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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군 김천록 瑞興君 金天祿(1250-?)
1280年 고려조 충열왕6년 서흥군 봉작 高麗朝 忠烈王六年 瑞興君封爵
광정대부도첨의시랑찬성사상장군판판도사사 匡靖大夫都僉議侍郞贊成事上將軍判版圖事司
서흥군 김천록金天祿 장군의 조부祖父는
고려중기 19대왕 명종明宗의 명장名將 휘諱 보寶공으로 서흥김문瑞興金門의 시조始祖이시다.
신라 경순대왕敬順大王의 넷째아들 보국대안군 평장사輔國大安君平章事 김은열金殷說공의 오세손五世孫이다.
*위의 영정은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무열사에 모셔져 있다*
▲서흥군 신도비瑞興君 神道碑 -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월향리
서흥군 신도비명瑞興君 神道碑銘
국중國中의 명문거족名門巨族인 서흥김씨는 고려조高麗朝의 명장名將 김천록金天祿 장군이 훈공勳功을 세워 서흥군瑞興君에 봉작封爵됨으로써 시관始貫되었다.
공公은 금오위정용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 휘諱 보寶의 손孫이요, 좌우위정용장군左右衛精勇將軍 휘 덕인德仁의 자요, 그 선계先系는 신라 경순왕의 四자 보국대안군 평장사輔國大安君平章事 휘諱 은열殷說의 후예이며,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장군과 함께 원종元宗과 충렬왕조忠烈王朝에 활약하였고, 원종元宗 11년(1269) 배중손裵仲孫 등이 승화후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반란을 일으켜 삼별초三別抄군을 이끌고 진도珍島 일대에 침거함에 김방경 장군이 원장元將 흔도忻都 · 홍다구洪茶丘 등과 함께 이를 토벌하자 서흥군도 함께 출정하였다.
김방경 장군의 전함이 반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자 공께서 그 전함에 뛰어 들어가 적병을 칼로 무찌르고 장군을 구출하니 전군이 용기를 얻어 분발하여 승승장구하였다. 이로서 명성이 높아짐에 조정에서 광정대부 도첨의시랑 찬성사상장군 판판도사사̂[匡靖大夫都僉議侍郞贊成事上將軍判版圖司事] 서흥군瑞興君에 봉하였다. 그 후 김방경장군의 무공을 시기하는 간당들의 모함으로 대청도大靑島에 적거謫居하자 공이 극구 변론하여 방환放還되니 세인들이 공의 의리와 직언에 감탄하였다.
원종元宗 15년(1274)에 왕이 승하하고 충렬왕忠烈王이 원나라에서 돌아와 즉위하자 원에서 정동균征東軍 일만오천명과 흔도장군忻都將軍을 보내어 일본을 정벌케 하니 조정에서는 김방경장군을 비롯 공과 박지량朴之亮 등을 보내어 정벌하도록 했다. 이 때 공은 감사대장敢死隊長이 되어 왜군을 대파했으나 뜻밖에 대풍大風으로 인하여 개가凱歌를 올리지 못하고 되돌아왔으나 이 때 원나라 홀돈忽敦 장군이 공의 전공을 극찬하였다.
그 뒤 충렬왕 6년(1280) 고려는 다시 일본을 정벌할 계책을 세울 때에 공이 참획參劃하였고 원나라에 조인규趙仁規를 보내어 원세조元世祖의 동의를 구하기에 앞서 동정東征할 때 전공을 세운 고려의 장군을 포상하여 군의 사기를 진작하게 하니 원세조元世祖가 고려장군들에게 포상하였는데 공에게 충현교위 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의 직을 내렸다.
그 뒤 도독 김방경을 원수元帥로 삼아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원의 홀돈忽敦을 부원수로 삼아 五만의 려·원연합군麗·元聯合軍과 九백척의 전함을 이끌고 출전했다. 이 때 공과 박지량朴之亮 · 김흔金忻 · 조변趙抃 등은 특공대를 거느리고 왜군을 크게 격파했으나 전세는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김방경원수는 일대결전一大決戰을 주장했으나 원나라 장군들이 회군을 고집하여 철수함으로 무려 일만수천명의 대군이 희생되었으니 이같은 사실은 고려사 열전에 세가편충렬왕조世家篇忠烈王條와 김방경조金方慶條 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에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공의 묘소가 누차의 전화로 실전되었으며 문헌 또한 증빙할 길이 없어 애달프게만 여기어 오다가 이제 안성군 고삼면에 길지吉地를 택하니 앞에는 만경평호萬頃平湖가 그림처럼 펼쳐있고 뒤에는 경승지景勝地로 이름 높은 응봉산 하 양지바른 곳에 무열사武烈祠와 숭모재崇慕齋를 창건하여 위패와 영정을 모시었고 지척에 판서공 설단과 삼강정려각이 우뚝 솟아있다.
공의 부인 금릉김씨는 비서윤 보문각직학사秘書尹寶文閣直學士 김위金褘의 따님이다. 자의 휘 세구世丘는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요, 부인은 성주이씨星州李氏 밀직사사密直司事 백년百年의 따님이요, 농서군隴西君 장경長庚의 손녀이다.
손孫의 휘 봉환奉還은 정순대부성균대사성正順大夫成均大司成과 안동대도호부안집사安東大都護府按集使를 거쳐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역임했고 부인은 동래정씨東萊鄭氏 봉산군蓬山君 호瑚의 따님이다.
손서孫壻 김득배金得培는 상주인尙州人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안 우安祐 ·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의 스승이었다.
증손 휘 선보善保는 봉순대부판서운관사奉順大夫判書雲館事요, 부인은 여흥민씨驪興閔氏 화평부사化平府使 자명子明의 따님이다. 증손서曾孫壻 김충한金沖漢은 경주인으로 예의판서禮儀判書이다.
현손玄孫으로 중건中乾 · 중곤中坤 · 중인中寅 삼남을 두었다.
휘諱 중건中乾은 경기파의 중조中祖로, 조선조 초 사조四祖에 걸쳐 삼도관찰사三道觀察使와 자헌대부 예조판서資憲大夫禮曹判書를 역임하고 청백리로서 명성이 높았으며 부인은 창녕성씨 판도판서版圖判書 중용中庸의 따님이요, 광정대부 도첨의시랑찬성사집현전태학사匡靖大夫道僉議侍郞贊成事集賢殿太學士 사홍士弘의 손녀이다.
二남을 두었으니 장자인 휘 계술啓術은 생원生員 봉훈랑奉訓郞이요, 여서女婿 한 창韓昌은 청주인으로 보조공신증영의정청천부원군補祚功臣贈領議政靑川府院君이요, 외손 한백윤韓伯倫은 우의정청천부원군右議政靑川府院君이며 이 분 묘갈墓碣은 서흥인 호군護君 김 유金紐가 찬撰했다.
차남인 휘 계원啓遠은 관서파關西派의 중조로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이다.
생원의 아들인 휘 효인孝仁은 정의현감旌義縣監으로 성종조成宗朝에 좌리원정공신佐理原從功臣이다. 이남二男을 두었으니 장자長子 휘 석규碩珪는 용양위사직龍驤衛司直을 지냈으며 좌리이등공신佐理二等功臣이요, 차자次子 휘 석장碩璋은 용양위부사직龍驤衛副司直이다.
현감공縣監公의 종손 휘 인嶙은 충무위부사과忠武衛副司果요, 부인은 청주한씨 참찬관參贊官 경면慶綿의 따님이다. 그의 아들 휘 충수忠守는 호가 창죽헌蒼竹軒인데 임진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죽산 전투에서 항전 중 장렬히 순절하니 그 충절이 외외당당巍巍堂堂하였고 창죽헌공의 아들 휘 함涵은 호가 금제錦齊인데 아버지와 함께 적과 싸우다가 또한 순절하니 충절과 효절이 높다. 뒤에 부자에게 충효忠孝의 정려旌閭가 내리고 중직되니 부에게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아들에게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내렸다.
지평공持平公의 아들 휘 백려伯礪는 통덕랑通德郞으로 네 아들을 두었으니 그 三남 휘 배培는 통덕랑인데 부인 온양정씨溫陽鄭氏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순절하여 정렬貞烈로 정려旌閭가 내려지고 지평공의 현손인 통덕랑 휘 익성益聖의 부인 청주한씨는 부군夫君을 따라 하종下從하니 또한 정렬로 정려가 내려져 일문一門에 일충일효이렬一忠一孝二烈의 사중정려四重旌閭가 세워졌다. 이는 만고에 드문 일로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은전이다.
인조13년 병자(丙子 1636)에 호란胡亂을 당하여 어린 두 딸을 업고 안고 이천 거마산巨馬山 속에 피신했으나 호적의 추적을 받아 욕을 면키 어려움에 이르자 두 어린 딸과 함께 못에 빠져 순절하니 그 칭송이 일세에 빛났으며 이천 자래동子來洞에 지금도 일구一丘에 삼총三塚이 당시의 처참함과 정렬貞烈을 말하여 주고 있다. 그 뒤 영조16년 경신(庚申 1740)에 손 대영大榮과 5대손 동현東賢의 상소로 명정命旌되었다.
현감공의 증손 휘 색洓은 주부主簿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요, 그 아들 휘 신기愼機는 경양찰방景陽察訪이요, 그의 아들 휘 경복慶福은 부사과副司果요, 그 아들 휘 기虁도 부사과이며, 수은睡隱 강 항姜沆 선생의 서婿이다. 기의 종제從弟 휘 원정元鼎의 아들 휘 응문應文은 문과로 예조정랑겸 춘추관기사 경상도장시도사禮曹正郞兼春秋館記事慶尙道掌試都事를 역임했다. 증참판공贈參判公의 후손 휘 만익萬益은 문과로 예조정량禮曹正郞이요, 휘 상섭尙燮은 부총관副摠管이요, 휘 배윤培胤은 문과로 총융청천총摠戎廳千摠이다.
휘諱 중곤中坤은 영남파의 중조로 조선조 초 사조四祖에 걸쳐 사간원 좌사간司諫院左司諫과 통정대부예조참의通政大夫禮曹參議를 역임하고 또한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부인은 현풍곽씨 공조전서工曹典書 주珠의 따님이다. 그 자子 휘 소형小亨은 의영고사義盈庫使요, 부인은 배천조씨 부흥군復興君 반胖의 따님이다.
삼남을 두었으니 장자長子 휘 유紐는 호군護軍이요, 부인은 청주한씨 증병조판서청성군贈兵曹判書淸城君 승순承舜의 따님이다. 차자次子 휘 총緫은 호남파의 중조로 부호군副護軍이요, 부인은 완산최씨 직제학直提學 연촌烟村선생 덕德의 따님이다. 계자季子 휘 진縉은 해남파의 중조로 직장直長이며, 부인은 기계유씨 집현전직제학集賢殿直提學 효통孝通의 따님이다.
호군공護軍公의 자子 휘 굉필宏弼은 호 한훤당寒暄堂이요, 시호諡號는 문경文敬이며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연감춘추관사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요,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종사宗師로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의 문제門弟이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스승이다. 오현五賢의 수현首賢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도동서원道東書院의 주향主享이다. 부인은 순천박시 사맹司猛 예손禮孫의 따님이다. 삼남을 두었으니 장자長子 휘 언숙彦塾은 주부主簿요, 차자次子 휘 언상彦庠은 군수郡守요, 계자季子 휘 언학焉學은 선무랑宣務郞이다.
장자의 자 휘 대垈는 효렴孝廉으로 호조정랑戶曹正郞이요. 차자의 자 휘 입立은 ㅇ형조정랑刑曹正郞이요, 계자의 자 휘 익翌은 감찰監察이다. 후손인 대진大振은 호가 사우당四友堂 김천도金泉道 찰방察訪이며 한강문인寒岡門人이요, 하석夏錫은 호가 졸재拙齋요, 참봉參奉이며 갈암문인葛菴門人이요, 대곤大坤은 문과로 우부승지右副承旨요, 치곤致坤은 문정언文正言이요, 석희錫熙는 문교리文校理요, 희국熙國은 문교리文校理요, 錫輔는 문동부승지文同副承旨요, 기운麒運은 문정언이요, 錫源은 문주서文注書이다.
한훤당 선생의 외종손에 청주인 증영의정贈領議政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 선생과 증영의정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형제가 있는데 한강은 당대의 유종儒宗으로 영남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휘 총緫의 자 휘 유愉는 부사정副司正으로 이남을 두었으니 장자의 휘 감鑑은 생원이요, 차자의 휘 건鍵은 왕자사부王子師傅 예산현감禮山縣監이다. 휘 진縉의 자 휘 신頣은 감찰監察로 사남을 두었으니 장자의 윤문允文이 생원이요, 그의 자 휘 상祥도 생원이요, 차자의 휘 윤장允章은 감찰이며 여서女婿는 종실宗室로 금천군錦川君 수함守瑊이다. 외손에 판서判書 이성중李誠中 • 응교應敎 이경중李敬中 • 승지承旨 이양중李養中이 있다.
휘諱 중인中寅은 초계파의 중조이며 문과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요, 그의 손孫 휘 광윤光胤은 주부主簿요, 그의 현손玄孫 휘 백영伯英은 남원교수南原敎授로 한훤당 선생의 문인이기도 하다.
서흥세록에는 혁혁한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서 모든 사림士林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고려조의 휘 보寶는 당시 왕정王廷을 우의羽儀하여 그 공훈이 찬연히 빛났고 그의 손孫 서흥군 휘 천록天祿은 무략과 지모로 내외의 대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서흥군에 봉封하여졌다.
판서공判書公 휘 중건中乾은 청백 정직하고, 참의공參議公 휘 중곤中坤은 염결문아廉潔文雅하고 박사공 휘 중인中寅은 의덕미행懿德美行을 갖추었으며, 의정공議政公인 한훤당 휘 굉필宏弼은 도학창명道學倡明하여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도통을 수계하니 그 여광餘光과 유덕遺德이 온 나라에 충만하였다.
또 조선조에 대과급제한 분이 십여 명에 달하니 어찌 무과武科와 소과小科를 모두 기록할 수 있겠는가?
이는 오로지 서흥군의 유덕과 훈업에 근원根源이 심대강고深大强固하여 거수巨樹의 만지억엽萬枝億葉을 능양하는 소치라 하겠다. 근래 숭조정신이 쇠미해지는 작금에 사손嗣孫 택수보澤洙甫와 문경공 종손[文敬公 宗孫] 병의보秉義甫의 발의로 인득보仁得甫가 거금을 연출하여 서흥군신도비瑞興君神道碑를 세우게 되었으니 참으로 장거壯擧라 아니할 수 없으며 전통윤리를 바로잡는데 지주지공砥柱之功) 될 것이다.
이에 후손 석렬錫烈 · 필泌 · 준浚 · 현선鉉善 등이 비문을 청하므로 그 정성과 세의를 사辭할 수 없어 비재菲才를 불고不顧하고 사적史蹟의 대략과 손록孫錄을 초抄하여 비문으로 삼는 바이다.
1978년 3월
後學 法學博士 晉陽 姜周鎭 謹瓚,
瑞興君22世孫 昌東 書幵篆,
瑞興君22世孫 벽산그룹회장 經營學博士 仁得 謹竪
첫댓글 보감에 수록된 서흥군 신도비의 내용을 올립니다.
사진을 설명하는 글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 위에 글은 부록으로 들어가고...
서흥군 영정과 서흥군에 대한 글과 사진설명도 올렸습니다.
글은 서흥군에 대한 추가 자료가 부족하여 경현록과 보감의 글을 발췌한 서흥김문연원의 내용을 옮겼습니다.
서흥군 영정은 윤호 종원이 촬영한 사진입니다.
서흥군 신도비 비문 중 생략된 문단의 전문을 다시 올렸습니다.
괄호안의 한자표기도 다른 글에서 처럼 괄호없이 처리했습니다.
신도비문 위의 서문은 카페용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서흥군 영정 본문 사진 설명을 사진편집에 맞게 줄였습니다.
이처럼 훌륭한 조상님의 후손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한편 조상님의 기대에 따르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24세손 김찬동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