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트슈타이너와 ABO 혈액형의 유래
[이름들의 오디세이] 이름들의 오디세이(75)
2020.01.28 10:49 박지욱 신경과 전문의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인플루엔자가 돈다. 인플루엔자 환자들은 간단한 검사를 통해 자신이 A형에 걸린 것인 지 B형에 걸린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인플루엔자는 A형, B형, C형이 있는데 A형은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할 수 있는 유형이고, B형은 지역적으로 돈다. C형은 사람에게는 거의 없어 무시한다.
바이러스성 간염은 A형, B형, C형, D형, E형이 있다. 간염을 일으킨 바이러스의 이름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각각의 바이러스를 구분한 것은 경과나 예후가 다르기 때문이다. 혈우병도 A형과 B형이 있는데, 발병 기전이 다르기 때문에 구별한다.
혈액형도 A형, B형, AB형, O형이 있다. 이런 구분은 적혈구 표면의 항원성에 따라 편의상 붙였다. 지금도 유용하게 쓰는 ABO 혈액형은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처음으로 정해졌다.
1900년, 비인대학교의 병리-해부학 연구소에서 32세의 젊은 과학자가 시험관 속에 피를 섞는 실험을 하다가 아주 특이한 현상을 발견한다. 연구소로 보내온 여러 피들을 무작위로 뒤섞어보니 어떤 경우에는 피가 엉겨 붙고(응집) 어떤 경우에는 멀쩡한 것이 아닌가?
물론 서로 다른 몸에서 얻은 피들을 섞으면 엉겨 붙는 현상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동물과 사람의 피를 섞거나, 환자와 건강한 사람의 피를 섞으면 엉겨 붙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건강한 사람들의 피를 섞어보았는데도 엉겨 붙는다는 점이 새로운 발견이었다. 왜 같은 사람의 피인데도 엉겨 붙는 걸까? 그 이유가 궁금했던 젊은 의사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는 이 문제를 연구해보기로 한다.
카를 란트슈타이너. ⓒ 위키백과
란트슈타이너는 의대를 졸업해 의사가 되었지만 환자를 보는 것보다는 화학이 더 좋았다. 졸업 후에도 여러 대학에서 화학을 새로 공부했다. 비인대학교의 병리-해부학 연구소에서 ‘검시관’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부검을 열심히 했다. 10년 동안 3600여 건의 부검을 했으니 매일 부검한 셈이다.
그러다가 피가 엉겨 붙는 현상에 관심을 가진다. 란트슈타이너는 먼저 자신의 피, 동료들의 피를 뽑았다. 피는 적혈구와 혈장을 분리했다. 그런 다음 서로 다른 피들의 적혈구와 혈장을 섞어 응집현상을 관찰 기록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당연하겠지만 같은 사람의 피에서 얻은 적혈구와 혈장을 섞으면 아무 일이 없이 잘 섞였다. 하지만 타인의 적혈구와 혈장을 섞으면 응집반응이 생길 수도, 안 생길 수도 있었다. 이 이유가 궁금했다. 란트슈타이너는 이 실험을 결과를 도표로 만들어 보았더니 일정한 패턴이 나왔다. 응집 반응을 통해 인간의 혈액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3가지 혈액 집단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이 보였다. 란트슈타이너 이 반응 집단을 A그룹, B그룹, C그룹으로 나누어 불렀다. 다른 사람의 혈장과는 응집하지 않는 자신은 C그룹에 속했다. 이것이 현대적 혈액형의 시작이다.
일단 ABC그룹으로 시작한 혈액형이었지만 C 형(그룹)은 나중에 O형으로 바꾸어 불렀다. 몇 년 후에는 A형과 B형 혈장에 모두 응집 반응을 일으키는 그룹을 발견해 AB형으로 불러 추가했다. 이렇게 우리가 지금도 쓰는 ABO형 혈액형 체계가 확립된다.
하지만 란트슈타이너는 혈액 응집 반응의 원인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세균 감염이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아니면 인간 고유의 성질인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다만, 수혈 때 생기는 이런저런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밝혔다. 무척 중요한 발견이었지만 당대의 반응은 이상하리만큼 싸늘했다.
몇 년 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란트슈타이너의 조국 오스트리아는 패전해 동맹국 독일만큼 심각한 경제난을 겪었다. 가만있다가는 굶어 죽기 딱 좋을 처지가 된 란트슈타이너는 가족을 데리고 네덜란드로 갔다. 헤이그의 작은 병원 검사실에 일자리를 얻어 생계를 근근이 이어갔다. 그러다가 미국 록펠러연구소에서 그에게 일자리를 제안했다.
란트슈타이너는 1923년에 뉴욕으로 이주해 그가 간절히 소망하던 연구 특히, 면역학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다가 스톡홀름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1932년이었고, 30년 전에 발표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생겼길래 30년 전의 연구가 새삼 주목을 받게 된 걸까?
헌혈 포스터. 제주 ‘선녀와 나무꾼’에서. ⓒ 박지욱
수혈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었다. 오래전부터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다는 사실은 상식이었다. 다른 체액과 달리 피는 곧 생명으로 여겼고 우리 몸의 다른 체액과는 다른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17세기가 되면서 피가 심장을 중심으로 온몸을 순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일부 대담한 학자들은 동물의 혈관으로 포도주, 맥주, 우유, 안티몬 등을 주사해 그 효과를 살펴보기에 이른다.
1666년에는 영국에서 개(犬)끼리 수혈하는데 성공했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에서 인류 최초로 사람에게 피를 수혈했다. 소(牛)의 피였다. 소 피를 수혈받은 이 사람은 새카만 오줌을 누고 죽어버렸다. 이 사건으로 유럽 전역에서 수혈이 금지되었다. 혈액형도 모르고 하는 수혈이었으니, 차라리 다행스러운 조치였다.
수혈 금지령 150년 후, 영국에서는 산후 출혈로 죽어가는 산모들에게 여러 사람의 피를 수혈한 의사가 있었다. 11년 동안 10명에게 이런 수혈을 시도해 5명을 살렸다. 가만두면 죽을 환자들을 살린 것이긴 하지만 혈액형도 모르던 시절이었으니 얼마나 대담한 시도였던가!
이 성공에 고무되었는지, 몇몇 의사들이 수혈을 시도했다. 1873년에 나온 연구에 의하면 수혈 후 목숨을 잃은 경우가 무려 56%나 되었다. 물론 이 역시 가만두면 목숨을 잃을 환자들에게 마지막 수단으로 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이런 높은 사망률 때문에 수혈이라는 시술은 상식이 있는 의사라면 결코 하면 안 되는 일이 되었다. 더 나아가 저명한 의사들은 수혈하는 의사들을 사기꾼이나 다름없다고 맹비난까지 하고 나섰다. 란트슈타이너가 ABO 혈액형을 발견한 것도 이런 분위기가 만연하던 때였다. 이상하리만큼 의료계의 반응이 없었던 것도 수혈에 대한 의료계의 뿌리 깊은 거부 반응 탓일 수도 있다.
1920년대에 미국에서는 수혈하기 전에, 줄 피와 받을 피의 샘플을 미리 한번 썩어 응집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는 교차시험(cross matching)이 도입되었다. 이제 ABO혈액형에 맞는 혈액을 사전 교차시험까지 거치면 수혈은 안전한 시술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노벨상 위원회도 란트슈타이너의 업적을 인정한 것이다. 비록 30년 늦기는 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