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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벧후 1:5-11 “절제의 집을 짓자”
새동산교회 주일 낮 예배 Feb/20/2005 황종상 목사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신앙의 집짓기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들 얼마나 집을 잘 지어가고 있습니까? 몇 층까지 지었습니까? 신앙은 마치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기초를 든든히 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 되었는가 하면 그게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계단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에서 사랑까지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신앙인, 건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설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계를 밟는 것, 이것은 물론 계급이 아닙니다. 믿음보다 더 좋은 것은 덕이고 덕보다 더 좋은 것은 지식이고 지식보다 더 좋은 것은 절제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믿음을 비롯한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갖추어졌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기초위에 절제의 집을 한번 지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절제는 무엇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어느 선에서 멈추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도,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도, 가고 싶은 곳이 있을 때도, 입고 싶은 옷이 있을 때도, 타고 싶은 차가 있을 때도, 그 욕망을 누르는 것, 이것이 절제입니다. 적절한 선까지 지키는 것이 절제입니다. 절제할 줄 아는 사람은 참 멋있습니다. 요즘은 스포츠가 대중화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아이들이 운동을 한다고 하면 부모들이 많이 말렸습니다. 운동하면 공부 못하니까 공부해야한다고 운동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무엇이든 하나만 잘하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궉채이라고 하는 소녀는 인라인을 잘 타서 성공한 사람입니다. 인라인을 잘 타든지 춤을 잘 추든지 노래를 잘하든지 하나만 잘하면 됩니다.
운동을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호흡조절입니다. 역도선수들이 역기를 들어 올릴 때 보면 한참동안 숨을 고른 후에 들어 올립니다. 달리기하는 선수들이 숨을 어떻게 쉬느냐에 따라서 등수가 달라집니다. 수영선수들이 숨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기록이 다릅니다. 선수들에게 호흡조절은 운동의 기본 훈련입니다. 믿음의 훈련도, 신앙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인의 필수적인 연습은 바로 영적 호흡조절에 있습니다. 얼마만큼 자기를 조절하느냐, 바로 이것이 성공과 실패의 열쇠입니다. 절제는 곧 조절을 말합니다. 운동선수가 호흡을 조절하듯,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조절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제해야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갈5:24말씀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말합니다. 정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욕, 감정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고 싶어도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그 하지 말아야할 것들을 알고 조절하는 것이 절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절해야하는 것 중에 하나가 감정조절입니다. 감정은 인격의 3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지정의라고 할 때 감정은 지식, 의지와 함께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감정이 있기에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지요. 감정이 있기에 우리가 말하고 표현하며 삽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감정의 아름다움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때로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셨고, 분을 낼 때도 있었습니다.
요즘은 목회를 해도 감성에 호소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을 합니다. 찬양은 다분히 감성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감성을 자극하면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받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다만 감성을 자극할 때는 이성적인 부분도 소홀히 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너무 감성 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할 뿐입니다. 감성과 이성은 균형을 이루어야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너무 감정적인 부분으로 빠져서는 안 됩니다. 감성적인 부분으로 빠지게 되면 나중에는 이성이 먹혀들어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공부는 소홀히 하게 되고 그저 찬송만 하자고합니다. 눈물로 기도만하고 말씀에 기울이는 모습이 사라지게 될 우려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대통령 선거를 할 때 노대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이분이 대통령이 된 것은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2002년 당시 월드컵 열풍이 전국을 강타하고 있을 때입니다. 4강 신화를 이룩하고는 그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대선이 있었습니다. 그 주도적인 흐름이 젊은이들에게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어른들보다 감성적입니다. 반응이 빠릅니다. 그때 광고 중에 노무현 후보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또 기타를 치는 장면도 있었습니다. 기타를 얼마나 잘 치는지는 모르지만 쳤습니다. “저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불고 눈보라쳐도 헤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저도 386세대이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 이 노래 많이 불렀습니다. 이 노래는 힘이 있습니다.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독재의 시대를 거친 젊은이들은 결집하는 것입니다. 감성이미지에서 승리했습니다. 여기에 감성이 약한 사람들은 다 넘어간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노대통령은 시대를 잘 타고 났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웅이 시대를 만드느냐 시대가 영웅을 만드느냐” 저는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많은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목회도 보면 큰 교회를 하고 안하고는 신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시대와 분위기가 어느 정도 맞으면 목회도 잘된다는 것이 입증되는 사례가 많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감정이 필요하지만 그 감정을 내가 잘 다스려야한다는 것입니다. 감정이 전부는 아닙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 필(feel)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다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부분이지요. 시간을 두고 내감정이 정확한가를 관찰해야합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람은 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정상호흡이 아니라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조절하는 힘이 신앙이요, 절제입니다.
제 아이하고 장난을 치며 놀 때가 있습니다. 씨름을 한다거나, 태권도를 한다거나, 숨바꼭질을 한다거나, 하면 어느 정도까지 하고 그만 두어야하는데 계속 하자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난이 지나친 것입니다. 도를 넘어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제가 얘기합니다. “과유면 불급이다!” 그러면 그 말을 알고는 그만합니다. 제가 워낙 과유는 불급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 편이거든요. 지나치면 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아이하고 괜히 잘 놀다가 마음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절제를 못한 것이지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한 것입니다. 어느 선까지 가다가 그만두는 것, 이것이 절제입니다.
절제를 못한 사람의 대표적인 모델이 모세입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했는데 백성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니까 그만 망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 패역한 백성들아’ 하면서 감정조절에 실패했습니다. 결국은 가장 공로가 컸음에도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감정이라는 것이 순간적인 것이기에 조절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릅니다. 살인의 대부분은 바로 이 감정을 조절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부부싸움의 대부분은 감정조절을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 중에 감정을 잘 조절하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성인군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 한 템포만 늦추면 되는데 그것이 잘 안되지요. 몇 분만 지나면 “그 말을 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텐데, 왜 그 말을 했을까?” 하고 후회할 때가 있습니다. 감정이 불 일듯 일어날 때는 입에 재갈을 물리십시오. 그것이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이 절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감정조절을 잘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입니다. 처음 그가 제자로 부름 받을 때의 별명이 ‘보아너게’였습니다. ‘우뢰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이 별명에서 보는 것처럼, 그는 급하고, 거칠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쉽게 분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마리아로 예수님과 함께 가는데, 그 성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자 요한은 “이 도시에 불을 내려서 망하게 하십시오.” 그렇게 말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거칠고 감정조절이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변했습니까?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를 그가 기록했는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이 구구절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의 사도로 변한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기질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절제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집사님 중에 별명이 만물박사입니다.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정치면 정치, 경제면 경제, 교육, 한의학, 민간요법, 풍수지리, 다 압니다. 심지어는 목회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압니다. 그래서 그를 만물박사라고 말합니다. 그분하고 있으면 듣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앞에 한의사가 있는데도 자기가 다 말합니다. 진맥은 어떻게 하는 것이고, 인삼녹용은 어떤 사람이 먹어야 좋고, 어떤 사람은 안 되고, 부인병에는 무엇이 좋고, 혼자 다 얘기하니까 한의사가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웃고만 있는 거지요. 다 아는데 무슨 할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사람이 아는 것은 많은데 절제가 없습니다. 말해야 할 때와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할 때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팔불출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사람은 팔불출이지요. 특히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자가 아니기에 날마다 감정을 조절하는 힘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될 때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은 많은데 절제가 부족하면 안 됩니다. 지식위에 절제를 배워야합니다.
우리가 조절해야할 것 중에 또 하나가 욕심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정욕’만이 아니라 ‘욕심’까지도 포함됩니다. ‘정과 욕심’입니다. 바로 욕심을 조절하고, 다스리는 것이 절제입니다. 감정만큼 중요한 요소가 욕심입니다. 왜 성경에서 욕심을 다스리라고 했습니까? 이유는 하나입니다.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통제하지 않으면 위험한 것입니다. 돈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더 가지려고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의 작가 중에 ‘테네시 윌리암스’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연극하면 이 사람의 작품을 떠올릴 만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 중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있습니다. 처음에 연극으로 만들어졌다가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아카데미상을 석권하기도 했습니다. 제목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주인공의 끊임없는 욕망의 끝이 어디인가를 날카롭게 지적해 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미국 남부 뉴 올리언즈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녀가 처음에는 욕망을 억누르며 살아가다가 동생 남편에게 강간을 당하면서 억제했던 욕망을 분출시킵니다. 결국은 미쳐서 병원에 입원하고 맙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은 누구나 욕망의 전차를 타고 싶어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적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습니다. 저도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욕심을 중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를 가지면 둘을 갖고 싶고, 둘이 있으면 셋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끊임없이 채워야 하고, 가져야 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바울이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빌4:11이하에서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나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려 잘 된 사람이 없습니다. 아간의 욕심으로 이스라엘이 전쟁에 졌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아합 왕이 있었는데 그는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왕비 이세벨의 말을 듣고는 그 착하디 착한 소작농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있는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후 그 아들요람이 활에 맞아 염통을 뚫고 나왔다고했습니다. 그 후손이 그렇게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은30에 눈이 어두워 스승을 팔지 않습니까? 그 후 목매달아 자살했는데 떨어져 창자가 터져 나와 죽었다고 했습니다. 욕심은 반드시 좋지 않은 결과를 만듭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욕심을 조절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늘 자족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삶에 감사가 있어야합니다. 의욕은 좋지만 과욕은 안 좋습니다.
셋째는 육체의 조절입니다.
갈5:19이하에 보면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 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여기 15가지가 적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욕심을 부리는 일이 이같이 많습니다. 수도원에서 수도하는 사람들은 많이 먹는 것도 죄라고 해서 먹는 것도 절제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질병이 생기는데 그 원인은 못 먹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많이 먹어서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적게 먹으면 해결되는 질병들입니다. 먹는 것도 조절해야합니다. 이것도 절제입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잘 먹습니다. 공중에 있는 것은 비행기 빼놓고 다 먹고 바다 속에 있는 것은 잠수함 빼고는 다 먹습니다. 집에서나 식당에서 식사할 때 저는 음식을 남기지 않습니다. 가나한 시절에 어른들이 음식을 남기는 것은 죄악이라고 해서 다 먹던 버릇이 있어서 배가 불러도 남기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 과하게 먹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가능하면 양이 차면 숟가락을 놓으려고 노력합니다. 감사하게도 저의 몸무게는 20년 전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음식에 대한 조절 이것도 절제입니다. 육체적인 욕심을 통제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서도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 것들입니다. 세상 친구들, 못된 습관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절제할 수 있어야합니다.
제가 늘 성도들에게 예배 잘 드리라고 말씀드립니다. 예배는 자기통제능력입니다. 세상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는 결단입니다. 7,80년대 만해도 우리나라에 권투가 유행했습니다. 홍수환 장정구 유명우 등으로 이어지는 세계챔피언들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 권투경기가 참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꼭 그 경기가 주일 저녁 예배시간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예배당으로 옮깁니다.
저는 주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때부터 어른예배에 참여했기 때문에 꼭 저녁예배에 갔습니다. 지금생각해보면 중학생은 주일저녁예배에 안가도 될 뻔 했는데 꼭 식구들과 같이 갔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저를 잘 봐 주신 것 같아요. 권투중계를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는데 그것을 과감히 뿌리치고 예배당에 가는구나. 이게 절제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는 예배시간에 축구중계가 있거나 명절이 되거나 하면 자유 함을 드릴까합니다. 함께 교회 안에서 축구경기를 본다거나 명절이 되면 각자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지내라고하거나 하는 것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절제 잘하고 예배당에 나오는 사람은 그런 자유함도 때로는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고전9:25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신앙의 본질은 승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승리해야 합니다.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바울의 권면처럼 절제해야 합니다. 최종승리를 얻기 위해 목적지를 향해가는 사람들은 절제합니다. 절제의 집을 잘 지어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