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생거진천 전국백일장 수상작
[고등부 장원]
나
김보연[충북 진천 진천고등학교 2학년]
잊을 수가 없다.
내 학생증에 있는 것과 똑같은 증명사진이 박힌 장애인 복지카드를 처음 받았던 그 날을.
다른 모든 절차는 모두 아바가 처리하셨기 때문에 나는 내 앞으로 장애인 복지카드가 나올 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 날 내가 받았던 그 충격과 당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시력 검사를 하려면 눈에 약을 넣는데, 그 영향으로 검사가 다 끝나고 나서도 약 여섯 시간 동안 내 눈은 정상적이지가 않다. 조금씩 나아지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한 치 앞도 제대로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앞이 흐릿하고, 지하주차장에서도 눈이 부시다. 그 날의 내 마음이 그러했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학고, 공부, 꿈 모두가 흐릿해지는 것 같았고 상상하고 그려왔던 미래도 범접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 듯, 혼란스럽고 무서웠다.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건, 내가 장애인이라는, 비정상인 이라는 그 사실이었다.
‘저는 시각장애 3급입니다.’
올해 내 생일 날 진행됐던 프로그램촬영에서 내가 했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전국 방송에서 나는 그렇게 인터뷰 했다. 하지만 창피하거나 부끄럽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는 담담했고 당당했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쉬웠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수업시간에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선생님을 놀라시게 하기도 했고, 문득문득 우울해지는 바람에 친구들을 당황케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선생님과의 상담을 했었다. ‘행복한 장애’ 그 말을 처음 들었던 그 날 이후로 내가 조금씩 스스로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행복한 장애, 행복한 장애, 행복한 장애…… 나는 몇 번씩 이 말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장애를 가졌음에도 스스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나날이 지쳐갔다. 시험도, 수행평가도, 숙제도 내게는 너무나 벅찼다. 똑같은 내용과 분량을 공부하는 데 나는 친구들에 비해 두세 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됐으므로 거기에서 오는 열등감 그리고 그에서 비롯된 스트레스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한번은 심각하게 전학에 대해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맹학교’ 나처럼 저 시력 이거나 아예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들이 다니는 학교로의 전학을. 그 과정에서 나는 부모님과 처음으로 아주 깊고 진지한 대화를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힘들게 공부하는 당신들의 딸이 늘 안쓰러움을, 늘 미안함을, 그리고 늘 사랑하고 있음을 조심스럽게 전해오시던 부모님.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해왔던 시간만큼 딱 그 만큼만 더 견뎌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숨기시지 않으셨던 부모님. 나는 다시 마음을 다 잡았다. 나를 믿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믿고 해 보자고.
그렇게 1년, 매일 울고 아파하고 견디고 결국은 극복해 내며 나는 조금 더 성장했고, 성숙했다.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했던 전학, 그 과정에서 보게 된 부모님의 마음,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나의 장애를 알리고 증명서를 제출하고 특수교육 대상자가 된 일, 우연한 계기로 친구들에게 내 장애에 대해 스스로 말했던 일, 맹학교에 가서 나와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고 이야기 한 일, 그리고 맹학교 선생님과의 진학 상담. 나는 또한 그 모든 일들을 거쳐서 이제 제법 단단하고 담담한 사람이 됐다.
장애, 그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다. 누군가의 편견의 대상이기도 하고, 누군가의 낙인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아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모든 아픔과 시련을 이겨낸 후에 그 단어는 ‘생활’이라는 단어와 비슷한 맥락의 의미를 띠게 된다. 지금의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는 나를 믿는다. 내가 장애를 가진 건, 그래서 다른 보통의 사람들보다 불리하고 어려운 조건일 수밖에 없는 건 내가 잘못을 해서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은 다 맞는데 나는 틀려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다른 것일 뿐이다. 키가 큰 사람이 있으면 작은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공부를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이.
한 때는 미치도록 인정하기 싫었고, 또 한 때는 도망치고도 싶었던 나의 장애.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자체가 바로 ‘나’라는 걸. 눈이 나빠서 더욱 열심히 공부하고 그 때문에 모든 일에 신중하고 느릴 수밖에 없는 나도, 눈이 나빠서 자주 실수하고 자주 도움을 청해야 하는 나도, 눈이 나빠서 배려가 필요하고 관심이 필요한 나도, 눈이 나빠서 특수 교사라는 꿈을 가지게 된 나도, 결국엔 그냥 ‘나’ 자신이라는 것을.
시각장애인, 진천고등학교 2학년 2반 1번,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의 셋째, 김보연. 이제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하게 밝힐 수 있다. 그게 ‘나’ 라고.
[고등부 차상]
비누
이정인[경남 남해군 남해 해성고등학교 1학년]
소롱지게 방바닥 훑어 기어오르는 햇살
여물지 못한 먼지 헤집어 털어낸다
모래주머니 찬 다리 옹크린 어머니
가슴에 멍울진 신음소리 뱉으시며
힘든 어깨 일으키신다.
텅 빈 공허감이 가득 베어 문 방
자꾸 밑으로 곤두박일 치는 눈꺼풀
누런 육십초 백열등에 힘없이 동공을 박는다.
늦은 저녁,
공사판에서 한 온큼 담겨온 모래 먼지
어머닌 굳은 살 박힌 까칠한 손에
자꾸자꾸 비누를 칠 하신다
생채기 가득한 얼룩 지워내고 싶으신 걸까
헝클어진 집안에 몽글한 비눗방울 날리신다.
서서히 문드러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는 비누
어머니 얼굴 깊은 주름살 하나씩 늘듯
비누도 조금씩 사그라져 몸을 말아 올린다
자기 생명 내려 향기 품어주는 비누
어머니는 비누를 닮았다
자기 몸 억센 비바람에 깎이고 없어져도
마음 속 깊이 맑은 향기 드리우고
삼 남매 더러운 길 걷지 않게
오늘도 비누로 자식들 생채기
깨끗이 지워내시는 어머니
헝클어진 집안 비누 향내 가득하다
따뜻한 어머니 사랑 먹은 비눗방울
톡,
톡,
톡,
맑게 터진다.
처마 끝 풍경소리
박윤국[충북 진천 진천고등학교 2학년]
비가 내립니다
비는 아스팔트를 적시고 있습니다
한 방울 한 방울
거리를 온통 검은 색으로 칠하고 있습니다
찢긴 방충망 사이로도 빗물은 들어오지 않습니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토요일 오후 내
비는 내리고
3층에 내려다보는 세상은
어디 한 곳 쉴 곳이 없습니다
왜 손을 내밀어 봤을까요
손 씻어줄 빗줄기도 없는데
처마 끝을 따라 흘러내릴 빗줄기도 없는데
왜 방충망을 열고
눈을 감고 글기고 또 귀 기울여 봤을까요
그런데 또 어쩌자고 풍경소리는 들려와
아버지와 아버지의 四十九祭를 지냈던
이제는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그 작은 절의 마당으로 나를 데려갈까요
‘우산을 가지고 나가볼까.’
전화 한통이면 찾아질 사람들
여동생과 장을 보고 계실 어머니
가족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내내
나는 꿈꾸듯 풍경소리를 듣습니다
처마의 저 끝에서 물고기가 유영하고
그 때마다 절 옆의 대숲은 물결처럼 흐릅니다
바람에 꿈틀거리는 것은 풍경소리뿐일까요. 추억일까요!
잊고 있던 아버지를 만나는 날이면 언제나 비가 옵니다
빗방울 후드득 털어버리는 그 절 숲의 꾀꼬리 소리를 듣습니다
산으로 올라온 물고기의 꿈이었을까요?
그 풍경소리,
비닐봉지 가득 제찬거리를 들고 오는 가족들
나는 우산을 찾아 현관을 나섭니다.
[고등부 차하]
아버지의 생신
정슬기[충북 진천 진천상업고등학교 1학년]
내가 철이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옛날에 우리 아버지는 생신이 다가와도 모르고 넘기시는 일이 많으셨다. 쑥스러운 얘기이지만 딸이 되는 내가 그것을 몰랐다. 아니 모르기보다는 넘기는 일이 허다했다. 그때 나에게는 그저 철없는 한 아이였으니깐 말이다.
내가 아동기에서 청소년기로 접어들면서 어느 때처럼, 아버지의 생신이 다가오는 해에 어머니께서 나를 부르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얘야, 너도 이제 많이 컸으니 철이 들었잖니?”
라고 하시며 빙긋 웃으셨다. 난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고
“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세요?” 하며 여쭈었더니
“그럼, 다음 주에 무슨 날인지도 알겠구나?” 라고 하시며 내게 물으셨다. 그 말씀에 더욱 의아해진 나는
“아니요, 그날이 무슨 날인데요?” 하고 말하였더니 어머니께서 그럼 그렇지 하시며 한숨을 푹 쉬시고는 이마에 힘을 주시며
“얘야, 너는 너의 아버지 생신인 것도 모르고 사는 거니?”
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난 그제야 ‘아…….’ 하고서 내 잘못을 알고 나니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안 되겠다싶어 어머니가 계신 방을 나와 내 방으로 들어가서 한동안 이리저리 뒤적이다 ‘찾았다!’하며 미소를 지으며 그 물건을 촤라락 하며 넘겨보다 그 안에 돈이 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생신 3일 전 무엇을 해 드려야 기뻐하실까 하고 생각을 해보았다.
옷을 사드리려고 하니 돈이 적어서 문제였고 신발 한 켤레를 사드리려니 운동화가 많으신 걸 보고서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다고 액세서리를 사드리려고 하니 좀 아니다 싶어서 속으로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마침 아버지께 해드린 음식이 없는 것이 생각났다.
난 옳거니 하며 ‘그거야!’하고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리고 아버지의 생신 하루 전 나는 마트를 가서 미역과 마른멸치를 산 뒤에 빵집으로 가서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를 사 집으로 와서 냉장고에다 케이크를 넣어두고서 국을 만들기 위해 미역을 물에 불려놓고 몇 시간 뒤 그 물을 버리고 냄비를 꺼내어 그 안에다 미역을 넣어서 볶은 다음 다진 마늘을 넣고 물을 부어 국을 완성 하였다.
내심 나는 그 국을 만들었다는 것이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정말 바보였구나.’하는 생각에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내가 손수 끓인 미역국을 보며 ‘기뻐하실까? 기뻐하셨으면 좋겠는데’하고 걱정 반 기대 반 하고서 시간을 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벌써 9시 이길래 어머니와 아버지가 오시기 전 하던 일을 마치고 씻고 잠을 자기 전 내일을 생각하였다.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주실까?’ 하고서 미소를 지어 보았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일찍 일어나야 할 것 같아 미리 시계로 아버지보다 1시간 일찍 알람을 맞춰 둔 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내일을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가 일어나시기 1시간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미역국을 끓인 뒤 냉장고에 있는 케이크를 꺼낸 뒤 상에 차리고 미역국과 밥, 그리고 반찬들을 놓으려하는데 마침 일어나시는 것이 보였다. 난 그것을 보고서는 아버지께 달려가서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라고 소리를 질렀더니 화들짝 놀라셨다. 내가 소리 지르는 바람에 옆에 계신 어머니께서 일어나셔서 그 광경을 바라보시고는 미소 지으시며
“뭐해요 그렇게 어리둥절해하시고 모처럼 딸이 만든 음식을 눈으로 보기만 할 거예요? 다 식겠네.”
하시며 아버지를 상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히셨다.
어머니도 앉으셔서 나도 마저 꺼내던 반찬을 꺼내 놓은 뒤 의자에 앉게 되었다. 처음으로 감격 받으신 듯 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시는 걸 그날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아침부터 우리 가족은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의자
김지예[부천시 원미구 부천여자고등학교 1학년]
할머니 제삿날
감나무 아래
다리가 부러진
의자가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구석진 마당 한켠에서
주인을 잃고
노숙을 한 탓일까
손으로 쓰다듬자
할머니의 손처럼 거칠다
평생 감농사로
팔남매를 키우신
할머니를 받아주던
저 의자
갑자기 의자 위로
툭,
홍시가 떨어지자
할머니의 영혼이
찾아와서
의자에 앉았다
할머니가 웃고 있었다.
추수
김경현[경기도 군포시 수리고등학교 2학년]
꽃샘바람 비집고 찾아온 손끝하나
빈들에 씨앗심고 물주고 떠난 날
먼먼 땅 칼바람들이 서럽도록 찾아왔다
접동새 울다 지친 봄날이 훌쩍 가고
할아버지 헛기침 소리 논두렁을 돌고 돌면
울음을 참았던 자리엔 열매들이 서있다
햇살이 무던히 쏟아지는 한 낮이면
잉태한 열매마다 제 안을 발효시켜
노을이 찾아온 들녘마다 황금물결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