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문화를 위해서 호라스 제프리 하지스 (이화여대)
들어가는 말
1997년 싱가포르에서 ‘사고Thinking’를 주제로 한 제7차 국제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싱가포르의 철학자이자 외교관인 키쇼어 마흐부바니Kishore Mahbubani는 “아시아인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사고를 잘 할 수 있는가?”라는 상당히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일 년 후에 그는 미국의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잡지에 “아시아인에게 사고는 가능한가?”라는 더욱 도발적이고, 거의 ‘모욕적인’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같은 해에 그가 동일한 제목으로 발간한 책의 일부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이 글은 저자가 의도했던 만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3년 후에 2판을 찍어내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무엇보다 실망스러웠던 것은 이 글이 발표된 후, 왜 아시아 사회와 문명이 유럽 문명보다 몇 세기 뒤쳐져 있는가 하는 질문이 아시아인들 사이에서 토론의 쟁점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마흐부바니의 글이 그가 원한 대로, 왜 아시아인이 아니라 유럽인이 르네상스와 과학혁명, 그리고 계몽주의와 산업혁명을 경험했는지에 대한 토론을 촉발하진 못했지만 아시아의 몇몇 지식인들은 아시아인의 비판적 사고라는 주제에 대해서 의견을 표명했다. 예를 들어, 태국의 철학자 소라 홍라다롬Soraj Hongladarom은 1998년에 “아시아 철학과 비판적 사고: 이 둘은 서로 어긋날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수렴될 수 있는가?”라는 논문에서 유럽에 뒤쳐진 아시아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비판적 사고의 숙련이 온전히 현실화되지 못하도록” 만든 아시아 문화의 몇 가지 특성에 대해 얘기한다. 가장 중요한 특징은 “스승이 언제나 우월하고 (따라서) 항상 옳다”는 믿음과 “탐색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조화로운 사회를 우선시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위계적 질서에 따른 담화 형태와 사회적 조화를 우선시 하는 경향이 진정한 토론문화와 비판적 사고를 눌러 이겼다는 것이다. 홍라다롬은 이러한 문화적 특징을 비판하려는 의도 없이 아시아 사회가 아마도 과거에 “비판적 논쟁과 열린 토론보다 사회적 조화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결정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글로벌 경쟁 시대가 되어 버린 오늘날, 아시아 사회는 진정한 토론과 비판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언급된 이슈들은 토론에 부쳐질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 토론 역시 범위가 상당히 광범위해질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토론’, ‘소통 행위’, ‘담화 공동체’, ‘비판적 담화’, ‘조롱’, ‘모욕’, ‘자유로운 의사 표현’, ‘비판적 사고’, ‘자기 반어self-irony’, 등 토론문화와 관련된 여러 상호 관련 개념들을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토론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참된, 진정한 토론인가? 벨기에 철학자 바르트 베르샤펠Bart Verschaffel은 상당히 강경한 정의를 제시한다. “토론은 누군가의 말이 옳은지 틀린지를 찾아내기 위해 해명과 논거에 근거해서 서로 질문하고 논의하면서 싸우는 전쟁 게임이다.” 하지만 여기서 ‘전쟁’의 은유는 미덥지가 않다. 왜냐하면 전쟁은 한편이 다른 편의 값을 치루고 이기는 제로 섬 zero-sum 행위이며 결국은 다른 편을 쳐부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 은유는 토론 경쟁debate에나 어울린다. 한편이 상대편을 제압하여 이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토론 경쟁에서는 양쪽 팀 모두 호전적이고 서로에게 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discussion은 이처럼 서로 적대적인 관계에서 싸움이 붙는 토론 경쟁과 같을 필요가 없다. 토론의 목적이 적을 쳐부수는 게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서로에게 이로운 ‘게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토론에서 이루어지는 담화를 ‘게임’의 은유로 묘사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게임’이란 말은 삶의 진지한 이슈와는 동 떨어진 인위적 상황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경기 참여자는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게임의 규칙을 따르고 게임이 끝나면 자리를 뜨면 그만이다. 그리고 다음 번 게임까지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토론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는 규칙에 따라 진행된다. 토론자는 자신의 입장에 대해 그 이유와 증거를 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삶은 ‘게임’에서처럼 끝이 있는 게 아니라 지속된다. 아마도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자신의 책 <소통행위 이론>에서 제시한 소통 행위에 대한 견해가 토론이 사회적 행위로서 하는 역할을 더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 사회적 행위인 토론은 가장 이상적인 경우에 이미 문화 속에 널리 퍼져 있다. 왜냐하면 토론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지고, 언어는 토론의 기초가 되는 합리성을 기본 역량으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론만이 담화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며 문화가 단지 담화에 의해서만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베르샤펠이 생각하는 토론은 아주 좁은 경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예를 들어, 세미나에서 행해지는 그런 형태인 것 같다. 어찌되었든 베르샤펠 역시 토론이 “위험한 게임”임은 인정한다. 왜냐하면 가장 이상적인 경우, 토론에서는 어떤 것에 대한 질문도 허용되며 토론자는 모두 동등한 역할을 부여받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어떤 주제도 신성하지 않으며 누구도 최고의 권위를 갖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개별적 인간과 사회까지 변화시키며 따라서 잠재적으로 불안정을 야기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 홍라다모의 말처럼 - 왜 어떤 사회가 전통적으로 엄밀한 토론보다 사회적 조화를 선호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담화 공동체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현대 사회는 - 물론 위협적이긴 해도 - 토론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했다. 그렇다면 표현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이유와 증거와 관련해서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발언에만 자유를 허용해야 하는가? 토론 문화와 관련해서 흥미를 끄는 또 다른 이론가인 미국의 사회학자 앨빈 굴드너Alvin Gouldner는 그의 책 <지식인의 미래와 새로운 계급의 부상>에서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담화 형태에 대해 얘기한다. 그는 ‘비판적 담화 문화’라는 약간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이 담화를 규정하고 있고 그것이 새로운 지식인 계급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이 담화의 특징은 “비교적 상황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발화자가 개인적 이유나 권위 혹은 사회적 지위를 이용할 수 없다.” 이 같은 담화의 형태가 가장 이상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누구에게나 그리고 항상 “한 단어에 하나의 의미”만 적용된다. 굴드너는 이 비판적 담화 문화가 과학과 인문학을 포함한 새로운 지식인 계층의 “언어”라고 보았다. 우리는 “한 단어에 하나의 의미”라는 이 비판적 담화의 이상적 형태가 실제로 논쟁에서 발언되는 모든 용어에 적용될 경우 토론 자체가 부자연스럽게 되지 않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하지만 굴드너는 이 비판적 담화 문화를 자신이 정의한 대로 좁은 의미의 새로운 지식인 계층에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담화 문화에 있어서 소통하는 그룹의 범위는 좀 더 넓게 잡아야 하며 잠재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포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굴드너의 기준은 완화될 필요가 있고, 지식층의 비판적 담화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과 공유되어야 함을 인정해야 한다. 근본적으로, 토론 문화에서 모든 구성원은 모든 주제에 대해 어떤 질문이라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동시에 이유와 증거를 제시하는 답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조롱에 대처할 것인가?
여기서 제기되는, 결코 지엽적이지 않은, 흥미로운 질문은 모욕적인 언사인 조롱에 어떻게 대처하는 가하는 문제이다. 조롱하는 사람은 엄격한 의미에서 토론 문화의 규칙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풍자나 모욕으로 이유와 증거를 대신할 뿐이다. 그렇다면 조롱을 당한 사람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굴드너가 보여 준 행동을 따라해야 할까? “광의의 사회학”이란 제목의 글에서 저명한 에세이스트 스콧 맥리미Scott McLemee는 굴드너와 관련된 일화를 소개한다. 굴드너는 워싱턴 대학 재직 시절 로드 험프리스라는 박사과정 학생과의 불화로 인해 불미한 사건의 주인공이 된다. 발단은 사회학과 사무실에 붙여진 풍자 포스터였다. 이 포스터는 굴드너가 의견의 차이가 있을 때 의견에 대한 비판이 아닌 인신공격을 하는 것을 풍자하고 있었고 굴드너는 험프리스가 이 풍자포스터를 만들었다고 의심한다. 화가 난 굴드너는 대학원생 사무실로 험프리스를 찾아 가서 얼굴을 때리고 넘어진 그를 발로 찼다고 한다. 모욕적인 조롱에 맞닥뜨린 굴드너는 명예가 손상될 경우 물리적 폭력을 사용해도 좋다고 믿었던 것 같다. 옛날 같았으면 아마도 결투를 요청했을 지도 모르겠다. 굴드너는 자기가 세운 원칙, 즉 자신이 말한 비판적 담화 문화의 규칙을 스스로 배반한 것인가? 굴드너가 험프리스를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이론적 체계를 무너뜨렸던 아니던 간에, 담화 문화에서 모욕적인 발언은 보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욕을 당했다”는 감정은 순전히 주관적인 반응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독실한 종교인은 종교학에 비판적 연구방법을 적용하는 걸 보고 모욕을 당했다고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비판적 방법을 사용한 사람을 물리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문학이나 예술에서는 계산된 모욕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례: 밀턴의 <아레오파기티카Areioagitica>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영국의 위대한 문학가인 존 밀턴의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아레오파기티카>에서 밀턴은 오늘날 우리가 표현의 자유라 부르는 것을 변호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유와 관련해 이렇게 청원한다. “모든 자유 중에서도 알고, 말하고, 그리고 양심에 따라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오.” 왜 이 자유를 허락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구속받지 않는 발언을 통해서만 진리가 승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곧이어 진리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독자를 환기시킨다. “진리와 거짓이 격투하도록 내버려 두시오. 자유롭고 개방적인 대결에서 진리가 패배한 걸 본 사람은 없으니까.” 현대의 독자에게 흥미로운 대목은 밀턴이 논쟁과 인신공격까지 포함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대결”이 진리에 이롭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논쟁과 인신공격은 <교회치리론>에서 밀턴이 영국 국교회 주교를 모욕하는 대목에서 종종 눈에 띈다. 여기에서 밀턴은 주교들이 논지의 취약성으로 인해 궁지에 몰릴 때면 악의적인 중상과 궤변을 늘어놓는 것을 대놓고 비판하고 있다. 그의 비판 내용이 옳고 그른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그는 의식적으로 인식공격과 모욕을 마다하지 않는 논쟁을 벌인다. 밀턴은 상대가 중상을 일삼는다고 비판하지만 사실 자신도 똑 같은 비난을 받을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밀턴의 상대가 충분히 모욕을 당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밀턴이 아일랜드인과 카톨릭교도를 비판하면서 사용한 어휘를 국교회 주교들을 공격할 때도 여차 없이 사용하기 때문이다. 밀턴은 아일랜드인이 “흉악하다”고 하면서 이들을 “신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한다. 또한 이들이 국교회 주교의 “묵인”에 의해 태어난 “저주받은 자손”이라고 말한다. 밀턴에 의하면 국교회는 “‘교황절대주의자’(카톨릭교도를 경멸하여 일컫는 말)와 우상숭배자를 기독교인으로 묵인하여 이를 부양하고 육성하고” 있고 이는 개탄할 일이었다. 밀턴은 영국의 지배권 아래에 있는 아일랜드인의 영혼에 무관심한 주교를 비난했고 이로 인해 아일랜드인이 카톨릭교도로 남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아일랜드인과 카톨릭교도 그리고 (당연히) ‘우상숭배자’에 대한 경멸 역시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밀턴에게 있어서 중상과 모욕, 그리고 논쟁적인 어투는 일상적인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밀턴이 모욕적인 말을 자유롭게 사용했고 또한 그것이 정당하다고 느꼈음을 보여 준다.
모욕할 수 있는 권리?
그렇다면 인신공격은 허용되어야 할 것인가? 위에서 이미 밝힌 바대로 인신공격은 마땅히 허용되어야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인신공격은 대부분 토론문화 바깥에 위치한다. 왜냐하면 인신공격은 보통 어떤 입장에 대해 찬성하던 반대하던 논지가 취약한 경우에 사용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신 공격적 발언은 보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토론을 보호하기 위해 세우는 방어벽은 공격적 발언까지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대교의 율법인 토라를 수호하기 위해 이를 둘러싼 랍비의 율법까지 존중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 방어벽이 없을 경우에는 중요한 논점조차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모욕적인 발언이 보호되지 않으면 이 중요한 논점은 금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위계적인 사회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이 충분히 가치 있는 발언을 했더라도 그것이 지위가 높은 사람의 의견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유만으로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상당히 위계적인 사회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에선 바로 이런 종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후자는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식이다. 그 때문에 비판적 논의는 억제되고 (밀턴이 말하는) 진리는 종종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국의 정보 소통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위기 이후의 문화적 변환”이란 논문에서 공동필자인 이호철과 메리 패트리샤 맥널티Mary Patricia McNulty는 이 문제를 날카롭게 논의하고 있다. 이들은 윗사람과 논쟁하거나 윗사람의 의견을 비판할 경우 이를 예의바르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유교적 위계질서가 자유로운 표현을 억누른다고 말한다. 따라서 한국 문화는 파고드는 질문을 하거나 비판적인 의견을 표명하는 것을 장려하는 대신에, 그리고 확실하게 네, 아니오를 말하는 대신에 모호한 답을 하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진정한 토론 문화 발전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발전과 현대의 비즈니스에 있어서 토론 문화의 배양은 필수적이다. 한국인들에게 체면은 아주 중요하고 이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도 해당된다. 따라서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은 억제된다. 유교적 가치는 토론의 내용보다 사회적 예의범절을 우선시한다. 젊은이는 노인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높은 사람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예절은 자유로운 의사표현에 걸림돌이 된다. 이호철과 맥널티의 연구에서 우리는 “모욕당한 느낌”이 어떻게 주관적일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유교적 위계질서의 가치에 젖어 있는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이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경우 그것은 윗사람에 의해 쉽게 모욕으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아랫사람이 이것을 의식하는 한 불편한 진리를 밝히는 일은 억제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욕할 수 있는 권리 없이는 자유롭고 비판적인 토론 문화는 성취될 수 없고, 토론 문화는 진리를 추구하는 데에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모욕’은 정당하고 합법적인 의사 표현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토론문화의 핵심인 비판적 사고
모욕적인 발언은 보호되어야 한다. 하지만 토론 문화의 핵심은 이상적 형태의 비판적 사고이다. 그렇다면 ‘비판적 사고’란 무엇인가? 약 200명의 전문가가 합의한 의견이 이태리 철학자이자 교육이론가인 피터 파치오네Peter Facione가 쓴 “비판적 사고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중요한가?”라는 논문에 요약되어 있다. 여기서 파치오네는 비판적 사고의 기술뿐만 아니라 기질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기술’의 측면에서 봤을 때, 이상적인 경우에,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주장하고자하는 의견과 필요한 행동에 대해 의식적으로 자제력 있는 판단을 한다. 이것은 몇 가지 하부적인 기술을 요하는데 이들 중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는 기술로서 해석력, 분석력, 평가 능력 그리고 추론 능력이 언급된다. 해석력은 평가 대상의 의미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을 말한다. 분석력은 발언된 내용 간의 논리적 관계를 찾아내는 능력을 말한다. 평가 능력은 발언된 내용의 신뢰성과 내용들 간의 관계에서 논리적 설득력을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추론 능력은 발언된 내용과 증거에 근거해서 합리적인 결론과 추측을 내리는 능력을 말한다. 또 다른 하부 기술들 중의 하나는 설명 능력인데 이것은 이유를 설득력 있게 진술하고 판단의 기초가 된 근거를 해명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비판적 사고는 많은 기술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기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파치오네가 인용하는 전문가들은 다양한 ‘기질’ 역시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의 특성으로 파악한다. 이들 전문가에 따르면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호기심이 많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며,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며, 유연하고 공정하며, 정직하고 신중하다. 또한 성찰적이고 사고가 명쾌하며, 논리 정연하고 탐구적이며, 이성적이고 집중력이 뛰어날 뿐 아니라 악착같은 기질을 갖고 있다. 기질을 나타내는 목록은 사실 끝이 없다. 왜냐하면 뭔가 다른 것을 얼마든지 덧붙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제시된 목록은 전문가들이 제안한 기질들로서 앞에 언급된 토론 기술과 더불어 비판적 사고의 이상적 형태를 편의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비판적 사고는 개인적인 삶과 사회 활동에 있어서 강력한 힘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토론 문화를 지향하는 사회에서 교육의 목표 중 하나는 비판적 사고의 기술을 개발하고 기질을 키우는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기질은 가치 있는 통찰력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사회의 담화 문화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비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교육 체제의 유일한 목표는 아니다. 왜냐하면 올바른 사고란 그 외에도 윤리적 사고와 창의적 상상력과 같은 다른 사고력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판적 사고는 자기 성찰적 성격을 띠면서 기본적으로 다른 사고력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회 전체의 담화 문화를 교육만으로 개혁하기는 쉽지 않고, 기술과 기질의 개발을 통해 뛰어난 비판적 사고력을 가진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의 수 역시 상대적으로 많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제시된 비판적 사고의 이상적 형태는 우리가 추구할 하나의 목표로서 제시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굴드너의 비판적 담화 문화와 마찬가지로 파치오네가 제시한 기술과 기질들은 토론 문화에 내재된 담화 능력을 기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들의 설명이 베르샤펠과 하머마스와 갖는 공통점은 발화자의 사회적 지위보다 논지의 이유와 증거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한 사회가 토론 문화를 발전시키고자 원할 경우에는 담화적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동등한 입장에서 담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요구되며, 사회적 조화는 처음부터 강요된 규범적 조건이 아니라 토론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홍라다롬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처럼 문화도 종종 어떤 결정을 내리고 나중에 상황이 변하면 이미 내린 결정을 수정하거나 철회한다. 어떤 가치를 선호하게 만드는 결정은 바위에 새겨진 것처럼 영원하지 않다.” 하지만 전체 문화를 변하게 만드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예컨대, 한국에서 유교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던 그 결정은 조선 시대 초기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현실화되기까지는 몇 백 년의 세월이 걸렸고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불교문화의 저항 속에서 온전히 성공하지 못했다. 토론 문화를 도입하고자 한 현대 사회의 ‘결정’은 아마 좀 더 빠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개인을 이 방향으로 몰고 가고 있는 글로벌 시대의 압박과 이를 수행할 경우 따르는 물질적 보상이 충분히 유혹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판적 사고의 기술뿐만 아니라 적절한 기질 역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론 문화는 모욕할 수 있는 권리까지 수용해야 하기 때문에 그 기질은 ‘자기 반어’의 감각까지도 필요로 한다. 이런 기술과 기질이 계발되면 아마도 우리는 마흐부바니가 원했던 바와 같이 대대적인 토론 문화를 경험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번역: 황선애) 애지 2010 여름호에서
References
Facione, Peter A. "Critical Thinking: What It Is and Why It Counts." Insight Assessment <http://www.insightassessment.com/pdf_files/what&why2009.pdf>. Gouldner, Alvin W. The Future of Intellectuals and the Rise of the New Class. New York: Seabury, 1979. Habermas, Jürgen.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Translated by Thomas McCarthy, Cambridge: Polity, 1984-1987. Hongladarom, Soraj. "Asian Philosophy and Critical Thinking: Divergence or Convergence?" Third APPEND Seminar on Philosophy Education for the Next Millennium, May 6-8, 1998, Chulalongkorn University <http://pioneer.netserv.chula.ac.th/~hsoraj/web/APPEND.html>. Hughes, Merritt Y., editor. John Milton: Complete Poems and Major Prose. Hackett Publishing Co., 2003. Lee, Ho-Chul and Mary Patricia McNulty. "Korea’s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Boom, and Cultural Transition After the Crisis." Economic and Social Research Institute (ESRI), April 18, 2004 <http://www.esri.go.jp/jp/prj/seminar/seminar058b.pdf>. Mahbubani, Kishore. Can Asians Think? Singapore: Marshall Cavendish, 2004. McLemee, Scott. "Wide-Stance Sociology." Inside Higher Ed, September 12, 2007 <http://www.insidehighered.com/views/mclemee/mclemee121>. Verschaffel, Bart. "Visions for Cities: Public Truth and Public Spaces." Productivity of Culture, ECCM Symposium, October 17-21, 2007 <http://productivityofculture.org/symposium/a-z/bart-verschaffel/>.
호라스 제프리 하지스Horace Jeffery Hodges (jefferyhodges@yahoo.com) 미국 버클리 대학교에서 논문 Food as Synecdoche in John's Gospel and Gnostic Texts으로 역사학 박사 취득. 독일 튀빙겐 대학, 오스트레일리아 뉴잉글랜드 대학,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함. 현재 이화여대 교양영어실 전임강사 주요 논문: "Gnostic Liberation from Astrological Determinism: Hipparchan 'Trepidation' and the Breaking of Fate"; "Dualisms of Sustenance: Gnosticism and The Gospel of John"; "Society as Cosmos: Mary Douglas's Analysis of How Societies 'Naturalize' Themselves"; "On Huntington's Civilizational Paradigm: A Reappraisal"(공저); "Korea as a Clashpoint of Civilizations"(공저); "Striving to Understand 9/11: Some Religious Dimensions of the Attack"; "The Future of Christianity: Prospects and Possibilities"; "Praeparatio Evangelium: Beowulf as Antetype of Christ"; "Like One of Us: Milton's God and Fallen Man"; "Milton's Tree of Knowledge: Why 'Sacred' Fruit"; "Holy Moley: Don Quijote's Significant Señal" 등 문학상 경력: Baylor University Short Story Prize (1977);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Eisner Poetry Prize (1985); University of New England, Australia, Literary Awards (1997/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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