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인문학-4-다산과 정조의 영원한 이별 -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은 결국 집안 주변의 천주교 사건에 자유로울 수 없어서 서른여덟 한창 일 할 나이에 상소를 올리고 정조와 하직하고 고향으로 귀향하게 된다.
1799년7월 26일 다산은 영원이 벼슬을 마감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 온 다산은 그 이듬해 6월 까지 “죽란사”의 시 모임을 계속하면서 친구들과 시를 짓고 아픈 마음을 달래게 된다. 만남의 운명도 중요하지만 헤어짐의 운명 또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자기를 신임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에서 부터 정조를 잘 보좌한 당대의 명재상 채제공이 갑자기 죽게 된다. 정조와 채제공은 다산에게는 양쪽 날개와 같았는데 비록 낙향해 있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입성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세월을 보내던 중 채제공의 죽음은 한쪽 날개가 꺾이는 불안감이 휩싸이게 된다. 채제공은 영조 때 도승지로 있으면서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서 증폭되는 부자간의 갈등을 해결하려 했던 그의 도량과 열세에 있던 남인 시파(다산파)들의 입장을 강화해 주고 정조의 지위를 확고히 세워 백성이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정조를 잘 보필하고 다산에게 천주교의 큰 방패막이가 된 채제공의 죽음은 다산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정조 이후 마지막 남인 정승이었다. 정조는 채제공을 두고 100년 만에 한명 나올까 말가하는 명재상이라고 했고 채제공의 재상 자리를 받을 사람은 다산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있었던 것 같다. 정조가 승하하고 다산은 살아 있었지만 다산을 알아 준 임금은 정조이후에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 또한 우리 역사에 얼마나 큰 불운이었나. 그는 채제공의 죽음에 이어 낙향한 이듬해인 1800년 6월28일 듯 밖에 청천 벽력 같은 비보를 듣는다. 갑작스런 정조의 죽음이었다. 그 전 6월12일 달 밝은 밤에 혼자 있는데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 맞이하니 정조가 보낸 내각의 서리였다. 정조의 말을 이렇게 전해 주었다.
“요즘 관에서 책을 편찮 할 일이 있으니 곧 불러들어야 할 것이나 주자소를 새로 개수해 벽에 바른 흙이 아직 덜 말라 정결하지 못하니 그믐께면 들어와 경연에 오늘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어지 그를 버리겠는가” 라는 말도 전해 주었다. 이 책 다섯 질은 남겨서 집안에 가보로 보관하여 보고, 다섯 질은 제목을 붙여서 들어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는 말을 듣고 다산은 정조의 총애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정조의 마지막 은전 이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눈에 띄어 18년간 임금의 사랑을 받은 보은의 눈물이 참을 수 없도록 흘러내려 잠을 잘 수가 없았다. 돌아가신 날이 28일이고 29일에 궁궐로 들어 가 책을 교정하는 일을 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각의 서리가 다녀가고 16일 만에 하늘이 무너지는 비보를 접하게 된다. “정조실록”에 보면 정조의 죽은은 갑작스럽게 맞이하여 지금도 의문이 남는다 6월14일 정조의 몸에 종기가 나 약물로 치료하니 효염이 없다는 기록이 나온다. 6월이 되기 10일 전부터 종기가 났고, 종기가 나고 1달 정도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다산은 스물 두 살의 젊은 나이에 소과에 급제해 임금은 다산에게 나이를 묻고 관심을 보여 18년간 임금의 총애를 받은 학자임금과 학자 신하의 만남이었다. 그 이후 스물 여듧에 대과에 급제하여 임금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임금 가까이 보필 한지 18년 애증의 세월에 다산의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겠다. 다산과 정조는 10살 차이다.
얼마나 다산의 능력을 믿었던지 대과에 급제한 그해 겨울 한강의 배다리를 설계해 놓으라는 명을 받아서 휼륭히 완성하기도하고, 사도세자의 원혼을 달려고 그의 묘를 이장하여 계획도시를 만든 수원 화성 설계를 아버지 상중에 지시를 하여 다산은 여막에서 그 설계를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거중기를 만들어 공사비를 4만 냥이나 줄이는 획기적인 방안으로 수원성을 잘 완성하여 현재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갑작스럼 죽음에 독살이라는 애기도 있어나 증명 할 길이 없으니 결론지을 수가 없다. 이제 다산은 모든 날개가 꺾여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가족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형제들과 한데 모여 “여유당”이란 편액을 달고 경전을 강의하고 후학을 가르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여유당이란 조심스럽게 자신을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고향에 내려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경전을 강의하지만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무서운 반대파의 흉계가 엄습해 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800년 11월 정조는 아버지 사도 세자의 능 가까이 영원히 잠들게 된다. 1801년 2월10일 새벽 의금부 도사가 다산을 체포에 국문이 시작 된다. 이가환, 정약용(다산의 형), 이승훈 모두 천주교와 관련이 있고 다산의 친인척이다.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서용보 등 모두 7명이 재판관이 심문하게 된다. 모두들 무죄로 풀어 주자고 주장했으나 우의정 서용보가 반대하여 형님 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장기현으로 첫 유배지가 결정 된다. 서용보는 다산이 암행의사 때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의 곡물에 대한 앙금의 원한으로 판세가 뒤집혀 억울한 유배길에 오르게 된다.
2015년2월11일 새벽에 余艸(여초) 씀
첫댓글 정조는 제가 존경하는 임금 중의 한분인데..안타까운 얘기입니다. 식물로 모든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없앨 수 있다면 우린 더할 나위 없는 화원 세상이 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