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경찰총경 4대김형진 (金亨鎭)???
친일 경찰 노덕술은 1989-1968년 79세 사망
일제 강점기 고등계 형사에다 해방 후 수도 경찰청 간부등 경찰 고위 간부다
1920년 31세 경남 순사 임명
1922년 33세 울산 경찰서 순사 부장
1928년 39세 반일 단체 혁조회 김규직, 유진흥을 체포 고문, 김규직은 고문 후유증으로 1년후 사망
1929년 40세 반일 학생들을 체포해 무자비한 고문 자행
1943년 54세 경시로 승진해 평남 경찰부 보안과장.,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조
1945년 8월 56세 평양 경찰서 서장. 소랸군에 체포, 석방, 월남
1946년 57세 장택상에 의해 수도 경찰청 수사과장. 반 이승만 좌익 분자 검거
1948년 59세 수도 경찰청장 ㅡ장택상 저격 혐의의 박성근을 고문 치사하고 시신을 한강에 투기하고 도망 후 반민 특위 핵심 관게자 15명을 암살 모의
1949년 60세 반민특위에 체포됨. 이승만의 비호 아래 무죄 선고
" 그는 반공 투사다. 풀어 줘라"
1950년 66세 육본 범죄 수사 단장
1955년 71세 뇌물 수수 혐의로 군법 회의 징역 6개월 선고및 파면
1956년 72세 고향 울산에서 칩거 생활
1960년 76세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 울산 출마 낙선
악질 친일 경찰 노덕술은 광복군 부사령관 김원봉의 뺨을 때린다
중국에서 27년간 항일 무장 투쟁을 하던 김원봉은 노덕술의 폭력 때문에 1948년 평양 대회 참석 후 북한에 남는다. 나중에 김일성에게 숙청된다.
프랑스 해방 후 드골 장군은 나치에 협조한 1만명을 대부분 체포해 교수대로 처형한다. 독일에 협조한 비시 정부 수뇌부와 지식인을 처단한다. 국가 수반 페탱은 종신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서 병사하고 라발 총리는 사형 선고및 처형된다.
1500명이 사형된다. 대한민국은 친일 부역자를 단 한명도 사형시키지 못한다
1949년 6월 반민특위 사무실에 중부 경찰서장등 40명이 난입해 위원들을 체포 진압한다. 국회에 상정된 반민족 행위 처벌법은 이승만이 반대해 집행을 못한다
이승만은 친일파의 자금과 정보를 이용한 독재 정권이다
1948년 4.3. 제주도 빨치산 무장 봉기 사건에 1천명 이상의 서청회원이 걍찰이나 경비대 신분으로 진압 작전에 투입된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좌익 시민 가리지 않고 살인 폭행 약탈을 감행한다
김구 암살범 서청회원 안두희의 배후로 추측되는 서청회 부단장 김성주가 배신의 가능성이 보이자 원용덕 헌병 사령관이 자기 집 지하실로 끌고 가 죽여 버린다.
이승만의 정적인 진보당 조봉암이 김구 암살 배후를 공개하려 햇으나 증거 부족이다
1948년 10월 제주도 빨치산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은 14연대 2천명이 반란을 일으켜 장교 20명을 죽이고 남로당에 가입하고 여수를 점령 한 후 순천으로 이동해 순천 경찰서장 두눈을 뽑고 차로 쓸고 다니다가 불태워 죽이고 구례 곡성 남원을 공격한다
독립 운동가 여성 정정화는 1900-1991년 91세 사망
1920년 20세 상하이로 망명 후 중국 국내를 10여차례 오가면서 독립 운동 자금 모집책 연락책을 하다. 중국 망명 27년간 김구 이동녕등 임정 요원과 가족들을 돌보며 임정의 안살림꾼을 하다
1940년 40세 한국 혁명 여성 동맹을 조직
1943년 43세 대한 애국 부인회 훈련 부장
1946년 46세 개인 자격으로 귀국. 남한 생활이 녹녹치 않다. 부역죄로 옥고를 치루다
[출처] 친일 경찰 노덕술과 독립 운동가 정정화|작성자 골드만 싹쓰리
김태석이 1세대 친일 경찰이었다면 더 악명 높았던 2세대 친일 경찰의 대명사는 노덕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은 총애했다
노덕술이 의열단의 수장이자 임시정부에서 광복군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김원봉을 연행해 모욕을 준 일화는 해방 후 왜곡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김원봉은 좌익 계열의 인사였지만, 임시정부 합류 이후 큰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는 좌. 우 합작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지만, 중국 공산당과 대치되는 장개석 정부의 지원을 받았고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근간으로 했다.
반민특위는 제헌헌법을 제정하던 당시 만들어진 특별법으로 구성되었지만, 출범 초기부터 어려운 여정을 지속했다. 해방 후 사회 각 분야에서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는 친일 세력들이 방해가 극심했다. 이승만 대통령 역시 반민특위에 비판적이었다. 반민특위는 독자적으로 본분을 다하려 했지만, 행정부의 비협조와 친일 경찰들의 조직적이 방해와 폭력,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반민특위를 지지하던 정치세력들이 몰락하면서 힘을 잃었다. 결국, 반민특위는 친일청산과 친일파 숙청이라는 국민적 여망을 이루지 못하고 1년여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는 친일청산의 소중한 기회가 사라지는 일이었다.
정의롭지 못한 이들이 주장하는 정의는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정의의 바탕 위에 공권력은 더 권위를 세울 수 있지만, 해방 후 우리 사회는 정의를 구현하지 못했다. 공권력의 바탕이 되는 경찰도 다르지 않았다. 대표적 친일 경찰인 김태석과 노덕술의 삶이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이는 친일 청산 실패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제 많은 세월이 흘렀다고 하지만, 친일의 그림자는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고 그때 쌓은 친일파들의 부와 명예는 세습되었다. 그들 상당수는 여전히 우리 사회의 지도층으로 자리하고 있다. 반대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들과 그 자손들은 경제적으로 힘든 삶은 사는 이들이 다수다. 결코 나와서는 안되는 불평등이다.
그들에 대한 청산과 숙청은 어렵지만, 대신 우리가 할 일이 있다. 역사를 통해 그들을 기억하고 그 역사를 계속 전달해 주는 일이다. 이를 통해 그들의 친일 행적이 민족을 배반한 부끄러운 일임을 기록으로 남기고 젊은 세대들에게 알려줘야 한다. 그 점에서 김태석, 노덕술의 악행은 영원히 기억해야 할 역사라 할 수 있다.
1937년~1938년 직접 적은 공훈기록에 의하면 중국으로 군수품을 수송한 업무는 84회,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전활동과 친일좌담회를 진행한 것은 35회에 달한다.
일주일에 한번은 군수품을 가지고 운반했고 2주에 한번은 친일좌담회를 개최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35년동안 경시가 조선인은 21명인데 그 중에 김태석과 노덕술이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