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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정부는 2차대전후 1950년 여행, 관광산업을 활성화시킬 목적으로 테마별로 여러 가도를 지정했으며, 그중 로만틱가도가 가장 인기가 많다.
로만틱가도는 휘센에서 시작해 부르츠부르크까지 400km 가 넘는 지방도로로 원래 로마 제국의
북벌정복전쟁을 위해 닦아 놓은 길이었으나 이후 이태리 독일간 상업무역로가 되었고 따라서
이 가도에 있는 도시들은 상업으로 번영을 누렸고 도시 건축양식도 바로크, 르네상스, 고딕 등
유럽에서 유행한 모든 건축양식을 다 갖고있다.
로만틱 가도에 있는 중세풍의 아름다운 도시들 중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 는 단연 눈에 띈다,
이름의 뜻은 "타우버 강 위의 붉은 요새" 이다. 이 도시는 타우 버 강이 내려다 보이는 고원에 위치해 있다. 사실 "로텐부르크" 이름에 관해서는, 일부는 언덕위에서 내려다 볼 때 주택의 지붕들이 붉은 색을 띤다고 붉다라는 뜻의 로텐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어떤학자는 이 고장이 모직생산이 활발했기 때문에 독일어로 마를 뜻하는 로트가 사용되었을 거라 한다.
이 도시의 유래는 Comburg-Rothenburg 공작이 도시를 건설했던 10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Rothenburg ob der Taube 뿐만 아니라 Rothenburg 이라는 이름으로 여섯개의 도시를 건설한다.
현재 4개는 독일내에, 1개는 스위스, 1개는 폴란드에 속해있다.
그러나 그 후 1116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Heinrich 5세 (잘리어가문에선 마지막황제) 는 이곳
Rothenburg ob der Taube를 조카 Conrad (호헨슈타우펜가문) 에게 영지로 할양해준다
1142 Conrad 3세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Stauffer 성을 짓는다.
(이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공석이었고 힘있는 영주들이 황제를 자칭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성은
1300년대 중반 지진 (추측) 으로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정원이 들어서 있다. 가운데 상 블레즈 성당이
서있다. 원래는 성의 일부로 왕의 손님들을 접대하는 Guest house 였으나 지진후에 유일하게 복구하여
회의실로 쓰여오다가 2차대전 후에는 성당으로 헌당되었고 지금은 두 세계대전으로 죽은 독일 군인들의 기념관 및 1298년 유대인 대학살의 기념관을 겸하고 있다.
성 정원의 흥미로운 것은 17,18세기 기하학적 화단디자인과 사계절, 사원소 등을 의미하는 디자인을
볼 수 있다.
파괴된 성의 돌들은 성곽을 확장하는데 사용되었다.
1170 년에 로텐부르크는 시장도 열리고 시로 승격된다.
1200년대에는 성벽과 성탑, 성문들이 건설되었으며, 그 중 지금까지 white tower, Markus tower 가
보존되어 있다. Conrad 3세 아들이후 대가 끊겨있던 차에
1274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는 비어있는 도시를 황제직속 제국 자유도시로 지정해서 자치정부가 들어서면서 박람회도 열리고 도시부흥이 시작되었고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흥망성쇄의 역사를 같이 한다. 1803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때 바이에른 왕국에 복속되는 등 근래까지 파란만장한 역사의 자국을
간직한 도시이다
주요한 역사로는 1300년대 초 십자군 일부가 신성로마제국 땅으로 돌아오고 그중 튜튼기사단으로
알려진 이들이 로텐부르크에 와서 자치정부와 함께 프란치스카나 수도원, 성령병원, 상 요하네스
성당을 건립하고 기독교도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돕는다.
이때 그 유명한 야콥성당도 지어진다. 성혈을 보관했다해서 많은 순례자들이 찾는다.
상 야곱 성당 (St. Jakobskirche, Rothenburg ob der Tauber) 앞에 야곱의 동상이
있는데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들고 있는것이 라틴아메리카 풍 같다.
2층 예배실의 성혈제단이라 부르는 제단위에 두 천사가 들고있는 크리스털 십자가에 예수의 성혈
3방울이 들어 있다 예기한다. 이 크리스탈은 1270년대의 것이다
(카톨릭 미사에서 행해지는 성만찬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믿기 때문)
예루살렘 입성과 최후의 만찬 등 예수의 생애를 조각한 제단이 있는데 독일 최고의 조각가
틸만 리멘슈나이더의 1500년대 초 작품이다.
이 성당에서 유명한 것 또 하나는 5,000개의 파이프로 만든 초 대형 파이프 오르간.
이곳에서 우리나라 명동성당처럼 1525년 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 농민항쟁주동자가 큰소리로
항쟁을 선언하기도 했다.
1300년대 당시 도시 규모도 커져서 성벽 내 5500명, 성벽외부 400km2 내에 14000명의 인구로,
이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도시중에서 가장 큰 20 개 도시에 꼽히기도 했다.
1510년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이끈 후 곧바로 많은 주위 도시들의 기사들이 이 개혁에 동의하게 되었고,
Rothenburg 에도 개혁의 바람이 불어왔다. 1525년 농민봉기가 일어나서 종교개혁이 좀 주춤했지만
1544년에는 상 요하네스 수도회를 제외하고는 상 야콥성당, 상 요하네스 성당, 프란치스코 성당 등이
모두 개신교로 변경된다. 1579년 시의회와 시장은 루터 개신교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이제 Rothenburg
는 공식적으로 개신교 제국 자유도시가 되고 약 50년후 30년 종교전쟁에서는 개신교측을 후원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도시에는 마이스터 트룽크축제가 유명하다.
종교전쟁당시 신교쪽에 섰던 시는 1631년 틸리장군이 이끄는 4만 여명의 구교군에게 침공을 받아 시를
내어주고 구교군의 겨울 캠프가 된다. 겨울을 나는 동안 구교군은 도시를 노략 소비하게 된다. 겨울이
지나고 캠프를 떠날 때쯤 되었을 때 틸리장군이 누쉬 시장에게 무리한 제안을 하게 되는데 즉 3.25 리터
와인을 단숨에 마시면 바로 시를 떠나겠다고, 그리고 누쉬 시장은 보란듯이 와인 3.25리터를 단숨에
들이마시고 구교군을 철수시키게 되었단다. 이를 기념해서 행하는 축제이다.
시청사 연회관 Ratsherrn Trinkstube (VIP 인사들의 Guesthouse) 건물 시계탑에서는 매시마다 창을 열고
인형들이 나오는데 잔을 들이키는 Nusch 시장과 장군모자를 쓰고있는 Tili 장군 이다
(11:00-15:00 , 20:00-22:00에는 매시)
시청사 (Rathaus) 앞건물은 16세기 르네상스식, 탑건물 (60m) 은 13세기 고딕식
시청사 Rathausgewölbe 1층 홀은 수십년전까지는 의용소방대 소방차들의 주차공간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전시회나 벼룩시장이 열린다.
220개의 나선형 계단을 따라 52m 높이의 시청사 고딕탑 전망대까지 (Rathausturm) 올라가면 로텐부르크
구시가지와 타우버계곡, 물래방아 등을 전망할 수 있다.
이 도시의 몇몇 관광 명소들로는
제국도시홀 (Reichstadthalle) 은 17세기 지어진 이후 십일조 창고라 불리는데 당시 여러 형태로 바친
세금을 저장하는 창고 역할을 했지만 중세풍의 건물 외관은 이 도시와 조화가 되고 또 Spitalhof 와도
잘 어울린다. 지금은 시의회 회의나 기타 연극, 연주회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시청사 옆 상트 게오르그 연못은 1446년부터 있어 온 것으로 로텐부르크에서
가장 깊은 8m 깊이의 연못으로서 10만 리터의 물을 담고 있다. 하지만 광장에 연해 있기 때문에 이
연못 앞에서 교수형이 행해지기도 했다. 연못앞에 기둥들, 그네 등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트 게오르그
기사와 용의 종주만이 400년 이상 연못가에 서 있다.
역사박물관과 감옥 (Historiengewölbe mit Staatsverlies) 16세기 역사부터 17세기 30년 종교전쟁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다.지하 감옥으로 이어진 계단이 있고 이 감옥에서 고문도 행해졌다. 유명한 토플러 시장도
여기에 감금되었다.
뢰더 성문 (Rödertor)
세관과 경비초소가 딸린 성문으로 14세기에 건설되었고, 앞문 Zwinger 를 적이 통과하였다면 이 문에서
다시한번 저항에 부딛히게 된다.
뢰더 타워 (Röderturm) 는 시청사 타워와 더불어 로텐부르크에서 유일하게 올라갈 수 있는 타워이며,
타워안에는 방이 있었다. 성의 안전에대한 보고 장소 였다.
이 타워는 2차대전때 파괴되었다가 이후 복구되었고 지금은 시의 역사의 발전과정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관이다.
부르거 성문 (Burgertor)
우선 Herrngasse 거리를 따라 성문 Burgertor를 나가면 성 정원이 펼처진다.
정원 끝에서 아래 계곡을 보면, 밝고 푸른색 타워성 Topplerschlösschen 이 있는데 1388 년에 지어진
Toppler 시장의 집으로 시장의 오락을 위해 지어졌다. 이 집은 타우버 강물에 둘러싸여 있어 마치 작은
요새와 같다. 이 시장은 공식재판 없이 사형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후 그의 재산은
유가족, 독일 왕, 시에 각각 균등하게 배분되었다. 이후 로텐부르크는 주위 도시들에게 점점 영향력을
상실해 가고 소박한 자유도시가 되어 갔고 1631년 종교전쟁때 막대한 피해를 입고 연이어 페스트 병이
휩쓸고 지나가면서 도시는 거의 폐허수준에서 다시 시작해서 조금씩 조금씩 일어선다.
성 정원에서 다시 돌아 올 때 Burgertor 성문 벽위에 마스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공격자에 뜨거운
역청을 부어 공격할 때 사용했다.
성문 옆에 바늘귀로 알려진 작은 쪽문이 있다. 성안으로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자신의 ID를 확인시키고
많은 돈을 내고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인형 장난감 박물관 (Puppen und SpielzeugMuseum) 은 개인 수집가 엥겔스(1780-1940) 가 40년동안
수집한 유럽산 인형들을 전시해 놓았는데, 당시 사회 생활상, 풍습 등을 엿볼 수가 있다
.
장인의 집 (Alt Rothenburger Handwerkerhaus) 은 13세기 말에 지어진 다양한 장인들의 작업장으로 통
만드는 장인, 구두장인, 직물사등 과거 장인들의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범죄박물관 (Kriminalmuseum) 에서는 중세당시 이곳에서 행해진 죄인 형벌관련, 고문기구 등을
전시되어 있다.
상설 크리스마스 박물관 (Weihnachtsmuseum von Käthe Wohlfahrt) 도 관광명소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용품 가게이다.
로텐부르크의 명물과자인 슈네벨이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에도 슈네벨 과자가 들어가 있다. 한국에서는 나무 망치로 깨어 먹기 때문에 재미있으나 로텐부르크 것은 딱딱하긴 해도 깨물어 뜯어 먹을 만하다. 띠 모양의 과자반죽을 공처럼 말아서 기름에 튀긴후 설탕 (초코릿, 커피등) 을 뭍혀 축하용으로
선물하던 선물용 과자이다.
제국도시박물관 (Reichsstadtmuseum) 은 13세기 후반부터 도미니크 여 수도회 수도원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을 박물관으로 전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조리장, 가구, 여러가지 생활용품, 13세기 유대인 대학살 만행에대한 문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대인 학살은 이처럼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반 유대 감정이 폭발하여 때때로 대학살이 행해졌는데
1200년 당시 로텐부르크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전부터 형성된 유대 공동체가 있었고 1298 년 이들을
학살하는 만행이 발생한다.
이때 약 450명이 희생되었고 이후 1349년에는 새롭게 생성된 유대 공동체에게 두번째 대학살이 자행되었
다. 그 이후 이 도시로 이주해온 유대 공동체에게 1520년 강제추방이 집행된다. 이처럼 13세기부터 끊임없
이 유대인에대한 적대행위가 자행되어 왔고 가장 광범위하게 자행된 지난 세계 2차대전때는 나치 정권에
의해 전 독일 관료들이 체계적으로 정치경제사회 문화전반에 걸쳐 유대인 말살을 위해 협력했으며,
결과적으로 유럽 전역에서 인류사상최대 민족말살테러로 60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 다행히
연합군이 전쟁에 승리해서 독일의 유대인 말살은 그정도로 끝나게 되었다.
1880년대 Hans Thoma, Carl Spitzweg 등 낭만주의 예술가들과 많은 유명인사들이 이 시를 방문했고
낭만적인 중세도시미관, 풍경에 반해 독일제국에다 이 시를 보존해 줄 것 요구했다.
이후 이 도시는 문화보호도시로 지정 , 증 개축도 안되게 중세풍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1930년 나치는 KDF (희락의 힘, kraft durch Freude) 를 제창, 로텐부르크는 열렬한 나치 후원도시이자,
나치당국은 로텐부르크를 나치선전장으로 적극 활용한다.
로텐부르크는 나치의 이상적인 도시, 가장 독일스러운 도시, 가족 같은 공동체의 훌륭한 예라 치켜
세우며 모든 제 3제국의 시민들은 정기적으로 로텐부르크로 소풍갈 것을 촉구한다.
1945년 독일군은 2차대전중 로텐부르크를 수성하려고 주둔했고, 미공습으로 이미
306 가구, 37명의 사상자, 9개 감시탑, 성벽 610m 가 파괴된다.
US 전시 사령관 Mc Cloy 는 역사적으로 보존할 만한 아름다운 중세도시 로텐부르크를 파괴하기 싫어서
육군의 발포를 중지했고 마지막 협상을 위해 12 보병연대 4대대 소속군인 6명을 성안으로 파견한다.
이들은 독일군 사령관과 협상, 만일 18:00까지 이들이 귀환하지 않는다면 또 독일군이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성은 대대적인 공습과 대포로 완전 파괴될 것을 경고했고, 드디어 독일군 사령관은
히틀러 명령에 불복하고 미군에 항복, 성은 더 이상의 파괴를 면하게 되었다.
이후 Mc Cloy 는 로텐부르크 보존 명예대사로 임명된다.
이미 공습으로 파괴된 성곽은 전세계 각지에서 복구를 위한 성금을 받아 이내 복구되었으며,
벽돌에는 기부자 이름이 세겨져 있다.
현재 Rothenburg 시는 42km2 면적에 약 11,000명이 살고 있다.
바이에른 주에 있으므로 뮌헨에서도 바이에른 기차표로 저렴하게 하루 다녀올 수 있다.
기차로 3시간 10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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