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화대학(청화대학, 중국어 간체 정체은 중국 베이징 시에 있는 대학으로, 의화단
사건에 대한 배상금을 기반으로 하여 1911년
이듬해 ‘칭화학교’가 되었으며, 원래 미국 유학을 목표로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건립된 학교였다.
이후 중국학을 위한 연구소를 세우고, 대학부를 설립하였으며, 사립 대학 성격의
대학으로 발전하였다. 1928년
1911년 중국 베이징의 청나라 왕자의 정원에 칭화학당으로 설립되었다. 원래는 의화단 사건에
대한 배상금을 기반으로 하여 미국
과학 분야의 교수들은 미국의 YMCA에 의해 모집되었고 졸업생들은 유학을 간 뒤 미국 대학의 3학년
학제로 자동 편입되었다. 1925년에 중국학을 위한 연구소를 시작하였고, 동시에 대학부를 설립하였다.
1928년에는, 중화민국 국민 정부에 의해 국립 대학으로 변경되면서 국립 칭화 대학이 되었다.
1929년 문학원 이학원, 법학원등 단과 대학을 설립하였고, 1930년 대학원을 설치했으며, 1932년에는
공학원을 설립하였다. 칭화 대학은 중화민국 시기에 중앙연구원 원사 59명을 포함하여, 학술계에 많은
인재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37년 8월에, 중화민국 국민정부는 칭화 대학, 베이징 대학, 난카이 대학을 모아
후난성 창사에 전시 임시대학을 구성하고 이후 윈난성의 쿤밍에 국립 시난연합대학을 세웠으며, 칭화대학
메이이가 총장 및 교무회 주석을 맡아 교무를 주재하였다. 중국의 베이징이 일본군에 함락된 데 따른 중국
학계와 정부의 대응이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과 리정다오
중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전시 연합대학은 해산되고 세 대학은 다시 이전으로 복교하였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 내전에서 국민정부가 패하면서, 1949년에 칭화대학의 총장 메이이치는 몇몇
교수와 함께 타이완으로 옮겨가 1955년 ‘국립 칭화 핵기술 연구소’를 세웠고, 이것이 이후 타이완의
국립 칭화대학
1952년에는 마오쩌둥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 식의 대학 조정과 개편이 단행되었고, 칭화대학은 법학원,
문학원, 이학원 등이 베이징대학 등에 옮겨졌으며, 폐교한 옌징대학의 공학부, 베이징대학의 공학부 일부를
흡수해 공과대학으로 대학 규모가 축소되었다.
칭화 대학은 개혁•개방 이후로 1980년~1990년대를 거쳐 2000년대 이후로 공학 부문을 확대 개편하고,
경제, 자연과학, 법학, 인문•사회, 공공관리, 커뮤니케이션, 예술&디자인, 생명과학, 의학 및 항공, 금융 등의
단과 대학(대학원)을 복원하거나 설립, 합병하는 과정을 밟아, 다시 중국 최고 대학의 예전의 명성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