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빛고을 향토사 이야기 7 >
항일독립투사 '엄순봉 의사' 이야기
이 글은 조국 광복을 위해서 구차스런 삶보다 떳떳한 죽음을 택한 우리고장의 자랑스러운 열사인
'김도현.남자현.엄순봉' 세 분은 영양군 '삼의사'입니다. 그런데 김도현 선생과 남자현 지사는 생가를
성역화 하여 공적을 기리고 있는데, 엄순봉 열사는 별다른 기념사업 없이 잊혀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엄순봉 의사'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항일 독립운동 열사 엄순봉 의사는 1903 년 영양면(今영양읍) 대천동(今대천리) 옥산마실에서 출생
하였으며 호는 '추수' 이고 만주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때는 1938 년 4월 9일 우리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왜적의 발길에 짓밟힌지도 어언 20여년이
지났습니다.
화창한 봄날이건만 산과 들에 피어있는 꽃들에겐 웃음이 사라졌고 하늘을 날으는 새들도
노래를 잃었습니다.
처마끝이 뜨락에 닿을듯 나지막히 엎드린 초가 지붕이 몇 채 늘어선 동네 앞 한길을
한 젊은이가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큰 죄를 지은 모양인지 두 손을 수갑으로 묶인 채입니다. 핏기 없이 파리하게
여원얼굴하며 남루한 옷차림이 감옥에서 오랫동안 고생을 한 모습이 잘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난히 맑은 눈동자로 무엇을 뚫을듯 한곳만을 바라보며 두려움이란 찾아볼 수
없이 당당하게 걸어 가는 모습은 끌려가는 죄수가 아니라 마치 일본 순경이 도리어
끌려가는 느낌을 주게 했습니다.
그 광경은 누가 보든 이 젊은이가 나쁜 죄를 짓기는 커녕, 오히려 예사 인물이 아님을
한눈에 알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젊은이는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 피끓는 젊음을 나라 찾는데 바쳐온
독립 투사입니다. 스므살이 채 못되는 어린 나이로 시작해서 '내 한 목숨 나라 찾는데
바치리라'는 굳은 결심이 한번도 변한 적이 없었습 니다.
지금 사형장으로 향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젊은이 마음에는 후회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다만, 나라를 되찾는 날을 볼 수 없는 안타까움만이 있을뿐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보람찬 지난 날이었습니다. 남달리 용감하고 조국애에 불타던 젊은이라, 그 활동이
눈부셨습니다. 만주 벌판의 호랑이라 불리우던 김좌진 장군 밑에서 장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김좌진 장군의 무섭고도 인자 하신 모습이 떠오릅니다.
젊은이는 빙긋이 웃음을 띄었습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빨리 가지 않고, 일본 경찰이 짜증섞인 목소리로 재촉했습 니다.
젊은이는 들은 척도 않습니다. 4년동안 옥살이를 하면서 젊은이는 갖은 고문을 당했
습니다.
“네 동지들이 누구냐? 한 사람만 말하면 살려 주겠다."
일본 경찰은 듣기 좋은 말로 꼬였습니다.
“나 혼자다. 더 묻지 마라."
언제나 한 마디 뿐 젊은이는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한사람의 독립 투사라도 희생
시킬 수 없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독립 운동에 몸 바침으로써 우리나라는 하루라도
빨리 독립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살자고 입을 열다니 당치도 않는 일이다.
마음 속으로 다시 다짐 하였습니다. 일본경찰은 더 이상 물어봐야 젊은이에게서
아무것도 알아 낼 수 없음을 알고 사형 시키기로 했던 것입니다.
젊은이의 기분은 오히려 흐뭇합니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그대로 실천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만주 벌판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한국 총 연합회를 조직하여 청년 회장이
되어 동지들과 동포들을 가르치던 일! 만주 사변이 일어나서 일본군의 감시가
심해져서 부득이 상해로 이동하게 되었을때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김좌진
장군과 전몰 동지들의 무덤을 찾아 눈물로 이별 하던 일! 반역자를 몰아내던
통쾌한 순간! 일본 정부의 중요 인물 암살 계획이 실패로 돌아 가던 때의 안타
까움! 온갖 기뻤던 일이 변갈아 떠 올랐다간 사라지곤 합니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말이 없는가?" 일본 법무관이 물었습니다.
“내 할 바를 다 했으니 할 말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너회들에게 한마디 충고해
주겠다. 너희들은 바른 길을 걷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꼭 망할 것이다.
지금이 라도 마음을 돌려 바른길을 걷는다면, 우리 나라가 독립도 되지만
너희들에게 덕이 될 것이다." 하고는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고
유유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셨습 니다.
이 분이 바로 추수 엄순봉 선생님이십니다.선생님은 1903년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 옥산마실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해방이 되자 나라에서는 선생의 높은 애국심 을 기려 돌아가신 영혼앞에
건국 공로 훈장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영양호국공원에 '엄순봉의사기적비'가
있고, 태어나신 마을 생가터 앞에 작은 표석 하나뿐입니다. 생가 복원으로
공적을 살피고 선생님의 정신을 배울 수는 없을까요?
* 자료정리 : 영양향토사연구회 박원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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