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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대 태조실록(왕건)
5. 삼국구도의 종말과 고려의 민족통일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이듬해 1월 도성을 송악(개성)으로 옮긴다. 철원은
궁예의 터전이기에 대다수의 철원 주민들은 왕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잇었고
이러한 반감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기에 왕건은 자신의 지지기반이 있는
송악으로 도성을 옮겨 왕권을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왕건의 입지는 그다지 튼튼하지 못했다. 태봉은 궁예를 구심점으로
이뤄진 호족연합국가였는데, 궁예가 사라지면서 자연히 호족들간의 결집력은
약해졌다. 왕건은 이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항상 호족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처지였고 외부적으로는 더욱 강성해진 후백제를 상대해야만 했다. 하지만
왕건은 특유의 유화적인 성품을 앞세워 이러한 내외적인 문제를 능숙하게 해결
해 나간다.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각 지역의 유력한 인물들과 결혼을 통한
인척관계를 맺는 한편. 후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다.
왕건의 유화정책에 견훤도 호의를 보였다. 호전적인 궁예보다는 왕건이
상대하기 편하다고 판단한 견훤은 고려 건국을 축하하는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고 몇 번에 걸쳐 신하들간의 교류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견훤은 내심 오랫동안
지속된 전쟁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중국, 일본 등과의 외교
관계를 통해 국가적 면모를 일신하여 자신을 한반도 지역의 맹주로 인식시키려는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한편 신라도 왕건에게 호의를 보였다.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신라는 신라
장수 출신인 까닭으로 역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견훤보다는 호족 출신인 왕건
을 더 믿을 만한 인물로 판단하고 있었고,그 때문에 은근히 고려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내비쳤다.
고려 건국 이후 2년 동안은 이러한 평화가 지속되었다.하지만 920년 견훤이
신라 지역인 합천을 침범함에 따라 평화는 깨지고 말았다. 합천의 대야성이
무너지자 신라는 진주, 거창, 산청 등의 경상 서부와 북부지역에 대해 위협을
느꼈고 후백제의 통일정책은 더욱 가속화되는 양상을 띠었다. 이 때문에 경상
북부지역의 호족들이 불안을 느낀 나머지 고려에 투항하였다.
후백제의 신라 침공에 대해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고 있던 고려는 925년 조물성
(경상 북부)싸움을 시작으로 후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전장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 전쟁은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이에 고려와 후백제는 휴전을 선언하고 화의를 맺었다. 화의조건으로 서로 인질을
교환했는데 견훤은 처의 친족인 진호를 고려에 보냈으며, 왕건은 6촌 동생인
왕신을 후백제에 보냈다.
그러나 두 나라간의 화의조약은 이듬해 고려로 갔던 진호가 병으로 죽으면서
깨지고 만다. 견훤은 진호의 죽음을 독살로 규정하고 인질로 잡고 있던 왕신을
죽인 후, 공주성을 기습하였다. 이로써 고려와 후백제 간의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싸움이 시작되자 신라는 고려를 응원했다. 경애왕은 '견훤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키면 하늘이 그냥 두지 않을 짓이라고 하면서
왕건을 지원할 뜻을 비쳤다.
고려와 후백제가 막 전쟁 상태에 돌입했을 때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침입하여
발해를 멸망(698-926) 시켰고 발해 유민들이 고려로 몰려들었다. 발해 유민이
고려로 몰려든 덕분에 왕건은 병사의 수를 늘릴 수 있었고 견훤과의 싸움에도
그들을 동원하게 된다.
한편 전쟁 과정에서 견훤이 경주를 침범함에 따라 신라 백성들의 감정은
고려에 더욱 우호적으로 변해갔다. 927년 9월 견훤은 경상 북부를 공략하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꿔 영천을 거쳐 경주를 기습하였다. 경주를 장악한 그는 경애왕을
비롯하여 많은 왕족들을 죽이고 김부를 신라왕으로 앉힌다.
신라는 견훤이 경주로 향해 온다는 전갈을 받은 즉시 고려에 원병을 요청했지만,
고려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경주는 함락되고 말았다. 경주를 유린한 견훤은 고려
원병을 의식한 나머지 급하게 말머리를 돌려 퇴각하던 중 공산성(대구 팔공산)에서
고려군과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공산전투(대구 팔공산)
견훤은 공산싸움에서 고려군을 대파한다. 고려군은 이 싸움에서 수천 명의
군사를 잃고 개국공신 신숭겸, 김락 등의 뛰어난 장수들도 전사했다. 왕건은
이 싸움에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개경으로 후퇴하였다.
공산싸움 이후 고려의 힘은 열세에 놓이게 되고, 경상도 서부 일대가 견훤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견훤은 오히려 경상도 주민들의 원성을
사게 되어 더 많은 적을 양산하는 결과를 빚는다. 견훤 병사들의 노략질에 분노를
느낀 경상 북부 일대의 호족들이 대거 고려로 발길을 돌렸던 것이다,
한동안 열세에 놓여 있던 고려는 930년 경상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 병산
싸움을 계기로 전세를 바꿔놓는 데 성공한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계속하던
고려군은 한때 완전히 수세에 몰리지만 유금필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후백제군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둔다.
병산싸움 이후 급격히 힘이 약화된 후백제는 이러한 힘을 열세를 회복하기
위해 서해안 일대를 공략하지만 그다지 큰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그러는 가운데
양국간의 전쟁은 한동안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때를 이용하여 왕건은
고려에 투항해온 재암성(경북 진보)장군 선필의 주선으로 경주를 방문하는
성과를 올린다.
왕건이 경주를 방문하자 경순왕 김부를 비롯한 신라세력들의 고려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져 강릉과 울산의 110여 성이 고려에 투항하는 등 호족들의
투항도 줄을 이었다.
고려가 이처럼 유화책을 통하여 국력을 신장시키고 있을 무렵 후백제에서는
견훤 아들들간의 내분이 가속화된다. 견훤에게는 장남 신검을 비롯하여 양검,
용검, 금강 등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넷째아들 금강에 대한 견훤의 신뢰가
두터웠다. 이를 시기한 나머지 세 아들은935년 3월 급기야 반갈을 일으켜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전북 김제)에 유폐시켜 신검을 왕위에 올린다.
금산사에 갇혀있던 견훤은 그 해 6월 간신히 탈출하여 나주의 고려 진영에
몸을 맡긴다. 왕건은 고려에 투항해온 견훤을 유금필로 하여금 데려오게 하여
환대하고 개성에 머물도록 하였다.
고려에 투항한 견훤에게 후한 대접을 하는 것을 목격한 경순왕도 그 해 11월에
고려에 항복하게 됨으로써 신라의 천년 왕국도 종막을 고하게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왕건은 통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936년 9월 8만7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검을 응징하기 위해 출병한다.
이때 출병한 왕건의 군사는 고려군 4만3천 명과 지방 호족 및 발해 유민으로
구성된 연합군 4만4천 명으로 명실공히 민족 연합군이었다.
고려연합군과 신검의 부대가 처음 싸운 곳은 일선(선산)이었다. 이곳에서 신검은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완산주로 퇴각했다. 그리고 연합군이 추격을 계속하여
여 황산군(충남 논산)의 탄령을 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검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왕건은 완산주에서 정식으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마침내 민족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신라의 통일이 당나라의 외세를 빌어 이룬 것이라면 고려의 통일은 민족 대화합적
차원의 자주적 민족통일이었다. 이 민족통일의 주도세력은 왕건을 중심으로 한
고려 건국세력이었다. 하지만 통일전쟁이 지속되면서 926년에 거란에게 멸망당한
발해 유민이 합세했고 또한 신라 왕실과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여 연합군에
가담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까지 끌어안음으로써 명실공히 민족대화합을 이룬
가운데 통일을 성사시켰다. 고려는 이처럼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일궈낸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고려의 통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 단일문화를 형성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한반도의 문화 중심지도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개성이 문화의 중심지가 됐다는 것은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라
문화를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의미이자, 동시에 고구려 문화를 회복할 기회를
맞이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가 고구려의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꾸준히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것도 고려 건국
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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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태조 왕건과 민족 대화합의 결정체 '고려'
(877년-943년, 재위기간 918년 6월-943년 5월)
견훤을 몰아내고 후백제의 두 번째 왕이 된 신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왕건은
외세에 전척 의존하지 않고 자주적인 통일을 이룩해냈다. 이는 대외적으로 고려의
위상을 한층 더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대내적으로는 대화합을 바탕으로 한
단일민족국가의 기틀을 확립한 것이었다.
그러나 통일국가를 이룬 왕건에게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과제가 남아있었다.
첫째는 지방 호족세력을 중앙으로 결집시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고구려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비록 통일을 일궈내기는 했지만 통일국가 고려의 초기 형태는 호족연합체적
성격이 짙었다. 따라서 통일 이후에도 지방 호족들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것은 언제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다.
게다가 왕건과 함께 고려 건국에 참여한 장수들 역시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왕건은 통일 이전부터 이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혼인정책이라는 화합책을 괼치고 있었다.
< 태조 왕권의 부인들 > 왕후 6명, 부인 23명
첫번째 부인 신혜왕후 유씨 정주 유천궁의 딸
두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 나주 다련군의 딸
세번째 부인 신명왕후 유씨 충주 유긍달의 딸
네번째 부인 신정왕후 황보씨 황주 황보제공의 딸
다섯째 부인 신성왕후 김씨 경주 김억렴의 딸
여섯째 부인 정덕왕후 유씨 정주 유덕영의 딸
일곱째 부인 현목대부인 평씨 경주 평준의 딸
여덟째 부인 정목부인 왕씨 명주 왕경의 딸 (명주 = 강원도 강릉)
아홉채 부인 동양원부인 유씨 평주 유금필의 딸 (평주 = 황해도 평산)
열번째 부인 숙목부인 진주 명필의 딸 (진주 = 충청북도 진천군)
열한번째 부인 천안부원부인 임씨 경주 임언의 딸
열두번째 부인 흥복원부인 홍씨 홍주 홍규의 딸(홍주 = 충청남도 홍성군)
열세번째 부인 후대량원부인 이씨 합주 이원의 딸(대량 = 합주 = 경남 합천)
열네번째 부인 대명주원부인 왕씨 명주 왕예의 딸(명주 = 강원도 강릉)
열다섯번째 부인 광주원부인 왕씨 광주 왕규의 딸
열여섯번째 부인 소광주원부인 왕씨 광주 왕규의 딸
열일곱번째 부인 동산원부인 박씨 승주 박영규의 딸
열여덟번째 부인 예화부인 왕씨 춘주 왕유의 딸(춘주 = 개경에서 강원도로 가는
교통요충지)
열아홉번째 부인 대서원부인 김씨 동주 김행파의 딸(동주 = 황해도 서원)
스무번째 부인 소서원부인 김씨 동주 김행파의 딸
스물한번째 부인 서전원부인 미상
스물두번째 부인 신주원부인 강씨 신주 강기주의 딸(신주 = 황해도 신천)
스물서번째 부인 월화원부인 영장의 딸
스물네번재 부인 소황주원부인 순행의 딸
스물다섯번째 부인 성무부인 박씨 평주 박지윤의 딸(평주=황해도 평산)
스물여섯번째 부인 의성부부인 홍씨 의성부 홍유의 딸
스물일곱번째 부인 월경원부인 평주 박수분의 딸
스물여덟번째 부인 몽량원부인 박씨 평주 박수경의 딸
스물아홉번째 부인 해량원 부인 선필의 딸(해평= 경북 구미)
왕건의 첫째부인 신혜왕후 유씨(인물=드라마)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왕권 강화를 위해 중앙 및 지방각지의 유력한 세력들과
혼인을 맺았고 공이 큰 부하장수의 딸도 아내로 맞이해 왕실을 안정시켰다.
태조 왕건은 부인 29명과의 사이에서 26명의 아들을 얻었다.
왕권안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이러한 혼인정책은 적어도 중앙집권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왕건에게는 좋은 안전장치가 될 수 있었다. 확고한 지배체제를
확신하지 못한 왕건은 중앙집권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호족의 힘을
국가조직으로 집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판단했고 혼인정책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혼인정책은 그가 죽고 난 뒤 고려를 왕권다룹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각기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들을 전면에 내세운
호족들의 왕권 경쟁으로 고려 왕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 같은 미래상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혼인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혼인정책은 강력한 통치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그가 그나마 고려를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호족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혼인정책 이외에도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의제(擬制) 가족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왕건이 이처럼 호족들을 혈연과 성씨로 묶어놓으려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뿐이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통일국가 고려의 정치적 안정이었고 장기적
으로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통일 중심적인 정치이념과 유화적인 성격에 바탕한 왕건의 일관된 화합정책은
고려를 하나의 단일민족국가로 유지시키는 구심체였다. 따라서 왕건의 혼인
정책은 단순한 호족달래기 차원의 정치적 수단을 넘어서서 민족대화합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족대화합책과 아울러 왕건이 추진한 또 하나의 숙원시업은 고구려 고토회
복운동이었다.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만방에 천명한 만큼, 왕건에겐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해야 할 대과제가 남아있었다. 이를 위해 938년 3천여 호를 데리고 귀순한
발해인 박승을 받아들이는 등 발해의 유민들을 적극 유치하고 평양에 서경을
설치하여 북진정책의 전진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왕건의 북진정책을 쉽게 용납하지 않았다. 요동 지역에는
강성해진 거란이 버티고 있었고, 거란과 고려 사이에는 여진족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왕건은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기 위해 말년까지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추진했으나 만주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고려의 강력한 북진정책은
서쪽에서는 청천강. 동쪽에서는 영흥 이북까지 여진족을 몰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일부 지역만을 회복한 것이지만 호족연합체
성격이 짙은 당시 고려체제를 감안할 때 이는 획기적인 결과였다.
청천강에서 영흥을 경계로 그 이북 지역은 비록 넓은 영토였지만, 농토가 비좁고
지형이 거칠며 기후도 좋지 않아 사람이 살기에 적당하지 못한 곳이었다.
때문에 아직 중앙집권체제를 확럽하지 못한 고려로서는 여진과의 숱한 전쟁을
치르며 그곳까지 영토를 확대하는 것보다는 청천강과 영흥 이남을 안전지대로
가꾸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또한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과는 적대관계를 유지시켰는데, 942년 10월에
거란이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며 고려와 화친을 제의했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다. 거란의 사신이 화친협약을 위해 고려에 당도하자 왕건은 꺼갈은 일찍이
발해와 동맹을 맺고 있다가 갑자기 의심을 품어 맹약을 배반하고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심히 무도한 나라로서 친선관계를 맺을 대상이 못 된다,고
못박았다. 그리고 거란과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고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는 개성 만부교라는 다리 아래서 굶겨 죽였다.
민족화합정책과 북진정책에 매진하며 고려를 안정된 통일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왕건은 민간의 정신적 통일을 위해 불교를 국교로 삼고 숭불정책을
적극 실시하였다. 숭불정책의 일환으로 신라 출신 승려 충담을 왕사로 세우고
940년에 그가 죽자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워 친히 비문을 지었으며,
그 해 12월에 개태사를 완성시켰다.
그리고 이 해에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을 설치하여 공신들의 모습을 그려 벽에
붙여놓고 무차대회(無遮大會,승려 .속인 .남녀노소 .귀천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널리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집행하는 법회)를 개최, 해마다 이 전통을 잇게 하였다.
왕건은 또한 관제의 정비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왕건 집권기의 고려 관제는
태봉의 관제를 축으로 하여 신라의 관제를 병용하고 지방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여 스스로 치안을 담당하게 하는 과도기적 형태였다.
태봉의 관제는 최고관부로서 광평성(廣쭈省)을 두고 그 밑에 광치나(匡治奈,고려
때의 시중)·서사(徐事)·외서(外書)의 벼슬을 두었으며, 그 밑에 병부(兵部)·대룡부
(大龍部)·수춘부(壽春部)·봉빈부(奉賓部)·의형대(義刑臺)·납화부(納貨府)·조위부(調位部)
·내봉성(內奉省)·금서성(禁書省)·남상단·수단(水壇)·원봉성(元鳳省)·비룡성(飛龍省)·
물장성(物藏省) 등 7부5성2단을 설치하여 국사를 각각 분담하게 했다. 그 밖에 삼림,
기물 등을 관리하는 부서를 두었으며, 군제는 장군, 정기대감, 성주장군, 대아찬장군,
파진찬장군, 백선장군 등의 고위 관직 중심으로 짜여 있었다.
왕건은 태봉의 이러한 관제와 군제를 기본으로 중앙을 정비하고 지방에는
호족자치제를 실시하여 호족들에게 호장, 부호장 등의 향직을 주고 그 지방의
치안을 책임지도록 했다. 또한 호족들의 자제들을 인질로 삼아 중앙에 머물게
하는 기인(其人)제도를 실시하여 지방의 반란에 대비하였다.
[참고] 고려 건국 초기의 관제 및 군사제도
고려의 관제는 우선 태봉의 관제를 답습하여 광평성(廣評省)을 비롯한 여러 정치기구를
설치하고 여기에 개국공신계열과 지방 호족세력을 중앙관리로 등용하여 왕조권력안에
편입시키는 한편 논공행방(論功行賞)을 기준으로 한 역분전(役分田)을 분급하여 이들을
토지를 매개로 고려의 위계체제(位階體制)안에 편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방호족의
자제들을 뽑아 서울에 머물게 하는 기인제도(其人制度)를 실시하였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을 사심관(事審官)에 임명한 것을 비롯하여 공신이나 고관들을 자기 고향의
사심관으로 삼아 그 지방의 치안통제를 책임지게 하는 사심관제도를 마련한 것도 모두
중앙집권화정책의 일환이었다.
904년 정한 중앙관제는 최고관부로서 광평성(廣評省)을 설치, 그 밑에 광치나(匡治奈)·
서사(徐事)·외서(外書)의 벼슬을 두었으며, 그 밑에 병부(兵部)·대룡부(大龍部)·수춘부(壽春部)
·봉빈부(奉賓部)·의형대(義刑臺)·납화부(納貨府)·조위부(調位部)·내봉성(內奉省)·금서성
(禁書省)·남상단·수단(水壇)·원봉성(元鳳省)·비룡성(飛龍省)·물장성(物藏省)을 설치하였다.
그 밖에 역어(譯語)를 맡은 사대(史臺), 과수를 심고 기르는 일을 관장하는 식화부(植貨府),
성황(城隍)의 수리를 맡는 장선부(障繕府), 기물을 만드는 주도성(珠淘省)을 설치하였으며
정광(正匡)·원보(元輔)·대상(大相)·원윤(元尹)·좌윤(佐尹)·정조(正朝)·보윤(甫尹)·군윤(軍尹)·
중윤(中尹) 등 9관등을 두었다. 또한 지방관원으로 태수(太守)직이, 군제(軍制)로는 장군
(將軍)·정기대감(精騎大監)·성주장군(城主將軍)·대아찬장군(大阿飡將軍)·파진찬장군
(波珍飡將軍)·백선장군(百船將軍) 등의 고위관직이 있었다. 이러한 체계는 고려에 계승,
신라의 관제와 함께 고려 태조가 초기 제도를 마련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참고] 고려 중앙/지방 관제 및 군사제도
이처럼 고려의 안정을 위해 전력을 다하던 왕건은 943년 계묘년 4월 병석에 눕게
된다.죽음을 예감한 왕건은 측근 세력인 박술희를 불러'훈요십조( 訓要十條])'를
전한다.
'훈요십조'는 왕이 지켜야 할 도리를 적은 것으로 왕건이 후대 왕들에게 내린 일종의
왕실헌장이다. 여기에는 왕건의 정치이념과 사상이 고스란히 들어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 것.
둘째,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셋째, 서열에 관계 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넷째,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다섯째, 서경(평양)에 1백 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여섯째,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일곱째. 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諫言)에 귀를 기울여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여덟째, 차령산맥 이남이나 공주 금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아흡째,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병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열째,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왕건의 이 같은 '훈요십조'는 고려왕조의 통치이념과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좋은 자료이다. 블교를 융성하게 하되 사찰의 난럽과 승려의 권력을 억제하고
자주적인 풍습과 문화를 지키며, 덕을 갖춘 자로 하여금 왕을 잇게 하여 백성의
존경을 받도록 하고 참소보다는 간언에 귀를 기울여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보살펴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며, 후백제 멸망으로 인해 고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백제 지역 인사에게 관직을 주지 않음으로써 반란 도모 가능성을 없애케
관직에 있는 자를 공평하게 다스리며, 역사와 경전을 소홀히 말고 반성하는 자세로
국사에 임하라는 것이다.
죽음을 앞둔 시간에도 이처럼 고려의 안녕을 걱정하며 '훈요십조'를 내린 왕건은
943년 5월에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임종을 앞두고 신하들이 슬피우는 소리를
듣고 왕건은 빙긋이 웃으면서 인생이란 원래 이렇게 덧없는 것이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능은 현릉으로 그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함께
묻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