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7월 28일 ~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World War I)은 1914년 7월 28일부터 1918년 11월 11일까지 약 4년 4개월간 지속된 전쟁으로 최초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 포고로 시작되었다. 8월 1일에 이르면서 독일은 러시아에도 선전 포고를 벌였으나, 3년 후 러시아에서는 혁명으로 군주제가 붕괴되어 전쟁을 포기하였다. 이후 독일이 잇따라 잠수함을 이용한 선박의 무차별 공격으로 미국의 상선들을 침몰시키자, 미국이 참전하였다.
마침내 1918년 독일 제국 내에서 혁명이 발생하여 빌헬름 2세는 퇴위하였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11월 11일, 연합군과 독일 간의 휴전이 성립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이 전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주요 연합국과,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웠으며 약 900만 명이 전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엔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제안으로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다.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 배경[편집] 경제적 배경1870년대부터 본격화된 국가 간의 산업·상업 반목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14년 독일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러시아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당시의 독일은 영국의 경제를 따라 잡아 세계의 경제를 주도하게 되었고, 해운업 역시 다른 나라들을 앞서기 시작했다. 본래 프랑스는 독일과 함께 경제를 이끌어나가고자 하는 경쟁자로, 양국은 모로코에서의 광산 자원과 무역 기회를 두고 대립하기도 했었지만, 프랑스의 풍부한 철광 산지인 로렌이 망하자 독일의 산업만이 크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이스탄불과 오스만 제국에 영토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은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할 계획이어서 이 지역을 일찌감치 탐내 왔던 러시아와 충돌이 불가피했다.
철도 부설도 문제가 되었는데, 이는 보스포러스(Bosporus)에서 티그리스 강의 바그다드까지 이루는 노선으로, 이것은 다시 바그다드에서 페르시아 만으로 이어지고 있어 인도에까지 가는 단축 노선을 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의 은행가들과 공동 자본 투자로서 실시하려 하였으나 양국 간 각각의 이해 관계에는 맞지 않아 거절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375마일(약 604킬로미터) 철도선 부설을 강행하여 국제적 반목을 일으키게 된다. [편집] 정치적 배경제1차 세계 대전의 정치적 원인으로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민족주의였다. 민족주의는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자리 잡았으나 점점 여러 가지 위험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대(大)세르비아주의,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복수,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였다. [편집] 오스트리아오스트리아가 1908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대세르비아 계획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항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 내의 슬라브족을 선동하여 세르비아로 뭉치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결국 이중 왕국에 반대하는 음모가 일어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범슬라브주의는 열렬한 민족주의자들의 감상적인 희망이며 러시아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이었다. 이 중에서 러시아는 가장 강력한 슬라브 국가로 발칸의 여러 민족의 희망이 되었고,
프랑스의 보복 운동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그 전쟁의 패배를 보복하려는 데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프랑스인 절대 다수의 의견은 아니었으며 사회주의자와 자유주의자의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잡다한 인종 집단 간에 점증일로에 있는 민족주의 운동의 압력에 직면하여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방대한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5,000만 신민의 반도 안 되는 소수, 즉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의 헝가리인만이 지배 민족으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밖에 840만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 500만의 폴란드인, 400만의 루마니아인, 550만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77만의 이탈리아인이 영토 내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피지배 계층에 속하였다.[2]
그 가운데서도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남부 발칸 지역에 분포한 슬라브족이 가장 강력한 발언을 했고 조직도 잘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이웃에 위치한 세르비아는 이들 슬라브인에게는 자기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옹호자이며 모범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총참모부는 세르비아와의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보게 되었고 이 보잘것없는 이웃 왕국을 당장 깨끗이 짓이겨 놓을 구실만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었다. 프란츠 폰 페르디난트 황태자 암살사건(사라예보 사건)이 그런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황태자 암살에 직접 세르비아 정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세르비아에 대한 응징 전쟁을 정당화하는 구실로 이용했다. [편집] 기타범독일운동은 1895년 창설된 범독일동맹의 이념에서 유래하였고 중앙 유럽의 모든 게르만족을 포괄하는 독일의 팽창을 모토로 한 독일 제국을 주장하였다. 이 이념은 고조된 독일 민족주의의 한 형태로서 독일의 팽창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달랐다. 프랑스와 전쟁에서 승리한 비스마르크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프랑스를 고립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하면서 해외 진출을 최대한 억제하였다. 이를 조건으로 다른 열강, 특히 영국과 관계를 원활히 하여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의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것이다. 영국이 독일과 대립 관계가 된 것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독일이 그와 상반되는 지속적인 해외 팽창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873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는 3제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터키 영토 문제로 독일·오스트리아와 불편한 관계가 되면서 3제 동맹이 무산되었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1882년 이탈리아를 다시 가입시킴으로써 삼국 동맹(the Triple Alliance)을 결성하였다.
이러한 비스마르크의 프랑스 고립 정책은 비스마르크 은퇴 후 변화를 맞는다. 영국과는 1차 및 2차 지중해 협약을 통해 이탈리아와 영국, 독일의 이익을 도모했지만, 요컨대 서로 이익을 놓고 타협하기 힘든 대립 구도의 열강을 억지로 화해시키고자 노력한 것이 비스마르크의 외교였다.
비스마르크의 은퇴 후,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와 전통적인 남진 정책이 오스트리아와 일전이 불가피했다는 사실, 빌헬름 2세 등장 이후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독일로부터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자 러시아와 프랑스는 가까워졌다. 그 극적인 예가 프랑스의 군사 재정 지원이었다.
또한 영국은 파쇼다 사건(곧 프랑스와 화해)과 모로코 분쟁 이후 독일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 독일의 대양 함대 건설을 놓고 건함 경쟁에 들어가면서 위기감은 올라갔다. 결국 영국은 기존의 고립 정책을 버리고, 프랑스와 손을 잡기로 했다. 이런 외교적 변화의 결과는 삼국 협상(the Triple Entente)의 결성이었다. 1907년에는 러시아와도 동맹을 맺는다.
이렇게 1907년경 유럽의 강대국들은 3국 동맹(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 1915년 연합국으로 전향)과 3국 협상(영국,프랑스,러시아)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고, 상호 동맹에 소속된 국가 간에 전쟁이나 분쟁이 발발하면 다른 모든 강대국들이 자동으로 말려들게 되어 있는 구조가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조그만 불씨 하나로도 큰 전쟁이 터질 수 있는 불안한 상태였다. 여기에 사라예보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이탈리아는 3국 동맹을 탈퇴하고 중립을 유지했다가 1915년 3국 협상에 가담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 포고하였다. [편집] 외교적 배경오스트리아-헝가리도, 세르비아도 그 동맹국들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외교적인 위기를 전쟁으로 몰고 갈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은 니콜라이 2세가 통치하는 러시아에서 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서 분할한 폴란드, 우크라이나 영토를 누가 더 많이 자국의 세력권 안에 넣느냐 하는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오랜 경쟁 관계에 있던 러시아는 발칸 반도에서도 영토를 넓히려 하고 있었다. 또한, 흑해와 에게 해를 잇는 중요한 수로인 다르다넬스 해협과 함께 전략적 요충지인 반도를 직접 통치하거나 아니면 자국의 영향권 안에 두고 싶어 했다.
러시아는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을 때도 맹렬히 반대했다. 그러나 러일 전쟁의 참패로 군사력이 약화된 터라 개입은 하지 못했었다.
세르비아의 편을 들어줌으로써 러시아는 전략적인 이득 추구, 범슬라브 운동에 대한 동정, 숙적을 골탕 먹이고 싶은 욕망의 충족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미 독일의 빌헬름 2세로부터 비슷한 지원을 다짐받고 있었다. 독일도 러시아와 같이 동맹국 지원에 나선 동기가 단순치 않았다.
유럽의 통치자로서 자국의 무력에 대해 빌헬름 2세만큼 큰소리를 치는 자는 없었다. 그는 독일이 완전히 지배하는 중부 유럽을 꿈꾸고 있었다. 독일이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느끼는 국제적인 인정을 하루 빨리 받아내고 싶은 나머지, 그는 필요하다면 "외국에서의 자국의 권리를 수호하기 위해 칼을 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있었다. 인구는 25%, 자본력은 50%, 국민 소득은 100% 늘어났다. 강철 생산량은 영국의 3배, 프랑스나 러시아의 4배가 되었다. 민족적 자신감이 팽배해진 독일은 대영 제국을 넘보고 있었다.
1870년, 보불 전쟁에서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빼앗긴 사실을 잊지 못하는 프랑스는 인구가 독일 인구의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으며, 공업력과 군사력에서 점점 낙후해 가고 있었다. 이 세력의 불균형을 바로 잡기 위해 첫발을 내딛은 게 1892년의 프랑스-러시아 동맹인데, 독일이 군대 동원령을 내리면 두 나라가 같이 동원령을 내리기로 되어 있었다. 프랑스와 러시아는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독일이 자제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영국은 독일로부터 절박한 위협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고손이었으며 조지 5세의 사촌이었다. 양국의 많은 귀족은 공통된 전통과 혈연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독일이 해군력의 경쟁을 촉발하자 두려움을 갖고 대비하게 되었다. 사실, 영국은 섬나라여서 식량과 원자재 공급을 자국 선박의 해로(海路) 확보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해로 확보와 유지는 필수였다. [편집] 제1차 세계 대전 역사[편집] 전쟁 발발 전[편집] 사라예보 사건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의 한 샛길로 차를 잘못 몰고 들어간 것이 화근이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오전 11시가 다 된 시각, 세르비아 출신의 대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 친선 방문했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호엔베르크 소피아 황태자비를 암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사라예보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에 대하여 세르비아에 다음과 같은 ‘최후 통첩’[2]을 보냈다.
등의 10개 조항이였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고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이였던 독일과의 마찰을 바라지 않았으므로 세르비아측에게 조항을 받아들일것을 권고하였다.
이에 세르비아는 재판의 관리 참여 조항을 제외한 모든 조항을 무조건 수용하며 재판 참여역시 협상이후에 받아들일 생각이 있음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측은 그들의 요구 조건 중 어느 것도 양보하기를 거부하고, 즉각 세르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얼마후 1914년 7월 28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곧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편집] 전쟁의 시작1914년 7월 29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이 쏜 포탄이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튿날, 러시아와 프랑스는 총동원령을 내렸다. 독일은 전쟁을 발칸 반도에 국한시킬 생각으로 러시아에 대해 동원령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8월 1일 러시아가 그 요구를 이행하지 않자, 독일은 바로 선전포고해버렸다.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조약 의무에 따라 취해진 독일 측의 결정이었으므로, 조약상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한 프랑스로 하여금 독일에 대적하는 동원령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두 전선에서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경우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독일군 최고 사령부는 즉각 프랑스 쪽으로 병력을 이동했다. 러시아가 병력을 충분히 동원하기 전에 대(對)프랑스전에서 재빨리 승리를 거두려는 속셈이었다.
8월 1일 독일군은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어 진격했다. 3일 후에는 벨기에를 침공했고, 프랑스로부터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얻어 내지 못하자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 포고했다.
영국은 얼마나 빨리, 또 어느 정도의 병력으로 프랑스와의 약속을 실천에 옮겨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발하지 않은 벨기에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마침내 균형을 깨뜨렸다.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도버 해협에 면한 벨기에의 항구들이 독일군에게 함락 당한다면 전략적으로 크게 불리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벨기에 영토에서 철수하라는 영국의 요구를 독일이 거부하자,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6일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에 선전 포고하고, 12일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 포고했다. [편집] 서부 전선[편집] 오스만 제국의 참전전쟁 초부터 터키에서는 누구의 편에 참전을 해야 할지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터키 청년당원의 3두 정치에서 국방부 장관인 엔베르 파샤와 내무부 장관인 탈랏 파샤는 친독주의자였지만, 제말 파샤는 연합군 지지자였다. 1914년 8월 2일 터키군은 사실상 독일군 사절단의 지휘하에 놓이게 되는 독-터 연합 협정이 체결되고, 군동원령이 선포된다. 그러나 이때 터키 정부가 중립을 선포한다.
8월 10일 지중해에서 영국 함대의 추격을 피해 온 독일 군함 <헤벤(Heben)>과 <브레슬라우(Breslau)>가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들어온다. 이 함선들의 출현으로 터키군 뿐만 아니라, 터키 함대마저 독일의 지휘아래 놓이게 된다.
9월 9일 터키 정부는 모든 국가들에게 외국인 거류 협정(외국 시민들의 치외 법권)을 폐지하기로 결정한 것을 알리게 된다. 이것은 모든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 수상을 포함한 대다수의 터키 정부 구성원들은 전쟁에 반대 입장을 밝힌다. 이때 엔베르 파샤는 독일의 지시와 함께 남은 정부 구성원들의 동의 없이 전쟁을 시작한다. 터키는 모든 연합국들에게 지하드(성전)을 선포한다.1914년 10월 29일과 30일 터키 함대는 독일의 해군제독 수숀의 지휘 아래 세바스토폴, 오데사, 페오도시야와 노보로시스크를 포격한다.
1914년 11월 2일 러시아는 터키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11월 5일과 6일 영국과 프랑스가 그 뒤를 이어 전쟁을 선포한다. 터키의 참전은 러시아와 연합국 사이의 흑해와 지중해로 통하는 해상 연결망을 끊었다. 러시아와 터키 간의 카프카스 전선이 생겨난다. 1914년 12월부터 1915년 1월의 사리카미스 전투에서 러시아의 카프카즈 군대가 터키군의 카르스로의 진입을 저지시키고 난 후, 터키군을 괴멸시키고 반격하게 된다. [편집] 이탈리아의 참전 : 삼국동맹 탈퇴 연합국 전향전쟁 초부터 이탈리아는 중립국이었다. 1914년 8월 3일 이탈리아의 왕은 빌헬름 2세에게 이탈리아가 참전을 해야만 하는 것에 관한 3국 동맹의 조건에 참전 명분이 적합하지 않음을 알린다. 이날 이탈리아 정부는 중립을 선포한다.
오랫동안 이탈리아와 동맹국 그리고 연합국 사이의 교섭이 진행된다. 마침내 1915년 4월 26일 런던에서 이탈리아는 한달 간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전쟁을 선언하고, 또한 연합국의 모든 적국들에게 반대한다는 협정을 체결한다. <피에 대한 대가>로서 이탈리아는 영토를 약속 받게 된다. 영국은 이탈리아에게 5억 파운드의 돈을 빌려준다.
이때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이탈리아가 중립국을 유지한다면 이탈리아인들이 사는 영토를 이탈리아인들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된다. 독일 대사 뷜로프는 이 약속에 대해 이탈리아 중립 지지자들 대표인 지오리티에게 알리게 된다.
이탈리아 의회 대의원들의 508명 중 320명이 지오리티를 지지했다. 사란드라 수상은 사표를 제출한다. 그러나 이때 전쟁 지지자들이 사회주의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를 앞세워 의회와 중립 지지자들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한다.
이탈리아 왕은 사란드라의 사표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지오리티는 로마로 떠나야만 했다. 5월 23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편집] 미국의 참전미국은 전쟁 중 영국과 독일 간에서 중립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계속적으로 “독일의 무차별 잠수함 공격에 대해서 방관하지 않겠다.”라는 의사를 표명했고, 독일은 이에 대해 이러한 공격을 중단할 것임을 몇 차례 약정했다.
그러나 1917년 2월, 독일의 외무 장관이었던 아서 치머만이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 펠릭스 폰 에카르트에게 보냈던 암호 전문 치머만 전보에서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할 경우, 멕시코가 1848년에 미국에 빼앗긴 모든 영토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라는 내용 때문에 미국은 참전 쪽으로 기울어졌다.
얼마 후 독일이 유보트를 이용해 영국 배를 공격하였는데 그안에 탔던 많은 미국인들이 죽었다. 따라서, 윌슨 대통령은 의회에 독일에 선전 포고할 것을 1917년 4월 6일 제의했다.
이는 미국 영토에 대한 독일 공격에 한한다는 내용으로 하원 결의안 373:50, 상원 82:6으로 승인되었다. 12월에 이르러서는 그 범위가 이탈리아 전선까지 확대되었다. [편집] 종전1917년,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연합국은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동맹국의 군대는 우후죽순처럼 무너졌다. 오스트리아가 항복한 같은 날, 독일의 킬(Kiel) 군항에서는 수병 반란이 일어났다. 파급 효과는 엄청났는데, 곧바로 독일 각지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여 군경과 실랑이를 벌였다. 결국, 황제는 제위를 포기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은 군주제를 포기하고 공화정으로 전환하였으며, 연합국과 휴전을 맺었다. 이렇게 해서 약 9백만이 전사한 이 전쟁은 끝이 났다. [편집] 결과동맹국이 연합국에게 전쟁에 지면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 오스만 제국은 세브르 조약,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을,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을 맺으면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고, 많은 영토와 인구를 잃었다. 이로 인해 발칸 반도와 중동 지방에 독립국이 많이 발생하게 되었다.
독일의 경우 식민지를 모두 포기하였으나, 본토 손실은 10%에도 못미쳤다(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넘겨준 정도). 그러나 장기간 전쟁수행으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실직자가 속출하였다.
더욱이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과다한 배상금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원인이 되었다. [편집] 전쟁 이후의 세계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했다.
한편,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말미암아 반성보다 지독한 가난과 연합국에 대한 보복에 시달렸으며 오스만 제국도 세브르 조약을 맺음으로써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다.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맹 조약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영토로 고정되었고, 헝가리도 트리아농 조약으로 현재의 영토를 확정했다. 불가리아는 뇌이 조약을 맺어 루마니아, 세르비아, 그리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할양하였다.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으나 그 이후에 많은 실직자가 생겨났고, . 일본은 오세아니아의 군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다. 중화민국은 연합국임에도 불구하고 산둥 반도에 대한 이권을 돌려받지 못하였다. 패전국인 독일에서는 감자 하나에 수십억 마르크로 값이 치솟았다
연합국은 패전국의 식민지 일부를 차지했다. 프랑스는 레바논, 시리아, 기타 독일의 식민지(카메룬) 등을 차지했으며,
중동 지역에도 오스만 제국과 싸운 대가로 독립을 성취하였다(이라크를 비롯한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북예멘 등을 꼽을 수 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중앙유럽의 많은 국가는 독립하였으며, 한국에서도 그것의 영향을 받아 3·1 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을 조건으로 영국을 도왔던 인도는 그 약속이 무산되자 지속적인 투쟁 운동을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은 1922년에 해체되어 1923년에는 지금의 터키로 바뀌었다.
한편,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민족 자결주의를 제창하였으며, 전쟁의 방지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국제 연맹을 설립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로써 국제 연맹이 설립되었으나, 정작 미국은 의회의 반대로 가입에 실패하였다. [편집] 1차 대전의 결과와 의의, 그리고 그 영향
[편집] 사상자참전 국가 중 희생자가 많았던 나라는 독일, 러시아, 프랑스였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는 의료체계가 제대로 되어있지 못하여서 심각했다. 반대로 일본은 희생자를 가장 적게 냈다.
[편집] 기술이 전쟁으로 인해 과학 기술이 발전했다. 그러나 독가스와 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무기들도 개발되어 나왔다. 최초의 독가스는 독일군이 사용하였으며, 연합군도 같은 무기로 대응했다. 독가스에 대한 유일한 대응책은 양측 모두 방독면 외에는 없었다. 독가스가 사용된 것은 마른 전투 이래 기관총, 철조망, 참호선으로 고착화된 전선을 뚫기 위해서였다. 탱크도 참호선을 뚫기 위해 개발되었으며, 대포도 점점 대구경화되었다. 장거리 사격 능력을 보완하기 위해 열차포(독일의 크루프 열차가 유명하다)도 등장하였다.
기술의 개선은 전방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생리대를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여성의 사회 진출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러한 여성을 위해 생리대가 개발되었다. [편집] 명언제1차 세계 대전에서 벌어진 전쟁의 참상은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독일어: Otto Dix, 1891년 - 1969년)은 참호전의 참상을 그린 〈전쟁〉(1929년 작)에서 참호 속에 흩어진 사지와 흙더미에 거꾸로 박힌 시체, 피범벅이 된 진흙탕을 묘사하였다. 하필이면 왜 저렇게 끔찍하게 묘사하였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딕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바로 저랬다. 나는 보았다."[3]
한편 영국의 시인 윌프레드 오언(영어: Wilfred Owen, 1893년-1918년)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한 반전시 《고귀한 영예》를 발표하였다.
[편집] 참전 포스터[편집] 미국
이 포스터는 역대 신병 모집 것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미국에서 발행된 것이다. 글귀는 이렇다. “I WANT YOU FOR U.S. ARMY” 뜻은 “나는 네가 미합중국 육군에 지원하기를 바란다.”이다. 엉클 샘이 그려져 있는데, 미국을 상징하는 캐릭터이다. [편집] 영국영국도 미국 못지않게 신병모집 포스터를 만들었다. 영국은 독일보다 인구가 부족하여 만 18세 이하의 미성년자들까지 징집하기도 했다. 실제로 유틀란트 해전에 참전한 어떤 수병의 나이는 16살이었다고 한다.
[편집] 함께 보기
전쟁사 하위 분류
<프랑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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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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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내마음의 보석상자 원문보기 글쓴이: 대륙철도횡단열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