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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 神 神 學 스크랩 고신의 역사와 신학(1) / 유해무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總會神學大學校 추천 0 조회 109 14.07.12 17: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신의 역사와 신학(1)| 개혁신앙과 개혁교회

박익천 | 조회 128 |추천 0 | 2010.03.30. 10:27

 

 

[고신교회의 역사와 신학]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고신교회는 2002년 교단출범 50주년을 맞아 기념 축제는 열었으나, 역사와 신학에 대한 학술대회는 갖지 않았다. 한국의 다른 기독교단의 기념행사와는 달랐다. 재건교회 총회는 “신사참배반대 70년, 재건교회 60년”이라는 주제로 2006년 12월에 학술대회를 가졌는데, 그 교회에 속한 어떤 신학자는 구약과 신약 그리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나타난 언약 전통을 살피면서 재건교회의 신앙전통을 ‘언약신앙’이라고 규명한다. 한국기독교장로회도 교단 역사 40주년을 기념하면서 “기장이 출애굽의 새 역사를 시작한 지 40년이 된 이 때에 기장의 신학과 신앙고백의 뼈대를 이룬 개혁신학의 전통을 되새김질”한다.

 

고신교회는 교단 역사편찬 위윈회가 ?한국장로교회사?를 출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50주년 기념 축제 중에 이를 감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출판 사실조차도 알리지 않았다. 고신교회의 역사의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고신교회가 자기 역사와 신학을 반추하지 않는 것을 누락의 문제라고 단순하게 보고 넘어가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다. 고신교회 안에 자기 역사를 부끄러워하는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70년대부터 교회 성장에서 뒤쳐진 고신교회 안에는 ‘또 순교 정신 우려먹나’식의 자조 분위기와 최근에 들어와서 불고 있는 ‘분리주의’ 논쟁이 이를 반영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주님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는 것은 성도와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비록 수욕은 우리에게 돌아온다 하여도, 하나님께서 우리 고신교회를 사랑하여 주신 것을 깨닫고 전진하기 위하여 역사의 반추는 필요하다. 먼저 역사를 개괄하고 신학을 정리하겠다.

 

 

1. 고신교회 약사

 

고신교회의 역사는 고려신학교의 역사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관계를 약술하면 그 과정에서 고신교회의 신학적 논의와 그 내용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약사에서 신학의 특징과 약점이 동시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장로교회는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주남선 목사(1888-1951), 한상동 목사(1901-1976) 등은 신사참배를 배교요 우상숭배로 파악하고 거부하다 검속 당한다. 해방과 더불어 출옥하면서, 새로운 신학교육을 통하여 교회를 재건하기 위하여 먼저 자유주의 신학을 대항하는 보수주의 정통신학을 표방하는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고려신학교는 박윤선 목사(1905-1988)를 강사로 1946년 6월 23일-8월 20일까지 있었던 진해 신학강좌를 모체로 삼아 그해 9월 20일에 개교한다.

 

박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Bruce F. Hunt, 1903-1992)가 초대 교수였고, 1947년 10월에 공식적인 취임식이 있었다. 설립취지서에서는 성경의 독자적 신임성(autopistia, 헬)을 믿는 개혁신학의 원칙에 따라 칼빈주의 신학을 수립하여 한국교계의 사상을 통일하려는 뜻을 밝히고, 신학 운동이 참된 문화 운동이라면서 대학 설립의 염원을 표방하였다. 같은 해 7월 9일 진해에서 모인 경남노회 임시회는 고려신학교의 설립을 인허한다. 노회(그리고 그 이후 총회)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고려신학교는 1964년까지 사립으로 존속한다.

1947년 12월 경남노회가 인허를 취소하면서부터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이들이 노회와 총회에서 견제와 소외를 당한다. 박형룡 박사(1897-1978)는 1947년 10월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지만, 갱신 운동, 신학교의 총회 직영과 권징에 대한 이견으로 1948년 5월 사표를 내고 서울로 떠난다.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이 추구한 정통신학은, 1947년 6월에 2대 교장으로 취임한 박윤선 목사가 연구하고 가르친 개혁신학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박 목사는 연구와 강의 외에도 신학교 기관지인 ?파수군?에 많은 글을 쓰고, SFC 강령도 기초하여 개혁신학을 널리 보급하려고 애쓴다.

 

1948년 5월 제34회 총회는 고려신학교는 총회와 무관하니 노회가 천서를 줄 필요가 없다고 결의한다. 다음 해 9월 제35회 총회는 1948년에 결의한 바를 재확인하고, 경남노회는 한부선派와 관계하지 말 것을 결의한다.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는 급기야 1951년 5월 25일 총회로부터 축출당한다. 1952년 4월 제37회 총회가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 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선언함으로 완전히 단절 당한다. 같은 해 10월 16일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노회 발회식 선언문”이 발표된다. 송상석 목사(1897-1978)가 초안한 선언문은 고신운동은 신사참배운동의 죄를 회개하는 교회 정화 운동일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 신학을 배격하는 개혁주의 신학운동임을 피력한다.

 

1956년 9월 총노회를 총회로 개편하고 첫 선교사를 파송한다. 총회 직전에 모인 부흥회에서 박윤선 목사는 “우리 진영에 교정하여야 할 몇 가지 과오”를 지적하였는데, 그 중 첫째가 예배당 확보를 위한 법정소송문제였다. 성도가 불신자를 걸어 소송할 수 있으나 신자를 걸어 소송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한 반면, 마산 문창교회를 시무하는 송상석 목사는 소송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1957년 2월 박윤선 목사는 이 문제 외에도 신학교 운영의 질서 문제와 재정 문제 등으로 사표를 내고 고려신학교를 떠난다. 그러나 이사회와 교수회가 소송을 금한다는 교육 이념을 확인한 후에야 같은 해 9월 복귀한다.

 

1958년부터 연속 3년간 고려신학교 직영 헌의가 총회에서 논의되나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1960년 9월 박윤선 목사는 소송에 대한 이견으로 송상석 목사와 지상 논쟁을 하고, 신학교 운영에 대한 이견을 표명하다가 표면적으로는 주일 성수 문제로 고신교회를 영구히 떠난다. 한부선 선교사도 함께 떠난다. 고신교회는 같은 해 12월 13일 승동측과 합동하나, 1962년 10월 17일 한상동 목사는 일방적으로 고려신학교 복교를 선언한다. 1963년 6월 (합동)총회 고시부는 고려신학교 졸업생에게 강도사 응시 자격을 주지 않자, 8월 부산노회의 환원을 필두로 원래의 고신교회는 환원 총회로 재조직한다.

 

1964년 칼빈학원(1955년 설립)은 고려신학교 대학부 과정으로 폐합되었고, 같은 해 9월 고려신학교는 총회 직영 신학교가 된다. 복음병원도 총회 직영이 된다. 총회는 1966년 9월 대학부의 대학 인가를 신청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사장이 일을 미루자, 이른바 ‘가(假)이사회’(또는 사조 이사회)를 조직하여 1967년 5월 인가를 얻는다. 이의 연장선에서 이사장 송상석 목사와 교수들이 갈등하면서 교수들이 전원 사퇴한다. 969년 3월 이사회는 선별하여 대학부 교수 5명만의 사표를 수리한다. 같은 해 9월 총회는 웨스트민스터 고백서와 대소요리문답을 고신교회의 신조로 채택한다.

 

1972년 12월 29일, 송상석 목사는 법적 이사장 신분을 주장하면서 사퇴를 거부한다. 결국 총회가 선임한 이사장은 송 목사를 검찰에 고발하고 세속 법정에 고소한다. 1973년 총회는 성도간의 법정제소는 하지 않는 것이 본 교단의 입장이라고 결의하였다가, 1974년 총회에서는 남용하지 않는 것이라고 수정한다. 같은 해 12월 총회 재판부는 송 목사를 면직한다. 결과적으로 반고소를 주장하는 세력이 이탈하여 교단 분열이 일어난다. 1992년 제32회 총회시에 이전 경남노회에 속한 이들을 다시 영입한다.

 

1980년 고신대학으로 교명이 바뀌고, 고려신학교는 특수 대학원인 신학대학원으로 개편된다. 1988년 4월부터 고신대학, 특히 의과대학 학생들의 소요 사태가 계속 일어난다. 1998년 신대원이 천안으로 이전한 이후, 총회 장소로 사용되면서 2000년부터는 고신의료원 노동조합원의 시위로 총회가 지연되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났다.

 

이것은 교육부가 학교법인 고려학원을 감사하는 계기가 되었고, 두 차례나 감사를 받다가 급기야는 2003년 4월 1일에 총회가 선임한 이사의 등록을 취소하고 교육부가 임시이사(종종 관선이사로도 불림)를 파견하였다. 그 이후 고신교회는 의료원 사태로 몸살을 앓았고, 교회가 경영하는 병원의 내분은 복음 사역과 하나님의 영광에 큰 장애가 되었다. 2007년 4월 임시이사가 철수하였지만, 현재도 이사 전원을 총회가 선임하지는 못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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