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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독재의 허상 세운상가
소개공지 조성
제2차 세계 대전은 공중 무기의 발달로 인해 지상에 효과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폭격기가 많이 운용되었고, 이에 따라 무차별적인 폭격에 대한 대비도 많이 진행되었다. 특히 폭격에 사용되는 소이탄은 투하 시 2,000℃의 고열로 주변을 모두 태울 수 있기 때문에, 화재에 취약한 목조 건물이 많았던 일본은 이에 대한 대비가 절실했다.
1945년 3월 10일에 있었던 도쿄 대공습은 일본에 충격을 주었다. 전선에서 일본이 불리한 상황이었고, 미국에 의한 폭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자명했으므로, 일본의 각 지역에서는 폭격에 대비하기 위해 아무런 건물도 짓지 않고 공터로 남겨두는 소개공지 조성 사업에 착수하였고, 경성에서는 5월 11일부터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소개작업은 미완으로 끝났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방치되어 있던 소개공지에는 전쟁으로 집을 잃은 주민들이 판잣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다. 또한, 종묘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공지 곳곳에는 사창가가 들어섰고, 사람들은 이 사창가를 속칭 종삼(鐘三)이라고 불렀다.
개발
1966년 서울특별시장으로 부임한 김현옥은 이 지역의 실태가 심각한 수준임을 인식하고 이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 종래에 종로구와 중구에 각각 분담되어 있었던 이 지역의 정비사업이 시청 소관으로 이전되었고, 8월까지 이 지역에 대한 철거작업을 마쳤다. 서울시는 이 지역에 대규모의 상가 건물을 짓기로 계획했지만, 정부는 당초 이 지역을 도로용지로 지정한 것을 들어 상가 건설을 거부하려고 했지만, 청계천에 인접하고 있던, 현재의 아세아전자상가 위치에 9월 8일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기공식에 참석한 김현옥은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이라' 라는 뜻을 담아 이 지역의 상가 이름을 세운(世雲) 상가로 결정했다. 결국 정부도 이 지역을 재개발지구로 고시하게 되었다.
상가 설계
세운상가의 설계는 김수근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물의 지상 1층은 자동차 통로와 주차공간으로 하고, 3층에 인공데크를 건설하여 주변에 상가를 배치, 보행자 전용의 통로로 하여 철저한 보차도 분리를 적용하고, 종묘에서 필동 사이 1km에 이르는 공간은 보행자통로를 연결하여 입체화하도록 했다. 또한 상가의 윗층 아파트 부분에는 건물을 유리로 덮는 아트리움 공간을 도입하는 등의 설계가 진행되었다.[7] 이에 이 지역의 개발이 활성화되었고 현대·대림·삼풍·풍전·신성·진양 등 6개 기업체가 참여, 북쪽부터 차례대로 현대상가(현 종로세운상가), 아세아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 풍전호텔(현 HOTEL PJ), 신성상가, 진양상가라는 이름을 붙여 건설되었다.
건설 결과
하지만 상가 건설 결과는 설계와 많이 달랐다. 3층에 있다던 공중보행도로는 동서 두 줄로 가다가 을지로를 건널 때 잠깐 한 줄이 되고, 을지로를 건넌 뒤 다시 두 줄이 되었다가 마른내길에서 끊어졌다. 마른내길이 이어지지 못하자 1km에 이르는 공중보도도 중간에 끊겨 버린 것이다. 건물에 유리덮개를 설치하는 것도 실현되지 않아 서울시내에서 투박하고 위압감을 주는 건물로 변해 버렸다. 철저히 보차도 분리를 하겠다던 당초의 계획과 달리 지상 1층에도 보행자가 다니게 되어 3층의 보행자 도로는 그 의미를 상실했고, 상가 내에 공공시설을 설치하고 옥상에는 인공정원을 두겠다는 계획도 무산되었다.[8] 설계자 중 한 명이었던 윤승중은 1994년에 밝힌 회고에서 자신들은 상가의 기본설계만 하고 세부 설계는 담당하지 않았으며, 시공주체가 서울시여야 했는데 8개의 기업군으로 분할되어 기업의 논리에 의해 계획이 변경되었고, 당시 시대가 자신들의 계획에 따라오지 못했다는 점을 들었다. 윤승중은 이 회고에서 계획이 10년만 더 늦게 착수되었어도 이상이 실현되엇을 것이라고 밝혔다.
준공과 운영
세운상가 중에서는 현대상가가 1967년 7월 26일 최초로 준공되었다. 서울시는 점포 2천개, 호텔 915개를 수용하는 맘모스 상가아파트를 건설하기 위해 동양 최대규모인 시멘트 87만부태, 목재 143만사이, 철근 7천t의 자재가 들어갔다고 자랑하면서, 서울의 상가 중심지가 종로 - 명동 - 소공동 - 무교동에 이어 이 곳으로 옮겨올 것이라고 예상했다.[10] 또한 상층부에 건설된 아파트의 인기도 대단해서, 사회 저명인사들이 다투어 입주해 있었고, 시공 때부터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1971년 한강맨션이 건설되기 전까지 세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세운상가는 서울의 유일무이한 종합 가전제품 상가로도 발전했다. 특히 80년대 말 개인용 컴퓨터의 발전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한국의 8비트와 이후 16비트 컴퓨터, 그리고 소프트웨어 대부분이 세운상가에서 거래되었다. 1987년 저작권법이 도입되기 전 한동안 소프트웨어를 카피하는 카피점이 성행했다. 세운상가 사람들이 모이면 미사일이나 잠수함도 만들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세운상가에 있는 많은 전자상들은 1987년 조성된 용산전자상가로 많은 수가 이전하였으나, 일부는 이에 반발하고 그 자리를 지켰다.
철거 계획
국민의 소득수준이 높아지고, 강남 개발이 이루어지고 도심이 정비되면서, 상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서울시에서도 1995년 도시계획위원회에서 세운상가를 철거하고 그 부지를 공원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13] 하지만 막대한 보상비 문제로 철거는 계속 미루어지게 되었다.
2003년 청계천 복원 사업이 진행되면서 청계천 주변 상가의 대규모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청계천을 떠나게 된 상인들은 송파구의 가든파이브로 이전하였고, 이 일대 상권은 더욱 쇠락하게 된다.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종로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잇던 공중 보행데크가 철거되었고, 뒤이어 을지로를 지나던 보행데크도 철거, 3층의 보행통로는 네 조각이 났다.
2006년 취임한 오세훈 시장은 세운상가의 철거와 일대의 공원화를 공약으로 발표했다. 상가는 상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8년 12월 17일 북쪽에 있는 종로세운상가부터 철거가 시작되었고, 일대는 '세운초록띠공원' 이라는 이름의 공원으로 재탄생했다. 2010년 청계천 남쪽의 청계상가 철거에 들어가, 2012년까지는 퇴계로까지의 모든 상가를 철거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