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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태극 원문보기 글쓴이: 삼태극
댕기머리와 상투와 푸른 옷
가. 서론
한반도 한겨레는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세계로 퍼져나갔다.(참역사 동아리 ‘다음’까페 삼태극의 대문글과 고인돌방 공지 참고) 이와 함께 한겨레는 한겨레의 상징을 나타내는 머리모양도 함께 가지고 갔다. 이것은 변발(딴 댕기머리)과 상투다. 변발의 경우는 현재 전 세계 주요 소수종족에게서 보이는 반면 상투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현지의 토착세력이나 현지풍토에 적응하면서 머리모양이 변했을 것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변발과 상투를 현재 까지 이어오는 종족이 보인다면 이들은 한반도 한겨레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한 핏줄이라고 볼 수 있다. 이하에서는 변발과 상투 그리고 추가로 복식을 가지고 한겨레의 참역사를 살펴본다.
나. 댕기머리(변발)
변발은 머리카락을 땋아 늘어뜨린 머리모양을 말한다. 이것은 일명 댕기머리라고도 한다.‘댕기’머리는 ‘단기(檀祈)’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즉 한민족의 뿌리역사인 단군의 단에게 기도하는 의미 또는 단군의 깃발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 리조선과 일제에 의해서 한겨레 뿌리문화인 단군무단(무당)문화가 천시 천대 받고 뿌리 뽑히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댕기머리는 흔한 풍습이었다. 변발(댕기머리)은 몽골 발음으로는 캐쿨(kekul 怯仇兒)이며, 변=편발(編髮)· 승발(繩髮)· 삭두(索頭)· 피발(被髮)· 추계(椎 )라고도 한다.
댕기머리(삼태극 북을 두드리는 악사-서양 여류화가 구한말 작품)
기록상으로는 한겨레는 변발과 상투 두 가지의 머리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변발과 상투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와 변발과 상투 중 어느 것이 먼저 시작되었는지 명확한 근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단군세기상의 기록과 현재 변발의 분포지역을 보면 변발이 먼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1. 문헌상의 변발기록
단군세기(檀君世紀)
2세단군 부루 재위58년
계묘3년(서기전2238.)9월 조서를 내려 생민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도록 하였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癸卯三年九月下詔編(辮)髮蓋首服靑衣)
규원사화(揆園史話)
태시기(太始記)
신시(神市)씨가 세상을 다스린 지 더욱 오래 되니, 치우(蚩尤) 고시(高矢) 신지(神誌) 주인(朱因)씨 모두 나란히 인간의 366가지 일을 다스린바, 남녀, 부자, 군신, 의복, 음식, 궁실(宮室), 변발(編(辮)髮), 개수(蓋首)의 제도이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리조 영조 때 처음 만든 것을 고종 때 다시 출판함.
->‘변발개수(編(辮)髮蓋首)’즉, 머리를 땋고 머리를 덮는다.
충주 지씨 족보
<충주 지씨 가병> (지병민 교정)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고 한다.
단군 왕검이 도읍을 평양 당장경으로 하다. 후에 도읍을 백악으로 하고 백성들이
머리를 땋도록 하였다.(檀君王儉都平壤唐藏京 後都白岳敎民編髮)
<한서 漢書〉 서남이전(西南夷傳)에는 서이(西夷)의 준곤명(昆明)이 처음 편발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진서 晉書〉 사이열전(四夷列傳)에는 토욕혼(吐谷渾)의 부인이, 또 〈남사 南史〉 이맥전(夷貊傳)에는 고창(高昌:新省 土番=현재의 티벳)의 남자들이 변발을 했다고 한다.
참고로 예로부터 차이나족(중공)은 중원대륙을 차지하면서 자기들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는바, 주변으로 밀려난 한겨레를 사이(四夷)로 표현하였다. 다른 말로는 이만융적이라고 불렀는데, 동이(대륙 산동성, 만주, 한반도권 한겨레) 남만(티벳, 백족 등이 사는 지역과 베트남 태국 등) 서융(신장성지역 위글 한겨레) 북적(훈=흉노, 선비, 돌궐, 몽골 한겨레)이다. 이렇게 다 같은 한겨레임에도 불구하구 이름을 각기 다르게 표기한 것은 강성하고 위대한 한겨레를 분열 분산시켜 소멸 또는 약화시키려는 숨은 의도 때문이라고 한다.
위와 같이 차이나족은 단조선을 숙신이라고도 불렀는데 반복하여 살펴보면 이렇다. 숙신(肅愼=주신= 단군조선, 서기전2971.~1122.)나라도 변발을 했다고 전해지며 단군(檀君)이라 불리던 공손단(公孫檀:서기전3018.~2878.)도 변발을 했다는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단군 초상화는 상투를 튼 게 아니라 변발한 머리를 둘레로 묶었다고 볼 수 있다. 위 단군세기 해당 원문인 '編(辮)髮蓋首'도 다른 각도에서 풀이를 해보면 '머리터럭을 땋아서 머리에 덮었다.' 라고도 되니, 아래의 제1세 단군<왕검>의 초상화의 머리모양은 실사적 근거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
제1세 단군 왕검-댕기머리로 머리를 두른 모습이다.(서기전 2333.)
기록상으로 이 변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는 하(夏-서기전2223.7~1766.)나라 말기인 14대 공갑(孔甲) 임금 때라고 전해진다. 변발 풍습은 하나라가 망한 뒤에 세워진 상(商 또는 은殷나라, 서기전 1766.~1122.)나라 때에도 계속되었다. 변발이 보편화 되었을 당시엔 갑골문이 성행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공갑의 갑(甲)이 상나라 임금의 이름과 흡사하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한다.(위 하나라와 상=은나라는 모두 동이한겨례가 만든 나라로 당시 단조선의 연방에 속하는 제후국으로 확실시 된다. 단군세기 참조)
구한말 장승앞에서 기도를 하는 모습-어린애들은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
(서양선교사 촬영)
상나라가 멸망한 뒤 변발 문화는 북방으로 밀려났는데 훈(흉노)와 몽골, 려진으로 이어졌다. 물론 변발문화가 대륙에서는 차이나족에게 밀려나고 있었더라도 한반도 한겨레는 지정학상 반도라는 점 때문인지 변발문화는 큰 변화 없이 이어져왔다. 상나라의 풍습과 청나라 때의 풍습, 숙신(주신=단조선) 때의 풍습은 완전히 같은 것으로 파악되고 같은 변발을 했었으며 다첸(大千)이라는 청나라식 인사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2. 변발 분포지역
현재 변발풍습이 남아 있는 지역을 보면 티벳, 인도의 타밀나두주(드라비다족-타밀족)와 북방 한겨레인 러시아 자치공화국의 부리야트 공화국과 사하공화국이다. 또한 북미 남미(인디언 인디오 일부)다. 사학공화국을 구성하는 한겨레는 서양인들에 의해서 퉁구스족이라고 불렸는데 러시아 학자가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퉁구스족의 사진 속에는 어린아이들이 모두 댕기머리(딴머리=변발)를 하고 있다. 이외 아직 발견되지 않은 곳도 있을 것이다. 인도의 경우 드라비다족이 인더스문명을 세운 주인공이며 나중에 남인도 타밀나두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한반도 한겨레와 말이 1천3백여개나 같다는 것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통해서도 끊임없는 교류가 있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참역사동아리 다음까페 삼태극, 한겨레참역사방 참고)
러시아 자치공화국 사하공화국을 세운 퉁구스 한겨레 어린이들의 댕기머리(19세기말 20세초 러시아 학자 촬영으로 추정)
티벳 카일라스 산 아래의 바위에 대고 기도하는 티벳 한겨레-머리를 길게 딴 댕기머리가 보인다. 위 줄에는 불경이 새겨진 오색(무당문화의 오방령색임)의 파르쵸가 펄럭인다.
남인도 타밀나두주의 힌두교 사원의 어린애들-모두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이들은 인더스 문명을 일으킨 드라비다족의 자손들인데 현재는 보통 타밀족이라고 불린다. 인더스 문명의 중심지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이주해 온것으로 밝혀졌다.)
서기전 2백년경 부터 역사에 등장하는 훈(흉노) 한겨레-머리모양이 댕기머리를 추정케 한다.
남미의 인디오들이 한 잔치에 참여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양쪽으로 딴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
참고로 청나라와 상나라, 숙신 등의 건국 주체가 려진 한겨레(만주족)였다. 하나라와 상(은)나라의 위치는 현재 중원대륙의 섬서성 산서성 일대로 알려져 있다.
몽골 한겨레의 변발
몽골 발음으로는 캐쿨(kekul 怯仇兒)이며, 이는 개체(開剃) 변발이라고 부르는데 앞머리에서부터 뒤 꼭지까지는 빡빡 깎고 좌우 옆머리만을 남겨 이를 두 가닥으로 길게 땋아 늘여 뜰인 것이다.
개체변발을 한 원제국의 쿠빌라이칸(홀필렬)-양쪽 귀 밑에 댕기머리가 보인다.
몽골 한겨레의 원(元)나라가 세력이 강대해지자 그들의 지배하에 놓였던 고려·페르시아·중국 일부에까지 이 풍습이 퍼졌다. 후두부(後頭部)만 남겨놓고 주변의 머리털을 깎아 나머지 모발을 땋아서 등 뒤로 늘어뜨렸다.
려진 한겨레(만주-청나라)의 변발
청나라는 남자가 12, 13세가 되면 후두부(後頭部)만 남겨놓고 나머지 부분의 머리터럭을 깎아버리고 남은 후두부의 모발은 길게 길러서 3가닥으로 땋아 등 뒤로 늘어뜨렸다.
대청제국의 무사의 기본무장도-댕기머리를 하고 있다.(서양 선교사 그림)
청은 명나라 수도였던 북경(그 전에는 몽골 원나라 수도)을 점령하고 명령을 내리어 변발을 강제하였다. 서기1644년 제1차 치발령을 내렸다고 하며, 변발을 청조에 대한 귀순의 표시로 보고 강남 지방의 정복을 끝내고 전국 지배 할 수 있게 되자. 제2차 치발령을 내리어 복종치 않는 자를 사형에 처하였다고 한다.
3.변발의 종류와 배경.
변발의 모양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한반도 한겨레식, 몽골 한겨레식, 려진만주한겨레식이 대표적이다. 일본의 경우는 려진 청나라 식 변발로 보인다. 그런데 한반도 한겨레식이 원래 변발의 모습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단군세기의 변발기록이 국가와 민족의 전통풍습의 기틀을 다지는 부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시기상으로도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보이는 변발을 보면 이러한 한겨레식이 대부분이다. 다만 외딴 머리냐, 양쪽으로 딴 머리냐의 차이만 날 뿐이다.
위 단군세기 기록을 보면 변발을 하게 된 배경은 하늘자손임을 나타내는 상징임과 동시에 생활속의 지혜가 녹아 들어가 있는 것으로 판단한다. 변발을 하면 우선 머리가 가지런하게 되어 생활하기가 편리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편리한 리발기계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 보면 최상의 머리터럭 관리는 변발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또한 머리를 땋고 그 딴 머리도 필요에 따라 풀렀다, 다시 땋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 이는 바로 머리를 자극하는 것이고 그 결과 머리 속 피가 잘 돌고 머리를 맑게 하고 똑똑하게 만든다. 또한 댕기머리를 하게 되면 두피가 지속적인 자극을 받아 모발이 굵어지고 튼튼해진다. 댕기머리(변발)풍습은 바로 이러한 과학적인 지혜가 숨어 있는 것이다.
다. 상투(속발束髮)
속발이란 상투를 튼다는 것으로써 머리카락을 올려 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 감아 남자의 성기(음경=자지)처럼 튀어나오게 하는 머리형태다. 이게 기본모양이고 관리나 높은 관직 이상의 집단에서는 이런 기본상투에 동곳을 꽂아 고정시킨 다음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보통 망건(網巾)을 쓴 것으로 보인다. 상투의 확실한 모습은 고구려 고분벽화, 신라 도제기마 인물상(陶製騎馬人物象)에 잘 나타나 있다. 보통 상투는 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올릴 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남자가 성인대접을 받고자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어야 했다고 하며, 여러 사정으로 결혼하지 못한 사람은 늘 상대방에게 하댓 말을 받는데, 이것을 면하기 위해서 건상투를 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아마 리조선의 상투풍습을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어느 촌로가 상투를 한체 맷돌을 돌리고 있다.(구한말로 추정-솔본님글에 발췌)
차이나족의 기록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에는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틀어 매고 무명 수건으로 머리를 가린다. 고 하고 ' 당서에는 '그들의 풍속은 상투를 매고 관과 띠는 없이 맨발로 다닌다. 폭건으로 뒤를 가리고 귀한 자는 비단을 쓴다.' 고 한다.
북미인디언블렉풋한겨레의 상투튼 모습
청주 지씨족보 에는, 위만조선을 세운 사람으로 알려진 ‘위만 연나라 사람이 도읍을 왕검성으로 하고 기원하니 정미년이다. 한혜제1년에 백성들이 머리를 쪽지도록(상투) 하였다.(衛滿燕人都王儉城紀元丁未漢惠帝元年敎民束髮)
상투를 튼 남자와 댕기머리로 머리를 두른 여인네(혜원 신윤복의 작품으로 알려짐)
신라의 경우 구리솥(동복)을 말의 뒷부분에 얹은 형태를 한 기마인물상이 발견되었는데 두개다. 그 중 하인으로 추정되는 기마인물상에서 말을 탄 사람의 머리모양이 상투로 판명되었다. 그런데 이런 기마 인물상은 북방 몽골과 알타이산맥 등 중앙아시아를 주 무대로 활동했던 훈 한겨레(흉노-그 이전의 스키타이 한겨레)의 기마인물상과 똑 같다는 것이다. 즉 중아아시아 지역 훈족 유물에서 발견되는 동복기마인물상과 같다. 그렇다면 훈족도 변발과 상투를 병행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훈족과 신라 왕실은 같은 계통의 조상을 이고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다만 누가 먼저냐는 것과 그 이동경로 등에 있어서는 견해가 갈리고 있다.
경주시에서 발굴된 도제기마인물상-오른쪽 사람의 머리모양이 상투다.
수메르 문명의 수메르인들도 상투머리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양인들에 의해서 세계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수메르 문명이 한국시대 한겨레 연방 중의 하나라는 것은 이미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서 증명되고 있다. 수메르 인들이 상투를 하였다는 것도 한겨레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배달 나가서 수메르 문명을 세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증명하는 것이라고 본다.
일본의 야마토 무사들로 알려짐-흔히 영화에서 보는 그런 상투를 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스모'선수들도 상투를 틀고 시합을 한다.
다. 복식구조
1.의복의 색
단군세기(檀君世紀) 2세단군 부루 재위58년.
계묘3년(서기전2238.)9월 조서를 내려 생민들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도록 하였고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癸卯三年九月下詔編(辮)髮蓋首服靑衣)
서기1357.(공민왕 6년)윤9.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옥룡기"(玉龍記 : 비기인 듯하나 전해지지 않음)를 인용해 이렇게 건의 하였다. <우리나라의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뻗어 지리산에서 마칩니다. 그 산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水根木幹)로한 땅에 뻗어 있습니다. 물은 흑색이고 나무는 청색이므로 흑색은 부모가 되고 청색은 몸체가 됩니다. 풍속이 땅의 이치를 거스르면 재앙을 입습니다.
풍속이란 군신과 백성들이 사용하는 의복과 모자로 나타납니다. 지금부터 문무백관들은 검은 옷을 입고 푸른 갓을 쓰게 하고 승려들은 검은 두건과 큰 관을 쓰게 하며, 여자들은 검은 깁옷을 입게 하여 땅의 순리를 따르는 풍속으로 삼으십시오.> (고려사 지-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8권)
차이나(중공)족 명나라의 정신을 통치이념으로 삼고 사대주의(소중화)를 국시로 하며 민족혼이 살아있는 한단의 고사서를 수거하여 모조리 불태운 리성계(중국 대륙 호남성 전주출신, 위화도 반역으로 중국 변방정권 리조선을 세움)의 리조선에 들어서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유교문화가 절대적인 지배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의 상층부으로부터 하층부에 이르기까지 <3강5륜>의 사상이 충일하였다. 복식에서도 몸에는 흰 옷, 머리에는 검은 관(白衣黑冠)의 모습이 민족의 상징이 되었다.
위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복색에서 검은색, 흰색, 푸른색이 등장한다. 그런데 위 고려사의 경우 삼국사기와 더불어 명나라를 조상부모로 모시기로 한 리조선 정권이 명나라를 거스르는 기록사료를 모조리 수거하여 불태우거나 조작 가필하였다는 견해와 고려사가 리조창건의 실질적 인물인 정도전에 의해서 쓰여 졌다는 것에 주목해 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리조선에 들어와서 공자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비로소 흰색이 생민들의 복색으로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흰색 부분과 관련하여 한겨레가 백의민족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리조선 시기에 조작날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다른 기록에서 백의민족관련 내용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겨레의 뿌리인 단조선의 단군세기에 2세단군 <부루>시대까지 국가 창건과 토대를 마련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에 복색제도의 하나로써 푸른 옷을 입게 하였다(服靑衣)는 것은 우리 한겨레가 백의민족이 아니라, 백두산 천지의 푸른색을 상징하는 푸른 겨레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사실, 복색전문연구가가 밝혀 놓은 것을 보면 고려조 때까지만 하더라도 하층 신분에서부터 왕족에 이르기 까지 복색은 흰색의 단색 옷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러 가지색으로 된 옷이 전부다. 물론 그 이전의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도 마찬가지로 벽화나 유물에서 보이는 복색도 여러 가지 색으로 된 옷을 입은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고려 서민계층의 복색(원혜은작품,元빔대표)
푸른색은 하늘자손의 상징인 오방색 중의 하나이다. 오방색은 오방령기 또는 오방신장기라고도 하는데 이는 무당문화의 전형이다. 여기에는 유일신 하날님(하나님)이 계시고 이 하나님의 여러가지 현시를 오방신장이라고 표현을 한다.
이 오방색은 동방에 청색, 북방에 흑색, 서방에 백색, 남방에 적색, 마지막으로 이 사방의 중앙에 황색이 자리잡는다. 따라서 흰색도 오방색의 하나이나, 이족(4이족으로 불림)의 종가집은 동방의 청색(동이한겨레)이다. 한웅천황의 신시배달국의 다른 표현이 청구국(靑丘國)임을 볼 때,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극동아시아 한겨레는 청색옷을 전통으로 입었다고 본다.푸른색은 오늘날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삼태극의 삼색중의 하나다.
2. 머리에 덮는 문화
위 단군세기와 규원사화 태시기 그리고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한겨레는 머리에 무엇을 쓰는 풍습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위 각 원문에는 모두 개수蓋首로 나와 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모자를 비롯하여 머리에 무엇인가 쓰거나 덮는 문화가 퍼져 있는 것이 보인다. 특히 전 세계종교는 모두 무엇인가 쓰는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전 세계 모든 종교와 철학과 사상의 뿌리인 무당문화에서 사제, 무단(당)이 고깔을 쓰는 것과 위 기록을 볼 때, 이런 머리를 덮거나 쓰는 문화도 결국 한겨레가 최초로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본다. 고깔의 상징적 의미는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수신하는 수신기(안테나)로 알려져 있다.
라. 결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극동아시아권 한겨레는 현생인류(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조상이다. 결코 서양 중심의 사관으로 만들어진 아프리카 현생인류 기원설이 대세가 될 수 없다. 최초로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 수 있는 문명의 뿌리 무당문화도 한반도 한겨레에서 나왔다. 이를 토대로 댕기머리와 상투 그리고 개수(蓋首)문화를 만들어 전 세계로 배달 나갔다. 1만년 이상이 흐른 오늘날에도 이 원시문화를 잘 보존 유지하고 살아가는 소수종족이 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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