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흥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제4자인 보국대안군 평장사輔國大安君平章事 휘諱 은열殷說의 후예이다. 시조 휘 보寶는 고려에서 금오위정용중랑장金吾衛精勇中郞將을 지냈고, 아들 휘 덕인德仁은 좌우위정용장군左右衛精勇將軍이요, 손자 휘 천록天祿이 본국에서 광정대부 도첨의시랑찬성사상장군 판판도사사匡靖大夫都僉議侍郞贊成事上將軍判版圖司事요, 원조元朝에서 내린 충현교위 관군총파忠顯校尉管軍摠把)가 되었고, 원종元宗 11년 삼별초三別抄가 진도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김충렬공金忠烈公 방경方慶과 함께 여러차례 평정하여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충렬왕忠烈王 6년庚辰에 려·원연합군麗·元聯合軍이 일본을 격멸할 때 구주축전九州筑前에서 큰 전공戰功을 세웠다. 이로 인하여 서흥군瑞興君에 봉작을 받았고 이 때부터 본관을 서흥으로 쓰게 되었다.
서흥군의 아들 휘 세구世丘는 봉익대부판도판서奉翊大夫版圖判書, 손자 봉환奉還은 정순대부성균대사성正順大夫成均大司成 및 안동대도호부안집사安東大都護府按集使요, 증손 휘 선보善保는 봉순대부판서운관사奉順大夫判書雲館事인데 이상은 모두 고려조에 벼슬하였다.
자헌대부資憲大夫 김공金公은 곧 판서운관사공(判書雲館事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여흥민씨驪興閔氏 화평부사化平府使 자명子明의 따님이다.
휘는 중건中乾 자字는 문원文元 호號를 인재仁齋라 하였다. 한성부 정동(漢城府貞洞)에서 출생하여 조선 태조 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태조에서 세종까지 사조四祖를 섬겨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삼도의 도사都事, 삼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는데 가는 곳마다 청백리淸白吏로 명예가 있었고 중앙직으로는 공조참의工曹參議, 형조참판(刑曹參判 및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아아! 공은 조년에 등과하여 오랫동안 지방의 요직에 있었으니 그의 문학과 행의行誼 및 임금과 나라를 위하여 후세에 전할 만한 사적事績이 많았을 것이나 누차의 사화士禍와 병란兵亂으로 인하여 고증할 만한 문헌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애석하고 통탄할 일이다.
공의 형제는 세 사람인데 공이 맏이요, 다음은 예조참의禮曹參議 휘諱 중곤中坤이요, 끝은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휘 중인中寅이다.
공이 정부인貞夫人 창녕성씨昌寧成氏 판도판서版圖判書 중용仲庸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아들 형제를 두었으니 장자長子는 휘 계술啓述이니 생원生員이요, 다음은 휘 계원啓遠이고 자字는 삼원三原이다. 계술의 아들 휘 효인孝仁은 정의현감旌義縣監 좌리원정공신佐理原從功臣이요, 효인의 장자長子 휘 석규碩珪는 사직司直 좌리이등공신佐理二等功臣이요, 다음 휘 석장碩璋은 건공장군建功將軍이요, 석규의 종손 휘 충수忠守는 임진란에 의병장으로 죽산에서 순절하였고 충수의 아들 함涵)은 아버지를 따라 순의殉義하니 후일 조가朝家에서 충수에게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함에게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추증追贈)하고 장령에게는 충신忠臣), 지평에게는 효자孝子의 정려旌閭를 내렸으며 또 지평의 손부孫婦 온양정씨溫陽鄭氏와 현손부玄孫婦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열부烈婦로 정려旌閭가 내려져 충효열忠孝烈 삼강三綱을 갖춘 사위四位의 정포旌褒를 받았다.
그리고 명종조明宗朝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휘 색洓, 경양찰방景陽察訪 휘 신기愼機, 영조英祖조의 예조좌랑禮曺佐郞 휘 응문應文, 고종高宗조의 참령參領 휘 원계元桂가 있으며 휘 계원의 후로 숙종조肅宗朝의 예조정량禮曺正郞 휘 만익萬益, 가선대부행부총관 휘 상섭尙燮, 무자식문과戊子式文科 휘 배윤培胤 등 과환科宦에 진출한 분들이 많았고, 증영의정贈領議政 한훤당寒暄堂 휘 굉필宏弼은 곧 공의 종증손從曾孫이요, 왕자사부王子師傅 죽오당竹悟堂 휘 건鍵은 족손族孫이다.
후손이 각지에 산거하는데 많이 집거하는 곳은 경기도의 안성 · 이천, 평안도의 평원 · 순천, 전라도의 영광 · 광양이다. 공의 묘가 본시 황해도 서흥부瑞興府에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 그 소재를 알 길이 없다. 근자에 후손들이 합의하고 마침내 안성군 고삼면 월노동安城郡 古三面 月老洞 응봉산鷹峰山 밑 양지바른 자리에 공의 제단祭壇을 축조하였다.
이곳은 기술한 바와 같이 후손의 집단 세거지일쁜 아니라 공의 생장지生長地였던 서울에서 가깝고 또 공의 현손 현감공縣監公 이하의 삼강정려각三綱旌閭閣이 있는 곳이며 앞에는 기호저수지의 만경평호萬頃平湖가 그림처럼 펼쳐있어 경승지로도 이름이 높은 명소이다.
단壇이 이루어진 뒤에 사손嗣孫 택수澤洙씨의 발의로 단비건립壇碑建立을 추진하여 후손들의 성금과 각 종문宗門에서 기금을 모아 입석立石의 준비를 마치고 족후손族後孫 양산군수梁山郡守 홍식弘埴씨를 통하여 임창순任昌淳 나에게 비에 새길 글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오늘날 사회풍조가 퇴패頹敗하여 선조를 숭앙하는 미풍양속이 무너져 가는 이때 오히려 몇 백년 전 공의 체백體魄이 안장安葬된 곳을 잃어버린 것을 애닯게 여겨 다시 향화香火를 올릴 곳을 마련함은 공의 유덕을 빛내며 오는 세대에 교훈을 드리우는 성사盛事이다.
또한 옛 성인도 신종추원민덕귀후愼終追遠民德歸厚) 곧 부모의 장사에 효성을 다하고 선대의 제사에 정성을 바치면 민심이 후해진다 하였으니 서흥김씨일문瑞興金氏一門의 선대를 위한 정성은 사회도의양양에 크게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 뜻을 기꺼이 받아들여 공의 약력略歷과 선후의 계조系譜를 대강 추려 이상과 같이 기록하여 후대에 전하려 한다.
첫댓글 보감(117-120쪽)에 수록된 판서공 설단비문 전문을 부록용으로 올립니다.
비문의 글은 고 임창순 옹이 지은 것으로 비문 내용중에 환훤당의 '증영의정贈領議政' 추증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설단 사진은 무열사 참례 때 편집자가 촬영한 사진입니다.
윤호 종원께서 사진 보내주시면 대체하겠습니다.
위 뎃글 내용 중에 설단비문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보감에는 사단비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바
설단의 용어 사용처가 고증에는 없고 또한 사전이나 인터넷검색에서도 애매합니다// 질의자 태갑
「설단設壇」 표기는 우리 문중에서 2010년 2월 발간 대동보의 표기에 따른 것입니다. 작고하신 병대 자문위원과 경기 안성파 석묵 자문위원의 자문에 따라 祀壇으로 표기해오던 용어를 設壇으로 바꿔 대종보 제59호(2012.1.23.)부터 「설단設壇」 표기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카페에서도 제목이나 대종보에서도 더러사용 흔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터넷 검색하니 다른문중에서도 설단비 용어가 등장하는 것을 인지한바 있습니다
뎃글자 / 태갑/
다만 비문에는 사단비를 기록하고 있는데 굳이 설단비란 용어가 사전에나 검색창에 설명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최근에 의문이 생겨 뎃글로 문의하는 것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태갑/ 배
혹시 설단비에 대한 참고할 사항이 있으면 자세히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태갑/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