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아주 훌륭하다. 문제는 이 세상에 있다.”
―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만약,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당신이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존재를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폴 틸리히(Paul Tillich)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 1942년-2015년)은 미국의 성공회 신학자이자 신약학자이다.
[생애와 활동]
마커스 보그는 미국 미네소타에서 스웨덴과 노르웨이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루터교회(Lutheran)를 믿어왔다. 컨콜디아 대학에서 공부하고B.A., 유니언 신학교를 거쳐 옥스퍼드 대학교 맨스필드 칼리지에서 석사 학위M.Th.와 박사 학위D.Phil를 받았다. 1966년부터 컨콜디아 대학, 남 다코다 주립대학교, 칼톤 대학을 거쳐 1979년부터 2007년까지 오리건 주립대학교에서 종교와 문화 분야 석학 교수로 활동했으며 미국 성서학회 역사적 예수분과 의장, 동 학회의 국제 신약성서 프로그램 위원회 공동의장, 성공회 성서학자 협의회Anglican Association of Biblical Scholars 회장을 역임했다. 부인이자 성공회 사제인 캐논 마리안네 웰스 보그Reverend Canon Marianne Wells-Borg가 사목하고 있는 오리건 트리니티 대성당의 캐넌 신학자로 활동하다 2015년 세상을 떠났다. 예수 세미나의 주요 구성원이었으며 성서와 신학 대중화에 힘쓴 저술가, 자신의 입장에 갇히지 않고 다른 입장에 선 학자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한 신학자, 평신도의 신앙 성숙에 관심을 기울인 선생으로 평가받는다.
<https://ko.wikipedia.org/wiki/>
마커스 보그,《놀라움과 경외의 나날들 Day df Awe and Wonder》―21세기 어떻게 기독교인 될 것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2019)란 그의 나이 27살 쓴 논문부터 일흔에 쓴 마지막 책까지 여러 곳에서 뽑아서 편집. 서문을 부인 마리안 보그가 썼다.(2017년)
시인 예후다 아미카이는
우리가 옳은 곳에서는
봄에 결코 꽃들이 자라지 않는다오.
우리가 옳은 곳은
마당처럼 단단하고 짓밟혔지만
허나 의심과 사랑은
두더지처럼, 쟁기처럼 세상을 파서 일군다오.
마리안 보그는 ‘의심과 사랑’이 우리의 토대를 흔들어 새로운 생명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으며, 기독교는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라면서 이 책의 목적은 당신의 정신과 당신의 마음을 자극하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로는
첫째, “좀 더 큰 것”(a more)이 있다. 삶이 무상하고 고통스럽다하더라도 우리의 존재는 훌륭하며 놀랍고, 우리의 삶은 놀라움과 경외감를 불러일으킨다.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나날들을 채우고 있는 놀라움과 경외에 대해서 장님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둘째, 예수는 중요하다. 당시에도 지금도 그렇고, 예수는 우리들 중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인간의 가능성을 구현한 분, 예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능력, 용기, 사랑, 친절, 정의를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것이 희망적이다.
셋째, 상황이 중요하다. 1세기의 세계는 경제적 불의, 억압적인 사회구조와 정치구조, 그리고 하나님을 독점하고 있다는 주장으로 가득찬 세계. 예수는 당시의 고통과 불평등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 관심을 기울였고, 그래서 타인의 행복을 위해 헌신했다. 예수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실재와 본성을 깨닫게 되는 일에도 똑같이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우리의 삶은 그 실재에 의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삶의 복잡한 상황들에 대응해야 하는가? 무엇이 실재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넷째, 지속가능한 삶의 “길”이 있다. 그 길은 함께 아파하는 자비의 길이다.
… 나는 기독교로 되돌아간다. 왜 21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가? 비전을 주고, 희망도 길도 열어주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한다.
그 나라는 지금 여기에 있다. 정의롭고, 온전하며, 비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기독교 비전은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우리가 변혁이라는 호된 시련을 짊어질 것을 요구한다. 개인적이며 집단적인 변혁은 해방의 핵심 요소다. 우리가 변혁에 참여하지 않고, 또한 함께 아파하는 자비의 삶을 구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으며, 또한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마리안 보그는 축복의 기도로 유대인 안식일 기도집에서 한 구 절을 인용하며 서문을 마친다.
하루씩 지나가고 한 해씩 사라지건만, 저희는 기적들 사이를 장님처럼 걸어갑니다. 저희의 눈을 볼 것들로 채워주시고, 저희의 마음을 알 것들로 채우소서. 당신의 현존이 마치 번갯불처럼 저희가 걸어가는 어둠을 비추는 순간들이 있게 하소서. 저희가 어디를 바라보든, 떨기에 불이 붙었지만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는 것(출3:2)을 볼 수 있게 도우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빚으신 흙덩이인 저희들이 거룩함에 닿게 하시고, 놀라움 가운데 “ 이 얼마나 경외로 가득한 곳인가…”(창28:17)하고 외치게 하소서.
마커스 보그가 말하는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것들, 기독교의 심장으로 이해하는 다섯 가지
첫 번째 요점은 ‘성스러움의 실재’, 기독교의 심장에는 하나님, 성스러움, 영―이 말들은 내가 동의어들로서 또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는 용들입니다―에 대한 확고한 주장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243)
두 번째 요점은 ‘계시의 원천들’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아나요? 기독교의 심장에 있는 계시의 원천들은 무엇인가요? 두 가지의 주된 계시 원천―그 두 가지 모두 “하나님 말씀” 즉 성경 속에 알려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안에서 알려진 하나님 말씀으로 언급.(245)
세 번째 요점은 기독교가 “바른 길(the way)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독교인에 대한 가장 초기의 이름은 “그 길”(행9:1)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길은 두 개의 차원을 갖는데,
첫째는 개인적 차원, 즉 개인의 변화에 관한 차원. 이것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미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주고 다시 사는 것으로서, 내적인 변화 과정에 대하 은유로 이해. 거듭나는 것이고,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존재방식 속으로 들어가는 것.
둘째로, 이 변화는 정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변화에 관한 것이고, 또한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핵심적인 구절과 함께 표현.
*우리가 기독교를 하나의 길로 바라볼 때, 그 길은 실천―하나님의 실재와 또한 우리의 하나님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뜻하는데, 믿는 것이 아니라 실천이 핵심이다.
*세 번째 요점을 말하면서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은, 그 길이 기독교에서 십자가에 의해 탁월하게 상징. 십자가는 개인적 변화의 통로에 대한 하나의 상징.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산 것이다.”(갈2:19~20)라는 바울 말처럼 말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이 세상을 통치하는 권력에 맞서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개인적이며 또한 정치적입니다.
네 번째 요점은 기독교의 핵심에 ‘공동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진정한 기독교에 대한 어떤 날카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권력자들에 의해 처형당한 사람을 따르는 것, 즉 그 시대의 지배 권력들, 그 시대의 지배체제, 이 세상의 권력들, 그리고 어쩌면 고대세계의 최고의 제국에 의해서 처형당한 사람을 따르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 이 세상의 권력들이 예수를 살해했고 하나님이 그가 옳았다고 해원解冤시키셨는데, 그것이 부활절의 핵심 의미들 중에 하나입니다.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제국에 의한 처형과 하나님의 혜원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권력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십자가에 매달은 그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 나는 기독교가 지배문화에 맞서는 비판적인 날카로움이 되고 … 신약성경이 선포하는 진정한 기독교의 메시지는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있다는 것과 그 더 나은 세상은 본래 하늘에 관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252)
예수가 누구인지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뜻은?(163)
“예수는 상당히 과소평가되었다. 우리가 그에게서 인간성을 빼앗을 때, 우리는 그의 위대함을 빼앗는 것이다.” ― 남아프리카공화국 예수 학자 앨버트 놀란 Albert Nolan
먼저, 예수를 유대인 신비주의자로 이해합니다. 예수가 하나님을 알았던 사람이고, 성스러움을 알았던 사람이고, 하나님의 영을 알았던 사람. 그는 하나님의 영을 경험적 실재로서 체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역사적 예수는 지혜의 교사. 지혜의 교사인 예수는 길을 경로를 제시한 교사. 1)우리를 인습 너머로 이끌어냈던 길 1) 많은 사람들이 아직 가지 않은 길 3)예수의 말로 표현하면, 그것은 좁은 길, 좁은 문 4) 그것은 체제 전복적이고 대안적인 지혜였습니다.
세 번째 진술은 그가 사회적 예언자였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사회적 예언자들처럼, 예수는 당시의 유대 땅에 존재하는 지배체제에 맞서 저항한 철저한 비판자였습니다. 실제로, 그가 살해당한 이유는 사회적 예언자로서의 그의 열정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성금요일이 갖는 정치적 의미입니다. 그 세 가지 요약을 달리 표현해 보면, 예수에게는 세 가지 차원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거룩한 영의 차원 두 번째는 지혜의 차원 세 번째는 정의의 차원이었습니다.
예수를 이처럼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삶이 어떤지에 대한 드러냄 또는 계시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을 뜻하나요?(166)
첫째로, 그 삶은 예수가 자신의 경험 속에서 알았던 것과 똑같은 거룩한 영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의 매우 많은 부분이 믿는 일-특히, 나중에 천국에 가지 위해서 믿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과 맺는 관계에 관한 것임을 뜻할 것입니다, 실제로, 나는 이것을 영성의 가장 핵심적인 뜻으로 이해합니다. 나는 영상이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적이고 또한 의도적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둘째로, 예수를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삶이 어떠한지에 대한 계시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삶은 예수의 대안적인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삶일 것입니다. 인습적인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놀라움에 대해 눈멀게 한다는 점입니다. … 예수의 길은 그 길의 가장 중요한 열매인 자비 속엣 성장. 우리는 인습적 짛케라는 눈가리개로부터 해방되어 점점 더 자비로운 존재들이 되어갑니다.
3)세 번째 요소는, 예수를 정의의 차원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정의를 향한 열정은 예수로 하여금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지배층들이 자신들의 좁은 사리사욕을 위해서 만들어내고 종교에 의해서 합리화된 체제에 맞서 저항하게 만들었습니다.(179)
* 요약하면, 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 안에 점점 더 우리의 중심을 두는 삶, 예수의 대안적인 지혜에 의해 살아가는 삶, 자비와 정의로 특징되는 삶을 뜻합니다.
“책 한 권의 목적은 당신으로 하여금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지,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의 생각을 해주는 것이 아니다 … 어떤 생각이든 당신의 정신이나 마음에 자극을 주기 시작하자마자, 당신은 책을 내려놓을 수 있다. 당신의 명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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