 전교생 학예회라는 것을 한 사진이에요.
어떤 분들어 독재정권 시대에나 있을 일이라고 말하더라고요. ㅎㅎㅎ
그러나 그 시절을 산 우리는 전쟁이 끝나고 다시 나라를 회복했다는
감격과 작으나마 희망을 행한 소원에서 나온 일들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내 기억으로는 아마 이 분이 교가를 작사 작곡 하셨다고 들은 것 같아요.
왼쪽 4 번째 팔장을 끼고 계신 분인데
내 일생에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이지요.
아마 그 무렵 1회 선배님으로부터 5회까지 모두에게
이 분의 이미지는 그럴 것이라고 여겨지네요.
잊혀 지지 않은
보배 같은 추억을 그냥 간직하고 세상을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대평초등학교 카페가 이곳에 있어서 올려볼까 말까 망설이다가
올립니다.
교실이 없어 황하쟁이로 장터로 돌며 수업을 하고
모래와 자갈을 책보따리에 들어 나르면서
돌담을 쌓는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과
나이 들어 입학을 한 1회와 2회의 남자 선배님들을 도와
제법 큰 돌을 책보를 또아리 만들어 머리에 이어다 나르고
지게작대기만큼 작은 나무들을 학교 주위에 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나무가 몇 년이나 자라면 백전초등학교와 병곡초등학교 둘레에
서 있는 나무처럼 자랄 수 있을까?‘ 안타깝게 쳐다보았지요.
고향을 떠나 30여 년만에 큰아들을 사천 공군 훈련소에 데려다 주고
다시 서울로 돌아 오는 길에
나는 꼭 대평국민학교를 한번 가보고 싶다고 남편에게 통 사정을 하여
함양읍을 들러 그립던 물나드리로 차를 몰아 학교에 들어섰더니
내가 그리도 안타깝게 여긴 나무들은 아름드리가 되었는데
학교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학생들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어서 눈물을 훔치면서 다시 차를 탔어요.
길지도 않은 세월을 살았는데 참으로 인생은 무상한 것이라는 마음이 들더군요.
대평초교 카페가 있으리라 상상을 못했는데
너무 반갑고 감사해요.
구름도 찬란한 백운산 줄기
우뚝 솟은 감투봉 맑은 시냇물
기름진 이 땅을 길이 빛내는
우리들은 대평교 힘찬 어린이.
기름진 이 땅을 길이 빛내는!!!
첫댓글 아주 클래시컬한 흑백무비를 보는 듯한 재미있는 추억 이야기군요
청산이 깊어 좋으신 님은 대평 가족이신지요? 우리 집에서 가까운 사업장이던데.. 재가 이따금 그 앞을 지내기도 한 것 같아요. 반가워요.
전 대평 21회입니다. 학교 바로 앞마을에 살았습니다. 저희 가게 가까운데 사시면 들리셔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제 집사람이 하는 가게라서 전 가게에 자주 가지는 못합니다. 가게를 처음 열어서 걱정이 많습니다.
선배님 !이 글을 다 읽고나니 .눈물이 하염없이 흐름니다. 호홉을 가다듬고 다시금 자판기를 두들깁니다. 대평교의 탄생과 그 시절의 아픔을 고스라이 간직한 우리네의 역사를 인용해 주셨기에 서러움을 간직한 우리들의 이력서 같습니다. 옜 추억 그대로 입니다,,,,,,
영삼이 후배, 잘 지내지요? 누나랑은 앞, 뒤 순번으로 친했고 누나는 공부도 꽤 잘하는 친구였어요. 내 기억으로는 7회에 형도 한 사람 있었지요? 학교가 작아서 6년도안 가족처럼 모두를 아는 사이였지요. ㅎㅎㅎ 폐교가 되어서 더욱 그립고 아쉽지만 어쩌겠어요. 건강하게 잘 지내요. 고마워요.
선배님!
네, 맞습니다. 형님께서 (영규) 50에 출근길 교통사고로 인해 너무일찍 가셨어요, 그때는 형님 나이가 많은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할일도 많고 너무나 적은 나이였는데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에 안타까움을 삭일수밖에 업군요, 7회 선배님들의 감투봉 회의 명칭이 대평교의 상징이기도 했지요 ,감투봉은 교가에 있는 상징적인 산이었지요,
주말 잘 지냈지요? 내가 무단한 말을 하여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같아 미안해요. 사실 영규 후배와 내 동생 성중이와 동창이에요. 대개 동급생 중에 형제가 여럿이면 다른 형제들도 동기가 되더라구요. ㅎㅎㅎ 7회 모임이 감투봉이라니 대평국민학교 동창모임 향기가 물씬 나네요. 그런데 감투봉은 갈머리 절 뒤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의 이름 아니었는지..? 왜 그런지 나이 들수록 옛 일은 어제 같이 새로워요. 한 주도 건강하시고 평안하게... 축복해요.
저는 59년생인데 제가 태어나기전 이네요,,가슴이 아려옵니다,,,귀한사진을 아직까지 보관하고 계시니 말입니다,,그리고 지나간 세월의 글들을 읽노라니, 아름답습니다,,선배님,누야 할머님ㅎㅎㅎㅎㅎ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감사합니다,
ㅎㅎㅎ. 할머니라고 그러지 말아요. 후배님께서는 혹시 웃헤재 사람인가요? . 반가워요.
네,,우두재,,,그리고 서울 뱡화동 살아요,,
권순찬 (갑)이라고 했는데 동명이 또 있는 모양? 우두재에 권씨 가진 동문이 몇 분 있었어요. 대평국민학교는 성씨만 봐도 어느 동네 사람인지 대강은 알 수 있었지요? ^^ 방화동 사는군요. 서울의 서쪽 끝이지요? 나는 동쪽 끝 송파동에 살아요. 축복해요.
대평초등학교의 탄생 비밀을 보는 것 같습니다 참으로 귀중한 사진인데 저희 학교가 세월속으로 사라져버려서 안타깝습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고마워요. 후배님, 축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