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조선침략사상과 <日本書記>
조선침략은 일본인이라면 대를 이어 힘쓰지 않으면 안되는 숭고한 의무라면서 따르는 제자들에게 거역하기 어려운 윤리적 명령을 내리고 갓 서른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일본인이 있다. 그 제자 중에는 메이지(明治) 제일의 문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제일의 무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있었다. 또한 유신(維新)의 3대원훈의 한 사람인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도 있었다. 기도 다카요시는 메이지유신(1868년) 직후 최초로 한국을 쳐야 한다는 정한론을 입에 올린 자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바로 이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미국과 국교를 트기 위해 1854년 1년 만에 도쿄만에 다시 나타난 미국의 페리 함대에 야음을 틈타 접근한 후 밀항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자수한다.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이후 그는 처형될 때까지의 6년간 수형생활을 하는데 얼마동안 자택유폐의 수형생활을 했다. 이 때에 딱 1년 동안 사설학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주재했다. 이것이 그의 교육경력 전부였다.
그런데 이 짧은 기간에 배출된 문인은 모두 80여명에 이른다. 문인들은 대부분 하나같이 메이지 일본의 근대화와 조선침략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앞에서 본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평생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던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사람이다. 1년 남짓에 불과한 교육이 어떻게 그렇게 강력한 영향을 후세에 남긴 것일까.
요시다 쇼인은 기본적으로 유신의 혁명구호인 존황양이(尊皇攘夷)의 지사였고, 관직과는 무관한 풀섶(草莽)의 혁명가였다. 제자들도 기존의 교육기관, 즉 번(藩)이 운영하는 시습관(時習館) 등에 한계를 느끼고 몰려든 패들이었다. 교육은 스승과 제자들이 숙식을 하며 24시간 이루어졌다. 무슨 과목을 이수하는 것은 아니었고, 시국과 나라의 진로를 놓고 토론하는 교육이었다. 교실이랬자 다다미 8장의 방에서 시작했다. 봉건 일본의 종말이 다가오는 격동 속에서 그는 초급진적 행동주의자였다. 교육장은 자연히 생사를 거는 것 같은 긴장이 늘 팽배했다. 이 강도 높은 긴장 속에 각인된 그의 사상이 메이지국가의 주역이 되는 제자들을 통해 근대 일본을 침략국가로 오리엔테이션 했던 것이다.
요시다 쇼인의 가문은 원래 병법사범이 가직(家職)이었다. 흔히 그의 조선침략사상으로 곧잘 거론되고 있는 옥중서신의 한 구절이다. “취하기 쉬운 조선, 만주, 지나(支那)를 거느리고, 교역에서 노국(露國)에 잃은 바는 토지에서 선만(조선과 만주)으로 벌충해야 할 것이다.” 미국, 러시아 등의 외압 속에서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교역상의 손실을 조선, 만주 땅을 빼앗아 보충해야 한다는 발상을 1850년대 옥중에 앉아서 했던 것이다.
요시다 쇼인은 또한 밀항에 실패하고 옥중에 있을 때, 외압 속에 있는 일본의 진로를 밝히고자, ‘존황양이’의 양이를 위한 기본적인 전략구상으로 <유수록(幽囚錄)>을 엮었다. 이 책 속에서 그는 천황의 핏줄은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는 이른바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주장하고, 반도의 삼한(三韓) 즉 신라, 백제, 고구려는 번국(蕃國)인 것이고, 천황에게 복속되어야 할 열등한 나라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천황론에 의해 이념화된 조선침략론을 그는 쇼카손주쿠에서 이토 히로부미 등에게 불어 넣었던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카타 아리토모가 평생을 두고 실천해 갔던 그의 전략구상의 중심에 조선침략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침략사상 전개가 8세기 초에 쓰인 <일본서기>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침략을 뜻하는 정한론은 메이지 유신의 개막과 함께 터져 나왔다. 메이지정부의 중추에 있었던 기도 다카요시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속히 천하의 방향을 일정케 하고, 사절을 조선에 보내 저들의 무례를 묻고, 만약 저들이 불복할 때에는 죄를 물어 그 땅을 공격하여 신주의 무위(武威)를 신장하기를 바란다.” 일기 속에서 그가 ‘무례’라고 하는 것은, 그 동안 에도 막부기(期)를 통해 조선이 천황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고 하는 얘기다. 이 일기는 그때의 대 조선 외교담당이었던 쓰시마번의 사절이 일본에 일어난 큰 변혁인 왕정복고를 조선에 알리기 위해 출발한 직후의 것이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서기> 속의 허구인 삼한, 즉 신라-백제-고구려 번국론을 그대로 답습하여, 천황이란 원래가 조선을 신속시킨 존재로서 조공을 받지 않는 천황존재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법이었다. 그러므로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를 하여 천황을 받들게 된 일본이 무엇보다 먼저 해야 될 일은 조선을 쳐서 복속시키는 일이었다. 그의 제자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훗날 천황제 절대주의 국체론(國體論) 헌법을 만들어 제국 일본을 조형했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침략을 실천할 군사력과 전략을 만들어낸 것은 다 아는 얘기다.
조선침략사상의 또 하나의 원천은 명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를 창립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이다.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근대일본의 이데올로기였던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창도자였다. 조선, 중국 같은 것은 더 이상 상대하지 말고 빨리 서양을 목표로 근대화하고, 서양국가로 행세하자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전국민을 향한 설교 강단이 있었다. 그것은 <시사신보(時事新報)>였다. 이 강단에서 이웃인 조선은 아시아 속의 일소(一小) 야만국이고, 불문의 나라(不文之國:비문명국)였다. 그는 일관되게 조선멸시관을 깔고 있었다. 조선을 야만으로 보는 멸시관은 당연히 일본 스스로에게 문명 강제의 사명을 떠안기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사명은 침략전쟁의 명분이었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도 일본민족의 광휘로운 선례를 신화와 역사 속에서 찾았다. “일국의 인심을 흥기하여 전체를 감동케 하는 방편은 외전(外戰)의 방편만한 것이 없다.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 정벌은 1700년 전의 옛날에 있었고,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출사도 이미 300년을 지났으되 인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신공황후의 허구는 <일본서기>속에 있는 것이다. 후쿠자와의 조선멸시관 내지 조선 침략사상 역시 그 뿌리는 <일본서기>에 가서 닿아 있다.
요시다 쇼인이나 후쿠자와 유키치의 조선멸시관이나 조선침략사상은, 막부 말기나 메이지기(期)가 되어 이들이 갑자기 창작하거나 날조해 낸 것이 아니라, 그 전 시대의 역사나 전승 속에 이미 구조화되어 있었다. 메이지의 전 시대인 에도기(期)는 표면적으로는 조선통신사 등으로 선린관계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전승에 의거하는 조선멸시관은 사상, 학술, 문예, 연예, 설화 등을 통해 계승, 유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서기>는 백제를 부흥시키려는 일본원군 2만7000명이 663년 백촌강(白村江)전투에서 나당(羅唐)연합군에 패한 후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유민들이 먼저 건너와 정착하고 있던 백제유민들과 합세하여 일본열도에 고대국가를 건립하던 과정에서 편찬된 역사서로 알려져 있다(삼국사기도 일본이란 국호가 670년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8세기 초까지가 일본고대국가의 완성형인 율령(律令)국가 건국기로 보이는데, 이 때의 사서 편찬은 달리 지식인이 있을 수 없는 상황에서 백제유민들의 몫이었다. 따라서 백제유민들의 신라에 대한 원한과 콤플렉스는 열도국가의 반도국가에 대한 자존심과 아이덴티티의 근간으로 탈바꿈되어 역사는 구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하튼 <일본서기>는 신화와 허구와 사실(史實)이 혼잡 되어 역사서로 만들어졌다.
후세에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 조선번국관이 드러나 있는 기사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과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두가지 기사이다. <일본서기>의 절대적 영향력에 주목하는 사람들 중에는 일본에 와 있던 서양사람들도 있다. 메이지 초기에 일본에 와서 도쿄대학의 전신인 개성학교(開城學校)에 근대 화학교육을 도입하고, 훗날 미국으로 돌아가 목사가 되어 저술 등으로 서양에 일본을 소개했던 윌리엄 E. 그리피스도 그중 한사람이다. 그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본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은 행해졌고, 강화도사건(1875)도 일으켰다고 했다. 당시의 미국인들이 운양호(雲揚號)사건을 일본의 조선침략의 개시로 규정했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바다를 건너기 전에 신공황후를 떠받들어 놓은 신사에서 혈제(血祭)를 올리고 침략길에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일본역사의 빛나는 선례로서 전 일본국민에 의해 공유되었던 ‘신공황후 스토리’는 소학교 교과서에 <일본서기>를 그대로 옮겨 알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때는 기원3세기의 어느 해로 못 박혀있다. 제14대 천황 신공황후는 날 때부터 씩씩했다. 남편 천황이 죽고 나서 황후는 바다를 덮는 군선을 거느리고 일본서 제일 가까운 신라를 쳐들어갔더니, 신라왕은 대단히 겁을 내어 신국(神國)의 신병(神兵)은 대적할 수 없다면서, 즉각 매년 조공 바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다. 신공황후는 곧바로 개선하였는데, 드디어는 백제, 고구려의 두 나라도 일본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 황당한 얘기가 <일본서기> 속에 있다. 그런데 2차대전 직후 이 신공왕후 스토리가 <일본서기>에는 있어도 역사서술에서는 사라져 버렸다.
또한 '임나'란 님(임금, 주군, 왕)의 나라란 말이다. 일본 역사학은 90년대까지도 한반도에 있었던 여러 가야국을 임나라 불렀고, 4세기부터 6세기 후반까지 250년 동안 임나일본부라는 관부(官府)를 두어 그곳을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79년의 <아사히신문>이 주최의 심포지엄에서 학계의 거장들이 내린 결론은 일본의 국가 성립 시기는 6세기로 정리 되었다. 즉 임나일본부를 설치 지배했다는 4세기 중엽에는 일본열도에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조선침략사상을 뒷받침하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나 임나일본부는 모두 허구임이 밝혀졌다.
1984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광복 후 처음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을 때였다. 9월6일 궁중만찬회에서 천황은 “돌이켜보면 귀국과 우리나라와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인국(隣國)으로서, 그 사이에는 옛날부터 여러 가지 분야에서 밀접한 교류가 있어왔습니다.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에 의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면 6~7세기의 우리나라의 국가형성 시대에는 다수의 귀국인이 도래하여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 학문, 문화, 기술 등을 가르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긴 역사에 걸쳐, 양국은 깊은 이웃관계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관계에도 불구하고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이고, 재차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발언했다.
작가 김달수(金達壽)는 <일본 고대사와 조선>에서 쇼와 천황의 ‘6~7세기의 우리나라의 국가형성의 시대에는’ 이라고 한 대목을 주목하면서 여기에는 일본 역사학자나 고고학자의 최신의 연구 성과가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것에 의해 ‘4세기반경’ ‘국내통일을 끝낸 야마토 조정’ 등의 속설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야마토 조정의 자손이라고 하는 현 천황 자신에 의해 확실하게 부정되었다고 썼다. 일본 고대국가의 ‘6세기 성립’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4세기 중엽부터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그곳을 경영했다는 ‘임나일본부’설과 그 이전의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확실하게 허구인 것으로 단정하는 의미가 있다. 이로써 조선번국관의 주요한 근거는 더 이상 힘을 못 쓰게 되었다.
또 한번의 천황의 한반도 혈연관련 발언은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의 통역이 신문 인터뷰에서 궁중만찬회가 끝나기 직전 천황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한국과 상당한 인연이 있다고 느낀다’며 아악(雅樂) 감상을 권유했고, 식장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제 가계를 보면 모계(母系)에 한국계 인물이 있는 듯 하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일본 궁중의 아악이 신라 아악인 것을 천황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번국관의 극복을 평균적인 일본인 모두의 것으로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2차대전의 항복 선언을 천황이 하지 않고, 총리나 대본영의 누군가가 했다면, 100만 명의 희생이 더 있었을 것이라 한다. 미국이 천황제를 온존시켜 점령통치를 매끈하게 했던 지혜를 우리 국민이라고 차용 못할 것인가. 일본 천황은 현 헌법에서는 어디까지나 상징일 뿐이다. 그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과도 무관하다. 그러나 긴 역사를 통해 형성된 천황의 초헌법적 권위는 오늘의 천황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일본 사람 모두의 역사 속에 뿌리 깊은 조선멸시관, 조선번국관을 바로 잡을 사람은 천황밖에 없다는 현실을 우리 국민은 직시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