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5~141) 차가운 비바람을 맞으며 도약의 길로
내가 태어나고 성장한 시기는 세계적으로 혼란스러운 격동기였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혼돈된 사상과 가치가 난무했고, 지구상의 인류는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상실한 채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두고 의지할 곳이 없을 때 나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꿈과 소원을 이루어 드리겠다는 신념을 지니고 성장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 당대에 하늘의 한 맺힌 복귀 섭리를 종결짓겠다"는 확신에 차 있었으며, 그와 같은 마음으로 문 총재와의 성혼도 결정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내 세대를 넘기지 않고 종교적 갈등과 분파를 청산하겠다는 결단이었습니다. 이제 종교적 분파로 인한 갈등은 멈춰야 합니다. 하나 되지 못한 혈통과 그로 인한 분파를 기필코 정리하겠다는 것이 나의 결심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소망을 이뤘습니다. 성혼 후 20년 내에 14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그것도 아들딸 수를 맞춰 각각 일곱 명씩을 출산했습니다. 현재 나는 전쟁과 갈등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하나님을 해원해 드리기 위해 5대양 6대주를 넘나들며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벌써 60년이 지났네요." "세월은 살과 같다더니, 그 말이 틀리지 않아요. 지난 60년은 고통과 시련의 세월이었으면서 동시에 영광과 기쁨의 나날이기도 했어요." 1954년 5월 1일 서울 성동구 북학동에 세워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는 2014년에 60년을 맞아 조촐한 기념식을 가졌습니다. 식구들은 둘러앉아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서로에게 고마운 인사를 했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모든 것이 빈한하게 시작된 통일교회는 나의 성혼을 디딤돌 삼아 새로운 시대로 도약했습니다. 소수에 불과했던 작은 교회가 지금은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전 세계로 뻗어 나갔습니다. 원리말씀은 지구촌 땅끝까지 전해져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에 세계종교로 우뚝 솟은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던 만 16세 소녀 한학자는 하늘신부에서 우주의 어머니이자 하나님의 유일한 첫딸 독생녀가 되어 평화를 널리 펼칠 어머니로 모든 인류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혼 후 1960년 여름에 들어서자 전체 식구가 하계 40일 계몽전도 활동에 나섰습니다. 전국 모든 지역에서 신앙의 불길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600명이 넘는 전도사와 식구들이 413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40일 동안 미숫가루 한 되로 버티며 동네 골목을 청소하고, 마을의 어느 집 사랑방에서 호롱불을 켜놓고 한글을 가르치며 갖은 어려움을 이겨 냈습니다. 그 시절 통일교회 전도대원들은 핍박이 심해 몸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외롭기가 너른 들 한복판에 홀로 선 미루나무와 같았습니다.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난이 커질수록 계몽전도에 더 박차를 가했습니다. 나중에는 젊은 청년들뿐만 아니라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발 벗고 나섰습니다. 심지어 중학교 1학년 여학생도 동참했습니다. 계몽전도는 해를 거듭할수록 들불처럼 번져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도도한 물결이 되었습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들불처럼 번졌던 농촌계몽과 문맹퇴치 운동도 그때 시작되었습니다. 도시와 시골마을 곳곳에 사랑방 야학을 만들어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청소년과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습니다. 충주에서는 맨손으로 흙벽돌을 찍어 교실을 만들고 구두닦이 청소년들의 배움터를 마련해 훗날 성화학원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전국적인 규모의 농도원을 세워 농촌 근대화를 이끌어 갔습니다. 이 역시 새마을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여러 분야에서 우리 사회를 변혁시키는 운동의 가장 첨단에 섰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는 이단이라 하여 곳곳에서 비난의 목소리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목회자들과 전도대원들은 험난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전도나 계몽활동에 참여한 사람이 하루 세 끼를 온전히 챙길 수는 없었습니다. 아니 하루 한 끼를 먹기가 어려웠습니다. 교회 학생들이 집에서 싸준 점심 도시락을 전도대원이 머무는 사랑방에 몰래 놓고 갔습니다. 점심을 굶을 학생들을 생각하며 도시락을 먹어야 할 때 그 마음은 참담하기 이를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나는 일선에 나가 땀 흘리는 전도대원과 식구들을 도와주기 위해 옷과 생활용품을 모아 보냈지만 늘 부족하기만 했습니다. 선교 외에도 사회운동과 봉사활동에 쓰이는 돈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일하는 식구들이 간혹 아이들을 위해 초콜릿이나 바나나, 과자를 가져왔습니다. 그때만 해도 무척 귀한 물건이었습니다.그걸 차마 아이들에게 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손이 닿지 않는 장롱 안이나 선반에 올려 두었다가 멀리 임지로 떠나는 식구들에게 한 묶음씩 싸서 들려 보냈습니다. 어떤 여자 식구는 과자 보따리를 받고 그 자리에서 눈물을 왈칵 쏟았습니다. 몇 달 후 돌아와 내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그 꾸러미를 들고 내려가 개척지 식구들과 나눠 먹었습니다. 참어머님의 격려가 원리말씀을 전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말이 내게는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전도사만 임지에 보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 나는 문 총재와 함께 1년에 서너 차례 지방순회에 나서 교회들을 찾아갔습니다. 개척지 전도사들은 감격의 눈물로 우리 부부를 맞아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개척 교회는 대부분 단칸방이었고, 간판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초라했습니다. 교회 문을 들어설 때면 '이곳이 정말 교회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 옹색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으로 여기며 식구들을 위로했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은······ 지금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찮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훗날에는 깃발을 드높여 만국 국민의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더라도 부끄러움이 없었고,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당당했습니다. 협회를 정부에 등록하려 했을 때 여러 차례 거부되다가 1963년 5월에야 마침내 정식으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특히 기성교회의 반대와 탄원서가 빗발쳤습니다. 세상은 역시 하루도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남북한 갈등으로 더욱 위태로웠고, 국제정세 또한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공산주의를 극복해 가면서도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한반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모든 식구가 나서야 한다고 독려했습니다. 축복가정 부인들은 남편과 자식들을 떼어 놓고 가정을 떠나 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집집마다 방문하며 계몽활동을 펼쳤습니다. 병든 노모와 아이들을 하늘 앞에 맡기고 나섰습니다. 가정의 중심인 어머니가 오랫동안 집을 비우니 온 가족이 감내해야 할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남겨진 아기를 안고 동냥젖을 얻어먹여야 하는 아빠가 있는가 하면, 임지에 나간 엄마는 퉁퉁 불은 젖을 짜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내가 출발하기 전에 임신한 아기를 중간에 돌아와 낳아 놓고 100일 만에 다시 집을 나서기도 했습니다. 3년 만에 돌아오니 아기는 엄마가 낯설어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해산할 때는 산모가 힘들어 괴로워해도 모질게 다그치는 것이 산파의 역할이듯, 우리 부부는 식구들을 매몰차게 밀어붙였습니다. 통일교회 부인들이 가정마다의 갖가지 사연들은 가슴에 묻어 두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앞장섰던 활동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숨어 있는 애국활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농민이나 의병이 봉기했듯이, 공산주의와 맞서 나라를 구한 국난 극복의 위대한 역사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이후 모든 축복가정 부인에게 이 전통이 계승되었습니다. 그때 통일교회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우리를 새롭게 받아들였습니다. "지금은 통일교회를 이해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 민족 3천만이 통일교회와 함께하는 날이 오면 이 나라 이 민족은 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후 우리는 더 큰 책임감을 안고 세계를 사랑하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세계 선교의 중심이었던 미국으로 건너가 200년 전 미국의 건국정신을 일깨우는 운동을 펼쳤습니다. 우리 부부는 1974년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을 만나 회담하고 50개 주를 일일이 순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습니다. 미국 의회와 양키스타디움, 워싱턴 모뉴먼트광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해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활발한 승공운동을 펼치며 구국의 함성을 이어 갔습니다. 승공운동은 일본과 아시아를 넘어서 세계 여러 나라로 전해져 공산주의를 소멸시키는 데 큰 지렛대가 되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종교 화해를 위한 초교파운동과 남북통일을 향한 범국민운동을 이끌어 갔습니다. 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평화를 증진시키는 운동도 펼쳤습니다. 1990년대에는 고르바쵸프 소련 대통령과 역사적 만남을 가졌고 소련 젊은이들에게 민주주의 정신과 올바른 가치관을 가르쳐 공산주의 몰락과 동서 화해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91년 북한 땅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나 남북대화의 물꼬를 텄고 북한 선교의 발판도 마련했습니다. 새로운 천 년이 시작된 2000년 이후 하나님이 바라시는 평화세계를 이루기 위해 유엔까지 활동의 폭을 넓혔습니다. 190개가 넘는 나라에 교회가 세워져 지구촌 어느 도시, 어느 마을에 가더라도 통일교회 식구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와도 같았던 60년이 흘렀습니다. 60년을 지나오면서 걸림돌을 넘을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세계평화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2012년 9월 문선명 총재가 성화한 후에도 이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 모든 인류를 위한 선물로 선학평화상을 제정해 미래의 평화운동에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남미와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세계 곳곳에서 더 많은 인재들을 길러 내고, 더 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초창기 극도의 탄압과 억압, 비난을 이겨내고 이제 하나님을 한 부모로 모시고 온 인류가 한 형제가 되는 참된 평화의 꿈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P142~148)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옵니다
1980년대 초반 어느 날 편지 한 장이 전해졌습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 드리는 인사입니다. 천상에서 뵙겠습니다.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 감옥에 갇힌 선교사가 처형되기 전 써 내려간 유서 편지였습니다. 나의 몸은 푸른 피가 도는 듯 삽시간에 굳었습니다. 눈물마저 얼어붙어 그 자리에 망부석이 되어 한동안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사랑하는 그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인류의 참부모로 가는 길은 그토록 험난하고 절박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무너지는 억장을 홀로 쓸어안고 속으로만 통곡해야 했습니다. 50여 년 전, 식구들은 어느 자리에서건 열띤 토론을 벌였습니다. "이제 세계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아직 변변한 교회 건물조차 없는데······." "교회 건물을 멋있게 지으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가요?" 어떤 식구는 세계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고, 어떤 식구는 나라 안에서 우선 교회라도 제대로 짓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둘 다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한국'보다 '세계'를 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겉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버젓한 교회 하나가 없었습니다. 식구들이 모여 오붓하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많아서 자그마하게 초록색 지붕의 A형 교회를 지은 게 전부였습니다. 교세가 약한 시절에 세계를 향해 진출해야 한다는 주장에 반대가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변변한 교회조차 없으면서 세계를 목표로 하는 것이 가당키나 하냐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통일교회는 애초부터 보다 큰 가치를 추구했습니다. 개인이나 가정보다는 민족과 나라를 위했고, 한국보다는 세계구원이 우선이었습니다. 갈등이 범람하는 메마른 세상에 평화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습니다. 1958년 일본으로 첫 선교사가 건너가고, 이듬해에 미국 개척전도가 어렵사리 시작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도 외국 선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적지 않은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에 자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해외 선교를 본격화하기 위해 1965년 문 총재가 세계순회를 출발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유럽, 중동, 남미로 선교사들이 밀물처럼 건너갔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나쁠 순 없다'고 할 정도로 모든 여건은 최악이었습니다. 통일교회 원리말씀이 거대한 해일처럼 세계로 뻗어 나가던 1970년대에는 모든 나라가 합심이라도 한 듯 거의 총력을 기울여 우리를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핍박이 심하면 심할수록 오뚝이처럼 일어섰습니다. 1975년 일본에서 세계선교사회의를 열고 127개 나라에 선교사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 결정에 반대하는 이유도 많았지만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습니다. "보내지 못할 이유는 늘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지금 보내지 않으면 영원히 못할 수도 있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때 대규모 선교사를 보낸 것이 훗날 큰 결실을 맺었습니다. 선교사를 보낼 때 한 나라 사람만 보낸 것이 아니라 독일, 일본, 미국 등 세나라 사람을 한 팀으로 묶어서 보냈습니다.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서로 원수지간이었습니다. 우리의 선교활동에서는 근대 서구 기독교의 낭만적인 선교를 연상할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호화로운 저택이나 빌딩이 아니라 조그만 방이나 막사에서 살며 활동했습니다. 임지로 떠날 때는 선교 자금이 부족해 보내는 사람이나 떠나는 사람이나 비통한 마음으로 각오를 다져야 했습니다. 당장 쓸 돈을 조금이라도 마련한 사람부터 낡은 가방에 옷가지와 《원리강론》한 권만 달랑 넣어 임지로 떠났습니다. 당초에는 막연하게 '5년 정도'로 예상했지만 길게는 20년 넘게 아프리카와 중동에 머물면서 선교를 한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1년에 한두 번 행사에 참석하러 뉴욕의 이스튼가든수련소로 왔습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현지에서 자립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형편이 넉넉지 못해 비행기 표를 구입하지 못해 참석하지 못한 선교사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를 처음 만난 이국의 젊은 선교사는 우리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울고 싶은 심정이야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가장 통곡하고 싶은 사람은 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기쁨의 자리가 눈물바다로 변할 것이기에 강인한 어머니의 마음으로 그의 어깨를 안아 주었습니다. 다음 날이면 선교사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 소박한 셔츠와 넥타이를 하나씩 사주었습니다. "이게 잘 어울리네요. 그동안 수고했어요." 진심 어린 위로와 함께 당부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뜻길에 헌신하면 평화로운 세상을 우리 시대에 이룰 수 있어요." 선교사들은 뜻 앞에 새로운 각오을 다지며 다시 섭리의 전선으로 떠났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부부는 선교사를 낯선 땅으로 보내면서 항상 하늘을 붙잡고 간곡한 기도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산국가로 떠나는 선교사에게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불행히 순교자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나'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 염려는 결국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1970년대가 되면서부터는 견디기 힘든 탄압이 몰아닥쳤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공산권 국가에서는 '나비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선교사들이 지하에서 생명을 걸고 활동했습니다. 나비작전은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철의 장막이 드리워진 동유럽에서 펼쳐졌던 비밀 선교활동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최초로 소련땅에 건너간 군터 부르처를 비롯해 수많은 선교사들이 소련KGB에게 미행을 당하고 핍박을 받다가 결국에는 발각되어 구금당하거나 강제로 추방되었습니다. 1973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선교사와 신도 30여 명이 한꺼번에 경찰에 체포되어 연행되었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식구도 있었고, 5~10년 징역형에 처해지는 등 말로 다 할 수 없는 탄압이 자행되었습니다. 심지어 무고하게 테러를 당해 시체로 발견되는 참사도 있었습니다. 24세의 마리 지브나는 차디찬 감옥에서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어, 공산 치하에서 선교를 하다 숨진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1976년 프랑스 파리의 빌라오블레 교회에서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의 의해 총탄이 쏟아지고 폭발이 일어나 수많은 부상자가 났습니다. 프랑스 식구들은 에펠탑에서 트로카데로까지 순교자 애도 행진을 벌여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공산세력이 개입된 것으로 드러나자 미국 국회의원과 조야 인사들이 종교 탄압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뉴욕 벨베디어의 통일교회 수련소도 폭파한다는 협박을 받아 경찰이 출동했습니다. 감시와 추방, 미행, 테러는 선교사들을 늘 따라다니는 일상적인 일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종교 탄압은 1980년대 들어서도 멈추지 않아, 탄자니아로 떠난 사사모토 마사키 선교사는 그해 겨울에 총을 맞아 순교했습니다. 1986년 우리는 나비작전의 선교사들을 미국 이스튼가든으로 조용히 모이도록 했습니다. 선교사들의 처절한 이야기는 밤이 깊어도 끝날 줄 몰랐습니다. 부모형제에게도 하지 못했던 가슴 깊은 곳의 속사정을 털어놓는 선교사들의 마음에서는 오열이 끊이지 않았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또한 애간장이 녹았습니다. 공산국가에서 그들의 하루하루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 아슬아슬한 나날이었습니다. 한 선교사의 말이 모두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나는 모릅니다. 내 삶은 하나님의 영적 계시에 의해 직접 주관받고 있다는 것만 알 뿐입니다. 나에게 위험이 닥치면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갈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임지로 떠날 때 나는 그들을 하나하나 포옹하고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했습니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약도 없이 전쟁터보다 더 치열한 땅으로 떠나는 선교사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고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습니다. 단지 통일교회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를 받은 식구들의 사연은 참으로 애처롭습니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볐습니다. 고통과 위험 속에서도 가난한 사람을 돕고, 학교를 세우고, 직업교육을 시키고, 황야를 개척해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오늘날 190개가 넘는 나라에 통일교회가 있고, 식구들이 있는 것은 모두 선교사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교사들을 낯선 대륙과 바다 건너로 보낼 때마다 하나라도 더 주어서 보내지 못하는 현실이 늘 마음 아팠습니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는 날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풀 것이라는 말로 격려할 뿐이었습니다. 그 격려는 천군마마보다 더 든든한 응원이 되어 선교사들의 발걸음을 힘차게 해주었습니다. 초창기 통일교회 식구들은 몰리고 쫓기는 제일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밤, 집에서 쫓겨나 담벼락에 홀로 서서 눈물의 기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낯선 땅에서 추방되고, 사막에서 오직 밤하늘의 별빛만으로 길을 찾고, 깊은 밀림을 홀로 헤쳐 나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슬픔을 안으로 삭이면서 신앙을 지키고 믿음을 전파했습니다.
(P149~ 156) 그리움과 눈물로 얼룩진 세계순회
"엄마, 또 가방을 꾸려요?"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내 옆에서 묵묵히 짐 싸는 것을 거들어 주던 큰딸이 또 물어 옵니다. "어머니, 이번에는 어디로 가요?" 커다란 가방을 꺼내 놓고 옷가지들을 챙기노라면 아이들이 가장 먼저 묻습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늘 곁에서 놀아 주고 보듬어 주기를 바라지만 나는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사람을 만나는 일, 교회 일, 지방순회 등 해야 할 일들이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바다 건너 외국에 나가는 일은, 짐을 싸려고 가방을 꺼내는 것부터가 고달픔의 시작이었습니다. 여행은 즐거운 일이지만 미션을 갖고 출발하는 여행은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긴장과 더불어 고생이 시작됩니다. 호화찬란한 대궐에 머물러도 자기 집이 아니면 마음은 불편합니다. 불편한 대궐보다는 작고 옹색하더라도 자신의 오두막에서 편안히 살아가는 것이 더 마음 편합니다. 더욱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사명을 띠고 나서는 발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1960년 성혼 이후 편안한 내 집에 머물러 있던 적이 드물었습니다. 휴전선 아래의 작은 마을에서부터 외로운 섬마을까지 전국을 다니며 식구들을 만나고 행사와 강연에 참석하느라 마음 편히 쉰 날이 없었습니다. 바다를 건너면 일본을 시작으로 아시아와 유럽, 미국, 남미,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를 순회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기 위해 낯선 사람들과 낯선 땅을 내 형제자매, 내 집으로 여기며 찾아다녔습니다. 세계순회를 떠나면 힘든 일과였음에도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잠깐 짬을 내서 그림엽서를 샀습니다. 밤 12시가 넘어 일이 끝나면 나를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효진아 보고 싶구나. 언제나 불러 보고 생각나고 달려가 안아주고 싶은 착하고 귀엽고 사랑스런 아들이구나. 효진아, 일시 떨어져 있긴 하지만 너희는 행복한 하늘의 아들이요 딸이다. 우리의 효자, 효진! 하늘의 효자요, 땅의 효자요, 온 우주의 효자, 효자의 본이 될 우리의 착하고 슬기로운 효자 효진 . 사랑한다. 아빠와 엄마는 뜻을 따라 항상 바쁜 생활로 너희와 지내는 시간이 적어 무척 아쉬우나 엄마도 아빠도 네가 있으므로 든든히 생각한다. 효진아, 넌 보통 아이들과 다르단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더라도 너의 근본을, 하늘의 품위를 손상시켜서는 아니 된다. 아빠 엄마는 항상 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때 아빠 엄마 많이많이 깜짝 놀라게 해줄래? 아빠 엄마는 너에 대한 큰 꿈이 있단다. 엄마는 기다리고 항상 기도한단다. 건강하여라. 안녕! 1973년 5월 12일. 미국 벨베디어에서
나는 여러 공적인 일로 아이들과 다정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의젓하게 잘 자라 주었습니다. 언젠가 큰아들 효진이가 신문사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어머니의 어떤 점을 존경합니까?" 효진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를 감싸 주며 기쁘게 해드리는 어머니의 사랑과 끈기를 제일 존경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다 위대하지만요······ 특히 저의 어머니는 우리를 절대적으로 믿고 격려해 줍니다. 나는 그 모습에 늘 깊은 감명을 받습니다. 언제나 세계적인 일로 바쁘면서도 14명의 형제를 낳은 것도 정말 위대합니다." 나는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찬물로 샤워하는 것을 꺼립니다. 아이를 많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의사마저 만류하던 네 차례의 절개수술도 받았습니다. 영진이를 분만할 때는 아기 머리가 커서 사경을 헤맸습니다. 남편은 독일에 있었는데, 30분 안에 결정하지 않으면 산모와 아기가 모두 위험하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를 했습니다. 한 번 절개수술을 하면 다시 자연분만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예수님의 흑암으로 둘러싸인 사망권세를 새 생명의 출산으로 해원해 드리겠다는 다짐으로 고통을 참아 냈습니다. 세상 엄마라면 누구나 겪는 것처럼 한 생명의 탄생은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고통 가운데 맞이하는 것입니다. 네 번의 걸쳐 수술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절개수술을 받으려고 수술대에 오를 때마다 나는 십자가의 고통을 체휼했습니다. 그렇게 한 생명 한 생명 하나님을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낳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차례 유산도 했습니다. 그 여파로 인해 지금도 찬물로 샤워를 하면 한여름에도 한전이 나 몸이 오들오들 떨립니다. 내가 아이를 많이 낳아 집안이 화기애애한 만큼, 교회는 이 도시 저 마을에 계속 생겨나고 식구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나 '신도가 가장 많은 교회'와 같은 세속적 목표는 애당초 없었습니다. 세계를 구원하는 종교, 인류의 눈물을 닦아주는 참된 교회만을 소망했습니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1969년 첫 세계순회 강연을 했습니다. 수천 번이 넘는 다양한 대회와 행사, 모임, 세미나를 열었고 강연도 수백 회에 달했습니다. 50여 년 동안 지구촌 거의 모든 곳에 나의 발자국이 오롯이 새겨졌습니다. 낯선 대도시, 원시의 작은 마을, 햇빛이 살을 태우는 뜨거운 사막, 울창한 밀림, 숨이 턱턱 막히는 고원지대에 이르기까지 지구촌 곳곳을 다녔습니다. 특히 소외된 사람들과 힘없는 여성들, 어린이와 소수민족이 나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내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만큼 그들에게 평안을 줄 수 있고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알기에, 어젯밤 집에 돌아와 피곤한 몸을 누일 시간도 없이 오늘 새벽에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낯선 도시의 호텔에 들어가 두어 시간 의자에 앉아 있거나, 공항 빈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잠시 눈을 붙인 후 길을 나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가방을 풀어 보지도 못한 채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다시 길을 재촉했습니다. 공산국가에 처음 들어가 강연할 때는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죽은 영혼들이 더 많이 나를 찾아왔습니다. 나 홀로 크로아티아에 갔을 때는 그 일대가 한창 전쟁 중이었습니다. 호텔 방에 들어서는 순간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어간 영혼들이 구원받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 영혼들을 해원시켜 주기 위해 밤새 기도를 올렸습니다. 아프리카에 갈 때는 매번 말라리아 예방약을 먹었습니다. 한번은 처방이 잘못되어 후유증이 몹시 심했는데, 그대로 말라리아를 앓고 고열에 들떠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치료는 언감생심이었고, 계획된 순회 일정을 모두 마치기 위해 정신없이 다니다 보니 어느샌가 말라리아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1996년 가을에 열린 볼리비아 행사는 쉬이 잊히지 않습니다. 수도 라파스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산도시 중 하나인데, 그 높이가 해발 4천 미터나 됩니다. 토박이가 아닌 이상 누구라도 산소 부족으로 고산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강연을 해야 했기에 산소통을 옆에 놓고 연단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강연대가 흔들거려 살짝만 기대도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힘센 직원이 붙들고서 있어야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근심스레 바라보았지만 나는 강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속이 울렁거리고 갑작스레 두통도 찾아오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이겨 낼 수 있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버텨 냈습니다. "저분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 놀라움과 함께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강연은 성황리에 끝났고, 저녁에 열린 축승회에서 나는 참석한 식구들의 손을 한 명 한 명 따뜻하게 잡아 주었습니다. 나를 만나기 위해 멀리서 온 귀한 손님과 식구들을 내 몸이 힘들다 하여 무덤덤하게 대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기쁨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남편은 내 등을 토닥이며 기뻐해 주었습니다. "4천 미터나 더 하늘에 가까운 곳에서 승리를 쟁취했으니, 그런 복이 또 어디 있어요." 세계 곳곳을 다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일 외에도 희생당한 영혼을 구원하는 해원식 또한 여러 나라에서 거행했습니다. 2018년 봄 오스트리아에서 치러진 영혼 해원식은 참으로 뜻깊은 행사였습니다. 빈에서 도나우강을 따라 서쪽으로 두 시간쯤 가면 마우트하우젠 이라는 마을이 나옵니다. 주변 풍광은 무척 아름다움에도 사람들을 맞이하는 건물은 우울하고 음험합니다. 짙은 회색 벽돌로 높다랗게 지은 담장 앞에 서면 누구라도 통한의 눈물이 저절로 흐를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나치가 유대인들을 가둬 놓았던 강제수용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 갇혔던 30만 명은 대부분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습니다. 벌써 70여 년이 넘은 역사의 아픈 상처를 지닌 현장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짜 아픔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희생당한 영혼들을 위로하고 원통함과 슬픔을 달래 주어야 영혼은 안식처를 찾아갑니다. 빈에서 유럽전진대회를 마치고 나는 식구들을 마우트하우젠으로 보내 해원식을 올리도록 했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시골길을 몇 번이나 돌아 도착한 그곳은 옛날의 상처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영원한 사랑의 백합꽃을 바치고 희생자들의 영혼을 달래는 고천문과 의관을 제작해 해원식을 엄숙하게 올렸습니다. 원통한 영혼들이 이 과거의 슬픔과 분노를 털어 내고 맑은 영혼으로 평온한 안식처에서 행복하게 머물기를 기원했습니다. 기념관을 짓는 것도 중요하고, 역사적 사실을 학문적으로 조명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억울한 영혼에 맺힌 원한과 분노를 풀어 주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7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무도 하지 않았던 해원 의식을 우리가 거행함으로써 30만 명의 영혼이 안식처를 찾게 되었습니다. 세계 곳곳을 다닐 때마다 낯선 사람들이 나를 보자마자 두 손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으려 합니다. 그 애절함이 내 가슴에 깊이 아로새겼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며, 내가 그들 곁에 머물다가 떠나오면 아쉬워하는 것은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기 때문입니다. 6천 년 전부터 하나님의 품을 벗어난 인류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둘을 이어 주는 하늘의 중보자인 독생자 독생녀가 있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 독생녀를 만나 울음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근본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나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매일 수백수천 킬로미터를 다녔습니다. 그 힘든 여정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늘 행복했습니다. 그러하기에 내가 남긴 말과 발자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매일매일 자라고 해마다 커져서 세계를 덮고도 남을 것입니다.
(P157~161)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 'You are My Sunshine'
"벨베디어가 무슨 뜻인가요?" "이탈리아로 '아름다운 경관 혹은 전망'이라는 뜻이예요." 미국 뉴욕의 허드슨강 인근에 수련소를 마련했을 때 그곳 이름을 벨베디어(Belvedere)라 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휼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그곳에서 1970년대부터 식구들이 원리말씀을 바탕으로 수련을 받았습니다. 우리 부부를 만나기 위해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수련소는 늘 혼잡했습니다. 나는 벨베디어수련소와 이스트가든에 노란 수선화를 많이 심었습니다. 수선화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얼어붙은 땅을 가장 먼저 뚫고 나와 새로운 계절을 알리는 봄의 전령입니다.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언 땅을 비집고 나오는 새싹의 강인함과 자연의 섭리 앞에 나는 늘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봄이나 한여름에 피는 장미나 백합도 아름답지만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수선화의 강인함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는 참부모의 길, 독생녀 참어머니의 길을 걸어오면서 이 꽃을 참 사랑했습니다. 이 뜻깊은 벨베디어에서 2016년 여름 '뉴욕 양키스타디움대회 40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40년 전인 1976년 대회는 통일교회와 문선명, 한학자를 전 세계에 알린 기념비적 대회였습니다. 또한 혼돈과 타락에 빠졌던 미국을 일깨운 중요한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와 문 총재는 동양에서 온 신흥 종교의 창시자로 소수에게만 알려져 있었으나, 반백년이 흐른 지금에는 전 세계가 문선명을 '독생자 메시아'로, 한학자를 '독생녀 우주의 어머니'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40주년 대회를 '하나님이 축복한 미국 가정축제((God Bless America Family Festival)'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에 사는 식구 3천여 명이 이 행사를 기리기 위해 벨베디어에 모였습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노래 <그대는 나의 태양(You are My Sunshine)이 흘러나오자 우리 모두는 숙연하면서도 감격에 겨워 그날의 감동을 되새겼습니다. 나는 감동을 넘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직도 많다는 것을 식구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나선 청교도정신이 바로 미국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세계를 보듬기보다는 이기주의와 퇴폐문화가 만연했습니다. 나는 미국의 건국정신을 되새기고 참다운 책임을 일깨우기 위해, 혼신을 다해서 청년들과 지도자들을 가르치며 많은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럼에도 미국은 하늘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79억 인류가 평화롭고 행복한 세상을 이루고, 새로운 심정문화 혁명을 일으켜 하나님의 사랑 앞에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1976년 6월 1일의 양키스타디움대회를 어제 일처럼 기억합니다. 미국 각지는 물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뉴욕 양키스타디움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날씨는 우리 편이 아니었습니다.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쳐 혼란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또 우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스타디움 밖에서 대회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여 무척이나 소란스러웠습니다. 자칫 폭동이라도 일어 날 것 같았습니다. 연설을 듣기 위해 모여든 사람은 5만 명이 넘었습니다. 돌풍과 함께 쏟아진 비가 대회장을 엉망으로 만들었음에도 의연하게 등장한 우리 부부는 5만 명의 청중뿐만 아니라 전 미국인, 나아가 전 세계인에게 경종을 올렸습니다. 미국 건국 200주년을 기념해 '미국은 하나님의 소망'이라는 주제를 내걸고 "공산주의의 위협과 청소년의 윤리적 파탄을 막지 않고서는 미국에 희망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문 총재가 "나는 미국의 의사요 소방관으로 왔다"고 힘주어 말하자 청중들은 큰 박수로 응답했습니다. 그동안 쉬쉬하면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부끄러운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미국이 안고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했습니다. 행사가 열리기 두 달 전부터 우리 식구들은 전 세계에서 기도를 올렸고, 미국으로 건너온 식구들은 하루도 쉬지않고 곳곳을 다니며 열심히 대회 소식을 알렸습니다. 그 60일은 잠들어 있는 미국을 일깨우는 기간이었고, 공산세력을 막아 내 민주세계를 부활시키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청소년들의 윤리적 파탄을 막아 내는 방파제가 되느냐, 못 되느냐의 갈림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소명과 달리 모진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져 대회장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현수막은 찢겨 나갔고 포스터는 물에 젖어 흘러내렸습니다. 무대의 집기마저 널브러져 그야말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빗물에 젖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스타디움 밖에서는 수천 명이 모여 온갖 야유를 퍼붓고 비난의 고함을 질렀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거센 비와 반대자들의 비난, 아우성은 오히려 우리를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에 받아 온 그간에 고난과 탄압에 비하면 반대자들의 함성은 되레 응원가로 들렸습니다. 우리는 비를 흠씬 맞으면서도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누군가 노래 한소절을 불렀습니다.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You make me happy when skies are gray." 그것을 신호탄 삼아 모두 한마음으로 <그대는 나의 태양>을 불렀습니다. 한 사람의 노래는 곧 웅대한 합창이 되어 스타디움에 가득 울려 퍼졌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빗물 섞인 기쁨의 눈물이 철철 흘러넘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곁에 찾아오셨습니다. 천지를 뒤덮고 있던 어둠이 걷히고 먹장구름 사이로 한줄기 햇살이 비추면서 대회장은 서서히 밝아졌습니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대회는 그 햇살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남편은 연단에 오르기 전 기도를 마치고 나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당신의 정성과 기도 덕분에 내가 오늘 단상에 올라갑니다." 남편은 구름 사이로 솟은 햇살보다 더 따스한 감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것은 실로 죽음의 경계선과 같은 어둠을 뚫고 광명천지로 부활한 느낌이었습니다. 나는 얼굴위에 차가운 빗방울을 떨어내고 남편에게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계 구원의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고, '구세주가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에 용기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 믿음과 용기로 대회는 큰 성공을 거둬 미국 역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통일교회 선교 역사는 물론 모든 종교 역사에서 위대한 발자국을 남긴 대회였습니다. 미국인들이 잊고 지냈던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기 위한 우리 부부의 믿음과 원리운동이 미국을 감동시켜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나는 청평 천정궁을 지을 때 수선화를 여러 모양으로 조각했으며 정원에도 많이 심었습니다. 장미나 백합과 달리 강인하고 아름다운 수선화를 많이 사랑합니다. 지금도 겨울 잔설이 녹기도 전에 솟아오르는 새싹을 보면 양키스타디움대회가 떠오릅니다. 북풍한설을 이겨내고 새롭게 소생하여 가장 먼저 봄이 왔음을 전하는 수선화는 우리의 평화통일운동에 큰 의미를 지닌 상징적인 꽃으로 내 마음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P162~167) 푸른 잔디밭 위로 내리는 여름비
미국 팝가수 제임스 테일러가 부른 노래 중에 <Line 'Em Up>은 1974년 닉슨 대통령의 하야를 그린 곡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Yeah, big Moon landing, peaple are standing up." 여기서 'big Moon'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남편 문선명 총재를 가리킵니다. 양키스타디움대회가 열리기 5년 전인 1971년 우리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세계는 꼭 나침반을 잃어버린 난파선과 같았습니다. 공산주의의 위협이 갈수록 심해졌고, 기독교는 서서히 힘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무너진 성도덕으로 인해 참된 삶의 목적과 목표를 잃고 방황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온 청교도들이 피땀으로 건국한 미국은 그 소명을 잊고 퇴폐문화로 얼룩졌습니다.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사건으로 민심이 사분오열로 갈라져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도 정치인들은 닉슨의 하야를 요구했습니다. 전 세계가 덩달아 설왕설래했는데, 나는 그 사건이 선량한 사람들에게 참혹함을 알려 줄 것을 잘 알기에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우리 부부는 미국 국민들을 향해 "용서하라, 사랑하라"고 외쳤습니다. 닉슨 대통령 한 사람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미국인 모두의 각성을 촉구하는 메세지였습니다. 나날이 밀려오는 공산세력의 적화 야욕을 막아 내기 위한 외로운 외침이었습니다. 미국인들의 메마른 심령에 성령의 불을 붙여 하나님의 사상을 각성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지 1년이 겨우 지난 1972년 겨울, 뉴욕에서 '하나님의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때 세계의 현실을 식구들에게 알려 주고 우리가 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도 들려주었습니다. "민주세계는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절박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위기를 타개하려면 우리가 적극 나서야 합니다." 우리 부부는 곧바로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샌프란스시코,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청년들을 모아 통일십자군(One World Crusade)을 만들어서 불같은 열정을 품고 세계를 일깨우라고 독려했습니다. 1974년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한 해였습니다. 닉슨 대통령이 "꼭 만나기를 원한다"는 연락을 해와 우리는 백악관으로 갔습니다. 초조해하는 그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들려주고, 미국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준엄히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어 32개 도시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습니다. 처음에 미국인들은 당혹해했습니다. 그러나 차츰 우리의 뜻을 이해하고 감동을 받아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우리의 순회 연설은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집회로 정점을 찍었습니다. 미국에서 열린 통일교회의 첫 번째 대강연회이자 미국 역사상 가장 놀라운 기록이었습니다. 3만여 명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음에도 2만여 명이 입장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 돌아가야 할 만큼 대성황이었습니다. 우리는 대회의 주제를 '기독교의 새로운 장래'로 정했습니다. 뉴욕은 미국의 중심 도시이고 매디슨스퀘어는 뉴욕의 중심부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타오른 하나님을 향한 불길은 전 미국으로 퍼져 나갔으며 지구촌을 밝히는 햇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 온 지 3년여 만에 매디슨스퀘어가든집회를 통해 만민을 해방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렸습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미국과 전 세계를 감격케 하는 대회를 연이어 두번이나 열었습니다. 건국 200주년에 맞춘 뉴욕 양키스타디움대회와 워싱턴DC 모뉴먼트대회였습니다. 6월1일 양키스타디움대회의 성공에 힘입어 워싱턴에서 모뉴먼트대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국 정부와 종교계가 총공격을 퍼부었고 언론들은 헐뜯고 비난하기 바빴습니다. "백악관과 국무성에서 반대가 심합니다." "모든 신문이 우리를 헐뜯느라 지면이 모자랄 지경입니다." 양키스타디움대회 때는 12개 단체가 공격을 퍼부었는데, 워싱턴 대회에는 30여 개가 넘는 반대파들이 똘똘 뭉쳐 공격을 해왔습니다. 공산당까지 가담해 대회 자체를 무산시키려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치의 두려움이나 망설임 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승리를 위해 생명을 걸고 대회를 감행했습니다. 대회 40일 전에야 천신만고 끝에 집회 허가가 났습니다. 그 40일은 심정적으로 40년보다 길고도 막막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늘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너무 골몰한 나머지 아침을 저녁으로, 저녁을 아침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드디어 1976년 9월 18일 워싱턴 모뉴먼트광장에서 미국 건국 200주년 대강연회가 열렸습니다. 30여만 명이 구름처럼 모여든 광경은 실로 기적적인 장관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모뉴먼트대회는 통일교회를 선전하거나 문선명과 한학자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열린 대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내부적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심지어 테러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식도 들려왔지만 우리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깊은 기도를 올리고,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형장에 나가는 것보다 더 무거운 마음으로 행사장으로 향했습니다. 전 인류를 감동시키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며 대회장에 들어섰습니다. 그 기도와 정성은 대회장에 모인 30여만 명을 넘어 전 미국인에게, 지구촌 모든 사람에게 어둠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미국 언론과 온 국민이 통일교회에 반대했지만 우리는 그 반대를 극복하고 대회를 성공시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낯선 땅 미국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세 차례의 대회를 성황리에 마쳐 하나님이 소망하시는 성스러운 뜻을 이루었습니다. 1974년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집회와 1976년 양키스타디움대회 그리고 워싱턴 모뉴먼트대회에서 참다운 승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영광은 우리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촌 온 인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미국에 도착해서 짧은 기간에 그처럼 넓고 깊은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았습니다. 미국인들이 종교성을 회복해 가슴속에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는 호소가 큰 공감을 받았습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청년들이 도덕성을 되찾아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정성을 다한 것도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처음에 그들은 동양에서 온 우리 부부에게 별반 호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통일원리'라는 처음 듣는 단어를 낯설어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 원리가 진리임을 깨닫고 차츰 우리 식구가 되었습니다.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간 원리말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종과 직업, 나이, 학력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그들 삶의 핵심 축이 되었습니다. 미국 전역을 다니며 학교를 세우고, 신문사를 만들고, 봉사단체를 조직하고, 리틀엔젤스 공연을 했습니다. 그 길목마다 선교사들의 피와 땀,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쉬지 않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2016년 여름에 열린 '뉴욕 양키스타디움대회 40주년 기념식'은 그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는 날이었습니다. 나는 40년 전의 위대한 승리에 만족해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푸른 잔디밭 위로 내리는 여름비를 맞으며 이제 다시 신발끈을 동여매고 평화의 참어머니로서 희망과 행복의 평화세계를 만들어 가야한다는 소명을 가슴 깊이 새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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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8-178) 댄버리에 울려 퍼진 승리의 노래
" 통일교회는 물러가라." 앞장선 사람이 외치면 그 뒷사람도 덩달아 목소리를 높입니다. " 청년들을 세뇌시키는 통일교회를 규탄하라!" 이런 비난과 반대는 늘 우리 부부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습니다. 특히 1970년대에 워싱턴 모뉴먼트대회가 불씨가 되어 미국에서 통일원리가 들불처럼 번져 나가자 우리에게 반발하는 움직임이 조직적으로 일어났습니다. 하원의 도널드 프레이저 의원이 앞장서 국제관계소위원회를 만들어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통일교회를 제물 삼아 상원의원에 출마하겠다는 정치적 야심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자신이 판 함정에 스스로 매몰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세력은 쉽게 단념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문 총재는 1981년 10월 ' 탈세' 혐의로 뉴욕 연방지방법원에 여러 차례 출두했습니다. 그때마다 성명서를 통해 "이번 사안은 인종차별과 종교적 편견의 결과"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미국과 세계 인류를 위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왔기에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은 우리를 헐뜯기에 바빴습니다. 우리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습니다. 미국의 권력을 등에 업은 공격과 비난에 굴복할 우리 부부가 아니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는 다윗처럼 절대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서 대응했습니다. 그럼에도 고난의 십자가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문 총재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뉴욕 연방지방법원은 1982년 12명의 배심원단을 꾸렸습니다. 그전에 우리는 배심원에 의한 판정이 아니라 판사 재판을 요구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미국 정부의 의도대로 1982년 5월 18일 유죄 평결이 내려졌습니다. 헌금 160만 달러의 이자 11만 2,000달러에 대한 소득세와 5만달러에 상상하는 주식배당금 세금으로 1973년부터 3년간 7,300달러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었습니다. 그리고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징역 18개월과 벌금 2만 5000달러를 선고한다." 유죄가 선고되자 오히려 미국 종교계와 민간단체들이 '종교에 대한 명백한 탄압' 이라며 곳곳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통일운동에 관해 우호적이지 않았던 기성 교회에서 지지성명을 발표하는 등 우리를 옹호하고 나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무죄청원서를 제출했고, 재판에 항의하는 종교자유대회도 거의 매일 열렸습니다. 종파를 떠나 많은 양심적 인사들이 종교 탄압을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으나 1984년 5월 대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은 그대로 확정되었습니다. 문 총재는 1984년 7월 20일 미국 코네티컷주 댄버리연방교도소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겉으로는 탈세를 문제 삼았지만 그 속내는 통일교회의 무서운 성장을 제재하려는 저의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정부 권력을 이용한 교묘한 종교 박해였습니다. 7300달러에 대한 형벌이 무려 징역 18개월과 벌금 2만5000달러라는 판결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미국 곳곳에서 수천 명이 항의했고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일주일씩 문 총재와 함께 옥에 갇힐 것을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문총재는 미국을 영적 죽음으로 부터 일깨울 수 있다면 오히려 감옥에 가기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전 세계의 통일교회 식구들은 걱정과 눈물로 매일 밤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이 가시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요? 그러나 우리 부부는 의연하게 식구들을 위로했습니다. 이제부터 새로운 세계가 시작될 거에요. 이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우리와 함께 할 것이고, 세계 모든 곳에 희망의 북소리가 울려 퍼질 것입니다. 1984년 7월 20일은 나의 역사 가운데서 영원히 지우고 싶은 하루였습니다. 문 총재가 집을 떠나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되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 순간에도 식구를 격려하며 희망을 심어 주었습니다. 밤 10시에 이스트 가든을 출발해 댄버리 교도소까지 여러 식구가 함께 갔습니다. 나는 이미 강하게 마음을 먹었기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분노와 슬픔을 쏟아내는 식구들에게 문 총재는 당부했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세요." 교도소로 들어가는 남편의 등 뒤로 진한 어둠이 내려앉았습니다. 식구들은 문 총재가 다시 되돌아 나올 것만 같은 마음에 교도소 입구에 한참이나 서 있었습니다. 나는 식구들을 다독여 발걸음을 돌리게 했습니다. 남편이 이국땅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건만 나는 저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그리고 위하여 살라." 우리 통일운동의 가장 근본은 '위하는 삶'입니다. 사지의 경지에서 자신을 희생함은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상대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댄버리정신입니다. 댄버리정신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잃어버린 처지에서도 하늘의 뜻에 따라 희생하고 용서하며 더 큰 가치를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밤길은 어두웠지만 내 마음은 어둡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건너와 10여 년 동안 내가 겪은 일들은 강가의 조약돌보다 더 많았습니다. 세계를 뒤흔든 세 번의 대집회를 비롯해 대륙을 횡단하는 순회강연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 힘든 노정만큼이나 문 총재의 억울한 수감도 괴로운 일이 분명했습니다. 남편의 투옥 자체가 감내하기 쉽지 않은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때 남편은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였고 미국이란 나라에서 혼자 수감생활을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유색인종에다 소수종교의 지도자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박해였기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나는 막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몸과 마음이 몹시 힘들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없는 공백 또한 내가 메워야 했습니다. 문 총재는 다음 날 새벽 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소명에 따라 기독교에 봉홧불을 붙여라, 이 말을 식구들에게 전해 주어요." 나는 그 말을 식구들에게 전하면서 우리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들려주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후의 기회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일은 물론이고, 또한 지금 지시한 내용까지 온갖 정성과 적극적인 활동으로 꼭 성취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정성에 하늘부모님이 감동하고 사탄은 항복할 것이며, 역사는 새 시대를 맞이 할 것입니다. " 그러나 '불행은 한꺼번에 온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좋지 않은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미국에서 우리 부부를 도와 활동하던 핵심 지도자가 갑작스레 행방불명된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 납치되어 뉴욕의 어느 지하실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워싱턴타임즈>를 통해 공산주의 활동은 물론 이념까지도 승공사상으로 반박하자 이에 대한 보복조치로 문 총재가 없는 틈을 타서 한 것입니다. 또 통일교회가 미국에서 꾸준히 공감을 받아 신도들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악감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 그를 해할 생각뿐이었습니다. 문 총재가 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내가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나는 우선 침착하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납치된 그의 귀에 내 목소리가 들리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친분이 있던 법무장관이자 상원의장 오린 해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우리 지도자를 납치한 것은 사적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며, 돈이 필요해서도 아니예요. 공산주의자의 소행이며, 종교에 대한 차별적 공격입니다" "즉각 FBI를 통해서 수사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FBI가 수사를 시작하면 범인들이 오히려 납치된 사람을 해칠 수 있으니 기다렸다가 협상을 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간곡한 심정으로 담판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럼에도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납치범들은 그를 심하게 구타하고 전기고문을 해서 기절시켰습니다. 그는 차가운 지하실 바닥에 쓰러져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시간이 없다. 저들은 오늘 밤까지는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부터 열두 시간 이내에 그곳을 어떻게 해서라도 탈출해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 그는 의식을 잃었음에도 꿈속에서 나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지혜를 발휘해 납치범들과 대화를 시도한 후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살아 돌아온 그가 자초지종을 들려주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온 참어머니의 목소리는 저에게 하나님의 음성이자 계시였습니다. 제가 벌떡 일어나 저들에게 대항할 힘과 지혜를 주었습니다. " 만약 내가 납치 소식을 듣고 발만 구르면서 시간을 놓쳤거나 범인들과 협상하기 위해 기다렸다면 더 큰 불행을 당했을 것입니다. 또한 납치범들은 통일교회를 굴복시켰다고 기고만장해서 세상을 향해 떠들어 댔을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사탄의 수법이자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힘든 싸움을 벌이면서 단호하게 협상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댄버리 옥고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우리 부부는 그 일을 승리로 바꿨습니다. 어느 때보다 힘든 시간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가장 설레고 사랑과 연민의 정이 깊어지는 나날이었습니다. 남편 역시 애틋한 마음을 나누는 다정다감한 하루하루였습니다. 남편은 새벽 5시 기도를 마치면 교도소 공중전화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하고 부르는 것이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습니다. 면회 시간이 다가오면 남편은 언덕까지 나와서 나를 기다렸습니다. 어떤 때는 남편이 교도소 안에서 바닥 청소나 식당 설거지를 하다가 초췌한 모습으로 면회실에 들어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느 아내가 마음 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서러움을 억누르고 항상 환한 미소로 맞이했습니다. 나는 면회를 갈 때 막내 정진이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막 두 살 난 아기를 받아 안으며 남편은 즐거워했습니다. 잠시의 면회가 끝나면 남편은 밖으로 나와 우리가 탄 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전송해 주었습니다. 나는 오픈카를 타고 다녔는데, 면회를 가서 언덕길을 오를 때면 남편은 우리가 도착할 시간에 보일 만한 장소에 미리 마중 나와 있곤 했습니다.그때는 그리운 마음에 환한 웃음을 짓고 손을 흔들지만, 언덕길을 내려올 때는 눈물이 쏟아질까봐 바라보지 못하고 손만 흔들어 보이곤 했습니다. 남편도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 슬픔과 억울함을 딛고 나는 문 총채가 옥에 갇힌 13개월 동안 교회와 섭리를 이끌었습니다. 전 세계 모든 식구가 안정된 가운데 흔들림 없는 신앙생활을 이어 가도록 했습니다. 처음 문 총재가 옥에 갇혔을 때 세계의 언론들은 과연 통일교회가 존속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사라져 버릴 것인지 비아냥거리며 입방아를 찧었습니다. 몇몇 언론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섣부른 장담을 했습니다. 통일교회는 스스로 와해될 것이며, 신도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신도들이 부쩍 늘어 났습니다. 인류 구원과 종교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문 총재의 사연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문 총재가 수감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국제과학통일회의(Internarional Conference on the Unity of the Sciences, ICUS)가 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부부가 12년 전에 창설한 이 대회는 세계의 과학자들이 모여 과학과 기술의 미래를 토론하는 큰 행사였습니다. 창설자가 수감된 상태에서 과연 대회가 열릴수 있을지 근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열리지 못할것이다 라고 비웃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나는 한마디로 논란을 잠재웠습니다. 대회는 반드시 열려야 합니다. 1984년 9월 2일, 제 13차 국제과학통일회가 워싱턴 DC에서 열렸습니다. 전 세계 42개 나라에서 250여 명의 과학자가 참석했습니다. 나는 과학자들을 만나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연단에 올라 의연하게 환영사를 낭독했습니다.창설자가 없어도 국제대회가 성공리에 끝나자 과학자들은 고마움을 표했고, 교회 식구들은 몹시 감복했습니다. 국제대회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985년 여름, 세계평화교수협의회가 국제대회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역시나 창립자가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회 개최가 가능할지 걱정이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선뜻 "변함없이 개최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대회 장소는 스위스 제네바로 결정되었습니다. 대회 의장을 맡은 미국 시카고대학의 정치학자 몰턴 캐플런 박사가 댄버리로 우리 부부를 만나러 왔습니다. 문 총재는 대회의 주제를 '공산주의의 종언,소련의 멸망'으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케플런은 반대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공산주의가 막강한 세력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사회학자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 총재는 더욱 강경하게 말했습니다 . "공산주의는 망하고, 소련은 멸망한다! 이 사실을 세계의 학자와 교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포하세요." 케플런은 망설이다가 물었습니다 "그 말 앞에 'maybe (아마도)'를 붙이면 어떻겠습니까?" "안돼요, 내 말 그대로 하세요." 면회를 마치고 돌아갈 때 케플런은 몹시 고심했습니다. 그때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학자였기에 공언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공포였습니다. '아마도'라는 말을 넣겠다고 세 차례나 말했습니다. 나는 케플런에게 아무 걱정 말고 문 총재의 권고를 따르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교회 간부들도 조심스럽게 나에게 권했습니다. "'멸망'이나 '몰락'이라는 말 대신 부드러운 단어로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수년 내에 공산주의가 소련에서 몰락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85년 8월 13일 제네바에서 세계평화교수협의회 국제대회가 열렸습니다. 세계의 저명한 대학교수 수백 명이 모인 역사적인 자리에서 '공산주의의 몰락'이 선포되었습니다. "공산주의는 5년 이내에 멸망합니다!" 참석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확신을 가지고 선포한 것에 놀랐고, 대회장 바로 앞 길 건너편에 소련대사관이 버티고 있음에도 소련제국의 멸망을 장담한 것에 또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후 우리의 예측대로 소련의 공산주의는 막을 내렸습니다. 그때 우리 부부는 '섣부른 예언가'로 놀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유명한 사회학자와 교수들은 우리의 선포를 드세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소련이 해체되자 그들은 우리의 예측에 놀라움과 감탄을 그치 못했습니다. 옥에 갇힌 문 총재와 나는 세계의 앞날을 위해 하루도 쉬지 않고 그렇게 일을 했습니다. 억울한 옥살이라 해도 남편은 모범적인 몸가짐과 부지런함으로 재소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수감자들이 처음에는 '동양에서 온 이단종교 창시자' 라며 비웃고 시비를 걸었으나 곧 참스승으로 여겼습니다. 남편은 미움과 증오, 다툼이 지배하는 교도소를 변화시켜 사랑이 흐르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재소자들은 남편을 '옥중의 성자'라 불렀습니다. 간수들과 교도소 관리들도 감복했습니다. 남편은 모범수가 되어 1985년 8월 20일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옥에 갇힌 것은 내가 갇힌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남편의 옥살이는 2천 년 전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 섰다가 혈혈단신으로 십자가에 내몰린 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언제 문 총재를 위해할지 모를 세력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넘보고 있었습니다. 소련 KGB와 북한 김일성의 사주를 받은 적군파가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수감자들 가운데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불손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남편의 안위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것과 다름없는 현대판 골고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그 고난을 겪으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자 몸과 마음을 다했습니다. 그런 고달픈 인생행로를 묵묵히 걸어 평화와 우주의 어머니이자 인류의 중보자 독생녀로서 소명을 다해 나왔습니다.
(P179~184) 고아들을 누가 품어야 할까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나는 이 성경 문구가 내가 걸어온 길을 압축해 표현한 말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생길도 알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은 제 부모가 있다 해도 마치 고아와 같습니다. 나는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 긴 세월을 지나왔습니다. 1990년대 초만 해도 지방에서 행사나 강연을 한다고 하던 사람들은 첫머리에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특히나 여성들을 상대로 한 강연이라면 아예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때만 해도 여성들의 목소리는 작았고, 남녀평등은 허울에 불과할 뿐 어디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나는 여성이 온전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우리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서, 특히나 하나님의 딸로서 주어진 역할을 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랫동안 고심했습니다. 그 고심의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 세계평화여성연합입니다. 1992년 5월 인천을 시작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40개 도시에서 창설대회를 차례차례 열어 갔습니다. 나는 대회에서 '이상세계의 주역이 될 여성'을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대회를 열기전에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올까?' 걱정이 많았으나 가는곳마다 인파로 가득 찼습니다. 대회의 주제가 여성임에도 남성 또한 많이 참석해 내가 주창하는 '여성시대'가 펼쳐지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국 대회가 마무리되자 나는 다음 일정으로 일본을 잡았니다. "이 말을 일본 여성들에게도 들려주어야 해요." "그렇긴 해도·······한국어로 하면 원래의 뜻이 잘 전달되지 않을 텐데요." "그럼 일본어로 하면 되지요." "연설문도 길고······· 일본어도 잘 모르시고, 시일도 촉박하고·······" 나는 사나흘 동안 연습해 연설문을 모두 일본어로 준비했습니다. 일본 도쿄돔에 5만여 명이 모였습니다. 일본 수도에서 내가 처음으로 일본말로 강연을 한다고 하니 역시나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집행부에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무대옆에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간부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연단에 올라 입을 열자마자 일본 사람들은 너무 놀라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감격에 겨워 여러 차례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어디선가 틀리겠지, 어디가 틀릴까?' 기다리다가 내가 한마디 한마디 또렷하게 말할 때마다 놀라움에 사방에서 탄성이 터졌습니다. 나는 지치지 않고 5개 도시를 순회하며 일본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통역을 쓰면 훨씬 쉬웠을 테지만 나는 일본어로 된 강연문 전체를 완벽하게 소화했습니다. 일본 국민들을 고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 철저히 준비했습니다. 고아가 되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내가 일본말로 또박또박 일러 주었습니다. "이제 미국으로 가야해요." "힘들지 않으시겠어요? 하루라도 푹 쉬고 가면 좋을 텐데요. "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 몸 편하자고 쉬면 안되지요·······" 태평양을 건너 미국 땅으로 들어가 8대 도시를 순회하면서 '여성시대 '가 우리 곁에 다가왔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워싱턴에 모인 사람들은 내게 깊은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나에 대한 인식이 한국에서 온 '문선명 목사의 부인'에서'여성 대표로서의 한학자'로 바뀌었고, 나아가 그들은 나를 '세계를 구원하는 여성 지도자 '로 추앙했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은 필리핀 대회였습니다. 전날 마닐라로 가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서 비행기를 탔습니다. 잠시 눈을 붙였을 때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꿈을 꾸었습니다. 아주 또렷하게 예쁜 아기를 보며 꿈속에서 혼잣말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아기를 낳을 나이가 아닌데······?" 마닐라 공황에 도착하면서 그 꿈을 잊었는데, 마침 그날이 카톨릭 기념일로 원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었습니다. 마닐라 시내에서 한 여성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노랑 저고리를 입은 내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순간 '이분이 마리아의 사명을 하는 분이다' 라는 생각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대회장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내 연설을 듣고 감복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오늘처럼 성스러운 날에 필리핀 땅에 오신 저분이 진정 마리아이시다" 큰 어려움과 보람이 함께한 곳은 마지막 강연지 중국이었습니다. 개방정책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대회가 순조롭게 열릴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처음에는 공산당이 불허했고 군부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정치대회가 아니라고 설득하자 " 그러면 먼저 원고를 검열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당에서 원고를 검열하는 데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이런 내용은 곤란합니다. " 그들은 몇 번이나 훼방을 놓았으나 나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와 무관하게 '여성'이 대회의 초점임을 강하게 내세우자 결국 저들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덩샤오핑 전 주석의 아들 덩푸팡은 장애인으로 50만 회원을 둔 중국 장애인협회 회장이었습니다. 대회 전날 그곳 사람들이 우리를 초청해 환영회를 열어 주었습니다. 체제와 이념을 떠나 서로를 격려하는 화합의 자리였습니다. 저녁에는 전국부녀연합회에서 우리를 또 초청했습니다. 처음에는 잘 모르는 처지라 서로 어색했지만 곧 친구가 되어 즐겁게 노래를 부르며 화동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환영회와 강연은 별개였습니다. 나는 처음의 원고 그대로 거침없이 강연을 했습니다. 공산국가에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한 번도 아니고 수십 번이나 나오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나는 담담했고, 응당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그런 강연을 했다는 것 자체가 가히 혁명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1992년 한 해 동안 세계 113곳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한국을 떠날 때 각 도시에 어울리는 옷을 여러 벌 준비해 갔는데 돌아올 때는 한 벌도 없었습니다. 거의 1년 만에 집으로 돌아오자 문 총재는 "수고했어요 "라고 말하다가 문득 물었습니다. "그런데 결혼 반지는 어디에 있소?" 나는 내 손을 보았습니다. 일본으로 떠날 때 끼고 있었는데 없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습니다. "반지가 없네--------누군가에게 주었겠지요." "누굴 주었소?" "주긴 주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요. 받은 사람이 잘 간직하고 있거나, 아니면 팔아서 살림에 보태겠지요." "준 것은 그렇다 치고 누굴 주었는지도 모른단 말이오?" 나는 늘 그래 왔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우리 부부는 성혼식을 올린 후 신혼여행을 가지 못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나 남편은 늘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세계순회 중 네덜란드에 들렀을 때 아끼고 아낀 돈으로 큰마음 먹고 작은 다이아몬드를 사왔습니다. 그렇게 의미 있는 반지를 나는 누군가에게 선뜻 내주고는 기억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주기도 잘 주지만, 주는 즉시 그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자기 몸에 지닌 것을 주고, 사랑을 주고, 심지어 생명까지 주어도 잊어버리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일 가까이 갑니다. 나는 발이 부르틀 때까지 세계를 돌며 여성의 참다운 가치와 사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들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참부모를 알지 못해 천애고아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참부모를 모시고 살아갈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린 고아에서 벗어나 참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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