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수경신
중국의 관광기념품점에 가면 흔히 세 마리 원숭이를 새긴 나무 조각을 볼 수 있다. 각각 입과 눈과 귀를 가렸다. 일본의 신사에 가도 세 마리 원숭이 조각상을 자주 본다. 인사동에서도 심심찮게 보았다.
설명을 청하면 대뜸 시집살이 벙어리 삼년, 귀머거리 삼년, 장님 삼년이란 뜻이라고 설명한다. 좀 더 고상한 축은 '논어'의 "예가 아니면 보지를 말고, 듣지도 말며, 말하지도 말라"는 구절을 일러준다. 그런데 왜 하필 원숭이인가?
사실 이 조각상은 예전 민간 도교의 수경신(守庚申) 신앙에서 나왔다. 우리 몸에는 삼시충(三尸蟲)이란 벌레가 있다. 요놈은 몸속에 숨어 주인이 하는 과실을 장부에 기록해 둔다. 그러다가 60일에 한 번씩 경신일 밤이 되면 주인이 잠든 틈에 몸에서 빠져나가 옥황상제께 그간의 죄상을 낱낱이 고해 바친다. 그러면 지은 죄만큼 감수(減壽) 즉 수명이 줄어든다.
다만 삼시충은 치명적 약점이 있다. 주인이 잠을 안 자면 절대로 몸에서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래서 경신일 밤마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술 마시고 놀면서 밤을 새웠다. 삼시충의 고자질을 원천봉쇄하겠다는 뜻이다. 경신(庚申)의 신(申)이 잔나비, 즉 원숭이여서 삼시(三尸)를 삼원(三猿)으로 대체했다. 눈 코 입을 막아 설령 하늘에 올라가더라도 고자질을 못하게 한 것이다.
고려 중기 이후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의 경신일 기사를 보면 거의 예외 없이 "왕이 밤에 신하들과 잔치하였다"거나 죄수 사면 기사가 뜬다. 연산군은 아예 삼시충에 대한 시를 짓고, 신하들에게 자기 시의 운자(韻字)에 따라 시를 지어 제출하도록 숙제를 내기까지 했다. 수경신 행사를 노래한 한시도 적지 않다. 죄를 안 짓고는 못 살겠고, 일찍 죽기는 싫어서 아예 삼시충을 영구 박멸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로 고안되었다.
섣달 그믐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속신도 다 이런 민간 도교신앙에서 나왔다. 눈썹이 센다는 것은 늙는다는 의미다. 결국은 수명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하기야 섣달 그믐밤에 부뚜막의 조왕신(�B王神)이 주인이 잠든 사이에 하늘로 올라가면 1년치 죄상을 다 보고하게 될 테니, 그야말로 십년쯤 감수(減壽)할 일이 아닌가. 그러게 평소에 좀 착하게 살지.
[18]호반
화가 최북(崔北)은 오기로 똘똘 뭉친 사내였다. 천한 화공의 신분이었지만 기개가 드높았다. 최북의 몇 가지 호 중에 '거기재(居其齋)'란 이상한 이름이 있다. 내 추정은 이렇다. 양반집 사랑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업수이 여겨 이름을 안 부르고 '이봐 거기!' 하고 불렀다. 그림을 다 그린 최북은 호를 '거기재'로 떡 썼다. 너희가 나를 '거기'라고 부르니, 부르는 대로 낙관해 준다는 뱃심이었다.
그는 칠칠(七七)이란 호도 즐겨 썼다. 본명인 '식(埴)'자를 초서로 쓰면 칠(七)자를 두 번 쓴 것 같아서 장난친 것인데, 혹은 최북의 북(北)자를 파자(破字)한 것이라고도 한다. 당나라 때 술법에 능했던 도사 중에도 은칠칠(殷七七)이란 이가 있다. 하지만, '그래 나는 칠칠맞은 놈이다. 어쩔래?' 하는 반항이 한 자락 깔려 있다.
신분이 노비였던 천재 시인 이단전(李亶佃·?~1790)은 호가 필한(疋漢)이었다. '필(疋)'자를 파자하면 '하인(下人)'이다. 필한은 '하인놈'이 된다. 삐딱하다. 인헌(因軒)이란 호도 썼다. 큰 사람이 감옥 속에 갇힌 형국이다. 그는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며 늘 패랭이를 쓰고 다녀 이패랭이란 별명으로도 불렸다. 정작 당대 최고 문인이었던 이용휴(李用休)는 그의 시를 격찬했다.
장혼자(張混字)까지 만들어 당시 출판계와 문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장혼(張混· 1759~1828)도 신분이 중인이었다. 그는 이이엄이란 희한한 호를 썼다. '이이(而已)'는 '뿐, 따름'이란 뜻이다. '엄'은 집인데, 보다시피 텅 빈 집이다. 이이엄은 결국 아무것도 없는 허깨비 집이란 말이다. 그의 다른 호인 공공자(空空子)도 같은 뜻을 담았다.
기술직 중인으로 천대받았던 정민수(鄭民秀·1767~1828)의 자는 기범(豈凡)이다. '어찌 평범하랴?'란 뜻이다. 죽어도 남과 같이 살지 않겠다는 결기마저 느껴진다. 문장이 뛰어났음에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서당 선생으로 생을 마쳤다.
이렇듯 문인 화가의 호(號)에는 한 시대의 풍경이 떠오른다. 능력 있는 인재를 출신이나 학벌의 틀에 가둬 숨도 못 쉬게 옥죄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가지다. 얼마나 많은 거기재와 칠칠이와 필한과 이이엄들이 이런 폭력의 그늘에서 울분을 곱씹고 있을까?
[19]재석도
중국에 사신 갔던 신위(申緯)가 돌아왔다. 휘장을 친 수레 하나가 따라왔다. 가족과 친지들은 입이 그만 귀에 걸렸다. 휘장을 걷자 온통 돌뿐이었다. 그 무거운 괴석을 싣고 만주벌을 건너왔던 것이다. 자신은 그것을 자랑으로 여겨 화공을 불러 재석도(載石圖), 즉 돌 싣고 오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
추사가 '수선화부(水仙花賦)'를 글씨로 쓰는 등 수선화 예찬론을 펼치면서, 중국에서 수선화 구근을 수입해 오는 것도 한때 크게 유행했다. 수반에 구근을 얹어 겨울철 방 안에서 수선화 향기 맡는 것을 사대부의 고아한 풍류로 여겼다. 나중에는 정도가 너무 심해져서 국가에서 수입을 금지시켰다.
다산은 사신으로 연경에 가는 이기양(李基讓)을 전송하는 글에서, 중국에 간 우리나라 사신들이 그 비싼 은을 가져가서 금방 닳아 없어지고 말 비단이나 각종 소비재만 잔뜩 사올 뿐, 백성들의 실용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하나라도 구해가지고 오는 사람을 못 보았다고 한탄했다. 그러면서 고려 때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얻어 돌아온 일을 말했다. 실 잣는 기계 틀을 '물레'라고 하는데, 문익점이 가져왔다는 뜻의 '문래(文來)'에서 나왔다고도 했다.
이기양은 다산의 이 말을 듣고 북경에서 목화를 앗는 기계인 박면교거(剝綿攪車)를 구해왔다. 나사 홈을 판 축 끝에 십자 기어를 맞물려 그 아래에 가로로 나무를 걸어 만든 기계장치다. 의자에 앉아 발판을 밟으면 하루에 200근의 목화를 앗을 수 있었다. 200근은 젊은 여자가 20일 꼬박 매달려야 겨우 마칠 수 있는 엄청난 양이었다. 정조가 기뻐하여 그대로 본떠 만들어서 팔도에 나눠주게 했다.
다산은 이기양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이 기계를 이용해 장사하는 사람이 4000근의 목화를 앗아 1000근으로 만든다면 운송 비용도 4분의 3이 절감될 테니 이익이 얼마나 크냐면서, 그 공이 문익점이 목화씨 가져온 것 이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같이 중국에 갔는데, 한 사람은 돌이나 수선화 뿌리를 사오고, 한 사람은 목화씨 앗는 기계를 구해왔다. 그 해맑은 운치가 귀하고, 값비싼 비단만 잔뜩 사온 것보다야 낫다 해도, 목화씨 앗는 기계가 가져온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보람에 견줄 수야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