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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미문화지킴이(문화탐방단./ 옛.생활문화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청산거사
장 소 : 땅끝마을. 다산초당, 백련사, 미황사 .
사구미 해수욕장(해수욕 ) 우수영 기념관(명량대첩비),
우항리 공룡화석지(박물관).
일 시 : 7월 6~.7( 1박2일) 6일 점심(각자 해결) 저녁, 7일 아침, 점심)
6일 오전 7시 출발 - 휴게소 점심 - 다산초당 - 백련사 -
숙소(사구미 해수욕장) - 땅끝마을(일몰 구경) -
숙소(사구미 해수욕장 ) - 저녁시간(골든벨 퀴즈
1등 상품 : 300만원이하) - 2등( 상품 200만원이하) -
3등 (상품 100만원 이하)
7일 미황사 - 우수영 기념괌 - 우항리 공룡발자국 화석지(박물관)
준비물: 해수욕 준비 옷(갈아입을 옷. 비키니. 세면류, ). 필기도구
출발지 : 구미시청 주차장 오전 7시 출발
도착예정 : 7일 오후 8시 예정
회비 : 70.000원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초당
초당 바로 앞에 차를 달이는 다조(茶窕 )를 마련하였고, 초당 뒤 서쪽 언덕바위에 '정석(丁石)'이라고 새겨 이곳이 자신의 거처임을 징표로 만들었다. 정석 바위 밑 석간수가 나오는 샘물(藥泉)로 차를 끓였다. 초당 오른쪽에는 연못을 파서 잉어와 붕어를 기르고, 온갖 화초를 심어 경관을 멋있게 꾸몄고, 산 속에서 샘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폭포수가 운치를 더한다. 이 곳에 갯가의 괴석을 직접 골라 조그마한 산을 만드니(蓮池石假山) 진짜 산보다 더 멋있었다고 즐거워하였다.
다산은 정석, 다조, 약천, 연지석가산을 '다산4경'이라 이름하고 일경마다 시를 지어 이를 칭송하였다.
(추사 글씨 현판: 추사가 쓴 것이 아니고 추사 글씨를 집적(集摘)한 것임)
다산초당 연지 다조
다조 : 뜰 앞에 널찍한 돌 하나가 놓여 있다. 모두들 무심히 보고 넘기기 쉬운 돌이다. 이 곳에서 다산이 홀로 상념에 젖어 차를 마시기도 하고, 찾아오는 학우와 학승, 제자들과 함께 그가 직접 재배하고 만든 차를 달여 마신 곳이다
초당 뒤 서쪽 언덕바위에 '정석(丁石)'이라고 새겨 이곳이 자신의 거처임을 징표로 만들었다. 정석 바위 밑 석간수가 나오는 샘물(藥泉)로 차를 끓였다. 초당 오른쪽에는 연못을 파서 잉어와 붕어를 기르고, 온갖 화초를 심어 경관을 멋있게 꾸몄고, 산 속에서 샘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폭포수가 운치를 더한다. 이 곳에 갯가의 괴석을 직접 골라 조그마한 산을 만드니(蓮池石假山) 진짜 산보다 더 멋있었다고 즐거워하였다.
약천(藥泉) 정석
초당 뒤 서쪽 언덕바위에 '정석(丁石)'이라고 새겨 이곳이 자신의 거처임을 징표로 만들었다. 정석 바위 밑 석간수가 나오는 샘물(藥泉)로 차를 끓였다. 초당 오른쪽에는 연못을 파서 잉어와 붕어를 기르고, 온갖 화초를 심어 경관을 멋있게 꾸몄고, 산 속에서 샘물을 끌어들여 만든 인공 폭포수가 운치를 더한다. 이 곳에 갯가의 괴석을 직접 골라 조그마한 산을 만드니(蓮池石假山) 진짜 산보다 더 멋있었다고 즐거워하였다.
* 다산은 정석, 다조, 약천, 연지석가산을 '다산4경'이라 이름하고 일경마다 시를 지어 이를 칭송하였다.
초당의 동쪽과 서쪽에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을 새로 짓고, 그는 동암에 거처하였다. 서암은 다성각(茶星閣)이란 현판이 있으며, 다산이 주로 18명의 제자를 가르친 곳이다. 동암에는 다산이 쓴 '茶山東庵'과 추사 김정희가 예서체로 쓴 '寶丁山房'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초당에 걸려 있는 추사의 현판글씨 茶山草堂은 추사가 실제로 쓴 것이 아니고, 후손들이 추사의 글씨를 집자(集字)해서 만든 것으로 글씨의 크기와 획이 불균형하고 볼품이 없다. 그러나 '보정산방' 네 글자는 추사의 명필로 평가되고 있다. 추사는 24세 연상인 다산에게서 유학의 가르침을 받기도 하여 그를 사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다산의 자제인 유산공과는 막역한 교유를 나누었다. '정약용 선생을 보배롭게 모시는 산방'이란 의미의 현판을 다산이 이 곳을 떠난 후 그 제자들이 스승을 기리는 마음으로 추사에게 부탁하여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집에 다산이 쓴 현판 '다산동암'의 글씨는 상당한 명필로 평가받는다. 다산이 이곳에서 10여년 간 지내면서 불후의 명작인 '목민심서'등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우리민족을 일깨운 위대한 '다산학'을 이룩하였다. 이는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다산의 동암에서의 생활이 고고하고 서정어린 낭만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이다.
1) 서암현판 2)다산동암
*1) 동암에 걸려 있는 추사의 현판 : 추사가 해남에 머물러 있을 때 썼다
서암은 제자들이 머물던 곳이며 '보정산방'이라는 현판은
다산보다 24세 연하인 추사가 다산의 학문적 역량을 흠모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다산 초당 동쪽에 있는 東庵: 정 다산의 친필 현판
다산의 외로움을 달래고자하는 마음이 담긴 행서체의 4언 시구를 써서 외동딸에게 보냈다. 다행히 외동딸에게 보낸 이 '梅鳥圖'는 고려대 박물관에 소장
작은 새 한 쌍이 동암 뜰에 날아와 매화 가지에 앉았네
매화 꽃 향기에 이끌려 홀연히 찾아 왔네
여기에 머물면서 함께 집 짓고 살면 즐겁지 않은가
매화꽃이 만발하여 그 열매도 많단다.
비단 위에 그린 '매화와 새'는 오른 쪽에서 뻗어 내린 매화 가지에 두 마리의 작은 새가 앉은 이른 봄날을 꾸밈없이 그려낸 예쁜 그림이다. 가지에 활짝 핀 매화꽃과 꽃망울, 아랫 가지 가운데에 서로 교차해서 앉은 새를 단아하고 깔끔하게 표현하였다. 매화가지에 앉은 다정한 두 마리 새는 마치 애틋한 부부애를 상징하는 것 같다. 1813년 7월 한 여름 동암에서 그린 이 서화(書畵)는 다산이 오랜 유배생활로 가정의 화목과 사랑의 중요함을 잔잔한 필치로 그려 외동딸에게 보낸 것이다. 외동딸은 아버지를 극진히 보살펴 온 강진군 도암면 목리에 사는 윤서유의 며느리가 된다. 다산은 아버지를 위하여 멀리 이 곳까지 시집오는 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이 한 편의 아름다운 시로 나타냈다고 본다. 그의 사위 윤창모는 다산의 제자로서, 비록 지벌이 낮았지만 외동딸을 이 집으로 보낼 정도로 다산을 감동시킨 집안의 청년이다. 그의 외손자 윤정기(尹廷琦)는 다산으로부터 사사를 받고, 큰 학자가 되어 다산풍의 많은 저서를 남겼다.
다산초당 '다산동암'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다산초당'
다산이 강진에 머물면서 제자들과 함께 학문을 연구했던 곳
정약용 선생님의 글씨를 집자한 '다산동암'
동암은 다산이 초막을 짓고 거처하면서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을 집필한 곳이다
하피첩
妻病寄敝裙(병처기폐군)
千里托心素(천리탁심소)
世久紅已褪(세구홍이퇴)
悵然念哀暮(창연념쇠모)
병든 아내가 날근 치마를 보내왔으니
천리 머나먼 길 애틋한 정을 담았네.
흘러간 세월에 붉은 빛 다 바래서
만연의 서글픔을 가눌 길 없구나.
裁成小書帖(재성소서첩)
聊寫戒子句(료서계자구)
庶幾念二親(서기염이친)
終身鐫肺腑(종신전폐부)
마름질 해 작은 서첩을 만들어서
아들을 일깨우는 글을 적는다.
부디 두 어버이 마음 헤아려서
평생토록 가슴에 새기도록 하라.
서첩을 만들고 남은 치마폭의 일부를 가지고
조그마한 가리개병풍을 만들어
그 위에 활짝 핀 매화가지에
멧새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
한 방향을 보고 있는 그림을 그리고
그 밑에는 시 한수를 써서
시집가는 딸에게 주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다산의 매조도(梅鳥圖)다.
현재 고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翩翩飛鳥 息我庭梅(편편비조 식아정매)
有烈其芳 惠然其來(유열기방 혜연기래)
爰止爰棲 樂爾家室(원지원서 낙이가실)
華之其榮 有蕡其實(화지기영 유분기실)
펄펄 나는 저 새 우리 집 매화가지에 쉬는구나.
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도다.
이렇게 이르러 둥지를 틀고 네 집을 즐겁게 하라.
꽃이 벌서 다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열리리로다.
그림 아래 여백에는
시를 한수 짓고
곁에다 이런 글을 남긴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잘라 네 첩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가경 18년 계유년(1813년) 7월 14일
열수(洌水)늙은이는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열수는 그 당시
한강을 열수라 불러
남양주에서 살았던 다산 본인을
가르키는 것이다.
이렇게 다산은 부인의 치마로
서첩 4권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주고
나머지로 작은 가리개를 만들어
딸에게 주어
자식을 챙기지 못한
아비의 절절한 마음을
자식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이다.
동암을 지나 바로 옆에 있는 천일각(天一閣)
숲에 싸여 어두컴컴하고 습한 초당에 비하면, 천일각은 시원스러운 전망으로 구강포 넓은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확 트인다.
정다산이 머물고 있었을 때에는 이 누각이 없었다. 다만 선생은 공부와 저술에 지치거나 흑산도로 유배가 있는 형님 손암이 그리울 때 이 자리 어느 바위나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바다를 보며 심신의 피로를 달래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상념에 젖기도 하였을 것이다
천일각 백련사
천일각 옆길을 따라 초당 뒤를 도니 곧장 백련사로 가는 산길이 나타난다. 동백꽃들이 우리를 마중한다. 따듯한 바람 속에 떨어진 붉은 꽃잎들은 여자 입술과 같아 자못 매혹적이다. 산허리를 돌아서면 구강포와 아랫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등산길이다. 그 옛날 다산선생이 초당에 머물러 있을 때 이 절의 혜장스님을 만나러 가던 길이다. 혜장과 함께 불교와 유교 사상을 서로 담론도 하였으며, 그를 통하여 차 마시는 다인(茶人)의 길을 알았고, 시문과 학문을 토론함으로서 인간적, 사상적 영향을 적지 않게 서로 주고받았다.
초당과 백련사를 서로 오가던 혜장스님은 우리 나라의 문화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대흥사 초의선사를 다산에게 소개하고, 그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입적하였다. 시우(詩友), 다우(茶友), 주우(酒友), 학우(學友)인 혜장의 죽음은 정다산에게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이 길은 그를 위하여 만시와 제문을 지어 백련사로 가던 길이다. 혜장을 잃은 다산은 초의에게 정을 쏟았다. 다산의 제자가 된 초의선사가 혜장의 빈자리를 메꾸었다. 유학과 불법을 심도 있게 연구, 토론하여 다산학을 여는 데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그림도 그리고 시문을 쓰기도 하여 다산문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각각 파가 다른 해남 윤씨의 세 집안(해남 연동의 녹우당, 강진 목리의 사돈 집, 귤동마을의 단산정)과 초기 유배시절의 읍내의 몇 집안 그리고 학승들은 다산학 완성에 훌륭한 보조자로서 올바른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시대의 선구자요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일생은 참으로 위대하다. 정치적으로 당쟁의 희생자였으며, 이로 인하여 옥고와 유배를 당하면서도 학문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은 선비정신으로 5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을 남겼고, 2천 5백 여수 이상의 시를 지었다.
다산선생을 조선실학의 완성자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실학의 중심 사상인 경세치용,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학문을 수립하였을 뿐 아니라 서구의 인본주의, 실용주의 사상을 그의 저서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연구 분야는 정치· 경제·사회·과학·의학·철학·천문·지리·역사·종교·윤리·음악·서화등 모든 분야에 미치지 않는 것 없이 탁월하였다.
한 달에 한 권 이상을 저술 한 것은 초인간적인 열정 때문이지만 오랜 저술 활동으로 엉덩이에 종창이 번지자 그는 선반을 만들어 선 채로 집필을 하였다 한다.
1818년 8월, 18년 동안의 귀양살이가 풀렸다. 그의 나이 57세. 다산학의 산실인 다산초당을 떠나 그의 고향에는 9월 15일에 돌아 왔다.
75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기쁨이나 환락보다는 슬픔과 고통, 외로움과 한스러움의 생애였지만 좌절치 않은 위대한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이 떠난 후에도 다산초당에는 해마다 제자들이 모여서 시회를 열고, 차를 만들며, 초당의 지붕을 이으면서 오랫동안 그의 얼을 되새기곤 했다.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전에 회혼일을 맞아 회혼시를 썼다. 그의 최후의 시다.
육십 년 세월 잠깐 사이 흘러갔네.
복숭아나무 봄 빛 성한 것은 신혼 초와 같구나
이 밤 두 사람 마음은 같은 심정
지난 유배시절 아내의 치마폭엔 눈물 자국 번졌노라.
해어졌다 다시 만난 것은 우리들의 참 모습
바가지 두 쪽이나 자손에게 남겨 줌세.
백련사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때 무염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1211년에 원묘국사 요세스님이 옛터에 중칭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고려 후기 정치와 종교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몽고와 왜군의 침략으로 살육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에 요세스님은 어둠의 한 가운데서 온 몸으로 희망을 말하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결사운동을 벌인다. 이렇게 태동된 백련결사는 삶속에서 만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수행을 통해 현세를 정토로 만들자는 최초의 민간 결사 운동이였다.
원묘국사의 백련결사는 120년간 고려 8분의 국사(원묘국사.정명국사. 원환국사.진정국사. 원조국사. 원혜국사. 진감국사. 목암국사)를 배출하고 번창하였다.
고려사기를 보면 공민왕자가 1351년(총정3년)에 백련사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사찰은 고려말 왜구가 세 차례나 침입하여 노략질을 일삼았을때 폐허지경에 이르렀다. 이후 1430년에 행호대사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동원 20동과 서원4동을 건립하고 왜구의 침입에 맞서 행호토성을 쌓는다. 세종의 둘째형인 효령대군은 백련사에 입산하여 8년간 큰 법회를 열고 불,법,승 삼보에 기원하는 수륙재를 지내며 수행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백련사는 청허 휴정선사의 의발을 전수받은 8명의 종사를 배출하며 이어져 내려왔다. 백련사에 8국사와 12종사가 나온다고 하였는데 8국사는 고려때 나왔으며 8종사는 조선시대 배출되었으니 앞으로도 4종사가 나올 것이라는 예언이 있다.
그 가운데 여덟 번째가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던 아암혜장선사로 두륜산 대흥사에서는 12대 강사로 꼽힌다. 백련사 옆 다산초당에 적거했던 다산정약용은 백련사에 자주 들러 차를 마시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과 왜구의 침탈로 폐사 지경에 까지 이르렀으나
세종대왕의 형님이신 효령대군이 이 곳에서 8년간 기거하면서 큰 불사를 일으켜 가람을 재건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전·시왕전·나한전·만경루·칠성각·요사채 등이 있다.
그외 유물로는 만덕산백련사사적비와 원묘국사중진탑이 있으며,
절 주위에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의 동백림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미황사
조선시대 중기의 사찰건물이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효종 10년(1659)에 새로 지은 후 영조 30년(1754)에 복원했다는 <대법당중수상량문>의 기록이 1982년에 보수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으로,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불의 목조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복잡하고 아름다운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이다.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의조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미황사는 우리나라 육지에서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검은 소와 금인이 담긴 이름, 미황사”
<미황사 사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창건설화가 전한다. 신라 경덕왕 때의 어느 날, 돌로 만든 배가 달마산 아래 포구에 닿았다. 이 소식을 들은 의조화상은 사람들을 이끌고 포구로 나갔는데 배는 바닷가에 다다랐다. 배안에는 금인(金人)이 노를 젓고 있었고, <화엄경> 80권, <법화경> 7권,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40성중, 16나한, 탱화, 금환(金環), 검은 돌들이 실려 있었다. 사람들이 이 불상과 경전을 어디에 모실지 의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검은 돌이 갈라지며 그 안에서 검은 소 한 마리가 나오더니 순식간에 커다란 소로 변했다. 그날 밤 의조화상의 꿈에 금인(金人)이 나타나 말했다. “나는 본래 우전국의 왕으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부처님 모실 곳을 구하고 있던 차에 이곳에 이르러 달마산 꼭대기를 보니 1만불이 나타나므로 여기 온 것이오. 경전과 불상을 소 등에 싣고 가다가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모시도록 하시오” 의조화상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데 소가 한 번 바닥에 누웠다가 일어난 다음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쓰러지더니 ‘미(美)’소리로 크게 울면서 죽었다. 의조화상은 소가 처음 누웠던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뒤에 누워 죽은 골짜기에는 미황사를 세웠다. 미황사의 ‘미’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따온 것이고, ‘황’은 금인(金人)의 색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 489m) 자락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위도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잡고 있으며 달마산의 끝자락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달마산은 백두대간의 맥이 마지막으로 솟아올라 이루어진 두륜산의 끝자락에 이어진 산으로 이곳의 지맥이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황사는 병풍같이 펼쳐진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석양 무렵의 낙조의 모습 등 산경을 배경으로 한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긴 공룡의 등을 연상시키기는 산등성이의 온갖 기암괴석으로 인해 미황사를 뒤로한 산이 수십폭의 병풍을 펼치고 있는 듯 그 자연의 모습이 수려하다.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1692년(숙종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寺蹟碑)가 있다. 미황사의 부도전 옆에 있는 이 사적비는 창건시기와 창건연기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749년(신라경덕왕8)에 의조화상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旨元年間)(1264~1294)에 남송(南宋)의 달관(達官) · 군자(君子)등이 미황사에 내왕하기도 하며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1754년(영조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번째 중건은 1597년(선조30)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 1601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 그 뒤 1658년(효종9)에서 1660년(현종1) 까지 두번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 · 수신(脩信)스님이 담당했다.
그리고 세번째는 1751년(영조27)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내용은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1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 대흥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1754년(영조30)에 여고(女古)가 4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당시 대웅전의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다.
그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나한전(응진당)은 1761년(건륭16년)3월 26일에 대웅전은 같은 해 4월 11일에 각각 상양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로 보아 대웅전과 응진당은 18C에 건립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유일(蓮潭 有一)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폈다. 스님은 특히 절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58년(철종9) 에는 영허의현(靈虛義玄)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며 이같은 내용은 초의선사가 지은『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그리고 명부전, 요사체 등이 남아 있으나 옛날에는 통교사를 비롯 도솔암, 문수암, 보현암, 남암 등 12암자를 비롯하여 전각이 20여동이나 있었던 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미황사에는 현재 미황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부도가 28기, 탑비가 6기 경내에 있어 조선후기에 활발한 전법도장(傳法道場)이었으며 사격(寺格)이나 사세(寺勢)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미황사는 이러한 융성을 거듭하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주지인 혼허(渾墟)가 절의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 당하여 젊은 승려들이 몰살당한 후 군고단 준비에 진 빛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미황사 스님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궁고 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미황사 전경
사찰의 구조
1) 사찰의 의미 사찰이란,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성스러운 곳, 즉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가 모두 갖춰져 있는 곳을 우리는 흔히 '절'[寺]이라 부른다. 같은 의미지만, 사찰의 명칭은 아래같이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다. 사(寺): '절'. 부처님을 모시고 부처님 가르침대로 닦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사찰(寺刹): 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도량. '사원(寺院)'이라고도 한다. 가람(伽藍): 많은 대중들이 모여 살며 수행, 법회와 행사를 하는 곳. 도량(道場): 부처님이 상주하며 불법의 도를 선양하고 구현하는 곳. 정사(精舍): 수행을 하는 청정한 곳, 깨끗한 집. 총림(叢林): 강원, 선원, 율원, 염불원이 두루 갖춰진 사찰. 원래는 모든 사부대중이 모여 수행하는 곳. 승원(僧院): 스님들이 수행하는 곳. 청정원(淸淨園): 입과 몸과 뜻으로 짓는 신구의 삼업(三業)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곳. 선원(禪院): 참선을 위주로 하는 사찰. 암(庵): 암자, 규모가 작은 사찰 또는 큰 사찰에 딸린된 부속 사찰. 사암(寺庵): 사찰과 암자를 동시에 아우러는 말. 말사(末寺): 교구본사에 소속된 사찰. 포교원(布敎院): 포교를 중점적으로 하는 사찰.
불교 최초의 사찰 : 인도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부처님께 기증한 죽림정사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 : 고구려 소수림왕때 지어진 이불란사와 초문사
2) 전통사찰의 구조 (1) 전각 - 불보살이 모셔진 곳을 전(殿), 그 외에는 각(閣)이라 함.
① 대웅전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신 법당. ‘법력으로 세상을 밝히는 영웅을 모신 전각’이라는 뜻. 협시보살 :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또는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삼세불이나 삼신불을 모시기도 함. 삼세불은 현세의 석가모니불, 과거의 연등불인 제화갈라보살, 미래불인 미륵보살 삼신불인 경우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봉안 (이럴 경우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부른다.)
② 대적광전- 화엄계통의 사찰로 화엄전, 비로전이라고도 함. 본존불은 비로자나불(연화장세계의 교주) 삼신불 : 법신불인 비로자나불, 보신불인 아미타불, 화신불인 석가모니불 선종사찰 :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원만보신 노사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③ 극락전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 아미타불은 본래 임금의 지위와 부귀를 버리고 출가한 법장비구로서, 보살이 닦는 온갖 행을 다 닦아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48대원을 세워 마침내 아미타불이 되어 극락정토를 주재하게 되었슴. 일명 무량수전, 미타전이라고 함.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 아미타불의 좌우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 또는 지장보살과 관세음보살
④ 미륵전 미래의 부처이신 미륵불을 모신 곳. 일명 용화전(미륵불에 의해 새로이 펼쳐질 불국정토 '용화세계'를 상징) 또는 자씨전('미륵'의 한문 의역인 '자씨'를 붙여 자씨전) 금산사 미륵전이 유명
⑤ 원통전 관세음보살을 모신 곳. 관세음보살은 모든 곳에 두루 원융통(圓融通)을 갖추고 중생의 고뇌를 소멸해준다. 그 절의 주불전일 때 원통전, 부불전일 때 관음전 낙산사 원통전이 유명
⑥ 약사전 약사유리광여래(약사여래)를 모신 법당. 약사여래는 현세중생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없애주고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현세이익적인 보살 일명 만월보전, 유리광전, 보광전
⑦ 팔상전 석가모니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봉안한 곳 일명 영산전.주불은 석가모니 부처님, 좌우협시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
⑧ 나한전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중 아라한과를 성취한 성인, 즉 나한을 모신 곳 석가모니부처님 주불, 좌우 가섭존자와 아난존자가 협시, 16나한, 500나한 등 봉안 일명, 영산전 또는 응진전(진리와 합치한 분들을 모셨다는 의미)
⑨ 명부전 지장보살을 봉안한 경우 지장전, 시왕을 모신 경우 시왕전.
⑩ 대장전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축조한 건물. 경북 예천의 용문사 대장전과 전북 김제의 금산사 대장전
⑪ 적멸보궁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전. 내부에는 불보살님을 모시지 않고 비어 있슴. 5대적멸보궁 : 영축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
⑫ 조사당 한 종파를 세운 스님이나 후세에 존경받는 큰스님, 그리고 창건자나 역대 주지스님의 영정 또는 위패를 모신 당우. 국사전 - 송광사 국사전
⑬ 삼성각 우리 고유의 토속신들 즉, 산신, 독성, 칠성 을 모심. 세 분을 분리해서 '산신각, 독성각, 칠성각'을 지어 따로 모시기도 함.
⑭ 범종각 범종을 보호하는 건물. 사물 - 범종, 법고, 운판, 목어
⑮ 누각 만세루, 보제루 등의 명칭을 씀. 법당 및 강당 등으로 쓰임.
(2) 문 ① 일주문 사찰에 들어갈 때 제일 처음 만나는 문. '일심'을 뜻함 사바세계에서 정토세계로, 이 언덕에서 저언덕으로 가는 첫째 관문. 이 문을 경계로 문 밖을 속계라 하고, 문 안을 진계라 함.
② 천왕문 천왕문은 불법을 지켜주는 외호신인 '사천왕'을 봉안한 건물
동방 지국천왕 : 푸른색, 오른손에는 칼(보검)을 쥐고있음 남방 증장천왕 : 붉은색 몸에 노한 눈빛, 오른손에 용, 왼손을 여의주를 쥐고있음 서방 광목천왕 : 몸은 흰색. 손에는 삼지창과 보탑을 들고있음 북방 다문천왕 : 몸은 흑색, 손에는 비파를 들고 비파 줄을 튕기는 모습.
천왕문의 좌우는 금강역사(밀적금강, 나라연금강)가 지키고 있음. 천왕문 대문에 금강역사를 그려놓거나, 금강문이라는 별도의 문을 갖춘 곳 있음
③ 불이문(해탈문) 천왕문을 지나 불이의 경지를 상징하는 불이문. 일명 해탈문 (3) 요사 사찰 경내의 전각과 문을 제외한 문을 제외한, 스님들이 생활하는 건물. 심검당 : 지혜의 칼을 찾아 무명의 풀을 벤다는 의미를 가진 건물 적묵당 : 말 없이 명상한다는 의미를 가진 건물 해행당, 수선당 : 올바른 행과 참선하는 장소 설선당 : 참선과 강설의 의미가 복합으로 가진 건물 염화실 또는 반야실: 조실스님 등 그 사찰의 가장 큰스님을 모시는 건물
(4) 탑 산스크리트로 스투파. 중국에서는 전탑, 우리나라는 석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발달 부처님의 진신사리 또는 부처님 말씀을 보존하고 있는 곳으로 불자들의 숭배대상. 탑은 초기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
금강계단 :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장소. '통도사 금강계단'이 가장 대표적. 석등 : 경내를 밝히는 등 부도 : 고승의 사리를 모신 묘탑. 3) 법당 안 구조 (1) 상단 : 법당의 앞쪽 정면에 설치한 단. 불보살단 또는 불단. 수미단 (2) 중단 : 호법신장을 모신 단. 신장단 또는 신중단 (3) 하단 : 영가의 위패를 모신 단상. 하단.
일컫는 용어이며, 이러한 의미로 쓸때는 일반적으로 공룡으로 간주되는 익룡, 어룡, 수장룡은 포함되지 않는다. 공룡이란 이름은 한자를 풀어보면 두려운 용이란 뜻인데, 전설의 동물인 용(드래곤)과 비슷해서 따온 듯 하다. 넓게는 중생대의 쥐라기와 백악기에 걸쳐 크게 번성했던 화석파충류들을 총칭하기도 한다. 트라이아스기 후기에 출현하여 2억 년 넘게 전 세계에 걸쳐 번식하며 지구상의 주된 육상동물로서 진화하다가 백악기 말에 운석충돌로 추정되는 사건인 백악기-제3기 대멸종으로 익룡, 어룡, 수장룡과 함께 새를 제외한 모든 종이 절멸하였다. 공룡은 현재까지 가장 길게 산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30cm의 작은 크기에서부터 현존하는 어떤 육상동물보다도 큰 40m가 넘는 크기까지 다양한 크기와 식생을 가졌다. 원시 파충류와는 달리 몸 아래로 곧게 뻗은 다리를 가져 높은 운동능력을 갖고 있었다. 공룡은 현재까지 화석상으로 알려진 것만 600여속의 하위분류를 갖는다. 미국에서는 주마다 각 주를 상징 하는 공룡을 정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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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학에서는 공룡을 "트리케라톱스와 근생 조류 및 이들에서 분기된 모든 자손을 아우르는 최근 공통 조상이 속해있는 부류"로 보고 있다. 이는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의 공통 조상이 곧 모든 공룡의 최근 공통조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메갈로사우루스와 이구아노돈은 오언이 분류한 세 종류의 공룡 가운데 두 종류 이다. 공룡은 4족 보행을 한 용각아목, 2족 보행을 한 수각아목, 딱딱한 등을 가진 곡룡류, 등에 돌기뼈를 가진 검룡류. 머리뼈가 부채모양으로 퍼지고 뿔이 달린 각룡류, 오리모양의 입이 특징인 조각류등으로 나뉜다. 고생물학자들은 새가 공룡의 일종에서 진화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새와 공룡을 같은 분지로 다룬다.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공룡은 완전히 멸종한 것이 아니다. 고생물학에서는 새가 용반목 수각아목 마니랍토라의 일종인 코에루로사우리아에 속한 조상으로부터 진화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6] |
공룡의 화석 기록을 보면 20종이 넘는 공룡이 같은 시기에 일정한 지역에서 함께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공룡은 목초지대에 무리를 이루어 살았으며, 아파토사우루스나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같은 종류는 평생을 거의 혼자 지내거나 작은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 곡룡류·각룡류·검룡류 등은 바닷가나 탁 트인 곳의 키 작은 식물을 뜯어먹고 살았다. 알로사우루스와 티란노사우루스 렉스 등의 커다란 수각류는 주로 거대한 초식공룡을 잡아먹었다. 일부 작은 수각류는 곤충이나 알을 먹었고, 또 다른 종류는 포유류나 작은 공룡, 또는 다른 파충류를 잡아먹었다. 작은 수각류는 매우 활동적이고 행동이 재빨랐다.
공룡이 어떤 방법으로 번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공룡알 화석이 발견되어, 적어도 몇 종류는 다른 파충류와 마찬가지로 알을 낳았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암컷은 땅을 파서 둥지를 만든 후 1 2~ 24개의 알을 낳았다. 그 중에는 알에서 깬 새끼를 일일이 돌보는 것도 있었고, 새끼가 제 나름으로 살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룡은 어느 만큼 자란 다음에는 성장이 멈추는 포유류와는 달리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자란 것으로 짐작되었지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생장곡선 등으로 본다면 공룡도 일정 기간 자란 다음 성장이 멈추는걸로 알려진다. 수명은 각각 공룡마다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이 온혈동물이였다는 점을 본다면 100년 이내로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수명은 30년으로 알려져있다
공룡의 종류
전통적으로 공룡은 용반목(龍盤目)과 조반목(鳥盤目)의 두 종류로 분류된다. 전문가들은 이들 공룡이 헤레라사우루스라는 훨씬 초기 공룡으로부터 진화했다고 믿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반목의 동물이 용반목의 동물의 수를 넘어섰고 새로운 공룡들이 두 집단에서 진화되어 나왔다. 이들 새로운 공룡들은 생존에 보다 잘 적응하여 먹이를 얻고 적으로부터 도망치는 데 익숙했다. 용반류는 도마뱀의 골반을 닮고, 조반류는 새의 골반을 닮았다.
용반목은 수각아목와 용각아목으로 나뉘며, 용반목의 허리는 도마뱀형으로 장골, 치골, 좌골이 세 방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좌골에서 치골이 앞으로 향하는 것으로 식별된다. 용반목에는 크기가 크거나 육식 공룡들이 포함된다.
대한민국에는 쥐라기와 백악기의 지층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1973년에 경북 의성군 탑리 부근에서 공룡의 뼈 화석이 발견된 이후 1977년부터 이 '공룡 골짜기'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많은 공룡 화석을 발굴해 냈다. 1983년 경남 하동군 금남면에서는 조반류의 알껍질 화석이, 또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평리에서는 약 360개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 발자국은 대부분 조반류의 두 다리로 걸은 공룡의 것이나, 일부 용반류의 것과 네 다리로 걸은 공룡의 것도 있다. 그 밖에 경남 고성의 해안 및 함안·통영·울산 등지에서 수천 개나 되는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발견되었으며 합천·진주·군위 등지에서도 크고 작은 많은 초식공룡과 육식공룡 등의 화석이 발견되어 앞으로 대한민국에서도 공룡의 완전한 뼈대 화석이 발견될 날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공룡이름 뜻
갈리미무스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4~5m
식성 잡식성
분류 용반목, 수각류
화석 발견 장소 아시아(몽골)
‘닭을 닮은 공룡’이라는 뜻으로, 전체적인 생김새가 깃털 없는 타조 같다.
타조를 닮은 공룡 중에서는 가장 큰 공룡이다. 육식 공룡에 대항해 싸울 만한 무기가 없는 대신, 몸매가 늘씬하고 다리가 가늘고 길어 시속 50km가 넘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시력은 좋았고, 꼬리는 빠른 속도로 달릴 때 몸의 균형을 잡는 역할을 했다. 목은 가늘고 머리는 작으며, 부리처럼 생긴 입에 이빨은 없다.
발은 앞뒤 모두 세 개의 발가락이 있으나 특별히 날카로운 발톱은 보이지 않으며, 앞다리는 뒷다리에 비해 매우 짧지만 물건을 집을 수 있었다.
먹이는 다른 공룡의 알이나 자기보다 작은 동물, 구과류(열매), 또는 곤충 등을 먹었다. 최근 발견된 화석에서는 소화를 돕는 위석이 나오기도 했다.
데이노니쿠스
시기 백악기 전기
몸 길이 2.5 4m
식성 육식성
분류 용반목, 수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날카로운 발톱’이라는 뜻으로, 뒷다리에 있는 네 개의 발가락 가운데 두 번째 발가락의 발톱은 13cm가 넘는 날카로운 갈고리 모양이다.
데이노니쿠스 몇 마리가 테논토사우루스를 습격했던 것으로 보이는 화석이 1964년 미국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갈고리 발톱으로 사냥감을 찍고 있었다. 또한 이 발톱은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는데, 풀숲이나 거친 땅 위를 걸을 때 상하지 않게 위아래로 들 수 있고 90도 이상 회전할 수도 있었다.
이들은 떼를 지어 다니며 날쌘 몸매와 튼튼한 뒷다리로 자기보다 몸집이 훨씬 큰 사냥감을 시속 40km로 뒤쫓아가, 힘껏 뛰어올라 공격했다. 앞다리에 있는 세 개의 발톱 또한 매우 날카롭고, 단단한 턱에 나 있는 이빨도 무서운 무기였다.
두 발로 걸었으며 뒷다리는 튼튼하고 길며, 근육으로 연결된 쭉 뻗은 꼬리는 몸의 균형을 잡고 빨리 달리는 데 도움을 주었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크지만 무게는 가벼워 점프하는 데 지장이 없었으며, 머리가 큰 만큼 뇌도 커서 머리가 좋았다.
디플로도쿠스
시기 쥐라기 후기
몸 길이 25 27m
식성 초식성
분류 용반목, 용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캐나다)
‘두 개의 기둥(줄기)’이라는 뜻의 공룡이다.
몸 길이에 비해 몸무게가 가벼운데, 목뼈나 등뼈 일부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목이 가벼웠고, 목 척추에 붙어 있는 근육이 발달해 목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목뼈 하나의 길이는 가장 긴 것이 1m에 달하기도 한다.
이 공룡의 특징은 긴 꼬리인데, 모두 70여 개의 뼈로 되어 있어 공룡 중에서 가장 길다.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목 또한 길어서 7~8m나 되지만 머리는 길이가 60cm 정도로 작다.
온순한 성격으로 얕은 물이나 물가에서 무리 지어 살았으며, 물가의 부드러운 식물이나 나뭇잎을 하루에 300kg이 넘게 먹었다. 이빨은 머리빗처럼 생겨 나뭇잎을 훑기에 좋았고, 위에는 소화를 돕는 위석이 있다.
콧구멍이 머리 위쪽에 뚫려 있어 물 속에 들어가 머리만 내놓고 있으면 숨을 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육식 공룡의 공격을 받으면 앞발에 있는 날카로운 발톱과 튼튼하고 긴 꼬리를 휘둘러 물리쳤다.
딜로포사우루스
시기 쥐라기 전기
몸 길이 6m
식성 육식성
분류 용반목, 수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볏이 두 개 달린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머리뼈 양쪽에 30cm 정도의 뼈로 된 반달 모양의 벼슬이 달려 있다. 이 볏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장식으로서 수컷에게만 있었던 듯하다. 적을 위협하기 위해 색깔을 띠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날씬한 몸매와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긴 꼬리로 보아 달리는 속도가 무척 빨랐을 것이다. 육식 공룡이지만 턱이 약하고 이빨이 날카롭지만 가늘어서 직접 사냥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로 작은 동물을 잡아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튼튼한 앞발과 뒷발의 날카로운 발톱이 고기를 찢기에 알맞다. 미국에서 거의 완전한 모습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마멘키사우루스
시기 쥐라기 후기
몸 길이 22m
식성 초식성
분류 용반목, 용각류
화석 발견 장소 아시아(중국, 몽골)
중국 사천성 마멘키라는 지역에서 화석이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공룡 중에서 가장 긴 목을 자랑하는 공룡으로 목 길이만 무려 13m에 달한다. 목은 19개의 목뼈로 연결되어 있으며, 뼈 사이에 공간이 있어 구부리기 쉽고, 긴 목을 이용해 아무리 높은 곳에 있는 먹이도 쉽게 먹을 수 있었다. 먹이는 침엽수 잎과 부드러운 잡목이었는데,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양을 먹었다.
몸에 비해 머리는 작고 성격도 온순했다. 몸 크기의 절반이 넘는 목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목뼈 사이 사이에 수많은 근육이 얽혀 등부터 머리까지 연결하고 있다. 목이 긴 만큼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꼬리 또한 길었는데, 육식 공룡이 나타나면 힘차게 휘둘러 쫓았다.
무리 지어 살면서 먹이를 찾아 장소를 옮길 때는 무리 가운데에 새끼들을 두어 육식 공룡의 공격을 막았다.또한 깊지 않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기도 했다.
마이아사우라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9m
식성 초식성
분류 조반목, 조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착한 어미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1978년 미국의 공룡학자 호너가 공룡이 새끼를 돌보았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하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
호너가 발견한 것은 이 공룡의 둥지였는데, 그 둥지 한가운데 알이 동그랗게 놓여 있었다. 새 둥지와 비슷한 이 둥지의 발견으로 공룡이 파충류보다 새에 더 가깝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이 공룡이 발견된 화석 주위에 알에서 깨어난 새끼들이 많았는데, 이것으로 보아 무리를 지어 알을 낳고 공동으로 키웠던 것 같다. 이로써 공룡이 대부분의 파충류처럼 새끼를 낳기만 하고 돌보지 않았다는 생각을 수정해 ‘공룡이 새끼를 길렀다’는 설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성격은 온순했고 네 발로 걸었으며, 꼬리는 길고 탄탄하여 몸의 균형을 잡아 주었다. 오리 주둥이 공룡이므로 이빨이 잘 발달해 다양한 식물을 먹었다. 지금까지 이 공룡의 화석은 아주 많이 발견되었는데, 무리를 지어 생활했기 때문이다.
모노클로니우스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5~6m
식성 초식성
분류 조반목, 각룡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하나의 뿔’이라는 뜻으로, 코 위에 긴 뿔이 있다. 각룡 가운데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공룡이다. 센트로사우루스와 비슷하나, 프릴이 센트로사우루스와 다르다.
머리는 크고 프릴을 빙 둘러 돌기가 나 있다. 하지만 이 돌기가 없는 종류도 있다. 큰 머리에 비해 꼬리는 짧고, 튼튼한 네 다리로 달릴 때는 무척 빨랐다. 새의 부리처럼 생긴 입으로 나뭇잎, 질긴 나무 줄기를 뜯어 먹었다.
바로사우루스
시기 쥐라기 후기
몸 길이 25 30m
식성 초식성
분류 용반목, 용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아프리카(탄자니아)
‘무거운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1890년 미국의 공룡학자 마시 교수가 이름을 지었다.
거대한 몸집에 목과 꼬리가 길었다. 목뼈에는 빈 공간이 있어 무게를 줄였고, 머리끝까지 피를 보내기 위해 강력한 목 근육이 발달했다.
머리는 작고, 입에는 머리빗 모양의 이빨이 나 있어 나뭇잎을 긁어모으기에 알맞았다. 육식 공룡의 공격을 받으면 채찍과 같이 긴 꼬리를 휘두르는가 하면 뒷발로 일어서서 위협하기도 했다. 성격은 매우 온순했고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
바리오닉스
시기 백악기 전기
몸 길이 9~10m
식성 육식성
분류 용반목, 수각류
화석 발견 장소 유럽(영국)
‘무거운 발톱’이라는 뜻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앞발톱이 매우 커서 30cm가 넘는 것도 있다. 튼튼하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이 앞발과 발톱을 이용해 작살로 찍듯이 물고기를 잡았다. 발견된 화석의 배에서 물고기의 비늘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머리는 길쭉하고, 물가에서 살며 물고기를 주로 먹었다.
입 위에 볏과 같은 것이 있고, 날카로운 이빨이 촘촘하게 나 있는데, 모두 128개나 되는 것도 발견되었다.
이 공룡의 화석은 1982년에 발견되었는데, 뼈의 60% 정도밖에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다. 특이한 것은 마치 악어처럼 턱이 굴곡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벨로키랍토르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1.8m
식성 육식성
분류 용반목, 수각류
화석 발견 장소 아시아(중국, 몽골)
‘날쌘 도둑’이라는 뜻으로, 몸의 생김새로 보아 재빠른 몸놀림에 머리도 아주 좋은 공룡이었을 것이다.
머리는 길쭉하고 입은 납작하며 이빨은 날카롭다. 이들은 무리를 지어 사냥하면서 튼튼한 꼬리와 뒷다리를 이용해 사냥감을 향해 높이 뛰어올라 뒷다리에 있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찍었다.
이 공룡의 화석이 1971년에 몽골에서 발견되었는데, 프로토케라톱스와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토케라톱스의 몸에 이 공룡의 발톱이 박혀 있었고, 프로토케라톱스는 벨로키랍토르의 앞발을 물고 있었다. 이 두 공룡은 서로 싸우다 갑작스런 모래 폭풍에 덮여 죽은 것으로 보인다.
튼튼한 뒷다리의 발가락에는 크고 날카로운 발톱이 달려 있다.
브라키오사우루스
시기 쥐라기 후기
몸 길이 23m
식성 초식성
분류 용반목, 용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아프리카(탄자니아, 알제리)
‘팔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길어 붙여진 이름이다.
가장 무거운 공룡 중에 하나로, 성격은 온순했고 거대한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2톤에 가까운 나뭇잎을 먹었다. 턱은 작고, 가느다란 이빨은 마치 갈퀴처럼 사이가 벌어져 있어 잎사귀를 모으고 훑기에 알맞았다.
머리 꼭대기에 꼬뼈가 크게 확장되어 있는데 그 곳에 콧구멍이 있어서 물 속에 잠수한 뒤 콧구멍만 내놓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80톤이나 되는 몸집으로 잠수했다가는 수압 때문에 숨도 쉬지 못했을 것이다. 이 콧구멍 때문에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한데 가장 믿을 만한 것은, 뇌를 식혀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무 그늘 아래로 내릴 수도 없이 목이 길어 강한 햇빛을 그대로 받아야 했던 머리를 식히기 위해 코로 들어간 차가운 공기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목 길이가 12m가 넘는데 목뼈 사이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어 부드럽게 움직일 수 있었고, 뒷다리로 일어서면 키가 거의 20m에 달해 아무리 높은 곳에 있는 먹이도 쉽게 먹을 수 있었다. 거대한 몸집을 지탱하는 발은 코끼리를 닮았다.
어지간한 육식 공룡도 쉽게 공격하지 못했겠지만, 설사 공격해 오더라도 길고 강한 꼬리를 휘둘러 막았다. 이 공룡의 화석은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발견되어 정확하게 복원되었다.
세이스모사우루스
시기 쥐라기 후기
몸 길이 30 50m
식성 초식성
분류 용반목, 용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지진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이 공룡의 몸집이 너무 거대해 한번 걸으면 땅이 흔들려 지진이 났을 거라는 생각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구상에 살았던 동물 중 가장 길고 가장 컸으며, 몸무게가 약 100톤으로 가장 무거웠던 공룡이다. 거대한 몸집을 지탱하기 위해 다리는 굵고 튼튼했으며, 몸집은 컸지만 성질이 온순해 무리 지어 생활했다.
빗살처럼 생긴 이빨로 나뭇잎을 먹었다. 아무리 높은 곳에 있는 먹이도 긴 목을 이용해 쉽게 먹을 수 있었다. 위에는 소화를 돕기 위한 위석이 있었는데, 뼈와 함께 발견된 위석이 모두 230개나 된다. 긴 목을 이루는 목뼈에는 빈 공간이 많아 가벼웠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센트로사우루스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5~6m
식성 초식성
분류 조반목, 각룡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캐나다, 미국)
‘가운데 도마뱀’이라는 뜻이다. 코 위에 있는 뿔은 앞쪽을 향해 날카롭게 뻗어 있고, 프릴에도 가시들이 돋아 있다. 프릴은 뼈로 되어 있지만 그리 단단하지 않다.눈 위에도 작은 뿔이 있고 머리는 커서 길이가 1m 정도나 된다. 이렇게 머리가 크지만 목뼈 관절이 부드러워 머리를 움직이는 데 문제가 없었다. 무거운 몸을 지탱하기 위해 다리는 아주 튼튼했으며, 체중을 분산하기 위해 발가락은 짧고 넓적하게 벌어져 있다.
많은 무리의 화석에서 한꺼번에 발견된 것으로 보아 육식 공룡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무리 지어 생활했을 것이다. 나뭇잎, 구과류(열매) 등의 식물을 먹었다.
스테고사우루스
시기 쥐라기 후기
몸 길이 5 9m
식성 초식성
분류 조반목, 검룡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지붕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스테고’란 등줄기를 따라 나 있는 골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석이 발견된 지층으로 볼 때 숲 속에서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검룡류 중 몸집이 가장 크다.
이 공룡의 특징인 골판은 10~11쌍의 오각형이며, 60~ 80cm의 뼈에 근육이 붙어 있어 양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 골판들은 몸을 지켜 주는 일 외에도 판 속에 핏줄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체온을 조절하는 구실도 하였을 것이다.
꼬리에는 뼈로 된 날카로운 가시가 네 개 있는데 육식 공룡을 물리치는 무기였다. 스테고사우루스는 아주 순한 초식 공룡으로 나뭇잎을 먹었으며, 입은 딱딱하고 이빨은 아주 작고 약했다.
큰 몸집에 비해 머리가 작고, 뇌 또한 호두알 크기에 70g 정도로 달걀의 무게와 비슷해 공룡 중 머리가 가장 나쁘고 행동이 느렸을 것이다.
스테고케라스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2.5m
식성 초식성
분류 조반목, 각룡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캐나다)
1898년 미국에서 화석이 처음 발견되었고, 이후 캐나다의 낮은 지역에서 발견되었지만, 이 공룡이 살던 곳은 로키 산맥과 같은 높은 지대일 것이다.
‘뿔이 있는 천장’이라는 뜻으로, 머리뼈가 대단히 두꺼워 일명 ‘박치기 공룡’이라고도 한다. 머리뼈는 둥근 원형이고 위로 솟았으며, 뒷부분에 작은 혹들이 있다. 두껍고 단단한 머리뼈는 박치기를 하는 데 사용했다. 즉 육식 공룡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또는 암컷에 비해 수컷의 머리뼈가 더 두꺼운 것으로 보아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세력권을 지키기 위해 박치기로 승부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치기를 할 때는, 상대에게 강한 충격을 주기 위해 온몸의 무게를 실어서 돌진했다.
성격은 온순하였고 무리를 지어 생활하면서 나뭇잎, 구과류(열매) 등을 먹었다. 짧은 앞다리와 길고 튼튼한 뒷다리로 보아 두 발로 서서 걸었으며, 몸매가 날씬해 매우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스트루티오미무스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3 4m
식성 잡식성
분류 용반목, 수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캐나다)
‘타조를 닮음’이란 뜻으로, 뒷다리가 튼튼하고 길며, 지금의 타조를 닮은 몸매로 매우 민첩하고 빨리 달렸다. 꼬리와 목은 길고 머리는 작은데, 마치 새의 부리처럼 생긴 입에는 이빨이 없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세 개의 앞발가락은 길어 물건을 쥘 수 있었다. 이 앞발로 곤충이나 나뭇잎, 구과류(열매) 등을 먹었다. 뒷발가락도 세 개이다. 특히 눈이 발달하고 뇌가 상대적으로 커서 다른 어떤 공룡보다 감각 기관이 뛰어났다.
성격은 매우 예민했으며 주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이름을 알려줄테니까 원하는대로 찾아보시고 분류를 해 드리겠습니다.
1. 용반류
파충류형 요골을 가진 종류로서, 좌골이 치골에 대해 어느 정도의 각도를 이루며 5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다.
ㄱ. 용각류
용각류도 수각류처럼 파충류와 비슷한 골반을 갖고 있지만, 그 밖의점에서는 수각류와 완저히 달랐다.용각류 공룡들은 초식동물이었다 용각류는 네 다리로 걸어다녓다.
ㄱ. 수각류
모두 육식공룡이다 이공룡들은 뒷다리로 일어서서 걸어다니면서 먹이를 사냥했다.
수각류는 몸무게가 수톤이나나갔고 몸길이는 11m에 이르렸다.
ㄴ. 카르노사우루스류
카르노사우루스류 여전히 뒷다리로 걸어다니는 육식공룡이었지만 수각류보다 몸집이 더크고 힘도 더 세어졌다, 몸길이가 14m에 이르고 몸무게가 6톤넘는 티라노사우루스 렉스 도 카르노사우루스fb에 속한다.
ㄴ. 코엘루로사우루스류
이공룡들은 몸집이 작고 가벼워진 대신 속도와 민첨성이 좋아졌다. 살점을 잘라 내기에 적합한 날타로운 이빨과 발톰은 그래도 갖고 있었다, 겨우 고양이만한 크기의 콤프소그나투스도 사나운 육식 공룡인 데이노도쿠와 벨로키랍토르와 함께 코엘루로사우루스류에 속한다,.2. 조반류:
조류형의 요골을 가진 종류로서 좌골이 길고 치골과 평행하여 접해있다. 모두 초식성이다.
조반류 공룡의 일족은 조각아목에 속하며 때에 따라서는 두 다리로 설 수도 있었고, 네 다리로 걸을 수도 있었다.
ㄱ. 검룡류
몸에 철갑을 두른 것 같은 종류이며, 쥐라기의 스테고사우르스가 잘 알려져 있다. 백악기에는 몸길이가 4∼10M이고 등에 비늘 모양의 단단한 껍데기와 가시 모양의 돌기를 가진 검룡류가 출현했다.
스테고 사우르스
ㄱ. 갑주룡
안킬로 사우르스
ㄱ. 각룡류
백악기 후기에 나타난 머리에 뿔이 있는 공룡이다.그리 사납지 않은 모습으로 되어있는 조반목의 이빨은 마치 멧돌같이 먹이를 잘게 갈 수 있다.
초식공룡으로 스테고사우루스, 트리케라톱스, 켄트로사우루스 등이 있다.
참고로 익룡은 공룡이 아닙니다.
익룡은 공룡으로 분류를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용반류와 조반류만 공룡으로 분류하기 때문입니다.
트라이아스기 후기에 출현하였고 쥐라기, 백악기에 번성하였다. 익룡은 몸집이 거대한 반면 뼈 속이 비어 있고 골질 속에서 공기주머니가 들어 있는 작은 공간이 있어서, 날 수 있을 만큼 몸무게를 가볍게 할 수 있었다. 익룡이 하늘을 날 때는 글라이더처럼 바람을 이용해 활공하였다(최근에는 날개를 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설이 대두되고 있다). 몸집이 크고 꼬리를 가진 람포링쿠스류와 몸집이 작고 꼬리가 없는 프테로닥틸루스류의 두 무리가 있다. 하늘을 날다가 물 속에 뛰어 들어 물고기를 잡아 먹고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브라키오사우루스
높이 : 12m,
몸무게 : 77톤
먹 이 : 초식
생존시기 : 쥐라기 후기
생존지역 : 아프리카의 알제리, 탄자니아, 북아메리카의 콜로라도
'팔 파충류'라는 뜻을 지닌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대략 1억 5000만 년 전에 지금의 아프리카와 북미 대륙에 살았던 거대한 초식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라는 이름은 앞다리 공룡이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다른 공룡들과는 달리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앞다리가 뒷다리보다 길다.
뒷다리보다 긴 앞다리 덕에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어깨 쪽이 엉덩이 쪽보다 높아서
몸통이 목에서 꼬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오랫동안 가장 크고 무거운 공룡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45m까지 자라는 사이스모사우루스를 비롯한
훨씬 더 큰 공룡들을 발견했다.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작은 머리와 긴 목, 긴 꼬리를 가진 거대한 공룡인 용각류의 일종이다.
그러나 아파토사우루스와 같은 다른 용각류에 비해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목이 더 길며, 꼬리는 반대로 더 짧고 굵다.
머리에는 넓고 납작한 입이 달려 있고, 콧구멍은 머리 꼭대기에 있다.
과학자들은 브라키오사우루스의 콧구멍이 머리 꼭대기에 있어서
물 속에서 살면서 콧구멍을 내밀고 숨을 쉬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키오사우루스의 골격 화석이
미국 서부와 아프리카 서부 탄자니아의 해안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물가 근처의 저지대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물가의 마른 땅에서 기린처럼 나무 꼭대기에 있는
잎을 먹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디플로도쿠스
시기 쥐라기 후기
몸 길이 25 27m
식성 초식성
분류 용반목, 용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캐나다)
‘두 개의 기둥(줄기)’이라는 뜻의 공룡이다.
몸 길이에 비해 몸무게가 가벼운데, 목뼈나 등뼈 일부의 속이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목이 가벼웠고, 목 척추에 붙어 있는 근육이 발달해 목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목뼈 하나의 길이는 가장 긴 것이 1m에 달하기도 한다.
이 공룡의 특징은 긴 꼬리인데, 모두 70여 개의 뼈로 되어 있어 공룡 중에서 가장 길다. 몸의 균형을 잡기 위해 목 또한 길어서 7~8m나 되지만 머리는 길이가 60cm 정도로 작다.
온순한 성격으로 얕은 물이나 물가에서 무리 지어 살았으며, 물가의 부드러운 식물이나 나뭇잎을 하루에 300kg이 넘게 먹었다. 이빨은 머리빗처럼 생겨 나뭇잎을 훑기에 좋았고, 위에는 소화를 돕는 위석이 있다.
콧구멍이 머리 위쪽에 뚫려 있어 물 속에 들어가 머리만 내놓고 있으면 숨을 쉬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육식 공룡의 공격을 받으면 앞발에 있는 날카로운 발톱과 튼튼하고 긴 꼬리를 휘둘러 물리쳤다.
딜로포사우루스
시기 쥐라기 전기
몸 길이 6m
식성 육식성
분류 용반목, 수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볏이 두 개 달린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머리뼈 양쪽에 30cm 정도의 뼈로 된 반달 모양의 벼슬이 달려 있다. 이 볏은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장식으로서 수컷에게만 있었던 듯하다. 적을 위협하기 위해 색깔을 띠었을 것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날씬한 몸매와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긴 꼬리로 보아 달리는 속도가 무척 빨랐을 것이다. 육식 공룡이지만 턱이 약하고 이빨이 날카롭지만 가늘어서 직접 사냥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주로 작은 동물을 잡아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튼튼한 앞발과 뒷발의 날카로운 발톱이 고기를 찢기에 알맞다. 미국에서 거의 완전한 모습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알로사우루스
크기 : 최대 12m
먹이 : 육식
생존시기 : 쥐라기 후기
생존지역 :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북아메리카의 콜로라도, 유타, 와이오밍, 호주
거의 티라노사우루스만큼 잘 알려진 이 육식공룡은 그보다 천만년 정도 전에 살았다. 아파토사우루스의 큰 집단과 다르게 거대한 용각류들과 함께 지금의 미국 로키산맥 일대에서 지배적인 육식공룡이었다. 몇몇 전문가들은 이 중간 크기의 육식공룡이 길이가 21.34m나 되는 용각류들을 사냥했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여러 마리의 알로사우루스는 어리고 병든 용각류 공룡을 골라 그것이 쓰러질 때까지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발톱과 칼같은 이빨로 베어냈을 것이다. 여러 아파토사우루스의 뼈에서 알로사우루스의 이빨 자국이 발견되었다.
티라노사우르스
몸길이 : 15m,
선 자세에서 엉덩이 높이는 : 3.7m,
몸무게 : 6~7톤
몸을 일으킨 높이 : 6m.
티라노사우루스는 매우 큰 육식공룡에 속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육중한 근육질 꼬리를 뒤로 뻗어
균형을 잡으면서 몸을 지면에 평행하게 한 채 걸어다녔을 것이다.
몸길이가 15m에 달하고, 선 자세에서 엉덩이 높이는 3.7m이며,
몸무게는 6~7톤이 나간다. 몸을 일으키면 높이가 6m에 달한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육중한 근육질 꼬리를 뒤로 뻗어 균형을 잡으면서
몸을 지면에 평행하게 한 채 걸어다녔을 것이다
티라노사우루스의 거대한 머리는 1.4m까지 자라며,
강력한 턱은 15cm 길이의 날카로운 이로 무장되어 있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짧고 유연한 목과 강력한 몸통 덕분에 괴물과 같은 입을 이용하여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뜯어낼 수 있다.
이 공룡의 또 다른 치명적인 무기는 뒷다리에 난 날카로운 발톱이다.
티라노사우루스는 입으로 먹이를 물고는
커다란 발톱으로 몸통을 가르고 찢었을 것이다.
앞다리는 몸의 다른 부위와 달리
매우 작고 조그만 발톱이 달린 발가락 두 개만 달려 있다.
앞다리는 작긴 하지만 힘이 세다. 티라노사우루스는 땅에 엎드려 있다가
몸을 일으켜 세울 때 이 앞다리를 사용했을 것이다.
켄트로사우루스
몸길이 : 5m
몸무게 : 2톤
뇌의 크기 ; 호두알 만했다
먹이 : 초식(억센 소철)
생존시기 : 쥐라기 초기
생존지역 :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뾰족 파충류'라는 뜻을 가진 켄트로사우루스는
등에는 목에서 등의 중간부분까지 두 줄로 골판이 솟아 있고
그 뒤로 꼬리 끝까지 2줄로 가시가 돋아 나 있고 어깨에도 한 쌍의 가시가 있었다.
이 골판과 가시들은 뼈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원래 위치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골판의 기능도 불확실한데
아마도 체온조절, 짝짓기, 방어용 등으로 생각되며 가시를 이용하여 적을 물리쳤다.
뇌는 작지만 길고 후각기능이 매우 발달되어 있었다.
공격을 당하면 꼬리를 무기처럼 좌우로 휘둘러 방어했으리라 추측된다.
머리뼈는 길고 좁으며 이빨이 없는 부리와 조그마한 어금니가 있었다.
머리는 땅 가까이 두고 다녔는데 발가락에는 발굽 같은 발톱이 돋아 나 있었다.
아르케옵테릭스
크기 : 35cm
먹이 : 곤충,과일
생존시기 : 쥐라기 후기
생존지역 : 유럽의 독일
아르케옵테릭스는 쥐라기후기에 번성했던 공룡으로서 생김새가 마치 새처럼 깃털이 달려있어 고생물학자들은 새처럼 날았으리라는 추측을 하고 있으며 먹이습성은 날카로운 이빨 생김새로 보아 곤충이나 또는 과일 등을 먹었으리라 짐작된다.
파라사우롤로푸스
크기 : 9m
먹이 : 초식
생존시기 : 백악기 말기
생존지역 : 북아메리카의 앨버타,뉴멕시코,유타
'볏이 달린 도마뱀'이라는 뜻의 길이가 2m나 되는 가늘고 속이 빈 볏을 가지고 있었다. 이 볏은 나팔 같은 소리를 내는 데 쓰였을 것이다. 머리를 들고 있을 때는 볏이 등뼈에 난 작은 홈에 딱 맞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스테고사우루스
시기 쥐라기 후기
몸 길이 5 9m
식성 초식성
분류 조반목, 검룡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지붕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스테고’란 등줄기를 따라 나 있는 골판을 가리키는 말이다. 화석이 발견된 지층으로 볼 때 숲 속에서 살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검룡류 중 몸집이 가장 크다.
이 공룡의 특징인 골판은 10~11쌍의 오각형이며, 60~ 80cm의 뼈에 근육이 붙어 있어 양쪽으로 움직일 수 있었다. 이 골판들은 몸을 지켜 주는 일 외에도 판 속에 핏줄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체온을 조절하는 구실도 하였을 것이다.
꼬리에는 뼈로 된 날카로운 가시가 네 개 있는데 육식 공룡을 물리치는 무기였다. 스테고사우루스는 아주 순한 초식 공룡으로 나뭇잎을 먹었으며, 입은 딱딱하고 이빨은 아주 작고 약했다.
큰 몸집에 비해 머리가 작고, 뇌 또한 호두알 크기에 70g 정도로 달걀의 무게와 비슷해 공룡 중 머리가 가장 나쁘고 행동이 느렸을 것이다.
스테고케라스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2.5m
식성 초식성
분류 조반목, 각룡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미국, 캐나다)
1898년 미국에서 화석이 처음 발견되었고, 이후 캐나다의 낮은 지역에서 발견되었지만, 이 공룡이 살던 곳은 로키 산맥과 같은 높은 지대일 것이다.
‘뿔이 있는 천장’이라는 뜻으로, 머리뼈가 대단히 두꺼워 일명 ‘박치기 공룡’이라고도 한다. 머리뼈는 둥근 원형이고 위로 솟았으며, 뒷부분에 작은 혹들이 있다. 두껍고 단단한 머리뼈는 박치기를 하는 데 사용했다. 즉 육식 공룡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또는 암컷에 비해 수컷의 머리뼈가 더 두꺼운 것으로 보아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세력권을 지키기 위해 박치기로 승부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치기를 할 때는, 상대에게 강한 충격을 주기 위해 온몸의 무게를 실어서 돌진했다.
성격은 온순하였고 무리를 지어 생활하면서 나뭇잎, 구과류(열매) 등을 먹었다. 짧은 앞다리와 길고 튼튼한 뒷다리로 보아 두 발로 서서 걸었으며, 몸매가 날씬해 매우 빠르게 움직였을 것이다.
스트루티오미무스
시기 백악기 후기
몸 길이 3 4m
식성 잡식성
분류 용반목, 수각류
화석 발견 장소 북아메리카(캐나다)
‘타조를 닮음’이란 뜻으로, 뒷다리가 튼튼하고 길며, 지금의 타조를 닮은 몸매로 매우 민첩하고 빨리 달렸다. 꼬리와 목은 길고 머리는 작은데, 마치 새의 부리처럼 생긴 입에는 이빨이 없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세 개의 앞발가락은 길어 물건을 쥘 수 있었다. 이 앞발로 곤충이나 나뭇잎, 구과류(열매) 등을 먹었다. 뒷발가락도 세 개이다. 특히 눈이 발달하고 뇌가 상대적으로 커서 다른 어떤 공룡보다 감각 기관이 뛰어났다.
성격은 매우 예민했으며 주위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항리 공룡 화석지
우항리 공룡화석 및 고생물화석 산출지 는 해남읍에서 20Km, 황산면에서 2Km 떨어진 한반도의 서남단 화원반도의 동북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화원반도 북쪽 해안선을 따라 분포하는 백악기의 우항리 지층은 1953년 세일층이 협재되어 있음이 밝혀졌고 1963년 정밀 지표조사가 실시된 바 있으며 1970년대에 석유매장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석유 탐사 작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과거에 이곳은 해남만의 남쪽에 위치한 바닷가였으나 지금은 금호 방조제에 의해 막혀진 대규모의 담수호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화원반도와 목포를 연결하는 금호방조제가 조성된 후 수면이 낮아짐에 따라 노출된 지역으로 푸른색, 검은색, 흰색의 퇴적층이 색종이를 쌓아 놓은 듯 층층이 쌓여 있어 보는 이를 경탄케 한다.
공룡발자국은 석유 매장을 확인하기 위해 지질탐사를 하던 중 발견되어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이후 문화재관리국과 해남군의 노력에 의해 자연사 유적지로서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우항리 지역은 상부와 하부 퇴적층의 수평 노출이 평균 30cm에 불과하였고 지층의 경사가 해안의 반대방향으로 놓여 있어 발굴 및 복원 연구에 의하지 않고는 오늘날 같이 세계적 규모의 고생물 화석지를 발견하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우항리 공룡화석지의 가치는 지금으로부터 8천 300만년전에 형성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물갈퀴 달린 새발자국 1,000여점과 미국 콜로라도 대학 록클리 교수에 의해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큰 익룡의 발자국 300여점, 그리고 세계적으로 정교한 공룡의 발자국 500여점이 한 지역에서 발견되는 세계에서 유일한 지역으로 공룡의 생태환경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곳으로 평가되고 있는 지역이다.
그 외에도 공룡의 뼈, 나무가 굳어서 화석이 된 규화목, 퇴적층에 형성된 물결화석, 아시아에서 최초로 발견된 바다게의 발자국 등도 함께 관찰되고 있다. 발자국의 길이는 20cm에서 90cm에 걸쳐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으며 소규모 공룡에서 대형 공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공룡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발자국의 모양, 크기, 보행 간격을 고려해 볼 때 8,300만년전 우항리 일대에는 네발로 걷는 초식공룡과 2발로 걷는 육식공룡의 낙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항리 공룡화석지는 경상도의 진동층, 또는 함안층에 비하여 지질 연대가 젊으며 이러한 지질시대에 따른 공룡의 변천사를 밝히는데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또한 전세계적으로도 그 시대의 산출이 흔지 않아 학술적 보존가치가 크며 국제적인 지질학 퇴적명소로 알려져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 대첩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에서 일본 수군을 상대로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명량 해전에서는 전선의 수가 133척 대 12척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인데도 조류를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명량 해협은 진도와 화원 반도 사이에 있는 좁은 바다로, 우리 나라에서 조류가 가장 빠른 곳이다. 이 해역에는 남동쪽과 북서쪽으로 흘러가는 조류가 교대로 흐르며, 유속은 10노트 내외이다. 명량 대첩이 있었던 음력 9월 16일은 만조와 간조의 차이가 큰 날이며, 따라서 조류도 매우 강하게 흐르는 날이었다. 울돌목(명량 해협)의 좁은 해협과 거센 조류를 이용하여 적을 물리칠 전략을 세운 이순신 장군은 울돌목의 양 끝에 쇠사슬을 걸어 놓고 일본 수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수군들은 이른 아침부터 북서쪽으로 흐르는 조류를 타고 명량 해협을 통과하여 한강으로 올라가기 위해 우리 수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거침없이 몰려오던 일본 수군의 배들은 생각지도 않던 쇠사슬에 걸려 넘어져 부서지기 시작했다. 뒤따라 오던 일본 함대가 쇠사슬을 피하기 위해 방향을 돌리려고 했지만 북서쪽으로 흐르는 강한조류 때문에 방향을 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 때를 기회로 조선 수군은 각종 화포를 쏘며 맹렬히 공격했다. 시간이 지나 조류의 방향도 남동쪽으로 바뀌었다. 사기충천한 우리 군사들은 더욱 공격을 가하여 31척의 일본 배를 격파하였으며, 일본 수군은 패하여 도망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이처럼 바닷물의 흐름을 잘 이용하여 적은 수의 배로 10배가 넘는 일본 수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정리
바다가 운다고 해 명랑이라고도 불리는 울돌목은 해남군과 우수영과 진도군을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산처럼 크게 이는 파도와 울부짖는 듯한 파도의 울음소리가 일품인 곳입니다.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여m로 하루에도 한길 넘게 턱이 지는 밀물과 썰물이 몇차례나 있으며 썰물때가 아니면 대형선박들도 지나가기 힘들 정도로 물살이 거센 곳입니다. 임진년 전라수사로 있을 때부터 울돌목의 이런 특수한 형세를 잘 알고 있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이곳의 지형을 지혜롭게 이용해 명랑대첩에서 왜군을 맞아 압도적인 대승을 이룹니다. 1597년 9월 16일 새벽, 어란포에 머물던 왜군들이 400여척의 배를 타고 명랑으로 공격해 왔으나 곧 썰물이 되어 기함을 잃은 왜군들은 저마다 도망가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단 12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대파한,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대승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현생 인류의 발생과 이동bc60000~bc10000
1. 인류의 발생과 발전
2. 현생 인류 남성 Y염색체의 유래
3. 한민족 남성 Y염색체의 유래 (환인 유전자와 환웅 유전자, 치우 유전자 추적)
4. 한민족 여성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유래
1. 인류의 발생과 발전
지구가 생기고 인류가 발생하여 청동기 문명을 이루기까지는 간략하게 표로 대신한다.
시기 |
사건 |
---|---|
46억년전 |
지구 탄생 |
41억년전 |
바다와 대기 형성 |
40억년전 |
무산소 상태에서 RNA 출현, 자기 복제 |
39억년전 |
원형세포 출현, 탄소와 산소를 이용. |
35억년전 |
박테리아 출현, 광합성 시작 |
30억년전 |
대기중 산소 증가 |
21억년전 |
진핵세포 출현, 세포 핵과 미토콘드리아 등 세포내 기관 형성. |
12억년전 |
양성생식 시작, 육상 생물체 출현 |
10억년전 |
다세포생물 발생 |
6억년전 |
해면동물 발생, 운동기능 없이 소화기능만 있음 |
5억년전 |
(캄브리아기) 어류 발생 |
4.7억년전 |
원시 식물 육상에서 발생 |
4.5억년전 |
원시 동물 육상에 상륙 , 곤충과 거미 등 |
3억년전 |
상어 황금 시대, 양서류와 파충류 발생, 석탄, 석유 형성 |
2.5억년전 |
악어류 공룡 발생 |
2.2억년전 |
건조기후, 포유류 발생 |
2억년전 |
디노사우르스 등 거대 공룡 발생 |
1.8억년전 |
판게아 대륙 분열 |
1.6억년전 |
수중 포유류 발생 (오리너구리), 티라노사우르스 발생, 거대 공룡시대 |
6,500만년전 |
멕시코 유타칸반도에 혜성 충돌. 직경 170km의 충돌 흔적 남김. |
4천만년전 |
영장류(원숭이) 발생 |
1천만년전 |
건조기후, 인류의 선조와 고릴라 선조가 분화됨 |
5백만년전 |
인류 조상과 침팬지 조상이 분화됨(침팬지와 인류는 유전자 98%가 일치) |
370만년전 |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출현 |
2백만년전 |
도구 사용 원인 호모 하빌리스 homo-habilis출현, 인류의 뇌에 언어 중추가 생겨남. |
180만년전 |
직립원인 호모 이렉투수 homo-erectus 출현 |
50만년전 |
북경원인 출현 석탄 사용 |
19만년전 |
호모 사피엔스 조상 에디오피아에 출현 |
15만년전 |
현생인류의 여성 조상 유전자(Mitochondria Eve) 아프리카에 출현 |
13만년전 |
네안데르탈인 출현, 장례 매장 풍습. 창 사용, 언어 발달 |
10만년전 |
호모 사피엔스 homo-sapiens 출현. 아프리카로부터 이동하며 피부색 분화, 백인종 등 형성 |
82000년전 |
동물 뼈로 작살을 만들어 물고기를 사냥함 |
74000년전 |
인도네시아에서 토바 화산 폭발 Supervolcano . 6년간 여름이 없고 1000년간 빙하기 초래. 대부분의 구석기 인류 멸종 |
70000년전 |
마지막 빙하기 시작. 조개 묶음 목걸이 등장. |
60000년전 |
현생 인류의 남자 조상 아담유전자 (Y-chrosomal Adam) 아프리카에서 출현 |
50000년전 |
현생 인류 아프리카로부터 유럽과 호주로 이동 |
40000년전 |
크로마뇽인 프랑스에서 맘모스 사냥 |
32000년전 |
독일에서 조각품 만듬. 프랑스에서 피리 만듬 |
30000년전 |
현생인류 일본과 아메리카에 진출 |
20000년전 |
프랑스에서 기름 등잔 사용, 중국에서 뼈바늘 사용. 러시아에서 맘모스 뼈로 집을 만듬. |
16000년전 |
일본 북동부에서 질그릇 제작(신석기 시작) |
15000년전 |
빙하시대 끝남, 해수면 상승. 일본이 한반도에서 분리. 시베리아와 아메리카 분리 |
12700년전 |
북극 빙산 용해로 영거 드라이아스기 시작. 1200년간 혹한기. |
11600년전 |
영거드라이아스가 급격하게 끝남. 고원문명 시작. |
11000년전 |
인류 500만명에 도달, 털맘모스 멸종. 개를 사육하기 시작 |
10000년전 |
중동 지역에서 농업 발전. 밀등 8개 곡물과 과수 재배, 도시 인구가 19000명까지 증가 |
9000년전 |
반영구적인 주거 개발, |
8200년전 |
8.2K 사건. 기후 급냉 200년간 |
이후 12700년전(bc10700년)에 알 수 없는 이유로 북극의 빙하가 녹고 천년의 혹한기가 찾아왔다. 이때 대륙의 동물과 식물 자원의 몰락은 인류의 급격한 감소를 초래하였다.
이후로 인류는 이동 채렵생활에 의존해서는 겨울에 살아남을 수가 없고, 농사를 지어 수확하고 저장하는 생활을 알았던 종족만 살아남게 된다.
한편 천년의 혹한기 끝에 단 10년 동안에 걸쳐서 무려 10도 이상의 급격한 기온 상승이 있었다. 지난 천년동안 해안 가까이 살면서 혹한에 적응했던 인류로서는 기온 상승도 적응할 수 없는 재앙이었다. 이때 더위를 피해 인류는 고원으로 피난하여 살았을 것이다. 그것이 11600년전(bc9600년)이 된다.
그후 bc6200년경에 다시 200년의 혹한이 찾아왔다.
더워서 고원으로 향했던 인류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고원에서 다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환인족은 고원문명에서 발생하였고 환인국은 고원에서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2. 현생 인류 남성 Y염색체의 유래
아담 Y 염색체의 발생과 이동
현대인은 고대 원시인, 대부분의 구석기 인류와 달리 약 6만년전에 시작된 세칭 "아담"의 Y 염색체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아담의 시대에 다른 많은 원시인들이 존재했지만 아담 이외의 남성 유전자는 지구 상에서 사라지고, 아담의 후손 부족만이 전세계에 퍼져서 오늘날의 현대 인류를 탄생시켰다.
Y 유전자는 남성의 성염색체다. 보통 생식 분열 과정에서 Y 유전자의 일부분이 여성의 X유전자와 교차하여 변형된다. 그러나 Y 중심부에는 X 유전자와 영원히 교차되지 않고 절대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선조에서 후손까지 일정하게 전달되는 유전자 부위가 있다. 그래서 그 고정된 부위 염색체만을 추적하면 모든 남성의 직계 조상을 밝혀낼 수가 있다.
단, 수천년의 기간에 우연히 돌연변이가 일어나서 그 돌연변이 유전자가 다시 그대로 후손에게 내려가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이 돌연변이된 남성 유전자 형질의 계보를 추적해 몇만년 선대로 올라가면 현재 모든 지구 인류는 6만년전 아프리카인 아담의 유전자로 귀결된다. 백인종, 황인종, 흑인종 구분없이 모두 흑인 아담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담 이전에 구석기 시대에는 많은 원시인이 살았지만 대부분 멸종하였는데 72000년전의 인도네시아 토바 화산 폭발이 큰 역할을 하였다. 그후 60000년전에 아프리카에서 돌연변이로 시작된 소위 아담의 남성 Y 유전자가 전세계에 퍼진 것이며 그는 모든 현생 인류의 남자 유전자를 퍼뜨렸으니 전 지구인의 조상이다.
아담 남성 유전자로부터 훗날에 A, B 그룹이 생겨나서 지금까지 아프리카 안에 남아 있다.
M130 이라는 코드를 갖는 남성 유전자 C(M130)그룹이 5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생겨났다.
C(M130)그룹은 이란으로 건너가서 남아시아 해안을 따라서 인도 서부에서 네 갈래로 갈라져서 전 세계로 퍼졌다.
C1(M8)그룹은 일본까지 갔는데 도중에 흔적은 없다. 소수였거나 일본 이외의 지역에서는 멸절당했다.
C2는 인도 남해안을 따라서 동진하여 인도네시아와 호주에 이르렀다.
C3(M217)그룹은 약 3만년전에 중앙아시아 평원을 따라 시베리아까지 올라가서 시베리아와 몽고지방, 일부는 아메리카까지 건너갔다.
C4는 인도와 파키스탄에 남았다.
C(M130)그룹이 변형되어 D(M174)그룹과 E(M96)그룹을 낳았는데
D(M174)그룹은 인도 동부에서 히말라야산을 넘어 티벳을 거쳐 북만주와 러시아 동쪽을 지나 일본에 이르러 아이누족이 되었다.
C(M130)그룹은 원시 몽골인의 주종이며, 후에 환웅의 부여족인 C3그룹(M217)을 낳았고, 다시 중세 몽고족 징기스칸의 활약으로 유럽과 남아메리카에도 영향을 미친 C3c(M48)그룹을 낳았다.
C3그룹이 한반도에는 약 15%정도이고, D(M174)그룹은 1% 이내로 희소하게 남아 있다. C3c는 한반도에 거의 없다.
E(M96)그룹은 아프리카와 중동, 그리고 지중해 연안 유럽에 있다.
아담 남성 유전자로부터 M168 코드를 포함한 남성 유전자를 가진 F그룹이 약 45000년전에 아프리카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은 인도 서부까지 이동했다.
F(M89)그룹으로부터 약 40000년전에 다시 다섯그룹이 시작되었는데 각기 G(M201), H(M52), I(M170), J(M304), K(M9)그룹이다.
G(M201)그룹은 30000년전에 시작되고,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 그리고 이탈리아에 분포한다.
H(M52)그룹은 인도에도 분포하고 이탈리아의 로마에도 있다. 약 25000-20000년전에 기원하였다.
I(M170)그룹은 유럽의 크로아티아,스칸디나비아에 분포하고, 역시 약 25000-20000년전에 기원하였다.
J(M304)그룹은 그리스, 이탈리아, 터키, 코카서스에 분포하고 약 15000년전에 기원하였다.
한민족의 주종이 속한 K(M9)그룹은 40000년전에 이란과 중앙아시아 남부에 있었다.
K(M9)그룹은 현재 유럽과 아시아, 인도 대부분 인종의 선조다.
K(M9)그룹은 카자흐스탄에서 35000년전에 P(M45)그룹을 낳았고 이들이 현재의 유럽인 대부분을 차지한다.
P(M45)그룹은 시베리아에서 20000년전에 Q(M242)그룹을 낳았고 이들은 현재 시베리아인이며 동시에 아메리카 인디언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C그룹보다 먼저 아메리카로 건너갔다. 15000년전 베링해가 갈라지기 전에 이주한 것이다.
한편 K(M9)그룹은 30000년전에 L(M20)그룹을 낳았는데 인도에 분포하고, 10000년전에는 M(M4)그룹을 낳았는데 서남아시아와 인도네시아, 멜라네시아에 분포한다.
K(M9)그룹은 또한 한민족이 주로 속한 NO(M214)그룹을 낳았는데, 아랄해에서 35000년전에 출발하였다.
북만주를 지나 한국까지 와서 한국인에서는 K(M9)그룹 자체가 2% 이내로 나타난다.
NO(M214)그룹의 원형은 소수만 남아있는데 일본까지도 있다. NO(M214)그룹은 다시 N (LLY22G)그룹을 낳는데, 수천년전에 시베리아에 출현하며 현재 동부유럽과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핀란드에 존재한다.
NO(M214)그룹은 또 O(M175)그룹를 낳았는데 35000년전에 출현하며 2만년전에 중국으로 들어왔다. 현재 동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중국, 일본의 유전자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O(M175)그룹은 중국인의 50%, 동북아시아인의 40%, 한국인의 75%, 일본인의 20%를 차지한다.
O(M175)그룹은 약 2만년전에 O3 (M122)그룹을 낳았는데 타이완, 필리핀, 중국, 한국, 일본 등에 많다.
좀더 세부적으로 O3 (M122)그룹은 O3a(M121),O3b(M164),O3c(M159),O3d(M7),O3e(M134)그룹으로 나누어지며
다시 O3e(M134)그룹은 O3e1(M117)을 낳고 O3e1(M117)그룹은 O3e1*a(M162)을 낳는다.
O3e1(M117)이 bc200년대의 진나라(秦)라는 주장도 있었다.
한편 2005년에 2322명의 중국인을 조사하니 O3 (M122)가 중국 남부에서 중국 동북부 방향으로 전파되고 몽고 방향으로 전파되고 동아시아 인구의 44.3%에서 나타나며 이 유전자가 동아시아에 들어온 것은 25000년~30000년전이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
O3e(M134)그룹은 약 10000년전인 bc8000년(~7000년 설도 있음) 전후에 출현하였다. 중국 한인들의 선조라고도 한다. 또한 한국인들의 선조다.
O(M175)그룹은 O2 (P31)그룹을 낳았는데 다시 O2a(M95)와 O2b(SRY+465)를 낳고 O2a(M95)는 O2a*(M88)과 O2a1(M111)로 분리된다.
O2b(SRY+475)그룹은 O2b1(47z)그룹을 낳는다. O2b(SRY+465)와 O2b1(47z)를 합치면 한국인에서 19.4% 정도 나타난다.
O3-d(M7)그룹은 bc1000년경의 오(吳)나라인으로 보기도 한다.
O1(M119)그룹은 10000년전에 출현한 몽골족이고 중국의 동남해안, 항주와 양자강 삼각주를 수천년간 지배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O1a(M101)그룹과 O1b(M50,M103,M110) 그룹을 낳는다. 이를 복희, 신농, 요, 순, 우 등은 몽골계로 중국에서 본다. (사실이 아닐 것으로 본다.)
한국인 남성에게 10% 정도 나타난 C(M130)그룹의 분화 표는 아래와 같다.
Y 유전자의 세계적 분포는 아래와 같다.
저 많은 아담 Y 유전자의 돌연변이 형태에서 그 발생과 연대, 이동 경로를 추정해낸 것은 현대 생물과학이다. 먼저 아담 Y 유전자를 가진 부족의 출발점은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였다. 아프리카의 구석기인에서 돌연변이 되어서 약 6만년전에 형성되어 전세계에 저와같이 퍼져있다.
3. 한민족 남성 Y염색체의 유래 (환인 유전자와 환웅 유전자, 치우 유전자 추적)
위 분포 그림에서 한국인과 피가 가장 많이 통하는 것은 대만, 중국, 필리핀, 동남아시아, 만주인 일본 등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반도 문화는 북방문화의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그 오랜 혈통은 동남아시아와 훨씬 더 가깝다.
여기서 2006년 자료로서 한국인 남성의 Y유전자 분석과 주변 민족을 비교하면 아래표와 같다.
(표의 숫자는 해당 유전자의 발현 빈도 퍼센트%)(세로 분홍색 칼럼이 한국인의 Y유전자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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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중국에서 발표한 자료 http://www.genetics.org/cgi/content/full/172/4/2431#TBL1 에 한국인은 2개 자료를 더하여 보정한 것임. 브리야트, 알타이는 1999년, 라후는 2000년, 묘족은 2003년 자료임. 아래는 2006년 조사 장소
위 표를 분석하여 특징적인 것들을 살펴보면
1. 중국이나 태국에서 가장 한국적 문화를 많이 간직하여 당나라 때 이주한 고구려 후예로 여겨지던 라후족이 Y,F,K 등 고대 유전자를 주로 가졌다. 그러나 몽고 유전자가 섞이지 않은 것은 이들이 압록강 남쪽 사람들이고, 그들 스스로 강서에서 왔다고 하므로 대동강 서쪽 강서군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들은 고대 마한 유전자를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고려된다. 가장 오래된 고대 유전자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출발지에서보다 변화하지 않고 보존되는 현상이 종종 있다. D 유전자는 일본 아이누족과 티벳 산중, 인도양의 안다만 섬 같은 고립된 지역에 보전되어 있다.
2. 원시 몽골유전자 C그룹은 3만년전에 시베리아로 이동하여 북만주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환웅 시대 이전에 원시 몽골유전자 C그룹이 들어오지 않았다.
3. D그룹이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티벳과, 티벳과 이웃한 요족瑤族에 남고, 남쪽으로는 인도양 안다만 섬으로 가고, 북쪽을 돌아서 몽골 유전자 C1과 동행하여 함께 일본에 건너갔는데, 이는 한국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시베리아를 돌아서 사할린을 통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D와 동행한 C1이 일본에는 9%이지만 한국에는 전혀 없다. 아이누족 유전자인 D는 일본에서 30%에나 이르지만 한국에는 3%에 못미친다. 따라서 D는 일본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4. 북방으로 우회한 원시 몽골 유전자 대신에 한반도에는 3만 5천년전 아랄해에서 출발한 Y, F, K 그룹유전자가 이미 들어와 있었다. 이는 한반도에 살았던 라후족 유전자로도 확인된다. 이 유전자들은 알타이를 거쳐 중국 황하를 지나왔는데, 황하 남북에 사는 약 20%인구가 K유전자를 가졌다.
K나 F, Y 등은 중국을 거쳐 만주를 통해 한반도로 들어온 것이 확인된다. 중국에도 F 유전자는 5% 이내로 적은데, 일찍 K로 변형을 일으켰던 것이다.
Y, F, K와 뒤에 일어난 O그룹까지도 아직 아프리카에서 출발한 모습과 다름없는 흑인의 피부색을 가졌었다. 이는 7000년전의 양자강 하구 하모도 유골도 마찬가지로 흑인형(negroid)이었다.
5. K그룹이 시베리아에서 NO그룹을 발생하고 N그룹은 러시아를 지나 스칸디나비아로 가면서 백인이 된다.
시베리아의 NO그룹에서 O그룹(M175)이 35000년전에 발생하는데, O그룹은 그곳에서 P그룹을 발생시켜서 대부분의 유럽인의 조상이 되게 한다.
6. O그룹(M175)은 중앙아시아로부터 티벳에 들어와서 다시 동아시아의 세 방향으로 퍼졌다.
약 2만년전에 O그룹은 광동성 해안 지방에서 O1(M119)그룹을 발생시키고,
또다른 O그룹은 우수리강, 흑룡강에 이르러서 O2 (P31)그룹를 발생시키고,
역시 또다른 O그룹은 운남지방에서 O3(M122)그룹를 발생시켰다. 광동의 요족이 O3를 발생시켰을 가능성이 높은데 인도의 아리안족이나 드라비다족에게는 O3가 없다. 즉 드라비다족의 언어와 O3그룹의 언어는 유사한 것이 많지만 혈통적 관련은 적다.
7. O2는 북경 동북의 요녕성에서 중심이 되고 한반도에까지 들어왔고, O3는 중국 해안을 따라 한반도로 들어왔다.
중국은 O3(M122)의 전국적 확산을 신석기시대 쌀농사의 확산으로 추정해왔는데 사실과 다르다.
O3의 일본까지 확산이 다른 북부 지역과의 확산과 별 차이가 없으므로 15000년전에 있었던 한반도와 일본 분리 이전에 O3가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쌀농사와 관련없는 구석기시대 수렵족 O3의 확산으로 보인다.
20000년전 대륙지도. 붉은지역은 빙하의 확장으로 인한 해수면의 저하로 육지였던 곳. 현재의 동해바다가 육지로 둘러싸인 내해였고 황해바다, 대만, 해남도가 육지였다. Times Books (4th ed) 1993 . 한국과 일본은 15000년전에 분리되었다.
8. 한반도 동북부의 O2그룹은 흑룡강에서 흙을 구워서 질그릇을 개발하였다. 이는 일본 북부에 16000년된 유적에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한반도 동북방의 아무르강 유역에서 개발된 것으로 추정된다.
질그릇의 개발은 씨앗 열매나 채소류의 소화력을 증가시켰다. 특히 사냥이 어려운 한겨울에 음식거리로 마른 곡물이 먹거리의 중심이 된다.
즉 질그릇의 발명이 자연 상태 곡물 채집과 농경 생산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는 컴퓨터의 발명이 정보산업을 일으킨 것과 마찬가지로 질그릇이 농업을 일으킨 것이다. O2그룹과 O3그룹은 한반도의 태백산맥을 경계로 하였을 것이다. 요동반도까지 한반도 서쪽이 주로 O3그룹이고, 태백산맥 동쪽과 길림성, 흑룡강성을 포함한 북부 지역이 O2그룹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9. 15000전 한반도 충북 청원 소호리에서 쌀농사가 시작되었다. 야생 벼의 원산지는 중국, 인도 등일 것이지만 이를 처음으로 재배 경작한 것은 한반도인이다. 이때 한반도에서 쌀농사를 지은 종족의 주 유전자는 O3(O122)였고, 처음으로 도입된 농사는 한반도 신석기인의 인구폭발을 일으켰다. 인구폭발 와중에 O3e(O134)가 한반도에서 생겨나서 O3와 함께 한반도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세상으로 아직 농사가 확산되지 않았으니, 기존의 종족들은 대부분 과일 채집과 동물 사냥으로 살았다. 이무렵 O2그룹도 역시 농사 혁명으로 O2b그룹을 발생시켰는데 이들은 좀더 추운 지방의 작물들을 재배했을 것이다.
10. 12700년전 영거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천년 혹한기가 시작되고, 한반도의 쌀농사족은 기장쌀, 보리 등 혹한에 견디는 농사로 전환하거나, 쌀농사를 계속하기 위해 중국 전역으로, 특히 중국 남쪽 해안으로 이주하였다. 농사를 모르는 민족은 천년 혹한기 동안 사냥의 한계로 개체수가 많이 줄어들고, 대신에 농사짓는 한민족은 더 많아져서 중국의 대부분 인종은 한반도에서 다시 남쪽으로 회귀한 O3와 한반도에서 발생한 O3e로 대체된다. 한반도에서 O3, O3e는 삼한족三韓族을 구성했다.
11. 한반도 북부와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에 산재해 있던 O2그룹은 한반도에서 일찍이 농사 기술을 배워서 만주 북부로 퍼졌다. O2는 북방 몽고족이 들어오기 전에 한반도 동부에서 O2b로 분지되고, 이들은 점차 세력을 넓혀서 요녕성에 남아있던 O3와 함께 예족穢族을 구성했다. (단, 이들 O2그룹과 O3그룹이 대규모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4세기 무렵의 백제 전기 시대다.)
12. 천년 혹한기 끝에 단 수년만에 급격한 기온 상승으로 인하여 11600년전부터 인류는 고원으로 피신하고 고원 문화가 발달한다.
<환단고기-삼성기>에 환인족의 선조인 "나반那盤"과 "아만阿曼"과 아이사타에서 만나 환인족의 조상이 되었다. 이는 환인국의 형성 전이다.
"나반"의 "나"는 나르, 즉 태양의 의미를 가졌고 이는 쿠르드 언어에 남아있다. 이집트의 태양신은 "라"이다. 우리말에서는 "날. 낮"이 그 파생어다. 또한 드라비다어로서 누반은 기장쌀이다. 노란색의 어원이 태양 나일 것이고, 태양의 노란색과, 건조 기후에 적합한 기장쌀의 노란색 때문에 기장쌀은 태양빛 곡물로서 이름을 누반이라고 했을 것이다.
한편 "아만"은 몽고어로서 "하나"라는 의미다. 첫 번째라는 뜻도 된다. 즉 나반과 아만의 만남은 O그룹의 드라비다어와 C그룹의 몽고어가 만난 것이고, 한반도에서 올라간 만주의 농사족이 시베리아의 수렵족 중에서 에웬키족과 만나 그들을 농사족으로 바꾼 것이다.
11600년전의 환인족 유전자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O3e1이 된다. 위에 제시한 표에서 보듯이 모든 북방족에 퍼져있고 한반도에도 많이 있다.
(1999년 자료)
13. 아만의 에벤키족의 유전자는 지역별로 세 종류가 있다. 시베리아-에벤키, 극동(오호츠크)-에벤키, 만주-에벤키 등이다. 이중 가장 오래된 종족은 고대 유전자인 Y와 N그룹이 많이 남아있는 시베리아 에벤키로서 퉁구스라고도 불리웠다.
O3e그룹의 나반이 드라비다어(당시 한반도 고어였다.)를 사용하면서, 만주로부터 시베리아 에벤키족의 일부가 살던 "아이사타"에 들어가서, 기장쌀 농사를 가르치고, 그 결과로서 만주 에벤키족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주에벤키가 탄생한 위치는 "아이사타 阿耳斯陀"라고 했는데, 중간의 이耳는 ㄹ 발음을 대신하는 것이므로 본래 "알-사타" 라고 고려되며 이는 흥안령산맥과 바이칼호수 중간의 내몽고 우랑카이고원에 위치한 울리아스크(東烏珠穆沁旗縣)로 추정된다.
울리아스크는 흑인(negroid)에 의한 농경족 문화로 추정된다. 따라서 농경으로 인해 북방에서 상당한 인구 증가가 되고 당시 시베리아 몽골인중에서 주류로 성장하게 된다.
11600년부터 8200년 사이에 오랑캐고원에서 이루어진 환인족의 문화는 농경족과 수렵족 두 문화권의 결합으로 뛰어난 발전을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흑색을 숭상하여 검은 칠을 남겼는데 옥조각에 입힌 광물성 흑칠의 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14. 8200년전 200년 혹한이 찾아왔다. 오랑캐고원은 혹한 속에서 도저히 농사짓기에 부적당해서 환인족이 사방으로 흩어져간다. 이때 서남쪽 내몽고로 내려간 환인족은 내몽고 중심인 인산陰山에 자리잡아서 알유족(에벤키족의 옛이름)이 되고, 인산산맥에 암각화를 새기는 암각화 문화를 만드는데 이는 한반도 동남해안에도 흔적이 있다. 이때 알유족과 반대로 동남쪽 흥안령 산맥을 넘어 새한산(塞罕山 = 혹은 서한산西罕山)으로 진출한 것이 환인족의 환국이다. 반면에 남쪽 난하 지역으로 진출한 산융족(험윤)도 있다.
15. 꾸준한 기온 상승으로 6000년전 지구의 해수면이 오늘날과 같아졌다. 2만년전에 비해 100m 이상 높아진 것이다. 중앙아시아에서 기후의 온난화로 북방 시베리아 진출이 쉬워졌다. 이때 C3그룹 유전자를 가진 바이칼의 브리야트족이 시라무렌강 유역에 도래한다. 환인의 서자라고 표현된 환웅은 원시 몽고족의 방계민족인 것이고 브리야트족은 우리말로 부여족인 것이다. 배달국, 밝은땅에 살던 이들 문화의 특징은 붉은 색깔이다.
이전까지 빗살무늬 토기와 달리 홍산문화는 붉은 색을 칠한 채도문화가 가장 큰 특징이다. 붉은 칠과 울란우데(적봉), 울란바토르, chita赤塔 등은 모두 붉은 색을 숭상하는 지명이다.
16. 한편 산동반도의 임치(臨淄)에서 역사적인 연대에 따른 유전자분석이 있었다. 즉 2500년전 유골의 유전자와 2000년전의 유골의 유전자, 현대인의 유전자를 일본 도쿄대학에서 분석한 것이다. 2500년전은 치우의 후손인 용산문화 이후 제나라 지배하의 임치이나, 임치는 치하淄河변으로서 4800년전의 치우 후손과 밀접하다. bc1236년 단군 색불루 때에 포고씨를 청주 땅 엄에 세웠다는 기록도 있고, bc461년 단군 물리 때에 박고씨를 청주에 세워 엄국(고엄국은 산동곡부曲阜에 있었다)이라고 하였었다는 기록도 있다. 단군 색불루 이후 환웅족 부여인이 오르도스 고원에 진출하여, 환인족 알유인과 스키타이 금속문화를 일으켰고, 이 청동 예술 문화가 스키타이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었다. 당시 <사기>에는 양성凉城의 적적인赤翟人과 중산국中山國의 백적인白翟人들이 있었으니 이들도 관련된다. 2000년전은 한나라 시대이고 진시황의 통일 이후로서 동이인東夷人들을 많이 북쪽과 동쪽으로 물리치고 제나라 사람들이 살았다고 보여진다.
연구 결과는 2500년전의 임치인(치우 후손)은 유럽인과 같은 유전자를 가졌고, 2000년전의 임치인은 위구르인과 키르키즈인의 중간이었다. 그리고 현재 임치인은 몽골인과 한국인의 중간이었다.
즉 4888년전의 치우나 그 후손인 2400년전의 청구인은 검은 얼굴의 유럽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용산문화의 특징은 검은 질그릇의 흑도문화黑陶文化이기 때문이다. 또한 청동기물의 수면문獸面文이 특징인데 이는 아랍인의 얼굴을 과장한 것일 수 있다. 신라 때 아랍인 처용의 얼굴 가면으로 귀신을 쫓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또하나의 특징은 중국 최초로 말을 기른 것이다.
치우족은 현재 만주에 남아있는 석백족(sibe)의 선조로 고려된다. 석백족은 러시아인에 많은 N그룹과 유럽인에 나타나는 P그룹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석백?伯은 지비犀毗, 선비?卑(이것도 시비로 읽어야 한다. 흉노의 왕칭인 선우도 치우에서 유래한 것이니 시우로 읽어야 옳다.), 시비矢比, 등 다양하게 표기를 하며 하이라얼의 실위산 아래 사는 부족도 있다. 이는 모두 치우의 발음과 관련된다. 석백족은 사내가 태어나면, 활과 화살을 매단 새끼줄을 대문에 거는 풍습이 있고, 어려서부터 말타기를 가리킨다. 또한 10세에 완전한 활을 주고, 평생 활과 화살을 신물로 여겨서 남녀가 결연할 때의 매개로 삼기도 한다. 이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는데 이는 치우의 구려(九黎=句麗=狗) 후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석백족은 특이하게 정월 16일을 말흑절(抹黑節)이라고 하는데 악귀를 쫓고 밀의 풍년을 위해서 뺨에 검은칠을 하는 명절(抹黑節)이다. 솥바닥의 검은 그을음을 쓰기도 한다. 대문앞 큰 길에 검은 재를 뿌리기도 한다. 그외 존경을 위해 노인의 이마에 검은 점을 찍기도 한다. 즉 검은 것을 숭상하는 것이 치우 용산 문화의 유물이다. 여러 가지로 석백족은 치우의 후손으로 고려되는데 현재 치우를 전혀 생각지 못하고 대신 관우를 섬기고 있다.
현재 치우를 섬기는 것은 묘족苗族이다. 묘족이 한나라 이전에 임치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치우가 황제를 꺾으면서 남하하여 산동반도 임치에서 묘족을 배경으로 황하 동부의 하북과 양자강까지 중국을 다스렸던 것이다.
4년후 중국에서 나온 보충 논문은 다르게 결론을 유도하고 있으나 아래 추가된 새로운 그림을 보면, 역시 일본의 주장이 맞는 것으로 나타난다.
4. 한민족 여성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유래
한편 여성에서 딸로만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에 대한 연구도 있다.
거의 모든 현생 인류의 어머니는 미토콘드리아 이브EVE라고 부른다. 그녀는 20만년전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에서 출현했다.
곁가지가 하나 있는데 L0그룹이며 역시 15만년전에 있었다. 이들은 33000년전에 아프리카 동해안에 닿았고 11000년전에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퍼졌다.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첫 번째 후손은 L1그룹이라고 부른다. 15만년전에 사하라 사막 남쪽 중앙아프리카 부근에서 출현했고 현재 모든 인류의 미토콘드리아에 이 유전자가 들어있다.
L1그룹에서 15만년전에 L2그룹과와 L3그룹이 나왔는데 L2그룹은 7만년전에 아프리카에서 나와서 아프리카에 남아있다. L2그룹은 L2a그룹, 등 4개의 지파로 나누어지는데 L2a그룹은 미국에 건너간 흑인들에서 나타난다.
L3그룹은 8만년전에 출현하여 북부 아프리카에 주로 남고 일부는 아시아 지역 근동지방까지 진출했다.
M그룹은 L3그룹에서 유래되어 6만년전에 출현했고 대륙의 해안을 따라서 유라시아 구석구석에 퍼져갔다. M그룹은 다섯 개의 지손이 있는데 M*그룹, M1그룹, CZ그룹, D그룹, E그룹, GQ그룹 등이다. 이들은 파키스탄 남부와 인도 서북부에 많이 산다.
C그룹은 중앙아시아에서 6만년전에 출현하여 동북아시아로 퍼졌고 아메리카까지 건너갔다. 현재 아메리카 인디언의 1/5을 점하고 있다. 나머지 아메리카 인디언은 A그룹, B그룹, D그룹과 X그룹이다.
Z그룹은 중앙아시아에서 발원하여 한국과 중국, 중아아시아에 다양한 변종을 보인다. 또한 러시아에도 나타나고 스칸디나비아의 사미( Saami)족에서도 보인다.
D그룹은 역시 6만년전에 아시아에서 출현하여 동북아시아와 시베리아에서 나타나고 아메리카 인디언의 1/5에서 나타난다.
E그룹은 서남아시아에서 나타나며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파푸아뉴기니아,대만, 필리핀 등에서 나타난다.
N그룹은 8만년전에 출현하여 거의 모든 유럽인의 선조가 되고 아시아까지 퍼져있다.
N그룹의 지파는 R그룹과 N1그룹, A그룹, I그룹, W그룹, X그룹 등이 있다.
A그룹은 현대 아시아인의 선조이고 특히 지파인 A1그룹은 북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발현된다. 역시 지파인 A2그룹은 시베리아와 아메리카인디언에서 발견된다. 페루의 미이라에서도 발견되었다.
N그룹에서 유래된 I그룹은 3만년전에 발생되었고 이집트와 아라비아, 그리고 유럽에 존재한다.
N그룹에서 유래된 W그룹은 우랄산맥 서부와 발틱연안에서 나타나고 인도에도 있다.
N그룹에서 유래된 X그룹은 2만년전 내지 3만년전에 출현하여 X1그룹과 X2그룹으로 발전한다.
X그룹은 유럽에서 2% 이내이고 근동, 그리고 북아프리카에서도 발견된다.
X1그룹은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 근동에서 발견된다.
X2그룹은 20000년전에 출현하여 근동과 코카서스, 지중해 등에서 나타나고 아메리카인디언에서도 소수 나타난다. 극동아시아가 아닌 곳으로부터 아메리카로 건너간 것이다.
N그룹에서 유래된 R그룹은 B그룹, U그룹, F그룹, pre-HV그룹 (HV그룹, H그룹, V그룹)과 J T그룹을 낳았다.
R그룹에서 유래된 B그룹은 5만년전에 아시아에서 생겨났고 현대 아시아에서 두루 발견되며 아메리카인디언에게도 나타난다. 그러나 시베리아 북부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에 투바 공화국, 알타이, 브리야트에서 나타나며 몽골이안과 중국 중앙부, 대만, 인도네시아,폴리네시아, 마이크로네시아에서 나타난다.
R그룹에서 유래된 F그룹은 아시아에서 나타났고 일본과 중국 동부에서 나타난다.
R그룹에서 유래된 U 그룹은 bc7150년 영국 서머셋 체다조오지의 체다맨(신석기인)에서 나타났다.
R그룹에서 유래된 T그룹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만년전에 발생하였고 발틱해 동부연안과 우랄 지방에서 발견된다.
K그룹은 U그룹의 큰 부분이며 16000년전에 나타났고 중세 유럽의 유태인Ashkenazi Jewish 에서 나타나서 현대 유태인의 80%를 차지한다.
R그룹에서 유래된 pre-HV 그룹은 중동에서 발생하여 동아프리카까지 나타난다.
R그룹에서 유래된 HV그룹은 2만년전에 발생하여 서부 유럽에 나타난다.
HV그룹에서 유래된 H그룹은 현대 유럽인의 50%를 점유하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도 나타난다.
HV그룹에서 유래된 V그룹은 12000년전에 발생했고 유럽의 이베리아반도에서 나타난다. 특징적으로 스칸디나비아의 사미인과 바스크인에서도 나타난다.
아시아의 미토콘드리아 연구
미토콘드리아 연구는 남성 Y 유전자보다 복잡하고 좀더 많은 연구결과가 필요하다.
최근 중국에서 눈강 유역(전통적인 실위족 거주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 5그룹을 연구하였다.
원시형 M그룹은 야쿠트족(41.9)이 제일 많고, 다음으로 거란족(35.6), 실위족(31.8), 퉁구스에벤키인(23.4) 이고 그 다음이 한국인(23.1), 브리야트인(23.1), 몽고인(18.9) 순이었다. 이는 상기 지역에 오래된 민족 순서일 수도 있다.
N계열은 브리야트족(49.4)에서 제일 많고, 몽고족(37.6), 퉁구스에벤키족(36.1), 거란족(30.8), 야쿠트족(25.7), 한국인(18.8), 실위족(11.3), 이었다. 이는 역순으로 서남아시아계와 가까운 순서일 수도 있다. 또한 약탈혼의 흔적이 남은 것일 수도 있다.
몽골족에 특이적인 D그룹은 실위족(43.1)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 몽고족(39.6), 한국인(33.3) 순이었다. 그후 퉁구스에빈키(31.9), 거란족(24.4), 야쿠트(20.9), 브리야트인(19.0) 순이었다. 징기스칸으로 비롯되는 현대 몽고족의 어머니가 실위족으로 고려된다. 이는 Y 염색체에서도 그렇다. 실위족에서 징기스칸 유전자인 C3c그룹이 더 많이 나타난다. 징기스칸의 고향이 바로 실위였기 때문이라고 고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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