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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발발과 휴전 |
․ 1950년 6월25일 북인민군 20만 명과 탱크, 전투기, 대포를 앞세워 38선을 일제히 남침. 1953년 7월27일 휴전이 협정 될 때가지 3년 동안 200여 만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를 남기고, 국토는 초토화 되었다. |
•후퇴와 채병덕의 전사 |
〮․ 파도같이 밀고 내려온 인민군은 6월28일 서울 침범하자 한강철교 폭파함. 7월말에는 경남 하동 땅까지 밀고 내려와 오끼나와의 미군이 투입 되었으나 중과부족 이었으며,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장군도 전사함. |
• 통영탈환과 해병대 |
․ 1950년 8월17일 인민군 1개 중대가 통영을 쳐들어오니 통영시민은 거제나 한산도로 피신함. 8월20일 해병대가 창설되어 통영시 탈환전을 전개하여 처음으로 469명을 사살하고 87명을 생포한 것이 포로의 시작이다. UN군 창설하여 9월15일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지휘로 인천과 원산만 상륙작전에 성공하여 전세는 역전되었다. 10월5일에는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을 진격하여 승리가 눈앞에 다가올 때, 10월25일 인민군 100만 명이 인해전술로 개입하자, 맥아더 장군은 중공을 폭격하기로 백악관에 건의하였으나 3차 대전의 확전을 염려하여 파직시켰으니, 부득이 1951년 1월4일 서울후퇴를 단행하였다. 통영에는 제2사단 거제에는 육군 제3훈련소가 창설되고, 각 학교마다 훈련소가 설치되었다. |
• 인천상륙전과 포로수용소 설치 |
․ 9월15일 인천, 원산 상륙전으로 수많은 인민군이 생포되어 부산과 영천에 수용되었으나 포로관리상 문제가 있어 섬이라는 여건으로 11월27일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고현 중심으로 360만평에 설치하고, 인민군 15만 명, 중공군 2만 명, 여자포로 3천명, 도합 17만 3천명이 고현. 수월 지구에 수용되었다. 포로가 계속 늘어나자 일부는 저구, 명사로 이동시키고 한산도 등에도 분산 수용하였다. |
• 반공포로 선별과 난동 |
․ 인민군 포로 가운데는 북한 공산당을 싫어하는 반공포로가 수없이 많아 이를 심사하여 반공포로는 부산, 광주, 마산, 영천 등지로 이송하였고 용공포로는 저구, 한산봉암도에 배송하여 수용하였다. 반공포로 선별작업에 반발한 용공세력은 소요와 난동으로 자체 인민재판을 여는 등 반공포로를 학살하였으므로 이를 매장 하기 위해 연초면 송정리에 묘지를 설치하고 800여명을 매장 하였다가 휴전 후 포로교환 대 그 유해를 북송하였다. |
•돗드준장의 피납과 주민소개 |
․ 1952년 5월7일에는 포로수용소장 ‘돗드’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석방되지 않아 제13대 소장 ‘존슨’준장이 임명되고 만약을 대비해 고현지구 1,116세대를 강제 소개시켰다. 지역 주민들은 피난 아닌 피난으로 3년간 고생을 했다. |
• 돗드준장의 석방과 경비강화 |
․ ‘돗드’준장의 석방을 포로대표와 협의하여 5월10일 석방됨으로써 폭동은 일 달락 되었으나 포로들의 요구를 들어준 굴욕적인 협상을 문책하여 골슨소장을 해임하고 제14대 ‘보드니’준장이 부임하여 집과 공공건물을 모두 소각하고 2중 철조망을 설치하였다. |
• 휴전협정과 반공포로의 석방 |
․ 6․25전쟁 중 전쟁종결을 위하여 휴전을 하자는 협상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 1953년 6월18일 0시에 이승만 대통령은 헌병감 원용덕 장군에게 명령하여 7개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을 모두 석방하려고 하였으나, 28,278명 중 114명은 미군에 잡히고 실제 탈출은 27,389명이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협정되자 1954년 1월23일 인민군 111,754명, 중공군 20,720명, 모두 132,474명의 용공포로와 우리 국군 7,142명, 미군 3,193명, 기타 참전군 1,216명 총 11,551명을 판문점에서 교환함으로서 거제도 UN군 포로수용소는 막을 내렸다. |
•포로수용소 철수와 주민복귀 |
․ 포로수용소 시설의 일부는 논산으로 철거하고 소개시켰던 주민 1,116세대는 3년간의 타향살이 끝에 1955년 봄부터 이동해 왔다. 포로막사 880동을 무상양여 받고 주택복구비 6천 5백 만 원과 농경지 복구비 3백 만 원을 받아 허허벌판인 황무지를 쑥버머리를 먹으면서 집과 농경지를 복구하였다.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로1988년 10월에는 3천 여 명이 모임 가운데 반공행사를 가졌고, 거제포로수요여소 유적관은 1998년 착공하여 2002년 제2차 완공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향후 3년간에 걸쳐 현 고현중학교 부지 1만 5천 평을 매입하여 새로운 전쟁기념관을 2010년 준공예정으로 건립 중에 있다. 6·25전쟁 당시 수용소 130만 평에 설치되었던 시설 전부를 축소 건립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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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안보 교육의 장 |
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면 후환이 없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청백리인 서애 유성용 대감의 10만 양병설과 임진왜란에 대한 ‘징비록’을 생각하지 않아도 유비무환이란 단어는 몇 백번 다짐하고 실천하여도 과하지 않다. 나는 목숨을 초계와 같이 버리면서 이 강토를 지켰던 고인들의 명복을 빌었으며 과연 나는 국토방위에 무었을 일조 하였는지를 일깨워주는 안보 교육장을 관람하며 시종일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많은 관람객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나름대로의 안보 교육의 장이 되었으면---. |
2008년 9월27일 미군 찬용사 방문 가운데 꽃목거리를 한 분이 중장임. 앞의 학생은 마산에서 관람객임.
2005년 흥남철수작전 기념조형물 준공식 (국내외 많은 전쟁 영웅들이 참석)
중공군 개입으로 폭파된 다리를 넘고 있는 북한 주민들
탱크 모양을 한 전1 전시관
탱크 전시관 안에 좌우 진영의 모습 (좌:김일성, 스탈리, 모택동 우: 이승만, 트루먼, 맥아더)
거제포로수용소 전경
6.25 전쟁 연대표
MP다리---현재 연사리를 지나면 만나는 다리(유엔군 헌병 검문소)Military Police Bridge
포로수송 열차
포로들을 음식을 만드는 식당
6.25전쟁시 참여한 전쟁 장비
거제포로수용소 경비대장 집무실---포로수용소 유적공원 바로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