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일(5월 11일. 서귀포-성판악) 안개 낀 700고지를 넘어 성판악으로
맑음
오늘도 천호각 모텔 안채에 초대받아 아침밥을 얻어먹는다. 시금치국에 두릅나물, 어제와 같이 이집 명물 간장게장 등 하나같이 정성이 깃들고 감칠맛 나는 아침상이다. 식후 알아서 원두커피까지 제공된다.
이 천호각 내외와의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국토종주 내내 "지금 어디쯤 가고있수꽈?" 같은 격려 문자메시지를 보내는가 하면, 작년 가을 제주올레길 걷기 중간에 찾아갔더니 무척이나 반가워하면서 직접 농사지은 감귤을 한 박스씩 택배로 보내주었다.
08:35. 숙소 현관문 밖에까지 손자 셋 데리고 나와 손을 흔들어 주는 가족을 뒤로하고 우리는 성판악으로 보무도 당당히 걷기 시작했다. 며칠째 면도를 안 해 밤송이 처럼 까칠해진 턱과 얼굴에 선크림을 잔뜩 찍어 발랐다. 배낭 뒤에는 노노3인방 페넌트까지 매달았다.
멀리 정상에 흰 구름을 이고 있는 한라산이 보인다. 내일이면 우리가 저곳 정상에 올라있을 거다.
날씨는 쾌청. 토평 4거리를 지나 11번 국도(516도로)로 접어든다. 자전거 전용도로가 나 있어서 차량 위험없이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길가에는 온갖 들꽃들이 피어있는 길이다. 길가 나무그늘에 앉아 어제 과일가게에서 몇 개 얻은 한라봉을 까먹는다. 한 개씩은 비상식으로 아껴뒀다가 나중에 먹기로 했는데 K는 짐을 줄여야 한다면서 앉은 자리에서 그냥 다 먹어버린다. 우리는 서로 각자의 짐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치약은 K가, 세숫비누는 C가, 나는 빨래비누를 넣었는데, K는 자꾸만 이 치약마저 짐되니 버리겠다고 해서 우릴 당황하게 했다.
휴식을 취할 때에는 잠시지만 신발을 벗고 발에 바람을 쐬는 게 좋다. 땀도 말리고 발바닥의 열을 식히는 게 물집 예방에 도움이 된다.
하례리 입구서 부터 아쉽게도 자전거 도로가 끝나버리고 갓길로 변한다. 차량에 신경 쓰면서 걷는데 우리 '화백산우회'로 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반가움이 넘처흐르는 목소리. 참, 그러고 보니 오늘이 화백산행 날이지. 지금 산에 오르는 길에 잠시 휴식하며 커피타임 이란다. 차례로 바꿔가면서 안부를 교환하며 발바닥 물집까지 걱정을 해준다.
선덕사라는 절 앞에서 아름다운 계곡을 만나 잠시 아래로 내려가 발을 담그고 휴식을 취했다. 발가락에 물집에 붙인 반창고도 갈아준다. 불쌍한 3인방의 발. 주인 잘못만나 고생 하는구나. 차가운 계곡물에 발을 담그니 발의 피로와 부기도 빠지고 다시 출발하는 발걸음 또한 한결 가벼워 졌다.
516도로는 한라산 중턱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로 우리는 점점 오르막을 올라야 했다. 해발 400m고지를 지나 구불구불 힘들게 오르는데 지나가는 승용차에서 '파이팅!'하고 외치는 여자 목소리. 고맙고 반가워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고개위에 정자가 하나 나온다. 정자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안개까지 몰고 와 땀을 식혀주더니 금새 몸이 오싹해 진다. 걷는 중간 중간에 격려의 전화가 걸려온다. C는 미국에 있는 아들 전화를 받는다. 노노3인방의 국토종주가 미국까지 소문났다구? K는 딸과 친구들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나에게는 후배 만보가 수시로 전화를 해 온다. 현재 진행상황을 알려주면 '노노3인방 카페'에 수시로 속보를 띄운다. 마치 방속국 생중계인양 전해주니 소식을 궁금해 하는 분들로 부터 대단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모양이다.
시간이 벌써 오후 1시가 넘었고 배가 고픈 시간이 이미 지났다. 식당이 있을 리 없고 해서 성판악을 7km 남긴 지점 오르막 길 잔디밭에 앉아 비상식으로 가져간 미숫가루를 타서 마셨다. 우리가 잠시라도 앉아서 휴식을 취할 때면 주위 나뭇가지에는 어느새 까마귀란 놈들이 몰려와서 기회를 노리고 있다. 우리가 자리를 뜨자마자 놈들이 내려앉는다. 그래봐야 과자 부스러기 하나 흘린 게 없으니 까마귀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 아마 낮에 점심을 늦게 먹을지 모르니 간식을 좀 사서 준비해 가자고 했다가 그냥 떠나다보니 지금 배꼽시계가 난리다.
말이 나온김에 재무담당 C의 책임감은 정말 대단하다. 어제 서귀포 월드컵경지장 사우나탕에서의 일이다. 냉탕, 온탕 옮겨가면서 몸을 푸는데 C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 탕을 옮겨갈 때마다 목욕대야를 소중히 끼고 다닌다. 대야에는 비닐봉지가 하나 들어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현금'이란다. 그렇지. 재무 담당이라 몸에 지닌 현찰을 옷장 속에 넣어 두기도 불안하고 카운터에 맡기기도 그래서 이런 방법을 쓰는 모양이었다. 그 꼼꼼함에 감탄하면서 믿음이 갔다. C여, 배꼽시계 걱정 말고 알뜰 살림 부탁해요. 그나저나 아휴~ 배고파!
오르막 도로가 점점 높아지면서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온다. 한라산국립공원 구역 내로 들어서서 부터는 갓길이 없어진다. 차량들은 씽씽 속력을 내고 달리는데, 우리는 죄측길로 차량과 마주보고 걸으면서 앞에 오는 차들을 피하느라 신경이 곤두섰다. 안개등을 켜고 줄지어 과속으로 우리 옆을 지나갈 때는 여차하면 길 옆으로 몸을 날릴 차비를 해야 했다. 이 길을 걷는 미친(?) 사람은 우리밖에 없으니 운전기사도 놀랄것이다.
해발 700m 고지를 지나고 잠시 후 성판악 표지판이 나타난다. 오후 3시. 수많은 관광버스들이 주차해 있고 수학여행온 학생들이랑 한라산 등반을 마치고 내려온 사람들로 붐볐다. 휴게소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해장국을 사 먹고 커피도 얻어마셨다.
이곳 성판악에서는 내일 한라산 등반을 시작할 계획인데 근처에는 숙소가 없다. 때문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숙소가 있는 제주시로 이동하여야만 했다.
숙소를 정하고 모레 토요일 완도 가는 배를 탈 제주 연안여객선터미널까지 1시간을 걸어가서 완도행 배편을 예약하고 왔다. 모레 걸어야 할 구간까지 오늘 미리 걸어둔 것이다. 숙소인 모텔에 돌아와서 카운터 여자에게 세탁기가 있으면 빨래를 좀 부탁한다고 했더니 고맙게도 선선히 받아준다.
▶오늘 걸은 거리 : 25km(7시간 30분)
▶코스 : 서귀포-5.16도로-성판악. 제주시-여객터미널
<식사>
아침 : 백반(천호각)
점심 : 해장국(성판악)
저녁 : 추어탕(제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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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화백)지친 몸으로 걸어서 연안여객선터미날엔 왜 갔나구요? 모레 걸어서 여객선터미날에 가야하니 미리 시간을 책크하자는 시몽의 철저한 준비지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06.05.11
(만보)그렇고말고요~ 대단이라는 단어는 시몽님을 위해 맹글어진 듯 합니다. 06.05.11 23:24
(장화백)요즘은 내가 하는 일들이 하나도 힘이 안듭니다. 왜냐구요? 3인방을 생각하면 힘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나로선 언감생심 상상도 못할 일들을 하고 계시니까요! 3인방은 아무래도 환상의 콤비인것 같습니다. 06.05.12 06:49
(나광식)3인방 펜들이 당일의 소식이 궁금하여 전화하면 행군에 방해가 될까봐 총무과로 현재 상황과 응원의 전화가 오고 있습니다. 대단한 3인방님들의 즐겁고 보람된 행군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화이팅!!! 06.05.12 08:45
(wanju42)어머나 비닐로 싼 돈 주머니 상상도 못했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가끔씩 조설모는 우릴 우끼신다니까요. 비상 상식으로 알아두어야 겠습니다. 7시간 30분 대단하십니다. 어제 우리 서울화백은 휴식 시간 포함 5시간 30분 했습니다. 신통하죠? 06.05.13 00:03
(신현식)위의 물집 잡혀 부르튼 발을 보니 가슴이 저려 옵니다. 스타킹은 신으셨는지 궁금하군요?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06.05.14 18:48
(조설모딸)아빠는 배안고파도 다른 분들은 배고프시죠.. 회계담당 아버지..간식 좀 넉넉히 챙겨서 드세요. 06.05.14 21:51
(조설모딸)돈가방 푸하하.. 제가 조심하라고는 했지만 그 정도로 까지 하실 줄은...하하.. 돈 지키시느라 목욕도 제대로 못 하시는 거 아니여요? 06.05.14 21:52
(벗꽃)대단하세요 06.06.25 17:08
*(참고) K의 ID는 캡화백(캡은 이름자 김문갑에서 따온 별명), C의 ID는 조설모(조관휘, 산에 가면 펄펄 날아서 마치 청설모 같다고 해서 붙여준 별명), 내 ID는 시몽(유난히 가을 타는 남자라고 해서 붙여준 별명..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