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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말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이상을 실현하고, 영원한 진리와 영원한 생명의 정신적인 가치를 충실히 지키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나의 숨어있는 재능을 세상에 나타내고, 인류에 봉사하며, 신의 지혜와 진리의 미를 더욱 더 많이 세상 사람에게 제시하는데 나의 생활은 살아진다. 나의 이상에 충실한다는 것은 나의 평화와 행복과 성공을 의미하며 그것은 즉,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일이어야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이 영화를 보고, 이 책을 읽고, 내 마음의 평화를 나누고 싶었다. 엄마와 딸을 떠나서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서 관계를 갖으며 존재하는 한 마지막 페이지를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며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힘을 표출시켜 그 속에서 살아야 겠기에. 어딘가 깊숙히 숨어 빛을 보지 못한 사랑이란 힘을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아내고 키우고 하여 사랑의 빛 속에 우리가 부드럽고 평화로이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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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는 깨달았고 이제 그녀는 조화 속에 살 수 있다. It must not be too L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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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소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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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막] 빅터와 에바의 목사 관저의 거실에서 에바는 무엇인가 쓰고 있다.
[빅터] 아내 모르게 난 가끔 여기서서 아내를 쳐다보곤 해요. 저 사람은 창가에 앉아 있기를 즐기죠. 지금은 창가에 앉아 자기 어머님께 편지를 쓰는가 봐요. "어머, 참 좋아요. 언젠가 살던 집에 온 기분이예요." 저 사람이 이 방에 처음 들어섰을 때 한 말이예요. 그 때 우리는 안지 며칠 안 되는 사이였어요. 주교들 모이는 회의에 참석 했다가 무슨 종교 신문 대표로 참석한 저 사람을 만났었죠. 점심을 같이 하면서 내가 살고 있는 목사 관저에 대해 얘기 했더니 꽤 흥미있어 하더군요. 회의가 끝난 다음날 용기를 내서 같이 이리로 오자고 했지요. 오는길에 청혼을 했어요. 아무 대답이 없더군요. 그러나 이 방으로 들어서면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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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 참 좋아요. 언젠가 살던 집에 온 기분이예요."라고 말했지요. 그 때부터 우리는 이 집에서 조용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어요. 에바, 제 아내의 이름이죠. 에바는 자기의 지나온 세월에 대해 얘기했어요. 대학에 다닐 때 어느 의사와 약혼하고, 그 후 그 약혼자와 몇 년 같이 살았다구요. 그 때 짧은 책을 두권 출판했고, 그 후에는 폐가 나빠져서 그 사람과 약혼을 깨고 헤어졌대요. 그리고는 오슬로 보다 조금 따뜻한 노르웨이 남쪽 지방에 있는 조그만 마을로 내려가서 기자 노릇을 시작했다는군요. (조그만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아내가 쓴 책이예요. 제가 꽤 좋아하죠. "삶은 배워야 한다. 그냥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삶을 매일 매일 연습한다. 그 삶 속에서 가장 큰 장애물은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모르면서 더듬 거린다. 마치 장님처럼 나를 있는 그대로 누군가가 사랑해줄 수 있다면, 그 때는 감히 그래도 내가 나 자신을 쳐다 보리라." (읽기를 멈추며) 내 아내에게 내 모든 것을 바쳐서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한번만이라도 말해 주고 싶지만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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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게끔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요. 꼭 맞는 말들을 찾을 수가 없군요.
[장] 장면 1. 빅터는 자기 책상으로 돌아가 앉는다. 에바가 그에게로 다가 온다.
[에바] 엄마에게 편지 썼어요. 방해가 안 된다면 읽어 드릴께요.
[빅터] 그래요. 어서 와 앉구려. 불을 켜야겠군. 벌써 어두워 지는 것을 보면 가을이 오긴 왔나보구려. 오후의 협주곡 시간인데 라디오를 끄지.
[에바] 끝까지 듣고 싶으시면 제가 있다가 다시 오죠 뭘.
[빅터] 당신이 읽는 편지가 라디오보다 훨씬 더 듣기가 좋은걸.
[에바] (읽으며) 어제 마을에 나갔다가 우연히 애그너스를 만났어요. 애들 데리고 남편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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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친정에 왔다더군요. 레오나르도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어요. 엄마,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어요? 두 회의 연주를 앞에 두고 엄마가 아스코나에서 짧은 휴가를 취하고 계신다고 하더군요. 엄마의 매니저 폴에게 전화해서 엄마 주소를 얻었어요. 스케쥴이 가능하고 엄마가 원하신다면 저희 집에 오셔서 며칠이고 몇 주고 저희와 함께 계시지 않으실래요? 꼭 오셔야 한다는 부담은 갖지 않으셔도 돼요. 다만 어머님이 원하시면 꼭 오세요. 편하고 조용하게 지내실 수 있어요. 여기는 어느새 가을이 와서 나무들은 벌써 노랗고 빨갛게 단풍이 들고 서리도 두 번이나 내렸답니다. 마지막 들 열매들도 따버렸는걸요. 그렇지만 아직은 바람이 차지않고 하늘도 맑고 공기도 싱그러운 날들이 남아있지요. 어머니께서 얼마든지 연습하실 수 있는 그랜드 피아노도 있어요. 호텔 방에서 몇 주라도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게 즐겁지 않으세요? 사랑하는 엄마, 꼭 오신다고 말해 주세요. 애기 다루듯이 위해 드리고 보살펴 드릴께요. 우리가 만난지가 너무 오래 된 것 같아요. 10월이면 꼭 칠년이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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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군요. 당신의 사위 빅터와 딸 에바가 사랑을 보내며---
[장] 장면 2.
엄마 샬로트가 예상외로 일찍 도착한다. 아침 열 한시경에 먼지나는 긴 언덕 길을 운전해 오는 샬로트가 보인다. 에바는 층계 중턱에서 엄마가 못보는 유리창을 통해 차에서 내려 멍하니 서 있는 엄마를 지켜본다. 잠시 서로 아무 움직임이 없다.
[에바] 보고 싶었어요. 엄마, 어서오세요. 이렇게 오시니까 정말 기뻐요. 꿈만 같애요. 오래 계실거죠? 그렇죠? 아유, 가방이 무겁네요. 악보도 갖고 오셨어요? 잘 되었어요. 저도 좀 가르쳐 주실수 있겠네요. 꼭 가르쳐 주실거죠? 그렇죠? 피곤해 뵈세요. 그렇겠죠. 그렇게 긴 여행을 하셨으니, 엄마가 이렇게 일찍 도착하시는지 미처 모르고 빅터는 외출했어요. 지금.
[페이지] 027 *원본 페이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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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장면 3. 샬로트가 머무는 방
[샬로트] 레오나르도가 죽기 전 며칠은 그 사람 옆에서 밤과 낮을 꼬박 지켰지. 아무리 진통 주사를 맞아도 굉장히 아파했어. 가끔 죽는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너무 아프니까 울더구나. 그런 날들이 계속 되었단다. 밖에서는 공사중이라 망치소리에 콩크리트 뚫는 소리가 요란하고 커텐도 빛을 가리는 채양이 없어서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셔 혼났단다. 자기 몸에서 나는 악취 때문에 그 사람은 몹시 부끄러워 했단다. 다른 병실로 옮기고 싶어도 병원이 수리중이라 그 시끄러운 방에서 계속 있었단다. 저녁때나 되서야 밖의 공사가 멈추면 창문을 좀 열수가 있었지. 더위가 사방을 휩싸고 바람 한 점 없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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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의 옛 친구인 의사가 와서 이젠 얼마 남지 않았으니 조금만 참으라며 아프지 않게 죽을 수 있도록 반시간 마다 진통제를 놓아 주겠다고 했어. 그 의사는 레오나르도의 뺨을 쓰다듬으며 브람스 연주회에 갔다 오는 길에 들리겠다고 하니까 레오나르도가 무슨 곡이냐고 물으면서 연주자 야노스에게 옛날부터 생각했었다며 자기 첼로를 갖다 주라고 하더라. 의사는 가고 간호원이 들어와 주사를 놓았어. 간호원은 나한테 뭘 좀 먹어야 하지않겠느냐고 했지만 배도 고프지 않더라. 냄새 때문에 메스꺼웠어. 레오나르도는 몇분간 자다 깨더니 간호원을 부르면서 나한테 방에서 나가달라고 했지. 간호원이 다시 주사를 놓았어. 조금 후에 간호원이 나와서 내게 레오나르도가 죽었다고 말해 주더라. 죽은 사람옆에 밤새도록 앉아 있었어. (쉬다가) 레오나르도에 대해서 밤새 생각했어. 십 팔년동안의 친구에다 십삼년 간이나 같이 살면서도 언성 한번 높이지 않은 사람이란다. 이년 전부터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었지. 가능한한 자주 나폴리에 있는 그의 별장에 가서 애기하며 놀고 둘이서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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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악도 연주했어. 그 사람은 나의 성공을 진심으로 기뻐해 주고 늘 부드럽고 생각이 깊었지. 자기 병에 대해선 말 한마디 없었고 나도 또한 언급하고 싶지 않았어. 혹시 그 사람을 우울하게 만들까봐. 어느날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웃으며 "내년 이맘때는 난 저 세상으로 가고 없겠지. 그러나 난 항상 이렇게 당신과 함께 할거구 늘 당신을 생각하고 있을거야." 참다정하고 연극같은 얘기지. 하기야 그이는 꽤 극적인 말을 자주 하긴 했지만. (쉬다가) 슬픔을 가누지 못해 미치지는 않는다. 나도 그의 죽음을 예상못하던 바도 아니었고 또 그도 고통을 받느니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했으니까. 물론 텅빈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죽음을 놓고 연연해 한들 뭘 하겠니? 서로 못 본 칠년 사이에 엄마 많이 변했니? 글쎄, 염색이야 했지만. 레오나르도는 내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게 싫다잖니. 그 외에는 똑같지? 이 옷 쥬리히에서 샀다. 차 여행에 편한 옷을 살까 하는데 마침 고급백화점 쇼우윈도우에 이 옷이 보이잖니, 입어 보았더니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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렇게 꼭 맞고 뭐 그리 비싸지도 않길래. 괜찮지?
[에바] 참 좋아요. 어머니.
[샬로트] 얘, 짐을 풀자. 좀 도와주렴. 죽은 사슴이라도 드는 것처럼 무겁구나. 짐도 이렇게 무거운데다가 운전까지 오래 했더니 허리가 몹시 아프다. 얘, 침대 매트레스 밑에 나무 판대기 좀 깔아야 하는데 뭐 쓸만한게 없니? 너도 알다시피 내 침대는 아주 딱딱해야 하잖니?
[에바] 어제 이미 넣어 두었어요.
[샬로트] 잘 했다. (에바를 살피며) 에바야 얘, 너 왜그래? 아니 울잖니? 어디 얼굴 좀 보자. 왜그러니? 무슨 일이 있니? 양처럼 착한 우리 딸이 화가 났나보다. 내가 말이라도 잘못 한게 있니? 내가 원래 좀 말이 많다는 것 너도 잘 알면서 뭘.
[에바] 엄마를 보니까 너무 좋아서 우는거예요.
[샬로트] 어렸을 때처럼 어디 한번 꼭 안아 보자. 내 얘기만 너무 했구나. 이젠 네 얘기 좀 듣자. 어디 얼굴 좀 볼까? 아이 계집애, 좀 여위었구나 몇 년 사이에. 행복해 보이지도 않고. 무슨 일이라도 있니? 얘기 해 봐라. 자 이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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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자. 담배 피워도 되지? 이뻐, 어디 너 사는 것 좀 들어가 보자.
[에바] 잘 살아요. 정말예요.
[샬로트] 여기가 너무 한적한 것 같지 않니?
[에바] 교회 일이 있으니까요.
[샬로트] 참 그렇구나.
[에바] 교회에서 가끔 연주를 해요. 지난 달에도 피아노를 쳤어요. 연주하고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꽤 성공적이었어요.
[샬로트] 나를 위해서도 꼭 쳐 다우. 물론 네가 원한다면.
[에바] 꼭 들려 드리고 싶어요.
[샬로트] 로스앤젤스에서 나도 학교 연주를 다섯 번이나 했는데 매회 한 삼천명 정도의 학생이 왔단다. 연주하고 얘기 나누고, 아주 성공적이었어. 그런데 정말 힘들더구나 그런 식의 공연이.
[에바] 어머니, 말씀 드려야 할게 있어요.
[샬로트] 뭔데?
[에바] 헬레나가 여기 있어요. (침묵)
[샬로트] (화를 내며) 왜 편지에 걔가 여기 있다고 쓰지 않았니? 여기 이렇게 도착한 지금 이 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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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나한테 한다는 건 네가 내게 너무했다고 생각되지 않니? 오도 가도 못하게끔 해놓고 이럴 수가 있어?
[에바] 헬레나가 여기서 우리와 같이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엄마에게 말했으면 어머닌 절대로 여기 오지 않았을 거예요.
[샬로트] 무슨 소리야, 그 소리를 들었어도 왔을거다.
[에바] 아뇨 안 오셨을 거예요.
[샬로트] 레오나르도의 죽음으로 충분치 않니? 이 슬픔위에 넌 꼭 내가 헬레나를 만나야 속이 시원하겠어? 걔는 왜 데려 왔니?
[에바] 걔는 지난 이년 동안 우리와 같이 살아 왔어요. 제가 어머니께 편지 드렸죠. 빅터와 제가 헬레나 한테 여기 와서 같이 살고 싶으면 그러자구 하겠다구요. 제가 벌써 어머니께 그런 편지를 썼었는데요.
[샬로트] 그런 편지 받은 일 없다.
[에바] 아니면 귀찮아서 뜯어 보지도 않으셨는지도 모르죠.
[샬로트] (갑자기 조용하게) 너 나에게 너무 심하다고 생각지 않니?
[에바] 그렇게도 볼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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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그 아이를 보고 싶지 않다. 가뜩이나 오늘 만큼은.
[에바] 엄마, 헬레나도 훌륭한 인간이예요. 말하는게 좀 알아듣기 힘들긴 하지만 전 다 알아 들을 수 있게 되었어요. 제가 옆에서 가르쳐 드릴께요. 엄마, 걔는 엄마를 몹시 보고싶어 하고 있어요.
[샬로트] 너도 참! 아니 그 병원에 있을 때 괜찮던데.
[에바] 헬레나가 너무 그리웠어요.
[샬로트] 너는 헬레나가 여기 있는 것이 헬레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확신 할 수 있니?
[에바] 네, 그리고 저한테도 누군가를 보살펴 줄 수 있는 기쁨이 생겼잖아요.
[샬로트] 병세가 더 나빠졌니? 내 말은 그 아이의---? 더 병신이---? 내 얘기는, 더 악화되었냐 말이야?
[에바] 물론이죠. 더 악화되었어요. 그 병은 날로 더 나빠지게 되어 있지않아요.
[샬로트] 좋다, 그럼 가자. 가서 헬레나를 만나자.
[에바] 만나고 싶으세요?
[샬로트] (웃으며) 끔직하겠지만 별 다른 수가 없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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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에바] 어머니!
[샬로트] 앞 뒤 생각없이 일부러 저질러 놓는 사람들을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더라.
[에바] 저 말씀이세요?
[샬로트] 여기 너 말고 또 누가 있니? 자 어서 가자.
[장] 장면 4. 헬레나의 방.
[샬로트] 귀여운 헬레나! 꼭 껴안고 뽀뽀해 줘야지. 자 너의 두 팔을 엄마 어깨위에 얹고 이렇게 옳지, 네 생각을 자주 했다. 아니 매일 했지.
헬레나 무슨 말을 한다
[에바] 감기 때문에 자기 편도선이 조금 부었대요. 엄마한테 감기 옮길까봐 가까이 못 가겠대요.
[샬로트] (다시 뽀뽀를 하며) 그까짓 감기 엄만 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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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 안한단다. 이십년 동안 감기라고는 단 한번도 걸려본 적이 없는 엄마야. 방이 정말 예쁘구나. 전망도 좋구. 내 방에서 보이는 경치랑 같은데 헬레나.
헬레나가 무슨 말을 한다.
[에바] 엄마가 자기 진짜 얼굴을 잘 볼 수 있게끔 안경을 벗겨 달래요.
[샬로트] 괜찮다. 안경을 썼어도 난 네 얼굴을 다 아는 걸.
헬레나는 무슨 말을 한다
[에바] 엄마의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받쳐 들고 잘 보래요.
[샬로트] 자 이렇게?
[헬레나] 네.
[샬로트] 언니가 널 돌보아 주고 있어 여간 다행이 아니다. 난 그런줄도 모르고 여기 오는 길에 병원에 들려 너를 보고 오려고 했지. 아직 거기 있는 줄 알고, 이렇게 여기서 만났으니 더 잘 되었지?
[페이지] 037 *원본 페이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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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네.
[샬로트] 이젠 우리 매일 같이 있을 수 있구나.
[헬레나] 네. (기뻐하며)
[샬로트] 진통이 심하니?
[헬레나] 아뇨.
[샬로트] 머리를 아주 얌전하게 빗었네.
헬레나 무슨 말을 한다
[에바] 어머니가 오신다고 해서 특별히 정성드려 빗었대요.
[샬로트] 엄마가 요새 불란서의 혁명에 대한 아주 재미있는 책을 읽고 있는데 너한테 읽어 줄까? 베란다에 나가서 네게 읽어 줄게. 좋아?
[헬레나] 네
[샬로트] 그리고 우리 같이 드라이브도 하자. 여기는 나한테도 낯선 고장이니까 나가면 재미 있을거야
[헬레나] 네.
[샬로트] 엄마가 헬레나 굉장히 보고 싶어 했단다.
헬레나 무슨 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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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얘가 뭐라고 그러니?
[에바] 자기한테 너무 신경쓰실거 없대요. 이대로 있어도 자기는 정말 기쁘대요. 엄마가 옆에 그냥 계신것만으로도요.
[샬로트] 얘는 시계도 없니?
[에바] 침대 옆에 있어요.
[샬로트] 헬레나야 여기 엄마 시계 너 줄게. 내가 하도 잘 늦으니까 어느 팬이 내게 준 선물이다. 헬레나도 우리랑 함께 저녁먹는거지?
[에바] 아니예요. 헬레나는 오히려 점심식사를 충분히 먹고 저녁은 간단히 해요. 병원에서 너무 많이 먹여서 좀 절식을 시켜 몸무게를 줄여야 할 것 같애서.
할레나 무슨 말을 한다
[에바] 헬레나가---
[샬로트] 잠깐! 헬레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번에는 엄마도 알아 들었는걸, 맞춰 볼까? "유리창에 나비가 붙었어요."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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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장면 5. 샬로트가 머무는 방
[샬로트] (혼자서) 열이 있는 것 같애 왜 그러지? 울고 싶은 이유가 뭘까? 왜 이렇게 바보처럼 어리석을까? 나한테 죄책감을 갖게 하려는 것이야. 얌심의 가책을 느껴라 하는 것이지. 항상 그 놈의 죄의식! 지겨워. 도대체 그렇게 서둘러서 여기 온 목적이 뭐야? 뭐가 그렇게도 그립다고 생각한걸까? 내가 그리움을 느낀다는 것부터가 믿을 수도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우선 샤워나 하고 한잠을 자보자 좀 누워서 눈을 붙이기라도 해야지. 저녁 식사때는 멋있는 옷을 입고 내려가야지. 내가 비록 나이는 먹었어도 몸은 아직 안 늙었다는 것을 보여 줄거야. 이제와서 온다는 건 말도 안돼. "벌써 네시가 넘었군. 원 끔찍해서, 거기 그렇게 앉아 뚫어져라 쳐다 볼게 뭐야. 내 이 두 손으로 그 아이의 얼굴을 받쳐 들었어. 그 목속에 있는 병균들이 꿈틀거리는 걸 느껴야 하다니. 빌어먹을! 나는 왜 헬레나를 번쩍 안아서 내 침대로 데려오지 못했을까? 나는 왜 걔를 토닥토닥 내 품에 안고 어렸을 때처럼 달래주지 못하는 걸까? 흐물흐물하고 뒤틀려 비틀어진 그 몸둥아리가 내 딸 헬레나라니, 하느님! 제발 울지마라. 벌써 네시 십 오분이네, 샤워를 하고 정신을 좀 차리자. 어서 빨리 여기를 떠나야겠어. 한 나흘 정도는 견디겠지. 그리고 예정대로 아프리카로 가는 거야. 마음이 아퍼, 찢어지는 아픔이야, 아파, 가만 있어, 지금 아픈게 바르토크 소나타 이악장에서 아픈것과 같은가? (콧 노래로 멜로디를 흥얼거린다) 정말 같은 아픔이군. 내가 그 소절을 너무 빨리 쳤었나봐. 그래 조금 빨랐어. 이렇게 쳐야겠다, 올라갈 때는 좀 세게 치고 내려 올 때는 실뱀같은 아픔을 갖고, 아예 눈물이 없었거나 아니면 이미 모두 말라버린 상태로 냉정하게 차분히. 그래, 이것이 제대로 맞는 해석이라면 여기 온 것이 결코 헛수고는 아니야. 에바가 레오나르도의 죽음 때문에 내가 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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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입으리라 생각하겠지만 천만에 말씀 에바를 좀 당황하게 만들어야지. 빨간 드레스를 입는다 이 말씀, 내 몸매야 아직도 날씬하니까. 그렇게 기가 막히게 멋있는 몸은 아니더라도 내 나이에 이만하면 준수하지. 아프리카에 도착하면--- 아냐 크리트 섬으로 가서 해롤드나 만나볼까? (웃으며) 약간 질은 낮지만 요리 솜씨도 괜찮고 "멋쟁이란 말이야. 오늘 저녁에 전화를 걸어야겠어, 여기 온지가 벌써 네 시간이나 지났으니 꽤 오래 거룩하게 버틴 셈이네, 헤롤드하고 기분 전환이나 해야겠어. (갑자기) 난 왜 이렇게 못되먹었을까? 계속 화를 내고 있으니, 내가 온것에 대해 에바가 저렇게 기뻐하고 정말 잘 해주고 있는데. 빅터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 정말 다행한 일이지. 늘 궁상인 에바한테 저런 훌륭한 남편이 생길줄야 보나마나 샤워가 고장일꺼야, 아이구 이게 왠일이야 멀쩡하게 물이 나오네, 제법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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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장면 6. 식당
에바가 식탁을 차리며 빅터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에바] 우리 엄마는 너무 희한해서 도대체 어떤 사람인 줄을 모르겠어요. 내가 헬레나가 여기 있다는 얘기를 한 순간 엄마의 얼굴은 정말 볼만했어요. 당신도 그 때의 엄마 얼굴을 보셨으면 좋았을걸. 그 때 그 미소, 우리 엄만 무서운 경악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예요. 헬레나의 방에 들어선 순간은 또 어땠겠어요. 정말 배우예요. 무대에 등장하기 전 분명히 끔찍하게 떨고 있는 배우, 그러다가도 자기를 잘 다스리면서 자신에게 취해 있는 배우, 우리 엄마의 연기는 최상품이었어요. 피도 눈물도 없는 여자인가 봐요. 여긴 왜 오셨는지? 칠년 동안 서로 헤어져 있다가 이제와서 뭘 기대하시는지? 무엇을 기대하시며 난 또 거기에서 무엇을 기대하는지? 우리 인간들은 단념을 절대 안 하는가 보지요?
[빅터] 그런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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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모녀란 죽을 때까지 그 관계를 벗어날 수 없을까요?
[빅터] 다 그런건 아니겠지.
[에바] 에릭의 방문을 열때면 잊고 있다가도 무서운 귀신이 돌연히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애요. 당신한테는 제가 다 큰 것 같애요?
[빅터] 다 컸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려.
[에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빅터] 어른이란 꿈도 바램도 잘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가 봐요? 당신은 그렇게 바라는 것도 없다는 것 같던데.
[에바] 그렇게 보여요?
[빅터] 웬만한 일에는 놀라는 기색도 없구.
[에바] 낡은 파이프를 물고 그렇게 앉아 계시니까 인생 도통한 사람 같애요. 당신은 분명 어른이예요.
[빅터] 어른인 것 같지 않아요. 난 무슨 일에도 잘 놀라고 재미있는 걸.
[에바] 뭐가 그렇게 놀랄정도예요?
[빅터] 예를 들면 당신한테, 뿐만 아니라 내겐 좀 말도 안되는 꿈과 희망이 있다우, 그러니까 어떤 그리움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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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무엇을 향한?
[빅터] 당신에 대한 그리움.
[에바] 퍽 아름답군요. 그렇죠? 아무 의미도 없는 말들, 전 그런 어휘속에서 자란 사람이예요. 예를 들면 그 고통이란 단어예요. 한번도 불행이나 절망이나 분노를 느껴 보지 못한 엄마이면서도 자기를 늘 고통속을 헤메인다고 하셨거든요. 당신도 그런 표현들을 많이 해요. 목사라는 직업때문이겠지요. 내가 당신 앞에서 이렇게 웃는데도 날 그리워한다면 누구나 그말이 의심이 가지 않겠어요?
[빅터]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당신에 대한 그리움이.
[에바] 그럴까요? 내가 그 의미를 안다면 나를 그리워 하지 않을 거예요.
[빅터] 맞는 얘기같군.
[빅터] 그런걸 보면 내가 당신만큼은 똑똑한가 보죠. 아니 어쩌면 조금 더 현명한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그렇다한들 달라질 건 없지만, 부엌에 가서 고기를 좀 뒤집어야지, 엄마는 내가 정말 음식도 못하는 병신인줄 알고 있어요. 엄마는 식도락이신데 어느 정도이냐 하면 언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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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음악회 사회자와 무슨 조리법에 대해 밤을 새면서 토론을 했는데 그게 그렇게도 신이 나더래요.
[빅터] 내가 보기엔 당신 요리 솜씨가 아주---
[에바] 일급이라 이 말씀이죠? 고마워요 여보, 사랑하는 엄마를 위해서 카페인이 안들어간 커피를 만들어야 해요. 엄마의 불면증에 대해 생각해 봤거든요. 그러지 않아도 활력이 넘치는데 잠까지 잘 잤다가는 그 활력에 주위사람들은 다 숨통막혀 죽을 거예요. 엄마의 불면증이야 말로 신이 특별히 생각해서 내리신 거예요. 그 배려로 그나마 사람들이 견디는 게 아니겠어요? (부엌으로 나갔다 다시 등장하며) 남편을 잃은 외로운 여인이라는 걸 강조하는 우중충한 옷을 입고 나올테니 보세요.
[장] 장면 7. 샬로트가 식당에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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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어머, 옷이 아주 예뻐요 어머니.
[샬로트] 어울리니? 빨간색깔의 옷을 입은지가 꽤 오래 되었다. 왠지 나한테 어울릴 것 같지가 않더구나. 그런데 하루는 내 친구가 디오르 패션쇼에서 나한테 꼭 어울릴 드레스를 봤다고 하길래 사오라고 했다. 괜찮지? 배가 몹시 고픈데.
[에바] 엄마가 좋아하는 송아지 고기를 구웠는데.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샬로트] 좋지. 그 지긋지긋한 호텔 밥 대신에 네가 손수 만든 저녁 좀 먹어보자.
[빅터] 자!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서,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기쁩니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어머님의 집처럼 생각하시고 오래 오래 계십시오.
[장] 장면 8. 저녁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샬로트는 폴에게서 온 전화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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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영어로 전화에 대고) 그래요 폴, 방해했어요. 저녁 식사중이었거든요. 아니 정말 저녁식사라니까 여기 시골에서는 저녁 밥을 다섯시에 먹는군요. 좀 크게 말해요. 똑똑하게, 전화상태가 좋지 않아요. 도대체 거기가 어디예요? 니-스? 거기서 뭘하는거예요? 내돈까지 도박으로 다 잃는 것 아니예요? (음성이 사업적으로 바뀐다) 그래요? 그럼 해야죠. 하지만 지난번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을거예요. 내 연주비에서 매니저 여비와 커미션을 줄 수는 없어요. 따로 내라고 하구요. 내 여비도 따로 내라고 하세요. 그것도 수월치 않더라구요. 여비 때문에 파산하겠어요. 그리고 더욱 중요한걸 잊었군요. 연습문제인데요 (자기의 메모 노트를 보며) 뮌헨에서 비행기를 탈 것 같으니까 오케스트라와 연습을 두 번정도 하고 싶으면 토요일과 일요일을 잡으라고 해 주세요. 난리 법석하며 서두르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비행기 연결이 쉽지 않아서 하루 종일 비행장에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기다려요 안경 좀 끼구, 어느 구석에 안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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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었는지 생각이 나야지. 얘, 에바야 창가에 있는 책상위에 내 안경 있니? 그래 고맙다 얘야, 자 봅시다--- 할머니가 안경을 걸쳤으니, 안되겠어요. 절대 불가능한 얘기예요. 그 때가 바로 내 휴가야, 잘 알지않아요. 그럴순 없어 아예 생각지도 말아요. 해방, 해방 해방이라고 내가 크게 써 놓았는데---뭐라구요? 얼마라구? 할 수 없이 또 미끼에 걸려들었군. 지겨운 연주 수요일로 잡으라고 그래요 내가 꽃병에다 소변 보는 일이 없도록 이번에는 무대 뒤에 제대로 된 화장실을 설치하라구 그래요. 제기랄, 바로크식의 고궁이면 변소도 바로크식이여야 하나? 잘 있어요 폴, 삼십 삼도라구? 조심하세요 너무 지치도록 놀지 말구, 우리는 이미 옛날처럼 젊지 않다는 걸 명심하세요. 항상 생각해 주는 사람은 나 밖에 없죠? (전화를 내려 놓으며) 내 매니저 폴이다. 다정해, 이젠 단 하나 남은 친구지 아냐 브랜디는 싫어 조금 있다가 위스키나 하지. 같이 치울까?
[빅터] 어머니를 애기 위하듯 위해드리고 싶다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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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피아노 의자에 앉으며) 옛날 악기라 정말 좋구나. 소리가 아주 아름다운데. 조율도 잘되어있구, (치기 시작하며) 이렇게 좋은 것을 쓸데 없이 그랬구나.
[에바] 무슨 말씀이세요 어머니?
[샬로트] (눈물을 글썰이며) 무슨 뜻이겠니? 요것아, 칠년만에 만나니 좀 겁이 나더구나. 어제 밤에는 걱정이 너무 되니까 잠도 못자겠구 이제와서 말이지만 오늘 아침에 실은 못 온다고 전화까지 걸려고 했었어.
[에바] 어머니는 참.
[샬로트] 넌 내가 피도 눈물도 없다고 생각하니? 설탕 둘. 카페인을 뺀 커피는 정말 맛이 없지만 어쩌겠니 마셨다 하면 잠을 잘 수가 없으니 얘 너 요사이 쇼팡의 전주곡 연습중이구나. 어디 쳐 봐라.
[에바] 지금 치라구요? 어떻게 어머니.
[샬로트] 어린아이 같기는, 내 앞에서 피아노치는 너를 봤으면 좋겠다.
[빅터] 엊그제도 엄마 앞에서 쳐 봤으면 좋겠다고 했잖소.
[에바] 듣고 싶으시다면, 하지만 전 피아니스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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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예요. 테크닉도 없고 손가락도 책에 있는 대로 치기가 어려워서 내 마음대로 했어요.
[샬로트] 얘 얘, 괜찮아 어서 쳐요.
에바는 쇼팡의 전주곡 제 2번 A마이너스를 친다
[샬로트] 아주 좋구나.
[에바] 그 외에는 할 말이 없어요?
[샬로트] 아니 무슨 소리를, 감동이 너무 되서.
[에바] (표정이 밝게 바뀌며) 제가 치는게 감동적이었어요?
[샬로트] 피아노 앞에 앉은 너를 보니까 좋아서.
[에바] 무슨 뜻이세요?
[샬로트] 부드럽고 아늑한 분위기가 되었으니 계속 치렴.
[에바] 뭣을 잘 못쳤는지 알고 싶어요.
[샬로트] 잘못이라니?
[에바] 이 전주곡에 대한 저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으시죠?
[샬로트]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의 해석이란게 있지 않겠니?
[에바] 그래요, 그러니까 이젠 엄마의 해석이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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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다니까요.
[샬로트] 내 해석을 꼭 들어야겠니?
[에바] (발끈 화를 내며) 듣고 싶다니까요
[샬로트] 내게 화가 난것같구나.
[에바] 나한테는 들려 줄 가치조차 없다는 말이니까 화가 날 수 밖에요.
[샬로트] 좋아 네가 꼭 듣겠다면. (침착하게) 손가락을 제대로 치면 해석에도 도움이 된다. 그 점만 조금 유의하면 테크닉도 그리 나쁜편은 아니더라. 여하튼 그런 것은 제쳐놓고 작품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얘기할까?
[에바] 하세요.
[샬로트] 쇼팡은 감상적은 아니야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지 절대로 기가 없는건 아니다. 감정과 감상의 큰 차이는 너도 알지? 이 작품속에는 단순한 환상이 아닌 억눌린 고통이 있어. 침착하고 또렷하면서도 강한 고통, 느낌은 정열적으로 고조되어 있어도 표현은 남자답게 잘 콘트롤 되어있지. 자 처음 몇 소절을 볼까? (말의 뜻을 설명하기 위하여 치기 시작한다) 가슴이 쓰려도 그것을 나타내지 않아, 겉으로 보이지 않는 아픔이 있고 사이에는 짧은 위안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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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위안도 어느새 증발해 버리고 다시 똑같은 고통이 찾아들어. 더 강할 수도 약할수도 없는 똑같은 고통이 억눌린 채로 억제속에 쇼팡은 자존심이 강하고 예리하고 정열적이면서 고통이 많고 울분도 잘 느끼며 꽤 남성적이지. 다시 말하면 쇼팡은 늙고 감상적인 여자가 아니란 말이다. 이 전주곡 2번은 그 소리가 미울 정도로 연주 되어야해. 이 곡은 절대 아름답게, 듣기 좋게 쳐져서는 안되고 어딘가 꼭 맞지 않는 듯 들리는 거야. 끝까지 감정을 잘 억눌러야만 이 곡과 나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전 곡을 친다)
[에바] 알았어요.
[샬로트] 나를 노여워 마라 에바야.
[에바] 무슨 그런 말씀을, 오히려 그 반대예요.
[샬로트] 사십 오년이란 세월을 이 거대한 전주곡들과 씨름해 왔어도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들이 많아. 그래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거야.
[에바] 어렸을 때 엄마를 굉장히 우러러 보다가 또 한동안은 엄마와 피아노가 싫었었죠. 지금 다시 다른 각도에서지만 엄마를 존경하게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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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비꼬는 듯한 어조로) 그렇다면 우리 아직 희망이 있구나.
[에바] (조심스럽게) 그런 것 같군요.
[빅터] 어머니의 해석은 매력적이고 에바의 해석은 감명적이고 그런데요.
[샬로트] 그 해석이 더 멋지군.
[빅터] 생각난대로 얘기한 것 뿐인데. (창피해 하며)
[장] 장면 9. 에바의 아들, 에릭의 묘 둘레를 샬로트와 에바는 산책 중이다.
[에바] 전 토요일은 꼭 에릭의 묘에 와요. 지금처럼 날씨가 좋을 때는 제 생각은 훨훨 날면서 온갖 공상을 헤메 다니죠. 한참을 혼자 이 벤치 위에 앉아있게 된답니다. (쉬다가) 에릭이 죽던 날은 자기 생일 하루 전이었어요. 다섯 돐도 못 넘긴 셈이지요. 뒷 마당 우물에는 굵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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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뚜껑이 항상 눌려 있었는데 에릭이 어떻게 열었는지 그 우물에 빠졌죠. 즉시 발견을 했는데도 에릭은 이미 죽었어요. 빅터에겐 너무나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어요. 그 부자간은 유난히 가까운 사이였거든요. 나도 겉으로는 무척 슬펐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에릭이 꼭 살아 있었죠. 정신을 조금만 집중시키면 어느 새 에릭은 내게 나타나는 걸요. 내가 막 잘이 들려는 순간 에릭의 입김이 내 얼굴에 와 닿고, 어린 손이 나를 만지작 거리죠. 정신병자처럼 들리죠? 그럴수도 있을거예요. 하지만 내게는 극히 자연스러워요. 넘을 수 없는 벽도 없고 그렇다고 절대로 건너지 못하는 선이 그어진 상태도 아닌 그저 우리와 틀린 삶속으로 간 것 뿐이니까요.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서로를 느낄 수 있어요. 저쪽 삶을 묘사할 수는 없어요. 이 삶과는 달리 모든 느낌이 자유롭게 해방된 세계이니까요. 그래서 에릭의 죽음은 저한테 보다는 빅터에게 훨씬 가혹한 충격이었죠. 산채로 태워 죽이고, 총으로 죽이고 굶겨 죽이고 미치게 만들고, 이렇게 어린 아이들을 죽게 내버려 두는 하느님을 빅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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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다고 했지요. 저는 어린 아이들과 어른들과의 차이가 하나도 없음을 설명했어요. 어른이란 어린 아이가 어른인척 변장한 것 뿐이라고. 저는 인간이란 정말 철저하게 완전한 창조물인 것 같애요. 우리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막힌 착상이죠. 우리의 삶,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자체에도 그 속에는 저차원에서 고차원까지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것들이 있어요. 인간은 신의 영상이지요. 신 안에는 모든 것이 존재하죠. 엄청난 힘이 있는 반면 악마가 창조되고 성자와 예언자, 계몽을 반대하는자, 예술가, 우상 파괴주의자들도 우리 인간속에서 창조되었죠. 이 모든 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관통하며 평행선 상에서 나란히 공존하고 있죠. 장대한 무늬가 그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물린채 어울어지는 기분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아시겠어요? 우리들의 이 무딘 감각으로 알고 보는 이 현실 외에도 비록 보고 만질 수는 없어도 우리를 에워싼 또 다른 현실, 부단한 움직임을 그치지 않는 무한의 또다른 현실이 있음을 전 분명히 알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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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우리가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고 믿는 이유는 단지 두렵고 자아의식이 너무 강한 때문이지요. 한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심지어 생각이나 느낌에도 한계라는 것은 전혀 있을 필요가 없는거죠. 불안이라는 우리들의 부족함이 그 한계를 지어주는 것 뿐이죠.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세요? 베토벤의 하먹클라비어 소나타의 느린 악장을 칠 때 감히 우리로서는 그 크기를 짐작이나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러니까 한계라고는 있을 수 없는 그러한 세계로 몰입하고 있는 자신을 분명히 느끼게 되죠. 예수도 마찬가지죠. 전혀 들어 보지도 못한 전혀 생소한 감정, 사랑이란 단어로 한계와 그 한계를 둘러싼 법칙들을 산산히 말살시켰죠. 다 시들어 빠지고 무딜대로 무뎌진 그 알량한 감정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서로 잡아 먹을 듯이 발광들을 하면서도, 조금만 강한 느낌이 압도해 올 때는 놀래 자빠지고 도망가기에 급급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언제나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고 겁에 질려 항상 화만 낸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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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장면 10. 묘지에서 돌아온 샬로트는 빅터와 거실에서 얘기한다.
[샬로트] 에바가 그런 식으로 헛소리를 진지하게 떠드니까 간이 다 써늘해 지는군. 완전히 돌지 않았나 싶어. 너무 사실같이 얘기하니까 무섭더군. 노이로제가 심한 것 같애. 우주의 신비에 대한 해답을 훤히 들여다 보는 듯이 죽은 아들하고 지금도 만난다고 하잖아.
[빅터] (웃으며) 그래요, 그렇다죠.
[샬로트]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될 것 같애.
[에바] 그냥 내버려 두다니 무슨?
[샬로트] 자기가 무척 불행하다거나 자기의 생활이 어딘가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꼭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 같단말이야.
[빅터] 정말 그런 생각을 하시나요?
[샬로트] 그렇다니까, 자넨 무섭지 않나?
[빅터] 에바 이층에 있어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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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그래, 헬레나 잠 잘 준비 시킨다고 올라갔어.
[빅터] 어머니 그럼 여기 앉아 제 아내 얘기를 잠깐 하죠. 제가 에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샬로트] 그래 좋아.
[빅터] 제가 청혼을 했을 때 에바는 솔직하게 자기 심정을 얘기하더군요.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혹시 누구 다른 사람이라도 있느냐고 했더니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자기는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쉬다가) 에바와 나는 서로에게 친절하죠. 열심히 일하고 휴가 때에는 외국여행도 하며 벌써 대 여섯해를 살아왔지요. 그러다가 에릭이 생겼죠. 아무래도 애기가 없을려나 보다 하면서 이미 우리들의 아기는 포기했었거든요. (쉬다가) 흐 -ㅁ 임신을 통해 에바에게 많은 변화가 생겼어요. 성격이 밝아지면서 부드럽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죠. 사람이 여유가 있어 지더니 교회일도 귀찮아 하기도 하고 피아노도 게을리 할 수 있게 됐지요. 의자에 발을 올려 놓고 창 밖에 보이는 언덕과 절벽 사이에 햇빛을 즐기며 한참을 앉아 있곤 했어요. 우리 둘은 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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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행복에 싸였어요. 어머니 앞에서 외람되지만 잠자리에서까지도 꽤 즐거웠으니까요. 아시겠지만 저는 에바보다 스므살이나 위죠. 저에게는 이미 회색의 장막이 나의 인생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는 걸 실감하고 있을 때였죠.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지난날들을 돌이켜보며 나의 인생을 정리할 때가 오고 있었죠. 이게 바로 나의 인생이었구나. 내게 주어진 삶을 이렇게 마치면서 가야하는가 보다 늘 이렇게 생각할 때였지요. 그러는 순간 모든 것이 갑자기 달라졌어요. 놀랄만큼 행복하게--- (쉬다가) 정말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쉬다가) 이해하세요. 아직도 그 때의 얘기를 할려면 힘이 드니까요. (쉬다가) 그래요. 너무나 행복한 몇해였죠. 그 때의 에바를 보셨어야 했어요. 그 시절 그렇게 밝고 행복한 에바를 꼭 보셨어야 했어요.
[샬로트] 그 때가 기억나는군.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녹음 때문에 눈코 뜰 사이없이 바빴지. 하루의 자유시간도 갖을 수가 없었어.
[빅터] 압니다, 몇 번씩이나 오시라고 했지만 항상 시간이 없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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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그랬어.
[빅터] 에릭이 죽었을 때는 회색은 더욱 짙고 두텁게 나를 휩싸 버렸죠. 하지만 에바에게는 달랐어요.
[샬로트] 다르다니? 어떻게?
[빅터] 에바의 감정에 아무 동요가 없는 듯이 보였죠. 그녀의 감각이나 그녀의 모든 것은 썩어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그러나 에바는 서서히 안정을 잃기 시작했고 신경이 날카로와지더니 점점 몸도 여위더군요. 균형을 잃은 사람처럼 사소한 일에도 화를 버럭내고, 그러나 난 한번도 에바가 정신이상이거나 어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에릭이 아직도 자기 곁에서 살고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왜 잘못됐다고 보시는지요. 어쩌면 그럴수있는지도 모르죠. 그 얘기를 자주 입에 올리지는 않죠. 내 마음이 아플까봐 그럴거예요. 사실이 아직도 그 얘기를 하면 아프니까요. 여하튼 난 에바가 느끼는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아요.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어요? 나는 내 아내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샬로트] 물론 자네는 목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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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터] 내가 가지고 있는 그나마의 믿음은 에바로부터 지탱되는 것이지요.
[샬로트] 자네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미안하네.
[빅터] 괜찮아요. 에바나 어머니처럼 제 주관이 확고부동하게 서 있는 사람도 아니예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지 않겠냐는 것이 저라는 사람이죠. 그게 제 약점이구요.
[장] 장면 11. 그날 밤 샬로트가 침실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
[샬로트] 오늘 밤은 잠약을 넉넉히 먹는게 나을거야. 그렇지 그래야지.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워. 지붕위에 떨어지는 빗소리 밖에 들리는 소리가 없어. 모가론 두 알과 밸리윰 두 알이면 지까짓게 곯아 떨어지겠지.
[에바] 뭐 필요한 것 없으세요?
[샬로트] 아니, 필요한 것 다 있어. 여행용 발까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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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터 귀막는 것 눈가리개, 탐정소설, 카셋트 그리고 맛있는 과자와 약수, 쥴리히에서 산 쵸코렡 먹을래? 맛이 기가 막히다. 두 개만 먹어.
[에바] 고마워요 엄마, 전 쵸코렡 좋아하지 않아요.
[샬로트] 얘 웬일이니 너 어렸을 때 단것이라면 사죽을 못쓰던 애가.
[에바] 제가 아녜요. 헬레나가 그랬죠.
[샬로트] 그랬니? 어쨌든 잘 됐다 내가 다 먹게 됐으니.
[에바] 엄마 안녕히 주무세요.
[샬로트] 잘 가라 내 강아지야 오늘 저녁은 아주 즐거웠다. 빅터 참 좋은 사람이더라. 잘 해줘라.
[에바] 그러고 있어요.
[샬로트] 너희들 행복하니? 서로 잘 지내냐 말이야.
[에바] (참으며) 빅터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예요. 그 사람 없는 생활이란 상상이 안가요.
[샬로트] 네가 빅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데.
[에바] 빅터가 그런 말을 했어요?
[샬로트] 그래 왜?
[에바] 아뇨 그냥 좀 놀랬어요.
[샬로트] 내가 알면 안되니? 비밀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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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아뇨.
[샬로트] 빅터가 내게 그 말한 것이 기분 나쁜 가 보구나.
[에바] 빅터는 누구에게 그런 식으로 자기 속 마음을 쉽게 털어 놓는 사람이 아니예요.
[샬로트] 네 얘기니까 했겠지 그게 어떻다고 그래.
[에바] 저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게 있거든 직접 제게 물으세요. 사실대로 알려 드릴테니.
[샬로트] 얘, 왜 조그만 일갖고 화를 내고 이러니. 늙은 에미가 자기 딸이 어떻게 지내나 싶어 좀 물었기로 뭐 이상할 것 있니? 우리들이 너 나쁘게 얘기하지 않았다.
[에바] 제발 남들을 좀 가만 놔 두세요.
[샬로트] 너를 너무 오래 놔 둔 것 같아서 그래.
[에바] 그 말은 맞죠
[샬로트] 얘 그런 기분 나쁜 얘기는 집어 치우자. 아무리 잠약을 많이 먹었어도 기분 나쁜 얘기만 했다하면 한 잠도 못 자니까.
[에바]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겠지요.
[샬로트] 그럴거야, 자 엄마 품에 안겨서 다시는 화를 내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렴.
[에바] 약속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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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 잘 알지?
[에바] (친절하게) 저도 엄마를 사랑해요.
[샬로트] 내가 항상 혼자 있는걸 좋아하는 것 같지. 그렇지 않다고 얘기하면 네가 놀라겠지. 실은 너와 빅터가 몹시 부럽구나. 레오나르도가 죽은 이후 무섭도록 외롭다. 이해 하겠니?
[에바] 이해해요.
[샬로트] 그만, 그만, 그만, 내 처지가 불쌍해서 금방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다. 오늘 밤은 슬픈 얘길랑 모두 잊자고 했지. 이 탐정 소설이 꽤 재미있더라. 아담 크레진스키 라고 신인작가가 쓴것인데 들어 본 적 있니?
[에바] 아니요.
[샬로트] 마드리드에서 이 작가를 한번 만났는데 완전히 갔더구나. 나한테는 말할 기회 한번 안주고 저혼자 중얼거려, 말할 필요성을 느낄만한 위인도 못됐지만. 잘 자라 내 강아지야.
[에바]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샬로트] 자기가 만난 사람 중에서 내가 가장 멋있는 여자라고 입이 마르게 찬사를 보내더라. 그 점에 대해선 너 어떻게 생각하니?
[에바] 아침 식사 언제 드실건지 알으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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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나 때문에 시간 바꿀 것 없다.
[에바] 어머니를 특별히 위해 드리고 싶어요.
[샬로트] 그래 네가 정 원한다면.
[에바] 진한 커피와 뜨거운 우유 독일 빵과 치즈 꿀을 바른 토스트 한쪽. 그렇죠?
[샬로트] 오렌지 쥬스.
[에바] 참 하마트면 잊을 뻔했군요.
[샬로트] 얘 나는 말이---
[에바] 오렌지 쥬스 잊지 않을께요.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샬로트] 잘 자라 내 강아지야.
[장] 장면 12. 샬로트는 잠을 청하지만 잠들지 못하고는 일어나 앉는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그녀는 가방을 열고 저금 통장을 꺼낸다.
[샬로트] (혼자서) 통장이나 들여다 볼까? (빨간 노트를 꺼내며) 레오나르도의 유산을 어디다 투자를 해 놓아야 할텐데. 집도 청산하면 꽤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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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고, 돈 문제 같은 일상 생활 문제는 하나도 신경쓰지 않고 내게 다 떠다밀고 가시다니 "샬로트, 당신은 경제적인 머리가 있으니 내 돈도 좀 맡아 관리해 주구려" 언젠가 내게 화를 내면서 나한테 지독하다고 했지. 그런지도 몰라. 난 돈에 대해선 언제나 철저하고 정확하니까. 농부였던 할아버지의 철저함과 근면의 피와 땀이 내게 흐르고 있는걸. 삼백만 칠십 삼만 오천 팔백 육십 육프랑이라, 아니 이 많은 돈을 갖고 있었다니 누가 믿겠우, 그것을 또 내게 다 주고 가시다니. 나도 나대로 또 조금 숨겨 놓은게 있긴 있지요. 합해서 거진 오백만은 되겠으니 이 많은 돈을 다 뭐에다 쓴다? 에바와 빅터에게 최신형 차를 사줘야지. 이 험한 시골길에 그 낡아빠진 차를 어떻게 몰고 다니는지 참, 위험한 일이야. 월요일에 시내에 나가서 차를 좀 봐야지. 좋아하겠지. 나도 기뻐지는걸. (하품을 하며) 슬슬 나른해 지는게 졸음이 오는군. 이 책을 조금만 읽다가 불을 꺼야지. 여기는 정말 조용하구나. 비도 그쳤군. 아--- (읽는다) "그녀는 말없이 엄숙하게 빨간 꽃의 처녀성을 그에게 바친다. 그는 팽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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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녀의 가슴을 그리고, 비키니 사이로 삐져 나온 아랫도리의 털을 아침 내내 황홀하게 취해 쳐다 보았으면서도 시들하게 그녀의 몸을 대한다." 맙소사! 천하의 악마로군. 나 때문에 자살을 기도하겠다는 것을 봐도 꽤나 정신나간 놈이지 (웃으며) 에바하고 빅터한테 내 벤즈를 주고 내가 새 차를 사면 어떨까? 파리에서 차를 산다면 난 여기서 비행기를 타고 가도 되니 더 좋지. (하품을 하며)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라벨을 연습해야지. 지난 몇주 한심하게 놀았으니. (눈을 감으며) 빅터 참 되게 멋대가리 없어. 어째 그리 사람이 유우머가 없을까. 에바 아버지하고 똑 닮았어. 노래도 에바 아버지는 멋있었는데. 하기야 에바도 그러니 잘 만났지. (문이 열린다. 샬로트 놀랜다. 갑자기 헬레나가 들어와 엄마에게 덮친다. 신경이 마비된 헬레나의 몸은 무겁고 강하다. 둘은 씨름을 한다. 무섭다. 잠을 깬다. 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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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장면 13. 샬로트는 안정을 잃고 아래층 거실에 혼자 서성거린다.
[에바] 어머니 왜 그러세요? 소리가 나서 뛰어갔더니 안계시데요.
[샬로트] 깼구나. 미안하다. 너무 무서운 꿈이였어. 꿈에 글쎄 헬---
[에바] 네?
[샬로트] 벌써 잘 생각이 안나는구나.
[에바] 제가 말동무라도 해 드릴까요?
[샬로트] 괜찮다 얘, 잠깐 안정을 하면 될꺼야 어서 가서 자거라.
[에바] 그렇게 하세요 그럼.
[샬로트] 에바야.
[에바] 네 어머니.
[샬로트] 너 나를 좋아하지 그렇지?
[에바] 물론이죠, 저의 어머니신데요.
[샬로트] 그 대답이 보통 대답이 아니구나.
[에바] 그러면 저도 어머니께 여쭤 볼까요? 어머닌 저를 좋아하세요?
[샬로트] 난 너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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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그렇지 않은걸요. (웃는다)
[샬로트] 너는 내가 사랑이 결핍된 여자라고 비난하는거지.
에바는 말없이 쳐다본다
[샬로트] 넌 왜 내게 그렇게 불공평하니?
[에바] (쳐다보며) 비난이 아니었어요.
[샬로트] 빅터를 사랑하지 않는 너 자신에 대해선 비난하지 않니?
[에바] 난 빅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얘기 했어요. 허지만 엄마는 사랑하는 척 하고 있는거죠. 그 두가지는 엄연히 다른 얘기예요.
[샬로트] 하지만 난 너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걸.
[에바] 무슨 말씀이세요?
[샬로트] 나로서는 너와 헬레나를 진실로 사랑하는 줄 알고 있다면.
[에바] 불가능한 일이죠.
[샬로트] 넌 내가 나자신의 출세도 희생해 가면서 집안에 들어 앉기로 결심한 걸 잊었구나.
[에바] 어느 쪽이 더 나쁜건지, 부인과 엄마 노릇을 하며 집에 계실때인지 아니면 차라리 연주여행을 떠나실 때인지, 어쨌든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는 아빠와 나에게 불행한 삶을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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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었어요.
[샬로트] 넌 아빠와 나 사이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라.
[에바] 아빠도 나와 마찬가지였어요. 항상 엄마에게 눌려 시키는 대로만 했는걸요.
[샬로트] 그렇지않아, 너희 아빠와 나는 무척 행복했어. 그이는 친절하고 선량하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어.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었지.
[에바] 그래서 아빠를 배신하셨군요.
[샬로트] 배신이 아니야. 마틴과 사랑에 빠져 도망간 팔개월이 꽃방석에라도 앉아 행복한 줄 아니?
[에바] 어쨌든 전 저녁마다 아빠랑 앉아 있어야 했어요. 전 아빠를 위로해야 했고 전 저녁마다 아빠에게 엄만 아빠를 사랑하고 있다고 반복해야 했어요. 전 엄마는 꼭 돌아 온다고 말해야 했고 전 엄마의 편지를 읽어 드려야 했어요. 즐거운 여행에서 잘 편집된 얘기들을, 재미있게 우습게 애정이 듬쁙 담긴듯한 부드러운 편지를, 그 긴 편지를 전 몇번이고 읽어 드려야 했어요. 그리고 우리들은 바보처럼 앉아서 엄마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라며 엄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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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워 했죠.
[샬로트] (조용히 놀래며) 넌, 에바야, 넌 나를 증오하는구나.
[에바] 몰라요,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혼돈돼요. 칠년만에 갑자기 엄마를 만나게 되었어요. 엄마가 굉장히 기다려졌어요. 무엇을 상상했는지 나도 몰라요. 엄마가 외롭고 슬픔에 잠겼을 것을 기대했는지도 모르죠.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이젠 다 자랐으니까 엄마와 나, 그리고 헬레나의 병, 우리들의 어린 시절들을 냉정하게 바라 볼 수 있다고 기대했는지도 모르죠. 만나고 보니까 그건 무서운 착각이었어요. (쉬다가)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과거에 대해서 얘기한다는건 무의미한 일이죠. 너무 마음이 아파와요 소용도 없는 일인데.
[샬로트] 그런 식으로 내게 비난을 퍼붓고 이렇게 가버리면 그만이냐?
[에바] 이미 늦었잖아요.
[샬로트] 뭐가 늦어?
[에바] 아무것도 바뀔 수가 없잖아요. (길고 가느다란 괴성과 같은 울음소리가 침묵속에 들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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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샬로트는 놀래 자기 딸을 쳐다 본다)
[에바] 헬레나가 깼나봐요. 올라가 봐야겠어요.
에바는 어두운 집 속을 급히 지난다. 불을 켜지 않고도 그녀는 자기 길을 안다. 달빛이 고요하다. 에바는 조심 스럽게 헬레나의 방문을 연다. 울음이 멈춘다. 침대 옆 탁자위에 램프를 켠다. 헬레나가 앉아 있다. 목과 어깨에 경련을 일으키며 입술을 깨물고 있다. 눈은 꼭 감겨 있고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에바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깬다. 천천히 눈을 뜨며 서서히 현실 속으로 깨어온다. 무슨 말을 할 듯하다 멈춘다. 에바가 목이 마르냐고 묻는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을 감고 즉시 잠든다. 경련이 멈추고 그녀의 얼굴은 편안을 찾는다. 에바는 그녀를 내려보며 옆에 앉는다. 불을 끄고 다시 쳐다 본다.
[장] 장면 14. 다시 거실로 돌아온 에바는 샬로트와 대화를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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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엄마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그저 시간있을 때 잠깐 가지고 노는 인형이였어요. 내가 귀찮게 굴거나 아파서 칭얼댈때면 항상 유모나 아빠에게 나를 건네 주었죠. 엄마는 아무도 들어 갈 수 없는 방에서 연습만 했고 누구도 방해를 해선 안 됐었죠. 난 숨을 죽이며 문밖에서 엿들었죠. 커피 마시느라고 잠깐 연습을 멈추시면 엄마의 존재가 현실인지 아니면 나에게 있어서 엄마란 꿈에만 있는 것인지 알고 싶어서 몰래 들여다 보곤 했지요. 마음은 늘 다른 곳에 있었으면서도 늘 친절했죠. 얘기를 붙여도 대답이 없었어요. 마루에 무릎 꿇고 앉아 의자에 앉은 엄마를 올려다 보곤했죠. 엄만 키가 크고 아름다웠죠. 그 방은 신선한 공기로 가득차고 채양이 드리워져 있었고 밖에는 싱그러운 바람에 초록 잎파리들이 날리고 있었어요. 모든 것이 그림처럼 초록의 연속이었죠. 가끔 바다 멀리까지 우리는 노를 저으며 나갔죠. 엄마의 길고 하얀 옷은 앞이 파져있어서 엄마의 가슴이 들여다 보였어요. 엄마의 가슴은 정말 예뻤어요. 맨발이였어요. 머리는 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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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땋아 올리셨어요. 엄만 물 속을 들여다 보길 즐기셨었죠. 차고 맑은 물 속 깊이 바닥에는 바위와 해초들, 그리고 물고기들이 보였어요. 엄마의 머리가 젖었었죠. 손도 젖었어요. 엄만 항상 멋있었어요. 멋있는 엄마의 딸도 멋있어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 늘 내게는 있었죠. 나도 옷 입는데 무척 신경을 쓰게 되었죠. 엄마가 내 모양을 싫어할까봐 불안했어요. 난 늘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했었어요. 삐쩍마르고 앙상한데다가 눈은 황소같이 튀어 나오고 입술은 너무 두텁고 속 눈썹은 짧고 팔은 너무 길고 발은 주책없이 크고 발가락은 납작하고--- 내 몸의 모든 것은 좌우간 구역질 난다고 믿었어요. 그래도 엄마는 내 외모에 대해서 조금도 걱정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죠. 그러다 어느날 "넌 사내아이였으면 좋았을 걸" 하시면서 내가 혹시 속상해 할까봐 슬쩍 웃으셨어요. 물론 속상했어요. 주일 내내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울었죠. 엄마는 울수 있어도 남이 우는 꼴은 못 참아 하셨기 때문에 숨어서 울었죠.
그러던 어느날 엄마 트렁크들이 아래층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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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에 놓이기 시작했어요. 엄만 전화에 대고 알아 듣지도 못할 외국말로 떠들고 있었죠. 난 내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 했어요. 제발 무슨 일이나 생겨서 엄마가 떠날 수 없게 해 주세요. 할머님이 돌아가시든지 지진이 일어나든지 비행기가 모두 부셔져 버리든지 엄마만 떠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그래도 엄만 항상 떠났어요. 대문이 열리고 바깥 바람이 불어오면 모두들 떠들썩 작별 인사를 했지요. 그러면 엄마는 내게 다가와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춰주고 또 다시 껴안고 또 입을 맞추면서 웃어 주셨죠. 엄마의 몸에서는 알지 못하는 향내가 나고 이미 엄마도 내게는 알지 못하는 남이 되어 버렸죠. 엄마의 마음은 이미 멀리 떠나 있었고 나를 보며 웃고 있었지만 그건 나를 보고 웃는게 아니었어요. 이러다 심장이라도 멈추는 것이 아닐까? 이대로 가면 난 죽고 말거야. 가슴이 이렇게 메어져 오는데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난 다시는 즐거울 수 없어. 이제 겨우 오분 지났는데 이 모양인데 어떻게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두달을 견딜 수 있단 말야. 이렇게 생각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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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요. 내가 아빠 무릎위에 엎드려 울면 아빠는 부드럽고 다정한 손을 머리 위에 얹어 주셨어요. 아빠는 파이프의 연기가 우리들을 에워쌀 때까지 오래오래 움직이지 않고 계셨어요. 오늘 저녁엔 영화 구경이나 갈까? 아니면 오늘 저녁엔 아이스 크림을 먹을까? 난 아이스 크림이나 영화구경 따위에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어요. 난 그때 죽어가고 있다고 믿었는걸요. 그러면서 날이 가고 달이 바뀌며 아빠와 나는 어느새 외로움에 익숙하게 되었죠. 말이 없이도 아빠 곁에 있으면 평온했고 난 절대로 아빠를 방해할 이유가 없었어요. 아빠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이 돌때에도 내가 살금살금 다가가면 아빠의 얼굴은 언제 그랬느냐듯이 밝아지고 말없이 부드럽게 나를 어루만져 주셨어요. 전 그 때 아빠가 경제적으로 곤란을 당하고 계신지 몰랐었어요. 어느 저녁엔 오또 아저씨와 가죽 의자에 앉아 브랜디를 마시며 둘이 중얼거리셨어요. 서로의 얘기를 듣는 것도 아니면서 중얼거리셨어요. 그러다가 해리 아저씨가 오셔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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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두셨죠. 두분은 너무 조용히 장기를 두셨죠. 들리는 소리는 오로지 세 개의 시계가 제각기 똑딱 똑딱 가는 소리 뿐이었죠. 엄마가 돌아오시기 며칠 전부터 나는 흥분으로 들뜨기 시작하죠. 이러다 아프면 어떻하나 걱정까지 들 정도였죠. 엄만 아픈 사람을 싫어했어요. 드디어 엄마가 오시는 날은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게되죠. 너무 기뻐서 아무 말도 못하게 되면 그런 나를 보고는 알지도 못하시고 "에바는 내가 집에 온게 기쁘지 않은가 보지?" 이렇게 말씀하시죠.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고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난 여전히 한마디 말도 할 수가 없는거예요. 우리 집에서 말이란 다 엄마가 도맡아 했기 때문에 난 말을 잘 할 수도 없었어요. 난 엄마를 목숨과 바꿀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어요. 적어도 그 때는 그렇게 믿었었죠. 그래도 엄마가 하는 말들은 믿지 않았어요. 난 직감으로 엄마가 하는 말에는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는걸 알 수 있었거든요. 엄마의 목소리는 정말 아름다웠어요. 어머니, 나는 엄마가 말하실 때 엄마의 목소리를 내 몸 전체로써 느끼곤 했죠. 그러다가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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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게 듣지 않는다고 꾸중을 여러번 들었었죠. 그건 내가 엄마의 목소리에 반해서 목소리를 듣다가 내용을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이였어요. 전 무슨 얘기를 하는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 내용들이 엄마의 말투라든가 눈빛에 서리는 감정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였죠. 그 중에서도 제일 심했던 것은 엄마는 화를 낼때도 꼭 미소를 띠운다는 사실이였어요. 아빠에게 화를 낼 때 늘 엄마는 아빠에게 나의 가장 사랑하는 친구 라고 불렀고 내가 지겨워 지는 순간에는 꼭 나를 나의 가장 귀여운 강아지 라고 불렀죠. 그 어느 내용도 엄마의 얼굴 표정과 맞는 것이 없었어요. 조금 더 해야겠어요. (에바는 말을 중단 시키려는 엄마를 막으며) 어머니, 제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좀 취했어요. 취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 있는 것이지요. 얘기가 끝나면 전 또 용기를 잃고 어머니 앞에서 벌벌 떨며 말 한마디 못하고 부끄러워 할거예요. 그 때는 어머님의 차례지요. 제가 듣는 차례구요. 어머니 쪽의 얘기와 해명이 있으시겠지요. 전 또 항상 그랬듯이 조용히 들으며 어머니를 이해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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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모든 것이 어려웠어도 엄마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어요. 엄마가 그 많은 연주 여행을 잘 견뎌내셨듯이 저도 엄마를 잘 견뎌냈거든요. 그런데 한가지 견뎌낼 수 없는 게 있었죠. 이해할 수 없었어요. 엄마와 아빠의 관계는 두분에 대해서 난 요즈음도 많이 생각해 봐요. 두분이 나누신 생활들은 아직도 제게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예요. 아버지는 엄마보다 훨씬 나약하셨죠. 그런데도 엄마는 아버지한테 전적으로 기대시는 것 같았어요. 어느 면에서는 아버지한테만은 생각이 꽤 깊으셨던 것 같애요. 나와 헬레나한테는 절대로 그런 법이 없었지만 엄만 아버지가 마치 깨질듯한 유리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다루셨죠. 애기다루듯 하셨어요. 허지만 불쌍한 아버지는 실은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죠. 약하고 남 해칠 줄 모르는, 아버지가 진 빚도 엄마가 몇 차례 갚어 주셨죠.
[샬로트] 그래.
[에바] 아버지에게 몇번의 정사가 있었던 것 같아요. 모르는 여자들이 우리를 찾아와서 거실에 앉아 있곤 했어요. 그 때마다 엄만 여행 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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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어요. 그 중 한 여자는 엄마의 제자였던 것 같았어요. 마리아라구.
[샬로트] 그래 마리아와 지내셨다. 그러나 심각한 관계는 아니었어.
[에바] 그런 일들이 엄마를 괴롭히지도 않았어요?
[샬로트] 아니, 난 전혀 화를 내지 않았어. 그런 시시한 감정따위로 너희 아빠에게 불쾌해 하지 않았지. 게다가 상대들의 질이 높았거든. 너는 아빠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고 했지만 그건 불공평한 판단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네가 얼마나 너희 아빠를 모르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 너희 아빠가 시대만 잘 타고 났더라면 구라파 전체에서 일류가는 건축설계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이는 너무 남을 생각하고 사람이 좋았어. 할아버지께서 건축회사를 너희 아빠와 큰아버지께 같이 물려주신게 잘못이었지. 자기능력의 반도 못되는 형님 밑에서 보조역할을 했으니 말이 되니? 너희 아빠는 문제를 일으키거나 남앞에 나서기를 싫어했어. 아빠는 머리가 뛰어나게 좋았어. 예를 들면 코펜하겐의 음악당을 설계했을 때, 아냐 오슬로 였던가? 아니 리용이지. 모두들 1930년대의 가장 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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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고 훌륭한 예술작품이라고 했단다. 전쟁이 터져 그냥 설계에서 그칠 수 밖에 없었지. 그 사람은 가엾게도 하는 일마다 운이 안따랐어. 정말 뛰어난 사람을 너는 어떻게 평범하다고 할 수 있니? 왜 그런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니? 내 말이 믿어지지 않니?
[에바] 믿고 안믿고가 무슨 소용이예요? 엄만 엄마가 만들어 놓은 현실이 있고 난 내가 만든 현실이 있는걸요. 서로의 말을 맞바꾼다면 그 땐 모든 것이 무의미해지죠. 서로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삶을 보게 마련인걸요.
[장] 장면 15. 계속되는 대화.
[샬로트] 넌 아까 내가 내 자신을 속이며 산다고 말했다. 그렇지 않단다. 난 내 자신에게 항상 솔직 하려고 노력해. 나도 실은 무서웠어. 허리는 아파서 연습을 충분히 못했고 연주는 계속 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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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이었다. 중요한 연주들이 취소되고 내 생애가 무의미하다고 느끼기 시작했지. 동시에 너와 너희 아빠에 대한 죄의식이 시작됐다. 너희들과 같이 집에 있어야 하는 시간에 나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혹평을 받으며 불명예스럽게 다닌다는 것이 너무 어리석었지. 그런 비웃는 듯한 얼굴을 하지 말렴. 있는 그대로 얘기하고 싶다. 그냥 솔직하게.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건 괜찮아. 이왕 터진 일이니 다 터트려 놓으면 다시는 이런 얘기를 할 필요가 없으니 오히려 잘 된건지도 모르겠구나.
[에바] 이해할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샬로트] 함부르크에서 베토벤의 일번을 연주했어. 특별히 어려운 곡도 아니고 그저 그런대로 지나갔지. 늘 하듯이 끝난 후 슈미쓰씨하고 저녁 먹으러 나갔단다. 슈미쓰 알지? 지휘자말이다. 지금은 죽었지만. 먹고 마시고 한참 하니까 긴장도 풀리고 즐거워 지더라. 허리 아픈것도 잊어버리고. 그 때 슈미쓰씨가 얘기했어. 남편과 애들하고 남들처럼 집에서 즐겁게 살지 왜 관객들 앞에서 자기자신을 가혹한 비난의 대상으로 내놓느냐고. 그런 말을 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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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쳐다보며 웃었지. 내 연주가 그렇게 형편없었느냐고 물었다. "아니 그래서 이 얘기를 한건 아니죠. 나는 1934년 8월 18일이 자꾸 생각나서. 당신은 스무살이었고 우리는 베토벤 1번을 린즈 라는 도시에서 연주했어요. 기억나세요? 무척 더운데다가 극장은 꽉찼었죠. 우리의 연주는 마치 신들이 내려와 연주한 것처럼 완전무결했어요.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모두. 연주가 끝나고 관객들은 발을 굴르고 오케스트라는 팡파레를 울렸죠. 당신은 아주 간단한 빨간 여름 원피스에 머리를 허리까지 내려뜨렸어요. 당신은 즐거웠고 아무것도 걸리는게 없었죠. 그날 밤 당신이 그 곳을 다섯 번을 쳤어도 여전히 아름답고 완전했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기억하냐고 물었더니 자기 악보에 써 놓았대. "난 기가막힌 경험은 항상 악보 귀퉁이에 메모를 해 두는 습관이 있지요." 그날 새벽 세시에 아빠에게 전화를 했지. 더 이상 연주 여행을 하지 않고 남처럼 가정에 충실하겠다고. 정말 좋아하셨지. 너무 감정적이 되서 우리 둘이는 울다 웃다 거의 두시간을 얘기했단다. 정말 그랬어 이건 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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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 아니다. 이 샬로트에게도 행복의 문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어린애 같은 생각이 들었어. 물론 어리석었지. 한 달쯤 후에 나는 내가 너나 너희 아빠에게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멀리 없어져 버리고 싶었다. 일년이란 시간이 지나고서야 마음이 가라앉았어. 개인지도 하면서 너를 열심히 키우고 남편의 걱정거리를 서로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섬에서 한 여름 보낸 것 생각나니? (에바는 끄덕이며 미소아닌 미소를 띠운다) 꽤 즐거운 여름이었다고 생각되는데, 우린 즐거웠지? 아니었니?
[에바] 아뇨, 즐겁지 않았어요.
[샬로트] (한숨을 내 쉬며) 이 세상에 내가 제일 즐겁다고 네가 말했잖니?
[에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한 말이예요.
[샬로트] 그럴테지, (웃으며) 내가 뭘 어떻게 잘못했니?
[에바] 잘못하신 것 하나도 없어요. 항상 그렇듯이 훌륭하셨어요. 그런 엄마가 난 무서웠어요. 엄만 열네살짜리 딸에게 발산시키지 못한 에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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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를 다 쏟았어요. 그 동안의 무관심을 한거번에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난 내 자신을 엄마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고 최선을 다했지만 어림없는 일이였어요. 좋든 싫든 난 엄마를 사랑했고 엄마는 항상 옳고 잘못은 내게 있다고 믿었거든요. 엄마가 어떠하셨는지 아세요? 엄만 절대 겉으로 화를 내는 법이 없었어요. 항상 교묘하게 기술적으로 암시만 했지요.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고상한 농담과 부드러운 걱정과 함께 내 주위를 하루 종일 맴도셨죠. 약간의 걱정스런 빛을 띠며. 정말 조그만 일에서부터 모든 일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져갔죠. 난 키가 너무 일찍부터 자라서 어깨를 꾸부리고 다녔어요. 그것 때문에 난 체조를 꼬박꼬박 해야했고 엄마도 허리가 아프다면서 운동시간까지 같이 보내야 했어요. 사춘기에 여드름이 좀 나니까 엄만 금방 피부과 의사를 불러왔어요. 그 의사는 냄새가 지독한 피부약을 바르라고 주었어요. 그 냄새 때문에 난 계속 토할 것 같았고 얼굴은 더 빨개지더니 못보게 되었어요. 내가 긴머리를 간수할 능력이 없다며 짧게 자르게 만들었어요. 내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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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엉망진창이 되었죠. 게다가 이 교정까지 한다고 철사까지 끼워 놓으니까 정말 꼴볼견이되버렸어요. 그러면서 이젠 다 컸으니 바지나 세타만 입지 말고 엄마가 만든 원피스나 엄마 맘대로 맞춰온 옷을 입어야 했어요. 싫다고 할 수가 없었어요. 엄마를 화나게 하기가 싫었기 때문에 이것이 전부가 아니예요. 엄만 그런 마당에서 읽기 싫은 책들까지 강요했어요. 내 나이에 너무 어려운 책들이었어요. 읽고, 또 읽어도 이해 할 수 없었지만 엄마와 토론까지 해야했지요. 엄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계속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었어요. 난 두렵고 겁에 질려 있었어요. 꼭 언젠가는 엄마가 나 같은 바보는 처음 봤다고 하실 날이 온다고 믿었거든요. 난 항상 마취된 상태였어요. 그 상태에서 한가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어느날 사실의 나를 알게 되면 엄만 분명 나를 증오하시게 될거라는 것이죠. 엄만 결심이 굳었고 그러면 그럴수록 난 공포속에서 위축되어갔죠.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매순간 엄마를 기쁘게 해 주느라고 바빴어요. 엄마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머리 텅빈 꼭두각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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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되어버린 것이예요. 엄마가 받아 들일 수 있는 딸이되기 위하여 난 엄마같이 행동하고 말하며 엄마 흉내를 내고 엄마가 듣고 싶어하는 말만 골라하며 살게 되었죠. 심지어는 혼자만 있는 순간에도, 다만 일초라도 나는 내 자신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어요. 이미 난 내 자신이 싫어져 버렸으니까요. 그 몇해를 생각하면 지금도 정말 무서워요. 몸이 떨리고 소름이 끼쳐요. 끔찍한 일이죠. 그리고 계속 일은 더 악화되었어요. 난 내가 엄마를 미워한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항상 엄마와 나는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고 또 엄마는 여러모로 멋있는 사람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러니 제가 엄마를 미워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대신 그 미움은 미칠 것같은 공포로 변했지요. 무시무시한 꿈을 꾸며 손톱을 깨물고 머리카락을 한주먹씩 쥐어뜯기 시작했어요. 소리내어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울 수 조차 없게 되었어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나오느니 나약한 신음소리 뿐 나는 더 무서워 지기만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엄만 나를 끌어 안고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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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더군요. 내가 걱정이라면서 좋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게해야겠다고 하셨어요. 엄마의 눈에는 내가 미쳐간다고 보였고 미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내게 어떤 서글픈 만족감을 주었지요. 하얀 까운을 입은 의사에게 보내졌어요. 그 의사는 이상한 버릇이 많았어요. 종이칼로 그 뚱뚱한 배를 쿡쿡찌른다든가, 솔직히 제 눈에는 꽤 구닥다리 돌팔이 의사처럼 보였지요. 그는 나의 성생활에 대해서 물었어요. 무슨 얘기인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그 때 난 아직 월경도 하기 전이었는걸요. 할 수 없이 난 말을 막 만들어 내기 시작했죠. 아마 내 상상력이 꽤 훌륭했었나 봐요. 그 어린 나이에 괴상한 공상들이 그 의사를 놀라게 했을거예요. 아니면 그런 나를 알면서도 내 마음을 상하게 하기 싫어 모르는 척 했는지도 모르구요. 그런대로 친절하고 교양도 있었어요. 엄마는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내가 잘되기만을 바란다며 이미 다 아는 말들을 되풀이 했어요.
[샬로트] 그러다가 내가 마틴하고 없어졌지. 넌 그때의 나를 아직도 용서해 주질 않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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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감히 제가 엄마한테 용서라는 단어를 쓸 수 있나요.
[샬로트] 어쨌든 넌 내가 너를 실망시켰다는 얘기지.
[에바] 그렇죠.
[샬로트] 넌 절대--- (자기 자신을 억누르며 말을 멈춘다)
에바와 샬로트 둘다 말이 없다
[에바] 스테판 생각나세요?
[샬로트] 물론이지, 너와 스테판은 애기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에바] 어머니 제가 그 때 몇살이었는지나 아세요? 열 여덟살이었어요. 스테판은 이미 성인이였구요. 그리고 우린 서로 좋아했으니까 어떻게든 이겨나갈 수 있었을 거예요.
[샬로트] 천만에 절대로 못했을 걸.
[에바] 아녜요, 절대로 이겨나갈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그 아이를 원했어요. 엄마가 우리 사이를 갈라 놓은 거예요.
[샬로트] 아니야, 당치도 않은 소리를 하는구나. 난 오히려 너희 아빠에게 여유를 주자구했다. 우리는 그저 옆에서 보기만 하자고. 스테판은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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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부터 끝까지 너를 속인 불량배에다 범죄자에 정신빠진 놈이라는 걸 너는 모르니?
[에바] (증오에 차서) 내가 엄마에게서부터 멀어지고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엄만 그 사람을 미워했어요. 동정을 갖고 이해하는 척하면서 우리 사이를 망치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어요.
[샬로트] 그래 애기가 어쨌단 말이야?
[에바] 스테판은 내가 애기를 가졌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부터 사람이 전혀 달라졌어요.
[샬로트] 그래서 내 차를 훔쳐내 취중 운전을 하다 붙잡혔구나. 달라져서 그랬어. 스테판이 네가 임신했다는 소리에 보인 반응이 바로 그거라는 걸 모르니?
[에바] (화가 치밀어 오르며) 엄마는 그렇게 무엇이든 잘 아세요? 그 사람과 내가 얘기를 나눌때 옆에라도 계셨나요? 도대체 지금 무슨 얘기하는지나 알고 떠드시는 거예요? 남의 느낌에 대해 한번이라도 진심으로 알려고 하는 적이라도 있으면서 이러시는 거예요? 말이 나왔으니 얘기지만 자기 자신외에 이 세상에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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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신경 한번 써 보셨어요?
[샬로트] 그런 비난의 화살은 이미 받았잖니.
[에바] 스테판은 물론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어요. 그 다른 점이 즉 그의 좋은 점이였죠. 보다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이었으니까요.
[샬로트] 그래서 램브란트의 그림을 전당잡혀먹고, 그래서 자기 과거를 비극적으로 꾸며 너를 유혹하고 그래서 우리 별장을 부수고 들어가 술이란 술은 다 없애고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았구나.
[에바] 순서가 틀렸어요. 잊으셨나요? 인공유산을 강제로 받고 정신병원에 쳐넣어졌다는 소리를 듣고 엄마를 만나고 싶어 했죠. 엄만 그 사람을 집에도 들여 놓지 않았어요. 담을 넘어 들어간 스테판을 엄마는 경찰에 고발했죠. 어떤 사람이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샬로트] 네가 정 애기를 원했다면 누가 뭐래도 갖을 수는 있었다. 아무리 내가 강제로 너를 병원에 끌고 갔어도 버틸 수 있었어.
[에바] 내가 엄마를 거역해요? 내겐 그럴 힘이 없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의 의견에 항상 따라왔고 저는 제 자신을 잊은 세뇌된 병신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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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걸요.
[샬로트] (비통하게) 나는 너를 돕는다고 생각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믿었었지. 지나간 이 긴 세월을 너는 그런 증오속에서 살고 있었다니 정말 무섭구나. 왜 한번도 이 일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았니?
[에바] 엄마가 남의 말을 귀담아 듣나요? 엄만 유명한 도피자였어요. 정서적으로는 절름발이에다 사실은 나와 헬레나를 미워했어요.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인걸요. 그 사실이 엄마 자신을 망쳐 놓은 거예요. 나를 차디 찬 뱃속에 가두었다가 미움과 함께 이 세상으로 밀어 내보냈어요. 그래도 그런 엄마를 난 사랑했어요. 그런 나를 구역질 나는 바보에다 실패작이라며 미워했죠. 엄마는 내가 엄마처럼 썩어들어가기를 바랬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모든 것들이 시퍼렇게 멍들기를 바랬어요. 내게 있어서 생동하는 무엇이라도 모조리 질식시키려고 했지요. 내게 있는 증오에 대해서만 얘기하지 마세요. 엄마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도 제것 못지 않죠. 절대로 지지 않을걸요. 전 어렸어요. 온순하고 착했죠.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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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구속하면서 엄만 누구에게나 그러했듯이 내게도 자기를 사랑해 줄 것을 원했어요. 전 엄마의 완전한 종속물이 되었죠. 모든 일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졌어요. 말로는 늘 아빠나 나, 그리고 헬레나를 사랑했어요. 말로만 사랑하고 사랑하는 척하는 데는 엄마를 따라갈 사람이 없을 것 같군요. 엄마같은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위험인물이지요. 철창에 가둬 철저히 가르쳐야해요. 엄마와 딸, 그것은 감정과 혼돈 그리고 파멸의 끔찍한 혼합물예요. 사랑과 염려라는 명목하에 어떠한 끔찍한 일이라도 가능한 관계인가 봐요. 엄마의 상처는 딸이 이어받아야 하고, 엄마의 실망은 딸에 의해 보상되야 하고, 엄마의 불행은 또 다시 딸의 불행으로 물려져야 하나봐요. 탯줄은 절대로 끊겨지지 않는가 보죠. 딸의 역경은 엄마의 승리가 되고 딸의 슬픔은 엄마의 남모르는 즐거움인가 봐요.
헬레나가 에바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다. 에바의 말투에 헬레나는 저으기 놀래며 침대에서 빠져나온다. 마루에 떨어지는 헬레나. 팔꿈치와 무릎으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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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와 문밖으로 쓰러진다. 숨을 바삐 쉬며 몸에 강한 경련을 이르킨다.
[에바] (목소리만 들린다) 엄마의 잔인한 은총을 받으며 난 엄마에게 맞추며 살아 왔어요. 우리 딸들은 그렇게 살아야만 되는 것인 줄 알았죠. 어린 아이들은 상처 받기 쉽죠. 이해력도 없고 무기력하니까요. 알아 듣는 능력도 없고 아무 지식도 없으며 누구도 가르쳐 주질 않아요. 그런 어린애들이 남들로 인해 창피를 당하고 거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며 넘을래야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드는 것이지요. 아무리 불러도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고 뛰어와 주는 사람도 없는거예요. 아시겠어요?
[장] 장면 16. 계속되는 대화.
[샬로트] 너의 그 지독한 미움속에다 내 초상화를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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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그렸구나. 그 초상화가 과연 나의 실상과 틀림이 없을까? 넌 초상화가 진정으로 "나"라고 믿고 있니?
에바는 두손에 얼굴을 파묻고 머리를 흔든다.
[샬로트] 에바야 너 할머니 생각나니? 물론 안나겠지. 네가 일곱 살에 돌아가셨으니까. 할아버지는 기억나지? 그래 너와 할아버지는 아주 가깝게 지냈지.
[에바] 할머니는 무서웠어요. 몸이나 정신력으로나 늘 압도를 느꼈어요. 할아버지는 그래도 부드러우셨죠.
[샬로트] 그래, 너한테는 부드러우셨을 게야.
[에바] 엄마한테는 그러지 않았나요?
[샬로트] 전혀 그렇지 않으셨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름난 수학자셨다. 두분은 서로에게 빠져있었고 또 수학에 빠져있었지. 굉장히 무게가 있었고 다른 문제에는 무책임하며 즐겁게 지내셨단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꽤 후하셨어. 그러나 실은 진정한 관심과 애정때문은 아니었지. 벌을 줄때는 물론 입을 맞춰 주실 때에도 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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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부드러움이라든가 접촉 혹은 밀접한 관계 애정 등등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에는 전혀 알지 못했어. 오로지 음악을 통해서만 내 감정 표현을 배운 거란다. 어느 때는 방에 혼자 누워서 생각해. 내가 도대체 지금까지 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내게 참 훌륭한 생을 사신다며 남들을 음악으로서 그토록 즐겁게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하더라. 난 사는 것도 아니야.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어. 나의 어머니의 몸에서 밀려나온 정도에 불과해. 엄마의 몸은 다시 닫히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지. 나의 엄마에게 나는 존재하지 않는거란다. 어느때는 남들도 다 이렇게 느낄까? 아니면 어떤 이들은 산다는 것에 남달리 더 재주가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까지 해봐. 살지않고 그냥 존재만 하는 사람들도 있지.
[에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며 살았어요?
[샬로트] 삼년 전에 내가 굉장이 아팠단다. 넌 모르지. 피 속에 독이 들어가서 혼났어. 파리 병원에서 두달이나 입원해 있었어. 레오나르도는 모든 음악회를 취소하고 내 곁에 있었다. 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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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쎄 죽은 것과 다름없었어. 그리고 나서 한동안 우울증에 들어갔지.
[에바] 그런 줄 전혀 몰랐군요.
[샬로트] 너를 걱정끼치고 싶지 않았어. 여하튼 레오나르도와 나는 모처럼 시간을 갖고 대화를 나눌 수 있었어. 주로 얘기는 그 사람이 하고 난 이해할려고 듣는 쪽이었어. 처음에는 그것도 어렵더구나. 때로는 나도 영혼이란 단어를 쓰기는 썼다만 그 영혼이란 자체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더구나. (한숨을 내쉬며) 꼭 일학년 학생같았어. 우수 학생측에도 못끼겠드라.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이가 옆에 있는 것이 좋았어. (웃으며) 그 사람은 참을성이 많았지. 물론 가끔은 나한테 머리가 이렇게 안도는 여자가 어떻게 이 정도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은. (쉬다가) 그러나 결국 내가 누구라는 감이 들더구나. 난 아직도 성인이 되지 못했다. 얼굴과 몸은 늙고 추억과 경험들은 쌓였어도 이 샬로트라는 껍데기 속에는 아직도 태어나지 못한 내가 있다고.
[페이지] 106 *원본 페이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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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다가) 난 얼굴들을 기억해 낼 수가 없어. 심지어 내 얼굴도. 어느 때는 어머니의 얼굴도 생각이 안나. 크고 살결이 좀 검고, 눈은 파랗고 코는 크고, 입술은 두텁고, 이마는 넓고 이런 식으로 하나 하나는 기억이 나지만 이런 것들을 맞춰서 엄마의 얼굴을 만들 수가 없어. 마찬가지로 너나 헬레나 레오나르도의 얼굴도 떠오르지가 않는다. 너와 네 동생을 낳았을 때에 대해서도 생각나는 것은 고통 뿐 어떻게 아팠는지에 대해서도 생각이 안나는구나. (쉬다가) 레오나르도가 한번은 이런 말을 했어. 어떻게 얘기했더라--- "현실에 대한 느낌도 일종의 재질이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재질이 부족하지만 그게 오히려 잘 된것인지도 몰라" 무슨 말인지 알겠니?
[에바] 알 것 같군요.
[샬로트] 정말 얼마나--- (조용하다)
[에바] (쉬다가) 뭐가요?
[샬로트] 얼마나 이상한 일이니?
[에바] 이상하다뇨?
[샬로트] 난 네가 항상 두려웠어. (놀랜다.)
[에바] 이해가 안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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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다시 놀래며) 네가 나를 돌봐 주기를 바랬나봐. 네가 나를 껴안고 포근하게 감싸주기를 바랬나봐.
[에바] 전 어린애였는걸요.
[샬로트] 그게 상관이 있을까?
[에바] 없겠죠.
[샬로트]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단다. 나도 너를 사랑하고 싶었어. 그런데 사랑할 수가 없었어. 난 너의 요구가 무서웠다.
[에바] 요구같은 것 없었어요.
[샬로트] 난 나의 능력이 미칠 수 없는 너의 바램들이 꼭 있는 것 같았지. 불편하고 거북했어. 난 너의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어. 나도 너와 다름이 없이 무능력하고 가련하게 겁에 질려 살고 있었다는 걸 네가 알아주었으면 했던거야.
[에바] 정말이세요?
[샬로트] 이제까지 한번도 이런 말을 한적이 없어. 내가 거짓을 꾸미고 있는 것일까? 연극을 하는걸까? 진실일까? 나도 몰라. 에바야 나도 모르겠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서야할지 방향과 균형을 잃었어. 레오나르도의 죽음 때문일까? 헬레나의 병때문일까? 아니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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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그 무서운 증오 때문에? (무거운 고통속에서) 에바야 내게 너무 가혹하게 대하지 마라. 내 마음이 찢어 지는것 같애.
[에바] 그 아픔 저도 알아요.
무서운 노력으로 헬레나가 문을 열고 층계 끝으로부터 내려온다. 거기 그 어둠 속에서 그녀는 두 여자들의 얘기를 듣는다
[샬로트]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에바] 헬레나와 레오나르도에 대해서요.
[샬로트] 무슨 얘긴데?
[에바] 모르세요?
[샬로트] 레오나르도와 헬레나는 서로 잘 알지도 못했잖아?
[에바] 어머니.
[샬로트] 오래 전에 부활절 휴가를 같이 보낸 것외에는.
[에바] 삼일만 계시다가 엄만 우리만 남겨 놓고 가버리셨어요.
[샬로트] 비가 오고 아마 눈도 왔던 걸로 기억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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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어머니
[샬로트] 바르도크의 일번 공연을 쥬네브에서 할 예정이었지. (쉬다가) 빨리 가서 연습을 충분히 하고 싶었어. 좀 더 나은 연주를 하고 싶어서 안절부절 했다. 그래 일찍 떠날 수도 있었어. 날씨도 아주 나뻤고. (한참 쉬다가) 레오나르도도 저조했고 너도 꽤 우울했었어.
[에바] 어머니.
[샬로트] 왜 나한테 그 지겨운 부활절을 상기시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구나. 네 목소리를 들어서는 내가 분명 또 잘못을 한 모양인데 그랬다면 내가 모르---
[에바] 엄마하고 레오나르도는 화요일에 도착했어요. 그날 저녁은 꽤 재미있었어요. 웃고 노래하고, 포도주에 취해서 벽장속에 파묻혔던 오락기구들을 꺼내 게임도 하고, 유쾌하게 보냈죠. 그 때는 헬레나의 병세도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이 앉아 놀았어요. 헬레나는 몸 컨디션도 좋았고 명랑하고 행복해 보였어요. 헬레나가 좋아하는 것이 레오나르도를 기쁘게 했어요. 둘이는 같이 얘기를 나누며 농담도 했어요. 헬레나는 문자 그대로 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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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도에게 매혹되었어요. 밤 늦도록 같이 앉아 있었죠. 다음날 아침 헬레나는 나에게 비밀을 말하듯이 레오나르도가 자기에게 입을 맞췄다며 좋아했어요. 아침을 끝내고 둘이는 드라이브를 나갔어요. 부활절 금요일 날씨는 따뜻하고 평화스러운 봄 날씨였죠. 이런 것까지 다 잊으셨어요. 어머니? 집에 돌아올 때 그 두사람의 얼굴은 빨갛게 그을렀고 상쾌해 보였어요. 엄마는 전화중이였죠. 엄만 하루 온종일 전화만 걸었어요. 레오나르도가 헬레나를 안고 들어와 의자위에 앉혔어요. 엄만 전화걸다 말고 헬레나에게 " 자 너에게 친절하게 해주신 레오나르도에게 감사의 표시를 해라." 이렇게 말했어요. 헬레나가 웃으면서 "엄만 나를 아직도 여덟살난 애기 취급을 해 주니 고마워 눈물이 나네요."라고 대답했어요. 엄마의 목소리는 순간 바뀌더니 아직도 유우머가 살아있으니 다행이라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화기로 얼굴을 돌렸어요. 오후에 레오나르도가 가방에서 책 한권을 꺼내 헬레나에게 읽어 주기 시작했어요. 모차르트의 생애였어요. 크게 소리내어 읽어 주며 사진들을 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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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며 시간을 보냈죠. 엄만 몇 시간을 바르토크 협주곡과 싸웠어요. 오후 네시 경 부엌으로 나와서 차를 만드시며 나한테 "얘 헬레나 어디 있니? 그 고마워서 눈물이 난다는 아이" 하시더군요. 그날 저녁 손님들이 오셨어요. 레오나르도가 술을 너무 많이 했어요. 바하의 독주곡 전부를 쳤어요. 보통 때와 다르게 몸이 더 커 보였고 어딘가 무거우면서도 부드러웠어요. 그의 실력 전부는 아니었지만 그의 첼로 연주는 아름다웠어요. 황홀해 하며 그를 쳐다보고 있던 헬레나의 눈에서는 빛이 보였어요. 난 그런 헬레나를 본 적이 없었어요. 손님들이 피곤해 하며 우울한 채로 떠나고 엄마와 나는 어둠 속으로 산책을 나갔죠. 열심히 듣지않아 모르겠지만 엄마는 케냐 든가 어딘가로 여행갔던 얘기를 내게 신나게 떠들고 있었어요. 내 머리 속에는 헬레나와 레오나르도 뿐이었어요. 집에 돌아왔을 때까지도 그들은 우리가 떠났을 때 앉아 있던 그 모습 그대로 방 양쪽 끝에 앉아 있었어요. 벽난로의 불길도 꺼져가고 촛불도 꺼져가고 있었죠. 레오나르도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는 자기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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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을 감추려고 조금의 노력도 하지 않았어요. 감추는 면에서는 헬레나가 훨씬 나았어요. 헬레나는 우리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현실적인 목소리로 말했어요. 다들 자러 들어가고 난 레오나르도를 이층까지 부축했어야 했죠. 침실문 앞에서 그는 내게 얼굴을 돌리며 얘기했어요. "잠깐 상상해 봐, 저 유리 창에 나비가 한 마리 부딛혔다고, 유리에 부딛힌 나비의 파닥거림을." 헬레나의 방으로 갔어요. 꽂꽂이 의자에 일어나 앉아 있는 헬레나는 초연하고 침착해 보였어요. 병 증세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었어요. 난 헬레나의 그 때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어요. 어머니, 앞으로도 절대 그 얼굴을 잊지 못할 것 같애요. 엄만 우리와 같이 있겠다던 날보다 나흘이나 먼저 떠났어요. 바로 다음날 쥬네브로 가셨으니까요. 폭설이 내려서 비행들이 못 떴는데도 엄마는 용하게도 페리호에 자리를 잡으셨더군요. 부두까지 제가 모셔다 드렸어요. 배를 타시기 직전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레오나르도에게 너희들과 며칠 더 있으라고 부탁했어. 헬레나에게 좋은 것 같길래." 미소를 띠우며 서로 포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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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엄마는 떠났지요. 레오나르도가 갑자기 불안해 하며 우울해 지더군요. 건망증이 생기고 우리에게도 무심했어요. 다락방에 쳐박혀 내내 첼로만 쳤어요. 부활절 아침 너무 취해서 층계에서 굴렀지요. 오히려 그제서야 기분이 풀린다는 듯이 비를 맞고 산책을 나가더군요.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는 술이 깨었어요. 헬레나에게 몇시간 내로 자기는 떠나야 한다며 추억으로 모차르트의 생애를 주면서 다시 만나기를 약속했지요. 그리고는 쥬네브에 전화를 신청했어요. 엄마와 삼십분 정도 얘기하고 그날밤 마지막 비행기로 떠났어요. 무서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죠. 헬레나의 울음이었어요. 헬레나의 방으로 뛰었죠. 허리와 오른 다리의 심한 통증에 견디지를 못했어요. 새벽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다면서 소리 소리 지르더군요. 집안에 있는 진통제란 진통제는 다 먹였어요. 그래도 효과는 보이지 않고 새벽 다섯시에 앰블런스를 불렀죠.
[샬로트] 그래 헬레나의 병까지도 내 잘못이로구나.
[에바]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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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로트] 그게 사실이냐? 넌 정말로 헬레나의 병이 나때문이라구---
[에바] 네.
[샬로트] 설마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
에바는 조용하다. 샬로트도 말이 없다.
[에바] 헬레나는 한 살이었어요. 엄마가 우리의 곁을 떠난 것이 그리고, 계속 엄마는 우리를 등한시 하셨죠. 헬레나의 병이 심각해졌을 때 엄마는 헬레나를 병신들만 모여 있는 병원에 넣어 버렸어요.
[샬로트] 설마 넌 진심에서 그런 소리를 하진 않겠지. 그건 사실이 아니다.
[에바] 사실이 아녜요? 어떻게 사실이 아니겠어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주세요. 저를 보세요. 그리고 헬레나를 보세요. 구실을 만들어보세요. 자기 변호를 해 보세요. 어머니, 진실은 오직 하나예요. 진실 아니면 다 허위예요. 용서란 있을 수 없어요.
[샬로트] 난 몰랐어. 알고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에바] 물론 그렇게 까지는 저도 생각지 않아요.
[샬로트] 그렇다면 나만 원망할 수는 없잖니?
[에바] 엄만 자기 자신에게는 늘 무엇이든 예외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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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혜를 만드셨죠. 인생이 엄마에게는 특별 대우를 한다고 믿었어요. 하지만 그 생각은 엄마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놓은 계약이라는 것을 엄마도 어쩔 수 없이 깨달아야만 할 날이 올거예요. 삶은 엄마에게만 괴로움을 빼 주질 않는거예요. 엄마도 남들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지독한 죄를 짓고 있는지 알게 만들거예요.
[샬로트] 무슨 죄?
[에바] 몰라요. 그냥 죄겠지요.
[샬로트]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에바는 대답이 없다
[샬로트] 에바야 이리 가까이 와, 너의 가슴에 나를 좀 파묻어 주렴. 무섭다. 에바야 나의 모든 잘못은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일까? 내가 고치겠어. 네가 가르쳐다오. 얘기를 좀 더 많이 오래도록 해야겠구나. 그리고 네가 나를 도와줘야 해. 더 이상 이렇게 하고 살 수는 없다. 너의 그 증오가 너무 무섭구나. 난 이런 것을 몰랐어. 이기주의에다 어린 아이처럼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의 연속이었으니까. 내게 그냥 손이라도 얹어주렴. 때리고 싶으면 차라리 때려라도 줘. 네가 날 도와주지 않으면 난 가망이 없게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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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집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 온다. 헬레나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 두 여자가 어두운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지만 에바가 먼저 다다른다. 헬레나는 언니를 밀어 제치고 엄마에게로 팔을 뻗친다. 샬로트는 아픈 딸의 두 무릎에 얼굴을 파 묻는다.
[장] 장면 17. 샬로트는 자기 매니저 폴에게 조용히 전화를 건다.
[샬로트] (전화에 대고) 폴, 너무 일찍 걸어 미안해요. 아무도 못 듣게 얘기하느라고 말소리가 적을 거예요. 내가 부탁이 있는데 좀 들어 줄래요? 사무실에 나가는 즉시 나를 당장 파리든 아무데든 곧 오라고 전보 한 장 띄어줘요. 여기서 한시라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요. 그렇다고 아무 이유 없이 떠나기도 뭣하고, 구실이 있어야지. 아무렇게나 스토리를 좀 꾸며 줘요. 옛날 얘기 잘 만들잖아. 요금이 비싸니까 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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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안녕.
샬로트가 방문을 닫고 들어 간다. 에바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전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다.
[장] 장면 18. 샬로트는 폴과 함께 기차로 여행 중이다. 에바는 아들의 무덤 근처를 혼자 산책한다. 기차 속의 샬로트와 무덤가의 에바가 번갈아 보인다.
[샬로트] (기차 속에서) 고마워요 폴, 브리타니까지 동행해줘서. 혼자 있다는게 견디기가 힘들어요. 딸네집에 가서 너무 놀랬나 봐. 아예 생각지도 않던 헬레나를 보고 병세도 너무 악화되었고, 왜 차라리 죽지도 않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잔인한 일인가 폴? "나"라는 사람 당신은 잘 알지요? 내가 누구를 실망시키거나 연주를 취소하거나 하는 일은 한번도 없던 샬로트예요. 나를 믿고 의지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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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
[에바] (혼자서) 나자신이 나를 위로해야지. 항상 마음이 아플 때마다 남에게 의지할 수는 없어. 하기야 우리가 울어야 할 때는 늘 아무도 모르게 혼자 조용히 울잖아.
[샬로트] (기차 속에서) 내 말좀 들어봐요 폴 졸지 말고. 평론가들은 나를 마음이 훈훈한 피아니스트라고 하죠.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나처럼 따뜻하게 연주하는 사람이 없다고들 하잖아요. 아니 브람스였든가? 나 자신에게는 잔인하지 않은데, 아니 잔인한가? 이런 부질없는 생각들이 내 머리 속을 느닷없이 질주하는군요. 폴, 내가 어딘가 정상이 아니라는 얘기조차 하기 귀찮아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거예요?
[에바] 불쌍한 엄마, 그렇게 도망치듯 달아나야 했어. 갑자기 늙고 지치고 겁에 질려 쭈그러들었지. 엄마의 얼굴은 시들고 코는 너무 울어서 빨겠어. 다시는 엄마를 볼 수 없을거야. 내가 그렇게 무섭게 만들어서 도망가버렸으니.
[샬로트] (기차 속에서) 폴, 저기 작은 마을을 봐요. 벌써 불들을 켜고 저녁 준비를 하나봐요. 식탁 차릴 준비를 하고 아이들은 숙제를 하고,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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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되어 살고 있어요. 가정이 그리워요. 항상 그리웠어요. 그래도 막상 집엘 가면 또 다른 뭔가를 그리워 하는 나를 발견하죠.
[에바] (혼자서) 곧 어두워지고 쌀쌀해 질거야. 집으로 돌아가자. 헬레나와 빅터의 저녁을 준비해야지. 난 지금 죽을 수는 없어. 자살이란 무서운 일야. 신은 무슨 일을 위해서 언젠가는 꼭 나를 필요로 하실 거야. 나를 해방시켜 주시겠지. 그 때를 위해서 준비해야지.
[샬로트] (기차 속에서) 폴, 작은 딸 아이 눈이 그렇게 맑고 밝고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어요. 헬레나의 눈은 자기 아빠를 닮았더군요. 머리를 치켜 들어 주니까 내게 눈의 촛점까지 맞췄어요. 그런 고통속에서도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놀라워요. 내 생애는 그런대로 나쁜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헬레나의 생애는? 인생이 쉽게 풀려 준 셈이죠. 저한테는 폴, 좀 우울해 지기는 해도 내 잘못을 자백하는 일이 부끄럽지는 않아요.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후련해요. 난 자아의식이니 하는 것이 귀찮아요. 그러니 하는 수 없이 나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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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자신을 만지며) 내 뺨을 쓰다듬니? 내 귀에다 속삭이니? 너 나와 함께 있지 지금? 우리는 서로를 절대 떠나지 말자 너와 난.
[샬로트] (웃으며) 당신은 참 착해요. 폴, 당신이 없으면 어떻게 살지 당신도 나없이 어떻게 살겠어요. 아오리니스트들도 당신 속만 썩이면서 불평들만 하니. 연습할 때 그 끽끽거리는 소리들을 생각만 하면.
[에바] 헬레나 방에 불이 들어 왔군. 빅터가 헬레나와 얘기하고 있는 게로군. 다행이야. 착한 사람이지 빅터는. 헬레나에게 엄마가 떠나신 얘기를 해 주고 있을거야.
[장] 장면 19. 헬레나의 방
[빅터] 헬레나, 얘기할 것이 있어. 엄마가 아침에 떠나셨단다. 널 깨우기가 안돼서 그냥 가셨다. 약먹고 잠이 깊이 들었더구나. 지난 밤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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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밤이 되었단다. 그래서 널 깨우기가 싫었어.
헬레나가 무슨 말을 한다.
[빅터] 엄마가 너를 사랑한다고 얘기해 달라고 하셨다. 엄마의 마음이 괴롭고 슬프셨나봐, 많이 우신 것 같더라.
헬레나가 무슨 말을 한다.
[빅터] 에바는 초저녁에 산책갔다. 이젠 정리도 되고 기분이 좀 나아졌나봐. 명랑해 보이던데. 내 생각엔 엄마가 떠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가봐.
헬레나는 무슨 말을 한다.
[빅터] 나도 모르겠어 헬레나, 언니는 엄마를 보게 되었다며 그렇게 좋아했는데. 너무 많은 기대를 했었나봐. 너무 큰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고 경고하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언니에게 그 말을 차마 할 수가 없더구나. 그랬더니 이렇게 잘못 끝나고 말았다.
굉장한 고생과 함께 헬레나가 무슨 말을 한다.
[빅터]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겠구나.
헬레나가 떨며 다시 묻는다.
[빅터] 뭐가 필요하니? 뭐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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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는 소리지르기 시작한다.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몸을 떤다. 비명을 지르다 간혹 무슨 단어를 소리 치나 알아들을 수 없다. 입술은 물어서 피가 나고 그녀의 눈은 애원한다.
[빅터] 에바, 빨리 와요. 얘가 또 시작하는 모양이야. 빨리.
헬레나의 비명은 더 커지며 사람의 목소리 같지 않은 절규로 변한다. 의자 위로 몸을 내던진다. 의자가 쓰러지며 몸은 오므라들고 팔과 다리가 비틀린다. 입은 거품과 피로 가득찬다. 에바가 들어오고 빅터와 함께 헬레나를 진정시키려 하나 헛일이 된다. 그들은 헬레나의 입에 약을 집어 넣는다.
[장] 에필로그 첫 장면과 같다.
[빅터] 아내 모르게 난 가끔 여기 서서 아내를 쳐다보곤 해요. 저 사람의 마음은 지금 몹시 아픈 것 같군요. 지난 며칠 밤은 저 사람에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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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운 밤들이었어요. 전혀 잠을 못 자더군요. 저 사람은 엄마를 그런 식으로 떠나 보낸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거죠. 무슨 말이라도 해 주고 싶어요. 하지만 말이란 다 먼지같은 쓸모없는 텅빈 귀절들이죠. 도와 주지도 못한채 고통스러워 하는 저 사람을 이렇게 바라 보고만 있어요.
[에바] 어디 나가세요?
[빅터] 우체국에 책이 도착했나 보려구.
[에바] 잘 됐군요. 가시는 길에 이 편지 좀 부쳐 주시겠어요?
[빅터] 물론이지. 음, 엄마한테 썼구려.
[에바] 읽고 싶으시면 읽어도 좋아요. 난 헬레나 방에 가 있겠어요.
[빅터] (읽는다) 지금에서야 깨달았어요. 어머니께 저지른 잘못을. 저에겐 어머니에 대한 사랑보다 요구가 더 많았었군요. 이미 과거가 되버린 캐캐 묵은 미움으로 어머니를 괴롭혔어요. 모든 것이 저의 잘못이예요. 어머니 용서해 주세요. 헬레나가 저보다 훨씬 위대해요. 저는 바라고만 있을 때 헬레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었어요. 제가 거리를 두고 어머니를 대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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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는 어머니를 가까이 느끼고 살았어요. 어머니가 떠나신 후 어느 순간 모든 것은 지나간 일이고 이제는 어머니를 제가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다시는 엄마를 내 곁에서 떠나보내지 않겠다고. 어머니, 다시는 혼자 계시지 않게 하겠어요. 이 편지가 어머니께 도착할는지, 어쩌면 어머니는 뜯어 보시지 않을지도 모르겠어요. 글쎄요. 어쩌면 모든 것이 이미 너무 늦어버렸는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저의 이 깨달음이 헛되지 않기를 무한히 기원합니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예요. 서로를 보살펴 주고 서로를 도와 주고, 서로에게 애정을 쏟을 수 있는 크나큰 기회를 예기하고 있어요. 어머니, 다시는 제 곁을 떠나도록 가만히 있거나 엄마의 모습이 내 생애에서 사라지도록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아 주세요. 끝까지 우기겠어요. 포기하지 않겠어요. 이미 늦었다고 하드라도, 저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지 않아요. 결코 다 늦었다고는 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