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 무신(武臣) 백야(柏冶) 장필무(張弼武) 공의 또 다른 이야기
장필무(張弼武) 공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무신(武臣)이자, 조선왕조 역사상 드물게 청렴함으로 이름을 남긴 무장(武將)이었다.
공의 자(字)는 무부(武夫), 호(號)는 백야(柏冶), 시호는 양정(襄貞)이며 본관은 구례(求禮)이다.
중종 38년(1543) 무과에 급제한 뒤 훈련원권지·온성판관·양산군수·부산진첨절제사·제주목사·강계부사·경상도 및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북방의 여진족(胡人) 토벌에서 큰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안마(鞍馬)와 장전초피(長箭貂皮)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필무 공이 후세에 더욱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한 무공(武功) 때문만이 아니었다.
공은 성품이 매우 강직하고 청렴하여 권세가나 세력 있는 자들에게 아부하지 않았으며, 군수나 현령으로 재임한 지역마다 “청렴하고 근신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필무는 보통 이상으로 청렴하여 무인답지 않았고, 또 강직하여 뜻이 높았기 때문에 세상에 용납되지 않았다.”
또한 공은 당시 북방 육진(六鎭)의 백성들이 계속 유랑하고 도망하는 원인이 과도한 초피(貂皮) 진상 때문이라고 지적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였다고 한다.
선조(宣祖)는 장필무 공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하여 여러 차례 장유(奬諭)를 내렸으며, 특별히 우대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선조는 장필무 공을 인견(引見)한 뒤:
“청근(淸謹)한 것은 훌륭하나 성격이 과격함을 경계하라.”
는 내용의 서찰을 내렸다고 한다.
이는 장필무 공이 단순한 지방 무장이 아니라, 임금이 직접 성품과 절개를 인정할 정도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공은 무신이면서도 《역학(易學)》에 밝았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선조 7년(1574) 별세한 뒤, 명종·선조 시기의 무신 가운데 가장 청렴결백한 인물로 평가되어 사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또한 영동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무주의 죽계서원(竹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백야유사(柏冶遺事)》를 남겼다.
장필무 공은 무공뿐 아니라 청렴·절개·학문을 함께 갖춘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무신으로, 우리 구례·봉성 장씨 가문의 무맥(武脈)과 충절(忠節)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 참고 자료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국조인물고》
- 《해동명신록》
- 《백야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