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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월 】--성주(星州) 목민(牧民) 일록(日錄)-- 병진년(1616:광해군8=만력44=천명1) 선생51세
〖초1일 임신〗흐렸다가 갬.
신안(新安=星州)사람인 이경문(李景文),정결담(鄭潔澹)등이 찾아와서 만났고,
현풍(玄風)사람인 김응현(金應賢)도 왔다.
황공직(黃公直85)과 이치원(李致遠)이 아침을 먹고 돌아갔다.
저녁에 오봉(五峯=李好閔99)을 찾아뵙고,영상(領相=奇自獻5)에게는 명함을 넣어 면회를 신청했었다.
경관(趙景觀)을 찾아보고, 융보(吳隆甫61)는 못 만났다.
〖초2일 계유〗맑음.
월사(月沙=李廷龜119)와 유숙(柳潚104) 3 형제를 만났다.
〖초3일 갑술〗맑음,
사간(司諫)김질간(金質幹72)을 만나러 갔더니 이중인(李仲仁),정행지(鄭行之)및 정인(鄭寅260)도 거기에 있었다.
저녁에 융보(吳隆甫61)가 전별연(餞別宴)을 편다기에 박양이(朴養而=朴鼎吉4)와 이여첨(李汝瞻=李埁15),
남명우(南溟羽261)가 모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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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광해군 8년(1616) 1월 1일
이조에서 정인홍이 아뢴 유일을 등용하자는 일에 대해 회계하다.
부묘 대례를 행한 좌통례 정영국에게 가자하다. 판윤 이충이 사직하는 차자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1월 3일
양사에서 합계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할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이 변응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1월 4일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
양사에서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할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이 변응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었으나 불윤하다. 보방(保放)할 죄인의 명단을 아뢰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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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4일 을해〗
여첨(汝瞻=李埁15)이 전별(餞別)의 자리를 마련한다기에 융보(吳隆甫61),이위경(李偉卿112),형보(馨甫=李茳53),
김택지(金擇之=金友益94)가 다 모였다.
오늘 아침에 양이(養而=朴鼎吉4)와 모공(某公)을 찾아가 최호(崔濩263)를 만났다.
〖초5일 병자〗맑음.
아침에 황익중(黃益中77),유여율(柳汝慄),유희량(柳希亮73),유희발(柳希發71),강(姜)헌납(獻納)을 만나러 갔었다.
저녁에 장의동(藏義洞262),김지사(金知事=金尙容78)가 전별주를 마시자기에 김첨지(金僉知)및 연안(延安) 3 형제,
김(金)동지사(同知事)가 모두 모였다. 주우(柱宇33)도 같이 갔다.
〖초6일 정축〗맑음.
내일은 길 떠나기(出行)가 마땅하지 않아서 가는 걸 그만두었다.
〖초7일 무인〗맑지만 춥다.
참의(參議),유간(柳澗80)과 대사간(大司諫),이영(李覺81)및 김효백(金孝伯),김택지(金擇之=金友益94),
권경섭(權景涉)을 가서 만났다.
밤에 경행(朴景行)형제와 낙이(蔡樂而) 및 김참판(金參判=金尙寯87)이 와서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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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1월 6일
동지사 민형남·허균 등이 변무한 것을 북경에서 아뢰다.
冬至使閔馨男許筠,在北京以秘密馳啓,國史、野史,皆有本國誣枉之語,臣等呈辨禮曹〔部〕云云。
동지사민형남허균,재북경이비밀치계,국사、야사,개유본국무왕지어,신등정변예조〔부〕운운。
【所謂國史,卽《大明會典》,光國諸臣,所已辨明者。其野史,或先已行於東國,筠家素有之書,其言有不足辨者,筠或爲眞贗,
【소위국사,즉《대명회전》,광국제신,소이변명자。기야사,혹선이행어동국,균가소유지서,기언유부족변자,균혹위진안,
作雜其間。又有伍員萃所述《林居漫錄》草本,尤可疑。筠掇拾上聞,以中王意, 遂以卞誣自任矣。】
작잡기간。우유오원췌소술《임거만록》초본,우가의。균철습상문,이중왕의, 수이변무자임의。】
( 동지사(冬至使) 민형남(閔馨男)·허균(許筠) 등이 북경에서 비밀히 치계하기를,
“국사(國史)와 야사(野史)에 있는 본국을 무고하는 내용에 대하여 신들이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변무(卞誣)하였습니다.” 하였다. 이른바 국사란
‘대명회전(大明會典)’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들이 이미 변론하여 밝힌 것이며,
그 야사는 혹 이보다 앞서 이미 우리 나라에 유행하여 허균의 집에 본래부터 있던 책으로
그 내용은 변론할 것도 없는 것이거나, 아니면 허균이 혹 자신의 위작(僞作)을 그 속에 섞어 넣은 것일 것이다.
그리고 오원췌(伍員萃)가 기술한 ‘임거만록(林居漫錄)’의 초본(草本)이 들어 있으니, 더욱 의심스럽다.
허균이 이것저것 주워 모아 보고하여 왕의 뜻에 맞추고는 마침내 변무(卞誣)하는 것을 자임했던 것이다.)
양사에서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할 일을 아뢰었으나 불윤하다.
사간원이 변응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1월 7일
좌·우포도 대장을 불러 비밀히 전교를 듣고 나가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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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8일 기묘〗맑음.
아침에 신경력(申經歷)의 집에서 만나보고,심인보(沈仁補),조정립(曺挺立25),이형보(李馨甫=李茳53)와도 모두 만났다.
〖초9일 경진〗맑음.
경행(朴景行) 형제와 낙이(蔡樂而)와 같이 잤다. 공직(黃公直85)도 같이 잤다.
〖10일 신사〗흐리고 밤에 많은 눈.
경행(朴景行)형제와 같이 잤다.
오늘 저녁에 이대엽(李大燁42)을 만나러 가서 홍엽(李弘燁),정이지(鄭履之)와 몇 잔 마셨다.
도행(到行)하는 집 마다 내려간다고 함께 전별하며 큰 잔으로 4사발을 마시고 돌아왔다.
밤에 신광업(辛光業22)을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예판(禮判=李爾瞻49)은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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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1월 8일
선수 도감의 낭청·감역관이 나오는 대로 실직을 줄 것을 이조에 이르게 하다.
종묘령 이하를 승진시켜 서용하게 하다.
문묘 분향 때의 집사관 명단을 아뢰게 하다. 녹훈된 자 중 봉군되지 않은 인원은 충훈부에서 녹을 붙여주게 하다.
光海君 8년 1월 9일
우의정 정창연이 열한 번째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양사에서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할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이 변응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에서 장기 현감 신방로의 파직을 청하다.
光海君 8년 1월 10일
직산에서 신공을 상납하지 않아 임자년 전후의 관리를 추고하게 하다.
해빙기가 가까워 변방에 대한 방비를 계획하게 하다.
고명 반강 고제(誥命頒降告祭) 때의 헌관 이하를 아뢰게 하다. 한진영·변영·노순 등을 파직하다.
사간원이 장기 현감 신방로의 파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양사에서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할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1월 11일
하원군 부인이 졸하여 상장에 관곽을 지급하게 하다.
(河原君夫人卒逝。此乃大院君奉祀冡婦也。別致賻喪葬事)
(하원군부인졸서。차내대원군봉사몽부야。별치부상장사)
양사에서 두 역적의 일·이현문의 일을 합계하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게 하다.
사헌부가 신방로·인산 첨사 홍건의 파직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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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임오〗맑음.
폐사(陛辭)하다. 배자장(裴子張=裴大維36)은 세자시강원(講院)에서 오고,
이지화(李之華174)는 예문관(翰苑)에서 와서 막처(幕處)에서 만났다.
김참판(金參判=金尙雋255)도 와서 만났다.
송현(松峴)에서 밥을 먹고,이정건(李廷揵),백상현(白尙賢),김광위(金光煒:김참판의 아들)도 모두 와서 만났다.
조판사(趙判事)는 남대문 안에서 전별했고,정우상(鄭右相=鄭昌衍264)과 유희발(柳希發71)이 사람을 보내어 위로했다.
광경(廣敬)도 그랬다. 유희량(柳希亮73)은 정중한 글을 보내왔다.
차례로 만났는데,이순경(李順慶)은 그 집에서,남관묘(南關廟)에서 전별주를 마셨다.
한림(翰林) 윤성임(尹聖任91),금언강(琴彦康=琴愷12),이형보(李馨甫=李茳53),김택지(金擇之=金友益94),한안국(韓安國54),
한정국(韓正國109),신근(申謹),황정간(黃廷幹),풍릉군수(豊陵郡守)조석붕(趙錫朋60)이 와서 모였다.
그 나머지는 다 오지 않았다.양재역(良才驛)에서 잤는데,채낙이(蔡樂而)와 김의남(金義男)이 같이 간다.
〖12일 계미〗맑음.
판교(板橋)에서 점심을 먹고,신촌(新村)에 투숙했다.여기는 갈천(葛川)의 아래이다.
이부(吏府) 이순신(李舜臣)등이 와서 현신(現身)을 했다. 강충립(康忠立)이 쫒아 와서 동행한다.
〖13일 갑신〗맑음.
청회역(靑回驛)에서 점심을 먹고,소사(素沙) 교막(橋幕)에서 쉬었다가 저녁에 시름소(詩廩所)에 투숙했다.
〖14일 을유〗맑음.
천안(天安)주막(酒幕)에서 점심을 먹고,고을 원이 문지기에게 출입을 엄금하여 통언(通言:언어 소통)을 못했다.
가소롭다.
덕경(德京)주막에서 쉬면서 들으니 김충남(金忠南)씨가 저 개울 건너편에 계신다기에 달려가서 뵈니 비록 이미 늙었지만
총명은 그다지 줄지 않아서 면목(面目)과 말투는 20년 전과 완연(宛然:뚜렷하다,분명하다,모양이 비슷하다.)하다.
그분께 약과(藥果)20꼬치, 대계(大桂:油蜜果) 10꼬치,고등어(碧魚) 10마리를 정성으로 드렸다.
저녁에 달려서 전의(全義)에 도착하니 박태현(朴台賢)군수가 나와서 영접한다. 객사(客舍)에서 자다.
〖15일 병술〗맑음.
그냥 머물다.
〖16일 정해〗맑음.
일찍 출발하여 고신사동(古信寺洞)에 쉬고,문의(文義)에 투숙하는데,허주(許宙)현령(縣令)이 나와 영접을 한다.
〖17일 무자〗흐리고 늦게 많은 눈이 옴.
일찍 출발하여 구어촌(仇於村)에서 점심을 먹었다.즉 서원(西原)의 주안현(朱岸縣)이다,그냥 유숙(留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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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1월 14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다. 오정·이정원·정호선 등에게 품계를 올려주다,전 정(正)오정(吳靖),응교 이정원(李挺元),
사인 정호선(丁好善),흥해 군수(興海郡守)정호관(丁好寬),영천 군수(永川郡守)남벌(南橃),
재령 군수(載寧郡守)한여직(韓汝溭),사복시 정 유희량(柳希亮),전한 박자흥(朴自興),직제학 유희발(柳希發),
좌통례 정영국(鄭榮國)은 모두 통정계(通政階)를 더해주고,함경 감사 유공량(柳公亮),공조 판서 이상의(李尙毅),
지사 민형남(閔馨男)은 모두 숭록계(崇祿階)를 더해주고,대사성 조존세(趙存世),예조 참판 남근(南瑾),
호군 송석경(宋錫慶)은 모두 가의계(嘉義階)를 더해주고,의령군(義寧君) 송순(宋諄),대원군(帶原君)윤효전(尹孝全),
여성군(驪城君)이지완(李志完)은 모두 정헌계(正憲階)를 더해주고,부제학 유숙(柳潚),
홍주 목사(洪州牧使)황근중(黃謹中)은 모두 가선계(嘉善階)를 더해주고,
황주 목사(黃州牧使)이경심(李慶深)은 자헌계(資憲階)를 더해주고,
지돈령 김상용(金尙容)은 숭정계(崇政階)를 더해주고,
예조 판서 이이첨(李爾瞻)은 보국계(輔國階)를 더해주었다.
송순을 대사헌으로,정인(鄭寅)을 장령으로,윤인(尹訒)을 사복시 정으로,이위경(李偉卿)을 이조 좌랑으로,
박재(朴榟)를 전한으로,허경(許儆)을 담양 부사로,남성신(南省身)을 봉교로,이강(李茳)을 대교로,
이경전(李慶全)을 형조 판서로,신광업(辛光業)을 교리로,유희발을 이조 참의로, 유대정(兪大禎)을 병조 참판으로,
이안눌(李安訥)을 공홍 감사(公洪監司)로,김의직(金義直)을 공홍 수사로,이람(李覽)을 봉상시 정으로,
유희량을 예조 참의로,오여온(吳汝穩)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심□(沈□)를 형조 참판으로 특배하였다.
전 대사간 이호신(李好信)에게 가선 품계를 더해주고,도승지 윤선(尹銑)에게 가의 품계를 더해주고,
형조 참판 이호의(李好義)에게 가의 품계를 더해주고,전 참판 김개(金闓),
예조 참의 유간(柳澗)에게 가선 품계를 더해주었다.
윤대기의 지척을 받은 지평 조국빈, 집의 손척 등이 파직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계축년 추국때 현록을 잘못한 당해 도사·색리를 논죄하게 하다.
고강 때 패초에 나오지 않은 자를 도태시킨 적이 있는지 살피게 하다.
光海君 8년 1월 15일
승정원에서 패초에 나오지 않은 자의 도태시킴이 있음을 알리다.
부제학 유숙 등이 윤대기의 비난을 받았다 하여 대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경기 감사가 선정을 베푼 수령의 포상과 잘 다스리지 못한 수령의 파출을 청하다.
지평 조국빈을 체차하고, 집의 이하·대사간 이하는 모두 출사하게 하다.
光海君 8년 1월 16일
승정원이 흰 무지개의 변고가 있으니 임금이 공구수성할 것을 청하다.
고강 때 패초에 나오지 않은 자를 논죄하지 말라고 하다.
박자흥을 교정청의 부제조로 차임하여 교정일을 살피도록 하다.
판의금부사가 출사한 후에 보방(保放)죄인을 의계(議啓)하라고 하다.
홍문관에서 차자를 올려 민생을 돌보는 일·상벌을 분명히 할 일 등을 아뢰다.
천재가 참혹하니 저마다 도를 다할 것을 당부하다.
光海君 8년 1월 17일
침술에 능한 송언길·백학기를 내의원에서 근무하게 하다.
우의정이 열두 번째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다.
양사에서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할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어사를 정밀하게 가려 추천하도록 하다.
충청 감사 이안눌·사헌부 장령 정인을 체차하게 하다.
사간원이 차자를 올려 흰 무지개의 변고와 관련하여 당시의 폐단을 아뢰다.
사헌부가 홍건·신방로의 일을 조사하는 동안 정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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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기축〗맑음.
옥천(沃川) 서정리(西亭里)의 안민선(安敏善)네 집에서 점심을 먹고,접동리(接同里)에서 쉬고,
배로 접동강(接同江)을 건너서 저물녘에 영동현(永同縣)내촌가(內村家)에 투숙했는데,강준(姜遵)현감이 나와서 만났다.
〖19일 경인〗맑음.
황간(黃澗)전촌(前村)에서 점심을 먹고,
추풍역(秋豊驛)에서 쉬었다가 금산(金山)에 투숙하니 유중룡(柳仲龍265)현감이 나와서 만났고,
최계숙(崔季叔)이 마침 와서 방문했다.
〖20일 신묘〗맑음.
아침에 여희좌(呂姬佐:본관 성주),강설(姜渫),여희필(呂姬弼)이 와서 만났다.
점심을 먹은 뒤에 출발하여 부상(扶桑)서 쉬는데, 둘째 아들인 주국(柱國)이 와서 기다린다.
대마촌(大馬村)의 의원{醫生)인 이순적(李順迪)의 집에서 숙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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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1월 18일
천문 지리에 관한 책자 출간의 일을 관상감에게 의논하게 하다.
대사간 이병,정언 홍요검,사간 김질간,집의 손척,장령 황익중이 장령 정인의 일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유학 이현이 상소하여 신경희의 형집행을 속히 거행하라고 청하다.
光海君 8년 1월 19일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 송석경에 대한 가자를 그대로 주도록 하다.
승정원에서 재이를 그치게 하는 방도에 대해 아뢰다. 영의정의 차자에 대하여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이현의 상소에 대해 국청에 내려 의논 처리하게 하다. 최응해·이명남에게 가자할 것을 전교하다.
공조 판서 이상의가 차자를 올려 가자를 사양하다.
정언 홍요검,사간 김질간,헌납 강린,정언 한영,장령 황익중은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고,
대사간 이병,집의 손척,지평 임성지는 체차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光海君 8년 1월 20일
양사가 두 역적의 일·이현문의 일을 합계하니 이미 유시한 것으로 답하다.
영의정 기자헌이 질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박자흥(朴自興)을 동부승지로,유인길(柳寅吉)을 대사간으로,한옥(韓玉)을 지평으로,박건(朴楗)을 대사헌으로,
이대엽(李大燁)을 집의로,정준(鄭遵)을 지평으로,유혁(柳㴒)을 필선으로,유효립(柳孝立)을 제용감 정으로,
이경전(李慶全)을 홍문관 제학으로,손척(孫倜),이대엽을 겸보덕으로,박정길(朴鼎吉)을 응교로,이정(李涏)을 사서로,
임성지(任性之)를 문학으로,신익수(申翼壽)를 병조 좌랑으로,윤조원(尹調元),한덕원(韓德遠)을 동지로,
박경신(朴慶新),이척(李惕)을 도총관으로,이명남(李命男)을 분병조 참의로,정문부(鄭文孚),조존세(趙存世),
유간(柳澗)을 분총관으로,정응성(鄭應星)을 부총관으로 삼고,최응허(崔應虛)에게 통정계(通政階)를 더해주고,
임건(林楗)을 장령으로 삼았다. 햇무리가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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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임진〗맑음.
아침 일찍 출발하여 상관(上官)께 가서 모든 예(禮)를 마치고,
관아(官衙)에 들어와서 사당(祠堂)에 배알하고 차례(茶禮)를 행했다.
점심을 먹은 다음 객사(客舍)에 나가 앉아서
소지(所志266) 38권(卷)4장(丈)과 공문(公事:여러 사람에 관한 일이거나 관청이나 공공 단체의 서류나 직무)
10장(丈)을 처리하고 신시(申時:오후 3~5시)에 내아(內衙)로 돌아왔다.
〖22일 계사〗맑음.
조부(祖父:廷憲,퇴계문인,進士)기일(忌日)이라서 정청(正廳)에 나가지 않았다.
군관(軍官)서홍덕(徐弘德)을 시켜서 먹을 것(食物)을 들고 좌상(左相=鄭仁弘240)에게 문안(問安)드리도록 했다.
〖23일 갑오〗맑음.
아침 일찍 절애당(節愛堂)에 좌정(坐定)하여 소지(所志)8권(卷)과 공사(公事)7장(丈)을 처결하고
오후에 관아로 돌아와서 주국(柱國)이네와 술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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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1월 21일
대사헌 박건이 질병 등의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순검 어사 후보에 변방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추천하게 하다. 우의정 정창연이 열세 번째 사직을 청하다.
햇무리가 지다.
光海君 8년 1월 22일
양사가 두 역적의 일·이현문의 일을 합계하니 이미 유시한 것으로 답하다.
사간원에서 이조 정랑 박홍도의 파직을 청하다. 대사헌 박건의 청에 따라 헌납 강린을 파직하다.
光海君 8년 1월 23일
전한 박재가 상소하여 제신들의 알력 관계를 아뢰고 사직을 청하다.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부제학 유숙 등이 차자를 올려 대사헌 박건 등의 파직을 청하다.
지평 한옥,장령 황익중,정언 한영이 대사헌 박건에게 경시당했다 하여 사직을 청하다.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장령 임건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제신들에게 싸움의 단서를 진정시켜 조정을 편안하게 할 것을 명하다.
친국 때 문사 낭청으로서 두 글자를 빠뜨린 박정길을 추고하게 하다.
우의정 정창연의 열세 번째 사직에 대해 윤허하지 않다.
유간(柳澗)을 병조 참판으로,유희량(柳希亮)을 동부승지로,조정립(曺挺立)을 헌납으로,유화(柳韡)를 정언으로,
유덕신(柳德新)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윤조원(尹調元)을 황해 감사로,윤인(尹訒)을 겸필선으로,
경섬(慶暹)을 충청 감사로 삼고,특지로 허임(許任)을 영평 현령(永平縣令)으로,
남영(南嶸)을 음죽 현감(陰竹縣監)으로 삼았다.
光海君 8년 1월 24일
형조 판서 이경전이 홍문관 제학의 사면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부수찬 이집이 상소하여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유학 이해가 상소하여 신경희를 추형할 것을 청하다.
光海君 8년 1월 25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다. 한옥·황익중 등을 출사하게 하고 대사헌 박건을 체직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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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을미〗맑음.
아침에 사시헌(四時軒)에 나가 장남 주민(柱旻),차남 주국(柱國),조수붕(趙壽朋267)등을 전별하고,점심을 먹고,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4권(卷)과 공사(公事)5장(丈)을 처결했다.
(좌상 댁에 심부름 갔던 군관인)서홍덕(徐弘德)이 아침에 돌아와서는 좌상(左相)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탄식을 한다.
정한강(鄭寒岡=鄭逑184)선생께 문안드렸더니 권상경(權尙經)이 와 있었다.
〖25일 병신〗맑음.
좌상(左相)댁에 갔다.
벽에 떠나서 청천정사(晴川精舍268)에서 점심을 먹고,해인사(海印寺)를 찾아가서 숙박을 했다.
채낙이(蔡樂而)와 주우(柱宇)도 여행 장비를 갖추고 여기 왔는데,
들으니까 절 안{寺內}에는 돌림병이 극성하다고 하여 채낙이(蔡樂而)와 주우(柱宇)는 현(新安縣)으로 돌아가고
나 혼자 나아가니 이홍서(李弘緖)와 조원규(趙元規)등이 와 있었다.
절을 하고 술 12잔을 다 마신 뒤에 이야기가 퇴계(退溪)선생의 일에 언급이 되자 내가 말하길
“요즘 사람들로써 월천(月川=趙穆269)선생을 난감하게 입에 올리며 논쟁하는
첫 번째 화두(話頭:이야기의 실마리)가 되어있습니다.
월천(月川) (문인들에게)일러 선사(先師)와 등을 져야 사귈 수 있다고 대감(大監=鄭仁弘240)께서 말씀하셨다는데,
저의(小生)의 생각으로는 대감(大監)께서 남명(南冥=曺植153)선생을 위해 정성을 다해 발명(發明:무죄를 변명함)하시는
뜻과 같이 만약 월천(月川)(문인들이)선사(先師)를 배반하라는 것과 같은 말이 되므로 그러면 대감(大監)께서는 반드시
서로 상종을 허락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小生)는 학술(學術)을 모르는 귀머거리나 장님 같아도 오히려 청천백일(靑天白日)을 청천백일이라 하는 것은 압니다.
하물며 저는 월천(月川)을 독실히 믿고 있는데, 어찌 선사(先師)를 배반할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요즘 사람들의 아무것도 모르고 시비(是非) 곡직(曲直)을 법을 앞세워 장자(長者:덕이 높은 사람)를 꾸짖고
욕하여 망신 주는[詬辱]건 진실로 부당합니다.”라고 하자, 좌상(左相)은 흔연히 “심히 옳다.”고 했다.
내가 나간 후에 홍서(李弘緖)등이 전하기를(鄭仁弘이)“신안(新安=구전(苟全)선생)의 말은 통쾌하도다,
통쾌해!”라고 했단다.
날이 저물어서 달려서 돌아오다가 밤중에 신당리(新當里)촌가(村家)에 투숙했다.
이육(李堉)의 별장인데,
이육(李堉)은 합천 출신으로 그의 동생인 이숙(李埱),이영(李塋)등이 명함을 바치기에 불러서 만났다.
〖26일 정유〗맑음.
아침에 이숙(李埱)등이 술을 올리며 권하기에 내가 사양하여 마시지 않고 물리쳤다.
밥을 먹고 정장(鄭樟270)을 조문했다. 송진기(宋進器)가 관아로 돌아왔다.
오시(午時)에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 4권(卷),공사(公事) 6장(丈)을 처결하고 신시(申時)에 관아로 돌아와
동헌(東軒271)에 앉았다. 채몽관(蔡夢觀=蔡樂而)와 이홍서(李弘緖)가 따라 왔다.
〖27일 무술〗맑음.
아침을 먹고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 8권(卷)과 공사(公事) 11장(丈)을 처결했다.
김행가(金行可)좌수(座首272)가 순영(巡營273)에서 돌아왔다고 아뢴다.
교동(喬桐)의 원인 김정간(金廷幹)이 와서 아뢴다. 미시(未時:오후 1~3시경)에 내아(內衙)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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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1월 26일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다. 양사에서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일 등에 대해 합계하다.
영의정이 차자를 올려 사직을 청하다. 집의 이대엽이 조정의 알력을 아뢰고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정언 한영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송순(宋諄)을 대사헌으로,정광경(鄭廣敬)을 사간으로,김질간(金質幹)을 부교리로,남이준(南以俊)을 수찬으로,
이상항(李尙恒)을 설서로 삼았다.
적 체포에 공을 세운 이양백·이호백에게 실직 또는 품계를 주다.
光海君 8년 1월 27일
양사에서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일 등을 아뢰니 논하지 말게 하다.
사헌부가 조정의 알력에 관해 아뢰고 정언 한영의 출사를 청하다. 봉교 이강이 상소하여 체직되기를 청하다.
겸설서 남성신이 상소하여 박재의 신원에 관해 아뢰다. 영의정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이 이조 정랑 박홍도의 파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남명우(南溟羽)를 검열로,박건(朴楗)을 영평군(靈平君)으로,이강(李茳)을 봉교로,황덕부(黃德符)를 대교로,
유여각(柳汝恪)을 부수찬으로,정지산(鄭之産)을 빙고별좌(氷庫別坐)로,
【정지산은 정소용(鄭昭容)의 오라비로서 본래 천얼(賤孼)이다. 특지(特旨)로 관직에 보임한 것이었다.】
이성석(李聖錫)을 동몽훈도(童蒙訓導)로,권반(權盼)을 나주목사(羅州牧使)로,강수(姜燧)를 익위(翊衛)로 삼았다.
정호선(丁好善)을 천추사(千秋使)로,김류(金瑬)를 성절사(聖節使)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표정로(表廷老)를 그대로 지사(知事)에 제수하라. 이양백을 첨지중추부사로 삼으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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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기해〗맑음.
밥을 먹고 정청(正廳)에 앉아 소지(所志) 8권(卷)과 공사(公事) 7장(丈)을 처결하고
미시(未時:오후1시~3시)에 내아(內衙)로 돌아 왔다. 이사경(李士慶127)이 대구(大丘)서 돌아왔다.
〖29일 경자〗맑음.
아침을 먹고 정청(正廳)에 앉아 소지(所志) 9권(卷)과 송사(公事) 10장(丈)을 처결했다.
이점(李蒧56)이 말을 타고 왔다.
윤희현(尹希賢)이 영천(榮川)에서 왔고,노비 억정(億丁)이가 정금(丁金)이를 데리고 나타났기에 밤에 이야기를 했다.
관내(管內)의 맹인 점술가(盲卜)인 배현민(裴玄敏)이 와서 아뢴다.
송주빈(宋周賓)이 왔다가 갔는데 명함을 받아두지 못했다.
〖30일 신축〗맑음.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 10권(卷)과 공사(公事) 12장(丈)을 처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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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1월 29일
사간원이 박홍도의 파직을 청하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게 하다.
국청의 크고 작은 의계·소장·대계를 속히 처리하게 하다. 병조 판서 박승종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정조(鄭造)를 대사간으로, 유간(柳澗)을 대사헌으로, 이병(李覮)을 병조참판으로 삼았다.
光海君 8년 1월 30일
국기의 제계로 전계를 잠시 멈추다
光海君 8년 2월 2일
우의정의 열네 번째 사직소에 대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경상 감사가 왜인과 통신사 교환 여부를 묻다.
포도대장으로서 공을 세운 한희길에게 지중추부사와 수사를 제수하다.
대마도에 보낼 무신 전덕신에게 실직을 제수하게 하다.사헌부가 신수무·이무림·윤시준 등의 체차를 청하다.
박승종의 차자에 대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光海君 8년 2월 3일
인가를 방화·도둑질하는 폐단이 있자 좌우 포도 대장을 추고하게 하다. 훙년이므로 기곡례를 정지하게 하다.
공상지의 방납을 금하게 하다. 영의정이 차자를 올려 재앙을 멈추게 하는 방법에 대해 아뢰다.
파손된 병기를 고치고 시사·습진 등의 일을 특별히 거행하게 하다.
光海君 8년 2월 4일
병조 판서 박승종이 차자를 올려 병세로 직무수행의 불가함을 아뢰다.
우의정이 출사하도록 승지를 보내어 타이르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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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 】
〖초1일 임인〗맑음.
선왕(先王)의 국기일(國忌日)이라서 집무를 보지 않는다.
(정청에 나가 앉지 않았다.) 들으니 방백(方伯=監司273成晋善274)이 내일 화원(花原)을 지날 예정이란다.
〖초2일 계묘〗맑음.
닭 울 무렵에 화원(花園)으로 달려가니 김사헌(金士憲)과 채몽관(蔡夢觀)과 인잠(印岑)스님도 와 있었다.
환상(還上:봄에 환곡으로 받은 곡식을 가을에 바치는 환자)을 몫몫으로 나눠 주고
[分給]소지(所志) 5권(卷)과 공사(公事) 7장(丈)을 처결했다.
〖초3일 갑진〗맑음.
방백(方伯273)이 오셔서 임시로 권위(權威)스러운 전청(殿廳)을 설치하고
연명(延命:원이 감사를 처음 가서 뵙던 의식으로,감사나 원이 부임할 때에 궐패(闕牌)앞에서
왕명(王命)을 전포(傳布)하던 의식)의식을 행한 뒤에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들으니 대사헌 박건(朴楗6)이 박재(朴梓120)에게 논박 당해 (물러나고) 정조(鄭造62)가 대사헌이 되어
이조정랑인 박홍도(朴弘道14)를 공박하자, 옥당(홍문관)에서도 박건(朴楗6)과 박재(朴梓120)를 논박했단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르자 홍문관 전한(典翰)인 박재(朴梓120)의 심술(心術: 마음보)이 괴상하고 어그러졌다고 말한다.
(감사가) 밤에 돌아갔다.
〖초4일 을사〗맑음.
낮에 관아의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 5권(卷)과 공사(公事) 10장(丈)을 처결하고
오후에는 검정 관대(冠帶)를 하고 객사(客舍)에서 치재(致齋275: 제관(祭官)들이 3일 동안 몸을 깨끗이 가지는 일)를
하고 윤희현(尹希賢) 및 진사(進士) 애들과 같이 잤다.
〖초5일 병오〗맑음.
제물(祭物)을 받들고 향교(鄕校)로 가서 헌관(獻官)인 최항경(崔恒慶276),김주(金輳277),박명윤(朴明胤),
이천봉(李天封278),장현도(張顯道279),김축(金軸:호 松岩)등과 같이 앉았다.
집례(執禮:홀기를 읽는 사람)는 이육(李堉)이 하고,대축(大祝)은 이문우(李文雨)로 정했다. 밤에 비가 오다.
〖초6일 정미〗새벽부터 비가 오다가 늦게 갬.
석전제(釋奠祭275)를 지낸 뒤에 관아(官衙)로 올라와서 점심을 먹고,
정청(正廳)에 앉아서 사직단(社稷壇280)의 제물(祭物)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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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2월 5일
영의정의 차자에 대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우부승지 유대건이 우의정을 만난 것에 대해 아뢰다.
사간원이 강화 부사 조효남의 체차·사신의 잡인 대동에 대해 아뢰다. 우의정의 사직 차자를 올리다.
光海君 8년 2월 6일
좌의정 정인홍이 사직을 청하다. 사헌부에서 단성 현령 이무림의 체차를 청하다.
사간원이 조효남 등의 일을 잠시 정계하다. 합계에 대해 번거롭게 논하지 말게 하다.
사헌부에 답하여 이무림의 일을 논하지 말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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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7일 무신〗맑음.
사직단(社稷壇280)위에서 3경4점(三更四點:밤12시반 경)에 제사를 거행하고,
관아로 돌아와 교장(敎場:송(宋)대에 무술을 가르치던 곳. 일정한 교육 시설을 해 놓은 곳.
敎育場(교육장))에 앉아서 8초(哨:100명이 1哨)811명의 군대를 검열(檢閱)했다.
도망자나 유고(有故)자 또한 많았다.
소지(所志)29권(卷)과 공사(公事)11장(丈)을 처리한 뒤에 유시(酉時:오후5~7시)에 관아로 올라오니
여희좌(呂姬佐)와 권극평(權克平)이 와 있었다.
〖초8일 기유〗맑다가 밤에 비 옴.
객사(客舍)에 앉아서 군관 장교(將官)들의 활쏘기에 시사(試射)를 했다.
소지(所志)30권(卷)과 공사(公事)10장(丈)과 단자(單子:소지류(所志類)에 속하는 문서인데
대개 사대부가 친히 관사(官司)에 올리는 것으로,
소장(訴狀) 또는 청원서의 성격을 지님)5장(丈)을 처리하고 신시(申時:오후3~5시)에 관아(官衙)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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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2월 7일
사헌부에서 단성 현령 이무림의 체차를 청하다.不允
함경 감사·남병사가 가을파지가 오랑캐의 정세에 근거 치보하였음을 아뢰다.
원주에서 기상의 변괴가 있었음을 강원 감사가 아뢰다.
光海君 8년 2월 8일
경기 수사 한희길이 지중추부사를 사직하다. 병조 판서의 차자에 대해 간병하고 속히 조정에 나오도록 명하다.
단성 현감 이무림을 체차하고 대간·시종을 역임한 자로 뽑아 보내게 하다.
이조에서 총무 주문을 가지고 갈 사람으로 신익수를 아뢰다.평안 감사가 의주 부윤의 죄상을 조사한 내용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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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9일 경술〗늦게 갬.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10권(卷)과 공사(公事)10장(丈)을 처리하고 미시(未時)에 내아(內衙)로 돌아왔다.
〖10일 신해〗맑음.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11권(卷)과 공사(公事)10장(丈)을 처리하고 미시(未時)에 내아(內衙)로 돌아왔다.
〖11일 임자〗맑음.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10권(卷)과 공사(公事) 7장(丈)을 처리하고 미시(未時)에 내아(內衙)로 돌아왔다.
〖12일 계축〗맑음.
정청(正廳)에 앉아있으니(중국에 같이 갔던 역관인)강충립(康忠立)이 왔다.
소지(所志)20권(卷)과 공사(公事)10장(丈)을 처리했다.
〖13일 갑인〗맑으나 바람이 붐.
어머니가 행차(行次)하셔서 약목(若木)에서 주무시고 오신다기에 유등(柳等)까지 수 리(里)를 마중 나가서 모시고 왔다.
작은 숙부(季父=金山虎281)와 이수(而粹=金得淸282)도 왔다.
관아(官衙)에 모시고 종일 이야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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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2월 9일
형조의 청에 따라 대전 별감 이승록을 정죄하게 하다.
윤시준·윤간 등에게 관직 제수하는 일에 대해 이조에 조사하게 하다.
박승종이 사직소를 올려 병세로 직무 수행의 불가함을 아뢰다.교리 유활수찬 유여항을 불러 홍문관에 입직하게 하다.
양성의 진사 이원서가 상소하여 옥사의 국문을 속히 완결지을 것을 청하다.
유생 정심 등이 옥사 속결에 대해 상소하다.
光海君 8년 2월 10일
관학 유생 정심 등의 상소에 대해 임금이 유념하겠다고 답하다.
의주 부윤 박엽의 일을 조사한 계본을 다시 올리게 하다.우의정의 차자에 대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光海君 8년 2월 11일
전 응교 이정원이 상소하여 자신을 무함한 이해와 대질시켜 줄 것을 청하다.
光海君 8년 2월 12일
사은사 김권·이형욱,사장관 유여각이 연경에 들어가다. 사간원이 강화 부사의 체차·요새지 구축에 대해 아뢰다.
光海君 8년 2월 13일
비변사 낭청 유세온이 상소하여 대마도에 가서 정탐해 올 것을 청하다.
수의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은 집에서 헌의하게 하다. 사간원이 강화 부사의 체차 등을 아뢰니 논하지 말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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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을묘〗맑음.
정청(正廳)에 앉아서 소지(所志)22권(卷)과 공사(公事) 7장(丈)을 처리하고 미시(未時)에 내아(內衙)로 돌아왔다.
〖15일 병진〗맑음.
정청(正廳)에 앉아 있으니 이평사(李評事: 李之英)와 이평사(李評事)의 아들이 와서 이야기했다.
느닷없이 선전관(宣傳官283)유세증(兪世曾)이란 자가 갑자기 점심을 내 오라고 해서 음식을 가지고 간 하인을 때렸다.
소지(所志)20권(卷)과 공사(公事)10장(丈)을 처리하고 미시(未時)에 내아(內衙)로 돌아왔다.
저녁에 도사(都事284)가 왔다.
〖16일 을묘〗맑음.
절애당(節愛堂)에 앉아서 소지(所志)19권(卷)과 공사(公事) 7장(丈)을 처리했다.
저녁에 도사(都事284)와 이야기를 하다가 닭이 울 무렵에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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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2월 14일
의주 부윤 박엽을 체직하고 비변사로 하여금 대임을 추천하게 하다.
병조 판서의 차자에 대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사간원이 강화 부사의 일과 연경에 가는 군관의 일을 정계하다.
강화 부사 조효남을 체차하고 대임을 뽑아 보내게 하다.
光海君 8년 2월 15일
전 전한 박재가 상소하여 무함을 받아 원통함을 아뢰다.
도순검사 이경전과 종사관을 보내어 하삼도의 군무를 살피게 하다.
소나무 심는 일에 거역하는 사람들을 엄히 조사하게 하다 ○ 우의정이 사직하는 차자를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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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무오〗맑음.
호조정랑(戶曹正郞)신자방(辛子方=申義立115)이 왔다.
국기일(國忌日)이라서 정청(正廳)에 나가 앉아 집무를 보지 않았다.
저녁에 활집을 꺼내어 자방(子方=辛義立115)이 돌아오기에 활을 몇 순(巡:5矢가 1巡) 쏘았다.
〖18일 기미〗맑음.
자방(子方=辛義立115)이 머물고 있고,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하여 소지(所志)15권(卷)과 공사(公事)11장(丈)을 처리했다.
선수(繕修)도감의 낭청(郎廳285)인 한덕윤(韓德胤)이도 왔다.낮에 신정랑(辛正郞=辛義立115)과 이야기를 나눴다.
첨정(僉正:호조의 종4품직) 이효린(李孝獜)이 이미 지나 간지 여러 날이 지났다.
전충의(全忠義),전경의(全景義)도 이미 와서 묵고 있기에 더불어 술잔을 주고받다가 밤이 깊어서야 마쳤다.
〖19일 경신〗맑다가 잠깐 비가 날리고 그침.
관청(官廳)에 좌정(坐定)했다.
내일의 청명(淸明) 제사(祭祀)를 위해 치재(致齋)하고 있다.
저녁에 잠깐 자방(子方=辛義立115)과 한(韓德胤)이 관아(官衙)에 들어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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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2월 16일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 강화 부사에 합당한 인물을 비변사롤 하여금 추천하게 하다.
겸설서 남유신이 상소하여 무함을 받아 억울함을 아뢰다.
光海君 8년 2월 17일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 의주 부윤의 후보자를 더 추천하게 하다.
동지사가 이달 3일에 북경을 출발한다는 내용의 서목이 올라오다. 국기로 아뢴 것이 없다
光海君 8년 2월 18일
우의정의 차자에 대해 속히 조정에 나올 것을 명하다. 사간원이 문정전 중건의 불가함에 대해 아뢰다.
도순찰사 이경전이 체차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문정전의 사각기둥을 원형으로 바꾸는 일·좌향에 대해 논하다.
光海君 8년 2월 19일
시문룡·관상감 제조 등으로 하여금 목릉·유릉·성릉의 형세를 보고 오게 하다.
검은 도포에 검은 초립을 쓰고 대궐을 출입한 대전 별감 임경신을 추고하게 하다.
사간원이 문정전을 허물지 말 것을 청하다. 문정전의 동향·둥근 기둥의 사용의 일을 논하지 말게 하다.
비변사에서 강화 부사의 후보자에 전 부사 권반을 추천할 것을 청하다.
병조의 청에 따라 굶주리는 당번 군사에게 쌀을 지급하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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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신유〗맑음.
제사를 지낸 후 자방(子方=辛義立115)과 한(韓德胤)등이 모두 관아로 와서 나를 방문하기에 매우 늦었지만
이별의 술잔을 나눴다.
오후에 동헌(東軒)에 좌정(坐定)하여 소지(所志)10권(卷)과 공사(公事) 7장(丈)을 처결하고
유시(酉時:오후 5~7시)에 돌아 들어왔다.
〖21일 임술〗맑음.
알묘(謁廟: 사당에 참배 함)하려고 천곡(川谷)서원의 훈도(訓導)인 진사(進士)를 따라가니
김주(金輳),김축(金軸),도세순(都世純),송주빈(宋周賓),여황(呂惶),여명(呂熐)등 7~8명이 서원에 들어와 있었다.
오후에 동헌(東軒)에 앉아서 소지(所志) 8권(卷)과 공사(公事) 7장(丈)을 처결하고 유시(酉時:오후 5~7시)에 들어왔다.
〖22일 계해〗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하고 집무했다.
〖23일 갑자〗맑음.
인주(仁州=仁川)부사[府佰]가 왔다.
〖24일 을축〗비.
이전(移轉)된 조곡(租穀)300석(石)을 인주(仁州)서 받아 갔다. 오후에 동헌(東軒)에 좌정(坐定)해 집무했다.
〖25일 병인〗맑음. 정청(正廳)에 앉아서 공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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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2월 20일
사간원이 문정전을 허물지 말고 중수하기를 청하다-이미 유시하였으니 논하지 말게 하다.
이조에서 윤시준·윤간의 상피로 문제된 윤시준에 분도총부사를 제수하고 체차하지 말게 하다.
光海君 8년 2월 21일
사헌부가 상피법에 따라 윤간·윤시준의 관직을 개정할 것을 청하다-번거롭게 논하지 말게 하다.
시문룡이 세 능의 형세를 보러 갈 때 예조의 당상·성지도 같이 가게 하다.
光海君 8년 2월 22일
병조 판서의 첫번째 사직소를 돌려주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공홍 감사에게 후추 1두를 주게 하다.
光海君 8년 2월 23일
영의정의 차자에 답하여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예조가 좌참찬 송순이 죽어 다음날까지 조회·저자의 정지를 청하다.
함경 감사·북병사가 종성에서 누루하치의 많은 정병이 나왔음을 아뢰다.
사간원이 노쇠한 덕원 부사 정상철의 체차를 청하다
光海君 8년 2월 24일
태백이 낮에 나타나다.송순에게 특별히 부의를 보내라고 전교하다.정기룡의 상소를 비변사에 내려 회계하게 하다.
사예 박홍도가 상소하여 체차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2월 25일
능침을 쓰기에 합당한 곳이 있는지 시문룡과 성지에게 살피게 하다. 주서 김시주가 좌의정을 만나고 온 것을 아뢰다.
우의정의 열다섯 번째 사직소에 답하여 속히 출사할 것을 명하다.
사헌부가 죄인을 마음대로 수금한 의금부 낭청의 파직을 청하다.덕원 부사를 체차하고 무관 중에서 차출하게 하다.
光海君 8년 2월 26일
당상 무신을 소집하고 파산된 자도 서용할 것을 의논하게 하다.
남병사가 가을파지에 대해 첨사 유몽룡이 치보한 것을 아뢰다.
승정원이 병조 판서 박승종에게 하유하여 병무 주관에 힘쓰게 할 것을 청하다.
사간원이 속히 경연을 열어 신료를 자주 접견할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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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병인〗맑음.
어버이를 뵈러(覲親)길을 나서서 이언영(李彦英)께 들렀다가 한강(寒岡184)선생께 인사드리고 팔거(八莒)에서 잤다.
〖27일 무진〗맑음.
효령(孝寧)에서 쉬고,군위(軍威)에 투숙(投宿)했다.주주(主倅)가 나와서 영접한다.
〖28일 기사〗맑음.
안평(安平)의 오봉성(吳鳳聖)네 집에서 쉬고,또 일직(一直)서 한 번 더 쉬고,
안동(安東) 북문 밖의 업장(業長)네 집에 투숙(投宿)했다.
〖29일 경오〗맑음.
서촌(西村)의 딸과,제수(弟嫂)를 차례로 만나보고,남양(南陽)의 모든 친구들이 있는 서재(書齋)에 투숙했다.
이형보(李馨甫=李茳53)와 이여첨(李汝瞻=李埁15)을 모두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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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2월 27일
함경 감사가 노추 군병의 정세에 대해 아뢰다. 박승종이 상소하여 병세가 깊으므로 체직을 청하다.
비변사가 북도 순검사에 이정신, 남도 순검사에 유대정을 아뢰다. 유학 우필량 등이 상소하여 이원서의 징죄를 청하다.
사과 한영이 상소하여 국청으로 하여금 국론을 속히 정해야 함을 아뢰다.
사헌부에서 속히 도목 정사를 행할 것 등을 청하다.不允
사간원에서 문·무신 중에서 장수를 양성할 것을 청하다-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다.
光海君 8년 2월 28일
입직을 하지 않은 수찬 남이준을 추고하게 하다. 패초에 불응한 수찬 유여항·부수찬 유여각을 추고하게 하다.
숨겨야 할 일들은 조보에 내지 말라고 전교하다. 비밀의 일 3건을 합계하다.
사헌부가 전계한 윤간·윤시준의 관직 개정하는 일을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2월 29일
우부승지가 통제사를 즉시 차출하여 보낼 것을 청하다.황제의 칙서를 받고 종묘에 고하는 것 등의 일을 의논하게 하다.
사헌부가 승문 박사 임숙영의 관작삭탈을 청하다.파직하다-사헌부가 신계(新啓)하기를,
“승문 박사 임숙영(任叔英)은 본래 음흉하고 괴벽스런 자인데,
전일에 과방목(科榜目)에서 삭제시킨 전교를 분히 여기고 사특한 의논에 빌붙어 임금을 비방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통분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또 불만을 품고 있는 무리들과 더불어 사실이 아닌 말을 날조하여 대현(大賢)을 모함하였는데
음험하고 참혹하였습니다.
그동안의 죄악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아 임금을 모함하고 어진이를 해친 죄를
다스리소서.”하였다 임숙영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임숙영은 널리 배우고 문장에 능하여 세상의 추앙을 받았는데】
악을 너무나 미워하고 세상일을 분개한 나머지 항상 다리병을 핑계대고 전후 조정의 의논에 모두 참여하지 않았다.
또 학도들을 많이 모아 놓고 꺼림없이 담론하였으므로 당시 무리들의 원수가 되었다.
이때 이이첨 등이 조계(曺溪)에 조식(曹植)의 서원(書院)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임숙영이 이 소식을 듣고 비웃으며 말하기를
‘조계에 조식의 서원을 세운다면 공덕리(孔德里)에는 공자(孔子)의 서원을 세워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 을묘 식년 회강(乙卯式年會講) 때 모두 당시 권력가의 자제만이 뽑혔는데,
이는 글자 표시로 서로 내통하여 미리 출제되는 대문(大文)을 알고 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한찬남(韓纘男)의 집 담벽에 그의 아들이 미리 문제를 알고 강하여 합격한 것을
풍자하는 글을 붙였는데,
〈 그 내용에“경서(經書)에 밝은 어진 선비가 지금 많으니 이백년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네.
제 소원대로 따라주어 칠서(七書) 대문 통했지만 그 안의 사정을 귀신은 알리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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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
〖초1일 신미〗맑음.
만퇴(晩退)에서 쉬고, 곧바로 도천(刀川:갈내)으로 어버이를 뵈러 갔다.
〖초2일 임신〗맑음.
도천(刀川)에 머문다.
봉화현감이 달려와서 한잔 마시고는 돌아갔다.
〖초3일 계유〗맑음.
수연(壽筵)을 펼쳐 헌작(獻酌)을 했다.
〖초4일 갑술〗맑음.
식후(食後)에 만퇴(晩退)로 돌아와서 잔다. 태수(현감)가 사례하려고 들어왔다.
〖초5일 을해〗맑음.
온계(溫溪)로 출발해서 헌수(獻壽)를 드렸다.
〖초6일 병자〗맑음.
분천(汾川:부내)의 며느리와 예안현감을 차례로 만나보고, 또 지삼(知三)의 숙부모(叔父母)를 배알하고,
권사간(權司諫=權春蘭224)도 찾아뵙고,
저물어서야 안동 (安東)서문(西門) 밖의 금령가(金寧家)의 향소(鄕所286)에 투숙했다.
권동(權訔)이 술을 가지고 와서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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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3월 1일
함흥·북청·경성의 판관을 체차하지 말게 하다.
光海君 8년 3월 3일
예조가 칙서를 맞이하고, 고묘(告廟)·진하하는 일을 임금에게 재결하기를 청하다.
예조의 이이첨, 南瑾 李瑗등이 변무의 일로 심희수의 놀림을 받았다 하여 대죄를 청하다.
양사가 비밀에 관계된 세 가지 일을 합계하였으나 논하지 말게 하다.
사간원에서 임금이 대신들의 논의를 따르지 않음을 아뢰다
光海君 8년 3월 4일
진주의 유학 하경소가 상소하여 장수를 등용하여 우환에 대비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에서 갑산 부사 한인의 체차 등을 아뢰다 ○ 사간원이 세 고을의 수령에 관한 일 등을 정계하다.
光海君 8년 3월 5일
고묘와 진하의 일을 거행하지 말게 하다. 양사가 영돈녕부사 심희수의 삭탈관작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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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7일 정축〗맑음.
안동 부사(府使)와 판관(判官)이 와서 만났다.이번 행차에 사위인 이모(李慕10)와 정적(鄭迪)이 따라 왔다.
〖초8일 무인〗맑음.
군위(軍威)에서 숙박함.
〖초9일 기묘〗맑음.
정적(鄭迪)은 한강(寒岡)선생께 가고, 인동(仁同)서 쉬고,또 약목(若木)서 쉬고,본현(本縣=新安)으로 돌아왔다.
〖10일 경진〗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했다.
〖11일 신사〗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공무를 보다.
이조정랑 오융보(吳隆甫=吳汝穩61)가 말미를 받아 지나가기에 밤새 얘기하다가 닭이 울 무렵에야 파(罷)했다.
〖12일 임오〗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했다. (황유장의)동생 황유문(黃有文287)이 왔다.
〖13일 계미〗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공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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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3월 6일
김제남의 집과 봉자전 사후소를 내척간하다.
관학 유생 심지청 등이 상소하여 대현의 충성을 살필 것을 아뢰다.
가문이 비천하고 행실이 좋지 않은 분병조 좌랑 전영을 체차하다.
양사가 영돈녕부사 심희수의 삭탈 관작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3월 7일
관학 유생 심지청의 상소에 대해 임금이 유념할 것을 답하다.승정원이 고묘하고 진하하는 일을 거행할 것을 청하다.
양사가 영돈녕부사 심희수의 삭탈 관작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3월 8일
호조 참의 장세철이 상소하여 부역 균등·국가제정 풍족에 대해 아뢰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심희수의 죄에 대해 공론에 따를 것을 청하다.
사헌부,사간원이가 고묘하고 진하하는 일을 거행할 것을 청하다.
양사가 합계하여 심희수를 문외 출송시키는 일에 대해 아뢰다.
우의정의 열여섯 번째 정사에 대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사은사를 대신으로 차임해 보내는 일을 윤허하다.
.光海君 8년 3월 9일
사헌부가 죄인을 숨겨준 혐의가 있는 보은 현감 이양휴의 파직을 청하다.
합사하여 심희수의 삭탈 관작·문외 출송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보은 현감 이양후를 파직하다.
光海君 8년 3월 10일
의금부에서 죄인 이춘기의 수금과 삼성이 교대로 추국할 것을 청하다.
신병이 있는 관원은 상소하지 말고 정사 단자를 올리게 하다.
사은사로 가는 대신을 의논하여 정하게 하다. 합사한 계사는 조보에 내지 말 것을 전교하다.
양사가 합사하여 심희수의 삭탈 관작·문외 출송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병으로 보방했던 죄인 허국을 다시 가두어 정죄하게 하다.
光海君 8년 3월 11일
죄인 허국을 보방했던 것으로 좌승지 한찬남이 대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박승종의 상소에 답하여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유학 최기문이 상소하여 팔도에 대동법을 속히 시행할 것을 청하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심희수의 죄에 대해 공론에 따를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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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갑신〗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했다.
〖15일 을유〗비.
망궐례(望闕禮:초하루와 보름에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를 행했다.
〖16일 병술〗맑음.
청암(靑巖)의 검사(檢屍)사건으로 가 보니 지례(知禮)현감도 와 있었고,유문(黃有文287)이 배행(陪行)했다.
〖17일 정해〗맑음.
살해당한 사람의 친척[屍親]과 죄인(罪閑)이 선처해 달라는 소장(訴狀)을 올렸다.
돌아오는 길에 헌암(佡巖)에서 숙부와 정자(正字:홍문관의 정9품직) 및 진사(進士)들과 모두 모여 이야기했다.
〖18일 무자〗맑음.
정청(正廳)에 앉았다.통제사(統制使)의 상여(喪輿)가 도착했다.차사원(差使員)과 사천(泗川)군수도 왔다.
김행(金行)이 처음으로 왔다.
〖19일 기축〗비.
상여(喪輿)가 늦게 출발했고,오 이조정랑(吳正郞=吳汝穩61)이 박열(朴烈)네 집에서 쉬고,
그 아들인 익황(吳益愰)이도 배행(陪行)했다.
〖20일 경인〗맑음.
화원(花園)에서 방백(方伯)을 나가 맞았다.같이 추국(推鞫)하는 일로 대악(大岳)으로 가서 향당(鄕黨)에 묵었다.
손대인(孫大仁)과 이사경(李士慶127)이 와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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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3월 12일
사헌부가 윤간·윤시준의 가자를 개정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조유도(趙有道)를 사인(舍人)으로,유약(柳瀹)을 헌납으로,유충립(柳忠立)을 보덕으로,한영(韓詠)을 문학으로,
이홍엽(李弘燁)을 필선으로,이괄(李适)을 제주 목사(濟州牧使)로,박종주(朴宗胄)를 설서로 삼았다.
光海君 8년 3월 13일
합사하여 심희수에 대한 일을 아뢰니 논하지 말게 하다
光海君 8년 3월 14일
합계하여 심희수에 대한 일을 아뢰니 논하지 말게 하다.
홍문관이 차자를 올려 심희수의 죄에 대해 공론에 따를 것을 청하다.
사간원이 정언을 체차하여 합사에 동참하게 할 것을 청하다.
光海君 8년 3월 15일
우의정 정창연이 열일곱 번째 사직을 청하다. 박진장을 잉임시켜 내려보내게 하다.
光海君 8년 3월 16일
권진을 풀어주고 직첩을 도로 주라고 명하다.
유충립(柳忠立)을 사복시 정으로,이지화(李之華)를 대교로,한급(韓昅)을 검열로,유화(柳韡)를 정언으로 삼았다.
光海君 8년 3월 18일
사신을 잘못 추천한 이조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게 하다.
병조 판서 박승종의 첫 번째 정사를 돌려주며 출사할 것을 명하다.
우의정의 정사에 대해 병이 나으면 출사할 것을 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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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신묘〗맑음.
그냥 머물다.객사(客舍)로 옮겨서 잤다.
〖22일 임진〗맑음.
관아(官衙)로 돌아왔다.
하빈(河濱)에 있는 이정자(李正字),즉 평사(評事)의 집에서 점심을 먹는데,이종효(李宗孝)가 와서 알현한다.
〖23일 계사〗흐림.
감동천(監董川) 제방(堤防)에 있는 남정자(南亭子)에 앉아서 집무했다.
〖24일 갑오〗비.
동헌(東軒)에 앉아 집무했다.방백(方伯)이 팔거(八莒)를 지나는데도 나가서 마중하지 않은 공형(公兄:아전)을 벌했다.
〖25일 을미〗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업무를 보았다.
〖26일 병신〗맑음.
정청(正廳)에 앉아 공무를 보았다.
〖27일 정유〗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했다.
〖28일 무술〗맑음.
정청(正廳)에 앉아 집무했다.
〖29일 기해〗비.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공무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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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3월 19일
이조 판서 한효순의 차자에 답하여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사헌부에서 문무를 겸비한 자를 뽑아 서쪽 변방에 대비할 것을 청하다.
光海君 8년 3월 20일
사방이 컴컴하여 먼지비가 내리는 듯하다.
光海君 8년 3월 22일
양사가 합계하여 심희수의 일에 대해 아뢰니 논하지 말게 하다.
홍문관이 차자로 심희수의 죄에 대해 공론에 따를 것을 청하다.
사헌부가 사대부의 가속으로서 성을 나간 자는 엄벌할 것을 아뢰다.
光海君 8년 3월 23일
창경궁을 지을 때 드는 잡물을 올려 보내지 않은 감사를 추고하게 하다. 우의정이 열여덟 번째 사직을 청하다.
안개가 자욱하게 끼다.
光海君 8년 3월 24일
성지·시문용 등으로 하여금 인왕산 아래에 새 궁궐터를 잡게 하다.
영의정이 새 궁궐터 잡는 일에 관상감 제조 박상구를 동참하게 할 것을 청하다.
光海君 8년 3월 25일
선수 도감의 낭청·감역관을 빈 자리가 있는 대로 실직을 주게 하다.
양사가 심희수 논죄의 일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한영의 상소에 대해 유념하여 처리하겠다고 답하다.
이유록(李綏祿)을 사인으로,이상항(李尙恒)을 사서로,이정원(李挺元)을 부응교로 삼았다.
光海君 8년 3월 26일
사헌부가 응교 박정길의 직첩을 거두고 추고할 것을 청하다.
光海君 8년 3월 27일
윤연현을 탄핵한 정조·윤인 등이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3월 29일
승정원이 민심을 안정시켜야 함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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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 】
〖초1일 경자〗아침에 비 오다가 저물녘에 그침.
〖초2일 신축〗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를 했다.
〖초3일 임인〗맑음.
절애당(節愛堂)에 좌정했다.방백(方伯)의 관문(關文)이 왔는데,
오는 8일 오정자(吳正字)가 행하는 경연(慶宴:경사스러울 때 베푸는 잔치)에 간다는 것이다.
〖초4일 계묘〗맑음.
정청(正廳)에 앉아서 사위인 효사(孝思=李慕10)의 전별연(餞別宴)을 했다.
〖초5일 갑진〗맑음.
효사(孝思=李慕10)가 서울로 떠났고,감사(方伯)가 우리 현(縣)에 들어왔다.
손경징(孫景澄)과 신한용(辛翰龍)도 왔으며, 방백(方伯)을 배행한 사람은 김천 찰방(金泉察訪)인 정숙(鄭潚)이었다.
〖초6일 을사〗맑음.
감사[方伯]가 새벽에 출발해서 양장(羊膓)에서 자고 경축연(慶祝宴)은 뒤로 물려서
9일 쯤으로 한다는 관문(關文)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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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4월 1일
승정원이 영칙·고묘·진하 등의 일을 거행할 것을 청하다.
수원 부사 윤중삼·전 삼척 부사 김존경에게 가자하다.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박경업에 관한 일을 아뢰니 논하지 말게 하다.
사간원이 윤영현의 일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사간원이 철거지에서 행패를 부린 흥안군·경평군의 추고를 청하다-논하지 말게 하다.
사헌부가 윤영현의 삭직을 청하다. 합사하여 심희수에 대한 일을 아뢰니 논하지 말게 하다.
光海君 8년 4월 2일
예조에서 과거 시험의 부정에 대해 아뢰다.
합사하여 심희수를 문외 출송시킬 것을 아뢰다.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박내장(朴來章)을 병조 좌랑으로,남궁경(南宮㯳)을 필선으로,유활(柳活)을 교리로,유여각(柳汝恪)을 수찬으로,
이대엽(李大燁)을 전한으로,박정현(朴鼎賢)을 강원 감사로,김지남(金止男)을 사은사로,권경우(權慶祐)를 동지사로,
목대흠(睦大欽)을 부사로,정도(鄭道)를 제용감 정으로,이홍엽(李弘燁)을 장악원 정으로,임성지(任性之)를 부교리로,
정홍원(鄭弘遠)을 동지사 서장관으로,유효립(柳孝立)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光海君 8년 4월 3일
병조 판서 박승종이 차자를 올려 병이 있으니 체차하기 청하다.
양사가 합사하여 세 적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가 개성 도사 윤영현을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합사하여 심희수를 문외 출송시킬 것을 아뢰다.
光海君 8년 4월 5일
승정원이 경상감사 성진선(成晉善)의 추고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가 개성 도사 윤영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공성 왕후 추숭의 일로 증광시를 베풀어 김세렴 등 41인을 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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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7일 병오〗비.
감사[方伯]는 정승(政丞=정인홍)께 아뢰느라 술 마시기를 두려워한다.
오늘은 국기일(國忌日)이다.나와 김경적(金景迪)과 손창원(孫昌原)과 사시헌(四時軒)의 방에서 같이 잤다.
〖초8일 정미〗맑음.
오늘로 관문(關文)이 왔기에 인시(寅時:오전3~5시)에 경축연(慶祝宴)에 가려고 나도 일어나자마자 반찬거리를 보내고
뒤따라 출발했다.
가다가 문연정사(文淵精舍)에서 잠시 쉬었다가 기다리는 반찬거리 수송을 보내놓고,
도진(桃津)으로 들어가니 금방 감사[方伯]가 도착하고,초계(草溪)군수도 이미 와 있다.
날이 저물도록 그 연회는 진행되어 닭이 울 무렵에야 파(罷)했다.
〖초9일 무신〗맑음.
방백(方伯:감사)은 대구(大丘)로 가고, 나와 초계(草溪)군수와 고령(高靈)군수는 남아서 이야기했다.
주인이 본관(本官)에게 작은 술자리를 마련해서 저녁에야 돌아와서 현의 경내(境內)에 있는 대양촌(大陽村)에서 잤다.
〖10일 기유〗맑음.
거의 한낮이 되어서 관아로 돌아왔다.저녁에 사시헌(四時軒)에 갔었다.
〖11일 경술〗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했다.김경적(金景迪)이 고령(高靈)서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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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4월 8일
병조 판서 박승종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양사가 합사하여 세 적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가 개성 도사 윤영현을 사판에서 삭제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경운궁 시위에 불성실한 해당 관원들을 징계하다. 뇌물을 받은 해미 현감 남탁을 파직하다.
光海君 8년 4월 9일
사헌부에서 임금의 진강·인재 등용·백성 진휼 등에 대해 아뢰다.
승정원이 내일 칙서를 맞이하고 고묘할 것을 청하다.
정조·김질간 등이 직무 불성실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우의정 정창연의 스무 번째 사직소에 답하여 우선 본직을 체차하기로 하다.
光海君 8년 4월 10일
대사헌 유간이 직무 불성실을 이유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쌀 비축에 공로가 있는 홍사효·정효성·이유경을 논상하다.
합사하여 심희수를 문외 출송시킬 것을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다.
합사하여 윤삼빙·신설·박경업에 관한 일을 아뢰니 논하지 말게 하다.
사헌부가 개성 도사 윤영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부수찬 유효립이 양사에서 논의 절차의 부당함을 아뢰고 사직을 청하다.
光海君 8년 4월 11일
좌의정 정인홍의 차자에 답하여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대사간 정조 등이 비난을 받은 것으로 체차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대사헌과 대사간 이하가 물러나 물론을 기다리다. 문과 합격생을 발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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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신해〗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했다.전공(全公)을 보내 정승(政丞)댁에 먹을거리인 쌀 2섬과 기타 반찬거리를 보냈다.
연만(衍晩)이 경기[驚癎]를 한다.
〖13일 임자〗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했다.홍관해(洪觀海)가 왔다.
〖14일 계축〗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를 했다.
〖15일 갑인〗맑음.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국기일(國忌日)이라 정청에 나가 앉지 않았다.
〖16일 을묘〗맑음.
가는 날[衙日]을 뒤로 물렸다.정청(正廳)에 좌정(坐定)했다.
〖17일 병진〗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공무를 보다.
〖18일 정사〗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했다.차남 주국(柱國)이와 손우(孫祐:孫以吉)도 왔다.
〖19일 무오〗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했다.김시주(金是柱196)가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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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4월 12일
전한 이대엽 등이 비난을 받은 것으로 체차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홍문관에서 양사를 모두 출사시키라는 차자를 올리다.
남성신(南省身)을 봉교로,서국정(徐國楨)을 검열로,김세렴(金世濂)을 예조 좌랑으로,이이첨(李爾瞻)을 내섬시 제조로,
허균(許筠)을 사직 제조(社稷提調)로 삼고,
증산 현령 이여검(李汝儉)은 문과 갑과(甲科)에 급제하였으므로 통정의 자급을 더해주고,
황덕부(黃德符)를 겸설서로 삼았다.
【이여검은 문자를 모르는데 이진(李進)에게서 차술(借述)하여 높은 등급을 절취한 것이었다.
당하관으로서의 자급이 다 차서 당상관의 자급으로 오른 것인데,
시론에 아부하여 삭질(削秩)의 논핵을 면했으므로 공의가 매우 놀라워했다.】
光海君 8년 4월 13일
우부승지 유희량이 상소를 물린 일로 대죄하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양사가 유효립의 비난을 받은 것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4월 15일
전 교관 남홍점이 시폐에 관한 상소를 승정원에 올리다.
대관은 피혐하는 즉시 처치하게 하다.국기로 인해 아뢴 바가 없다.홍문관의 청에 따라 양사를 모두 출사시키다.
光海君 8년 4월 16일
사헌부가 부수찬 유효립·형조 정랑 정감의 파직을 청하다. 사간원의 청에 따라 유효립을 체차하게 하다.
합사하여 심희수를 속히 문외 출송시킬 것을 청하다.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합사에 답하여 심희수를 출송시킬 것을 윤허하다.
光海君 8년 4월 17일
병조 판서 박승종이 열네 번째 차자를 올려 체차를 청하다.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충익부를 충익위라 개명하고 윤번으로 입직하게 하다.
○ 형장을 남용한 병조 좌랑 박내장을 파직하다 ○ 사헌부와 사간원이 유효립의 일을 정계하다
光海君 8년 4월 18일
사간원이 옥사·송사의 판결을 법전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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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기미〗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공무(公務)를 보다.
〖21일 경신〗맑음. 처(妻:黃氏부인=황희 정승의 현손,司果 賀의 딸)의 기일(忌日)이라 정무를 보지 않았다.
(正廳에 나가 앉지 않았다.)이지화(李之華174)와 동생인 이지영(李之英)이 지나갔다.
〖22일 신유〗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했다.이지화(李之華174)가 와서 사시헌(四時軒)에서 만났다.
〖23일 임술〗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공무를 보다.
〖24일 계해〗맑음.
사시헌(四時軒)에 좌정(坐定)해 집무했다.
〖25일 갑자〗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공무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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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4월 19일
병조 판서의 차자에 답하여 속히 국문에 참여할 것을 명하다.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청하다. 사간원이 작상을 신중히 내릴 것을 청하다.
光海君 8년 4월 20일
적도 체포에 미진한 포도 대장·종사관을 추고하게 하다.병조 판서 박승종이 열다섯 번째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다.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박자흥(朴自興)을 승지로,민형남(閔馨男)을 형조 판서로,이욱(李稶)을 참지(參知)로,이경전(李慶全)을 판중추부사로,
유희량(柳希亮)을 형조 참의로,이식(李植)을 북평사(北評事)로 삼았다.
光海君 8년 4월 21일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나이 80이 된 허진·윤근수에게 가자 또는 은전을 베풀게 하다.
光海君 8년 4월 22일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光海君 8년 4월 23일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에서 복식·기물에 차별하여 나라의 기강을 세울 것을 청하다 ○ 정양윤(鄭良胤)을 정언으로, 조유도(趙有道)를 전한으로, 유여항(柳汝恒)을 수찬으로,이유록(李綏祿)을 응교로,한옥(韓玉)을 헌납으로 삼았다.
光海君 8년 4월 24일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백성을 침학한 황해 감사 윤조원을 추고하게 하다.사헌부가 작상을 신중히 하라는 계는 윤허하지 않음을 전교하다.
사헌부가 아뢴 의장 등의 일을 해당 부서에서 의논하게 하다.
수령·변장의 작상에 대해 어사로서 조사하는 일은 대신에게 의논하게 하다.
光海君 8년 4월 25일
임금이 배전을 거행할 때 연고자 이외에 문무 백관은 모두 참석하게 하다.
정배지에서 도주한 죄인들을 추적하여 잡게 하고,관할 수령을 파직하다.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니 윤허하지 않다.
사헌부가 황해도 관찰사 윤조원의 파직을 청하다.
이대엽(李大燁)을 사인으로,민몽룡(閔夢龍)을 좌참찬으로,목취선(睦取善)을 병조 좌랑으로,
유여각(柳汝恪)을 헌납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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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을축〗맑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했다.
숙부(叔父)가 봉화(奉化)로 돌아가고,향소(鄕所286)를 둘러보고,돌아오다가 만죽(萬竹)에서 잤다.
〖27일 병인〗맑음.
국기일(國忌日)이라 정무를 보지 않는다.
(정청에 나가 앉지 않음)대구부사(大丘府使)가 왔다.문흥주(文興周)씨도 왔다.
〖28일 정묘〗맑음.
대구(大丘)부사와 하득호(河得湖)의 옥사를 같이 추국(推鞫)했다.
〖29일 무진〗맑다가 흐려져 또 바람이 불고 밤에 비가 오다.
이 때 가무는 정도가 매우 급박했었는데 이 비를 얻었으니 기쁘다.
〖30일 기사〗비가 흠뻑 왔다.
늦게 정청(正廳)에 좌정(坐定)해 집무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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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
光海君 8년 4월 26일
양사가 합사하여 윤삼빙·신설 등을 국문하여 정죄할 것을 아뢰다.
사헌부가 황해도 관찰사 윤조원의 파직을 청하자 논하지 말게 하다.
사헌부가 납곡 등으로 상가받은 사람이 청요직에 끼지 못하게 하라는 일을 그치다.
光海君 8년 4월 27일
알성한 후 환궁할 때 헌축·결채하는 일의 거행을 강구하게 하다.영의정의 차자에 대해 사직하지 말 것을 당부하다.
국기로 양사의 계사를 잠시 정지하다
光海君 8년 4월 29일
기로·교방의 헌축과 가로·병문 등에 결채하는 것을 거행하게 하다. 친제의 재계 때문에 아뢴 바가 없다.
光海君 8년 4월 30일
정릉에게 산음 현감을 제수하여 조부인 정인홍을 봉양하게 하다.
한급(韓昅)을 검열로,남근(南瑾)을 대사간으로,윤영현(尹英賢)을 의빈 도사(儀賓都事)로,허진(許晉)을 판중추부사로,
권진(權縉)을 수원 부사로,박정길(朴鼎吉)을 검상으로,금개(琴愷)를 장령으로 삼았다.
수원 부사 권진에게 자헌 대부를 가자하다.
光海君 8년 5월 1일
의금부가 법에 조율하지 않고 이후재를 정배시키라는 명령은 잘못임을 아뢰다.
장악원이 침향산의 보수에 필요한 물품을 도감의 이름으로 조달할 것을 청하다.
光海君 8년 5월 2일
유생·기로·교방의 가요를 환궁할 때 같이 올릴 것을 아뢰다.
예조가 원로 신하를 우대하라는 전교에 대해 윤근수만은 이·호가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다.
양사가 삼적의 일과 비밀에 대한 일을 합계하였으나 따르지 않다.
光海君 8년 5월 3일
병조가 분총부 낭청의 지위 개선을 청하다.
장악 도감이 대례의 정재 연습을 위해 기생·공인을 내보내지 말 것을 청하다.
전례에 따라 헌축할 때에 잡인들의 접근을 엄금하라고 전교하다.
야대청·환경전의 수리, 왕자 사부청 등의 조성을 명하다.
청기와를 굽는 번와소 감역관의 요청대로 소용될 잡물을 조달하게 하다.
옥구 백성의 소망대로 선정을 한 현감 박영서를 유임시키다.
光海君 8년 5월 4일
병중인 영의정을 위해 대례를 물리고 내의를 보내 간병하게 하다. 병조에 도성의 보수를 명하다.
창경궁 건축에 필요한 당채색의 조달을 위해 화원을 요동으로 보내다.
보루각 도감이 세석·대부등·강철 등의 조달 방법을 아뢰다. 햇무리가 여러 번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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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공13세손 김 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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