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읽기 7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6)
1. 들어가며
우리는 앞에서 구원이란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에 의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반응에 의해 우리의 선택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구원은 창세 전에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자격이나 조건이나 성실함이나 반응이 거기에 보태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이래도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 맞나?” 하는 의문을 가질 때 가장 흔들렸던 것 같다.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을 나의 공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에게서 조금이라도 구원에 합당한 조건을 찾으신다면 나는 벌써 포기했어야 한다. 게다가 마음과 생각까지 살피시는 분이시니 나에게 구원은 언감생심 안 될 일이다. 그러나 구원은 철저히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서 나온 만큼 나의 반응이나 선택, 열심을 보고 결정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래, 나는 이렇게 실패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신다.” 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2. 본문 살피기
1) 하나님의 영광
에베소서의 시작은 구원에 관한 서술이다. 그런데 그 구원의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
우리는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수없이 들었다. 그런데 늘 다시 그 의미를 잊어버리곤 한다. 다시 한 번 확인을 해보기로 하자.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다. 즉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거기에 반응하는 감사와 찬송’을 통틀어 ‘하나님의 영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건 무엇인가? 다시 반복하자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나를 향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와 찬송을 드린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을 자녀로 삼아주시는 일이 바로 구원이다. 누구나 구원에 대해서는 각자의 체험이 있어 다양한 의미로 해석할 것이다. 내 문제, 내 감격, 내 눈물, 내 시원함, 이런 개인적 체험이나 생각을 떠올려 구원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구원의 보편적 의미를 설명하자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실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인자하심, 하나님의 영원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 등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다. 구원받았다 함은 이 하나님을 알게되었다는 말과 같다. 반면에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다. 성서는 그것을 죄라 한다.
그러니까 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우상이나 짐승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고도 마음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개신교의 핵심 진리를 질문과 대답으로 엮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 문답 1번은 바로 이 하나님의 영광을 확인한다.
문 : 인생의 첫 번째 목적이 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고 영원토록 그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게 내가 세상에 태어난 목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이 물음에서 사람들은 많이 넘어진다.
“성서를 많이 읽고 공부해야지요.”
“기도를 많이 합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주의 사랑을 실천해야지요.”
등등 수많은 좋은 행동들을 열거한다. 물론 이 행위들도 선한 생각에서 나왔으니 나쁘지 않다. 그러나 핵심이 빠졌다.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일이 우선이어야 한다. 어쩌면 앞에서 말한 성서공부, 기도, 교회 생활, 사랑의 실천을 전혀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더라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사람은 주의 자녀이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빼버리면 있는 정성을 다해도 허사라는 말이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구원이 우리에게는 분명히 복음이지만, 또 다른 누구에게는 잔혹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바다.
내게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모두 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들어갈 것이다.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여, 주여,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 악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거라" 하고 분명히 말할 것이다.(마 7:21-23)
주여주여 하면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까지 행하지만, 정작 주님은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실 거라 한다. 왜 그런 사태가 났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다른 곁가지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곁가지가 아니라, 우리가 잡아야 할 완전한 줄기에 대해서 말해 보자.
2)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고 우리가 붙들어야 할, 그 완전한 줄기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다 알고 있듯이 우리 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들판의 목자들에게 나타난 천사들이 “하나님께는 영광이다”라고 찬송하였다. 십자가 죽음으로 향하는 아들의 탄생이 하나님께 슬픔이나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도 하나님의 영광이라 한다.
그렇다!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죽으시고 부활한 이 과정이 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이다.
바울 사도가 앞의 4절과 5절에서 ‘사랑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을 분명히 밝혔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였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의 자녀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6절 끝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대신에 ‘그 사랑하시는 자’라고 칭한다. 이 ‘사랑하시는 자’가 오늘의 7절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어가신다는 뜻이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獨生子), 곧 외아들이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공생애 중에 예수를 가리켜 ‘사랑하는 아들’이라 직접 말씀하신 일이 있다.
처음은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두 번째는 제자들(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의 일이다.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덮고 구름 속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이 사람은 내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내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 17:5)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요, 그 본체의 형상(히 1:1-3)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 그 본체(本體), 독생하신 아들이자 하나님이다.
사도 요한도 증언하였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아버지 품속의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다”(요 1:18)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을 보내셨다”(갈4:4).
그 사랑하시는 자, 독생하신 하나님을 세상으로 보내신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다. 왜인가? 세상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요 3:16).
3)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사랑하시는 자와 하나님의 영광을 거저 주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불렀다.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 예수님의 기도(요 17:23) 속에서 찾아보자.
“나와 저희와 아버지가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과 함께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시려 한다. 아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알게 된 사람들을 아들만큼 사랑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나 세상에게 대가를 지불해서가 아니다. 그냥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바다.
거저 주신다. 이는 공짜로 아무런 요구도 없이 베푸는 은혜다. 그것이 참 수수께끼이다. 왜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인정하고, 믿는 사람이 되었을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덕분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의무를 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성경을 잘 읽지도 않고, 성서 연구와는 멀고, 기도를 전혀 안 하는 날도 많고, 교회 생활도 하지 않으며, 선한 실천도 없는 내가 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 생각하면 부끄러움이 앞선다.
3. 맺으며
하나님의 영광은 ‘은혜의 영광’이다. 은혜는 헬라어 원어로 ‘카리토오(χαριτόω)’인데 하나님의 크신 은총(highly favoured)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 마리아에게 수태고지 하면서 쓴 단어이다(막 1:28).
“크신 은총(κεχαριτωμενη(χαριτόω))을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을 품게 되는 마리아. 에베소서는 우리를 향해 똑같이 ‘크신 은총을 거저 받은 자’라 부른다. 하나님의 아들을 품게 된 마리아처럼 우리도 그 아들은 품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다.
조명한 교수도 이 부분에서 말씀하였다.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영광에 근접할 수 없다. 은혜에 들어감을 믿음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여 찬미할 수 있다. 우리를 택하시어 거룩하다 부르시고 당신의 자식으로 우리를 양자삼으시기로 예정하신 것이 하나님의 의지의 선한 기쁘심이라면, 그 기뻐하심을 입은 기독자로서는 비로서 개안하여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바라보고 찬미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 같은 사람에게도 ‘거저 주시는 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고 있음을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송한다. 그리고 우리 가족이, 우리 이웃이 이 크신 은총 안에 함께 속하여 있기를 항상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