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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KS 창립10주년 기념』 기고칼럼(7)
성남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신축기
김 기 명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신축방침 확정 및 부지 탐색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11월3일 국장이 끝났다.
부모 잃은 고아들처럼 새마을을 하던 사람들의 허탈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수원 농민회관에 전세살이를 하던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은 기회 있을 때마다 항구적인 자체시설의 필요성을 발의했지만 박 대통령께서는 “나도 생각은 하고 있으니까 기다려보라”는 언질을 주셨으나 생시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의 국상을 끝내고 한 달여, 12월 7일 구자춘 내무부장관이 김준 원장에게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신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자”는 방침을 내려 12월 8일부터 경기도청 도로과의 도움을 받아 수원 인근의 국·공유지 도면을 갖고 현지답사를 시작했다.
이 일의 실무는 당시 총무 부장이었던 김기명 교수와 부원장들이 담당했다.
현지답사 첫날은 조영기 부원장과 함께 상록수 발상지인 안산으로 갔다.
눈발이 시름시름 날리는데 지도를 들고 지금 상수도 공급지로 사용 중인 수암리 작은 산봉우리에 올랐다. 4방이 확 트이고 전망은 좋았으나 연수시설을 수용할 만한 평지가 부족 했다.
다음 날은 용인 자연농원 근처 포곡면 조부리 일대를 돌아보았고, 경기도 안성 농협 한독목장 부지 내, 수원근교 어천리 칠갑산 아래 임목육종연구소 구내, 과천 남태령 신탁은행 행우회 부지, 용인 죽전 현 단국대학 부지, 성남 정신문화연구원( 현 한국학 중앙연구원)이 있는 운중동 2개소, 신갈 경기대 신축단지, 그리고 현 도로교통 공단 용인자동차시험장 건너 녹원마을 일대 등 한강이남 13개 지역을 30여 개 항의 체크리트에 의해 답사를 했다.
연수원 부지로서의 구비조건은 제일 중요한 것이 주변 지형이다.
연수생활은 수도생활에 가까운 심신생활에 적합한 장소가 좋기 때문에 일상생활과 차단 된 곳으로 부지 내에 들어오기만 해도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는 수목이나 호수, 바다 등이 갖추어져. 전 시설의 교재화, 전 환경의 교육장화의 기본을 갖추고 있어야 하고 풍수지리설이 감안된 남향 모태(母胎)형이라야 한다. 이는 채광과 에너지 절감을 위한 기본 조건이다.
다음은 교육운영상의 입지 조건이다.
연수생들의 입교와 강사들의 출입과 교육지원 업무수행의 편의성이 고려되어야 한다.
다음은 소음, 냄새 등이 고려 된 청정지역이라야 한다.
이러한 요소들을 염두에 두고 찾아보면 대상지는 극히 드물다.
그리고 어느 정도 조건이 맞아도 보이지 않는 문제들이 가로놓이는 수도 있었다. 과천과 사당동 경계인 남태령 부지는 여러 면에서 조건이 충족 되는데 깊은 지하에 주요시설이 있어 환경보전 지역으로 제한되어 있었고 운중동에 있던 후보지는 주변도 잘 가꾸어져 있고 향이 조금은 맞지 않아도 아늑한 분위기가 좋았으나 소유주가 북한에서 월남한 분으로 조상들의 가묘를 해놓고 막무가내로 사정을 했다.
신갈 후보지는 영동고속도로에 접하기는 했으나 고속도로 소음은 문제가 되지 않고 향도 남향으로 쓸 만하고 역사적으로 개혁적인 혁신세력 조광조의 유적이 가까이 있어 내정을 하고 토지(소유자 )조사까지 끝냈다. 그런데 용인 군유지 1,800평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두꺼운 옛날 기왓장들이 늘려있어 마을 노인에게 사연을 알아보았더니 "그것도 모르고 자리 잡았느냐"며 그곳이 옛날 망나니가 칼춤을 추며 사람의 머리를 베던 형장(刑場)이란다.
그래서 그 땅이 이때까지 군유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내키지 않아 망설이고 있은데 서정화 내무부 차관이 나와 보고는 소음체크를 해보았느냐고 물었다.
어디를 가나 소음 체크는 기본이다.
교육장으로는 40데시벨 이하라야 한다.
물론 했는데 소음은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헬리콥터 편대가 고속도로를 따라 비행을 하는데 80데시벨인 아주 높은 소음수치가 나왔다.
고속도로가 헬리콥터 항로라는 것을 고려하지 않아 엄청난 오류를 범할 뻔 했다. 담당자는 식은땀이 날 정도의 큰 실수를 했던 것이다. 그는 그날 밤 그 정도 진척된 상황에서 실수를 깨우쳐준데 대한 감사기도를 드렸다.
부지 확정
다음날 김종환 내무부 장관께 보고가 돼서 대책회의가 열렸는데 장관께서 군에 있을 때 모 군사시설 부지를 보러 다니다가 봐둔 곳이 있는데 장관이 추천한다는데 조금도 부담 갖지 말고 실무자가 보기에 적합여부로 결정하라는 당부를 받고 그때는 백궁리 이매리 들판을 지나 분당저수지 옆길로 율리 산골 마을로 들어왔다.
때는 1980년 5월1일 오전 10시경, 새마을농로가 끝난 정자나무 밑에 차를 세워두고 정교관 부원장과 같이 먼저 절골로 들어갔다.
제법 경사도가 있는 초입이 마음에 들지 않고 한참 올라가 산골 논이 있기는 한데 평지 면적이 충분하지 못했다.
다만 오래 전에 절이 있었다고는 하는데 절터 윤곽도 없다.
좀 더 올라가다가 등고선을 따라 좌측으로 작은 능선 몇 개를 넘었다.
그리고는 지금 새마을마크를 조성해 놓은 봉우리에 앉아 내려다 본 결과 그대로 "여기다."하는 감이 확 들어왔다.
지금까지 찾아다니던 10여 곳의 후보지 보다 월등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남향 모태(母胎)형(좌청용 우백호)에 생김새나 크기도 아주 적합하고 외부와의 단절 공간도 충분했다. 그리고 중심을 흐르는 계곡만 잘 처리 한다면 자연경관의 훼손을 크게 하지 않고도 충분한 건축대지나 부대시설 부지도 나올 수 있었고 먼 장래에 대비한 예비공간으로 붓당골도 확보 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욕심 같아서는 매지봉 능선과 영장산 정상까지 포함시키고 싶었지만 당시 내무부 지방행정국장인 이상희 국장의 생각은 별 쓸모도 없이 너무 넓다는 의견으로 지금의 경계로 지적도에 자를 대고 줄을 그어 부지가 확정 되었다.
막간의 일화, 그날 미답의 숲속을 2~3시간 돌아다니다가 그때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던 파카 만년필을 잃어 버렸고, 1980년 가을에는 산입구로 올라오는 길 좌측 순안 안씨네 비석 아래 고구마 밭을 멧돼지가 엉망을 만들어 놓았더니 지금 식당 자리 강장옥씨네 벼논도 그 녀석들이 난장판을 만들 정도로 산골 오지였다.
멧돼지 소굴은 부지경계 밖 영장산(414m) 9부 능선에 작은 늪지대가 있었는데 그 근처였다. 그러나 바로 넘어 공원묘지 근처에 예비군 사격장이 있어도 꿈적도 않던 놈들이 신축공사를 하는 동안에 어디로 갔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신축공사 설계
신축부지는 김종환 장관님 덕분에 아주 좋은 곳을 잡게 되었고 토지조사와 일반적인 매수협의는 성남시에서 맡아 주고, 토목설계는 국토개발 공사 대형설계를 전담하는 한국종합개발공사, 건축설계는 세계 100대 건축가 중 유일한 한국인인 김수근 교수의 공간사가 맡기로 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축공사는 설계 시에 국내외 유사사례를 수집하여 좋은 점들을 채택 반영 하는데, 우리의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이라는 시설은 특수한 교육과정을 수용하는 성인들의 합숙교육을 위주로 하는 사회교육 시설이기 때문에 국내외적으로 유사사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공부를 하는 곳이라 하여 대학캠퍼스도 아니고 숙박을 한다고 해서 호텔 형태도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 연수원의 고유 특징인 전시설의 교재 화, 전 환경의 교육장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새로운 창작을 해야만 했다.
다행히 이 일의 실무를 맡은 필자는 군 복무를 마치고 한동안 건설회사에 근무한 적이 있었고 장형이 건설 회사를 하고 있어 연수원교수들 중에서는 조금이나마 건설공사에 대한 기초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비교적 장기근무를 했고 시청각업무도 담당하고 있어 시설 전반에 관한 기능적 연관성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었다.
토목과 건축설계 회사가 결정되고 공간사 설계팀 김수근 교수와 김원식 전무, 김남현 이사, 김평일 팀장, 신훈, 배영정 제씨들과 첫 회합을 가졌는데 처음 대하는 과업이라 막막했다.
할 수 없이 연수원에서 교과 진행사항과 시간대별 연수생들의 동선과 과정별 특성을 소상하게 기술 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연수생 선발 과정에서부터 연수원 도착, 등록, 생활관 배치 등 전 일정을 기술(記述)하면서 필요한 공간과 각 시설간의 연관관계 모든 과정 수행의 목적, 연수생 이동 경로와 소요시간 등 을 기술하고 교육시설 외에 부대시설과 전기, 기관설비까지 8절지로 약250쪽의 설명 해설서를 만들었다. 이것을 Academic Plan이라 했다.
시설 사용자가 해 주는 아카데믹 플랜에 의해 설계사무소는 마스터플랜을 하고 기획설계, 계획 설계, 기본설계, 실시설계 순으로 진행 하면서 공사비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감안하면서 수정보완 해나간다.
연수원의 교육특성과 교과진행 내용을 보다 명확하게 인지시키기 위하여 김수근 교수를 제외한 전 설계요원들이 각 과정별로 입교하여 전 과정을 이수하면서 아카데믹 플랜에서 설명하지 못한 부분까지 체득하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토목설계 팀과도 계속 공조를 하면서 과업을 진행했다. 설계나 공사나 진행된 내용을 다시 수정하는 일은 극히 번거로운 일일뿐만 아니라 설계가 되고 나면 그대로 공사로 시행이 되기 때문에 공사비 예산과 직결되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했다. 그러다보니 설계과정에서도 숫한 실랑이가 벌어졌다.
"여러분들은 줄 하나 긋는 것으로 끝나지만 우리는 그게 모두 돈으로 해결해야 하는 거요" 하고 불만을 토로하면 새로 하는 건축이라면 적어도 30년은 내다 봐야 할 것이고 원래 신발도 새 신은 처음에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반론을 제기했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대립과 다툼으로 일관 한다면 바람직한 과업이 수행되기 어려우므로 설계팀들과 일체화 노력을 했다. 담당자의 집이 수원시 근교 오목천동 된물에 농가주택을 개량한 전원주택이라 웬만한 회합은 그 곳에서 토종닭을 잡아 놓고 막걸리 파티를 겸해서 하고 공간사 지하에는 고급 커피집이 있었는데 커피 쿠폰을 수십 매씩 구입해서 우리 설계팀 총무에게 맡겨두고 밤낮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일반적인 갑을관계가 아닌 새마을 동지적인 입장에서 역사적인 과업을 수행하기로 해 부담 없는 의사소통이 되도록 했다.
중점적인 설계방향은 전시설의 교재 화, 전환경의 교육장화에 부합되고 작은 부분까지도 경제적이고 질박한, 새마을정신을 구현하는 노력이 보이도록 하되 각 시설의 기능별로 유기적인 배치를 하고 경제적인 효과를 거두기 위한 자재선택과 에너지절감을 위한 채광과 냉난방 순환체계 강구, 시청각 교육효과 제고와 강사와 청중과의 인체공학적 본성을 감안한 강의시설 구축, 시공과 유지관리 면을 고려한 내외장재 선택. 우천 시 지장 없는 이동경로 확보, 국산 자재 절대 사용 원칙, 시설유지관리의 편의성을 고려한 지하 연결 통로와 피트 확보 등을 요구 했다.
여기에 대하여 김수근 교수는 민족정신을 발양하는 의미 있는 시설이므로 우리의 전통적인 사찰의 가람 배치형식을 도입하고 수려한 주변 산야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외장재 사용과 다보탑 같은 국보급 감각을 시현하겠다는 기본방향을 제시했다. Academic Plan, Master Plan, 기획설계, 계획 설계 단계별로 시설기능별 크기와 위치가 부지설계에 따라 수시로 왔다 갔다 자리를 잡아보고, 다음에는 각 공간(방,실)의 크기와 위치를 여러 방향으로 앉아 보고, 다음에는 창문의 위치와 크기가. 그리고 출입문의 크기와 위치가 수십 번 바뀌면서 감각적인 도상실행(시뮬레이션)을 해본다.
내외장재의 선택에 따라 예산이 왔다 갔다 한다. 설계팀과 연수원과는 수 없는 마찰과 대립이 오간다. 서로 부딪칠 때마다 막걸리와 커피를 쳐야 한다.
합의가 이루어지고 도면이 나올 때마다 한 단계씩 진전이 된다. 모든 단계마다 건설부 설계심사를 거쳐 검증을 받아야 했다. 실시설계 단계에 서는 더욱 첨예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몇 가지 예를 들면 일반적인 건축기준과 연수원 특성상 달리하는 부분은 교과진행상 경험에 의한 필수 사항이지만 설계표준에 의하면 부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강당을 비롯한 각 강의실의 강단의 높이는 일반적인 공연장 무대는 높이가 90cm이지만 강의를 주로하고 강사와 연수생의 거리를 최소한으로 하고자 하는 연수원의 경우 강단의 높이를 60cm로 했다. 그리고 대강당 같이 공간 면적이 큰 경우 냉난방의 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대류식 보다는 지하철 좌석 난방처럼 Diffuser(냉·온기 배출구)를 의자 밑 오금으로 배치했다.
우수한 자연환경의 장점을 최대로 살리기 위해 김수근 교수의 제안으로 Window Pictur를 도입했는데 되도록이면 큰 창문을 통하여 계절마다, 달마다, 주일마다, 매일같이 변하는 자연이 한 폭의 그림으로 나타나는데 서있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각각 다른 경관이 나타난다. 성남분당 율동에 위치한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경우 건물의 안 밖을 막론하고 유심히 보면 수많은 살아있는 풍경화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에너지 절감을 위해 모든 창문에 복층유리를 사용 했는데 그 당시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실내 조도 조절을 위해서는 방의 크기에 따라 점등 스위치를 세분하고 대강당의 경우 오전 오후의 채광 각도가 연수생들의 시각에 지장을 두지 않도록 모서리 처리에 유념했고 내·외장재를 2급 변색벽돌을 사용했는데 1급 벽돌1장에 130원 할 때에 87원짜리 2급 벽돌을 사용함으로써 많은 예산을 절감했고 유지관리 면에서도 내장재로는 다소 어두운 편이었으나 일반 조적에 몰탈 마감으로 도색을 할 경우 5~6년마다 5~6억 원의 도색비용이 필요한 것으로 나왔다.
복도가 좀 어두운 편이나 이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강의실의 경우 백색 고압벽돌 치장 쌓기로 마감을 했는데 성인 교육시설이기 때문에 낙서나 더렵혀질 가능성이 적어 별도의 도색을 하지 않아도 무난했다. 이러한 새로운 자재의 도입도 많은 토론을 거쳐 결정 했다.
또 원장실은 연수생들의 동태를 상시로 살필 수 있도록 앞뒤로 시각적 개방을 하고 모니터링 설비도 완비 하도록 했다. 방송실은 연수부와 인접해 모든 교과진행과 시청각 교육이 유기적인 관계를 갖도록 했고 식당 입구 긴 복도는 두 줄로 입장하도록 공간을 조성하고 한 줄은 밥을 많이 배식 하는 줄, 한 줄은 적은 잡이 배식되도록 했고 초입에는 세면기 2개씩 양쪽으로 배치하여 식사 전에는 손을 씻는 습관이 생활화 되도록 했다.
우리가 같은 밥을 먹어도 산이나 들에 가서 먹으면 밥맛이 더 좋게 느껴지는 경험들을 했기에 식당은 벽 전체를 창문으로 해서 인접 산이 식당 안으로 연결 되는 효과를 시도했다.
그리고 기관설비나 전기설비의 관리가 용이하도록 지하비트를 모든 건물로 연결 되도록 해놓고 원활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비트의 최소 크기를 2mX2m로 했다. 토목 설계는 토적계산을 정확하게 하여 토량이 외부로 나가거나 들어와야 하는 부담이 없도록 했다.
그러기 위해 사용가능 석재는 토목공사과정에 나오는 자연석이나 발파(發破)석을 재활용하기로 해서 진입로 석축이나 점호장 석축을 쌓고 운동장 관람석도 모두 토목공사 부산물로 사용 했다.
가운데 돌 마당은 발파석을 깔면서 사이사이로 잔디를 넣으니까 아주 훌륭한 돌 마당으로 각종 행사장이 되었고, 업무동 건물 지하통로는 연수생들의 접근성을 단축하기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그리고 모든 시설을「전시설의 교재 화」라는 관점으로 유심히 보아야 할 것은 태극기 게양대 아래 있는 점호 장 발파석 돌 쌓기 담을 보면 작은 돌, 큰 돌, 모난 돌, 둥근 돌이 불규칙적으로 쌓여 있지만 그것이 우리 전통 돌쌓기 형식인데 각 돌들이 자기 생긴 대로 자기역할을 적절히 해 냄으로써 석축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여기가 연수원 구내에서 가장 민주주의를 이해하기 좋은 장소로 볼 수 있도록 대강당 정문에 그 담을 시도한 것이다.
그런데 설계와 공사과정에서 몇 가지 불가피한 변수가 생기도 했다. 당초 전체 수용능력 400명 기준으로 1980년 12월초 마스터플랜과 계획 설계가 완료 되고 기본설계, 실시설계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1981년 5월초 전두환 대통령의 연수원 순시 시 새마을교육의 효과가 좋다는 평가가 넓게 퍼져 있는데 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이 교육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하여 연수원을 신축하는 김에 좀 더 수용능력을 늘리도록 하라는 지시에 의해 수용인원을 600명으로 늘리는 설계변경을 하게 되어 많은 수정 작업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인원을 50% 더 늘리는데 공간적이나 추가 작업에 대한 부담은 수용 할 수 있었지만, 교육인원과 시설 증가에 대한 교육수행과 연수효과, 시설유지관리에 관한 사항은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큰 부담이 되었다. 예산이 증액 되는 문제 같은 것은 인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크게 대두되지는 않았다.
신축공사 착공
1981년 9월25일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신축공사가 현대건설로 낙찰이 되고 같은 달 9월 30일 역사적인 기공식을 율동 현지에서 갖게 되었다. 그동안 단계별로 건설부 설계심사를 거친 도면이 구체적인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시공회사인 현대건설에서도 새마을지도자연수원의 역사적인 의의를 감안하여 김정태 이사를 현장소장으로 파견하고 연수원에서도 현장감독 팀을 구성했다.
그동안 설계 지휘를 했던 김기명 교수를 건설 본부장으로 건축 감독은 한양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해병대에서 전공분야로 근무하다 중령으로 예편한 고대석 님을, 토목공사 감독은 토목설계 주무를 맡아 모든 토목공사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 신재영 님을 특채 했다. 전기공사 감독은 본 공사 자재관리를 담당한 김정삼 님이 베트남에서 전가분야로 같이 일했던 최상호 기사를, 설비 기관담당 감독은 지금까지 연수원 기관장으로 근무한 김태진 기관장이 추천한 조한규 님이 맡았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신축공사를 수행함에 있어 인선이나 업체선정은 2~3시간 이상의 새마을운동 설명과 단순한 직장인이나 영리목적의 사업자가 아니라 새마을운동 동지로서 역사적인 과업을 새마을정신으로 수행하겠는가 여부와 서약을 하고 기꺼이 이일을 수행하겠다는 의지가 확인 된 다음이라야 상담을 진행했다.
참으로 고마운 세상이었다. 시공회사를 비롯한 모든 기자재 계약업체들이 하청을 주는 사례도 없이 성실한 시공, 납품으로 계약이행을 했는데 식당 식탁을 납품하는 업체가 하도를 하여 반품 해지하고 재계약을 한 예가 있었다.
그리고 각 부문의 근로자들까지도 성심을 다했는데 현장순회를 하다보면 콘크리트 타설 공이 달려와 철근 배근상태를 봐 달란다. 도면을 갖다 대조 해본결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만일 그대로 레미콘을 쓸어 넣었으면 그대로 넘어갈 뻔했는데 비록 막노동을 하는 근로자였지만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 부분의 철근 공은 기절초풍을 하고 잠시 자리를 비운데 대한 과실을 정중하게 사죄했다.
또 레미콘 트럭 운전자들이 잠시 기다리는 동안에 카드놀이를 하는데 절에 가서 놀음 해 본적이 있느냐고 하면 재빨리 걷어치우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강의실 바닥 미장을 하는 사람은 미장 마감 흙손질을 하면서 이 방안에 들어와 공부하는 모든 분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봉사 하는 마음을 다지고 가시라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눈물겹도록 감사하기도 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매일 천여 명에 가까운 인력이 좁은 골짜기를 메우고 발파작업이나 여러 가지 위험한 공정들을 수행 하는데도 한사람의 인사사고가 없었다는 게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다만 전공 한사람이 못에 발이 찔려 상처를 입었고 연수원 이현식 교수가 전시관 부착물을 붙이다가 사다리가 미끄러져 팔목을 다친 적은 있었다.
이 공사를 하면서 건설 본부장은 기도를 많이 했다.부문별 전문 감독들이 있기는 하지만 원래 비전문가라 어려움에 부딪칠 때도 있고 걱정스러운 일도 적지 않았다. 그러면 잠이 안 올 때도 있어 잠이 안 오면 할 수없이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더러는 기도 중에 막연하나마 방법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 다음 날 담당기술자나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해결하는 수도 있었다.
흔히들 건설현장에서는 관습적인 비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있는 이 현장이라고 예외 일수 없기 때문에 우리 감독요원들에게는 특별한 마음가짐을 당부했다.
우리는 역사적인 국민의식 개혁을 위하여 연수원 전 교직원들이 밤잠을 줄이면서 10년 이상 분골하고 있다는 사실과 새마을운동 자체가 깨끗한 새로운 기풍을 조장하자는 운동이므로 우리가 몸소 시범하자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연수원 신축공사라는 이사업은 역사적이면서도 정치적인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 하고 우리의 행동이나 처신에 유의할 것을 서로 다짐 하면서 일과 후나 힘든 사안을 해결한 후에는 건설 본부장이 책임지고 뒤풀이를 담당하기로 했다. 직설적으로 술집에서 한잔 하는 거나 간략한 소주 한잔이나 거나해지기는 마찬가지라 데 의견을 같이 하면서 고맙게도 마음이 가뿐한 쪽으로 방침을 유지했다. 그러다보니 현장이 틈이 나면 절골 도랑의 동면하는 개구리들이 본의 아니게 수난을 당하고 본부장 네 내자의 걱정도 때로는 있었다.
이러한 기우는 상대적이기 때문에 크고 작은 업체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환기를 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큰댁에 갔더니 건설업을 하는 가형께서 현장운영을 어떻게 하느냐고 하시기에 자랑스럽게 위와 같이 하고 있노라고 했더니 “순진한 소리 하지 말라.”고 핀잔을 주셨다. 어리둥절하여 왜냐고 여쭈었더니 건설회사는 토착된 관례로 실행예산을 짤 때는 감독관실 운영비라는 묵시적인 예산이 책정되어있어 "당신들은 뭐라고 하더라도 현장은 본사에 해당 예산을 요구하게 마련" 이라고 했다. 그 말씀을 듣고 나니 정신이 확 들었다.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러면 본원적으로 봉쇄를 해야지. 현대건설 본사를 찾아 갔다. 현대건설에는 사장 아래 국내건설 담당 부사장과 해외건설 부사장이 있었는데 우리 연수원 신축공사는 특수성이 고려되었던지 해외건설 곽 모 부사장이 맡고 있었다. 대면을 하고 새마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주실 것을 당부 드리면서 이 일은 공사감독관들에게 해당하는 일이 아니고 새마을운동의 본질 수호와 김준 원장이 모든 생애를 바치고 있는 과업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는 것은 역사에 오점을 남길 뿐만 아니라 전국의 새마을동지들을 크게 실망시킬 중대사이므로 적극 협조하면서 새로운 기풍을 조장해 보자고 했다.
그러면서 미리 준비해 간 각서에 서명을 부탁했는데 각서의 내용은 분당 새마을지도자 연수원 현장에서는 어떠한 명목으로든지 애매한 경비가 한 푼이라도 집행되지 않도록 해주시고 명절 때 과일 한상자라도 나누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는 서면 각서였다. 이러한 절차를 끝낸 다음에는 다른 군소업체들에게도 주의를 환기시켰다.
현장사무실에는 본부장이 매일 준비해오는 커다란 얼음물 보온병이 있어 감독관들은 물론 출입하는 업자들도 시원한 물을 먹도록 했는데 어느 날 주방기구 납품계약을 한 뚝섬 대우금속 김 모 사장이 얼음물 보답을 한다고 박카스 한 박스를 사왔다가 김 사장은 그 일로 얼마나 혼이 났는지 계약파기 위협까지 받고는 다른 업체들에게도 경종이 된 에피소드도 있었다.
일반 근로자들까지도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는 자세로 성실하게들 해주신 덕분에 제반공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는데 몇 가지 난처한 문제에 부딪치기도 했다.
공사에 지장을 준 어려움들
제일 먼저 지하수 문제였다. 연수원이 필요로 하는 물의 양이 1일 300톤인데 한국에서 지하수개발 최우수 업체라는 한국종합개발에서 했는데도 파는 곳마다 불과 10여 톤밖에 나오지 않는다. 전리 탐사와 신부님의 버드나무 탐사까지 해 보고 지하 800m, 1,000m까지 10여공을 뚫었는데도 30톤, 최고 40톤까지 이상은 나오지를 않았다. 도저히 절대 필요량이 나오지 않자 한국종합개발에서는 포기요청을 해왔다.
아니 대 한국종합개발이 손을 든다면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그때만 해도 분당 신도시가 들어오기 7년 전이니까 수도 물은 성남 모란까지 가야 했다. 여간 낭패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한국종합개발이 해결해야만 할 일이다. 얼마나 그 일로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한국종합개발 손 모 이사는 신경성으로 정신과 입원까지 하기도 했었다. 할 수 없이 한국 토목학회 전문 교수들을 초청해 지하수 부존여부에 대한 정밀진단을 받아본 결과 절망적인 결과가 나왔다. 우리 한반도의 지질구조상 판교에서 신갈까지는 실트(찰흙)가 토사 층을 깊게 메우고 있어 지하수맥이 형성되기 어려운 지대라고 한다.
그러니 달리 대책을 찾을 수가 없어 여러 가지 대안을 찾기 위해 고심을 많이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연수원보다 먼저 개원 한 운중동 소재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도 물이 부족해 운중동 저수지를 축성했고 우리보다 늦게 착공한 용인 구성 소재 경찰대학에서도 지하수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고 했다. 근본적으로 땅 밑에 물이 없다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마 이런 경우에 잠이 제대로 온다거나 기도를 드리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행히 지금의 정문 연못 뒤쪽 계곡을 따라 1일 40톤 1공, 30톤 2공을 지하 800m와 750m 지점에서 찾아 놓은 것이 있어 이 3개 공을 합쳐 식수로 쓰고 종각 뒤 집수정(300톤)을 만들어 화장실용 위생수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생활관 뒤 산에는 100톤 용량의 저수조를 만들고 정문 옆 연못도 추가로 설계 축조하여 예비용 수량으로 확보했다. 이로부터 10년 후 천지개벽을 하듯 분당에 신도시가 들어오고 4~5년 후 상수도가 들어오게 되었다.
또 다른 하나의 황당했던 일은, 토목공사가 거의 끝나고 생활관 건물 터파기도 완료하고 건물기초 철근배관을 하고 있을 때 지금 인도어 골프장이 있는 곳에 있던 함바(임시 현장 식당)로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생활관 뒤 산에서 부스럭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점심을 먹고 오는데 같은 소리가 계속 나고 있어 감독관 전원과 현대건설 토목담당 책임자를 대동하고 소리 나는 산으로 올라갔더니 그 산봉우리에 1m 정도의 큰 균열이 생기며 산이 미끄러져 산사태가 나고 있었다. 이 또한 기절할 노릇이다.
생활관 터파기 공사를 하면서 뒷산 절토를 했다. 건설부 표준 규정에 의한 법면 경사를 유지하며 절토를 했는데 이 산이 미끄러져 내린다니 여간 낭패가 아니다. 원래 토목 설계에서는 토적계산을 한다. 단지 내의 높은 곳 흙을 절토하여 낮은 곳에 성토를 한다. 흙이 모자라지도 않고 남아서 외부로 실어내도 필요 없는 공사비가 발생하여 토량이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슬라이딩을 하고 있는 전체 토량은 엄청난 량이다. 기본 설계에 계상되지도 않은, 그리고 전연 예상 하지도 못한 사태가 발생하고 있으므로 우선 필요 없는 흙이 발생하여 이 흙을 옮길 장소도 문제가 되고 이 흙을 처리하는 공사비용과 공사기간의 지연이 문제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그리고 미끄러져 내리려면 그대로 확 쏟아지기라도 하면 치우기만 하면 될 텐데, 1,3m 정도 미끄러진 다음에는 그대로 정지해서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이 산 밑에 세워질 시설은 숙소다. 600명의 인원이 잠을 자고 야간 분임토의를 하는 곳이다. 이대로 두었다가 장마철에 밤중에 폭우라도 쏟아지는 날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군다나 외국인 교육까지 하게 될 것인데 이건 국제적인 문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이 절박한 상황은 담당자들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한국 토목학회 교수들이 총 동원되어 연구 분석을 하는데 역시 학회에서는 세계적인, 전국적인 사례들을 접하는 분들이라 태연했다. 이런 사례가 충주댐 공사에서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이 지역의 특이 지질로 생긴 일이라 “안식각으로 추가 절토를 하라”는 판정이다. 이는 국가적인 유권해석이라 토목학회가 내리는 최고의 대책이다.
그런데 문제는 율동 주민들이 공사장에 많이들 나와 일을 했는데 나이 많은 분들이 피식 피식 웃는다. 남은 죽을 맛인데 비웃는 것도 아니고, 정색을 하며 캐물었더니 글쎄 생각을 해보란다. "그 놈을 건들대는데 가만있을 놈이 어디 있겠느냐?"란다.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다그쳤더니 정자나무집 아저씨 왈 "그 봉우리가 공알 봉이라오."한다. 그러니 거기를 자극하는데 어떻게 꼼작 않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현대 건축에서도 최소한의 미신은 지킨다. 새마을연수원 신축공사장이었지만 주요 공정이 시작 될 때는 돼지머리 고사를 가끔 지냈다. 건설 본부장이었던 필자도 누구보다 고집이 있다고 생각 하지만 관습에 젖어있는 안전문제이고 보니 만에 하나 미심적은 일이라면 굳이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각오와 다짐의 절차로 술 한 잔 곁 드리는 데 극구 반대할 필요는 없다고 마음을 달랬다.
뿐만 아니라 웬만한 골자기는 이름까지 파악을 다 했는데 이 자그마한 봉우리의 이름이 그런 괴이한 이름일 줄은 몰랐다. 호되게 당한 후에는 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 지도자님들이 길을 넓히다가 서낭당을 만나서 일이 중단된다는 이야기를 흔히 하는데 그러면 새마을 기를 꽂아놓고 헐면 “귀신도 국법은 지키기 때문에 아무 탈 없다.”고 일러 줬고 또 그렇게 하면 아무 일도 없게 사업들을 끝냈기 때문에 우리도 산이 미끄러지던 그 봉우리의 정수리에 회양목으로 새마을 마크를 눌러 심었다 그러므로 그 새마을 마크는 그대로 보존 해야만 할 것이다.
공사가 진행 되면서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신축현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1982년 식목일에는 전두환 대통령의 식목일 행사를 인접 성남시 잣나무 조림단지에서 하면서 연수원 신축현장을 방문, 브리핑을 받으시고 오찬을 현장사무실에서 해 관계 국무위원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과 많은 귀빈들이 공사현장을 둘러 보았고
새마을 중앙본부 전경환 사무총장은 수시로 공사현장을 둘러보고 그냥 가거나 건설 본부 현장사무실에 들려 이야기를 나누고 가곤 했다. 그 당시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과 새마을본부는 별개 법인으로 전경환 사무총장은 단순한 방문객이었다. 그런데 공사가 진행이 되면서 건물 기초공사가 거의 끝나고 전체적인 윤곽이 잡히자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김준 원장이 각고의 영성수련을 거쳐 창안하고 여러 방면으로 시도 정착된 “생활 즉 교육” 방식이 독농가연수로 시작, 새마을지도자 교육과 사회지도층 교육으로 확산 되자 새마을교육은 공무원교육원을 비롯한 각 사설 연수원에서도 새마을교육을 필수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 사설 성인교육원을 운영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농촌운동 내지는 농촌개발 지도자양성에 뜻을 두고 온갖 어려움을 물심양면으로 감당하는 분들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고난 속에 추앙받는 모습이 부러웠던지 농민교육을 하면서도 그 당시로는 상당히 귀한 외제 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국회의원 자리도 엿보면서 유지행세를 하고 다니는 인사도 있었다. 본성이 그래서인지 나름대로 정의감(?)에 불타서인지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신축이 배알을 불편하게 했던지 초 고위층에 형평성을 거론하며 호화 연수원이라고 모략질울 계속 해 됐다.
10.26이후 새로운 흐름이라는 시류에 편승하여 끊임없는 공세를 펴자 들은 척이라도 해주기 위해 신축규모 축소 지시가 내려왔다. 이미 전 시설에 대한 기초공사가 완료되고 골조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계속되는 압력과 채근에 불가피하게 단안을 내려야만 했다.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요행사 및 우천 시 옥외 행사에 대비한 대강당 체육관을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원래 사찰 요사체 배치법에 의한 회랑 일체형 시설구조가 파손되었고 전천후 기능이 완비된 전통 건축미 추구는 포기 해야만 했다.
그래서 30년이 훨씬 지난 2018년 현재도 완공이 되지 않은 상태다.
언제인가 새마을중앙회가 연수원과 통합을 하고 전국적인 또는 세계적인 대규모의 행사를 치루기 위해서는 체육관식 대강당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강의 동 앞 돌 마당 쪽에는 기초공사가 완료된 대강당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장이라도 흙과 벽돌을 걷어내고 골조철근을 연결하여 계속 공사를 하도록 되어 있다.
실시설계 상세도는 아직도 관리부서에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 대강당이 완성되면 그야말로 새마을운동 본산으로서의 위용을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 있을 것이다.
빠듯한 조경예산과 몰려온 성금 성품
전체예산에서 보류된 시설의 공사비를 제외하고 나니 당초 빠듯하게 세운 조경공사비가 적지 않게 부족했다.
조경은 다소 미흡하더라도 교육수행에는 직접적인 지장이 없으므로 시간을 두고 보완하기로 했는데 이러한 사정을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내무부 주무부서(새마을 교육과) 공무원들이 모금을 하여 돌 마당 법면에 좋은 느티나무 식수를 해주고 큰 운동장 둘레에는 교수부인회에서 공동 작업으로 조성한 기금으로 자작나무를 구입하여 보기 좋게 심고, 이 소문을 들은 광주광역시 이현임 부녀지도자는 동남아 여행을 가기위해 비행기 표까지 샀는데 모든 계획을 취소하고 그 비용으로 3트럭의 조경수를 실고와 건축이 보류된 대강당 자리 빈터와 경사면 그리고 진입로 운동장 법면을 가릴 수 있었다.
모든 길가와 운동장 요소에는 꽃씨 아줌마 이덕훈 여사가 줄 장미 3천 그루를 심어 주었다. 그리고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께서 자연농원(에버랜드)에서 살구나무 30주를 보내시는 등 그런대로 기본적인 배식은 할 수 있었다. 그래도 허전한 부분은 건설 본부장 집 울안과 전답근처에서 가꾸던 나무들(버스로 2대분)로 보식을 했다.
조경은 그 후에도 수료생들의 기념식수나 고위 인사들의 방문 기념식수로 계속 보완이 되고 주변수목이 성장하면서 짙은 녹색과 갈색 벽돌건물들은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수료생들이 모아준 건축성금은 건축공사비는 도급계약에 의거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별도의 뜻있는 사업을 찾다가 새벽종을 울리는 종각을 짓자는 의견으로 모아져 성금 범위 내에서 지을 수 있는 전통식 8각 정을 짓기로 했다.
고 건축전문가가 별도 공사로 담당하고 쇠못하나 쓰지 않는 전통 고건축 공법으로 건축을 했는데 기이한 것은 대들보 위에 한 트럭의 호박돌을 올려 그 무게로 정자의 균형과 구조를 유지한다고 했다.
종각의 준공에 맞추어 대구 수료생 협의회 효종회(회장 백낙석)에서 100관의 범종을 모아 왔다. 효종회(曉鍾會)는 새벽 효자로 새벽종 모임이었다.
이 종은 연수 중 매일 아침 정교관 부원장이 목욕재계(沐浴齋戒)를 하고 기상시간에 맞추어 새마을운동 몇 주년의 회수만큼 타종을 했다.
연수생들은 인위적인 기상나팔이나 음악보다 산사의 범종소리를 연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세부시설에 얽힌 이야기
각 건물마다 목적에 맞는 특성을 고려했는데 생활관의 경우 합숙훈련의 스킨쉽 효과를 최대로 거두고 주변 자연 환경과의 조화를 고려한 침실과 분임토의실을 배치했고 화장실과 휴게실을 배치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야간 취침 시에 긴급 대피상황에 통로가 차단 된 경우에 대비, 전면 베란다를 이용하여 침구용 시트라도 잡고 아래층으로 대피 할 수 있도록 계단식으로 층을 이루었고 베란다 공간은 4개 반의 공동 휴게공간으로 매일 같이 변하는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로 마련했다.
그리고 취침 전 발을 씻는 사람들이 세면기에다 발을 올려놓고 씻으면 위생상으로도 좋지 않고 세면기 파손이 우려되어 청소용 대걸레도 빨고 발도 씻기 편한 공간을 만들었는데 처음으로 시도하는 시설이라 적당한 이름이 없어 여러 가지로 토의를 한 결과 발을 씻는 곳이니 세족대가 좋겠다는 의견으로 모아져 세족(洗足)대를 두게 되었고 이 세족대는 유사 시설에 이름과 함께 많이 도입되었다.
또 한 가지 겪었던 이야기는 시청각 기자재 구입 결재를 받는 과정에서 방송장비 중 메인 AMP를 일제 히타치로, 전체 음향제어장치인 콘솔데크도 일제로 하고 슬라이드 Project를 미제 Kodak으로 하자 서정화 내무부 차관께서 "아니 국산 기자재로 한다던 원칙은?" 추궁을 하시는데. 그때만 해도 국산 슬라이드 Project는 생산도 되지 않았고 Amp는 인켈에서 생산은 했지만 성능이 기대하는 정도가 되지 못했다. 아무리 강의실을 잘 짓고 좋은 강사를 모신다 하더라도 음향이 좋지 않으면 교육효과를 거두기 어렵다는 말씀으로 설득을 하는데 "우리 수준에 슬라이드 프로젝트 하나 제대로 생산하지 못하느냐?"는 대목에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새마을 역사관
다음은 새마을 역사관 구상과 설치에 관한 이야기다. 수원 농민회관에 있을 때 3층에 소규모 농업전시관을 두고 수요일 점심시간에 잠시 개방을 했지만 빈약함을 느껴 신축시설에는 국내외 방문객을 위한 제대로 된 새마을전시실을 두기로 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중요한 과제가 생기는데 첫째는 전시실 규모와 크기와 위치이고, 두 번째는 무슨 자료를 어떻게 전시할 것이며 전시물들은 어디서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 였다.
이 역시 Academic Plan을 여러 각도로 세워 보지만 전시 전문가에게 자문을 받아도 새마을운동과 새마을교육에 대한 이해의 한계로 건축 설계와 마찬가지로 자체적인 구상 위주로 해야 만했다.
공간배치는 부지(敷地) 지구(地區)계획을 할 때 전체를 교육지구, 일반시민 개방지구, 교직원 주거지구로 분할하고 역사관 전시시설은 일반시민들과 학생들의 홍보, 견학용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시민개방지구로 독립시키고 규모와 내용은 새마을의 특성과 질박(質朴)성을 유지하면서 전시설의 교재 화, 환경의 교육장 화를 추구하기로 했다.
전시물에 대하여는 원내생산 문건과 원외 새마을현장 물품을 수집하기로 했다. 전시 방향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의 모습과 새마을운동이 전개되던 과정과 발전 변모 된 모습 그리고 새마을교육 내용과 외국의 관심 등으로 하고 전시 방법은 영상전시, 실물전시, 문건전시, 게시물 제작 부착 및 공간 구성을 하되 자료보존 실은 별도로 두기로 했다.
자료 확보에 있어 원내자료는 시청각 교육용16m/m 영화 필름, 슬라이드, 수료생 앨범, 분임토의 결과보고서, 입교 및 수료소감, 수료생 서신, 각 과정별 교재, 그리고 새마을 화보, 정부 기타 유관기관 간행물 등이지만 가장 소중한 자료는 분임토의 결과보고용 차트와 성공사례와 여러 강의녹음 자료였다.
분임토의 결과 차트는 갱지 전지인데 분임토의 중의 대화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모든 토의 참여자들이 친필로 기록한 것이다. 모든 과정별, 분임반별로 차트가 작성되어 전량보존 되어 있다. 1972년 1월 시작한 독농가반 1기부터 1~2부 정도가 손실 되고 전량이 보존되어있어 먼 훗날 난중일기 같은 귀한 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초기에는 인력부족으로 정리할 새가 없어 한곳에 모아 두기도 했는데 76년도에 정리해보니 쥐가 집을 짓고 살아 이를 정리 한 김찬수 김기명 두 사람은 쥐벼룩이 올라 고생을 하기도 했다.
외부에서 수집한 자료는 현지생활교육 마을과 수료생 마을을 찾아다니며 옛날 농기구나 생활도구 그리고 마을 기록물 등을 수집 했다. 이천 대월면 송라리(지도자 김경열)에서는 100년이 넘은 미곡은행 사발통문 등 귀한 자료도 수집이 되었고 각 마을에서 생산한 주민총회 회의록이나 작업일지 출석부 등 생생한 기록물과 우리 지도자님들의 일기장, 마을현황 소개용 브리핑 차트 등이 수집되었다. 주로 경기도, 충청남북도, 강원도 등지를 연수원 대형버스를 갖고 다니며 마을에 있는 자료들을 모았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마을단위의 많은 자료들이 문서보존기한이 5년이라는 관공서 관습에 따라 폐기되어 없어지고 더러는 마을에서 보존을 하겠노라고 내놓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상당히 많은 량이 수집 되었고 전국의 각 시군에서도 디딜방아 등 민속 유물들을 보내 주었다. 이렇게 수집 보존 된 자료들이 2013년 유네스코 인류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세계 인류의 기록유산으로 보존되게 된 것이다.
새마을 역사관의 건물 구조기획은 진입로비 주전시실, 자료 보존실, 부속 강당, 사무실 겸 전시물 제작실, 상담 접견실, 전시물 보관 창고, 옥외 전시공간으로 구성했다. 주 전시실은 방 가운데 기둥을 두지 않는 특수구조로 지붕도 경량철골에 의한 장 스팬을 도입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0여년이 지난 후 지붕 방수공사를 하는 과정에 특수공법 구조를 무시한 과중한 레미콘 투하로 천정이 내려 앉아 인명사고를 포함한 전시물 파손 사고가 발생해 본래의 모습을 잃게 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전시실 내부 인테리어와 각종 전시물은 직접 현장제작을 했는데 공예가 고 박성호 선생과 목공 기능올림픽 출신 이남열 선생이 혼신의 정열을 바쳐 밤낮으로 사진액자까지 제작 했다.
전시물의 배치는 입구 로비 공간에는 새마을 새싹을 상징하는 이슬이 매친 대형 원목 새싹 3점이 돋아나게 했고, 전시실 입구 우측 벽면에는 새마을운동의 영속발전을 기원하는 모자이크 목편 십장생도를 제작 부착하고, 건너편 소강당 벽에는 「새마을 가꾸기 사업」 모습을 보고 노산 이은상 선생께서 우리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사해(四海)를 향해 웅비의 나래를 펼칠 것을 노래한 장편 서사시를 대구 효종(曉鐘)회 회원이신 조성욱 지도자의 서예 대작을 게시했다.
전시관 입구로 들어서면 새마을마크를 음각(陰刻) 양각(陽刻)으로 목각을 해 세계로 확산되도록 기원을 하며 벽면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새마을운동 이전의 우리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율동마을이 주택개량을 하기 위해 구옥을 철거했는데 그중 한 동을 전체로 인수하여 2/3로 정확하게 축소하여 복원하고 여러 가지 생활도구와 닭장까지 재현 했다. 이 일은 율동 토박이 목수 고 남상연씨가 그대로 재현을 했다.
다음에는 논산 연무읍 동산리 황종철 지도자 마을의 환경개선사업 이전 사진과 사업 이후 파노라마 사진을 전시 했고, 새마을운동 해설, 새마을교육 교재 등을 전시 하면서 새마을운동 이전의 농촌 풍경과 취락구조개선 이후의 풍경을 축소 모형으로 재현하고자 했는데 이 작업을 맡은 대학생들이 옛날 농촌과 초가집에 대한 감각이 부족해 몇 번을 시도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아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각 마을에서 수집된 새마을사업 추진 기록이라든지 아주옛날 마을 대동계 기록, 남여 지도자들의 일기장 등 기록물을 전시 했는데 꽃씨아줌마 이덕훈 여사의 일기는 천안 목천 독립기념관(7관)에도 전시했다.
그때만 해도 영상물은 슬라이드와 16mm영화 필름이 전부라 프리즘 원리를 이용한 4면 거울영상으로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다음 자료실은 분임토의 결과보고용 차트를 팔만대장경처럼 보존 전시하고 각종 화보 , 교재, 앨범, 슬라이드, 영화 필름, 교육결과 분석자료 등을 보존 전시 했는데 그 후 수차례에 걸쳐 개선보완 했고, 지질이 좋지 않은 갱지 차트는 별도 방부처리를 하여 항온(恒溫)실에 보존하고 있다.
영사실 소강당에서는 단체 방문객들을 위한 강의나 영화상영 등을 했다. 역사관 운영은 전담자를 배치하고 방문객들에게 안내를 하고 연수생들은 연수기간 중 별도 관람시간을 배정 관람토록 했다.
옥외 전시공간에는 조형물을 설치하거나 새로운 농기계 등을 전시하기로 했지만 제대로 활용 하지 못했다.
새마을지도자연수원 신축 준공식
신축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이르자 새마을본부에서 준공식을 주관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1983년 4월 그때는 새마을지도자연수원과 새마을본부는 별개의 법인이었다. 그러나 상황으로는 새마을본부가 준공식을 주관하겠다는 요청을 거절 못했다.
그런데 행사 준비를 하러 나온 새마을본부의 여직원들이 추리닝 바람으로 설쳐대는데 도저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지경이라 애 많은 본부 총무부장에게 화풀이를 했다.
누구는 매일 같이 목욕재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준공식 대사를 앞두고 여자들이 속곳 바람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건설 본부장이었던 필자의 소갈머리가 좁아서였던지 그냥 보고 넘길 수는 없었다. 모든 동작을 중지시키고 야단을 친 결과 다음날은 근무복을 입고들 나와 좀 조심스럽게 행동 했다.
1983년 4월26일, 전두환 대통령과 부총리, 경기도지사 등 국무위원들까지 참석한 성대한 준공식행사를 끝내고 새마을교육 성남 분당시대를 시작했다.
[편집자 주]
<글쓴이> 김기명. 1974.5.4.~1988.4.1까지 새마을연수원 교수로 근무.
당시 연수원 총무부장, 건설 본부장으로서 설계부터 준공까지 실무 전반을 지휘 감독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