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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종묘 추향 대제를 다음과 같이 봉행하오니,
인근 종친들께 널리 홍보하시어 참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 일시 : 2015년 11월 7일(토) 10:00 ~ 16:00
- 영녕전 : 10:30 ~ 12:00
- 정 전 및 공신당 : 13:00 ~ 16:00
나. 장 소 : 종묘 (서울 종로구 종로 157 )
다. 복 장 : 정장( 단정한 차림)
* 종친회 회장과 총무가 2015 종묘추향대제에 종묘정전 공신당 헌관으로 위촉을 받고
아래와 같이 습의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관심있는 종친께서는 가족들과 함께 종묘대제 봉행과 문경공 경암 허조 선조 모신 공신당 제향에도 참반하여 주시기를 권장합니다.
2015.11. 2
하양허씨 문경공파 종친회장 허 우 열
-------공신당에 모셔진분
태조 - 조준, 이화, 남재, 이제, 이지란, 남은, 조인옥
정종 - 익안대군 이방의
태종 - 하륜, 조영무, 정탁, 이천우, 이래
세종 - 황희, 최윤덕, 허조, 신개, 이수,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문종 - 하연
세조 - 권람, 한확, 한명회
예종 - 박원형
성종 - 신숙주, 정창손, 홍응
중종 -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정광필
인종 - 홍언필, 김안국
명종 - 심연원, 이언적
선조 - 이준경, 이황, 이이
인조 - 이원익, 신흠,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능원대군 이보
효종 - 김상헌, 김집, 송시열, 인평대군 이준, 민정중, 민유중
현종 - 정태화, 김좌명, 김수항, 김만기
숙종 - 남구만, 박세채, 윤지완, 최석정, 김석주, 김만중
경종 - 이수, 민진후
영조 - 김창집, 최규서, 민진원, 조문명, 김재로
장조 - 이종성, 민백상
정조 - 김종수, 유언호, 김조순
순조 - 이시수, 김재찬, 김이교, 조득영, 남연군 이구, 조만영
문조 - 남공철, 김로, 조병구
헌종 - 이상황, 조인영
철종 - 이헌구, 익평군 이희, 김수근
고종 - 박규수, 신응조, 이돈우, 민영환
순종 -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조선 왕조는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 이념으로 삼았어요. 유교의 예법에 따르면 국가의 도읍지에는 반드시 세 곳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고 해요. 세 곳이란 왕이 머무는 궁궐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묘, 그리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을 말해요. 이에 따라 조선을 세울 때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곳이 바로 종묘였어요.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이에요. 조선 왕조의 유교적 전통인 왕실의 제례 문화를 보여 주는 문화유산이지요.
종묘는 건물의 위엄함으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장엄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동시에 갖춘 모습이지요. 정전과 영녕전을 중심으로 모든 건물들이 하나같이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 웅장하면서도 신성한 분위기가 느껴진답니다.
종묘도 세계 문화유산이지만, 종묘에서 치르는 제사인 종묘 제례와 제례악도 무형 유산으로 등록되었어요. 모두 우리가 보존하고 지켜 나가야 할 자랑스러운 유산이지요.
조선은 유교를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으로 삼았던 왕조였습니다. 유교는 조상 숭배와 예의, 교육에 그 뿌리를 두었지요.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영혼과 육체로 분리되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육체는 땅으로 돌아간다고 믿었답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의 영혼이 의지할 수 있도록 상징물을 만들어 보관했어요. 그 상징물을 신주라고 하지요. 우리 조상들의 생활 속에는 유교가 깊숙이 자리하고 있어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또 조상들은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머물 수 있는 곳(신주를 모시는 장소)과 육체가 머무는 장소를 마련해 두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유교에서 영혼이 머무는 곳이 사당이고 육체가 머무는 곳이 묘인데, 종묘는 왕과 왕비의 영혼을 모시는 특별한 사당이었지요.
여러분도 종묘라는 단어를 책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들어 본 적이 있지요? 특히 텔레비전 드라마의 사극 속에서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시고 훗날을 기약하소서!”라고 하는 말을 들어 보았을 거예요. 조선이 국가의 근본을 종묘와 사직에 두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대목이지요. 종묘는 바로 조선 왕조의 뿌리인 셈이랍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1394년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종묘를 짓기 시작했어요. 종묘는 1394년 10월 공사를 시작하여 다음 해 9월에 완성되었어요.
종묘에서 조상들의 신주를 모신 건물은 정전이에요. 오늘날의 정전은 신주를 모신 태실 19칸과 양쪽 2칸씩의 협실로 이루어져 있어요. 그러나 처음 지어졌을 때 정전은 총 7칸 건물에 불과했어요.
오늘날처럼 웅장한 규모는 아니지만 종묘 정전은 신성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지어졌어요. 죽은 조상의 영혼을 모시는 공간답게 화려한 색상과 장식을 최대한 억제하였답니다. 대신 엄숙함을 느낄 수 있도록 간결하면서도 장엄하게 완성했지요. 당시 정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부인들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세월이 흐르자 정전에는 신주를 모실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서쪽에 영녕전을 새롭게 짓고, 정전도 점점 늘려 지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답니다.
종묘는 조선 왕조 500여 년 동안은 물론 지금까지도 제례의 전통이 이어지는 곳이에요. 종묘에서 역대 왕조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종묘 제례라고 해요. 조선 왕조의 제사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중요한 것이어서 ‘종묘대제’라고도 하지요. 조선 시대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섣달(12월), 이렇게 매년 다섯 차례 정기적으로 제사를 올렸어요. 그 외에도 나라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면 수시로 임시제를 올렸고, 햇곡식과 햇과일이 생산되는 시기에도 하늘에 제사를 올렸지요.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이면 종묘에서 제례 의식을 올린답니다.
종묘 제례에는 모든 행사의 순서에 맞게 노래와 악기 연주와 무용수가 추는 춤이 동반되었어요. 종묘 제례에서 연주되는 음악과 춤을 종묘 제례악이라고 해요. 종묘 제례악은 종묘 제례에 걸맞게 장엄한 것이 특징이에요.
우리나라 음계의 고유한 특성을 잘 살리고 있지요. 종묘 제례악 역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중요한 유산으로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등록되었답니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을 들어서서 역대 왕과 왕비가 다녔다는 거칠고 울퉁불퉁한 돌길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면 종묘의 상징인 정전 입구에 이르게 됩니다. 남문을 통과하여 정전에 이르면 웅장한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되지요.
가로 109m, 세로 69m의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정전은 위풍당당함을 자랑하는 건물이에요. 가로 길이가 101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 건물이랍니다. 정전 건물 앞에는 크기와 모양이 다른 얇은 돌을 쌓아 만든 단이 있는데, 이 단을 ‘월대’라고 해요. 정전의 위용을 드러내고 종묘 제례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만든 것으로 아래쪽의 하월대와 위쪽 상월대의 2단으로 되어 있어요.
정전의 마당인 월대를 구성하고 있는 돌은 매우 거칠고 지면도 평탄하지 않습니다. 바닥에 거친 돌을 사용한 것은 경박스럽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고, 지면이 평탄하지 않고 경사를 이룬 것은 비가 많이 내려도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것이랍니다. 선조들의 지혜를 알 수 있는 건축술이지요.
그리고 하월대 가운데에는 검은색 기와와 벽돌로 만든 신로가 놓여 있습니다. 신로는 죽은 왕과 왕비의 혼령만 다닐 수 있는 길로 왕도 다닐 수 없었던 곳이에요. 신로가 끝나는 지점에 상월대가 있고, 그 위에 정전이 세워져 있습니다.
정전에는 19칸의 태실에 모두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어요.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를 비롯하여 왕 19명과 왕비 30명의 신주가 모셔져 있지요. 조선 왕조의 왕은 모두 27명이지만 공덕이 높은 19명의 왕과 그의 왕비들만 정전에 모셔져 있답니다.
정전은 옆으로 길게 펼쳐진 1층짜리 건축물입니다. 검은색 지붕과 붉은색 기둥이 늘어선 모습은 전체적으로 엄숙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소박하고 간결하게 꾸며져 있습니다. 무심코 바라보면 평범해 보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살펴보면 어떤 건축물보다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정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화려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궁궐이나 유명한 옛 건축물에는 어김없이 장식된 화려한 단청은 고사하고 흔한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장식이라고는 동서쪽 지붕에 있는 악귀를 막아 주는 잡상이 전부입니다. 정전은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였기 때문에 이렇게 장식 없이 간결하게 만든 것이지요.
정전을 받치고 있는 20개의 기둥을 자세히 보면 모양이 모두 같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정전을 한 번에 지은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늘려 짓는 과정에서 모양이 달라지게 되었고, 또 건물의 안정감과 시각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모양을 다르게 만들었다고 해요.
정전은 겉으로 보면 20개의 기둥과 19칸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내부는 모두 트여 있어요. 그리고 신주를 모시는 태실 위에는 유일하게 화려한 색의 문양이 장식되어 있지요. 아쉽게도 정전 내부는 직접 볼 수 없게 되어 있어요.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어요. 향대청에 있는 제2 전시관에 정전의 신주를 모신 태실 1칸을 그대로 재현해 놓아서 누구나 자유롭게 볼 수 있답니다.
정전으로 통하는 문은 3곳이 있는데, 각 문마다 용도가 달랐습니다. 남문은 신주의 주인공인 영혼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동문은 왕과 세자, 제례를 지내는 종친과 신하가 사용하였고, 서문은 제례 음악과 무용을 담당했던 악공들이 출입했지요.
남문 바로 옆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들의 신주를 모신 16칸짜리 공신당이 있습니다. 공신당에는 모두 83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이황과 이이같이 잘 알려진 학자들의 신주가 포함되어 있어요. 그리고 남문 서쪽에는 계절마다 다른 일곱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칠사당이 있어요. 동문 옆으로는 정전을 지키고 관리했던 사람들이 머물던 소박한 수복방이 있습니다.
정전이 처음 세워졌을 때는 7칸짜리 건물이었어요. 세종대왕 때에 이르러 신주를 모실 공간이 부족하게 되자 세종은 정전 바로 옆 서쪽에 영녕전을 짓도록 했답니다. 영녕전은 ‘왕가의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신주를 정전에서 옮겨 왔다는 뜻으로 ‘조묘’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총 16칸으로 이루어진 영녕전은 정전에 비해 규모도 작고 모셔진 신주도 34위로 적습니다. 하지만 검정 기와와 붉은 기둥으로 이루어졌고, 상월대와 하월대가 있는 등 정전과 비슷하게 보인답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지붕의 모습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정전은 지붕 전체가 일직선인데 비해 영녕전은 중앙 태실 부분이 한 단 높게 돌출되어 있지요.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에서 부모까지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4칸의 중앙 태실을 중심으로 동서로 각 6칸씩 마련된 영녕전은 정전에 비해 아담하여 편안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에요. 영녕전에는 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왕이나 재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어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신주는 종묘에 모셔졌지만, 폐위된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정전은 물론이고 영녕전에도 신주가 없답니다. 유교에서 중시했던 조상 공경을 실천하지 않았던 왕이기 때문이지요.
종묘는 정전과 영녕전을 제외하고 3곳의 건축물 지역과 인공 연못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정전 동북쪽에 있는 정사각형 건물인 전사청은 종묘 제례에 사용할 음식을 만들었던 곳입니다. 전사청 마당에는 음식을 만드는 데 사용했던 4개의 돌절구가 남아 있고, 전사청 밖에는 우물인 제정과 제례 음식을 검사하고 보관했던 찬막단과 희생대가 있어요.
정전 동남쪽에는 왕과 세자가 제례를 준비했던 재궁(어숙실)이 있습니다. 왕이 머물렀던 어재실, 세자를 위한 세자재실, 왕이 몸을 청결히 했던 어목욕청의 세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한 왕과 세자는 깨끗이 옷을 갖춰 입고 재궁 서협문과 정전 동문을 지나 제례 의식을 올렸습니다.
종묘 외대문 가까운 곳에는 향대청이란 건물이 있어요. 향대청은 향청과 집사청으로 구분되어 있지요. 향청은 제례 의식에 사용하는 향이나 축문, 예물을 보관했던 곳이고, 집사청은 제례 의식에 참가할 사람들이 머물렀던 곳입니다. 향대청에는 제례 의식에 사용되었던 각종 용품이 전시되어 있어요. 그리고 향대청 동남쪽에는 고려 31대 왕인 공민왕과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신당이 있어요. 향대청 남쪽에는 망묘루라는 운치가 넘치는 건물도 있어요. 망묘루는 제례 의식에 참가한 왕이 휴식을 취했던 곳으로 현재 자료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의 제례 의식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세운 조선 왕조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자마자 조상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신주를 보관하고 계절마다 제사를 올리는 제례 의식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도읍지의 중심에 종묘라는 공간을 건축하였습니다. 종묘 제례 의식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그 전통은 조선이 멸망하는 날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조선 왕조가 사라진 지 약 1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후손들에 의하여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토록 오랜 세월 동안 제례 의식을 이어 온 곳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돌아가신 조상의 영혼이 머물렀던 정전과 영녕전, 그리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제례 의식은 소중히 보존해야 할 우리의 전통 유산입니다.
서울 광화문 서쪽 사직동에는 조선 왕조의 상징적인 유적지 가운데 한 곳인 사직단이 있습니다. 사직단은 나라의 발전과 백성들의 편안한 삶,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입니다. 한자로 사직단을 풀이하면 사(社)는 땅의 신을, 직(稷)은 곡식의 신을, 단(壇)은 제사를 올리는 제단을 말합니다. 나라에 커다란 사건이나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 또는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가 일어났을 때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여러분이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자주 보았던 ‘종묘사직’이란 말에 나오는 사직이 바로 사직단입니다. 종묘사직은 곧 조선 왕조와 나라 그 자체를 의미했습니다.
사직단은 임진왜란 때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가 1720년 숙종 46년에 다시 세웠습니다. 지금은 입구에 세워진 문과 제단만 남아 있지만 과거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유적지였습니다. 사직단에서는 정기적으로 봄, 가을, 겨울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물론 나라에 좋은 일이 있거나 가뭄과 홍수 같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는 수시로 제사를 지냈지요.
조선은 태조부터 순종에 이르기까지 27대에 걸쳐 519년이란 긴 세월을 이어 온 왕조입니다. 종묘에는 조선 왕조를 이끌었던 왕과 왕비들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그런데 종묘에 있는 왕의 신주는 총 25위뿐입니다. 신주 2개가 빠져 있지요. 왕을 지냈으나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은 것은 왕으로서 문제가 많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왕들은 세상을 떠난 뒤 삼년상을 치른 다음에 묘호(임금이 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리어 붙인 이름)를 받았는데 두 명은 묘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두 왕은 종묘에 신주를 모시지 않은 것은 물론, 아직까지 ‘군’이란 칭호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두 주인공이 연산군과 광해군입니다.
제10대 왕 연산군은 폭력과 향락을 일삼던 왕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를 궁에서 내쫓고 죽였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후궁들을 죽이고,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등 포악했던 군주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결국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군’으로 강등되어 살다 죽었습니다.
제15대 왕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공을 많이 세워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세자 때부터 고질적인 당파 싸움의 폐해를 보고 자란 광해군은 이를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서인이 주도하는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물려주고 유배되었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외교력이 뛰어나고 많은 책을 냈으며 당쟁을 막으려고 노력했던 광해군을 새롭게 평가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종묘에 신주가 없는 왕으로 남아 있습니다.
종묘에는 고려 제31대 왕이었던 공민왕의 신당이 있습니다. 정전이나 영녕전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신당이지요. 이곳에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있고, 이성계가 탔다는 말 그림이 있습니다. 공민왕은 당시 고려인의 생활 속에 뿌리내린 몽골 족의 머리 형태와 복장을 과감히 폐지하고 고려의 전통을 회복하려고 노력한 왕입니다. 그리고 정치를 개혁하고 옛 영토를 회복하려고 부단히 노력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조선 왕조를 세운 이성계를 발탁한 인물도 공민왕입니다. 공민왕은 이성계를 중용하여 결국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를 탄생시키는 원인을 제공했지요. 훗날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자신을 중용한 공민왕에 대해 예의를 지키고 그의 자주 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종묘에 신당을 마련하였습니다.
종묘에는 공민왕 신당에 관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묘를 건축할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공민왕의 영정을 이곳에 떨어뜨렸다는 이야기지요.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 때문에 태조와 신하들이 의논하여 종묘에 공민왕 신당을 세웠다고 합니다. 공민왕의 개혁 정치와 자주성 확립, 영토 수복은 조선 왕조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종묘는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는 곳입니다. 하지만 가능하면 해설사 선생님을 따라 관람하는 것이 좋습니다. 녹음기를 이용한 안내 서비스가 없어 겉모습과 간단한 안내판에만 의존하기에는 아쉬움이 많은 유적지이기 때문입니다.
종묘에 들어가기에 앞서 종묘 공원에 자리한 하마비를 둘러본 뒤 종묘로 향하는 것이 좋습니다. 정문인 외대문을 통과한 뒤에는 정전으로 이어지는 신로를 따라 이동하지 말고 오른쪽의 공민왕 신당과 망묘루를 먼저 보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그러고는 향대청으로 발길을 옮겨 보세요. 향대청에서는 제례 의식에 관한 각종 비품과 태실 내부를 재현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재궁으로 가서 어목욕청과 어재실과 세자재실을 둘러보고 정전 쪽으로 이동하세요. 곧장 정전으로 가지 말고 전사청과 제정, 수복방과 찬막단과 희생대를 보는 것을 잊지 마세요.
정전에서는 상월대까지는 올라갈 수 없지만 동월랑 계단까지는 올라갈 수 있어요. 동월랑 계단 위에 올라 정전을 받치고 있는 20개의 기둥과 19개 태실을 감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곳은 정전을 감상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므로 놓치면 후회하게 됩니다.
정전을 둘러본 뒤 서문을 통해 영녕전으로 이동하세요. 영녕전까지 본 뒤에는 정전과 영녕전의 악공청을 둘러본 뒤 천천히 걸어 종묘를 빠져나오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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