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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인물 |
백경한(白慶漢) | ? - 1812(순조 12) 조선 후기의 절신(節臣) 조선의 의사(義士), 시호는 충강(忠剛), 자는 자점(子漸), 호는 부호(鳧湖), 선양(善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해주노씨(海州盧氏)로 현진(玄軫)의 딸이다. 최경림(崔敬林)에게서 배웠으며, 1811년(순조 11) 12월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 정주가 난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동지를 규합하여 정주성내의 적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사방에 보내고 신안충의군(新安忠義軍)이라는 기를 세워 의병을 불러모으면서, 한편으로는 적정(賊情)을 안주병사영(安州兵使營)에 밀보하여 내응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아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홍경래가 입성하면서 그를 맨 먼저 체포하였다. 그러나 그의 명망을 높이 산 난군은 투항시키려고 여러가지로 협박을 다하였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다가 거짓 항복하고서 다시 관군과 밀통하다가 탄로되어 1812년 1월 마침내 피살되었다. 난이 평정된 이듬해 정주성 남쪽에 단을 세워 그를 포함한 일곱 의사를 제사지내게 하고, 아울러 순절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정주의 표절사(表節祠)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부호집》 8권이 있다 |
백경해(白慶楷) | 1765(영조 41) - 1842(헌종 8) 조선의 문신. 자는 성익(聖翊), 호는 수와(守窩), 선양(善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노현진(盧玄軫)의 딸이다. 1786년(정조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학유(學諭)가 되고, 이어 전적(典籍)·좌랑(佐郎)을 거쳐 1811년(순조 11) 평안도도사가 되었다. 이때 심한 기근이 들어 백성들의 동태가 심상하지 않음을 들어 감찰사에게 구휼의 방책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정주(定州)의 집에 있다가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형 경한(慶翰)에게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게 하고 평양에 돌아갔다. 그러나 운산군수(雲山郡守)에 임명되자 밤을 이용, 임지에 이르러 군민을 효유(曉諭)하고 영변(寧邊)과 연락하여 의려(義旅)를 규합하던 중 형 경한의 순절소식을 들었다. 이에 더욱 분개, 대군을 재촉하여 정주성을 함락시켰으나 형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자 의복을 갖추어 장사지내고 이로부터 죽을 때까지 정주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뒤 태천현감(泰川縣監)이 되어 난리의 화로 피폐된 민생을 진제(賑濟)하기에 힘썼다. 그러나 무고를 입어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장령에 기용되었다. 그 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부좌윤 등을 역임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加資)되었으며, 저서로는 《수와집》 3권이 있다. |
백광호(白光瑚) | 1639(인조 17)∼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여기(汝器), 호는 가소당(可笑堂).홍원(弘源)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주소씨(晉州蘇氏)로 현문(顯門)의 딸이다.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88년(숙종 14) 오도일(吳道一)과 함께 윤선거(尹宣擧)·윤증 부자를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가납되지 않았다. 재실(齋室)을 지어서 후학지도에 전념하였으며, 입교(立敎)·명륜(明倫)·흥학(興學)의 세가지 조목을 세워 종족(宗族) 교육에 힘썼다.1710년 학행으로 익위사(翊衛司)의 세마(洗馬)에 천거되었으나 반대파의 방해에 의해 좌절되었다. 평소 《소학》을 독실히 읽어서 문장보다는 궁행하는 데 힘썼다.당쟁의 심화로 정치형태가 점차 어지러워짐을 염려하여 정치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등 초야에서도 끝내 정치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저서로 《가소당집》이 있다 |
백시원(白時源) | 1776(영조 52)∼? 조선시대의 문신. 자는 이화(而華), 호는 노포(老圃).평안도 정주에서 살았으며, 이직보(李直輔)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의 가산(嘉山)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 격문(檄文)을 써서 각처에 돌려 창의기병(倡義起兵)하고는 모여든 민병(民兵)을 거느리고 관군과 합세하여 반란군을 토벌하였다. 반란이 진압되자, 조정에서 그의 공로를 참작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의 관위를 내렸으나 받지 않았고, 또 참봉을 제수하였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그렇지만 181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에야 비로소 관계에 진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문한(文翰)이 흡족하고 넉넉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뒤에 정주의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다. |
백영수(白榮洙) | 1811(순조 11) - ? 조선의 무관. 자는 경소(景韶), 호는 운초(雲樵), 도승지 인영(仁英)의 후손. 헌종 때 무과에 급제, 뒤에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으며, 80이 넘도록 장수했다. |
백은배(白殷培) | 1820(순조 20) - ? 조선의 화가. 자는 게성(季成), 호는 임당(淋唐), 민환(敏煥)의 아들. 화원으로서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인물 산수(山水) 영모를 잘 그렸다. |
백낙관(白樂寬) | 1846(헌종 12) - 1883(고종 20) 조선의 유생, 자는 경교(景敎), 호는 추강(秋江). 병조참판 홍수(弘洙)의 아들. 1882년(고종 19) 일본 세력 침투에 반대, 척왜(斥倭)의 소(疏)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산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면서 성토하다가 투옥되었다. 이 때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난군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군란이 실패하자 다시 체포되어 제주도에 귀양갔다. |
백성흠(白性欽) | 1843(헌종 9) - 1919 우국지사. 제주판관 기호(基虎)의 아들. 전남 장흥 출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 벼슬이 선전관에 이르렀으나 1910년(융희 4) 한일합방이 되자 향리에 은신, 1919년 고종이 죽자 통곡하다가 죽었다. |
백낙귀(白洛龜) | ? - 1907(융희 1) 조선의 항일운동가. 일명 낙구(樂九), 호는 운정(雲亭), 전남 광양출신,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광양 하동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사령장(司令長)이 되어 한때 순천을 점령하기가지 했으나 마침내 체포되어 강진 고금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사로 석방, 정읍 유병우(柳秉禹)의 집에 머물면서 재기를 기하여 의병을 모집하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순국했다. |
백낙연(白樂淵) | 조선의 관리. 1871년(고종 8) 철산 부사로 재직 중 미국 상인 프레스턴 등이 제네럴 셔어먼호를 타고 대동강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만행을 부리자 관찰사 박규수와 논의 끝에 셔어먼호를 불태웠다. 1881년(고종 18) 영선사 김윤식의 관변이 되어 군기제조를 연구할 유학생들을 이끌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
백운한(白雲翰) | ? - 1919 독립운동가. 평북 의주. 3 1운동 후 남만주에 들어가 독립단에 가담하고 이명서 김근하 함일 등과 국내에 들어와 홍주의 협력으로 독립단 국내지부를 설치하고 평양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 후 만주로 돌아가다가 관전현 상루구에서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 평양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
백홍준(白鴻俊) | 1748(헌종 14) - 1894(고종 31) 기독교 순교자(殉敎者) 호는 북산(北山), 의주(義州) 출신 일찌기 개화사상(開化思想)에 문떠, 1874年(고종 11) 친구들과 함께 만주(滿洲) 우장(牛莊)에 기서 영국 선교사 메킨타이어와 로스 두 목사(牧師)에게서 서구과학을 배우는 한편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1876年 이응찬(李應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등과 함께 메킨타이어 목사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洗禮)를 받고 신교(新敎) 신자가 되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신약성경(新約聖經)의 한글 번역사업에 착수하여 1887年부터 고향 의주에 내왕하며 전도(傳道)를 시작, 1888년(고종 25) 서상륜(徐相崙), 최명오(崔明悟)와 함께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최초로 전도사가 되어 평안도 지방 일대에 교회 설립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1889年 언더우드를 동반하여 만주에서 입국, 교인 33명을 선정하여 압록강(鴨綠江)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1892年 만주에서 사서(邪書)를 간행했다는 죄로 체포, 옥사(獄死)하여 한국 신교사상 첫 순교자가 되었고, 뒤에 사위 김관근(金灌根)이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평안도 일대에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
| 근대 인물 |
백선행(白善行) | 1862(철종 13) - 1935 여류 사회 사업가. 평양(平壤) 출신. 16세에 과부가 된 후, 근검절약(勤儉節約)으로 재산을 모아 1908年(융희 2)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大同郡古平面松山里)에 백선교(白善橋)를 놓았고, 1922年 평양에 공회당(公會堂)을 설립했으며 1923年 광성(光成) 소학교에 350석의 토지를 희사, 이듬해에는 창덕(彰德)소학교에 3백석 토지를 기부했다. 미국 선교사 모펫(馬布三悅)이 설립한 학교에도 부동산을 기증, 재단법인을 만들게하고 평양 숭현(崇賢)학교에 2만6천평의 토지를 희사했다. 1925年에는 전 재산을 기울여 가난한 사람과 사회 단체에 분재, 총독부에서 주는 표창을 거절하고 일평생 수절했다. 사회장(社會葬)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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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성(白龍城) | 1865(고종 2) - 1940 독립운동가, 33인의 한 사람, 불교인. 법명은 진종(震鍾), 속명은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法號), 남현(南賢)의 아들. 전북 장수(長水)출신. 16세때 해인사(海印寺)에 입산, 수도를 한 후 전국의 사찰을 주유(周遊)하면서 심신을 연마했다. 1919년 정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만해 한용운선생이 귀국인사차 용성선사를 찾았다. 만해는 이 자리에서 스승 용성선사께 평양에서 온 남강 이승훈선생과 만날 것을 요청했다. 이때 남강선생은 오산학교를 설립하고 105인 사건으로 검거돼 4년간의 옥고를 치른후 가출옥으로 임시 몸이 풀린 상태였다. 아무리 개화된 세상이라 하더라도 기독교 목사와 선종불교의 선사가 만나기란 당시로는 유례가 없었던 것으로 이례적인 주선이었다. 그러나 용성선사는 이를 쾌히 승낙, 약속날짜를 정했고 곧 역사적인 대좌가 이뤄졌다. 이 만남은 후에 천도교의 손병희, 유도계의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순차적으로 만나 3·1운동이라는 민족의 대역사를 의논하는 계기가 된다. 용성선사의 항일운동은 이미 선대불교에 의해 창출됐던 호국불교와 또 선사에 의해 태동된 행동불교, 실천불교자로서의 진목면을 보여준 대장정이었다. 선사의 인생은 크게 두단계로 요약된다. 그 하나가 14세에 불도에 입문한후 평생을 불자로 살아왔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독립운동에 투신했다는 사실이다. 선사는 자신의 굳건한 종교관에 의해 초년, 중년에는 불교대중화운동을 펼쳤고 중년 이후 여생은 불교를 통한 항일운동에 진력했다.
◇ 1864년 장수군 번암면서 출생 백용성조사는 이 나라에 풍운이 감돌기 시작한 고종 1년(1864년) 5월 8일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白南賢)과 어머니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 큰아들로 태어났다. 14세에 남원 산곡동 지리산 교룡산성 덕밀암에 출가하여 혜월화상(慧月和尙)으로부터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의 가르침을 받고 본격적인 불자의 길을 걷게 된다. 그후 16세(1879년)에 덕밀암 주지스님의 인도로 경남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에 재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혜조율사(慧造律師)를 계사로 사미십계를 수지 득도(得道)하였다. 선사는 임제종의 6대법손인 부휴(1543∼1615)와 종파의 법맥을 잇는데 혼신을 기울인 휴정(1520∼1604)이나 사명당 유정(1544∼1610)의 뒤를 이어 임제종의 법손으로 활동하기까지 불교대중화와 한국불교중흥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 시작한다. 1860년대부터 국내에 출입하기 시작한 일본인 승려들은 1900년대에 이르러 일본의 열연종을 선두로 진종·정토종·조동종·원종 등이 차례로 국내에 들어와 군국일본의 위세아래 각자 자기 종단의 포교활동을 벌였다. 특히 일본의 정토종은 우리의 통도사를 자기 종단의 말사(末寺)로 삼으려는 야심을 품었으며, 조동종과 원종은 우리나라 불교를 통째로 자기네 종단에 병합시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교활한 방법으로 국내 종단에 접근하기도 했다. 이른바 조일불교단합관할(朝日佛敎團合管轄)을 주창하며 민족종교를 말살하려 했던 것이다. 이때 조선총독부의 간섭을 받던 전통교단과는 별도로 새로운 불법교화를 통해 피압박민족의 정서를 순화하려는 교단이 출현했다. 다름아닌 용성선사가 이끄는 대각교의 창설이다. 1921년 용성선사는 서울 봉익동 3번지에 대각교포교당 간판을 걸었다. 당시 대각교의 출현은 조선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줬다.
◇ 불교대중화·선농일치 주창 금오산 천년의 달이요, 낙동강 만리의 파도로다. 고기잡는 배는 어디로 갔는고, 옛과 같이 갈대꽃에서 자도다.(金烏千秋月 洛東萬里波 漁舟何處去 依舊宿蘆花) 1886년 8월, 진종 백용성조사가 그의 나이 23세로 신라불교의 초전법륜성지인 경북 도개동(桃開洞) 아도모례원(阿道毛禮院)에서 정진 끝에 지견(知見)이 열려 보리도를 증오(證悟)한후 낙동강을 건너면서 읊은 오도송(悟道頌)이다. 이 오도송은 훗날 백조사가 창설한 대각교의 종지구(宗旨句)가 돼 용성조사의 사상을 함축하는 「대각(大覺)」의 절구로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는 저서 수심론에서 『대각심인(大覺心印)을 허공에 찍은즉 모양이 전무하고 물위에 찍은즉 흔적은 있으나 모양을 볼수 없고 종이에 찍은즉 그대로 나타남이라. 너희들도 이와같이 제1구 제2구 제3구로써 널리 중생을 제도하라. 나의 대각성존이 이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셨기에 나의 교를 대각교라 한다』라고 밝히면서 대중교화를 한국불교의 나아갈 지표로 제시했다. 실제 용성조사는 불교가 대중속에 뛰어들어 행동하는 불교로 전환돼야 한다며 스스로 심산불교전통을 깨고 도시복판에 절을 짓고 포교를 강화코자 했다. 이러한 조사의 뜻은 당시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으로 작용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 용성선사는 또 승려들도 스스로 농사를 짓고 노동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이른바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주장했다. 용성조사는 이 선농일치사상을 펴면서 이를 직접 실천해보이기 위해 경남 함양군 백전면에 화과원(華菓院)을 설립했으며 만주 간도성에 연길농장(延吉農場)을 만들어 이의 확대에 힘썼다.
◇ 불경한글화·불교음악 현대화의 선구자 실천불교를 주창했던 용성선사는 저술활동과 불경의 번역사업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 우리나라 역대 승려 가운데 가장 많은 저서와 번역본을 남겼다. 특히 용성선사에 의해 실행된 경전의 한글번역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우리 근대 불교문화에 귀중한 획을 긋는 일대 장전이 아닐 수 없다. 1921년 용성선사는 대각사 안에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설립, 본격적인 불경번역사업을 펼쳤다. 불후의 명작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도 이때 저술된 것으로 전한다. 선사는 또 불교음악의 현대화에도 남다른 정열을 쏟았다. 조사가 집필해 1927년에 간행된 「대각교의식」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찬불가인 「왕생가」를 비롯 「대각가」「권세가」등이 실려있다. 열반 58년만에 출범한 대각사상연구원(원장 한보광)에서는 이같은 발견을 중심으로 조사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재조명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그 시작으로 지난해 3월 대각사상학술발표회를 개최했다. 이 발표회에서는 「용성조사의 사상과 활동을 중심으로한 한국불교사의 재조명」에 관한 학계의 연구발표가 관심을 모았다.
성역화사업 독립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명인 백용성조사(祖師)의 생가지 성역화 사업이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백조사유훈실현후원회(회장 한명옥)과 장수군은 지난해 백조사의 생가였던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252번지 일대에 가칭 죽림정사를 창건하는 등 총 30억원 규모의 생가지 성역화 사업을 추진했다. 성역화 사업 계획에 따르면 대웅전과 선방 등이 들어설 죽림정사는 1백70여평 규모로 건축될 예정이고 47평 규모의 백조사 생가가 복원되며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한 주차장, 정자, 기념품 판매장 등이 건립되는 등 모두 3천9백여평이 성역공간으로 오는 2천2년까지 개발된다. 이에 따라 백조사유훈회와 장수군은 지난해 죽림정사가 들어설 번암면 죽림리 일대에 대한 토지 및 지장물 매수를 마친 뒤 지난해 10월 29일 죽림정사 개토식을 갖는 등 본격적인 생가조성사업에 돌입했다. 백조사유훈회는 올해 2억원을 들여 죽림정사가 들어설 토지 구입을 완료하고 7억4천8백만원을 투입, 36평짜리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하는 등 백조사의 생가를 한국불교의 새로운 성지로 개발한다는 복안이다. 장수군도 지난해 동국대 사찰조경연구소에 용역을 의뢰, 백조사의 생가와 연계한 동화댐관광권 개발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다. 군은 죽림정사와 연계해 독립운동 기념관지구, 선농교육 공원지구 등을 단계별로 개발한 뒤 논개생가지와 장안산 등을 연결하는 문화관광 코스로 개발할 계획이다.
불교성지로 발전하길
| 『한국 불교계의 거목인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백용성조사의 생가지가 성역화돼 기쁩니다』 지난해부터 죽림정사창건을 위해 장수를 수시로 방문하고 있는 대각사 주지 겸 조실 임도문스님은『장수지역민의 높은 관심 덕분에 죽림정사창건 등 생가지성역화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고『우리나라 불교역사와 뗄 수 없는 조사의 발자취를 뒤늦게나마 성역화할 수 있다는 감격에 서울과 장수를 수십번 오고가도 전혀 힘든줄을 모르겠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
석가여래부촉법 제70세로 백조사의 법손이기도한 불심도문 스님은 현재 부처 탄생성지인 네팔 룸비니원에 한국사원을 건립중이다. 또 인도 부다가야 보리수원과 바라나시 녹야원, 사위성 기수급 고독원, 부처가 열반한 구시나가르 사라쌍수원 등 성지를 백조사 유훈대로 보존하기 위해 세계불교성지보존회를 창설 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불심 도문스님은『백조사 생가지에 건립될 죽림정사는 백조사선양사업을 이끌고 있는 유훈실현후원회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는 장수군민의 합작품』이라며『백조사 탄생지인 장수가 인류평화를 기원하는 새로운 불교성지로 발전하길 바란다』고 합장했다.
백용성 싸이트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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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범(白義範) | ? - 1920 독립운동가. 일명 범장(範長), 평북 의주 출신. 한일합방 후 조병준의 제자가 되어 남만주로 망명, 관전현에서 대한독립단에 가입, 독립단 특파원 광복군 교통사장을 역임했다. 1920년 국내에 들어와 의주군 광상면에서 활동하다가 일본의 밀정 김동휘의 밀고로 경찰의 습격을 받아 전투 끝에 전사했다. |
백운각(白雲閣) | ? - 1929 독립운동가. 본명은 승욱(昇煜). 평북 정주 출신. 3 1운동 때 고향에서 만세시위를 선창하며 민중을 지휘했고, 후에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29년 조선혁명군에 가입, 소대장으로 활약중 이 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반독립군파 및 토군의 공격을 제압코자 소대원 11명을 인솔, 출동했으나 매복하고 있던 5백여 명의 적에게 포위, 3일간이나 싸우면서 많은 적을 죽였으나 식량과 탄약의 고갈로 전원이 전사했다. |
백인선(白仁善) | 1879(고종 16) - 1921 독립운동가. 황해도 장연 출신. 1919년 만조로 망명, 독립단에 가입하고, 이듬해 이영선 서춘보와 함께 국내에 특파되어 무력항쟁을 전개하다가 황해도 송화군 봉방면에서 일본 경찰 수색대에게 포위되어 교전 끝에 전사했다. |
백기준(白基俊) | 1887(고종 24)∼? 독립운동가. 호는 운계(雲溪). 평안북도 위주출신. 선문(善文)의 아들이다. 1905년 서울 보성전문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하던 중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의병에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일제의 기밀을 탐지하기 위하여 경찰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일이 여의치 못하자 3개월 만에 자진사퇴하였다. 이에 일본경찰로부터 요시찰인으로 주목을 받게 되자 1919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해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평안북도 독판부와 독립단 총본부로부터 백의범(白義範)·김승학(金承學) 등과 함께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연통제와 독립단 지부를 평안북도지역에 조직,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는 동지 백의범과 같이 용천·의주 등지를 주로 내왕하면서 활동하였고, 김승학은 평안남도·황해도일대에서 활동한 결과 80여개소의 지부를 설치하고 청년들을 포섭, 독립운동대열에 동참하게 하였으며 거액의 군자금을 모아 독립단 본부로 돌아가 나누어주고 임시정부에도 송금하였다. 1920년 만주에서 결성된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총무부장에 취임하고,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진력하여 광복군참의부(光復軍參議部)가 조직되자 그 참사(參事)에 취임하였다. 남·북만주의 독립운동기관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軍務部)직할로 광복군사령부가 수립되자 그 재무사장(財務司長)에 선임되었다가 상해로 돌아와 1921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입법활동을 전개하였고, 재정난으로 발간이 중단되고 있던 《독립신문 獨立新聞》을 김승학과 함께 운영자금을 준비하여 속간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국무원비서장대리에 선임되었으며, 1923년 10월 24일 교민단(僑民團)제4회의원총선거에서 본구의원(本區議員)으로 당선되었다.1924년 전각료가 경질되매 사임, 내몽고 바오터우(包頭)로 가서 의민부(義民府)를 조직하고 그 총무부장이 되었다.그러나 곧 원래 재임하던 각료가 다시 집무하게 되자 그들을 따라 상해로 와서 국무원비서에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임시정부 국무원비서국장으로 승진하였고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직에 참여하고 기관지 《한보 韓報》를 발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32년 이후 산둥성(山東省) 칭다오(靑島)로 가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백일규(白一圭) | 1879(고종 16) - ? 독립운동가. 평남 강서(江西) 출신. 호는 약산. 1905年 하와이에 이민(移民), 이듬해 미국 본토에 가서 공부하다가 1907年(융희 1)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창립 발기인이 되고, 이어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스를 살해한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 두 의사(義士)의 후원회 회장이 되어 공정한 재판을 위해 힘썼다. 1909年 네브라스카에서 박용만(朴容萬)등과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를 설립, 1918年 캘리포니아대학 경제과를 졸업. 이어 북미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민보] 주필이 되었다. 1919年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자금 30만 달러를 모아 상해(上海) 임시정부에 보냈으며, 1926年 북미 태평양 한인국민회 총회장에 선출되었고, 1946年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국민보(國民報)] 주필이 되어 주로 언론을 통한 한국인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고, 뒤에 미국 본토로 돌아가 국민회 중앙 감찰위원을 지냈다. |
백종렬(白鍾烈) | ? -1938 독립운동가. 자는 현복(賢復), 호는 온당(溫堂). 평북 태천 출신.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때 유인석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전개,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에 망명하여 관전현 환인현 등지에서 농무계 향약계를 조직, 의병 양성에 진력했다. 3 1운동 후에는 조맹선 등과 대한독립단을 조직, 부총재가 되어 많은 활약을 했다. 그 후 일본 군대가 관전현 향로구에 있는 한국 청년단을 공격한다는 정보를 입수, 대책을 강구하러 청산구에 갔다가 피체, 환인현에서 총살당했다. |
백영촌(白永村) | 1882(고종 19)∼?. 한말의 의병장. 별명은 남신(南信)·영근(永根). 경상북도 영일출신.상목(相穆)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만년(崔晩年)이다. 1906년 3월 정환직(鄭煥直)의 명으로 정용기(鄭鏞基)가 영천에서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己)·손영각(孫永珏) 등과 의병을 일으켜 산남창의진(山南倡義陣)을 구성하였을 때 그 휘하에 들어가 우포장(右砲將)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계획이 실행되기에 앞서 의병장 정용기가 관군에 붙잡히자 청하와 경주 등지를 공격하는 등 소극적인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렇지만 181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에야 비로소 관계에 진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문한(文翰)이 흡족하고 넉넉하여 세상에 알려졌으며, 뒤에 정주의 삼현사(三賢祠)에 배향되었다. |
백일진(白日鎭) | 1883(고종 20) - 1921 교육자,독립운동가. 기독교 전도사(傳道師)로서 1904年(광무 8) 전도사 김관근(金灌根)과 함께 의주(義州)에 양실학교 (養實學校)를 설립했고, 1908년(융희 2) 의주 군내 사립학교 연합 대운동회에서 일본의 침략정책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1910年 선천(宣川)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 교사가 되고, 이듬해 105인 사건으로 체포, 5년형을 선고받았다. 뒤에 석방되어 1919年 김병조(金秉祚)등과 중국 안동(安東)에서 임시의사회(臨時議事會)를 조직, 청년단장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21年 피체, 뒤에 병보석(病保釋)되어 병사했다. 1963년 건국공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
백낙준(白樂俊) | 1884(고종 24) - 1934 국악사(國樂師). 충남 논산(論山)출신. 가야금 산조(散調)의 장단(長短)을 취합(取合), 선택(選擇)하여 거문고 산조(散調)를 작곡함으로써 우리나라 거문고 산조의 효시를 이루었다. |
백남준(白南俊) | 1885(고종 25) - ? 독립운동가. 일명 신일(信一), 우광(愚狂). 평북 초산(楚山)출신. 일찌기 만주 길림성(吉林城)에 이주, 정미업에 종사하던 중 1911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5면형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후에 미국 유학을 뜻했으나 여비 관계로 단념, 1919年 만주 유하현 삼원보(滿洲柳河縣三源堡)에서 현익철(玄益哲), 김규환(金奎煥)등과 한인공회(韓人共會)를 조직, 이해 군정서(軍政署)와 통합하여 참모로 있다가 간부들의 분열로 탈퇴했다. 1920年 오동진(吳東振)의 권유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가입하여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했고, 1922年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국제공산당 동양민족 대회에 참석, 이해 가을 광복군 총영의 대표로 통의부(統義府) 조직에 참가했다. 이어 10월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위해 통의부 대표로 각 단체와 연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는에 힘썼다. 그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 감옥에서 복역했다. |
백광운(白狂雲) | ? - 1924 독립운동가. 본명은 채찬(蔡燦). 충주(忠州)출신. 1905年(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장 이강년(李康秊)을 따라 일본군과 싸웠다.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通化縣)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 합니하(哈泥河) 산골에 백서농장(白西農場)을 만들고 둔전제(屯田制)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19年 3 1운동 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들어가 모험대를 조직, 군내의 일본기관 파괴 활동을 전개했고, 이듬해 군정서 본부가 길림성(吉林省) 방면으로 옮겨지자 동지 신용관(辛容寬)과 의용군을 조직, 평북 강계(江界)에 잠입하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했다. 1921年 관전현(寬甸縣)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고, 1923年 남만주의 군인 독립단체인 통의부(統義府)에 가입, 제1중대장이 되었으나 내분으로 제 2, 3, 5 중대장과 함께 탈퇴하고 상해 임시정부 직할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결성, 참의장이 되었다. 그 뒤 압록강 철교 준공식 때 총독 사이또오(齊藤實)를 습격하는 등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치다가 통의부의 백병준(白炳俊), 백세우(白世雨)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2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
백남채(白南採) | 1888(고종 25) - 1950 독립운동가. 경북 경산(慶山) 출신. 1910年 중국 북경대학(北京大學)에 유학 중 이시영(李始榮)등과 접촉하며 독립운동에 종사, 졸업후 귀국하여 1918年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교감 및 이사장이 되었다. 3 1운동 때 대구 남산교회(南山敎會) 장로로서 서병우(徐丙佑), 홍주일(洪宙一), 이만집(李萬集), 김마리아 등과 만나 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다가 시위 전날인 3월 7일 일본 경찰에 피체, 2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에도 남산교회 장로로 배일사상 고취에 진력했으며, 해방 후 미군정 경북 내무부장, 입법의원을 거쳐 제헌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
백남운(白南雲) | 동암(東岩) 백남운(白南雲)선생(1894∼1979)은 좌파경제학의 대부로, 학자이자 교육자이며 정치가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였던 芹村 白寬洙선생과는 일가로 조선 선조시대에 의정부 우참찬 벼슬을 지낸 文敬公 白仁傑선생(사후 좌찬성에 추대, 청백리)의 같은 후손이다.근촌선생이 5살위로 항렬로 따져 할아버지뻘이 된다.동암선생이 동경상과대학 유학시 백남선이라는 일가에 보낸 편지에 할아버지 근촌의 안부를 묻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두사람은 상당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두사람의 고향은 고창군 성내면으로 우리나라 근현대사 논의에서 빼놓을수 없는 거목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근촌선생은 상당히 알려진데 비해 동암선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암선생이 남긴 족적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너무 많은 부분이다. 여기에는 근촌선생이 6.25 당시 납북돼 선생에 대한 연구와 논의를 활발히 할수 있었던 반면 동암선생은 자진 월북해 90년대초 해금 이전까지만 해도 선생에 대한 논의자체가 금기시 되었던 배경이 내포돼 있다.그래서 선생에 대한 기본적 자료와 학문적 연구논문, 서적등이 극소수에 불과해 아쉬움을 남겨주고 있다. 동암선생은 동학혁명이 일어난 해인 1894년 2월11일 고창군 아산면 반암리에서 한학자였던 遂堂 白樂奎씨의 2남으로 태어났다.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성내면 부덕리 엄동(일명 엄골)으로 이사와 이곳에서 성장해 성내면이 고향으로 불리워진다. 동암선생의 집안은 봉건 양반집안이었지만 외가에 종종 의존할 정도로 매우 빈한했던 집안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선생은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朱子家禮와 한학을 깊이있게 배워 훗날 신학문을 연구하는 큰 토대를 쌓았다. 선생이 우리나라 처음으로 한국사회경제사를 체계화한 불후의 역작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집필하기 위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원전을 3번씩이나 읽고 연구를 할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에서 연유한다. 종친들에 의하면 선생은 어릴때 고집이 세고 내성적이라 한번 돌멩이를 차기 시작하면 중간에 도랑에 빠지더라도 다시 건져내 끝까지 집으로 굴려왔을 만큼 고집이 상당했다고 전해진다. 선생이 학자로서 대성할수 있던 것도 이런 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은 1911년 18살의 나이로 奇南燮씨와 결혼해 생전에 장남 두기와 장녀 현기,차녀 금기,차남 홍기,삼남 영기씨등 3남2녀를 자녀로 두었으나 금기씨와 홍기씨만 살고 나머지는 태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모두 사망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봉건적인 집안이었으나 부친으로부터 排日의식을 체득한 선생은 신학문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1912년 19살의 나이로 당시 최고 관립학부인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했다.
새로운 세계와 신학문을 접한 선생은 이곳에서 근대과학적 정신과 지식,자본주의 경제학,농학의 기본이론을 습득했다.선생의 성격도 외고집에서 道義를 원칙으로 삼고 활달하면서도 온화한 품성으로 변화해 갔다.훗날 선생의 주변에 수많은 소장학자와 학생들이 뛰따랐던 것도 이런 품성에서 비롯된다.학문 못지않게 덕성을 길렀던 것이다.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몇년간 강화간이농림학교겸 강화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강화산립조합에서 技手로 재직했다. 이 기간동안 일제하의 한국농업의 기본문제와 민족현실에 눈을 떴다. 앞으로의 학문연구와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자기앞에 놓여진 가슴아픈 민족의 현실을 더욱 깊이있게 연구하고자 선생은 직장을 그만두고 1918년 10월 25살의 늦은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나섰다. 일본 사회주의운동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종합잡지 ‘개조’를 창간한 일본인 야마모토 자네히코집에서 잠시 머물며 동경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할 준비를 한 선생은 다음해에 관비유학생으로 이 학교에 입학했다.선생은 이 학교을 거쳐 일본 최고학부로 알려진 동경상과대학을 1925년 3월에 졸업했다. 선생은 1923년 학교재학중 발생한 관동대지진 때 하숙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기와가 무너져 내리는데도 집안으로 다시 들어가 귀중한 책 몇권을 들고 나왔을 만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학문적인 욕구가 치열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선생은 이 시기에 사상적 토대와 앞으로 펼칠 학문세계의 골격을 형성했다.암울한 민족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학문상의 주체성이 절실함을 자각했다. 나아가 ‘조선사회경제사’를 체계화시키고 한국인이 주체가 되는 ‘조선연구’의 진흥을 필생의 연구과제와 실천과제로 설정했다. 선생은 일제하의 민족적 모순과 지주제중심의 당시 사회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학문적 연구에 막스주의를 자연스럽게 도입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계급주의를 반대하고 강렬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막스주의를 수용했다. 민족해방이 전제되지 않는한 사회해방은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했던 선생은 평생 좌우세력의 협동을 소신으로 주장했다. 이같은 사상적 영향은 당시 동경고와 상대에 퍼져있던 일부 사회주의적 학문 분위기에서 기인된 것으로 보여진다. 동경상대에 널리 퍼져있던 학풍 즉 자본주의학문이 한국침략과 강점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선생은 이때 ‘자본론’과 ’국부론’등 외국서적의 원전을 공부하면서 영어와 불어,러시아어,독어를 배워 5개국어에 능통했다고 전해진다. 이같은 사상적 토대와 학문세계의 골격을 갖춘 선생은 동경상대를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연희전문 상과교수로 부임했다.선생의 나이 32살때였다. 1938년 연희전문을 그만두기전까지 이 학교에서 막스의 유물사관과 계급투쟁론에 서서 조선역사를 강의하는 한편 한국사회경제사를 국내 처음으로 체계화시킨 역저 ‘조선사회경제사’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1933년과1937년에 각각 출판했다.이 두권의 저서는 경제학도라면 책꽃이에 거의 꽃아놓고 볼정도로 필독서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1936년에 중앙 아카데미(학술원) 창립을 제안하기도 했던 선생은 연전경제연구회 사건을 기화로 오랫동안 후학들을 가르켰던 연전을 그만두고 칩거에 들어갔다.하지만 이것도 잠시, 8.15해방은 선생을 해방공간으로 불러내 격동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넣었다.격랑의 이 해방공간속에서 선생은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정치가로서 본격적인 길을 걷게 된다. 다른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새국가건설’이라는 역사의 명제앞에 몸을 던졌던 것이다.이 때는 좌.우익의 주도권다툼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 저서는 사적유물론의 원리를 조선경제사에 처음으로 적용한 역작으로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 ‘丁茶山의 사상’과 ‘조선민족의 진로’등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하지만 선생은 1938년 학생동아리 ‘연전경제연구회’ 사건과 관련해 학내 적화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검거돼 투옥되는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선생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 ‘백남운교수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연세대 방기중교수는 이 논문에서 한국 막스주의 역사학과 사회과학을 개척했다고 평가했다.
| 한국사를 세계사적 시야에서 법칙적으로 인식할수 있는 단서를 마련하는 한편 역사인식과 민족해방, 해방이후의 신국가건설의 과제를 상호유기적으로 파악할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는 것. 또 일제 식민사학자의 한국사왜곡을 실증적으로 타파해 우리나라 사회경제사 연구의 방향을 제시한 것은 물론 한국사인식의 典型을 확립하고 민족문제의 중요성을 역사연구를 통해 구체화함으로써 정체론적 입장의 교조적 막스주의 한국사 인식을 거부했다고 선생의 학문적 업적을 평가했다. |
만 51세가 된 선생은 해방후 다음날 조선학술원을 창설해 위원장을 맡고 지금의 서울대학인 경성대학 법문학부 경제학교수로 부임했다. 조선학술원 창설에 참여한 인사는 물리화학의 김양하선생과 이론경제학의 윤행중선생,철학의 김계숙선생등 중견지식인들로 이들은 ‘새국가건설’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했다. 학술원은 해방공간에서 좌.우통합에 중요한 구실을 한 단체로 1946년 2월15일에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일명 민전으로 불림)에 참여해 이론을 제공했다.선생은 좌익의 민전 공동의장에도 선출되는등 해방공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서울대 전 최호진교수가 “백남운선생은 일제시대부터 학문적 능력과 도덕적 품성으로 학계의 거목으로 꼽혔다”고 회고하는 바와 같이 많은 학자들을 결집할만큼 존경과 권위를 한몸에 받고 있었던 것이다. 모스크바의정서가 규정한 신탁통치조항에 불만을 가졌으나 통일정부가 들어서면 민족자주적으로 해결되리라 믿었던 선생은 비밀리에 월북해 북한의 조선독립동맹 김두봉위원장을 비롯한 간부들을 만났다.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선생은 이어 북한의 조선독립동맹이 신민당을 발족시킴에 따라 남조선신민당을 창당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선생은 완전한 민족해방을 성취하려면 사회의 혁명세력이 연합성을 띠어야 한다는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을 제기했다. 이같은 선생의 주장은 좌우익의 민족통일전선수립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이라는 점에서 중도파지식인들의 호응을 얻었으나 과격성과 폭력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조선공산당으로부터 이론적 비판을 받았다. 조선공산당은 일부 유산자와의 동맹을 배척했던 것이다. 이 당시 북한에서는 김일성의 북조선공산당과 김두봉의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로동당을 발족시키고 남한에는 좌익3당인 여운형의 조선인민당과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선생의 남조선신민당이 존재하고 있었다.북로당은 남한의 좌익 3당으로 하여금 통합신당 곧 남로당을 만들것을 요구했다. 이같은 권력의 암투과정에서 선생은 남조선신민당 위원장자리를 빼앗기고 여운형과 함께 사회노동당을 창당하고 박헌영이 지도하던 남로당의 10월폭동에 반대했으나 힘이 모자라 막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북한으로부터 우익기회주의자로 매도당했던 선생은 사회노동당을 해체해야만 했다. 이후 선생은 남로당에 비해 훨씬 덜 과격한 좌파적 근로인민당을 창당, 부위원장에 올랐으나 여운형이 암살돼 당을 힘겹게 이끌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948년 5월10일 남한총선을 앞두고 갈등을 겪던 선생은 총선을 비난하면서 자진 월북해 같은해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이후 그대로 북한에 눌러 앉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월북했던 인사들이 거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나 선생은 운좋게도 살아남아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한때 우익기회주의자와 분열주의자로 몰렸던 선생이고 보면 매우 예외적이다. 선생은 1948년 9월9일 출범한 북한정권의 초대내각에서 교육상에 발탁돼 8년동안 재직하고 과학원 원장도 겸했다.1961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뽑히고 67년에는 73세로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선출돼 5년동안 자리를 지켰다.이후 막스레닌주의방송대학 총장과 조국전선의 의장을 지내기도 했던 선생은 79년 만85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어록 ◆ 일제에 의해 왜곡된 조선의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이 작업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절실한 체험자인 조선인이 해야한다(1930.1월 논설) ◆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 실시란 뜻밖의 일로 한국에 대한 연합국의 인식이 충분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국제적으로 한국의 독립없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기하기 어려우며 국내적으로도 한민족은 자주독립할수 있는 역량과 조건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3천만이 굳게 뭉치기만 하면 탁치문제는 극복할수 있다. 좌우익의 각 정당이 엄숙한 태도로 자기비판하여 지엽적 문제에 구애됨이 없이 대국을 달관하여 시급히 제휴해서 민족통일전선을 하루빨리 결성하는 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선결조건이 될 것이다.(1945년 12월29일 논평) ◆오늘날 좌익과 우익이 벌이고 있는 대립은 역사적으로 요구되는 연합성을 파괴하고 있는 점에서 정당한 대립은 아니며 민중에게 불안을 줄 뿐이다.(1946년 저서 ‘조선민족의 진로’중) ◆입장과 노선이 다르다고 해도 상대방에 대한 저열한 비방은 삼가는 것이 정치의 대도다.(1946년 민전에 참여하면서) |
백관수(白寬洙) | 1889(고종 26) - ?. 독립운동가, 정치가. 호는 근촌(芹村), 도진(道鎭)의 아들. 전북 고창(高敞) 출신.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반만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실로 세계 최고 민족의 하나이다. 조선은 항상 우리 민족의 조선이요, 한번도 통일한 국가를 잃고 이민족(異民族)의 실질적 지배를 받았던 일은 없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에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얻기를 요구하며 만일 불연이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기필코 이룰 것을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 대강당에는 조선인 유학생들이 발디딜 틈없이 모여 들었다.사회자의 소개로 등단한 조선청년독립단장 백관수(白寬洙)는 차분한 음성으로 독립선언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 순간 일본경찰의 저지와 이를 가로막는 학생들과의 격투가 벌어졌고 삽시간에 장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그래도 백관수의 낭독은 계속 되었고 이어 김도연(金度演)의 결의문 낭독, 사회자 윤창석의 기도로 끝이 났다. 이날의 선언이 바로 역사적인 「2·8선언」으로 20일 뒤 조선을 뒤흔든 3·1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날 독립선언서에는 백관수를 비롯 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윤창석 김상덕 서춘 최근우 이종근 송계백 이광수 등 11명이 서명했다. 당시 동경에 없었던 이광수와 최근우를 제외한 9명의 대표는 현장에서 일경에 연행 되었다. 이로 인해 백관수는 1년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와 함께 한국 근대사에 큰 맥을 이룬 근촌(芹村) 백관수는 1889년(고종 26) 고창군 성내면 생근리에서 태어났다. 선조때의 명신이자 이름난 선비였던 백인걸(白仁傑)의 10대손으로 아버지는 도진(道鎭),어머니는 고씨(高氏)였다.
그는 5살부터 호남의 거유인 간재 전우(田愚) 문하에서 한문을 익혔다. 하지만 당시는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민비 시해사건이 터지는등 국내외 정세가 뒤숭숭하던 때였다. 그가 15살되던 해에는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이듬해에는 망국의 을사조약이 체결 되었다. 이 무렵 백관수는 평생의 동지 김성수와 함께 신학문의 스승인 한승이(韓承履)를 만나게 되어 2년에 걸쳐 군산 금호학교에서 물리 수학 영어 등을 배웠다. 이에 앞서 그는 김성수를 통해 송진우를 만나게 된다. 송진우는 김성수를 집으로 찾아갔다 김성수가 백관수와 더불어 변산 내소사 청연암으로 공부하러 갔다는 말을 듣고 같이 입산했던 것이다. 송진우와 김성수는 담양의 창평학숙에서 만나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이때 의기가 투합, 입지(立志)를 세운 세소년은 나중에 까지 서로 협력하며 같은 길을 걷게 된다. 금호학교를 졸업한뒤 김성수와 송진우는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나고 백관수는 부모의 뜻에 따라 서울로 올라가 경성법률전수학교에 들어갔다. 1915년 학교를 마치고 바로 YMCA에 들어간 백관수는 민족지도자인 월남 이상재(李商在) 선생으로 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애국계몽운동과 사회봉사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적극적인 YMCA 활동 덕분에 백관수는 1917년 일본에 유학할 기회를 가졌다. 비록 28살의 만학이긴 하나 동경으로 건너가 명치(明治) 대학 법과에 들어갔다. 그리고 동경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인 학우회에 가입, 주도적인 활동을 벌였다. 때마침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1918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자 국내외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독립운동이 힘을 얻게 되었다. 장덕수가 중국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의 밀명을 띠고 입국하고 이승만의 밀사가 서울을 다녀 가는등 자못 움직임이 활기를 띠었다. 동경에 유학중이던 백관수도 송계백을 송진우에게 보내 독립선언서 내용을 전달했다. 이 선언서는 백관수가 기초하고 춘원 이광수가 손을 본 명문으로 꼽힌다. 동경에서는 이 선언서를 인쇄할 곳이 없으니 활자만 구해 보내주면 국내와 시기를 맞춰 동시에 거사하자는 뜻에서 였다. 그러나 송계백이 상처를 입으면서 까지 짊어지고 온 활자는 일경의 감시 때문에 인쇄시설을 확보하지 못해 사용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독립선언서는 프린트에 의존해 찍어야 했다. 유학생 10여명이 백관수의 하숙집에 모여 1주일 동안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 1만부를 찍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2·8 선언이 탄생한 것이다. 1920년 3월 출옥한 백관수는 중단했던 학업을 1921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후 기독교청년회의 일을 보는 한편 언론계에 투신, 1924년 조선일보사 취체역(取締役)을 맡았으며 1926년 12월부터는 편집인과 영업국장을 겸임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손문(孫文)이 사망하는가 하면 조선공산당이 처음으로 조직되는등 국내외 정세가 혼미했다. 이에 자극받은 백관수는 민족주의자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해 김준연 안재홍 백남훈 홍명희 최두선 등과 함께 1925년 조선사정연구회(朝鮮事情硏究會)를 결성했다. 그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가 국내에 뿌리박지 못하도록 연정회와 태평양문제연구회를 단일화하는등 민족진영의 단합을 시도했다. 1927년 2월에는 민족 단일조직으로 신간회가 출범하자 이에 가담했으며 7월에는 하와이에서 열린 제2회 태평양회의에 유억겸 김활란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했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 사설 ‘보석(保釋)지연의 희생’이 문제가 되어 주필 안재홍과 함께 구속되고 이로 인해 조선일보는 1년4개월간 신문발행이 중단되었다. 1932년에는 홍문사(弘文社)를 설립, 월간지 동방평론을 발간했으나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3년만에 폐간을 당하였다. 1937년 5월 그는 동아일보 제 7대 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9개월만에 막 해제 복간된 상태였다. 그는 발행인과 편집인에다 편집국장까지 맡아 일제의 집요한 언론탄압에 맞서야 했다. 일제의 한글교육 폐지, 창씨개명, 신사참배, 전쟁 강요 등이 그것이었다. 이같은 탄압에 굴하지 않자 일제는 동아일보를 강제로 폐간했다. 그는 이에 저항하여 끝내 폐간계를 날인하지 않아 1개월간 구금되는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로부터 해방되던 해까지 5년동안 낙향, 시작(詩作)과 붓글씨를 벗하며 침묵의 나날을 보냈다.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는 상경, 조국의 재건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정국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가 구성되는등 어수선했다. 좌우익의 이니셔티브 다툼도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는 김병로 등과 함께 좌우익의 타협을 모색했으나 좌초되고 원세훈 조병옥 이인 나용균등 민족진영으로 조선민족당을 발기했다. 이 발기회가 바로 한국민주당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는 한때 한민당 총무를 맡기도 했다. 1946년 미군정하에서 남조선대한민국 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 입법의원을 지냈다. 1948년 5월 10일에는 고향인 고창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 초대 법사위원장및 헌법기초위원으로서 헌법제정및 정부수립에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50년 서상일과 함께 첫번째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했으나 2표차로 부결되고 말았다. 그로 부터 석달후 발발한 6·25 사변은 그에게 돌이킬수 없는 비극을 안겨 주었다. 서울 원남동 자택에서 미처 피하지 못하고 공산군에 의해 강제 납북되고 만 것이다. 이때 그의 나이 61세였다. |
백정기(白貞基) | 1896(건양 1) - 1936, 독립운동가. 전북 정읍(井邑)출신. 우리 민족은 수천년 역사를 통하여 우리를 침략해오는 주변 민족에 대하여 피로써 항쟁하면서 민족 존영의 명맥을 수호해왔다. 그 중에서도 최근세에 있었던 일제의 침략행위는 그 규모와 성격이 가장 크고 잔혹한 것이었을 뿐더러 마침내 우리의 국권을 빼앗고 강토를 짓밟고 수많은 생명을 살륙하고 재산을 약탈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독립투쟁도 심각하고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불행하게도 한 때 그 같이 치욕의 역사를 면치 못했다 할지라도 그 반면 민족의 혼이 죽지 않았고 불굴의 항쟁력으로 민족 전체가 독립운동에 참여했기에 민족의 위대함이 있다. 이것이 민족정신의 기반이요, 민족사의 전통이다. 건양(建陽) 원년인 1896년, 을미사변(乙未事變)에 분개하여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고종(高宗)이 비(妃)인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경복궁을 피하여 러시아공사관으로 임시 옮겨 거처했던 그 시기 이 지역 독립운동가 구파(歐波) 백정기(白貞基)의사가 출생했다. 백정기의사는 부안군 남하면 내진리 백사순(白士順)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살때 정읍군 영원면 은선리로 이사해서 정읍이 고향처럼 됐다.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을 업으로 살아나온 백의사는 편모 슬하에서 많은 고생을 하며 자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남달리 머리가 명석하고 똑똑한 소년으로 주위의 촉망을 한몸에 받아왔다고 도 기록에 남아 있다. 강인하였으며 남을 위하는 일을 잘 하였고 어른들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었으며 남달리 강직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은 그의 나이 11살때 소위 한일합방으로 일본에 나라를 잃는 통한의 아픔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그 무렵 전국을 휩쓸고 유행하고 있던 ‘오적배들이 오조약을 만들어 삼천리 강토를 왜놈들에게 팔아먹고 있다’는 동요를 부르며 그는 이미 이때부터 나라를 빼앗긴 민족적 울분을 터뜨리기시작하였다. 활발한 성격에 미소년의 용모를 지닌 의사는 13살 되던 해 명문과 부호로서 이 고을 일대에 이름을 떨치던 창녕(昌寧) 조(曺)씨 문중의 규수 팔락여인(1966년 작고)과 혼인하게 된다. 부호인 처가쪽에서 빈한한 가세인 의사를 위해 5백여석이라는 재산을 주었으나 의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이같은 당돌하고도 늠름한 기품에서 장차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인간적 넓은 도량과 소양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이와같은 사내로서의 분별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은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장래를 말해주는 증좌이기도 하다. 특히 이 때부터는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노골화하여 이 고을의 부자였던 의사의 처가는 왜놈들의 수탈정책의 과녁이 되었으며 이 광경을 눈으로 본 의사였기에 그후 항일투쟁의 정신적 무장을 공고히 다지는데 큰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주경야독으로 사서(四書)에 통달하였고 다시 신학문을 배워 정치에 대한 식견도 높아 고향에서 일이 있을 때면 그의 의견이 많이 반영되는 등 비범한 청년 백정기는 점진적으로 항일투쟁의 골격을 키워나갔다. 그는 적진을 뚫기 위해서는 먼저 적을 철저히 알아야한다는 병법을 새기며 일본어를 익히는 등 일본을 궤멸하기 위한 단계를 한발 한발 이행해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1919년 2월 서울에 올라가 3·1운동을 목격한 것이 의사의 행동력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그는 급히 고향에 돌아가 동지들을 규합해 무력항쟁에 나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평화적인 운동을 일제가 무력으로 탄압과 살륙을 자행하는 것을 보고 의사는 동지들과 함께 우리가 피를 흘려서 독립을 쟁취하는 길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 같은 애국적 장지를 안고 고향을 등지게 되는데 이때부터가 이른바 의사 백정기의 찬연한 투쟁시절로 접어드는 본격적인 항쟁사를 기록한다. 그해 8월 인천에 있는 일본군 시설 파괴에 나선 것. 이을규(건국 초대감찰위원) 이정규(전 성균관대 총장) 등과 함께 경인(京仁)간의 일본인 기관을 습격하려 한 이 사건은 비록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은 거두지 못했으나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큰 사건이었다. 만주(滿洲) 펑톈(奉天)으로 망명, 홍범도부대에서 활동했던 의사는 이듬해 겨울 다시 국내로 들어와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펴다가 일시적으로 경찰에 구금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민함을 발휘, 임기응변으로 광부 행세를 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1924년 일본에 밀입국한 의사는 동경에서의 대대적인 파괴공작을 꾀한다. 이때 일본 천황(天皇)의 암살기도에 참여하지만 이 거사 역시 실패에 돌아감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上海)로 재차 망명하게 된다. 이 천황 암살기도에는 몇 가지 후일담이 전해진다. 이 일을 계획할 때 의사의 용모에 매혹된 모리(森)라는 묘령의 일본여인이 모든 정보를 의사에게 제공했으며 또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 의사가 체포 직전의 비운에 빠지게 됐을 때 그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일본을 빠져나왔다는 일화도 그 중 하나. 상해로 건너간 의사는 세계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게 되며 한때 농민운동에도 투신한다. 특히 이 무정부주의자연맹은 일종의 파괴성 국제조직으로서 의사가 이 조직에 가입하게 된 것은 일제 타도의 근본 목적이 그들의 붕괴에 있고 그 붕괴는 철저한 일제의 파괴밖에 없다고 그는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결국 수많은 항거를 전부 행동화함으로써 독립투쟁의 최선봉에 서게 된다. 의사가 1928년 중국(中國) 남경(南京)에서 열린 동방 무정부주의자연맹 회의에 조선(朝鮮)대표로 참석한 것도 세계 무정부주의자연맹이라는 국제조직을 통해 일제에 의해 자행된 조선 침략의 마수를 제거하기 위한 독립운동의 연장으로서의 참여인 것이다. 1930년부터 상해에서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의 주요인물로 활동 중 1932년 청년연맹 예하의 결사대로 BTP라는 흑색 공포단을 만들어 만주 중국 등지에서 일본 기관들에 대한 파괴공작을 추진한다. 이 무렵 의사가 벌인 거사로는 여순(旅順)에서 일본 수송선 1만5천t급의 폭파를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시 해외신문에서도 대서특필되리만큼 큰 사건이었고, 다른 여러 곳의 폭탄의거와 함께 일본 관민에 준 위협은 적지 않았다. 의사는 다시 1933년 이강훈(李江勳) 이원훈(李元勳) 등 동지들과 함께 홍까우(虹口)공원에서 주중(駐中) 일본대사 유기찌(有吉明)와 일본 대사관원 그리고 친일 중국인사 등에 대한 대대적인 암살계획에 참여하게 되는데 불행히도 이 계획의 사전누설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의사는 이 거사를 마지막으로 일본 경찰에게 현장에서 체포돼 일본 나가사끼(長崎)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일본의 법정에서 무기징역 선고를 받고 복역중 1936년 5월 22일 41세를 일기로 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1946년 6월 8·15해방과 함께 자유의 몸이 된 동지 이강훈의사가 적극적으로 나서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두 의사의 유해와 함께 일본에서 봉환, 서울 효창공원 안에 안정돼 ‘3의사 묘’로 불리운다. 1963년 백의사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실로 짧은 의사의 일생이었지만 그의 생애는 오직 조국의 광복을 위한 일제의 타도 외에는 아무것도 있을 수 없었던 애국적 장지로 일관하였던 일생이기도 하였다. 우리를 빼앗고 우리를 죽이는 적에게는 투쟁을 통한 철저한 응징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의사의 애국정신이었고 독립투쟁의 목표였다. 그래서 의사의 생애에 점철된 항일사(抗日史)는 오직 행동을 통한 투쟁으로 일관됐던 것이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
백형철(白亨喆) | 자는 상옥(相玉), 호는 용성(龍城), 16세때 해인사(海印寺)에 입산하여 수도(修道)를 한 뒤 전국 사찰(寺刹)을 주유(周遊)하였다. 3 1운동 때에는 민족대표(民族代表)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에 서명(署名)하고, 1년 6개월간 복역(服役)했다. 출옥후 불교종단(佛敎宗團)의 정화(淨化)를 위해 노력, 대처승(帶妻僧)의 법통계승(法統繼承)을 인정하는 일본의 종교정책(宗敎政策)에 반대했으며. 한편 불교(佛敎)의 대중화 운동을 위해 저술(著述)에 힘썼고 대각사(大覺寺)를 창건했다. 1962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
백인제(白仁濟) | 1898(광무 2) - ?. 의사(醫師). 평북 정주(定州)출신. 인제대학교의 모태인 백병원을 설립하신 백인제 박사는 평안북도 정주군 남서면에서 부친 백희행(白禧行)씨의 7남매중 셋째 아들로 1898년 1월 28일출생하였다. 백인제 박사는 1915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재학하던중 1919년 3월1일 항일구국투쟁이 일어나자 학생대표 김택원 등과 같이 가담하여 학교로부터 퇴학처분을 받고 옥중에서 10개월간 고생하였다. 옥고를 치르신 후 경성의학전문학교 복학이 허용되어 1921년 동기생들보다 1년 늦게 학교를 졸업하고 그를 총애하던 일본인 교수들의 추천으로 모교 외과교실에서 연구생활을 시작하였다. 1928년 동경제국대학으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30세란 젊은 나이로 경성의학 외과주임교수에 임명되었다. 40세가 되던 1936년에는 외과학연구 차 프랑스, 독일 등을 순회하고 미국으로 가서 MAYO진료소가 의술로 벌어들인 돈을 의학연구와 교육에 헌납하는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 또한 펜실베니아 체스타병원에서 근무하며 개업을 하던 송재 서재필 박사를 만나면서 백박사는 조국의 독립에 굳은 의지를 다진다. 그 후,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주임교수로 병원장을 겸하며 서울의사회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46년 11월에 백박사는 해방된 조국에 대한 봉사로서 전재산을 기부하여 공익재단법인으로서는 제1호인 백병원을 창설하고,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서 북으로 납북되었다. 백인제 박사는 의학계에 남긴 학문적 업적 또한 뛰어나다. [소량혈청중의 칼슘 및 인산의 정량법에 관한 연구], [실험적 구두병에 관한 연구] 등의 수많은 논문과 우리나라 의학계의 지도적인 많은 인재들을 양성했다. 특히 백인제박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수혈을 시작한 의술인이기도하며 일제하에서 한국의술인 양성에 힘쓴 외과학의 개척자이기도 하였다. 백인제 박사의 민족정신에 관한 근원은 오산중학시절에 형성된 것으로 보아지며 당시 교사인 춘원 이광수와 남강 이승훈의 훈도와 감화를 받았다. "인술제세(仁術濟世)"라는 건학이념도 이때 유래된 것으로 도산 안창호선생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백박사의 측근들은 추측하고 있다. 재단 설립자인 백인제 박사는 명백한 민족주의자이며 인본주의자이기도 하다. 한국인, 일본인을 가리지 않고 환자는 환자로서 의사가 치료할 책무를 다함은 그가 민족주의자임을 내세워 의사임을 잊지않는 고귀한 인격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백인제 박사가 숙원했던 "인술제세(仁術濟世)"의 이념이 종합대학교로 발전된 "인덕제세(仁德濟世)"로서 구현되어 나타났다. 백인제 박사의 설립이념과 그의 애국적 행적은 곧 인제인을 민족사랑의 실천의 장으로 인도할 것이다. |
백정현(白正鉉) | 1917 - 1946 독립운동가. 평남 용천(龍川) 출신. 1939년 중국에서 한국청년 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 1940년 중국 중앙전시국사 간부훈련단(中央戰時軍事幹部訓練團) 제4단 한청반(韓靑班) 제2기생으로 졸업, 1943년 유격활동 및 지하공작 중 일본군에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
백인해(白仁海) | ? - 1921 독립운동가. 호는 심재(審齋), 평북 태천(泰川)출신, 한일합방 후 아버지를 따라 남만주 관전현(寬甸縣)으로 망명, 독립단(獨立團)에 가입하여 국내전권위원(國內全權委員)으로 활약했다. 1921년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 관공서의 파괴활동을 벌이다가 의주군 고관면 춘곡동(義州郡 古館面 春谷洞)에서 일본경찰 경부(警部) 후꾸찌(福地)와 한국인 순사 장형호(張瀅浩)를 만나 격투하다가 동지 이지중(李芝仲)과 함께 순국했다. |
백인수(白麟洙) | 호는 갑운(甲雲), 학문이 뒤어났고 효성이 지극하여 용인에 있는 세조 비 평택임씨 묘에 당시의 세도가가 투장하여 수천 자손이 10여년간 소송을 하였으나 파지 못하였는데, 6월에 엄우가 내릴 때 몇몇 장정을 인솔 발굴하고 용인현에 자수하니 경기감사가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흥덕에 3년간 안치시켰다. 그 후 1905년 10월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여 목을 끊어 자결하려 했으나 옆 사람의 구원을 받아 고향에 와서 두문불출하다가 1910년 합방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재차 목을 끊고 자결하였다. |
백낙준(白樂濬) | 1895 - ? 교육가 정치가. 호는 용재(庸齋), 평안북도 정주 출신. 1922년 미국 파크대학을 졸업하고 1925년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 해 미국 예일대학 대학원 수료와 동시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48년 미국 파크대학에서 신학박사, 1954년 미국 스프링필드 대학에서 인문학박사, 1958년 미국 디포대학에서 법학박사, 1965년 연세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 1938년 영국황가역사학회회원이 되었으며 1946년 연세대학교 총장에 취임하였다. 1948년 대한소년단 총재, 1949년 서울로터리클럽 회장을 거쳐 1950년 문교부장관에 취임하여 6 25동란 중의 교육문제 해결에 진력하였다. 1953년 서울시교육회장, 1956년 대한교육연합회장에 선임되었으며 4 19의거 이후 참의원에 당선 참의원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연세대학교 명예총장에 추대되고 연세대학교 재단이사를 역임하였으며, 그후 국사편찬위원, 한글학회 이사 등을 지냈다. 1969년 통일원 고문회의 의장을 거쳐, 고문으로 활약하고 1971년 도산기념사업회장, 전군신자화후원회장에 추대되었다. 1980년 국정자문위원이 되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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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 호암상 수상한 백남준씨 전인미답인 비디오아트의 길을 걸으면서 세계적 미술상(93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아 그 업적과 실력을 인정받았던 백남준씨가 국내의 권위있는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10월 뉴욕에 한국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개최한 복합문화제였던 나이맥스전시나 지난93년 자신이 25만달러를 내놓아 미국 휘트니비엔날레 한국유치에 공헌한 일도 그중 일부다. 당시까지 미국밖을 한번도 나간 일이 없는 휘트니 비엔날레의 한국유치는 뉴욕미술계에서도 화제를 끌며 백씨의 영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지난 84년 뉴욕, 파리, 베를린, 서울에 생중계된 우주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국내에 크게 소개된 백남준씨는 그후 국내활동폭을 넓혀 최근 미술계의 몇몇 굵직한 사안들의 막후에 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다.(조선일보 1995/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