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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서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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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이야기) 스크랩 유암서원 이야기
관보 추천 0 조회 83 11.12.15 19: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유암서원(流巖書院)
소 재 지 :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하 1리
건축시기 :  1556년(명종 11)
중건시기 :  1936년
이건시기 :  1763년(영조 38)
훼철시기 :  1868년(고종 5)
소 유 자 :  (관리자 : 이덕인)

건축 이야기
유암서원은 처음에는 유암서당으로 출발하였다.
1556년에 마창 남쪽 산기슭에 처음 창건되었는데, 퇴계가 이곳에 와서 강학을 하였다. 그 뒤 1763년에 주촌 유암 위로 이건하여 송계(松溪) 이형남(李亭男)과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 낙금헌(樂琴軒) 이정백(李庭柏) 선생을 나란히 배향하였다. 그후 1786년에 주촌 합계가로 이건한 후 사림의 공의로 유암이사(流巖里社)가 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송계, 송간 양 선생을 북후 물한에 소재하는 작산사(鵲山祠)로 옮겨 봉안하고, 낙금헌 선생 위패는 매판(埋板)한 뒤 묘우와 동서재는 모두 헐리게 되고 강당 10여 칸이 남아 청년 강습 장소로 사용되었다.
1936년에 암고(巖皐), 이수걸(李秀杰)의 발의로 복설을 추진하여 사림과 진성 이씨 후손들의 수연금(收捐金)으로 토지와 전답을 매입하고 동서재 2칸과 존덕사, 전사청 등을 신축하여 유암서원으로 승격하고, 낙금헌 선생을 제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축 특징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이정백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4개의 협실이 딸려 있다. 신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향사 때 제관이 출입하며, 전사청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로 향사 때 제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건축 구성
존덕사(尊德祠), 강당(講堂), 전사청(典祀廳), 신문(神門)

현판
존덕사(尊德祠)
유암서원(流巖書院)
유암서당(流巖書堂)

 

 

내력과 기능

향사일
매년 3월 중정일(中丁日)


관련문집
- 송간집(松澗集)
이 책은 풍산김씨 영감댁에 소장되어 있던 『송간집(松澗集)』이다. 송간집은 이정회(李庭檜, 1542~1613)의 시문들을 총 3권 1책으로 묶어 1949년에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 낙금헌선생문집(樂琴軒先生文集)
이 책은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에 소장되어 있던 『낙금헌선생문집(樂琴軒先生文集)』이다. 이정백(李庭柏, 1553~1600)의 시문들을 총 1책으로 엮어 1855년 목판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관련유물
- 낙금헌집초판(樂琴軒集初版)

이정백(李庭柏, 1553∼1600)의 시문집으로 2권 1책의 목판본이다.

 

 

관련인물

주향자
- 이정백(李庭栢, 1553~1600)
자는 여직(汝直)이며, 호는 낙금헌(樂琴軒)이다.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그는 천성이 꿋꿋하고 어질고 효성스러웠다. 5~6세 때 이미 어른스러운 태도를 지녔다고 한다. 어린 시절 퇴계 이황이 증조 이정(李禎)의 제사일로 집에 왔을 때 그를 보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주시며 작은 말소리로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의 태도가 매우 의젓하니 반드시 세상에 큰일을 할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고 이어서 마음대로 글자를 써 보라고 명하시니, 그가 곧 ‘충효(忠孝)’ 두 자를 써서 올렸다고 한다. 이에 퇴계가 크게 칭찬하면서 부지런히 학문할 것을 권하였다.

11세에 생가 부친 이희안(李希顔)의 상을 당하여 백씨인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 1542~1612) 공과 함께 여묘살이를 하였다. 장성하여서는 옛 현인들의 자기 수양의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다. 특히 집안의 어른인 퇴계 선생의 학문을 궁구하는데 열심히 노력하였다고 한다.

그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과는 내외종간(內外從間)이었다. 그는 친형인 이정회와 김성일, 남치리(南致利, 1534∼1580), 권우(權宇, 1552∼1590) 등과 퇴계의 학문을 토론하고 연구하며 퇴계의 『이학통록(理學通錄)』을 정서하는 등 가학(家學)을 계승하였다.
그는 항상 “우리들의 마음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마땅히 고인(古人)을 본받아야 한다.”고 하고, 평상시에도 어두운 새벽에 일어나 가묘를 배알하고 부친께 새벽 문안을 올렸다. 그리고 조용히 한 방에 거처하시며 책을 읽으면서 편안히 심신을 가누었다. 화급한 일을 당해도 당황하는 빛이 없었고, 편안히 쉴 때도 태만한 얼굴을 한 일이 없었다.

친척과 마을 사람에게도 늘 지성으로 대하였다. 누이동생 한 명이 집은 가난하고 자식은 많았는데, 모든 일을 두루 보살펴 주었다.
또한 가까운 벗인 권우가 일찍 돌아갔을 때, 권우의 자식이 아직 어리고 약했는데 사나운 종들이 화란을 도모하려하였다. 그는 본종가(本宗家)에 의논해서 난동을 일으키려 한 괴수의 죄를 다스리니, 그 집이 이에 힘입어 온전할 수 있었고 향리의 상하가 모두 존경하며 감복하였다.

1588년(선조 2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이후로 벼슬살이의 뜻을 끊고 편안히 지냈다. 1592년(선조 25) 왜란에 서울을 지키지 못해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을 하니, 그는 비분강개하여 적과 같이 살 수는 없다고 맹세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격문을 여러 읍에 보내니 향응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사람들이 공을 추대하여 의병대장을 삼고,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 1556~1609) 공을 부장으로 삼았다.
8월에 행군하여 용궁에 이르러 여러 군이 진을 합하게 되었다. 그는 대장의 직위를 예안 의병장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 1555~1593)에게 양보하고, 배용길과 더불어 부장이 되어서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대오를 단결시켰다. 겨울에 예천으로 진을 옮겨 적과 대치하였는데 올가미를 설치해서 왜적의 우두머리를 포박하여 순영에 바쳤다. 1593년 봄에 남하하는 적을 추격해서 밀양현에 진을 쳤고, 5월에 응천으로 진을 옮겼다. 이때 명나라 군사가 서울을 회복하였고 적은 패주하였다. 그는 승세를 타서 추격하여 수십 급의 머리를 베었다.
그는 군진(軍陣)에 임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오늘 간악한 오랑캐를 섬멸할 것을 기약하나 군사의 힘이 매우 약해 그 이기고 지는 결과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나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하려는 생각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다.
그때에 학봉 김성일이 초유사로 있었다. 그는 대장 김해와 연명으로 편지를 올렸다. “충성과 의리의 마음은 본래 인간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천지에 맹세하여 나라를 위해 죽을 뜻을 펴려고 합니다.” 그때 경주에 있는 군사들이 간장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는데, 삼일장(三日醬)을 만들어서 이들을 구제하였다.
6월에 대장 김해가 경주 숙소에서 죽었다. 그는 친히 염습하여 본가로 돌려보냈다. 공이 의병을 일으킨 뒤 2년여 동안 전란 속에서 동분서주하였다. 그동안 하루도 마음 놓고 쉴 틈이 없었다. 이로 인해 병이 깊이 들었다.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가마에 실려 돌아왔다. 그는 사람들에게 “출병한 지 몇 해 동안 임금님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어버이는 늙으셔서 집에 계시는데 아들 직분을 오래 비워 두었으며 또한 병을 앓아 공사 간 두 가지를 모두 망쳤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9월에 서애 유성룡이 그의 공적을 조정에 천거하여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그는 부임하지 않고 “전란에 임해서 구차하게 죽음을 면하고 또 관직을 받음은 신하로서 부끄러운 바이다. 그러니 내가 죽은 후에도 직명은 쓰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집 남쪽에 작은 집을 지어 낙금헌(樂琴軒)이라 이름하고 날마다 그 가운데서 고요히 앉아 자연을 즐기면서 책을 읽고 거문고를 타면서 지냈다. 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 1562~1624), 성헌(惺軒) 백견룡(白見龍, 1556~1622) 등과 더불어 학문을 토론하시고 간혹 시를 지어 서로 화창하였다.

1600년 향년 48세로 타계했다. 그는 집안에서는 효제의 행동이 있고? 마을에서는 다른 사람을 돕는 도리가 있어 그러한 마음으로 친족이나 친구를 잘 도와주었다. 나아가 국가에 대해서는 충성으로 의병을 일으키는 절개를 보였다.
그와 같이 의병 활동을 했던 금역당 배용길은 “공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 나와 일을 함께 하였는데 공은 엄격하고 꿋꿋한 자질과 충성스럽고 어진 성품으로 의병을 잘 이끌어 통솔하고 나라의 치욕을 씻기로 맹세하였다. 일을 조처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 늘 시의적절하여 몇 해 사이에 수많은 적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김해 공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공도 또한 병으로 병사를 이끌지 못하게 되어 큰 공을 이루지 못하였다.
반면 부모 곁으로 돌아가 능히 봉양의 도를 다하여 효도로써 칭송을 받았으니 공은 충과 효를 모두 갖춘 사람이라 할 만 하다.”라고 평가하였다.

그의 저술로는 『창의록(倡義錄)』, 『진중일기(陣中日記)』 등이 있으나 병란 중에 소실되어 전하지 않고 시문 약간만 전한다. 그의 시는 담담하고 소탈한[?淡蕭散] 맛과 불의에 비분강개(激仰慷慨)한 기운이 넘친다고 평가되었다.

그는 양자로 들어갔는데? 자신도 아들이 없어 사촌 이광복의 셋째 아들을 입양하여 뒤를 이었다. 그런데 그도 아들이 없어 생가 형의 셋째 아들 이조형으로 후사를 이었다.

생   애

성명 : 이정회(李庭檜) , 1542년 ~ 1613년
본관 : 진성(眞城)
: 경직(景直)
: 송간(松澗)
공시호 :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출생지 : 안동(安東) 주촌리(周村里)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안동(安東) 도솔원(兜率院)
입사경로 : 정탁(鄭琢), 구봉령(具鳳齡)의 추천
내관직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선온서주부(宣?署主簿)
외관직 : 횡성현감(橫城縣監), 의흥현감(義興縣監)
안동부로 복호시키다.
1581년(선조 14) 신복이란 자가 친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안동부가 안동현으로 강등되었다. 이에 유운룡(柳雲龍)·안몽열(安夢說)과 협의, 상소하여 다시 안동부로 복원시켰다.
종계변무에 공을 세우다.
오랫동안 조선의 중요 문제였던 종계변무가 이루어졌다. 즉 명나라의 대명회통 등에 이성계의 선대를 이인임으로 잘못 기록하고 있었는데, 1583년(선조 16) 명나라에서 바로잡겠다고 허락하였다. 이에 배삼익이 사은사로 가는데 모두가 동행을 꺼리자, 이정회를 수행원으로 천거하였다.

이정회는 명나라 예부에 여러 차례 글을 올렸고, 이정회의 정성에 감복한 명나라에서 수정된 대명회전 등을 베껴주었다. 당시 사람들은 배삼익의 외교력과 이정회의 보좌가 빛을 발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공로로 광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한편 이 사행 때 상인 양승개란 자가 종묘서의 은자를 훔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종묘에 불을 지르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사행에 참여했던 이들이 모두 잡혀 들어갔는데, 당시 정사였던 배삼익은 이미 죽은 뒤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두려워 제대로 진술하지 못하였다. 이정회만이 조목조목 사실 해명을 함으로써 마침내 무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다
횡성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랴부랴 횡성의 군비를 살펴보니 30여 군졸뿐이었지만 이를 잘 요량하여 왜적의 피해로부터 횡성을 지켜냈다. 뿐만 아니라 동생이 이정백에게 편지를 보내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키도록 권유하기도 하였다.
안동 치수사업에 큰 공로를 세우다
1605년(선조 38) 안동에 큰 홍수가 나서 두 개의 제방이 무너졌다. 당시 안동부사였다. 김륵이 둑을 복구하는 일을 이정회에게 부탁하였다. 이에 포항제와 송항제 등 두 군데 강둑을 쌓는데 전력하였다.
민생을 걱정하다
임진왜란 이후 국정의 혼란과 민생 불안을 걱정하여 당면한 급무 여섯 가지를 들어 상소하였다. 그 요체는 기강을 밝힐 것, 법을 밝게 할 것, 군정을 닦을 것, 부역을 고르게 할 것, 인재를 가려쓸 것, 백성을 부유하게 할 것 등이었다.
벗에게 최선을 다하다
지기였던 송소 권우가 마마를 앓자, 7일 밤낮을 정성들여 간호하였다. 그러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자, 이정회가 재물을 내어 예절에 맞게 장사지내 주었다.

가   족

: 이연(李演)
생부 : 이희안(李希顔)
: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예범(金禮範)의 딸
형제 : 이정백(李庭栢)
지극한 효성
모친상을 당했는데 마침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이정회는 아우와 여동생에게 밖으로 피신케 하고 홀로 빈소를 지키며 아침저녁으로 상례를 다하였다. 비복들도 모두 쓰러지자 직접 밥을 지어 제상에 올리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집안 어른, 친우 모두 글을 보내 밖으로 나올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그럼에도 끝내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신명이 도운 것이라 하였다.
남다른 우애
그에게는 남동생과 다섯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10여 년을 한 집에서 거처하면서 의복과 먹을 것, 수확한 농산물을 네것 내것 구분하지 않고 살았으며, 다른 사람들이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우애는 친형제에 국한되지 않았다. 족중완의(族中完議)를 만들어 혼인이나 상례시에 서로 돕게 하여 친척을 친하게 여기는 의리를 알게 하였다.

학   문

스승 : 이황(李滉), 권대기(權大期)
향사 : 작산사(鵲山祠)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김성일(金誠一), 권우(權宇), 유운룡(柳雲龍), 유성룡(柳成龍), 안몽열(安夢說) 등
스승 이황을 위해 서원을 세우다
이정회는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은둔할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진보 문암산의 산수를 사랑하여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살았으며, 옥동서원(玉洞書院)을 세워 퇴계 이황을 제사했다.
후진 양성을 위해 지남서당을 세우다
자신의 고향이자 세거지인 주촌(두루)에 지남서당(芝南書堂)을 만들어 배움의 터전을 닦고, 초하루와 보름날에 강회를 열었다. 한강 정구가 안동부사로 부임하자 서당에 토지를 지급하여 선비를 기르는 비용에 사용하게 하였다.
이황과 김성일의 훈도를 받다
이정회에게 있어서 학문은 수레에는 땅, 배에는 물, 농부에게는 경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더구나 그의 학문적 수양은 안으로는 집안 할아버지인 퇴계의 가르침, 밖으로는 내종형인 김성일의 친동기간 같은 훈도를 통해 이루어져, 일취월장하였다.
효제를 근본으로 삼다
그는 아들된 자는 마땅히 효도를 다해야 하고, 아우된 자는 마땅히 공순함을 근본으로 하며, 나머지 사람들을 대할 때도 이러한 자세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관련인물
- 이황(李滉, 1501∼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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