荀子[순자]
개요[편집]
전국시대(戰國時代) 후기의 유학자. 이름은 황(況). 경칭으로는 순경(荀卿) 또는 손경자(孫卿子)로도 불린다.[3] 15세부터 직하학궁(稷下學宮)[4]에서 공부하였고 훗날 그 좨주(祭酒)[5]를 세 차례 역임하였다.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부름을 받아 난릉령(蘭陵令)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춘신군이 살해당하면서 파직된 이후로는 제자 양성과 저술에 전념하며 여생을 마쳤다.
순자는 유가 중에서도 특히 경전주의(經典主義), 예(禮), 정명론(正名論), 인위[僞] 등 현실 규범적, 정치적 요소를 중시했고, <열두 선생을 비판함[非十二子]>으로 대표되는 그 전방위적 비판론은 도가, 묵가, 명가 등은 물론이요, 자사와 맹자의 관념적 유가 계통을 비롯해 자하학파, 자유학파, 자장학파 등에도 미쳐 유가 내부의 자성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논변 탐구가 치밀해져 묵가, 명가와 함께 순자학파는 춘추전국 3대 논리학파를 형성했다.
내외부 비판을 가하며 스스로를 공자의 적통으로 인식했으나, 사실 순자의 예(禮)는 공자보다 법적인 부분이 강하고 인식론상으로는 도가의 영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동일한 이유로 제자백가의 여러 학설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했다고 평가를 받아서 선진(先秦)사상의 집대성자라 칭하기도 한다. 이후 한-당나라 시대 때 정통 유학자로 인정받으며 일정한 영향을 미쳐 왔으나, 당나라 말 대유학자 한유가 순자의 학설에 결함이 있다고 말한 이후, 남송 이래의 성리학(주자학) 계통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이단시되었으며, 청나라에 이르러 다시 재조명 받기도 했다.
그의 사상은 공자(孔子)의 사상을 뼈대로 하였기에 인(仁)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면서도, '예(禮)'에 따라 사회적 직분을 구분하여 다스릴 것을 강조하였다.[6] 그가 주장한 예치(禮治)에 따르면, 왕(군자)은 어진 마음(仁)으로써 백성들을 살피고 '예(禮)라는 사회질서' 를 통해 귀천을 나누어 능력있는 자를 등용한다면 천자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순자의 왕도정치)[7]
하지만, 그의 제자인 한비자[8]와 이사(李斯) 등은 왕이 굳이 어진(仁) 행동을 하지 않아도, 능력있는 신하를 등용해 엄격히 법을 집행하면 백성들이 따라와 부국강병해진다는 패도정치를 주장하였으며, 왕도정치는 가식적이며 여유있는 시대에서나 사용 가능한 방법이라고 비판하고 따로 법가를 만들게 된다.
그의 제자는 위 이사로 대표되는 법가, 정치가 계열이 유명하지만, 부구백 등 유가, 학자 계열로 남아 문헌 정리와 보전, 후학 양성에 힘쓴 이들도 있었다.[9]《예기》등 보전된 고대 유가 문헌에는 순자학파의 공과 학색이 적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사마천의 《사기》, 《맹자순경열전》에서는 순자는 수 만 자에 달하는 글을 지어 남겼다 전한다. 전한 시대 유향은 322편에 달하는 순자학파 문서를 32편으로 정리하여《손경신서(孫卿新書)》라 하였다. 당나라 양경이 다시 32편을 20권으로 정리해 현행 《순자》가 되었다. 청 말에는 왕선겸이《순자집해》를 지어 순자를 재평가하고 주석을 모았다. 현행 《순자》는 과연 어디까지가 순자 본인의 글인지, 그의 학파의 글인지, 아니면 가탁된 글인지가 의문시되기도 한다.
오늘날 순자는 공자, 맹자 등으로 대표되는 이상주의 유가 계열에 비해 현실주의 계열로 알려지고 있고, 송대 주자학파에 의해 지나치게 이단시되었다는 점이 감안되어, 학계와 민간에서는 유교의 현대화를 이끌 새 지주로까지 드문드문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현실주의라는 것은 개방성과 유연성보다는 결국 배타성과 획일성으로 귀결되는 규범주의의 일종이었으며, 유가의 독존과 지나친 경전주의, 허례허식을 양산한 한대 유교에서부터 이미 그 영향력의 단점을 드러낸 것이었다.
혹자는 주자학이야말로 순자를 비판하였다지만 순자의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였다며 양자를 나란히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때문에 반주자학 경향이 강했던 청 말이나 일본 근세의 유학자들조차 오히려 일반적으로는 맹자를 주자학적 해석을 배격하고 재평가하거나, 혹은 맹자와 순자를 나란히 비판했고, 순자를 맹자 위로 올리려는 시도는 드물었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순자는 미묘하고 복잡한 위상에 처해 있다.
2. 사상[편집]
사람의 본성에 이기심이 있기 때문에 환경에 의해서 점점 악해지게 되며, 사람은 교육을 받아야만 이 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순자가 주장한 성악설이다. 교육에서는 특히 예(禮)를 강조하였는데, 무릇 왕이라면 '예(禮)로써 나라를 다스려야 된다'고 하였다. 순자에 따르면, 예(禮)란 사람들의 귀천과 직업을 나누는 성인의 방식이다. 예(禮)를 통해 구분된 계급과 직업들이, 각각 자기의 위치에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할 때, 나라는 평온해지고 강력해진다는 것. 왕의 역할은 그러한 구분을 하여, 능력있고 현명한 자를 뽑아 신하로 삼는 것이다.[10]
2.1. 성악론[편집]
무릇 사람이 선善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그 성(性)이 악(惡)하기 때문이다.
대저 천박하면 중후하기를 원하고, 추하면 아름답기를 원하며, 협소하면 광대하기를 원하고, 가난하면 부유하기를 원하며, 미천하면 고귀하기를 원하니, 진실로 그 안에 없는 것은 반드시 밖에서 구하려 들기 마련이다.
순자, <성악편>
순자는 맹자의 성선론에 비판을 가하며 인간의 성(性)이 추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말하고, 본성으로부터의 선이 아닌, 후천적인 교육과 학문으로부터의 선이 유학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11][12] 반면, 맹자는 성(性)을 선(善)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학문이나 교육을 성(性)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순자》를 보면 "맹자는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은 그 성(性)이 선(善)하기 때문이다' 했으나, 나는 '그렇지가 않다' 하겠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그의 이론은 인간의 본성은 배고프면 먹으려고 하고, 힘들면 쉬려고 하고, 추우면 따뜻해지려고 하는 것이므로 배고파도 가족과 나누어 먹고, 힘들어도 꾹 참고 일하는 등의 행위는 인위적인 결과이지 자연적인 본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의 세계에서는 상관없지만, 문명의 세계에서는 그러한 본성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데, 낙후된 환경 속에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인위적 윤리를 얻지 못하고 혐오스러운 본성에 따라 사는 바람에 춘추 전국 시대와 같은 난세가 왔다는 것이다.
순자는 성(性)을 악/오(惡)로 규정했기 때문에 선(善)을 만드는 인위(僞)[13]의 기능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위(僞)' 는 성(性)과는 엄격히 구분되어 지며, 성(性)보다 그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순자는 위(僞)의 대표적 작용인 '학문', '교육'[14] 등을 자기 학설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이것의 실용성, 필요성을 치밀하게 논증하였던 것이다.[15]
맹자는 '인의(仁義)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良能)'이라 보았지만, 순자는 배워야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16] 맹자는 선한 행위란 단순히 그 '선함'을 배운다고 행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의 선한 행위는 사람의 '감정'[17]에서 출발해야 보다 더 자발적이게 되고 그 동기는 더욱 강해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순자가 볼 때에는 '젖먹이 아이가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다만 동물적 가족애일 뿐 인(仁)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으며, '장성하여 형을 존경하는 것'은 분명 의(義)이지만 그것은 자연적인 순종성의 발로가 아니라, 장성하는 과정 중에 이미 가정교육을 거쳤으므로 도출된 인위의 결과이다.[18] 즉, 순자가 주장하는 것은 선(善)이란 배우지 않으면 할 수 없고, 배워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의 성선설은 배울 수 없는 환경에 처한 무지랭이 백성이라도 자신의 타고난 선한 본성을 갈고 닦으면 선함을 이룰 수 있다는데서 희망을 주며, 순자의 성악설은 그 본성이 나쁜 군주나 정치인이라도 교육을 통해 인위적으로 배운다면 선함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는데서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