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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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궐(西闕)경희궁의 전신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덕궁은 본래 인조의 생부 원종(元宗)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이 곳에 왕기가 서린다는 말을 듣고 광해군이 왕기를 없앤다는 뜻으로 광해군 9년(1617) 6월에 궁전을 짓기 시작하였으나, 인경궁과 함께 공사가 진행된 관계로 재력의 소모가 막대하여 공사가 뜻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광해군은 궁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왕 15년 3월계해 반정(癸亥反正)으로 폐위되고 말았는데, 그 뒤 경덕궁은 인조가 인목대비를 받들어 일시 이 곳에 이어한 일이 있었고 그 후에는 역대 왕들이 수시로 이 궁에 거처한 일이 있었으므로 경덕궁은 왕궁의 하나로 손꼽힐 수 | |
있게 되었다. 그 후 영조 36년(1760)에 경덕의 궁명이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동음이라 하여 이를 피하여 경희궁(慶熙宮)으로 고쳤다. 순조 29년(1829) 10월 경희궁은 화재로 인하여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순조 31년(1831)에 다시 중건 되었고 철종 10년(1859)부터 11년 사이에 보수 공사가 시행되었다. 그 후 고종 초년 경복궁을 중건하고 법궁을 이어하자 경희궁은 빈 궁궐로 남게 된다. 관청의 필요에 따라 창고나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시설은 유지되고 궁궐로서의 외양은 지키고 있었다. 광무 5년인 1901년에서 1904년 사이에는 당시 고종이 임어 하고 있던 경운궁과 연결하기위해 운교가 연결되기도 한 것으로 보아 경희궁은 광무연간까지 궁궐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고 있었다.
근세에 이르러 일제가 침략해 와서 한일합방이 체결될 무렵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회상전(會祥殿), 흥정당(興政堂), 흥화문(興化門) , 황학정(黃鶴亭)만이 남아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들어온 뒤로 숭정전(崇政殿)은 1926년 남산 산록에 이치(移置)되어 조계사(曹谿寺)의 본당으로 사용되었고, 흥정당(興政堂)은 1928년 광운사(光雲寺)로 이건하였으며, 황학정(黃鶴亭)은 1923년 사직단 뒤로 옮겨졌다. 흥화문(興化門)은 1932년 이토오히로부미를 위하여 짓던 절, 박문사(博文寺)의 북문으로 쓰였으며 최근까지는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경희궁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경희궁 자리에는 1910년 일본인 자제를 교육하는 경성중학교(옛 서울중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접어들면서 일제는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을 경희궁 근처로 잡고 통감부 중학교를 경희궁 터에 세우고 지형도 높은 곳은 깍고 낮은 곳은 메꿔 버리는 등 그 만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들의 만행은 1922년 6월에는 경희궁의 동편에 전매국 관사를 지으면서 그 부지로 25,500평을 떼어냈고 1927년에서 1928년에는 경희궁 남쪽 도로를 확장하면서 일부를 도로로 편입시킨다. 거기에 건물들은 대부분 매각 시켜 버리고 만다. 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던 숭정전(경희궁의 정전)은 1926년 3월 일본불교 종파인 조동종의 조계사에 매각 이건 되었다. 대내 정전인 회상전은 1911년 임시소학교 교원양성소의 교실과 기숙사로 그리고 편전인 흥정당은 1915년 소학교 교실로 사용되다 1928년 용산의 광운사로 팔려나갔다. 이렇게 1920년대를 지나면서 경희궁의 건물들은 완벽하게 소멸되고 만다. |
흥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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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慶熙宮)의 정문으로 경희궁의 창건과 함께 광해군 10년에 세워졌다. 이 문은 궁(宮)의 동남 우(隅)에 위치하여 (운종가를 바라보며)동향(東向)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구세군 빌딩과 마주한 위치쯤 되며 현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만들어놓은 다리(금천교) 앞쪽이 되겠다. 1915년 8월 도로공사를 하면서 남쪽으로 이전되었다가 1932년 박문사(博文寺)의 사문(寺門)으로 둔갑 되었고, 광복 후에는 신라호텔의 문으로 이용되던 것을 경희궁 복원 계획에 따라 정문(正門)으로 이전해 놓기는 하였는데 본래 위치와는 전혀 다른 현 위치에 남향으로 모습이 바뀌어 있다. 이렇듯 정문의 위치부터 뒤죽박죽 되어버린 몰골로 복원하고 있으니 경희궁의 옛 모습을 상상하기란 여간한 관심 가지고는 힘들게 되어있다. 현재도 궁궐지(宮闕址)의 초라한 모습으로만 경희궁을 바라보면서 또 흥화문은 흥화문이되 본래의 문이 아닌 문을 들어서면서 지금은 기형적이긴 하나 그래도 다 없어져 버렸던 경희궁을 이나마도 되찾았다는 위안으로 삼고 복원되는 몇몇 전각들을 둘러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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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문/행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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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화문을 들어서서 얼마정도를 걸어가면 말끔하게(?) 복원된 숭정문 영역이 나타나는데 그 앞의 계단도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계단 일부는 옛 것 그대로이고, 숭정문 좌우로 이어진 행각이 마치 곤룡포 자락처럼 화려하다. 그 행각은 동서쪽 행각과 이어져 있는데 동서행각도 물론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숭전문을 들어서면 법전인 숭정전이 2층 월대 위에 덩그렇게 올라앉아 있다. 물론 이 법전도 최근 새로 복원된 건물이다. 원래 있던 숭정전 건물은 일제 경성중학교 교실로 사용되다가 1926년 훼철될 위기에 이르러 조계사로 넘어갔다. 당시 일본 종파인 조동종(曹洞宗)에 속해 있던 조계사(曹谿寺)는 숭정전을 경내로 옮겨놓고 불전으로 사용했다. 당시 조계사는 현재 동국대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 숭정전 건물은 지금도 동국대 경내에 남아 정각원이라는 법당이 되어버렸다. 숭정전은 창경궁의 명정전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표적 궁궐 건축이지만 많이 낡았다. 최근 경희궁을 복원하면서 옮겨오려 했으나 너무 낡아서 이건하지 못하였다. 숭정전을 중심으로 둘레의 행각들이 새로 복원되어 있다. 현재 중층 월대 일부는 1985년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옛 것을 그대로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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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계단 소맷돌 측면의 당초문이 환상적일 만큼 아름답다. 계단에 엎드린 해치도 다른 정전의 해치보다 해학성이 뛰어나며, 해치가 Y형 뿔을 달고 있는 것도 이색적이다. 남향 건물인 숭정전은 옛 건물 그대로 본 따서 궁터에 새로 복원한 것이다. 정전인 만큼 지붕마루에 잡상과 용두 등이 어김없이 치장되어 있으나, 그 기법은 세월과 기술의 단절이 엿보인다. 마치 조잡한 화장(化粧)술의 여인얼굴을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이라 표현한다면 조금 지나칠까? 어간문을 열고 들어가면 용상과 일월오악도가 정면에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는 닫집이 있고, 천장에는 근정전의 것을 본뜬 두 마리 황룡이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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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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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정전 뒤를 돌아가면 2단의 높은 계단 위에 자정문이 덩그렇게 올라 앉아 있다. 자정문은 자정전 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자정전 영역이 법전인 숭정전 보다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은 오로지 이곳 지형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정문의 좌우 행각도 지형의 높이에 따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점이 다른 궁궐들과 다른 점이다. 그래서 경희궁의 전각배치는 마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지대가 높아지는 향교의 전각배치를 연상하게 한다. 정문 계단의 기단석 일부는 한눈에 세월을 읽어볼 수 있는 옛 것 들이다. 새로 깍아 앉힌 것보다 색깔이 붉은 까닭은 오랜 풍화로 돌속의 철분이 산화되어 겉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정전은 이 궁의 편전 이다. 편전은 왕이 평상시 거처하면서 정사를 보는 집무실과 같은 것으로, 경복궁의 사정전, 창덕궁의 선정전, 창경궁의 문정전 등이 편전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대개 정전 뒤쪽에 자리잡고 있다. 자정전은 자정문, 숭전전은 숭정문과 일직선상에 있고 흥화문 과 도 거의 축선이 같다. 그러나, 원래의 흥화문 위치는 그 축선에서 동쪽으로 크게 벗어난 곳에 있었다. 이것도 경희궁의 전각배치의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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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전각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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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전, 집경당(회상전의 남서쪽), 융복전, 흥정당은 한 영역 안에 있다. 회상전은 왕의 사적인 공간인 침전이며 숙종은 이곳에서 탄생하여 만승루에서 승하하였다고 한다. 회상전은 1928년 조계사에 매각되어 주지 집무실로 사용되다가 없어졌다. 궁궐지에 보면, 흥정당은 건물 일부에 누하주가 있는 다락식 건물이었던 것 같고, 흥정당 좌우에는 왕이 독서하던 존현각과 서음각을 끼고 있었다. 회상전 서쪽에 융복전과 주변에 연못, 정자 등이 있었다고 한다.
융복전 동쪽으로는 대비마마의 침전인 장락전이 있었고, 그 옆에 광명전이 있었다고 한다. 왕세자가 거처했던 동궁도 그 부근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 밖에도 단명전, 친현각, 창선각, 영강각 등 무수한 전각과 일신헌, 위선당, 봉황정,용비루 등 헌, 당과 누, 정 등이 궐내 즐비했을 뿐 아니라, 개양문 밖에는 승정원 홍문관 도총부등 관아 32개소와 방림원 등이 있어 궁궐로서의 규모와 위엄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우리궁궐이야기, 청년사, 홍순민 지음>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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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전 |
집경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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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복전 |
흥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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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3월 28일(목) 오후에 경교장, 경희궁, 서울역사박물관을 탐방할 예정입니다.
경희궁의 자료를 찾아 올려 놓습니다.
경희궁외 서울역사박물관의 아름다운사진들은
cafe.daum.net/maylove520/EEdL/9097 어린왕자의 들꽃사랑마을 에서 펌했습니다.
4월 4일(목)쯤에는 서울 남산(백범광장, 안중근의사기념관, 성곽 등등)을 탐방할려고 합니다.
3월28일(목) 오후에 경교장을 탐방(13시15분-14시15분)한 후에
경희궁과 서울역사박물관을 탐방(14시20분-16시20분)했습니다.
특별히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사진 작가 '김한용의 서울풍경'(2013.2.28-5.5)의 전시를 통해
서울시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볼 수 있어서 아주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