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자유인으로 떠나는 세계 여행-
<고흐가 그림으로 남긴 도개교의 석양 모습>
<고흐의 도개교 그림 — 랑글루아 다리 (Pont de Langlois)>
다리의 정체
랑글루아 다리(Pont de Langlois, 혹은 Pont de l'Anglais)는 아를 외곽에 위치한 19세기 목조 도개교로, 아를과 지중해 항구 부크(Bouc)를 잇는 운하 위에 놓여 있었다. 네덜란드 기술자들이 운하를 따라 11개의 유사한 구조물 중 하나로 건설한 다리다. 다리의 공식 이름은 '레지넬 다리'였지만, 오랫동안 다리 관리인으로 지낸 랑글루아의 이름을 따서 랑글루아 다리라고 불렸다.
고흐와 다리의 첫 만남 — 향수
고흐는 1888년 2월 20일 아를에 도착하자마자 이 다리에 이끌렸다. 고향 네덜란드의 수로를 떠올리게 하는 향수 때문이었고, 그가 즐겨 참고했던 일본 목판화의 평면적이고 대담한 구도와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이곳은 네덜란드와 똑같은 모습이 많아"라고 편지를 보냈다. 물이 많은 고향에는 그런 도개교가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연작의 규모 — 집착에 가까운 탐구
고흐는 이 다리를 유화 5점, 완성된 드로잉 3점, 수채화 1점, 그리고 15점의 습작으로 묘사했다.
다섯 번째 유화는 고흐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거의 폐기했으며, 운하 옆을 거닐던 연인 한 쌍을 그린 단편만 남아 있다.
주요 작품들과 소장처
완성된 유화 중 하나는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또 하나는 쾰른의 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세 번째는 개인 소장이다. 네 번째는 네덜란드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작품의 구도와 특징
고흐는 전경에 도로가 있는 땅을 왼쪽 배경으로 이어지는 대각선으로 담는 구도를 선택했다. 이런 대각선 구도는 일본 판화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빈센트와 테오는 파리에서 함께 일본 판화 컬렉션을 모아왔다. 운하가 화면의 대각선을 이루며 시선을 다리와 그 위를 지나는 포장마차로 자연스럽게 이끄는 역동적인 구도를 가진다. 푸른 하늘과 물결을 표현하는 차가운 색조와 다리와 주변 자연을 감싸는 따뜻한 색조를 대조적으로 사용하여 장면에 생동감과 감정의 깊이를 더했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 속 묘사
동생 테오에게 보낸 1888년 3월 14일 편지에서 고흐는 이렇게 썼다. "나는 오늘 15호 캔버스를 그리고 집에 돌아왔어. 작은 마차가 지나가고 있는 도개교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그린 그림이야. 마찬가지로 푸른 강이 있고, 오렌지색 둑에 초록 풀이 있으며, 여인들이 작업복을 입고 다양한 색의 모자를 쓰고서 빨래를 하고 있어."
오늘날의 다리 — 퐁 반 고흐 (Pont Van Gogh)
고흐가 그림을 그렸을 당시의 랑글루아 다리는 1930년 콘크리트 다리가 새로 놓이면서 원형이 많이 바뀌었고, 위에 사진의 다리는 '반 고흐 다리(Pont Van Gogh)'라 불리고 있는 다른 다리다. 원래 랑글루아 다리 즉 고흐가 1888년 실제로 그림을 그린 그 다리는 운하 위에 있었으나, 1930년 콘크리트 다리로 교체되면서 사라졌다. 위에 사진의 다리는 원래 다리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구조가 똑같은 다른 다리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30대나 40대에 조기 은퇴하는 이들을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라 부른다. 반면 사회적 성취를 이루고 60~70대에 은퇴하는 이들은 '액티브 시니어(Active Senior)'라 불린다. 은퇴 후에도 자기계발과 사회 활동에 적극적이며 소비와 문화생활을 즐기는 세대를 가리키는 말로, '뉴 시니어(New Senior)' 혹은 '그레이 파이어(Grey FIRE)'라고도 한다. 나는 지난 3월 말, 내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은퇴를 했다. 44년간의 경제활동을 마감하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 됐다. 돌아보면 나는 과분하게 많은 것을 누렸다. 그래서 나는 감사함 속에 시편 8편 5절 (가톨릭 성경)을 늘 생각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시편 8편 5절
<고흐가 고갱과의 갈등으로 귀를 자르고 입원을 했던 아를의 병원 — 오텔-디유(Hôtel-Dieu)의 지금 모습과 아래 고흐의 그림으로 보는 병원 모습>
귀를 자른 사건과 입원
1888년 12월 23일, 고갱이 집을 나가자 고흐는 귀를 자른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아를 중심부에 위치한 '오텔-디유(Hôtel-Dieu)'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바로 이 병원에서 고흐는 내면의 혼란 속에서도 붓을 들었다.
담당 의사 펠릭스 레이
아를 병원 당직의 **펠릭스 레이(Félix Rey)**는 간질 추정 하에 고흐를 입원 치료했다. 이 의사는 고흐의 예술성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낮에는 밖에 나가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발작이 심해지는 밤에는 병원에 머물며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병원에서 그린 작품들
1889년 4월, 이곳에 입원해 있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아를 병원의 정원〉을 그려 보냈다. 고흐는 이곳에서 유화 143점과 100여 점 이상의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아를 주민들의 청원과 떠남
1889년 3월, 그를 "미친 빨강 머리(fou roux)"라고 부르는 마을 주민 30명의 청원에 따라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했다.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한 아를 사람들이 강제 입원시키라고 청원한 것에 고흐는 불만을 터트렸고, 결국 테오는 형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릴 만한 정신병원을 알아보았다.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을 추천받아 1889년 5월 8일, 고흐는 아를을 떠나 생레미로 가게 되었다.
현재의 모습 —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
시립병원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는 지금은 대학교이자 문화센터로 쓰이고 있다. 그 입구에는 여전히 '시립병원 Hôtel-Dieu'라는 간판이 걸려 있다. 지금도 그림 속의 화단 배치와 꽃들이 그대로 관리되고 있어, 노란색 아치형 복도와 화려한 꽃들이 어우러진 정원을 걸을 수 있다.
<고흐가 그린 아를의 병원 — 오텔-디유(Hôtel-Dieu)>
"꿈은 그 꿈을 꾸는 사람의 것이다"
드디어 나와 아내는 지난 5월 20일, 12박 13일 일정으로 은퇴후 첫 여행인 남프랑스 예술 기행에 올랐다. 이번 여행은 우리 부부를 포함 이화여대 78학번 우아한 여성 5명과 7명 팀이 함께 하고 있다. 나는 홍일점이다.
이번 여정은 화가인 아내가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으로, 오래전부터 우리 부부의 버킷리스트 맨 위에 올라 있었다. 아내는 남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각각 한 달을 살아보는 꿈을 갖고 있다. 두 지역의 작은 도시 골목 골목을 여유롭게 보고 싶어한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해체주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설계한 루마 아를 타워(LUMA Arles Tower). 사진은 이 작품의 일부>
건축가 — 프랭크 게리
프랭크 게리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유명한 캐나다-미국계 건축가로, 해체주의 건축의 대표 거장입니다. 프리츠커상(건축계 노벨상) 수상자입니다.
탄생 배경
스위스 예술 후원가 **마야 호프만(Maja Hoffmann)**이 설립한 루마 재단이 아를의 파크 데 아틀리에(Parc des Ateliers), 즉 옛 7헥타르 규모의 철도 공장 부지를 문화 캠퍼스로 탈바꿈시키는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2007년 게리와의 첫 만남을 시작으로 2014년부터 2021년까지 타워를 건설했다.
건물 규모와 구조
높이 56미터, 연면적 1만 5,000㎡의 타워는 강철·콘크리트·유리 세 가지 소재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하부에는 아를 원형경기장에서 영감을 받은 유리 원형 홀(Drum)이 방문객을 맞이하며, 로마 도시 계획의 영향을 반영한 규모와 기하학적 형태를 갖추고 있다.
외관 디자인 —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담다
게리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과 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솟아오른 암석 군락에서 영감을 얻어 외관을 구상했다"고 밝혔다.
타워를 뒤덮은 1만 1,000개의 반사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은 하루 동안 극적으로 변한다. 한낮에는 푸른 하늘에 녹아들고, 늦은 오후에는 황금빛으로 물들며, 해가 질 무렵에는 반짝이며 빛난다.
내부 시설
타워 12개 층에 걸쳐 전시 갤러리, 프로젝트 공간, 루마의 연구·아카이브 시설이 들어서 있으며, 올라푸르 엘리아손, 카르스텐 횔러 등 세계적인 예술가 45명 이상의 작품을 선보인다.
'맥주캔' 논란과 빌바오 효과
일부 지역 주민들은 이 건물을 "맥주캔"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지역 당국은 1997년 게리가 설계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스페인 빌바오시를 되살린 것처럼, 아를에도 '빌바오 효과'가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다.
<루마 아를 타워 내부 미끄럼틀 모습>
"게으른 내 신심을 깨운 루르드 성지"
이번 여정은 인천공항에서 루프트한자 항공편으로 출발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13시간의 비행끝에 독일 뮌헨 공항에 도착, 4시간 남짓 경유한 뒤 프랑스 툴루즈 블라냐크 공항에 밤 11시 넘어 내렸다. 서울 송파구 오금동 집을 떠나 24시간여 소요됐다. 공항 근처 호텔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아침 9시에 출발 2시간여를 달려 가톨릭 성지 루르드(Lourdes)에 도착했다. 마침 47개국 가톨릭 신자 군인들이 모이는 군인 순례일을 앞두고 있어 매우 붐볐다.
루르드는 성녀 베르나데트 수비루 (Sainte Bernadette Soubirous)가 성모님의 발현을 보고 그녀의 메시지를 전한 가톨릭 신자라면 꼭 보고 싶은 성지다. 루르드에서 하루를 묶고 3시간여 넘게 달려 마티스와 드랭이 활동했던 콜리우르에 도착했다. 여기서 다시 1박후 고흐의 발자취를 따라 아를로 갔다. 내가 탐방을 한 남프랑스 도시들의 이야기는 이후 블로그를 통해 이어갈 예정이다. 우리는 아를에 이어 뤼베롱 지역을 지나 카스텔란느에 여장을 풀고 2박을 했다. 남프랑스의 전형적 레지던스에 묵으며 한숨을 고르고 있다.
전반 5일의 여정 중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곳은 역시 아를이다. 다시 자세히 다루겠지만 간략히 소개한다. 광활한 평야와 해바라기 밭이 펼쳐지는 이 도시에서 고흐는 1년 3개월을 머물며 〈해바라기〉, 〈노란 집〉 등 3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야말로 예술혼의 성지다. 귀를 자른 뒤 입원했던 병원 앞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고, 명작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플라스 뒤 포룸(Place du Forum)'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석양 무렵에는 도개교를 찾아 그 앞에서 잠시 고흐를 생각하며 셔터를 눌렀다. 아를에 이어 찾은 루시용마을. 마을 전체가 붉은 황토빛으로 물든 루시용 역시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라는 명성이 빈말이 아니었다.
[아를 원형경기장 — 레자렌 다를 (Les Arènes d'Arles)모습]
기본 제원
기원후 90년에 건설된 2층 구조의 로마 원형경기장으로, 아를에서 가장 두드러진 관광 명소다. 길이 136m, 너비 109m이며 120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고, 2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다.
코린트식과 도리아식 기둥 100개 이상이 2개 층에 걸쳐 배치되어 있으며, 로마의 콜로세움(72~80년 건설)에서 영감을 받아 그보다 약간 늦은 90년에 완공됐다.
건설 목적 — 검투사, 맹수, 전차경주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에 건설된 이 경기장은 검투사 경기, 맹수 사냥, 전차 경주 등 다양한 공공 오락을 위해 설계됐다.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아를(라틴명 Arelate)의 사회·문화생활의 중심지였다.
중세의 변신 — 요새이자 마을로
5세기 말까지 검투사들의 결투나 맹수와의 싸움을 오락거리로 즐겼으며, 중세시대에 이르러서는 경기장 안에 예배당과 주택들을 세워 요새로 활용했다. 한때 경기장 내부에 200여 채의 민가와 교회 2개가 들어서 있었고, 수천 명이 그 안에 거주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 등재
1840년,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érimée)의 노력으로 역사 기념물로 지정됐다. 같은 해 경기장에 붙어 있던 마지막 민가들이 철거됐고, 184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후 10년에 걸쳐 2013년에 2,500만 유로의 복원 공사가 완료됐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큰 로마 유적이다.
<고흐의 눈에 담긴 경기장>
고흐는 1888년 11~12월, 고갱과 노란 집에 함께 살던 시기에 〈아를의 원형경기장〉을 그렸다. 흥미로운 것은, 투우 경기에서 이긴 투우사가 패배한 황소의 귀를 잘라 자신이 선택한 여성에게 건네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장면을 목격한 고흐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자신의 귀를 자르는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이론이 있다.
오늘날 — 살아있는 경기장
중세에는 요새와 주거지로 활용되다 1883년경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현재도 내부에 좌석이 설치되어 투우와 공연이 열리고 있다.
지금도 해마다 두 차례의 투우 경기와 여름에 열리는 음악축제, 사진축제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은퇴후 아내와 함께 하는 여행은 계속 된다"
내일부터는 칸, 니스, 앙티브를 탐방하며 이 긴 예술 기행의 마지막 장을 넘기게 된다. 방문하는 도시마다 오랫동안 버킷리스트에 담아두었던 꿈을 하나씩 현실로 만들어가고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여행은 언제나 사람을 설레게 한다.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이 여정의 마지막 날들, 더 많은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자 오늘도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 2025. 5. 26, Castellane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