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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절 (상)
청춘극장
점심을 먹고 나서 무료해진 섭이는 오토바이를 타고 손 씨 집에 들렀더니 추석 대목용으로 나갈 사과를 막 상차하고 있었다.
상차가 끝나자 손 씨 아저씨가 "식구가 오늘 대구에 가고 없어 오후에는 좀 적적할 번했는데 섭이 자네가 마침 잘 왔다. 좋은 양주가 두어 병 생겼는데 피라미를 좀 잡어다가 매운탕을 끓여 한 잔 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손 씨 아저씨네 집은 대구선 철도가 금호강을 건너는 황정 철교에서 조금 떨어진 큰 사과밭 안에 있어 조용한 집이다.
사과 밭에서 나와 방축만 넘으면 금호강이라 손 씨 아저씨 혼자서도 종종 초망으로 고기를 잡곤 한다.
오후 4시쯤 태양이 뜨겁지 않을 무렵이 되어 손 씨는 섭이와 같이 물이 맑고 유수가 느린 황정 철교 아래에서 고기를 잡았다.
추석을 앞둔 초가을의 금호강은 여름을 지나면서 알맞게 살이 오른 피라미들이 강바닥에 흩어져 하얀 비늘을 햇빛에 빤짝이며 놀고 있다.
강가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어항으로 밤마다 고기를 잡아 새벽 기차로 대구까지 가져가서 장사꾼에게 넘기는 생계형 어부들도 있다
영천읍 오수동에서부터 금호면 황정 철교 아래까지는 초망 질을 하기에 적당하도록 물의 속도가 느리고 큰 길에서 가까우므로 봄부터 가을까지 고기를 잡는 천엽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피라미를 먹을 만큼 잡아 강가에서 손질을 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손 씨 아저씨는 술안주용으로 고기전골이나 생선찌개를 잘 만들지만 특히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여놓으면 그 맛이 아주 일품이다.
손 씨 아저씨는 매운탕이나 찌개 같은 요리를 만드는 취미가 있어 자주 끓이시며, 누가 도와주는 것을 아주 싫어하신다.
올해 61세로 지난봄에 회갑을 지내신 손 씨 아저씨는 체격이 크고 젊을 때부터 운동을 하셔서 아주 건강하고 힘이 좋으시다.
술을 좋아하셔서 혼자서도 술을 즐기시며 한잔 하는 날이면 노래를 아주 잘 부르는 멋쟁이시다.
시골 사람답지 않게 집에는 서재에 장서가 1000여권에 이르고 아는 것이 많고 달변이면서 대단한 뱃장이 있는 분으로 술에 취하셔도 흐트러짐이 없고 항상 무거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혼자 있을 때면 슬픈 느낌을 주는 노래를 잘 부르는데,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옛터에, 현인의 비 내리는 고모령, 술이라도 한잔 하시면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을 곧잘 불러 듣고 있으면 구성진 노래에 고독과 슬픔이 절절하게 묻어난다.
진방남의 불효자는 웁니다, 이 노래를 부를 때는 목이 메여 눈물까지 흘린다.
{ //타관 땅 밟아서 돈지 십년 넘어 반평생 사나이 가슴 속에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눈물로 찾아도 보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다시 못 올 어머니여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
마당에 있는 화덕 위에 양은솥을 올려놓고 매운탕을 끓이시는 손 씨 아저씨가 오늘은 취하기도 전에 불효자는 웁니다. 하고 숙연한 느낌이 들도록 처량하게 부르고 있다.
늦게 얻은 두 아들은 대구에서 아직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고, 나이차가 10년 이상 나는 부인과 조용한 과수원 안에 시골에서는 보기 어려운 꽤나 잘 지은 양옥집에서 행복스럽게 살고 있으면서 애수에 젖은 노래를 부르며 외로워하시는 손 씨 아저씨를 섭이는 이해할 수 없다.
화덕에 사과나무 장작으로 불을 피워놓은 양은솥에 매운탕이 끓는 동안 나무토막 의자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슬슬해 보인다.
매운탕이 끓을 동안 할 일이 없어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섭이가 누가 읽다가 마루 구석에 놓아둔 소설책 한권을 발견하여 집어 들어보니 집에서 읽은 김래성씨가 쓴 청춘극장이었다.
섭이는 중학생 때부터 폐결핵을 앓아 고등학교를 가지 못하고 꿈 많은 청소년 시절을 병마와 씨름하였다.
병마로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지만 머리가 명석하여 자습으로 역사, 문화, 지리, 철학 등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이 해박하고 사서삼경을 자습으로 완전히 외우는 상당한 실력에 아저씨도 감탄할 정도였다.
22살에 대구 동산병원에서 폐결핵이 완치 되었다는 판정을 받은 후 건강은 많이 좋아졌지만 폐결핵을 앓은 병력(病歷)때문에 병력(兵力) 면제를 받았다.
섭이는 청송군 부동면 정자목이에서 태어났으나 1967년 2월 작은 고모가 살고 있는 영천읍 금로동으로 이사를 왔다.
아버지가 주남 들에 6000평 정도의 논농사를 지어 생활은 어렵지 않으나 오랜 폐결핵으로 체력이 허약해 농번기에 조금씩 돕기는 해도 농사일은 별로 하지 않고 소설가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자습을 하는 편이다.
섭이가 손 씨 아저씨를 알게 된 것은 69년 여름이었다.
친구들과 고기를 잡으려고 나갔다가 죽뱅이(竹方) 마을 앞에서 혼자 고기를 잡던 손 씨 아저씨가 유리조각에 발이 베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섭이가 자기 러닝샤스를 벗어 찢어 상처를 메어 지혈을 시키고, 오토바이에 태워 읍내 의원으로 모시고 가서 치료를 해드리면서였다.
낮선 손 씨가 유리조각에 발이 베여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자기 샤스를 찢어 싸매주고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는 섭이가 너무 고마워 다음 날 섭이네 집으로 인사를 갔다.
손 씨는 섭이와 이야기를 해보니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촌놈 건달로 여겼는데 젊은 사람이 심성은 착하고 상상외로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있어 마음에 들어 종종 불러서 천엽을 하거나 안강 하곡(霞谷)저수지(딱실 못), 청통 풍락저수지 같은 유명한 저수지로 밤낚시를 같이 다녔다.
생각이 깊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섭이의 글을 읽고 격려를 해주며 조카처럼 사랑해 주시는 손 씨 아저씨가 연세에 비하여 젊은 섭이를 잘 이해를 해주시므로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주왕산 자락의 작은 마을 정자목에서 태어난 섭은 스물두 살까지 거기서 살았다. 이웃 마을에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하는 또래들이 있어 자습을 하는 섭이는 방학이면 친구들을 찾아가 어울려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자습한 지식으로 이해가 어려운 부분에는 친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4-H 자원지도자(필자 주 : 4-H는 1910년 미국에서 시작하여 1947년 3월 경 우리나라에 도입된 농촌 청소년단체로 자원지도자는 4-H 회원들을 지도하는 부락 단위 지도자)인 남봉현 형이 섭이들이 노는데 자주 와서 청년들이 덴마크처럼 농촌 개발에 앞장을 서야 한다면서 농도원이나 농촌진흥원에서 실시하는 4-H 교육에 좀 갔다 오라고 추천하므로 섭이는 여름 방학을 맞아 친구와 같이 대구 동촌에 있는 경상북도 농촌진흥원에 가서 두 주간 농공훈련을 받았다.
섭이로서는 중학교 중퇴 후 병마로 늘 혼자서 지내는 따분한 일상에서 잠시의 탈출이었고 대학에 다니는 친구는 섭이를 위해 동행해 주었다.
농공훈련을 마치고 돌아 온 날 저녁 남봉현 형이 자기 집에서 방을 빌려 통일교를 포교하고 있는 아가씨 김 선생을 데리고 섭이들이 노는 곳에 왔다. 대구에서 온 김 선생은 도회지에서 온 아가씨답게 세련된 용모였다.
자기도 고등학교 시절 문학소녀였다고 자랑하였으나 섭이네가 볼 때 그녀의 문학론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어쩌다가 한 번씩 오는 친구가 늦게 들어오면서 오늘 읍내 갔더니 극장에서 김래성의 원작 청춘극장을 상영 하더라고 했다.
남봉현 형이 청춘극장 소설을 읽었다며 젊은이들이 꼭 한번 읽어야 할 소설이라고 하였다.
김 선생이 자기는 소설을 읽고 영화도 보았다며 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잘 되었더라 하고, 남봉현 형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남봉현 형과 김 선생이 간 뒤에 대구에서 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친구가 청춘극장 소설은 사건과 인물의 배역이 좀 어색하고 흥미 위주로 쓰여 져서 문학성이 떨어지는 작품이라고 폄하를 했다.
벼들이 익는 가을 섭이가 대구에 갔다가 오는 버스 안에서 책을 파는 외판원들이 올라와 협객 김두환과 청춘극장 두 권을 반에 반값도 안 되는 100원에 판다고 하였다.
얼마 전 친구네 집에서 청춘극장 소설과 영화에 대하여 남봉현 형과 통일교 김 선생이 극찬 하던 생각이 나고 값이 싼 100원이라는데 구미가 당겨 쌌더니 해적판이라서 인쇄나 제본이 조잡하고 읽는 중에 책장이 빠지곤 하였다. 내용은 남봉현 형이나 김 선생이 하던 이야기와 달리 젊은이들이 읽어야할 만한 가치라기보다는 친구의 말처럼 섭이가 보기에도 문학성이 없었다.
손 씨 아저씨 집 마루에 있는 이 책은 正本이라 인쇄와 제본이 깔끔했다.
아는 내용이라 별 의미는 없이 심심하여 뒤적이고 있는데, 끓은 매운탕에 술상을 가져온 손 씨 아저씨가 책을 뒤적이는 섭이를 보고, 그 책이 아까 화물차 운전수가 놓아두고 간 것 같은데 집에 가져가서 보라고 하였다.
섭이가 책을 덮으면서 "화물차 운전수에게 돌려주어야지요. 저 이 책 읽어 보았습니다." 하고는 술상을 받아 마루에 앉았다.
양주를 생전 처음으로 마셔보는 섭이는 마시다가 깜짝 놀랐다.
멋모르고 술을 마시자 목과 코를 팍 쏘며 머리가 찡하고 정신이 아찔했다. 아저씨가 젊은 사람이 그 정도를 가지고 뭘 그러느냐면서 찬 물을 타주었다.
뜨거운 매운탕에는 양주가 어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소주 한 병 주량은 되는 섭이지만 세 잔을 마시고나니 소주와는 달리 취기가 확 올라왔다.
좀 시장 했던 탓인지 뜨거운 매운탕은 꽤나 맛이 있었다.
섭은 술에 취한 목소리로 청춘극장 이야기를 꺼냈다.
"아저씨 제가 청춘극장 저 소설을 전에 읽었는데 말입니다. 작자 김래성 선생님이 양반집 귀공자님인지는 몰라도 소설을 더럽게 썼습디다."
양주 서너 잔에 기분이 좋아진 손 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작가 김래성이가 소설을 더럽게 섰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하고 반문하셨다.
독한 양주 석 잔에 취기가 오른 섭은 조금 흥분된 어조로 "청춘극장을 읽어 보셨습니까? 못 읽으셨다면 제가 설명을 좀 해 드리지요."
섭은 벌써 혀가 좀 꼬부리지는 목소리로 "아저씨는 양반이셨습니까? 저는 조상님이 천한 상놈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철이 들면서 무식하고 배운 것이 없는 아버지를 독촉해서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을 22살에 떠나 고모님이 살고 있는 금로동으로 왔습니다."
"저는 앞으로 소설가가 되고 싶습니다. 김래성씨의 청춘극장같이 허접한 소설이 아니라 정말 사랑과 꿈이 있는 희망의 소설을 한번 쓰고 싶습니다. 김래성씨 이 작자가 사대부 양반님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상놈의 아들 준길이는 아주 나쁜 악질 왜놈의 앞잡이로 만들어 놓고 말입니다. 나라를 망하게 한 사대부 양반 댁 도련님들은 모두 독립운동을 하는 훌륭한 애국지사라는 배역을 맡겨주었더란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양반집 도련님들은 학교에서 상놈의 아들 준길이를 미워하며 괴롭히고 따돌렸습니다. 미움과 질시를 받으며 증오심으로 삐뚤어진 준길이는 양반님들의 멸시와 천대를 벗어나 먹고 살기 위해서 왜놈 헌병 보조원이 되자, 양반 댁 아드님들이 이것을 못 보아주어 증오하며 이를 갈더란 말입니다. 소위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애국운동을 한다면서 천출로 태어나 자기를 천대하고 짓밟는 민족과 양반에게 반격하기 위해 왜놈 앞잡이가 된 준길이를 이해하고 가엽게 여기며 앞으로 해방 될 조국에서 같이 살아야 할 동포요 민족으로서 품어주지는 못하고, 여전히 상놈의 새끼라서 저렇게 일본의 앞잡이 짓을 하다면서 미워하고 있는 이런 가치관과 생명이 없는 소설이드라 말입니다. 사대부 양반들에게 인간 이하의 멸시와 천대를 받던 천한 상놈의 자식이 서럽고 한 많은 세상에 신분의 변화만 할 수 있다면 왜놈 헌병의 앞잡이가 아니라 그 어떤 짓도 할 수 있는 것이 그 시대적으로 볼 때에 당연한 일 아니었겠습니까? 진정한 지성인이며 애국자들이라면 이를 이해 해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양반집 자제들에게 짐승만도 못한 천대를 받으며 굶주림의 가난 속에 자란 준길에게 사대부 양반님들이 망해 먹은 조국보다야 인간답게 먹고 살 수 있고 자기를 무시하고 천대하던 양반님들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처 들고 큰 소리 한번 빵빵 칠 수 있게 해주는 일본 헌병들의 앞잡이가 어찌 잘못이며 왜 그것이 나쁩니까? 저는 그것이야말로 양반님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상놈 준길이의 통쾌한 복수라고 생각합니다. 불쌍하고 천한 상놈의 아들 준길이가 악질 왜놈의 앞잡이가 되도록 만든 것은, 준길이를 상놈이라고 인간 이하로 멸시하며 나라를 망해먹은 자칭 사대부 악질 양반님들이 아니었습니다. 준길이의 인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그 따위 양반님의 자제님들이 애국청년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하는 지성이라고 써놓은 이런 소설이야말로 우스운 난센스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상놈 준길이에게 자기를 천대하며 짓밟으며 멸시하는 그런 조국과 민족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상놈이라도 인격으로 존중해주고 비록 무식하고 악한 일본헌병 앞잡이가 되었다 하여도 이 땅에 살아온 같은 민족이기에 앞으로 해방되는 조국강산에서 함께 살아가야한다는 애정으로 용서 해 주어서야 진정한 지성인이요 애국자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조국의 독립을 꿈꾼다는 애국청년이 상놈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왜놈 앞잡이라고 조소하는 이따위 소설 작가야말로 고약하고 몰지각한 자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섭은 독한 양주 몇 잔에 자기 분노로 흥분하고 있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남들에게 하대를 받는 것을 보며 자란 서럽고 천한 상놈의 후손이라 가슴 속에 한이 서린 놈입니다. 조선에 양반님들 孔孟의 이름을 팔아 권력의 칼을 휘두른 人白丁이요, 백성들을 착취해 먹은 화적패들이었기에 나라가 일본에 망하지 않았습니까? 진정한 애국자요, 선비라면 반민족 행위를 하는 자들까지도 가슴에 품고 민족일체를 이루려고 노력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천한 자들에게도 그들의 재능과 능력을 따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조국이요, 민족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조선의 참 선비 연암 박지원 선생님을 보십시오. 서출들을 얼마나 아꼈습니까? 참된 작가라면 왜놈 헌병 보조원으로 전락한 준길이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 가슴 아파하며 동포로서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소설을 써야 진정한 지식인이요. 생명이 있는 소설이 될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식인이요, 애국자라면서 상놈을 짐승처럼 멸시 천대하여 민족을 버리고 왜놈의 앞잡이가 되도록 만들어놓은 그런 병법과 통치술로 어떻게 나라를 독립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지난날의 양반들의 과오를 후회하며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할 줄 알고 상놈에게 용서를 빌어서야 상놈도 일본에 등을 돌리고 민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았겠습니까? 나라를 망해 먹고도 여전히 상놈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양반자제님들께서 자기네는 지식인이고 애국자연 하면서 가난과 천대를 견디다 못해 악질 왜놈 헌병 앞잡이가 된 상놈을 반민족 자라고 하는 이따위 소설에 무슨 생명이 있느냐 말입니다. 이런 소설을 칭송 한다면 이 나라 이 사회에 무슨 내일의 희망이 있겠습니까? 이런 소설 따위의 정신문화가 해방 된 오늘의 이 나라 이 사회를 분열하고 부도덕한 늪으로 빠트리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의 앞잡이가 된 천한 상놈들이 반민족 자가 아니라 가난한 백성을 착취하며 멸시 천대한 이 나라의 소수의 양반네들이 진정한 반민족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준길이 같은 상놈들을 친일파로 만든 것이야말로 자기들의 잘못이라고 자성하며 친일을 한 자들도 해방 되는 조국에서 함께 살아가야할 동포라고 생각하는 소설을 썼다면 얼마나 멋지겠습니까?"
"이승만이가 반민족특위를 해체한 것을 비난하는 인간들을 저는 옳게 보지 않습니다. 제 부모님은 무식해서 친일도 빨갱이도 못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분노하나 봅니다. 아저씨 제가 취했나 봅니다. 용서하십시오. 너무 횡설수설했습니다."
때 아닌 섭이의 분노를 넋 나간 듯이 앉아 듣고 있던 손 씨 아저씨는 섭이의 항변에 강한 전율이 느껴졌다.
"섭아!"
"자네 말이 맞아, 그래 이야기를 계속 해봐라."
"아직 자네 생각이 어리고 말에 서툰 점은 있다마는 내 평생 처음으로 스승을 만난 것 같다. 오늘 밤 자네와 같이 마음을 열어놓고 정말 한번 취해보고 싶다."
(계속)
어린 날의 회상
취기가 오른 손 씨 아저씨가 약간 비틀거리며 일어나 전깃불을 켜고 모기향을 피우더니 식은 매운탕을 비우고 뜨거운 것으로 가져오면서 매운탕이 양주 안주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술잔을 채워 섭이와 잔을 부딪치며, "젊은 자네와 내가 이 밤에 동지가 되어보고 싶다." 하고는 두어 잔을 거푸 마시더니 취기에 상기된 얼굴로 "마누라에게도 말 하지 못한 누구에겐가 언제 한번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오늘 밤 젊은 자네와 할 수 있게 되어서 내가 살아온 보람이 있는 날이라고 생각한다" 하고는 60평생 가슴에 묻어 두었던 자신의 비밀을 쏟아냈다.
선출(先出)이는 양산군 물금면 범어(凡魚)리 성 참봉(成 參奉) 댁 하인의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참봉 댁에는 선출이보다 한 살 더 먹은 석이 도련님이 있었다.
심성이 착하고 재주가 특출하여 일곱 살에 눈을 감고도 사서삼경이며 주역을 줄줄 외워 주위 사람들은 천재가 났다며 놀라워했다.
석이도련님이 끼니를 굶는 마을 아이들을 불러다가 하녀인 순달이 엄마를 시켜 밥을 먹도록 해주고 동몽선습(童蒙先習)이나 계몽편(啓蒙編) 같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한문책까지 가르쳐 주었다.
참봉 댁 마님은 그런 손자 석이 도련님을 보고 앞으로 큰 사람이 될 재목이라며 그 소행을 기뻐하며 순달이 어미를 시켜 항상 가마솥에 밥을 많이 해놓고 마을 아이들이 와서 먹도록 하라고 시켰다.
배가 고픈 아이들은 석이 도련님에게 한문을 배우는 것 보다 밥을 얻어먹는 것이 좋아 모여 들어 한문도 배웠다.
선출이도 석이 도련님에게 한문을 배우는 것이 좋았다.
아들 선출이가 동몽선습을 보지도 않고 줄줄 읽고 쓰는 것을 본 손 집사는 아이들에게 진작 글을 가르치지 못한 것을 깨닫고 저녁이면 선출이와 후출이 그리고 아내 갓난이에게 까지 글을 가르쳐주었다.
손 집사는 남의 집 하인이지만 선비들 못지않게 한학에 능통했다. 어릴 때부터 참봉 댁 서방님(석이 도련님 부친)과 같이 독선생에게 글을 배워 사서삼경은 물론 주역, 한비자, 심지어 손오병법 육도삼략까지 수 십 번을 읽어 참봉어른도 모르는 글이 있으면 손 집사에게 물어 볼 정도다.
손 집사는 한문 뿐만 아니고 일본 말도 능통하다.
청일전쟁 후 밀려드는 일본 세력을 보고 성 참봉은 자기 옆에 일본말 하는 사람이 필요함을 깨닫고 15살 먹은 아들과 12살 먹은 하인 용바우에게 일본 말을 배우게 하였다.
마침 마을에 일본 역관을 지내다가 관청에 미움을 받아 쫓겨난 참봉과 동갑인 박 서방이란 사람이 있어 그에게 일본말을 배우게 하였다.
박 서방은 중인이었지만 한문과 일본 말에 능통하여 성 참봉이 아들 독선생으로 가르치며 하인인 용바우도 같이 배우게 하였다.
용바우는 결혼한 후에도 시간만 나면 독서를 하고 있어 어느 선비 못지않다는 말을 들었다.
아홉 살 난, 석이 도련님을 소학교에 보내면서 참봉어른은 선출이도 같이 학교에 보냈다.
같이 학교에 보내주는 것이지만 참봉 어른의 속심은 선출이가 석이 도련님의 잔심부름을 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선출이가 석이 도련님보다 한 살 어려도 키와 체격은 비슷하나 힘은 훨씬 세어 학교에서 아이들이 석이 도련님과 싸움이라도 나면 선출이가 대신 싸워 때려눕히므로 감히 싸우려는 아이들이 없었다.
석이 도련님은 부모를 일찍 여이었다.
구포면 낙동강 변에서 단오 날 씨름대회가 열렸다.
동래군, 양산군, 김해군 등 원근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와 각 지역 면단위 기(氣)싸움이 대단했다.
석이 도련님의 아버지였던 새 서방님도 물금면 청년들의 씨름 선수를 후원하려고 집에서 면내 청년들이 먹을 음식을 소달구지에 실어 보내고 자전거를 타고 면내 청년들과 어울려 갔다가 외출을 나온 다대포에 있는 일본 군인들을 보고 분개한 조선청년들이 시비를 걸어 폭행을 하였다.
새 서방님이 조선 청년들을 말리는데 청년들에게 얻어맞은 일본군인 하나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얻어맞은 것이 분하여 마구 휘두르는 칼에 찔려 치료를 했으나 낫지 않고 여름이 되면서 상처가 속으로 곪아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성 참봉은 아들의 죽음을 어디 한번 제대로 호소도 못해봤다.
관청에 호소를 했으나 국력이 없으니 일본 군인들이 한 일이라 어물거리기만 했고, 다대포에 있는 일본군 부대에 항의를 해보았으나 조선청년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 생긴 사건인데 따지려 든다며 분노한 일본군 장교는 오히려 성 참봉에게 발길질을 했다.
남편을 잃은 새 아씨는 얼이 빠져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늘 울기만 하다가 병을 얻어 석이 도련님을 겨우 두 돌이 되었을 때 죽고 말았다.
조실부모한 석이 도련님을 참봉 댁에서는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웠으나 응석을 부리지 않고 반듯하고 착하게 자라고 있었다.
참봉 댁에는 하인으로 선출이네와 정돌이 영감 내외, 그리고 어린 딸과 같이 사는 순달이 모녀가 행랑채에서 살았다.
갑오경장 전에는 하인이 많았던 집이라 행랑이 많이 비어 있고, 대문 밖에는 소를 먹이는 마구간이 달린 여러 채 집들은 머슴들이 살고 있다.
머슴 집 마당에는 큰 돼지우리도 있어 여러 마리 돼지를 키우며 명절이나 집안에 귀한 손님이 올 때면 잡곤 하였다.
참봉어른은 아들이 죽고 나서 글재주가 좋은 용바우를 손 집사라 부르며 집안 재산관리를 맡겼다.
참봉 어른이 손 집사라고 부르면서 집안에서는 모두 손 집사라고 부르고 작인들과 머슴들은 집사님 하고 존칭을 하였다.
참봉어른의 조부 진사 공 산소에 40여 년 전에 세운 비석에서 진사(進士)라고 쓴 글자가 한 곳에서는 나아갈 진(進)자가 아닌 구슬 진(璡)자로 잘못 쓰여 있는 것을 손 집사가 가을 시제(時祭)때 발견하였다.
참봉 어른은 이를 보고 놀라 집안의 이런 큰 실수가 있느냐며 즉시 교체를 하자고 했으나 주위에서 산소는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이 아니니 한식에 교체하라고 하여 그렇게 하기로 했다.
가을부터 겨울 내 산소 석물 교체가 집안의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1919년 한식날은 음력 3월 초엿새였다.
이 날 하필이면 창원, 밀양, 양산 등의 유림 선비들의 급한 모임을 밀양군 부북면에 있는 禮林書院으로 소집을 하였다.
유림 선비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성 참봉은 어렵게 연초부터 참석하게 되고 임원까지 맡아보면서 유림의 일이라면 집안일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성 참봉은 석물 교체를 정한 날 보다 하루 당겨 한식 전날인 초닷새로 정하자 산소는 아무 때나 손을 될 수 없는 일인데 그렇게 한다면서 유림에 못가도 한식에 하자고 마님이 말렸으나 참봉 어른은 유림 선비들의 모임이 어떤 모임인데 빠진단 말이냐며 기어이 초닷새 날로 밀어붙였다.
손 집사가 머슴들과 마을 사람들을 불러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안골에 있는 조부 산소 비석(碑石)을 교체하는 날, 날씨까지 좋아 선출이는 물론 소달구지에 점심밥을 싣고 가는 작은 머슴을 따라 동이에 국을 담아 인 동내 아낙들과 동네 노인네와 아이들이 같이 올라가 하얀 쌀밥에 고깃국을 배가 부르도록 먹고 떡까지 얻어서 가져가는 등 안골은 온통 마을 소풍잔치가 되었다.
연초부터 큰일을 한다고 준비가 떠들썩하였으나 막상 일은 단조롭고 일손이 많아 빨리 끝이 나서 점심을 먹고는 참봉어른과 마을 사람들은 먼저 집으로 내려가고, 손 집사가 머슴들을 데리고 남아 뒷정리를 하였다.
먼저 내려온 참봉어른이 집에 도착하자 일본 순사와 헌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들어와 조사 할 것이 있으니 경찰서로 좀 같이 가 달라고 하였다.
손 집사가 일꾼들과 같이 내려오는데 마을에서 젊은이가 급하게 뛰어와 참봉 어른이 순사들에게 잡혀갔다고 전갈을 했다.
손 집사가 급하게 집으로 달려오니 마을 사람들이 집안사람들과 참봉 댁에 모여 무슨 일이냐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집에 도착한 손 집사는 우선 참봉 어른이 밤에 입을 따뜻한 옷과 용돈을 좀 챙겨서 자전거를 타고 경찰서로 갔다.
평소 건강하지 못해 밖으로 잘 나오지도 않으시는 마님까지 바깥마당에 멍석을 깔아놓고 나와 앉아 대체 무슨 일인지 몰라 초조하게 걱정을 하고, 저녁때 날씨가 서늘해지자 머슴들이 헌 가마솥에 숯불을 담아 내놓았다.
마당에 초롱불이 켜지고도 한참 후에야 돌아온 손 집사는 마님과 같이 안채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있다가 나왔다.
그 동안 마을 사람들은 가고 머슴들과 집안 하인들이 기다리다가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지만 손 집사는 아직은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고만 하였다.
참봉어른은 바깥채와 안채 사이에 담 밖으로 난 작은 시문(柴門)으로 드나드는 별체에서 거처를 한다.
별채는 울처럼 둘러있는 산 능선 아래 대나무 숲을 이루어 아늑한 양지에 안채 마당보다 서너 자가 높은 곳에 지어 안채에서 보면 담이 무척 높으며 평소에도 아이들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연초부터 별체에 나선 손님들이 자주 찾아들었다.
성 참봉은 학문이 없는데다 이름뿐인 종 9품의 참봉벼슬도 소문에 돈을 주고 샀다고 들렸다.
그러므로 성 참봉을 유림에서 그동안 선비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밀양 창원 양산 동래 유림들이 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자금을 모으는데 대부분의 부호들은 일본에 밀착 되어 있어 자금을 부탁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처사라 아예 접근하지도 않았으나 삼천석이 지기가 넘는 재산을 가진 성 참봉은 일본 군인들에게 아들이 칼을 맞아 죽었고, 동양척식회사가 토지 조사를 하면서 천석 지기가 넘는 토지도 등기가 되지 않은 땅이라 하여 빼앗아 가고 말았다.
재정이 필요했던 유림 선비들이 일본에 한이 많은 성 참봉을 찾아들었다.
성 참봉은 일본에게 아들과 재산을 잃은 적개심을 어디다 말도 못하고 울분을 삭여왔는데, 평소에 동경했던 유림 선비들이 그냥 찾아줘도 고마운데, 나라를 찾겠다며 이렇게 찾아오자, 이래저래 고맙고 반가워 부탁도 하기 전에 스스로 유림을 위해 천석 금을 쾌히 내놓아 유림선비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성 참봉을 보고 유림 선비들은 의기(義氣)가 있는 선비를 지금까지 몰라보았다며 유림의 중심인 임원자리까지 맡겨주었다.
유림선비들과 어울리는 것도 반가운 일인데 의기가 있는 선비라는 칭찬까지 듣게 되자 성 참봉은 의협심이 한껏 넘쳐났다.
이래저래 유림 선비들이 성 참봉 별채를 모임의 장소로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불렀다는 소문과 함께 각처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3월 5일 밤 손 집사와 별체에서 술을 한잔 하고 있는데 젊은이 서너 명이 찾아왔다.
경성의전에 다니는 양봉근이 양력 3월 29일 구포장날 장꾼들과 함께할 만세를 부르자는 연락을 받고 준비를 하던 구포 면서기 임봉래가 성 참봉을 찾아와 단도직입적으로 일제에 항거하는 만세운동을 하려고 현수막과 태극기를 만들고 청년들을 동원하려고 하는데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젊은이들이라 자금 융통이 어려워서 찾아왔으니 쌀 20가마니 값만 좀 도와달라고 하였다.
성 참봉 재산에 청년들이 무슨 행사를 하겠다며 쌀 20가마니 금을 도와 달라는데 못 도와줄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일제에 항거하겠다는 청년들이 고맙고 기특하기는 하지만 만일을 생각하면 철부지들에게 함부로 돈을 내줄 수는 없는 일이다.
도와주더라도 만일을 위해서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된다.
"자네들이 하는 일에 도와주고 싶어도 내가 돈을 줄 수는 없으니 자네들이 꼭 원한다면 내 집에 와서 강도짓을 해서 빼앗아 가거라. 그냥이야 어떻게 돈을 주겠느냐?"
성 참봉의 말에 영리한 임봉래가 말뜻을 알아듣고 3월 7일 밤에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성 참봉어른이 하인들과 머슴들에게 일철이 돌아왔으니 하루저녁 모꼬지를 하자며 행랑채로 불러 모아 닭을 여러 마리 잡고 밤이 늦도록 술과 푸짐한 음식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데 건장한 청년 다섯이 얼굴을 가리고 들어와 하인과 머슴들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칼로 참봉어른을 위협하며 돈을 내 놓으라고 위협하였다.
참봉어른의 목에 칼을 보고 놀란 마님이 돈을 줄 테니 사람을 놓아 달라며 강도 한명을 데리고 안채로 들어가 순순히 돈을 내 놓았다.
강도들이 나가고 나서 집안에 도움이 되지 않으니 소문을 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성 참봉은 어처구니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참봉이 거처하는 별체에 야식을 올리러 들어간 갓난이에게 흔히 양반들이 하녀들에게 저지르는 음흉한 짓을 하고 말았다.
손 집사는 해마다 영동이 지나면 작인들을 둘러보고 한해 농사를 잘 짓자고 격려를 하는 모꼬지를 열어 술을 한잔씩 먹인다.
작인들 모꼬지를 위해 삼랑진으로 간 손 집사는 내일 오후는 되어야 온다.
참봉어른이 평소와는 달리 갓난이에게 야식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부엌 설거지를 마치고 야식을 준비해서 가져가는 갓난이를 보고 아들 선출이가 몰래 따라갔다.
참봉 어른이 야식을 가져온 갓난이를 안으로 불렀다.
갓난이가 간식을 가지고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선출 이는 댓돌 가까이까지 다가갔는데 안에서 나리! 하는 엄마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놀라는 소리에 선출이도 놀랐지만 겨우 아홉 살 아이답지 않게 하인들은 이럴 때 모르는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의 놀란 소리에 이상한 애감이 들어 조심스럽게 별체 뒤로 가서 봉창 문 옆에 서서 안의 동정에 귀를 기울였다.
엄마가 내 보내 달라고 애원을 하는데 "네년이 내 말을 거역할 거냐?" 하고 참봉어른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출이는 조심스럽게 창호지가 찢어진 창문 구멍으로 안을 들어다 보려는데 구멍이 넉넉지 못해 어설피 보였으나 참봉 어른이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엄마 손을 잡고 "이 사람아 옷 벗어라" 하는 소리가 창밖에까지 들렸다.
선출이는 동생 후출이와 같이 따뜻한 철에는 작은 방에서 잠을 자지만 겨울이면 엄마 아버지와 한 방에서 잠을 자 아버지와 엄마 잠자리를 여러 번 훔쳐보았다.
어리지만 선출이도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선출이는 기운 없이 방으로 돌아와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그냥 뛰쳐나오지 못하는 엄마와 그러는 참봉어른이 미웠다.
엄마와 성 참봉의 일을 상상하며 슬퍼하다가 잠이 드는데 엄마가 조용히 들어오더니 윗목에 앉아서 소리 없이 울고 있다.
우는 엄마를 훔쳐보면서 이것이 상놈이기 때문이라는 나이답지 않은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참봉 댁 토지가 많이 있는 삼량진에서 농사를 짓는 작인들을 불러 술대접을 하며 여러 가지 일들을 지시하고 다음 날 오후 늦게야 집으로 돌아온 손 집사는 저녁을 먹자, 피곤하다며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후출이와 같이 일찍 잠이 들었던 선출이가 이상한 방안 분위기에 잠을 깨어 보니 캄캄한 데서 아버지는 담배를 피우고 엄마는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어제 일을 혹시 아버지가 알았을까봐 선출이는 마음이 불안했다.
담배를 태우던 손 집사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우리가 떠나자" 했다.
엄마가 걱정스러운 말로 "어린 것들을 데리고 어떻게?" 하고 반문을 하자, 아버지가 "나도 생각하는 게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아무래도 이제는 떠날 때가 된 것 같다" 하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아버지가 집안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어매가 살았을 때다. 안방마님은 첫아들인 죽은 새서방님을 낳고 얼마 안 되어 어쩌다가 허리를 다쳐 그 짓을 할 때마다 힘들어하니까 대신 참봉이 어매를 불러들여 욕을 보였다."
"어매는 자네처럼 영리하고 참 예뻤지! 마님도 참봉이 어매를 불러드리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가 그 일을 제대로 못하다보니 모르는 척 한 거야!"
"어매 나이 스물아홉 살에 아배가 돌아가셨는데, 아베가 돌아가신지 한 달도 못되어 어매를 별채로 불러들여서 밤마다 욕을 보이는데 집안사람들이 알까봐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겠나?"
"상전에게 밤마다 불려가 시중을 드는 능욕을 견디기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겨우 열일곱 살 난 나를 앉혀놓고 그런 부끄러운 이야기를 해주고는 36살 한창 나이에 목을 매버렸겠나?"
"상전들이란 여종을 통해 자기 자식을 낳아도 종으로 부려먹는 짐승 같은 것들인데 어매는 어린 나 때문에 밤마다 그 더러운 잠자리 시중을 들며 참고 살아오다가 열일곱 살 난 내가 혼자서도 살아 갈 수 있다 싶었는지 그렇게 부끄러운 이야기를 해주며 이 집에서 내가 스스로 나갈 힘이 있을 때까지는 말과 행동 조심하라고 당부하더니 그렇게 목숨을 저버렸다 말이다."
손 집사는 목이 메어 눈물을 지으면서 아내 갓난이에게 "자네는 어제 일을 빨리 잊어라, 상것들에게 정조가 어디 있나? 양반들이 달라며 줘야지 어쩌나?"
"우리 어매나 자네를 내가 어찌 탓하겠는가?"
"짐승만도 못한 놈의 자식, 어매에게 그 짓을 하고 어떻게 자네까지......,"
"내가 언젠가는 한을 풀려고 했으나 자네와 결혼하는 바람에 쉬 결행하지 못하고 애들도 생겼고, 또 참봉이 우리 식구들에게 무슨 마음이었는지 과분하게 잘해주어 어매 일을 잊어주려고 했는데 자네에게까지 그 짓을 했으니 이제 더는 참을 수 없다."
"늙은 놈이 어매를 죽게 한 것도 모자라 자네에게까지 그 짓을 했으니, 앞으로 잘못하다가는 우리 가족이 모두가 비명횡사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갓난이는 어제 일을 손 집사에게 말하는 것이 도리라 여겨 나오지 않는 말을 울먹이며 했는데 손 집사의 비장한 말을 들으니 고맙기도 하고 불안하여 "여보시오! 무슨 변고를 치려고 그래요. 내가 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만......., 우리 상것들이야 양반인 상전 앞에 무슨 힘이 있나요." 하고 울었다.
"자네는 내가 하는 대로 가만있어라. 자네와 애들을 두고 어설픈 짓은 절대로 안한다." 손 집사의 목소리에는 비장한 느낌이 들었다.
경찰서에서 호출이 와서 갔다가 오후 늦게야 돌아온 손 집사는 마님 방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나왔다.
잠자리에서 남편이 걱정되어 임자도 같이 연류 되는 것 아니냐고 물어보는 갓난이에게 손 집사는 경찰서에서 구포장날 만세사건과 관련하여 참봉 댁으로 누가 찾아 왔는지 조사를 하는데 내사 하인이라 누가 누군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거짓말 하면 잡아넣는다고 위협을 한참 하다가 보내 주더라고 했다.
그래도 남편이 연류 될까봐 걱정하는 아내 갓난이에게 손 집사는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니 마음을 놓으라며 안심시키며 품에 꼭 껴안아 주었다.
경찰서에서 가족 면회가 허락이 되었다.
손 집사는 인력거를 불러 마님과 석이 도련님을 태우고, 자전거를 타고 같이 경찰서에 가서 참봉나리를 면회하였다.
면회를 다녀온 후로는 돈을 장만하기 위해 손 집사가 매일이다 하고 자전거를 타고 삼랑진과 물금으로 다니며 땅을 판다고 내놓았다.
참봉어른을 빼 내려면 경찰과 검찰에 아무래도 많은 돈을 써야할 형편인데 지난 가을 추수한 곡식은 대부분 유림에 헌납하고 남은 것은 정초에 장리를 주어버렸기 때문에 돈을 장만할 여분이 없고, 토지 얼마를 팔려고 내놓았으나 농사철이 임박해 사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고 손 집사가 걱정을 했다.
(계속)
- 새 주인을 위해 -
집에 왔다 간 사람도 없는데 선출이 형제가 신는 신이 한꺼번에 없어졌다.
손 집사가 동래 장에서 석이 도련님 운동화를 사면서 선출이 형제 것과 순달이 꽃신을 사다 주었다.
촌에서 운동화를 신는 아이들이 없으므로 마을에서는 누가 훔쳐 가도 신지도 못할 것인데 선출이 형제 것만 없어져버렸다.
개들이 물어가도 거름 터나 마루 밑에 있을 터인데 어찌 된 일인지 두 켤레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갓난이와 순달이 엄마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고 작은 머슴이 만들어준 짚신을 후출이가 신지 않겠다며 울면서 맨발로 다녔다.
엄마가 물금 장날 신을 사준다고 달래도 말을 듣지 않았다.
물금 장날이 공일날이 되어서 갓난이가 아이들 신을 사 신기려고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길옆 개울가에는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선출이에게 이 날 찔레꽃 향기는 유별나게 향기로웠다.
화창한 5월 초여름의 장터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갓난이는 선출이 형제를 잃어버릴까봐 손을 꼭 잡고 다니며 신발가게에 들려 까만 운동화를 사 신기자 후출이는 아버지가 사다준 것만 못하다고 칭얼거렸다.
우는 후출이가 좋아하는 왜 국수(가락국수)를 사 준다고 달랬다.
아이들에게 국수를 먹고 나자 갓난이는 아이들을 데리고 기차 정거장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멀리서만 보아왔던 기차를 처음으로 타면서 선출이는 긴장한 엄마 표정에서 이상한 느낌을 느끼고 말이 없는데 후출이는 왜 기차를 타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
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나서야 갓난이는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만나러 가니 차 안에서 까불지 말고 점잖게 앉아 있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오후 늧께 기차에서 내려 역 광장으로 나와서 선출이는 글을 좀 안다고 역사에 붙은 한문으로 된 역 이름이 密陽驛(밀양역)을 보고 "엄마 여기가 밀양역이야?" 하고 묻는데 선출아! 하며 아버지 손 집사가 나타났다.
선출이와 후출이는 아버지가 반가워 아버지! 하고 불렀다.
"많이 기다렸지요." 하는 갓난이에게 손 집사는 빨리 따라 오라 하고는 앞서 골목 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돼지 국밥을 시켰으나 선출이 형제는 물금 장에서 국수를 먹고 와서 먹지 않고 장난만 치는데 갓난이는 장터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와서 시장하던 참이라 선출이 국밥까지 먹었다.
선출이는 우리가 참봉 댁에서 멀리 도망을 가는 구나 생각하면서 아버지를 따라 기차를 탔다.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출발을 하자 긴장하는 아내 갓난이에게,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묵어라" 하고 위로한 손 집사는 권련을 피워 물었다.
선출이 형제는 종일 걸어 다닌 탓인지 일찍 곤하게 잠이 들었다.
긴 초여름 해도 지고 어둠이 깔리자 갓난이가 입을 열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빈손으로 어디 가서 어떻게 살아요?"
"걱정하지 마라 우리 엄마 목숨 값은 받아가야지. 물금에서 논 스무 마지기와 삼랑진에서 서른다섯 마지기를 팔았으니 헐값에 팔았지만 이 돈이면 어디로 가도 우리 식구는 살 수 있을 거다."
손 집사 말에 놀라 "여보 어떻게 그런 일을" 하면서도 마음은 놓였다.
갓난이는 차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잠이 오지 않고 손 집사 상자에 신경이 쓰였다.
사람들이 모두 내릴 준비를 하자 손 집사도 밀양에서 가지고 온 무거운 상자를 챙겨 짊어지고 갓난이가 아이들을 깨워 기차에서 내리는데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니 역전의 식당은 아침부터 손님들이 꽉 차서 겨우 자리를 잡아 콩나물 국밥을 먹었다.
아침을 먹고 굉장히 으리으리한 역 대합실에서 한참을 기다려 또 기차를 타고 가는데 선출이와 후출이가 까불며 장난을 치자 갓난이가 조용히 하라고 만류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아무 말 없이 창밖만 보고 있던 손 집사가 내리자고 하였다.
갓난이와 아이들은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 내리자, 손 집사가 비싼 인력거를 불러 가족들을 태웠다.
갓난이는 생전 처음으로 인력거를 타고 따라간 곳이 개성 경찰서였다.
경찰서 문 앞에는 칼을 찬 무서운 순사가 문지기를 서고 있었다.
갓난이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손 집사가 일본말로 순사에게 무어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따라 오라며 수위실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니 젊은 순사 한 사람이 와서 손 집사 가족들을 따라 오라고 불렀다.
손 집사 네 가족들이 순사를 따라 경찰서 뒤편에 있는 관사로 가니 후지끼상이 나와 손 집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후지끼상은 며칠 전 양산 경찰서에서 개성 경찰서로 온 형사부장이다.
손 집사는 후지끼상을 따라 개성으로 왔다.
후지끼상은 손 집사 가족들에게 당분간 이 관사에서 생활하라고 하였다.
손 집사는 개성에 온 다음 날부터 이름을 도시오라고 고치고 후지끼상을 따라 다니는 경찰보조로 출근하게 되었다.
후지끼는 손 집사를 통해 3월 29일 구포장날 만세운동을 선도한 구포 면서기 임봉래 일당에게 성 참봉이 쌀 20가마니 값을 어떤 방법으로 전달 된 것과 마산 항일시위에 관련된 유림 선비들과 부산진 일신여학교 동래고보 교사들을 뒤에서 후원한 선비들의 명단과 성 참봉이 유림에 내놓은 돈 가운데 얼마가 흘러들어간 것을 입수한 공으로 한 계급 승진하였다.
정보 능력을 인정받고 있던 후지끼는 5월 중순 만세사건 여진이 심한 개성으로 특별 전보(轉補)를 받자 일본 말을 잘하는 손 집사에게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참봉 댁을 떠나야 할 손 집사는 쾌히 후지끼를 따라 개성으로 올라왔다.
자기 토지도 얼마간 장만하고 경찰 보조가 된 손 집사는 전처럼 양반들에게 허리를 굽히지 않고 오히려 위압적인 행세를 하게 되었다.
후지끼는 타고난 정보가로 정보 분석이나 취합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요소요소에 조선인 간자를 심어 하찮은 것에서 좋은 정보를 얻어내고 있었다.
정보를 얻으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므로 간자들의 충성심이 튼튼했고 경찰서 안에서도 다른 일본 사람들과는 달리 조선인 순사나 보조원들에게도 예의가 바르고 친절해서 존경을 받았다.
자기보다 두어 살 위인 후지끼의 이런 인간성에 감복한 도시오는 충성스러운 심복이 되어갔다.
도시오는 경찰 보조원이지만 조선인 순사들보다 지식이 많고 부잣집 집사로 작인들을 다루며, 능숙한 일본 말로 일찍부터 관공서 출입을 한 탓에 빠른 속도로 업무 능력을 갖추어 후지끼의 중요한 수족이 되었다.
개성에 올라온 후 3년째 되는 가을 임진강 지루인 사천 변에 제방을 막으려하자 후지끼가 개풍군수를 찾아가서 제방으로 인해 새로 생기게 될 땅 일부를 도시오가 불하(拂下) 받을 수 있도록 교섭을 했다.
경찰 간부인 후지끼의 도움을 여러 번 받은 조선인 군수는 쌀 200가마니를 군에 헌납해 주면 새로 생기게 될 하천부지 가운데 십만 평 정도는 군수 재량으로 무상 불하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뜻밖의 약속을 받은 후지끼는 도시오에게 쌀 200가마니에 10만평을 불하 받으라고 하였다.
도시오는 하천이 막아지지 않은 불모의 하천에 제방을 막아 농지를 만든다는 말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해마다 홍수 철이면 강물이 범람하는데 어떻게 하천을 막으며, 설사 막는다 해도 어느 천 년에 될 것인지 막연한데 쌀을 200가마니를 주고 불하를 받으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후지끼가 도시오의 어리석음을 꾸중하며 말을 들으라고 했으나 너무 불안해함으로 그렇다면 쌀 백가마니 정도를 버리는 샘치고 5만평만 불하를 받으라고 하였다.
도시오는 차마 후지끼의 권유를 거절하지 못하고 아까운 쌀 백가마니를 군청에 헌납하고 쓸모도 없는 땅 5만평이나 불하를 받았다.
남은 5만평은 조선인 정보 끄나풀들이 나누어 불하를 받도록 해 주었다.
양력 10월부터 시작한 제방 공사는 다음해 3월에 완공이 되었다.
손 집사는 일본에서 들여온 처음 보는 중장비와 농한기를 이용하여 저임금으로 농민들을 동원해서 하천을 막아 나가는 것을 보고는 땅을 더 많이 불하받지 못한 자신의 무지를 후회하면서도 그 5만평에 감사하였다.
제방이 완공되자 불모지였던 땅이 기름진 논과 밭으로 변했다.
일본에서 부모님들이 과수원을 경영하는 후지끼가 도시오에게 돌과 자갈이 많아 농사를 짓기 힘든 땅에는 사과나무를 심으라고 일러주었다.
후지끼의 선진 문화를 신뢰하게 된 도시오는 사리원에 가서 3년 된 사과나무와 배나무, 2년 된 복숭아나무 묘목을 사다가 심었다.
도시오는 값싼 1년생 묘목을 사려고 하는데 후지끼가 묘목 값이 비싸더라도 실하고 좋은 3년생을 사다가 심으로고 일러주었다.
도시오는 1년생 묘목과 3년생 묘목의 차이를 몰랐으나 후지끼가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과일 수확 시기가 2년이나 빨라 어린 묘목보다 오히려 이익이 되는 것을 보고는 후지끼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도시오는 농장이 많아지자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삼랑진에 사는 갓난이 친정 가족들을 불러 올려 농장 관리를 맡겼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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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배경이 정말 그림처럼 선명합니다. 중편일지 하편일지 다음 편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