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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일미구(曠日彌久)
曠:빌‧멀 광. 日:날 일. 彌:많을 미. 久:오랠 구.
[출전]《戰國策》〈趙策〉
오랫동안 쓸데없이 세월만 보낸다는 뜻.
전국 시대 말엽,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 때의 일이다. 연(燕)나라의 공격을 받은 혜문왕은 제(齊)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3개 성읍(城邑)을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명장 전단(田單)의 파견을 요청했다. 전단은 일찍이 연나라의 침략군을 화우지계(火牛之計)로 격파한 명장인데 조나라의 요청에 따라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러자 조나라의 명장 조사(趙奢)는 재상 평원군(平原君)에게 항의하고 나섰다.
“아니, 조나라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제게 맡겨 주신다면 당장 적을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평원군은 안 된다고 말했다. 구러자 조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나라와 연나라는 원수간이긴 합니다만 전단은 타국인 조나라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강대한 조나라는 제나라의 패업(霸業)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단은 조나라 군사를 장악한 채 ‘오랫동안 쓸데없이 세월만 보낼 것입니다[曠日彌久].’ 두 나라가 병력을 소모하여 피폐해지는 것을 기다리면서…….”
평원군은 조사의 의견을 묵살한 채 미리 정한 방침대로 전단에게 조나라 군사를 맡겨 연나라 침공군과 대적케 했다. 결과는 조사가 예언한 대로 두 나라는 장기전에서 병력만 소모하고 말았다.
[주] 화우지계 : 쇠뿔에 칼을 잡아매고 꼬리에 기름 바른 갈대 다발을 매단 다음 그 소떼를 적진으로 내모는 전술.
교언영색(巧言令色)
巧:교묘할 교, 言:말씀 언, 令:명령할‧하여금 령, 色:빛 색
[반의어] 강의목눌(剛毅木訥), 성심성의(誠心誠意).
[참조] 눌언민행(訥言敏行). [출전]《論語》〈學而篇〉
발라 맞추는 말과 알랑거리는 태도라는 뜻으로,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표정을 이르는 말.
공자[孔子:이름은 구(丘).B.C.551~479]는 아첨꾼에 대해 《논어(論語)》〈학이편(學而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발라 맞추는 말과 아랑거리는 태도에는 ‘인(仁)’이 적다.
[巧言令色 鮮矣仁(교언영색 선의인)]
말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뒤집어서 또 공자는 〈자로편(子路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강직 의연하고 질박 어눌한 사람은 ‘인’에 가깝다.
[剛毅木訥 近仁(강의목눌 근인)]
의지가 굳고 용기가 있으며 꾸밈이 없고 말수가 적은 사람은 ‘인(덕을 갖춘 군자)’에 가깝다는 뜻. 그러나 이러한 사람이라도 ‘인(덕을 갖춘 군자)’ 그 자체는 아니라고 공자는 〈옹야편(擁也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질 빈빈한 연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
[文質彬彬 然後君子(문질빈빈 연후군자)]
문(文:형식)과 질(質:실질)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 군사라는 뜻이다.
구밀복검(口蜜腹劍)
口:입 구. 蜜:꿀 밀. 腹:배 복. 劍:칼 검.
[유사어] 소리장도(笑裏藏刀), 소중유검(笑中有劍).
[출전]《新唐書》
입 속에는 꿀을 담고 뱃속에는 칼을 지녔다는 뜻으로, 말로는 친한체하지만 속으로는 은근(慇懃)히 해칠 생각을 품고 있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당(唐)나라 현종(玄宗: 712~756) 후기에 이림보(李林甫)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태자 이하 그 유명한 무장(武將) 안록산(安祿山)까지 두려워했던 전형적인 궁중 정치가(宮中政治家)였다. 뇌물로 환관과 후궁들의 환심을 사는 한편 현종에게 아첨하여 마침내 재상이 된 그는, 당시 양귀비(楊貴妃)에게 빠져 정사(政事)를 멀리하는 현종의 유흥을 부추기며 조졍을 좌지우지했다.
만약 바른말을 하는 충신이나 자신의 권위에 위협적인 신하가 나타나면 가차없이 제거했다. 그런데 그가 정적을 제거할 때에는 먼저 상대방을 한껏 추켜 올린 다음 뒤통수를 치는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수법을 썼기 때문에 특히 벼슬아치들은 모두 이림보를 두려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림보는 ‘입으로 꿀 같은 말을 하지만 뱃속에는 무서운 칼이 들어 있다[口蜜腹劍].’”
[주] 궁중 정치 : 궁정(宮廷)의 귀족(貴族) 또는 궁정의 대신(大臣)에 의해 행하여지는 정치.
구우일모(九牛一毛)
九:아홉 구, 牛:소 우, 一:한 일, 毛:털 모
[유사어] 창해일속(滄海一粟), 창해일적(滄海一滴), 대해일적(大海一滴)
[참조] 인생조로(人生朝露), 중석몰촉(中石沒鏃)
[출전] ≪漢書≫ <報任安書>, ≪文選≫ <司馬遷 報任少卿書>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한 개의 (쇠)털이라는 뜻으로, 많은 것 중에 가장 적은 것의 비유.
한(漢)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B.C. 141~87) 때(B.C. 99) 5000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B.C. 72)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난전(亂戰)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하여 후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하여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B.C. 135?~93?)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던 이광(李廣)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國難)에 임할 용장(勇將)’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가(史家)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아뢰었다.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하였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옵니다. 하오나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옵니다.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오소서.”
무제는 진노하여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다.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것으로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이를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고 적고, 이어 착잡한 심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네.”
사마천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으로 봉직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시(B.C. 122)에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사기(史記)》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로부터 2년후에 중국 최초의 사서(史書)로서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로 꼽히는 《사기》130여권이 완성(B.C. 97)되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주] 태사령 : 조정(朝廷)의 기록‧천문‧제사 등을 맞아보던 관청의 관리. 사관(史官).
사마천 : 전한의 역사가. 지는 자장(子長). 경칭은 태사공(太史公). 젊었을 때 전국 각처를 주유(周遊)하며 전국 시대 제후(諸侯)의 기록을 수집 정리함. 기원전 104년 공손경(公孫卿)과 함께 태초력(太初曆)을 제정하여 후세 역법(曆法)의 기틀을 마련함. 아버지 사마담(史馬談)의 뒤를 이어 태사령(太史令)이 됨. 흉노(匈奴) 토벌 중 포로가 되어 투항한 이릉(李陵)장군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을 받음. 기원전 97년 불후의 명저《사기》130권을 완성함. (B.C. 135?~93?)
국사무쌍(國士無雙)
國:나라 국. 士:선비 사. 無:없을 무. 雙:쌍 쌍.
[유사어]동량지기(棟梁之器) [출전]《史記》〈淮陰侯列傳〉
나라 안에 견줄 만한 자가 없는 인재라는 뜻으로 국내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일컫는 말.
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에 의해 진나라가 멸망한 한왕 원년(元年:B.C. 206)의 일이다. 당시 한군(漢軍)에는 한신(韓信)이라는 군관이 있었다. 처음에 그는 초군(楚軍)에 속해 있었으나 아무리 군략(軍略)을 헌책(獻策)해도 받아 주지 않는 항우에게 실망하여 초군을 이탈, 한군에 투신한 자이다. 그 후 한신은 우연한 일로 재능을 인정받아 군량을 관리하는 치속도위(治粟都尉)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직책상 승상인 소하(蕭何)와도 자주 만났다. 그래서 한신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안 소하는 그에게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 무렵, 고향을 멀리 떠나온 한군은 향수에 젖어 도망치는 장병이 날로 늘어나는 바람에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 도망병 가운데는 한신도 끼어 있었다. 영재(英才)를 자부하는 그는 치속도위 정도로는 도저히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소하는 한신이 도망갔다는 보고를 받자 황급히 말에 올라 그 뒤를 쫓았다. 그 광경을 본 장수가 소하도 도망가는 줄 알고 유방에게 고했다. 그러자 오른팔을 잃은 듯이 낙담한 유방은 노여움 또한 컸다. 그러데 이틀 후 소하가 돌아왔다. 유방은 말할 수 없이 기뻤지만 노한 얼굴로 도망친 이유를 물었다.
“승상(丞相)이란 자가 도망을 치다니, 대체 어찌된 일이오?”
“도망친 것이 아니오라, 도망친 자를 잡으러 갔던 것이옵니다.”
“그래, 누구를?”
“한신이옵니다.”
“뭐, 한신? 이제까지 열 명이 넘는 장군이 도망쳤지만, 경은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뒤쫓은 적이 있소?”
“이제까지 도망친 제장(諸將) 따위는 얼마든지 얻을 수 있사오나, 한신은 실로 ‘국사무쌍’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옵니다. 만약 전하께오서 이 파촉(巴蜀)의 땅만으로 만족하시겠다면 한신이란 인물은 필요 없사옵니다. 하오나 동방으로 진출해서 천하를 손에 넣는 것이 소망이시라면 한신을 제쳐놓고는 함께 군략을 도모할 인물이 없는 줄로 아나이다.”
“물론, 과인은 천하 통일이 소망이오.”
“하오면 한신을 활용하시오소서.”
“짐은 한신이란 인물을 모르지만 경이 그토록 천거하니 경을 위해 그를 장군으로 기용하겠소.”
“그 정도로는 활용하실 수 없사옵니다.”
“그러면 대장군에 임명하겠소.”
이리하여 한신은 대장군이 되었다. 즉 기량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다.
군맹무상(群盲撫象)
群:무리 군. 盲:소경 맹. 撫:어루만질 무. 象:코끼리 상.
[동의어] 군맹모상(群盲摸象). 군맹평상(群盲評象).
[출전]《涅槃經(열반경)》
여러 소경이 코끼리를 어루만진다는 뜻. 곧 ① 범인(凡人)은 모든 사물을 자기 주관대로 그릇 판단하거나 그 일부밖에 파악하지 못함의 비유. ② 범인의 좁은 식견의 비유.
인도의 경면왕(鏡面王)이 어느 날 맹인들에게 코끼리라는 동물을 가르쳐 주기 위해 그들을 궁중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신하를 시켜 코끼리를 끌어오게 한 다음 소경들에게 만져 보라고 했다. 얼마 후 경면왕은 소경들에게 물었다.
“이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느냐?”
그러자 소경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다.
“예, 알았나이다.”
“그럼, 어디 한 사람씩 말해 보아라.”
소경들의 대답은 각기 자기가 만져 본 부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달랐다.
“무와 같사옵니다.” (상아)
“키와 같나이다.” (귀)
“돌과 같사옵니다.” (머리)
“절굿공 같사옵니다.” (코)
“널빤지와 같사옵니다.” (다리)
“독과 같사옵니다.” (배)
“새끼줄과 같사옵니다.” (꼬리)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코끼리는 석가모니(釋迦牟尼)를 비유한 것이고, 소경들은 밝지 못한 모든 중생(衆生)들을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모든 중생들이 석가모니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즉 모든 중생들에게는 각기 석가모니가 따로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군자삼락(君子三樂)
君:임금 군. 子:아들 자. 三:석 삼. 樂:즐길 락, 좋아할 요.
[원말]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 [유사어] 익자삼요(益者三樂)
[반의어] 손자삼요(損者三樂) [출전]《孟子》〈盡心篇〉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말.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B.C. 372?~289?)는 《맹자(孟子)》〈진심편(盡心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
[君子有三樂(군자 유삼락)]
첫째 즐거움은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父母具存 兄弟無故(부모구존 형제무고)]
둘째 즐거움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
[仰不傀於天 俯不怍於人(앙불괴어천 부부작어인)]
셋째 즐거움은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得天下英才 而敎育之(득천하영재 이교육지)]
한편 공자는 《논어(論語)》〈계시편(季시篇)〉에서 ‘손해 되는 세가지 좋아함[損者三樂(손자삼요)]’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교락(驕樂:방자함을 즐김), 일락(逸樂:놀기를 즐김), 연락(宴樂:주색을 즐김).
권토중래(捲土重來)
捲:걷을‧말 권. 土:흙 토. 重:무거울‧거듭할 중. 來:올 래.
[원말] 권토중래(卷土重來)
[참조] 선즉제인(先則制人), 건곤일척(乾坤一擲), 사면초가(四面楚歌).
[출전] 두목(杜牧)의 시〈題烏江亭〉
흙먼지를 말아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온다는 뜻으로, 한 번 실패한 사람이 세력을 회복해서 다시 공격(도전)해 온다는 말.
이 말은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803~852)의 시〈제오강정(題烏江亭)〉에 나오는 마지막 구절이다.
승패는 병가도 기약할 수 없으니 [勝敗兵家不可期(승패병가불가기)]
수치를 싸고 부끄럼을 참음이 남아로다 [包羞忍恥是男兒(포수인치시남아)]
강동의 자제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江東子弟俊才多(강동자제준재다)]
‘권토중래’는 아직 알 수 없네 [捲土重來未可知(권토증래미가지)]
오강[烏江:안휘성(安徽省)내]은 초패왕(楚霸王) 항우(項羽:B.C. 232~202)가 스스로 목을 쳐서 자결한 곳이다. 한왕 유방(劉邦)과 해하(垓下:안휘성 내)에서 펼친 ‘운명과 흥망을 건 한판 승부[乾坤一擲]’에서 패한 항우는 오강으로 도망가 정장(亭長)으로부터 “강동(江東:江南, 양자강 하류 이남의 땅)으로 돌아가 재기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항우는 “8년 전(B.C. 209) 강동의 8000여 자제와 함께 떠난 내가 지금 혼자 ‘무슨 면목으로 강을 건너 강동을 돌아가[無面 江東]’ 부형을 대할 것인가”라며 파란 만장한 31년의 생애를 마쳤던 것이다.
항우가 죽은 지 100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두목은 오강의 객사(客舍)에서 일세의 풍운아(風雲兒), 단순하고 격한 성격의 항우, 힘은 산을 뽑고 의기는 세상을 덮는 장사 항우, 사면 초가(四面楚歌)속에서 애인 우미인(虞美人)과 헤어질 때 보여 준 인간적인 매력도 있는 항우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강동의 부형에 대한 부끄러움을 참으면 강동은 준재가 많은 곳이므로 권토중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않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자결한 항우를 애석히 여기며 이 시를 읊었다. 이 시는 항우를 읊은 시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당송 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인 왕안석(王安石)은 ‘강동의 자제는 항우를 위해 권토중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읊었고, 사마천(司馬遷)도 그의 저서《사기(史記)》에서 ‘항우는 힘을 과신했다’고 쓰고 있다.
금의야행(錦衣夜行)
錦:비단 금 衣:옷 의. 夜:밤 야. 行:다닐‧행할 행.
[동의어] 의금야행(衣錦夜行). 수의야행(繡衣夜行).
[반의어] 금의주행(錦衣晝行).
[출전]《漢書》〈項籍傳〉.《史記》〈項羽本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간다는 뜻. 곧 ① 아무 보람없는 행동의 비유. ② 입신 출세(立身出世)하여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음의 비유.
유방(劉邦)에 이어 진(秦)나라의 도읍 함양(咸陽)에 입성한 항우(項羽)는 유방과는 대조적인 행동을 취했다. 우선 유방이 살려 둔 3세 황제 자영(子嬰)을 죽여 버렸다(B.C. 206). 또 아방궁(阿房宮)에 불을 지르고 석 달 동안 불타는 그 불을 안주삼아 미녀들을 끼고 승리를 자축했다. 그리고 시황제(始皇帝)의 무덤도 파헤쳤다. 유방이 창고에 봉인해 놓은 엄청난 금은 보화(金銀寶貨)도 몽땅 차지했다.
모처럼 제왕(帝王)의 길로 들어선 항우가 이렇듯 무모하게 스스로 그 발판을 무너뜨리려 하자 모신(謀臣) 범증(范增)이 극구 간했다. 그러나 항우는 듣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누벼온 싸움터를 벗어나 많은 재보와 미녀를 거두어 고향인 강동(江東)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자 한생(韓生)이라는 사람이 간했다.
“관중(關中:함양을 중심으로 하는 분지)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요충지인데다 땅도 비옥하옵니다. 하오니 이곳에 도읍을 정하시고 천하를 호령하시오소서.”
그러나 항우의 눈에 비친 함양은 황량한 폐허일 뿐이었다. 그보다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 성공한 자신을 과시하고 싶었다. 항우는 동쪽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귀한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錦衣夜行]’과 같아 누가 알아줄 것인가…….”
항우에게 함양에 정착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안 한생은 항우 앞을 물러나자 이렇게 말했다.
“초(楚)나라 사람은 ‘원숭이[沐猴]에게 옷을 입히고 갓을 씌워 놓은 것[沐猴而冠]처럼 지혜가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군.”
이 말을 전해 들은 항우는 크게 노하여 당장 한생을 삶아 죽였다고 한다.
[주] 이 ‘금의야행’에서 ‘금의주행(錦衣晝行:비단옷을 입고 낮길을 간다)’ ‘금의환향(錦衣還鄕:비단옷을 입고-입신 출세해서-고향으로 돌아간다)’이라는 말이 나왔음.
기인지우(杞人之優)
杞:나라 이름 기. 人:사람 인. 之:갈 지(…의). 優:근심 우.
[준말] 기우(杞優). [동의어] 기인우천(杞人優天).
[유사어] 오우천월(吳牛喘月). [출전]《列子》〈天瑞篇(천서편)〉
기(杞)나라 사람의 군걱정이란 뜻. 곧 쓸데없는 군걱정. 헛 걱정. 무익한 근심.
주왕조(周王朝) 시대, 기나라에 쓸데없는 군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만약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진다면 몸둘 곳이 없지 않은가?’ 그는 이런 걱정을 하느라 밤에 잠도 못 이루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그러자 ‘저러다 죽지 않을까?’ 걱정이 된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하늘은 (공)기가 쌓였을 뿐이야. 그래서 기가 없는 곳이 없지. 우리가 몸을 굴신(屈伸:굽힘과 폄)하고 호흡을 하는 것도 늘 하늘 안에서 하고 있다네. 그런데, 왜 하늘이 무너져 내린단 말인가?”
“하늘이 과연 기가 쌓인 것이라면 일월성신(日月星辰:해와 달과 별)이 떨어저 내릴 게 아닌가?”
“일월성신이란 것도 역시 쌓인 기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일 뿐이야. 설령 떨어져 내린다 해도 다칠 염려는 없다네.”
“그럼, 땅이 꺼지는 일은 없을까?”
“땅은 흙이 쌓였을 뿐이야. 그래서 사방에 흙이 없는 곳이 없지. 우리가 뛰고 구르는 것도 늘 땅 위에서 하고 있다네. 그런데 왜 땅이 꺼진단 말인가? 그러니 이젠 쓸데없는 군걱정은 하지 말게나.”
이 말을 듣고서야 그는 비로소 마음을 넣았다고 한다.
기호지세(騎虎之勢)
騎:말탈 기. 虎:범 호. 之:갈 지(…의). 勢:기세‧형세 세.
[원말] 기수지세(騎獸之勢). [유사어] 기호난하(騎虎難下).
[출전]《 書》〈獨孤 傳〉
호랑이를 자고 달리는 기세라는 뜻. 곧 ① 중도에서 그만둘 수 없는 형세. ② 내친걸음.
남북조(南北朝) 시대 말엽인 581년, 북조 최후의 왕조인 북주(北周)의 선제(宣帝)가 죽자, 재상 양견(楊堅)은 즉시 입궐하여 국사를 총괄했다. 외척이지만 한족(漢族)이었던 그는 일찍이 오랑캐인 선비족(鮮卑族)에게 빼앗긴 이 땅에 한족의 천하를 회복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참에 선제가 죽은 것이다.
양견이 궁중에서 모반을 꾀하고 있을 때 이미 양견의 뜻을 알고 있는 아내 독고(獨孤) 부인으로부터 전간(傳簡)이 왔다.
“‘호랑이를 타고 달리는 기세이므로 도중에서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騎虎之勢 不得下].’만약 도중에서 내리면 잡혀 먹히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호랑이와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디 목적을 달성하시오소서.”
이에 용기를 얻은 양견은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한 나이 어린 정제(靜帝)를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문제(文帝)라 일컫고 국호를 수(隋)라고 했다. 그로부터 8년 후인 589년, 문제는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陳:557~589)나라마저 멸하고 마침내 천하를 통일했다.
기화가거(奇貨可居)
奇:기이할 기. 貨:재물 화. 可:옳을‧허락할 가. 居:살‧있을 거.
[출전]《史記》〈呂不韋列傳〉
진귀한 물건을 사 두었다가 훗날 큰 이익을 얻게 한다는 뜻. 곧 ① 좋은 기회를 기다려 큰 이익을 얻음. ② 훗날 이용할 수 있는 사람을 돌봐 주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림. ③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음.
전국시대 말, 한(韓)나라의 큰 장사꾼인 여불위(呂不韋:?~B.C.235)는 무역을 하러 조(趙)나라의 도읍 한단(邯鄲)에 갔다가 우연히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의 손자인 자초(子楚)가 볼모로서 이곳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이 장사꾼의 머리에는 기발한 영감이 번뜩였다.
‘이것이야말로 기화로다. 사 두면 훗날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여불위는 즉시 황폐한 삼간 초가에 어렵게 살아가는 자초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귀공의 부군이신 안국군(安國君)께서 멀지 않아 소양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정빈(正嬪)인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게는 소생이 없습니다. 그러면 귀공을 포함하여 20명의 서출(庶出) 왕자 중에서 누구를 태자로 세울까요? 솔직히 말해서 귀공은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건 그렇소만,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소생에게는 천금(千金)이 있습니다. 그 돈으로 우선 화양부인에게 선물을 하여 환심을 사고, 또 널리 인재를 모으십시오. 소생은 귀공의 귀국을 위해 조나라의 고관들에게 손을 쓰겠습니다. 그리로 귀공과 함께 진나라로 가서 태자로 책봉되도록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만약 일이 성사되면 그대와 함께 진나라를 다스리도록 하겠소.”
여불위는 자기 자식을 회임한 조희(趙姬)라는 애첩까지 자초에게 양보하여 그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뒤 재력과 능변(能辯)으로 자초를 태자로 세우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초가 왕위에 오르자[장양왕(莊襄王)] 그는 재상이 되었으며, 조희가 낳은 아들 정(政)은 훗날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
낙양지귀(洛陽紙貴)
洛:물 이름 락. 陽:볕 양. 紙:종이 지. 貴:귀할 귀.
[원말] 낙양지가귀(洛陽紙價貴). [동의어] 낙양지가고(洛陽紙價高).
[출전]《晉書》〈文 傳〉
‘낙양의 지가를 올리다’하는 뜻. 곧 저서가 호평을 받아 베스트 셀러가 됨을 이르는 말.
진(晉:265~316)나라 시대, 제(齊)나라의 도읍 임치(臨淄) 출신의 시인에 좌사(左思)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추남에다 말까지 더듬었지만 일단 붓을 잡으면 장려한 시를 썼다.
그는 임치에서 집필 1년 만에《제도부(齊都賦)》를 탈고하고 도읍 낙양[洛陽:하남성(河南省) 내]으로 이사한 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도읍 성도(成都), 오(吳)나라의 도읍 건업(建業:南京), 위(魏)나라의 도읍 업(鄴)의 풍물을 읊은《삼도부(三都賦)》를 10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화(張華)라는 유명한 시인이《삼도부》를 읽어 보고 격찬했다.
“이것은 반(班)‧장(張)의 유(流)이다.”
후한(後漢) 때《양도부(兩都賦)》를 지은 반고[班固:《한서(漢書)》저술],《이경부(二京賦)》를 쓴 장형(張衡)과 같은 대시인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자《삼도부》는 당장 낙양의 화제작이 되었고, 고관대작은 물론 귀족‧환관‧문인‧부호들이 그것을 다투어 베껴 썼다. 그 바람에 ‘낙양의 종이값이 올랐다[洛陽紙價貴]’고 한다.
남가일몽(南柯一夢)
南:남녘 남. 柯:가지 가. 一:한 일. 夢:꿈 몽.
[동의어] 남가지몽(南柯之夢). 남가몽(南柯夢). 괴몽(槐夢).
[유사어] 한단지몽(한鄲之夢). 무산지몽(巫山之夢). 일장춘몽(一場春夢). [출전]《南柯記》. 《異聞集》
남쪽 나뭇가지의 꿈이란 뜻. 곧, ① 덧없는 한때의 꿈. ② 인생의 덧없음의 비유.
당(唐)나라 9대의 황제인 덕종(德宗:780~804년) 때 광릉(廣陵) 땅에 순우분(淳于棼)이란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순우분이 술에 취해 집 앞의 큰 홰나무 밑에서 잠이 들었다. 그러나 남색 관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나타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괴안국왕(槐安國王)의 명을 받고 대인(大人)을 모시러 온 사신이옵니다.”
순우분이 사신을 따라 홰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자 국왕이 성문 앞에서 반가이 맞이했다. 순우분은 부마(駙馬)가 되어 궁궐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남가태수를 제수(除授)받고 부임했다. 남가군(南柯郡)을 다스린 지 20년, 그는 그간의 치적을 인정받아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때마침 침공해 온 단라국군(檀羅國軍)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아내까지 병으로 죽자 관직을 버리고 상경했다. 얼마 후 국왕은 ‘천도(遷都)해야 할 조짐이 보인다’며 순우분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잠에서 깨어난 순우분은 꿈이 하도 이상해서 홰나무 뿌리 부분을 살펴보았다. 과연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을 더듬어 나가자 넓은 공간에 수많은 개미의 무리가 두 마리의 왕개미를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가 괴안국이었고, 왕개미는 국왕 내외였던 것이다. 또 거기서 ‘남쪽으로 뻗은 가지(南柯)’에 나 있는 구멍에도 개미떼가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남가군이었다.
순우분은 개미 구멍을 원상대로 고쳐 놓았지만 그날 밤에 큰 비가 내렸다. 이튿날 구멍을 살펴보았으나 개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도해야 할 조짐’이란 바로 이 일이었던 것이다.
[주] 제수(除授) : 천거(薦擧)의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임금이 직접 벼슬을 시킴.
남상(濫觴)
濫:넘칠 람. 觴:술잔 상.
[유사어] 효시(嚆矢). 권여(權與).
[출전] 《荀自》〈子道篇〉.《孔子家語》〈三恕篇〉
겨우 술잔[觴]에 넘칠[濫]정도로 적은 물이란 뜻으로, 사물의 시초나 근원을 이르는 말.
공자의 제자에 자로(子路)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공자에게 사랑도 가장 많이 받았지만 꾸중도 누구보다 많이 듣던 제자였다. 어쨌든 그는 성질이 용맹하고 행동이 거친 탓에 무엇을 하든 남의 눈에 잘 띄었다.
어느 날 자로가 화려한 옷을 입고 나타나자 공자는 말했다.
“양자강(揚子江:長江)은 사천(四川)땅 깊숙이 자리한 민산(岷山)에서 흘러내리는 큰 강이다. 그러나 그 근원은 ‘겨우 술잔에 넘칠 정도[濫觴]’로 적은 양의 물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류로 내려오면 물의 양도 많아지고 흐름도 빨라져서 배를 타지 않고는 강을 건널 수가 없고,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배조차 띄울 수 없게 된다. 이는 모두 물의 양이 많아졌기 때문이니라.”
공자는, 매사는 시초가 중요하며 시초가 나쁘면 갈수록 더 심해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이다. 공자의 이 이야기를 들은 자로는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었다고 한다.
[주] 양자강 : 티베트 고원의 북동부에서 발원하여 동중국해로 흘러 들어감. 장강(長江)이라고도 불림. 길이 5800Km.
민산 : 사천(四川)‧청해(靑海) 두 성(省)의 경계에 위치한 산.
낭중지추(囊中之錐)
囊:주머니 낭. 中:가운데 중. 之:갈 지(…의). 錐:송곳 추.
[동의어] 추처낭중(錐處囊中). [출전]《史記》〈平原君列傳〉
주머니 속의 송곳이란 뜻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드러남의 비유.
전국 시대 말엽, 진(秦)나라의 공격을 받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동생이자 재상인 평원균(平原君:趙勝)을 초(楚)나라에 보내어 구원군을 청하기로 했다. 20명의 수행원이 필요한 평원군은 그의 3000여 식객(食客) 중에서 19명은 쉽게 뽑았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뽑지 못해 고심하고 있었다. 이 때 모수(毛遂)라는 식객이 자천(自薦)하고 나섰다.
“나리, 저를 데려가 주십시오.”
평원군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이렇게 물었다.
“그대는 내 집에 온 지 얼마나 되었소?”
“이제 3년이 됩니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囊中之錐]’ 끝이 밖으로 나오듯이 남의 눈에 드러나는 법이오. 그런데 내 집에 온 지 3년이나 되었다는 그대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름이 드러난 적이 없지 않소?”
“그건 나리께서 이제까지 저를 단 한 번도 주머니 속에 넣어주시지 않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에 주머니 속에 넣어 주시기만 한다면 끝뿐 아니라 자루[柄]까지 드러내 보이겠습니다.”
이 재치 있는 답변에 만족한 평원군은 모수를 수행원으로 뽑았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모수가 활약한 덕분에 국빈(國賓)으로 환대받으면서 구원군도 쉽게 얻을 수 있었디고 한다.
노마지지(老馬之智)
老:늙을 로. 馬:말 마. 之:갈 지(…의). 智:슬기‧지혜 지.
[동의어] 노마지도(老馬知道). [출전]《韓非子》〈說林篇〉
늙은 말의 지혜란 뜻으로,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저마다 장기나 장점을 지니고 있음을 이르는 말.
춘추 시대, 오패(五霸)의 한 사람이었던 제(齊)나라 환공(桓公:재위 B.C.685~643) 때의 일이다. 어느 해 봄, 환공은 명재상 관중(管仲:?~B.C.645)과 대부 습붕(隰朋)을 데리고 고죽국[孤竹國:하북성(河北省) 내]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런데 전쟁이 의외로 길어지는 바람에 그 해 겨울에야 끝이 났다. 그래서 혹한 속에 지름길을 찾아 귀국하다가 길을 잃고 말았다. 전군(全軍)이 진퇴 양난(進退兩難)에 빠져 떨고 있을 때 관중이 말했다.
“이런 때 ‘늙은 말의 지혜[老馬之智]’가 필요하다.”
즉시 늙은 말 한 마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전군이 그 뒤를 따라 행군한 지 얼마 안 되어 큰길이 나타났다.
또 한번은 산길을 행군하다가 식수가 떨어져 전군이 갈증에 시달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습붕이 말했다.
“개미란 원래 여름엔 산 북쪽에 집을 짓지만 겨울엔 산 남쪽 양지 바른 곳에 집을 짓고 산다. 흙이 한 치[一寸]쯤 쌓인 개미집이 있으면 그 땅 속 일곱 자쯤 되는 곳에 물이 있는 법이다.”
군사들이 산을 뒤져 개미집을 찾은 다음 그곳을 파 내려가자 과연 샘물이 솟아났다.
이 이야기에 이어 한비자(韓非子:韓非, ?~B.C.233)는 그의 저서《한비자》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관중의 총명과 습붕의 지혜로도 모르는 것은 늙은 말과 개미를 스승으로 삼아 배웠다. 그러나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어리석음에도 성현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아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잘못된 일이 아닌가.”
[주] ‘노마지지’란 여기서 나온 말인데 요즈음에도 ‘경험을 쌓은 사람이 갖춘 지혜’란 뜻으로 흔히 쓰이고 있음.
녹림(綠林)
綠:초록빛 록. 林:수풀 림.
[동의어] 녹림호객(綠林豪客)
[유사어] 백랑(白浪). 백파(白波). 야객(夜客).
[출전]《漢書》〈王莽傳〉.《後漢書》〈劉 傳〉
푸른 숲이란 뜻으로, 도둑 떼의 소굴을 일컫는 말.
전한(前漢:B.C. 202~A.D. 8) 말, 왕실의 외척인 대사마(大司馬) 왕망(王莽)은 한 왕조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나라 이름을 신(新:8~24)이라 일컬었다.
왕망은 농지, 노예, 경제 제도 등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책을 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복잡한 제도에 걸려 농지를 잃고 노예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점점 늘어났다. 또한 화폐가 8년 동안에 네 차례나 바뀌는 등 경제정책 역시 실패로 끝나는 바람에 백성들의 생활은 날로 어려워졌다. 그래서, 왕망은 백성들은 물론 귀족들로부터도 심한 반감을 샀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서북 변경의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대규모의 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 중에서도 지금의 호북성 당양현(湖北省當陽縣) 내의 녹림산에 근거지를 둔 8000여의 한 무리는 스스로를 ‘녹림지병(綠林之兵)’이라 일컫고 지주의 창고와 관고(官庫)를 닥치는 대로 털었다. 그 후 이 녹림지병은 5만을 헤아리는 대세력으로 부상했는데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光武帝:25~57) 유수(劉秀)는 그들을 십분 이용하여 왕망의 신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농단(壟斷)
壟:언덕 롱. 斷:끊을 단.
[원말] 농단(籠斷). [출전]《孟子》〈公孫추篇(공손추편)〉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 곧 ① 재물을 독차지함. ② 이익을 독점함.
전국시대, 제(齊)나라 선왕(宣王) 때의 일이다.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제국을 순방 중이던 맹자는 제나라에서도 수년간 머물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하려 했다. 그러자 선왕은 맹자에게 높은 봉록을 줄 테니 제나라를 떠나지 말아 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맹자는 거절했다.
“전하,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도 봉록에 달라붙어서 ‘재물을 독차지[壟斷]’할 생각은 없나이다.”
이렇게 말한 맹자는 ‘농단’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농단’은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언덕’이란 뜻인데, 전하여 ‘재물을 독차지한다’, ‘이익을 독점한다’는 뜻으로 쓰이게 된 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먼 옛날에는 시장에서 물물 교환을 했었다. 그런데 한 교활한 사나이가 나타나 시장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는 ‘높은 언덕[壟斷]’에 올라가 좌우를 살펴서 장사함으로써 ‘이익을 독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이 사나이의 비열(卑劣)한 수법을 증오(憎惡)하고 그에게 세금을 부과하기로 했다. 이 때부터 장사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누란지위(累卵之危)
累:여러‧포갤 루. 卵:알 란. 之:갈 지(…의). 危:위태할 위.
[준말] 누란(累卵). [동의어] 위여누란(危如累卵).
[참조] 원교근공(遠交近攻). [출전]《史記》〈范雎列傳〉
알을 쌓아(포개) 놓은 것처럼 위태로운 형세의 비유.
전국시대, 세 치의 혀[舌] 하나로 제후를 찾아 유세하는 세객(說客)들은 거의 모두 책사(策士)‧모사(謀士)였는데, 그 중에서도 여러 나라를 종횡으로 합쳐서 경륜하려던 책사‧모사를 종횡가(縱橫家)라고 일컬었다.
위(魏)나라의 한 가난한 집 아들로 태어난 범저(范雎)도 종횡가를 지향하는 사람이었으나 이름도 연줄도 없는 그에게 그런 기회가 쉽사리 잡힐 리 없었다. 그래서 우선 제(齊)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중대부(中大夫) 수가(須賈)의 종자(從者)가 되어 그를 수행했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수가보다 범저의 인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 기분이 몹시 상한 수가는 귀국 즉시 재상에게 ‘범저는 제나라와 내통하고 있다’고 참언(讒言)했다.
범저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거적에 말려 변소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는 모사답게 옥졸을 설득, 탈옥한 뒤 후원자인 정안평(鄭安平)의 집에 은거하며 이름을 장록(張祿)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망명할 기회만 노리고 있던 중 때마침 진(秦)나라에서 사신이 왔다. 정안평은 숙소로 은밀히 사신 왕계(王稽)를 찾아가 장록을 추천했다. 어렵사리 장록을 진나라에 데려온 왕계는 소양왕(昭襄王)에게 이렇게 소개했다.
“전하, 위나라의 장록 선생은 천하의 외교가 이옵니다. 선생은 진나라의 정치를 평하여 ‘알을 쌓아 놓은 것처럼 위태롭다[累卵之危]’며 선생을 기용하면 국태민안(國泰民安)할 것이라고 하였사옵니다.”
소양왕은 이 불손한 손님을 당장 내치고 싶었지만 인재가 아쉬운 전국 시대이므로, 일단 그를 말석에 앉혔다. 그 후 범저(장록)는 ‘원교근공책(遠交近攻策)’으로 그의 진가를 발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