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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달라이 라마의 입보리행론 강의
빼마까라 번역 그룹 편역/이종복 옮김
2563. 6. 25
제1장
보리심의 이로움
1.
환희에 이르신 분들께, 그들이 지닌 법신(法身)에
그리고 모든 그들의 법의 상속자에게,
응당히 존경을 받을만한 분들께 경건히 예를 올립니다.
경전에 따라, 저는 이제 보살행의 수행을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2.
여기서 나는 이전에 듣지 않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게송을 지을 재주가 없다.
따라서 이 글이 다른 이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내게는 없다.
이 글은 오직 내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 쓸 뿐이다.
《입보리행론》은 우리가 공양하는 수승한 분들인 붓다들과 보살들에게 귀의하며 게송을 시작한다.
1.
환희에 이르신 분들께, 그들이 지닌 법신(法身)에
그리고 모든 그들의 법의 상속자에게,
응당히 존경을 받을만한 분들께 경건히 예를 올립니다.
경전에 따라, 저는 이제 보살행의 수행을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환희에 이르신 분들이란 말은 붓다와 비슷한 말로, 산스크리트어로는 수가따(sugata, 善逝)이다. 이 말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가따의 수(su)는 ‘환희’를 뜻하고, 가따(gata)는 ‘도달하다. 이르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수가따는 ‘한희에 이르신 분’이며, 다르마끼르띠(Dharmakīrti; 法稱, 600~660)의 《논리의 정수[正理-滴論, nyāyabindu]》에 따르면, “완벽하게 도달하신, 혹은 이르신 분”이다. 이 환희의 경지를 성취하는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깨달음과 제거이다.
마음의 자질이 점점 향상되고 마음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사라지면, 궁극적인 본성을 어떠한 장애 없이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현상의 본질을 명철하게 직관할 수 있는 능력도 점진적으로 얻게 된다. 이 현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것은 어떠한 착각도 없이 모든 현상을 아는 지혜이다. 이는 가려질 수도 없으며, 다시 퇴보하지도 않는다.
깨달음의 모습은 모든 현상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 깨달음은 다양한 현상에 대한 통찰과 그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는 완벽한 앎으로 이끈다. 여기서 앎이란 마치 발가벗은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현상을 직관하는 것을 말하며, 모든 현상의 완벽한 앎을 성취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퇴보하지 않음[不退]’, ‘투철함’ 그리고 ‘완벽함’이라는 세 종류의 ‘앎’은 깨달음을 통한 환희 혹은 안락(安樂)의 증득이 가지고 있는 세 가지 특성이다.
이 올바른 이해는 수행을 통해 차근차근 이루어나갈 수 있다. 이 이해가 점점 더 강해지고 명확해지면, 자아와 현상이 실재한다는 미혹된 믿음이 점점 약해진다. 따라서 이 이해가 자아와 현상의 실재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치료하는 해독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해독제의 효력이 정점에 달하게 되면, ‘자성(自性)이 없음’을 보는 무분별지가 일어난다.(주14) 이 지혜는 현상 그대로의 모습만을 보게 하며, 어리석음 이라는 마음의 장애를 밀어내어 번뇌를 제거한다.
이는 다양한 수준의 삼매를 통해 번뇌의 힘을 일시적으로 약하게 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무분별지를 통해 번뇌들을 제거하면 이 번뇌들은 영원히 사라진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번뇌가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 상태를 ‘불퇴전(不退轉)의 번뇌 소멸’이라고 한다. 이 수승한 무분별지가 수행을 통해 완벽해지고, 그 무분별지를 가로막던 모든 장애가 깨달음이란 해독제를 통해 제거되면, 우리는 번뇌의 제거가 완성됐다고 말할 수 있다.
불퇴, 투철 그리고 완벽이라는 세 가지 측면이 번뇌의 제거를 통한 깨달음의 세 가지 특성이다. 수가따는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깨달음과 세 가지 제거를 통해 ‘도달한 자’인 것이다.
법신(法身, dharmakāya)을 지닌 이 수가따, 즉 선서(善逝)는 보살의 열 가지 경지 가운데 첫 번째에 이르러 번뇌를 버림으로써 출발한다.(주15) 그러고 나서 그는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경지[無學]에(주16) 이를 때까지 불성을 성취하는 수행의 길을 나아간다. 그 경지에 올랐을 때, 그는 완벽하게 청정한 절대적인 공간, 절대적인 본성 그리고 절대적인 법신을 깨닫는다. 어리석음의 장애가 멀어짐에 따라 지혜의 모든 자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법신의 스물한 가지 청정한 자질들이 일어난다. 모든 장애를 제거한 뒤에 남아있는 것을 ‘원초적인 지혜’라고 부른다.
법신에서 깨달음의 측면은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 가운데 ‘괴로움이 소멸하는 성스러운 진리의 길[道聖諦]’의 정점이며, 제거의 측면은 ‘괴로움이 소멸하는 성스러운 진리[滅 聖諦]’의 정점이다. 이 두 가지 진리가 붓다의 가르침, 즉 우리가 귀의하는 세 개의 보배인 삼보(三寶) 가운데 두 번째 보배, 법보(法寶)이다. 따라서 법신은 법보의 궁극적인 모습이다. 보신(報身, saṃbhogakāya)과 화신(化身, nirmāṇakāya)은 무학도(無學道)를 성취한 분들의 모임인 승가(僧迦, saṃgha)를 구성한다. 그리고 모든 결점에서 벗어나 모든 좋은 자질들을 갖춘 붓다는 도성제와 멸성제를 갖춘 분이다. 이 세 개의 보배, 붓다, 붓다의 가르침 그리고 무학도를 성취하신 분들의 모임인 승가는 절대적인 귀의처이다.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대승 보살들, 성문승들 그리고 홀로 깨달은 벽지불(辟支佛 혹은 緣覺)들은 수승한 모임, 또는 승가라고 말한다. 샨띠데바는 이분들과 다른 모든 공경을 받을만한 분들에게 존경의 예를 표한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한 뒤, 샨띠데바는 이 논서에 보살들과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 즉 붓다의 상속자들이 실천한 내용을 담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다. 붓다에게는 세 부류의 상속자들이 있다고 한다. 육신의 아들인 라훌라, 가르침의 상속자인 성문과 벽지불들 그리고 붓다 마음의 상속자들인 보살들이다. 이 세 부류의 상속자들 가운데 제일 마지막 부류를 가장 중요한 상속자라고 하는데, 그들이 모든 중생의 이로움을 위해 불성의 모든 수승한 자질을 갈망하며, 연민과 공성(空性)의 완벽한 방편들을 실천에 옮기기 때문이다. 이들이 샨띠데바가 붓다의 상속자들이라고 일컫는 자들이며, 그들의 숭고한 수행과 실천의 길이 이 문헌에 포함되어 있다.
보살의 수행은 육바라밀(六波羅密) 혹은 십바라밀(十波羅蜜)의 수행으로 이루어져 있다.(주17) 이는 다시 세 가지 수련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나쁜 짓을 하지 말고, 선을 실천하며, 중생의 이로움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다. 샨띠데바는 이 보살의 길을 입문, 수행 그리고 성취의 세 단계로 설명한다. 입문은 보살의 원을 세우고,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이라고도 말하는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열망을 처음으로 인지하는 단계를 설명한다. 이 논서의 주요 부분은 발보리심(發菩提心), 즉 육바라밀 수행을 따르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 수행의 목적인 불성의 성취는 제9장의 마지막 부분에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보살(bodhisattva)이라고 할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보디(bodhi)는 깨달음을 뜻한다. 이는 모든 결점을 여의고 모든 좋은 자질을 구족한 상태이다. 사뜨바(sattva)는 용기와 신념을 가지고 모든 중생을 위해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이렇게 모든 중생의 궁극적인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깨달음을 얻겠다고 염원하는 사람들을 보살이라고 한다. 그들은 지혜로써 그들의 마음을 깨달음에 향하게 하고, 연민으로써 중생을 염려한다. 다른 이들을 위한 완벽한 깨달음의 발원을 ‘보리심’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것이 보살행의 시작점이다. 수행자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아차림을 통해 이뤄야 할 목표뿐만 아니라 깨달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중생을 돕겠다는 열망으로 ‘그들을 위해 반드시 깨달음을 성취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생각이 바로 대승의 입구이다. 그러면 보리심은 두 배의 염원이 된다. 깨달음 그 자체를 이루겠다는 염원과 모든 중생을 위해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염원이다.
물론 깨달음을 얻겠다는 염원이 불분명하거나, 깨달음은 으레 성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무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고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절대 깨달음을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두 번째 법의 바퀴에서 배치되어 있는 공성의 이해는 아주 중요하다. 모든 현상은 본디 공(空)하며, 자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는 반야경부(般若經部)의 경전과 나가르주나(Nagārjuna, 龍樹) 등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주18) 그러나 이 순간 우리의 지각은 어떠한가? 나가르주나가 말하는 공성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은 그와 정반대이다. 우리는 현상을 공하게 바라보는 대신에, 모든 것은 존재한다고 본다. 만일 배움과 수행을 통해 현상의 본성은 공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이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물방울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어리석은 믿음에 사로잡혀 있는 자신을 지각하는 것과 같다. 이 어리석음[痴]과 무명(無明)은 지금까지 탐욕과 노여움의 근원으로 작용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윤회의 근원이다.
현상이 실재한다는 어리석음은 극도로 강력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실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어리석음은 견고하지만 단지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다면 그릇된 앎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정반대로 현상에 실재가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다면, 어떠한 논박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진리를 인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이가 이 이해에 친숙해진다면, 진리를 향해 무한히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이해가 발전하고 점점 더 강력해지면 현상이 실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제거하는 해독제로 작용할 것이다.
우리가 이 오해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을까? 이러한 가르침이 있다.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빛난다.
그러나 [그 본성을 가리는 번뇌와 지혜의] 장애들은 우연적이다.(주19)
비록 이 장애들이 아주 오랫동안 있어왔지만, 마음과 본성이 그와 같지는 않다. 따라서 현상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올바른 직관력을 키우게 되면 이러한 장애들은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
명료함과 앎을 특징으로 하는 마음의 본성은 흠이 없다. 마음의 본성은 어떠한 장애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다. 정신적이든 마음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든, 어떠한 현상도 마음의 본성을 흔들 수 없다. 어떠한 것도 마음 그 자체의 특징인 본연의 자질을 바꾸어놓을 수 없다. 현상이 실재한다는 믿음은 잘못된 인식에 기반한 것이며, 마음의 본성과는 정반대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들과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온 인식의 방법 때문에 우리는 현상을 잘못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상이 실재하지 않음을 간파할 수 있는 마음으로 현상이 실재한다는 잘못된 믿음을 부숴야 한다. 이 실재에 대한 잘못된 믿음은 너무나 강력하다. 하지만 마음 본연의 특징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미륵의 《구경일승보승론究竟一乘寶性論》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염오는 우연한 것이며
[마음 본성의]자질들은 본래적인 것이다.
이 게송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장애는 마음으로부터 떼어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수행하고 해독제를 거듭해서 적용한다면 분명히 없앨 수 있다. 모든 번뇌는 뿌리째 뽑힐 수 있으며, 이 번뇌들은 마음의 본성에 침투할 수 없으므로, 아무리 흔적을 깊게 남겼더라도 제거할 수 있다.
마음이 이러한 번뇌와 습관적 성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때, 비로소 모든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더욱더 정진하면서 올바른 방편을 씀으로써 이러한 일체지를 얻을 수 있는 잠재된 힘을 깨울 수 있다. 오직 마음과 대상 사이를 가로막는 장막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현상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장막을 걷어낸다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바라봄과 인식함이 마음 자체의 특징이다. 마음이 존재하는 한, 마음의 앎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 능력을 모든 장애가 사라질 때까지 그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방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깨달음을 향한 열망이 우리 안에서 점점 더 커질 것이다.
다른 중생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다는 염원에 대해서 논해보자. 이 염원은 우리가 그렇듯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행복을 원하며, 괴로움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른 존재들이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면에서 연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감정들이 강하지 않고 대상의 범위도 좁을 수 있지만, 모든 이들은 어느 정도 연민의 감정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을 본다면, 순간적으로 ‘아 끔찍해!’라고 생각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그들을 구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괴로움을 겪지 않고 행복하기를 바라듯이, 우리는 다른 이들도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 지금은 아주 적은 연민과 자애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 연민과 자애는 우리가 닦아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연민과 자애의 마음이 커져가면서 다른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우리의 바람도 함게 커질 것이다.
깨달음을 얻겠다는 열망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깨달음을 성취하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그렇지 못했을 때 잃는 것은 무엇인지 알아야만 한다. 설령 그 깨달음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도 말이다. 이를 위해서 윤회의 단점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리고 정반대인 열반(涅槃, nirvāṇa)의 단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자. 바바비베카(Bhāvaviveka, 淸辨, 490~570)의 《중관심론(中觀心論), madhyamakahṛdayakiārikā tarkajvālā》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그들은 [윤회의] 단점을 보기에
윤회를 피한다.
그들의 심장이 자애이기에,
열반도 그들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살아있는 존재의 행복을 바라는 현자는
심지어 윤회에도 머문다.(주20)
보살들은 윤회에 머문다 하더라도 윤회의 감옥에 갇혀있지 않다. 그들은 윤회의 단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다란 연민의 마음 때문에 열반에 머물지도 않는다. 이 양쪽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보살들은 이 둘을 초월한 깨달음을 열망한다.
따라서 우선 윤회에 무슨 문제가 잇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윤회로 인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염원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드시 윤회함으로써 겪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다른 생명들도 윤회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다는 열망을 일으킬 것이다.
더불어 만일 우리가 다음 생을 갈망하는 마음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현재 삶에서 무엇을 집착하고 있는지 대면해야 한다. 이렇게 한 단계 한 단계 마음을 길들여 가는 것이 중요하다.
보리심은 지혜가 깃들여진 매우 선한 마음의 상태이다. 여기에 자애가 함께 있는 것이다. 이는 정말 대단하다. 이러한 종류의 선함과 친절함이 빠르게 평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주며, 우리가 덜 편협해지고 덜 흥분하게 만들어 준다. 다른 이들을 만날 때, 폐소공포증을 느끼고 거리를 두려 하지 않는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 더 다가가려 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절대 두려워하지 않으며 용기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는 매우 유용한 마음가짐이다.
《입보리행론》은 샨띠데바 혼자만의 생각을 모은 것이 아니며, 경전을 그대로 되 읊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경전들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샨띠데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2.
여기서 나는 이전에 듣지 않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게송을 지을 재주가 없다.
따라서 이 글이 다른 이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내게는 없다.
이 글은 오직 내 마음을 길들이기 위해서 쓸 뿐이다.
“여기서 나는 이전에 듣지 않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내게는 게송을 지을 재주가 없다”는 부분은 단순히 자만심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오직 지식만 쌓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샨띠데바는 새롭게 이야기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이들을 도울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는 이 논서를 쓴 이유는 그 자신이 수행을 더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이며, 그와 같은 지에 있는 이들의 정진을 위해서이다.
《입보리행론》의 열 장 가운데 첫 번째 장은 보리심의 특징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보리심을 닦을 예비 단계로, 수행자는 공덕을 쌓고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서 일곱 가지의 수행법, 즉 칠지공양(七止供養)을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제2장 공양과 정화’의 주제이다. 세 번째 장에서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들에서는 육바라밀의 수행을 통해 보리심을 증득하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이 육바라밀의 첫 번째인 보시(布施)는 이 논서 전체에 걸쳐 논의 하고 있는 것이라서 특별히 어떤 장애서만 논하지 않는다. 청정한 계율을 닦는 방법에 대해서는 불방이(不放逸)과 정지(正知)의 두 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 다음 장들은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네 가지 바라밀을 설명하고 있다.
끝으로샨띠데바는 공덕을 모든 생명들의 이로움을 위해 회향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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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4) 대승불교에서 ‘자성의 부재(티베트어: bdag med, 산스크리트어: nairātmya)’는 개개인의 에고뿐만이 아니라 모든 현상에도 해당된다. 이 맥락에서 자성이란 실존하는 혹은 본질적인 실재를 뜻한다. 보살은 자기 개인과 모든 다른 현상 속에 자성이 부재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15) 첫 번째 경지: 용어 해설의 십지(十地, 보살의 열 가지 경지) 참조.
(주16) 역자주: 삼도(三道)인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 중 세 번째 경지를 일컫는다.
(주17) 십바라밀은 육바라밀(용어 해설 참조)과 방편, 힘, 원력, 그리고 지혜를 함께 하는 것이다.
(주18) 나가르주나(1-2세기경)는 인도의 불교의 스승으로 반야경부의 가르침을 널리 펴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의 공성에 대한 가르침은 중관(中觀, madhyamaka) 혹은 중도사상(中道思想)의 근간을 이루었다.
(주19) 역자주: 이 게송에서 말하는 우연하다는 것은 부단한 수행을 통해 장애를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주20) 역자주: 달라이 라마의 가르침처럼 윤회와 열반의 양 극단에 머물지 않는 무주처열반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