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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죽산안씨(신)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안재중
낙안면 하송리 사람들의 만세운동
순천군 낙안면은 원래 낙안군으로 경술국치 후인 1914년, 일제가 단행한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순천군에 편입된 곳으로 종래 문인향(文人鄕)으로 알려져왔다. 경술국치를 전후로 해서는 낙안의 나인영(羅寅永)ㆍ이병채 등 애국인사들이 을사조약과 경술조약에 반대하여 일본내각과 통감부(統監府)에 반박하는 글을 보내기도 하고 각처에 격문을 내어 일진회의 반민족적 행위를 성토하기도 하였다. 3ㆍ1 운동의 소식을 전해들은 하송리의 뜻있는 인사들은 낙안의 3ㆍ1 운동을 준비하였다. 이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김종주(金鍾)와 유흥주(劉興柱)였다.
김종주는 1906년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의병진에 가담한 바 있었으며1), 경술국치 후에는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조직에 가담하였다. 대한의군부는 임병찬(林炳瓚)의 주도로 1912년에 조직되어 1914년에는 그 군부 편제를 제정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전직 관료들 과 유생 중심의 복벽적(復的) 민족주의 단체였다. 이때 대한의군부의 순천과 그 주변지역 책임자들은 다음과 같았다.2)
낙안군3) :김종주(金鍾胄) 김승제(金承濟) 배영계(裵泳桂) 서인석(徐仁錫) 김영배(金永培) 보성군 :임봉준(林鳳準) 안종묵(安鐘默) 김학계(金鶴桂) 임양온(林良溫) 임양민(林良民) 임산원(林山源) 광양군 :김태희(金泰熙) 순천군 :박해섭(朴海燮) 이병욱(李炳郁) 여수군 :곽정범(郭正範)
한편 김종주와 유흥주는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동향 동지인 안호영(安鎬瑩:1873∼1948)의 연락을 받고 낙안의 3ㆍ1 운동 거사를 준비하였다고 기술한 글들이 있다. 즉 1919년 2월 말에 서울에서 ‘밀령’을 띠고 낙안에 들어온 연락원은 낙안 출신으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안호영이었다. 그의 동원계획과 각종 서류를 받은 김종주는 동지인 유흥주, 곽인석, 박태문, 김선제, 안덕환 등과 33명을 규합하여 2ㆍ8사, 도란사를 조직했다는 것이다.4)
이러한 사실은 일제의 재판문서와 관헌자료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증언이나 회고담에 의존한 듯한데, 이 사실은 각별한 주목을 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사실에 따라 여러 사실들이 달라지기도 하고 달리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안호영이 실제 연락원이었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가 연락원이었다고 전제하더라도 시위계획과 동원계획에 대한 ‘밀령’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33명의 민족대표를 구성하는 핵심세력으로 천도교, 기독교가 있었지만 모두 지방시위를 계획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지시할 수 있는 조직체계를 갖추고 있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므로 안호영이 서울에서 무엇인가를 가져와 전달하였다면 그것은 만세운동에 대한 생생한 정보이거나 독립선언서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종주가 천도교인이었다는 것은 가족들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지만 안호영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 김종주ㆍ유흥주에게 직접 전달하였는지, 또 안호영이 서울의 천도교세력과 연계가 있었는지 여부는 현재 알 수 없다. 또 신기리ㆍ하송리 사람들의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안호영이 과연 도란사의 결성에 관계하였는지 여부도 유의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현재 순천의 3ㆍ1 운동을 다루고 있는 대부분의 글들은, 4월 9일 신기리 사람들의 만세운동을 1차, 4월 13일 하송리 사람들의 만세운동을 2차, 4월 14일 신기리 사람들 주도의 만세운동을 3차로 나누어 순천지역 3ㆍ1 운동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두 지역 인사들은 사전모의에 따라 차례로 거사할 것과 역할분담, 담당자 등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원사료의 성격을 지닌 자료들에는 신기리, 하송리 사람들이 사전에 모의와 협의를 거쳤다는 기록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재판문서 등에 따른다면 오히려 두 지역 사람들의 만세운동이 사전협의 없이 각각 별개의 운동으로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객관적이다. 그런데 만약, 안호영이 독립선언서를 하송리의 김종주ㆍ유흥주에게 직접 전했으며, 또한 신기리 사람들이 도란사를 결성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면 두 지역 인사들은 거사 이전에 안호영 등을 매개로 사전 모의와 협의를 거쳤을 가능성이 충분하였으리라 판단된다. 현재로선 자세한 사정을 알수 없다.
1919년 4월 13일 정오경, 김종주와 유흥주는 각자 자택에서 태극기와 ‘조선독립기’, ‘대한독립기’라고 쓴 기를 준비하고 낙안 읍내 서문 밖에서 동지인 배형주 배윤주 박태문 김선제에게 목하 구주(歐洲)에서 개최 중인 강화회의에서 조선이 독립하게 된다는 말이 있기 때문에 조선 각지에 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들도 그 소감을 같이하는 일이다 우리 동지들은 오늘이 이곳 낙안읍 장날임을 좋은 기회로 삼아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는 것이니 다수 조선인은 동일한 소감을 가지게 될 것으로 안다 다수 동지들의 원조로 목적을 달성하고 국권을 회복하여야 하지 않을 것인가! 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니 모두들 찬동하였다. 오후 2시 10분, 유흥주와 김종주 행렬이 장대에 높이 단 2개의 큰 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문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의 장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곧 150여 명이 되었다.
이때 성문 안에 있던 보초근무자인 육군보병 이등졸(二等卒) 전중정치(田中貞治) 송미우일(松尾友一)이 그들을 제지하였으나 유흥주가 그들을 밀어 제치는 것을 기화로 시위대는 서문 안으로 쇄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형세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이때 순찰 중이던 헌병 상등병 야전희일(野田喜一), 육군보병 상등병 송강범삼랑(松岡範三郞)ㆍ대서신차랑(大西新次郞)ㆍ산전부길(山田富吉)ㆍ송본천팔(松本泉八)이 이를 발견하고 현장으로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대열을 제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대열의 앞에 서 있던 김종주가 “총검으로 찔러 죽일 테면 죽여보아라.”고 소리치며 가슴을 헤치고 대들었다. 적들이 주춤거리는 틈을 타 시위대 중의 몇 사람이 군인들의 총검을 빼앗으려고 하였고 김종주는 야전희일 상등병의 권총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를 본 헌병 상등병 야천양풍(野川良豊)이 김종주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김종주가 극력 저항하자 야천양풍은 칼을 뽑아들고 제지하려 하였다. 김종주는 그 칼에도 주저하지 않고 오히려 칼을 빼앗으려 덤벼들었으며 마침내 칼날에 양손을 부상당하고 말았다.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아버지를 본 김종주의 아들 김선제(김용석)와 몇 지사들이 육군보병 상등병 송강범삼랑 등의 총기를 탈취하려고 저항하던 중 김선제는 자상(刺傷)을, 유흥주는 오른팔을, 배형주는 이마와 신체의 몇 부위에 부상을 입었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참가자가 150명이었다는 데서 나타나듯 비교적 규모가 컸으며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저항의 형태가 매우 적극적이었다. 일제의 치안담당 기관들도 이날의 시위를 여러 통로를 통하여 상부에 보고하였다. 그 중 비교적 자세한 것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3ㆍ1 운동 일차보고(日次報告)』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순천 낙안면: 4월 13일 오후 2시 10분 낙안면민 약 150명은 구한국기를 앞세우고 낙안 읍내 시장에 들어왔는데 헌병과 보병들이 제지했음에도 극력 저항하므로 총검을 사용하여 해산시켰는데 시위자 중 4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수모자(首謀者) 5명을 체포하고 해산시켰다.
이날의 운동으로 검거되어 1919년 5월 29일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인물은 6명인데 그들의 간단한 신상과 형량은 다음과 같다.
유흥주(48세 농업), 김종주(56세 농업):이상 징역 1년 6월
박태문(29세 농업), 배윤주(33세 농업), 배형주(36세 농업) 김선제(29세 농업):이상 징역 6월
박은식은 그의 저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1919년 5월 31일 현재 순천 3ㆍ1 운동 현황을 집회횟수 6회, 집회인원 1,500명, 사망자 8명, 부상자 32명, 피검자 없음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박은식이 상해에서 수집한 이 정보는 매우 부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박은식이 전혀 없는 것으로 파악한 피검자는 오히려 다수 있었음이 확실하며, 1919년 12월 31일 현재 조선주차(朝鮮駐箚) 헌병대 사령부에서 보고한 순천의 3ㆍ1 운동 피검자는 58명이었다. 이는 전라남도 21개 군(제주군 포함)에서 피검된 785명의 7.4% 에 이르는 숫자였다.5) 이 검거자 58명 중 판결을 통하여 징역에 처해진 인물들은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박항래ㆍ전인채ㆍ강정수ㆍ김만덕ㆍ한흑량ㆍ김규석ㆍ전평규ㆍ곽인석ㆍ한철순ㆍ윤점수ㆍ안진영ㆍ안덕환ㆍ오기영ㆍ신종태ㆍ안장내ㆍ안상규ㆍ안운수ㆍ안규진ㆍ안응섭ㆍ안용갑ㆍ유흥주ㆍ김종주ㆍ박태문ㆍ배윤주ㆍ배형주ㆍ김선제의 26명이었다.
한편 이들 지사의 애국심을 기리고 받든다는 뜻에서 1955년 5월 전라남도 도지사 민병기(閔丙祺), 승주군수 김영관(金永琯), 낙안국민학교 교장 이용욱(李容昱) 등이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기념탑(紀念塔)’ 건립을 발기하여 1956년 6월 8일 낙안 객사자리였던 낙안국민학교 교정에서 마침내 기념탑을 제막하였다. 여기에는 순천 3ㆍ1 운동에 가담하여 형을 받은 24명 의사들이 새겨져 있는데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실형을 받았던 신종태ㆍ안장내ㆍ안응섭ㆍ김선제가 누락되어 있다. 대신 낙안 신기마을의 신용석이 6개월 수형(受刑), 같은 마을 안담환ㆍ안종귀가 각각 4개월, 6개월을 수형한 것으로 되어6) 기념탑에 올라 있다. 신용석ㆍ안담환ㆍ안종귀가 2ㆍ8사 대원들로 신기마을 사람들의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앞서 본 바와 같지만 필자는 아직 이들의 수형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
또한 한 문헌에 의하면, 1919년 4월 5일 순천 읍내에서 수천 명이 집합하여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광양서 헌병이 와서 총을 쏘므로 군중은 해산하였으나 4월 6일부터는 밤이면 각 면 각 동이 일제히 산에 불을 놓고 만세 부르기를 계속하였다 해룡ㆍ서면ㆍ황전ㆍ월등ㆍ쌍암ㆍ주암ㆍ송광ㆍ외서ㆍ상사ㆍ별량 등 각 면 각 동이 연이어 계속하다가 수십 명이 검거되었다 .7)고 한다.
이는 일제의 일일보고서에 나타나지 않는 사실인데 이만한 규모의 시위였다면 치안상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밤에 산상에 올라가 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는 이른바 ‘산호(山呼)’는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한 것이었다고 판단된다. 이 역시 지금은 당시의 사정을 짐작밖에 할 수 없는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순천 주변인 여수에 헌병대와 수비대 1,000명이 있었으나8) 순천의 3ㆍ1 운동으로 해서 여수의 이 병력이 움직인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순천의 헌병분대는 서면에 학구정출장소, 낙안면에 낙안출장소, 황전에 괴목장파견소, 쌍암면에 쌍암장파견소, 주암면에 광천점파견소가 있었다. 또한 순천헌병분대는 광양분견소와 구례분견소를 두고 있었다.9)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577∼578쪽.
2) 安德煥이 만주,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은 『낙안향교지』, 기미독립운동조와 『순천승주향토지』에 실려 있다. 특히 『竹山安氏午峰派』, 1957, 안덕환 항에는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性素伉直……4253年獨立軍與李靑天洪範圖將軍謀劃鬪爭於北溝等地而……遂解武裝以歸…….”안덕환의 아들 안규성이 1977년 2월 증언한 바에 따르면 안덕환이 고향에 돌아온 것은 1924년 6월이라 하였다.
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ㆍ1 운동사(하)』제3권, 1969, 595쪽.
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484∼491쪽.
5) 순천승주향토지편찬위원회, 『순천승주향토지』, 71∼72쪽.
6) 국학자료원 편, 『3ㆍ1 운동편』1, 373쪽.
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ㆍ1 운동사(하)』제3권, 882 885쪽;조선총독부 서무부조사과, 『朝鮮の獨立思想及運動』, 1924, 103쪽.
8) 승주군사편찬위원회, 『승주군사』, 242쪽.
9) 李炳憲, 『3ㆍ1 운동비사』, 時事時報社, 1959, 913쪽.
참고자료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상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운동사 - 3ㆍ1 운동사(하)』제3권, 1969. 국학자료원 3ㆍ1편 『운동편』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Ⅰ 原書房, 1967. 경성일보사 편 『조선연감』, 1939. 승주군사편찬위원회 『승주군사』, 1985. 순천승주향토지편찬위원회 『순천승주향토지』, 1975.
죽산20세 석산(石山) 안덕환(安德煥, 1898~?) : 우봉문중 독립운동가 字 炯培(형배) 號 石山(석산) 生 光武 戊戌(1898) 4月 3日 〇 己未三一獨立運動主導者(1919년 3ㆍ1 독립운동 주도자) 忌 12月 10日 配 高靈朴氏父圭熱 生 光武 辛丑(1901) 12月 12日 忌 12月 26日 墓 新基山七番地艮坐雙墳 (낙안면 신기마을에 묻히신 듯 함.) 配 金海金氏 父官朝 生 1919年 8月 22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