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鷗江書院 復元에 즈음하여
1. 우리나라의 서원
조선중기 이후 문학연구와 강학, 교화, 선현제향을 위하여 사림에 의해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으로 동시에 향촌자치 운영기구로서 서원이야말로 명실상부한 향촌사림의 활동장이 되었다. 1543(中宗38)년에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워 안향(安珦)을 배향한 게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다. 이후 이황(李滉)에 의해 백운동서원이 국가로부터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사액되고 서적과 전답 등 혜택과 국가의 공인을 받게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차차 사액 및 서원의 남설(濫設),첩설(疊設) 그리고 민폐가 가중됨에 따라 국가적 통제가 가해졌다. 마침내 1868(高宗5)년에서 1871(高宗8)년에 걸쳐 대원군은 서원 철폐령을 내려 전국 47개소를 제외한 전 서원을 훼철시켰다.
2. 울산지역 서원의 역사
1). 울산지역 서원의 특징
울산지역 서원은 조선시대 서원이 남설(濫設)되어 통제가 가해지던 1678(肅宗4)년에 세운 구강서원을 필두로 1848(憲宗14)년 학호서원(鶴湖書院)에 이르기까지 유력 사림과 문중에서 서원을 세워 선현을 배향하고 인재를 육성하였다. 건립유형을 보면 첫째, 사림이 주도를 한 것으로 구강서원(鷗江書院),난곡서원(蘭谷書院)등이 있고 문중 중심으로 주도한 것으로 오문(吾門)의 석계서원(石溪書院),연안차씨의 자암서원(紫巖書院),영해박씨의 치산서원(鵄山書院) 등이 있었다. 문중중심으로 했으나 지역 유림과 상관관계에 있었다. 울산서원의 특징은 지역에 배향할 만한 유현(儒賢)이 없어 인근(영천, 경주등) 출신 선현을 배향하게 된 것이다. 1868 및 1871(고종8)년 서원 철폐시 울산지역 8개 서원 모두 훼철되었다.
2). 울산서원의 현황
① 구강서원(鷗江書院) : 1678(肅宗4)년에 향토사림의 발의로 반구동에 건립되었으며 정몽주, 이언적선생이 배향되었고 1694(肅宗20)년에 사액을 받았다. 1871(高宗8)년에 훼철되었다. 2003년 132년만에 복원되었다.
② 반고(槃皐),반구(槃龜)서원 : 1712(肅宗38)년에 언양지역 유림에 의해 언양 반구대에 건립되었으며 정몽주(鄭夢周),이언적(李彦適),정구(鄭逑)선생이 배향되었고 1868(高宗5)년에 훼철되었다가 1983년 복원되었다.
③ 석계서원(石溪書院) : 1737(英祖13)년에 도(道) 유림의 공의에 의해 황룡연(黃龍淵) 위(현 신정1동)에 용연사(龍淵祠)가 창건되어 충숙공 학파선생을 배향하였으며 1782(正祖6)년 웅촌 석천리로 이건되어 사호(社號)를 석계라 하였다. 1860(哲宗11)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高宗5)년 훼철되었고 1915년 경수당(敬守堂)과 필동문(必東門)이 중건되었다. 2002년 복원되었으며 음력 9월 9일(중양절)에 봉향하고 있다.
④ 치산서원(鵄山書院) : 1745(英祖21)년에 영해박씨 주도로 두동면에 신모사(神母祠)로 건립되었으며 박제상(朴堤上)공을 배향하였고 1868년 훼철되었다. 1991년 복원되었다.
⑤ 원강(圓岡書院) : 1799(正祖23)년에 온산에 원강사(圓岡祠)가 건립되었으며 엄흥도(嚴興道)공이 배향되었고 1817(純祖17)년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1868(高宗5)년에 훼철되었다. 1994년 삼동면에 복원되었다.
⑥ 자암서원(紫巖書院) : 1804(純祖4)년 연안차씨 주도로 웅촌의 통천리에 건립되었으며 차원부(車原頫),차운혁(車云革)공을 배향하였고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19년 복원되었다.
⑦ 난곡서원(蘭谷書院) : 1848(憲宗14)년 고제응(高濟應),서극진(徐克進) 등이 주도하여 다운동에 난곡사(蘭谷祠)를 건립하였다. 송시열(宋時列), 김창집(金昌集), 김제겸(金濟謙)등 유현을 배향했으며, 1868(高宗5)년 훼철되었다.
⑧ 학호서원(鶴湖書院) : 1848(憲宗14)년 양정동에 학호사(鶴湖祠)가 건립되었다. 울산군수를 지낸 이제신(李濟臣)공을 배향했으며 1868(高宗5)년 훼철되었다.
그외 임란공신 서몽호(徐夢虎)공을 배향한 증산사(甑山祠),임란공신 7세 겸수(謙受)공을 배향한 남강사(南岡祠)등 祠들도 모두 훼철되었다.또한 2001년 3월 옛 용연사(龍淵祠) 유허지(遺墟地)에 향유(鄕儒)의 공의와 오문(吾門)의 월진문회(越津門會) 주도로 용연서원(龍淵書院)을 건립하였다. 시조인 학파선생(鶴坡先生)을 배향하며 음력 2월 23일 향사를 지낸다.
3. 구강서원과 학성이씨
구강서원은 조선시대 울산지방의 최초 사립교육기관으로 1659(孝宗10)년 2월 향교 춘기석전(春期釋奠) 후 사림 배두첨(裵斗瞻)등 11인에 의하여 창건발의되고 3차에 걸쳐 사림 55인이 공동출자하여 (벼490石, 錢 3650兩) 전답을 마련하고 무역(담배, 소금, 명태)으로 재정을 확보한 후 1678(肅宗4)년 현 반구동 290번지 일원에 건립하였으며 1679(肅宗5)년에 포은(圃隱)과 회재(晦齋) 양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발의에서부터 건립에 이르는 20여년간 화재 및 가뭄,질병등의 발생과 국가의 서원 남설(濫設),첩설(疊設)에 따르는 억제정책으로 건립이 늦어졌으며 또한 사액운동을 전개했으나 몇차에 이르는 환국(換局)의 정국(政局)속에 3차례 실패하고 건립 17년만인 1694(肅宗20)년에 마침내 4차 청액상소에서 “구강”이란 서원명을 사액받았다. 건립의 어려움과 청액운동의 기간동안 서원의 재정은 엄청난 소요자금으로 바닥났으나 마침내 지역사림의 숙원을 이룰 수 있었다. 1724(景宗4)년에 묘우(廟宇)를 중창했으며 1735(英祖11)년 부사(府使) 권상일(權相一)이 부임하여 1736(英祖12)년 동서(東西) 양재(兩齋) 각각 4간, 대문, 포주간 등의 중수를 하였다. 권부사는 묘우(廟宇)를 숭도(崇道),강당(講堂)을 지선(止善),동재(東齋)를 상지(尙志),서재(西齋)를 경신(敬身),문(門)을 유의(由義)라 지었다. 또한 1740(英祖16)년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구강서원에 딸린 정자는 벽호정(碧湖亭)이 있었다. 영조이후 서원은 더욱 난립하여 색맥(色脈)과 붕당(朋黨)은 서원 중심으로 횡행하여 마침내 1871(高宗8)년 대원군에 의해 전국 사액서원 47개소를 제외하고 훼철되니 200여 년간 면면히 양(兩) 선생을 봉향하고 문풍(文風)을 숭상하여오던 구강서원 또한 국령으로 훼철 당하였고 양현(兩賢)의 위폐는 마을 뒷산에 매안(埋安)되었다.
구강서원의 창건 및 서원 운영과 관련하여 오문(吾門)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바 창건주도 향리인사 55인중 21인이 참가 하였고 그 후 10世 수(琇)가 영조 때 권부사와 함께 서원중수에 진력했으며 아울러 창건에 오문과 관련(婿, 外孫 등)된 인사 또한 19인이나 되어 당시 울산에서의 오문의 영향력과 유풍진작(儒風振作)에 심혈을 기울인 선조들에 대해 후손으로서 긍지를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창건에 참여 선조 및 오문 관련 인사들은 다음과 같다(18世 樹元 자료제공).
먼저 선조들을 보면,
․기(夔). 8世. 자는 준여(峻汝) 또는 현경(顯卿)이고, 제월당(霽月堂) 경연(景淵)의 孫, 득오(得塢)의 6남중 장자이다, 학식과 문장에 뛰어났으며, 구강서원장을 역임 하였다, 子에 이복(爾馥),孫은 태장(泰章)이다.
․ 정의(廷義).8世. 자는 공보(公輔). 호는 오평(嗚坪). 매헌(梅軒) 겸익(謙益)의 3子이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향내 학우들과 학업을 크게 일으키고, 구강서원장을 역임하였다. 子에 문구(文耈), 孫은 시탄(時坦)이다.
․ 경(藑).8世. 자는 주경(周鄕). 호는 소오(小梧)이고, 제월당 경연의 孫, 득해(得亥)의 子이다. 子에 이추(爾樞), 孫은 한룡(翰龍)이다.
․ 동영(東英).10世. 자는 화백(華伯). 호는 이휴정(二休亭)이고, 한남(翰南)의 孫. 천기(天機)의 次男이다. 밀양박씨 괴천공(槐泉公) 박창우(朴昌宇)와 우의(友誼)가 돈독하였으며, 1666(顯宗7)년 사마시(司馬試) 생원과에 급제하고 미수(眉叟) 허목(許穆)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子에 시강(時綱), 孫은 광연(光然)이다.
․ 시찬(時纘).11世. 자는 공윤(公胤)이고, 천기(天機)의 孫. 정영(廷英)의 子(生父-東英)이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증(贈) 형조판서(刑曹判書) 겸(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總管)이 되었다. 子에 광조(光照). 孫은 여집(汝潗)이다.
․ 익(益).8世. 자는 무경(茂卿). 호는 청수헌(聽水軒)이고, 제월당 경연의 孫. 득오(得塢)의 6男中 3子이다. 학문과 덕망은 사림에서 높이 평가하였으며 일찍이 이몽암(李蒙菴)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포은집(圃隱集) 연보편찬(年譜編纂)에 참여하였다. 子에 이상(爾相), 孫은 태도(泰道)이다.
․ 명(蓂).8世. 자는 군서(君瑞)이고 경묵(景黙)의 孫. 대명은사(大明隱士) 득준(得埈)의 長子이다. 수가선대부(壽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고, 기장군 장안읍 장안사 입구 도로변에 묘소가 있는데, 봉분은 딸 8명이 치마폭에 흙을 담아다 쌓았다는 전설이 전한다. 子에 세장(世樟),孫은 항(沆)이다.
․ 협(莢).8世. 자는 군실(君實)이고, 경묵(景黙)의 孫. 대명은사(大明隱士) 득준(得埈)의 次男이다. 학행이 뛰어나서 향리의 숭앙을 받았으며 향사들과 더불어 향교를 이건하였다. 수가선대부(壽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시고, 子에 세즙(世楫), 孫은 응담(應聃)이다.
․시(蓍).8世. 자는 현구(顯龜)이고, 제월당(霽月堂) 경연(景淵)의 孫. 득오(得塢)의 6男中 次男이다. 통칭 단장골 할아버지라 부르며. 子에 이환(爾桓), 孫은 태원(泰元)이다.
․ 정지(廷智).8世. 자는 진향(晋鄕)이고 매헌(梅軒) 겸익(謙益)의 5子이다. 子에 문욱(文郁), 孫은 시걸(時杰)이다.
․ 정인(廷仁).8世. 오문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 상계와 후손을 찾지 못하였다.
․ 정례(廷).8世. 자는 언경(彦卿)이고, 매헌(梅軒) 겸익(謙益)의 4子이며 석천계 상조(上祖)이다.세인들이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며, 포은집 연보편찬에도 참여하였다. 子에 문백(文白), 孫은 시옥(時玉)이다.
․ 정엄(廷嚴).8世. 자는 군유(君裕)이고 경용(景溶)의 孫. 득배(得培)의 長子이다. 일찍이 학문을 닦았으며, 사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使)의 증직이 내려졌다. 子에 형도(亨道), 孫은 진방(震芳)이다.
․ 규(葵).8世. 자는 군일(君日)이고, 경묵(景黙)의 孫. 대명은사(大明隱士) 득준(得埈)의 3子이다.子에 세장(世樟), 孫은 원(源)이다.
․ 정신(廷).8世. 자는 집중(執中)이고, 매헌(梅軒) 겸익(謙益)의 6子이다. 子에 문상(文相), 孫은 시성(時晟)이다.
․ 시강(時綱).11世. 자는 공무(公懋)이고, 천기(天機)의 孫. 이휴정(二休亭) 동영(東英)의 長子이다. 무과 급제 후 함경도혜산첨사(咸鏡道惠山僉使)를 지냈으며, 子에 광연(光然), 孫은 여규(汝圭)이다.
․선도(善道).9世. 자는 명중(明仲)이고, 득배(得培)의 孫. 정엄(廷嚴)의 3子이다. 학행에 정진하였으며 구강서원 창건에 있어 “양세적로견칭원중(兩世(廷嚴-善道)績勞見稱院中)”이라했다. 子에 진화(震華), 孫은 원기(元杞)이다.
․ 문좌(文佐).9世. 자는 욱재(郁哉)이고, 매헌(梅軒) 겸익(謙益)의 孫. 정헌(廷憲)의 長子이다. 子에 시발(時發). 孫은 의채(宜埰). 曾孫은 양오(養吾)이다.
․ 신(莘).8世. 자는 경수(耕叟)이고, 경묵(景黙)의 孫. 득훈(得塤)의 長子이다. 학행과 덕망이 높았으며 長子 이식(爾拭)은 1682(肅宗8)년 나라에 구강서원 청액상소를 올렸으며, 孫 현담(玄聃)은 서원장과 향청좌수를 역임하였다.
․ 이상(爾相).9世. 자는 군식(君式). 호는 복재(復齋)이고, 청수헌(聽水軒) 익(益)의 子(生父 시蓍)이다. 효도와 학행을 지성․정진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았다. 子에 태도(泰道), 孫은 후(厚)이다.
․ 이해(爾楷).9世. 자는 공무(公武). 교육장 병직(秉稷)에 따르면 복재공(復齋公) 이상(爾相)의 초명이고, 동일인이라 했다.
․수(琇).10世. 자는 수옥(秀玉). 기(夔)의 曾孫. 태래(泰來)의 長子이다.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며 구강서원중수에 진력했으며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이 “허이가사(許以佳士)”라 하였다. 子에 효조(孝祚), 孫은 지노(之魯)이다.
다음은 창건 오문 관련인사 19인이다
․배두첨(裵斗瞻).본관 김해(金海). 7世 득훈(得塤)의 사위.서원장을 역임하였다.
․배두원(裵斗元).본관 김해(金海). 9世 이복(爾馥)과 사돈.배두첨의 弟.선전관(宣傳官).
․안상경(安上卿).본관 광주(廣州). 7世 득곤(得坤)의 사위인 안제(安悌)의 次子.
․김중태(金重泰).본관 고령(高靈). 8世 전(荃)의 사위.중추부사(中樞府事).서원장 역임.
․배두수(裵斗壽).본관 (金海). 9世 천기(天機)의 사위.배두첨의 弟.서원장 역임.
․전홍철(全弘哲).본관 경주(慶山). 8世 시(蓍)의 사위.
․안세경(安世卿).본관 광주(廣州). 7世 득곤(得坤)의 사위인 안제(安悌)의 長子.
․박홍조(朴弘祖).본관 흥려(興麗). 10世 태래(泰來)와 사돈.
․김서장(金瑞章).본관 고령(高靈). 9世 이복(爾馥)의 사위.중추부사(中樞府事).
․박세현(朴世衒).본관 밀양(密陽). 8世 명(蓂)의 사위인 박세도(朴世衜)의 伯兄.
․박세도(朴世衜).본관 밀양(密陽). 8세 명(蓂)의 사위.생원.서원장 역임.
․김세진(金世鎭).본관 경주(慶州). 7世 득기(得基)의 사위 김국용(金國鎔)의 長子.통덕랑(通德郞).
․배석우(裵碩佑).본관 김해(金海). 8世 규(葵)의 사위.
․김중석(金重碩).본관 고령(高靈). 7世 겸익(謙益)의 사위.통정(通政).
․윤임중(尹任重).본관 파평(坡平). 7世 득훈(得塤)의 사위인 윤익창(尹益昌)의 長子
․김중만(金重萬).본관 고령(高靈). 8世 영(榮)의 사위.도사(都事).
․윤임성(尹任聖).본관 파평(坡平) 7世 득훈(得塤)의 사위인 윤익창(尹益昌)의 次子.
․김이흥(金以興).본관 경주(慶州). 7世 득오(得塢)의 사위인 김원(金轅)의 長子.
․안수경(安壽卿).본관 광주(廣州) 7世 득곤(得坤)의 사위인 안제(安悌)의 조카.서원장 역임.
4. 구강서원의 복원
구강서원이 1871(高宗8)년 훼철된 후 양현(兩賢)의 위패를 서원마을 뒷산에 매안하였다. 일제시대 분향이 끊였다가 광복후 마을주민들이 매년 중양절(음력 9월 9일)에 제향하였으며 1988년 구강서원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부지를 매입, 시에 기부채납하고 구청과 시에서도 적극 협력하여 예산을 확보한 결과 2003년 3월 15일에 복원 준공을 보게 되었다. 훼철된지 132년 만이요, 복원추진위가 결성된지 15년만에 반구2동 171-1(신두산)에 대지 1200여평 건물 6개동(사당-숭도사(崇道祠), 문루-선화루(宣化樓)․유의문(由義門), 내삼문, 강당-지선당(止善堂), 전사청(典祀廳), 고직사(庫直舍) 등) 60여평 규모로 사업비 21억여원을 들여 복원하였다. 2003년 10월 17일 개원 및 봉안고유제를 거행 했으며 복향 봉안문은 오천(烏川) 정동열(鄭東烈)氏가 찬(撰)하였다. 향사는 음력 2월이며 구강서원 복원추진위원회(위원장 심근식) 이하 지역주민과 유림(吾門:19世 세걸(世杰) 外), 그리고 관(官)이 합심하여 복원의 꿈을 이루었고 앞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충효정신의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07.7월 현재 세걸이 구강서원 보존회 이사장 임.
카페 학성이씨에서 옮겨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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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를 옮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학성이씨의 자랑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