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수명 도시 계림(桂林)에 가다(2)
山井 김익하
향리(鄕里)의 소인배에게 굽히기 싫어 박봉 오두미(五斗米)마저 거절하고 귀거래사를 읊으며 귀향한, 위대한
시인 도연명(陶淵明). 그 도연명은 중국의 장시성 선양 차이쌍에서 태어났다. 차이쌍은 양쯔강 중류에 있으며,
남쪽에는 포양 호수가 있고, 북쪽에는 루산 산이 바라보이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전원마을이다. 그런 마을에서
자란 도연명이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이렇게 썼다.
桃花源記
陶潛
晉太元中, 武陵人捕魚爲業. / 縁溪行, 忘路之遠近. / 忽逢桃花林,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 芳草鮮美, 落英繽紛./
漁人甚異之, 復前行, 欲窮其林. / 林盡水源, 便得一山. / 山有小口, 髣髴若有光. / 便舍船, 從口入, 初極狹, 纔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朗. /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美池桑竹之屬. / 阡陌交通, 鷄犬相聞. /
其中往來種作, 男女衣著, 悉如外人. / 黄髮垂髫, 並怡然自樂. /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殺鷄作食.
村中聞有此人, 咸來問訊. / 自云. 先世避秦時亂, 率妻子邑人, 來此絶境. / 不復出焉, 遂與外人閒隔.
問今是何世, 乃不知有漢, 無論魏晉. / 此人一一爲(之)具言所聞, 皆歎惋. /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云, 不足爲外人道也.
旣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太守卽遣人隨其往, 尋向所誌,遂迷不復得路
南陽劉子驥, 高尙士也. /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病終. / 後遂無問津者
도화원기를 풀어본 내용은 이러하다.
동진 태원연간(太元年間:376-395)에 무릉(武陵 :지금 후난성(湖南省) 타오위안(桃源懸)에 살던 어느 어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복사꽃이 피어 있는 수풀 속으로 잘못 들어갔는데, 숲의 끝에 이르러 강물의 수원이 되는
깊은 동글을 발견했다. 그 동굴을 빠져나오니 평화롭고 아름다운 별천지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 사람을 만나 물어 본즉, 그곳 사람들은 진대(秦代)의 전란을 피해 이곳으로 왔는데, 그 후로 수백 년 동안
외계와 단절된 채 살아왔다고 했다.
후세 사람들은 도연명의 '도화원'을 현실에서 재현하려 했다. 수려한 산수 배경으로 땅를 파 회랑을 만들고, 강변에다
글 내용에 합당하게 복숭아나무도 심고, 꽃향기가 어지러울 정도로 짙은 유자나무, 귤나무도 심었다. 그런 부산끝에
하나의 이상향(理想鄕)을 만들었다. 이름하여 '세외도원(世外桃源)이다. 계림시의 관광안내문에 으레 등장하는
단골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 바로 그 도원경인 이곳이다. 이곳은 국가에서 지정한 AAAA급 관광지구로 제일 높은 등급의
관광지다.
양삭은 계림시에서 남쪽으로 64km 떨어져 있는 역사가 오래된 곳으로, 수나라 때(590년) 이미 양삭현이 설치되었다.
양삭은 카르스트 지질이라는 특이한 조건으로 청산녹수의 경치가 특별히 많다. 양삭의 볼거리들은 대부분 석회암의
산들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또 한 마디 했다.
'계림산수갑천하(山水甲天下) 양삭산수갑계림(阳朔山水甲桂林)' 즉 '계림의 산수는 천하 제일이지만, 양삭의
산수는 계림에서도 으뜸'이란 뜻이다. 그러니 계림에 왔어도 양삭의 산수를 보지 않고 가는 것은 제대로 계림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특히 세외도원(世外桃源)은 말 그대로 속세의 열외 지대, 낙원이란
것이다.
회랑을 이룬 물은 맑다 못해 눈이 시리도록 창푸르다. 물밑을 보니 수초가 깊이 자라 물살에 머리를 휘젖고
있었다. 그러니 비 온 뒤라도 흙탕물이 일래야 일 수 없는 천연 환경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바닷밑에 잠겼다가 3억년 전 뭍으로 융기한 뽀족한 산들이 제저끔 자태를 뽐내는데, 그것이 무색하듯 양삭으로
가는 주변의 산들은 기기묘묘한 형상을 드러낸다. 드문드문하던 산들이 연이어 일어서는데, 서로 붙어있지
않으려는 듯 외로움에 몸을 꼬고 있었다.
뱃길로 흐름을 안은 강심에다 시름을 놓고보면 마음은 허한데, 그 허한 마음으로 창푸른 물빛이 이끼를 피워낸다.
더 푸르게, 더더욱 푸르게. 오히려 세태에 젖었던 몸을 모두 비워내긴 부끄러울 따름이다.
물에서 뭍으로 오르면 푸른 풀밭이고, 풀밭을 지나면 향기를 뿜어내는 상록 활엽 교목 운향과(芸香科)의 수풀이며,
더 멀리 달아나면 청산이 다가온다. 마음을 훔쳐가는 청산을 넘어서면 천공이고, 곧 구름밭이니 그곳은 필시 혼줄을
훔쳐간 도둑이 사는 마을일 게다.
물빛이 청색으로 푸르고, 강변풀들이 녹색으로 빛나는데, 더 강력한 분홍색이 복사나무에서 피어나 관광객의 시선을
자극한다. 해서 비로소 도원경(桃源景)에 몸과 마음이 함께 든 듯하다.
가히 몽환적이다.
세상을 빚어냈다는 조물주의 능력이 평심(平心)을 잃은 작품이다. 산이 좋으면 물 흐름이 나쁘든가, 물 흐름의
모양이 으뜸이라면 산세를 버리든가 했어야 했는데, 이 모양새를 보면 끄덕끄덕 졸면서 빚었음이 틀림이 없다.
조물주의 실패작?
바람결이 코끝을 스칠 때마다 눈부시게 꽃이 일은 운향과(芸香科) 관목에서 향기가 진동한다.
유자나무는 열매를 맺으면서도 꽃을 일궈 강심을 적신다. 열매를 맺고도 꽃을 피워냄은 종족번식의 탐(貪)이
너무 과하기만 하다.
유람선이 가는 곳곳에 소수민족의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여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음원으로 듣던 중국의
그 날카롭고 애절한 곡이 귓전에 익숙하게 파고든다.
이곳 소수민족의 풍속은 손님이 방문하면 노래로 대접하며, 손님은 답가로 예의를 차려야 한다. 우리가 탄 배에도
소수민족의 아가씨가 동승하여 노래를 부르고 답가를 요청했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보수는 정부에서 지원한다고 했다.
직접 천을 짜는 시범을 보이고 있는 소수민족 사람들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가장 많은 인구 약 1,400만 명(자치구를 가질 만큼))을 가진 장족(壯族)이다. 장족은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개울에 인접한 골짜기 땅을 선호하고 물소나 황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으며, 말뚝을 박은
다음 그 위에다 지면에 닿지 않도록 집을 짓는다. 그리고 혼전의 자유로운 성행위, 중매인이 없는 자유로운 연애결혼,
신부가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친정에서 부모와 함께 사는 것, 첫 아이를 낳아야 비로소 결혼이 성립되는 것. 또한
주술적인 의식, 인형을 이용한 마법, 조상숭배 등 독특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아래 위의 사진은 세외도원 곳곳에 관광객들을 위하여 소수민족의 풍속을 보여주는 곳이다. 와족(佤族)이다.
와족은 동남아시아 북부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으로 중국에선 4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피부색깔이
검고 대나무로 만든 주거지에 사는데, 본디 인간의 두개골이 풍성한 수확과 건강을 보장해준다고 믿어 전시를
하는 풍속이 있다. 여기서는 물소머리를 장식해 놓았다.
또 이 와족들의 장례식 풍속은 독특한다.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물음을 전제로, 시신이 굳기 전
태아형태로(손을 앞으로 모으고 다리를 구부린 채) 매장을 한다고 했다. 다시말해 사람은 태아로 태어나 태아형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대체로 유순한 와족은 주변의 다른 종족과 동화되어 그들과 혼인하기도 한다. 대부분 불교를
믿는다. 이들은 대통으로 술을 마시는데, 손님에게 먼저 마신 뒤 권한다. 독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손님을 대접할 때도, 술을 권할 때도, 이성에게 구애를 할 때도 노래를 부르는 소수민족이 있다. 110만 명이 중국에
살고 있는 동족(侗族)이다. 송대(宋代)에 처음으로 중국에 진출했다. 남서쪽으로 계속 이동해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남하하는 몽골족에게 밀려난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이들 동족은 산 중턱에 말뚝을 박아 그 위에 세운
큰 집에서 살고 있다. 나무로 만든 높이 30m 가량의 원통형 파고다식 탑들이 독특한 건축물로 손꼽힌다. 대나무
관으로 물을 댄 관개지에서 벼농사를 짓고 물소를 기른다. 물소는 부의 중요한 상징이며, 제물(祭物)로도 쓰인다.
일부 관개지에서는 물고기를 기르고 매를 이용한 사냥을 하기도 한다.
세계에서 노래를 가장 잘 부르는 사람들이라 불리는 이들, 미녀들이 드물다고 한다. 현지의 우수개소리로 동족
여자가 한 번 돌아보면 물소가 놀라고, 또 돌아보면 집이 무너지며, 다시 또 돌아보면 강이 거슬러 흐른다고 한다.
그러나 동족의 여자들은 노래 잘 하고, 일 잘 한다고 알려져 있다.
결혼 풍습에, 어머니는 딸의 결혼할 때까지 딸의 생일 때 마다 물고기 한 마리씩 잡아 단지에 염장(鹽醬)을 한다.
결혼식 날 그 고기를 나눠 먹는다. 혼례식의 주관은 집안 어른(외삼촌)이 하는데, 신랑신부는 외삼촌에게 제일
먼저 음식을 올린다. 외삼촌이 시식을 해야 하객들이 비로소 음식을 먹는다. 신부의 나이를 물을 때 염장된 고기가
몇 마리냐고 묻는다고 했다.
전통의상을 한 묘족(苗族)의 여인이다. 대략 38만 명으로 추산된다.
대부분의 묘족은 땅 위에 직접 지은 단층집에서 산다. 농업이 모든 집단의 주요 생활수단이며, 옥수수와
벼를 구릉지대 위의 화전(火田)에서 재배한다. 최고의 지위는 마을 추장의 지위이다. 중국에서는 중국
지방관청의 지배를 받고 있다. 대부분의 묘족은 정령·귀신·조상신 등을 숭배한다. 그들에게는 악령을 쫓아
내는 무당들이 있으며, 제례를 집전하는 성직자들도 있다. 동물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널리 행해진다.
중국에 사는 많은 묘족은 중국의 중매결혼 풍습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젊은이들은 그들의 배우자를 직접
고를 수도 있고 성적(性的)인 면에서 많이 개방되어 있다. 구애(求愛)의 제도화된 형태로는 다른 마을의 남녀로
구성된 여러 집단들 사이에 서로 응답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앞뒤로 공을 던지는 놀이를 한다. 일부다처제가
허용되나 사실상 부유층에 국한되어 있다. 가족은 결혼한 아들들과 그 가족들을 포함하여 여러 세대가 함께 살고 있다.
부모가 죽으면 그 가족은 소단위로 분가한다.
묘족의 여인들은 대체로 미모가 뛰어났다. 남자들이 여자를 고르는 조건은 우선 발이 커야하고, 목청이 커야되며,
엉덩이가 커야한다. 발이 커야 화전밭에 다니기 좋고, 목청이 커야 일 나간 남편을 부르기 좋고, 엉덩이가 커야
자식을 잘 낳는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발의 움직임으로 구애를 한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