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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북 봉화군 봉화읍 봉화로 1001-28 (지번)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233 ❏배향인물: 유숭조(柳崇祖) 김중청(金中淸) 이종준(李宗準) 이홍준(李弘準) 정유일(鄭惟一) 홍준형(洪浚亨) 김성구(金聲久) 권두인(權斗寅) 권두경(權斗經) 이광정(李光庭) ❏창건연도: 2006년 ❏향 사 일: 3월 초정(初丁) |
경북 봉화는 영남의 북부 안동유교문화권(安東儒敎文化圈)에 속해있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인심 좋은 군(郡)으로 관내(管內)의 서원(書院) 16개소(個所)와 리사(里社) 6개소(個所)에 봉안(奉安)된 60위(位)의 유현(儒賢)을 배출한 유서(由緖) 깊은 고장이다.
이곳에 세워진 송록서원(松麓書院)은 봉화(奉化)에 이미 있었던 송천(松川), 반천서원(槃泉書院)과 백록이사(栢麓里社)의 삼원사(三院社)를 통합(統合)하여 향중(鄕中)의 사림(士林)들이 정성(精誠)을 다 하고 국가(國家), 지방자치단체(地方自治團體), 민간자본(民間資本) 등의 보조금(補助金)으로 서원(書院)이 훼철(毁撤)된지 140년만에 옛 백록이사(栢麓里社) 자리에 복설(復設)한 서원(書院)이다. 돌이켜 보면 송천(松川)은 진일재 유숭조 선생(眞一齋 柳崇祖 先生), 반천(幋泉)은 구전(苟全) 김중청 선생(金中淸 先生), 백록(栢麓)은 용재 이종준(慵齋 李宗準), 눌재 이홍준(訥齋 李弘準), 문봉 정유일(文峯 鄭惟一), 매헌(梅軒) 홍준형(洪浚亨),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창설재(蒼雪齋) 권두경(權斗經),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의 여덟선생(先生)을 모신바 있었으니 오늘 복설(復設)한 이 서원(書院) 주벽(主壁)에 문목공(文穆公) 진일재(眞一齋) 유숭조(柳崇祖) 선생을 모시고 아홉 선생을 시대순(時代順)에 따라 동서(東西)로 나누어 동(東) 5위(位), 서(西) 4위(位)를 종향(從享)하여 봉안(奉安)하고 송록서원(松蔍書院)이라 이름하였다. 이들 10현(賢)은 향리(鄕里) 출신으로 그 행장(行狀)은 다음과 같다.
1)유숭조(柳崇祖, 1452~1512)
고려말에 음덕(蔭德)을 쌓아 오자일서(五子一婿) 모두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일세(一世)를 빛낸 완산백 휘습(完山伯 諱濕)과 비위 삼한 국대부인 전주최씨(三韓 國大夫人 全州崔氏)는 선생(先生)의 후손이다.
선생(先生)은 전생서령(典牲署令)이며 예조참판(禮曹參判) 증직(贈職)된 휘지성(諱之盛과) 안동권씨(安東權氏)(계림군 구(玽)의 후예인 득지(得志)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1472년(성종3년) 21세 진사(進士)
1480년(성종 11년) 29세 성균관(成均館)에 유학
1489년(성종 20년) 38세 관시(館試)에 1등(等)으로 뽑힘
예문관 검열겸 춘추관 기사관(藝文館 檢閱兼春秋館 記事官)이 되고 성균관사(成均館事)를 겸임하다.
1490년(성종21년) 39세 사유(師儒)로 선발
1493년(성종24년) 42세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1503년(연산 9년) 52세 경기도 여주(원주)에 부처(附處)
1505년(연산11년) 54세 경옥(京獄)에 갇혔다가 다시 여주로 유배(流配)
1506년(중종 원년) 55세 경연(經筵)에 입시
1507년(중종 2년) 56세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에 제수(除授)
1511년(중종 6년) 60세 문묘(文廟)에 배알(拜謁) 후 명륜당(明倫堂)에서 강(講)함
학전(學田) 백결하사(百結下賜)
저서 대학강목잠(大學綱目箴)과 성리연원촬요(性理淵源撮要)를 국왕께 바치다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자급(自給)을 높이고 당표리(唐表裏) 한 벌과 금대(金帶) 하나를 하사(下賜)
11월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에 배명(拜命)되었으나 외직(外職)의 부당함을 계(啓)한 삼공(三公)들의 말을 들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바꾸다
1512년(중종7년) 61세 고종(考終)
국왕은 관곽(棺槨)과 부의(賻儀)를 내리다
문사들이 조문하여 경학노사(經學老師)께서 돌아가시니 유가(儒家)의 횡액(橫厄)이라 하였으며 성균관 유생(儒生)들은 자신의 친속(親屬)인양 7일간이나 소복(素服)을 입고 조문하다
1822년(순조22년) 위판(位版)을 전주(全州) 용강서원(龍岡書院)에 봉안(奉安)
1823년(순조23년) 위판(位版)을 안동부(安東府 내성현(지금의 봉화읍) 송천서원(松川書院)에 봉안(奉安)
1851년(철종 2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의금부사(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経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예문관(弘文館大提學藝文館)
대제학지춘추관 성균관실록사(大提學知春秋館 成均館實錄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 都摠管)에 증직(贈職)
1854년(철종 5년) 유범휴(柳範休), 유정문(柳鼎文), 유치명(柳致明)의 상소로 문목(文穆)이란 시호(諡號) 내림
1855년(철종 6년) 부조묘(不祧廟)를 시행토록 윤허(允許)
1862년(철종 13년)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지경연사(崇政大夫 議政府 左讚成 兼 判義禁府事 知經筵事) 총문관 및 예물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大提學知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으로 증직(贈職)
1883년(고종 20년) 문묘 배향(文廟 配享)을 상소(上疏)하여 청(淸)했으나 후일(後日) 기다리라 하다
조선 성종때의 학자, 자는 종효(宗孝), 호는 진일재(眞一齋),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전주(全州), 14889년(성종20년) 문과에 급제, 한림(翰林)ㆍ삼사(三司)를 거쳐 중종 때 대사성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일찍이 연산군 난정(亂政)때 장령(掌令)으로서 10여 조의 소문(䟽文)을 올려 직간(直諫)했으며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에 원주(原州) 장배(杖配)되었다가 중종반정 후에 특히 판결사(判決事)로 뽑혔고,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등을 지내면서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역서(易書)ㆍ예기(禮記)ㆍ천문ㆍ역상(曆象) 등을 모두 통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었으며, 「칠서언해(七書諺解)」를 지었는데 이는 경서(經書)의 언해로는 처음의 것이었다.
저서 진일재집(眞一齋集)이 있다.
2)김중청(金中淸, 1567(명종22)~1629(인조7))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ㆍ구전(苟全), 아버지는 절충첨지중추부사(折衝僉知中樞府事) 몽호(夢虎)이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13년 전적, 예조좌랑, 정랑을 역임하고 이듬해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15년에 문학(文學)이 되었으며, 정언(正言)으로 폐모론을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大北派)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자 파면되었다.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에 이어 1621년 승정원승지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영남을 순행하였다. 이후 산직(散職)에 머물렀으며 인조반정 후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봉화의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3)이종준(李宗準, ?~1499(연산군 5)
조선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중균(仲鈞), 호는 용재(慵齋)·용헌(慵軒)·부휴자(浮休子)·상우당(尙友堂)·태정일민(太庭逸民)·장육거사(藏六居士). 안동 출신. 대사헌 승직(繩直)의 손자이며, 홍준(弘準)의 형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1485년(성종 16) 별시문과에 1등 3인으로 급제하였고, 의성현령으로 있으면서 〈경상도지도〉를 만들었다. 1493년에 사헌부지평이 되었으며,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풍류로 명성이 있어 일본호송관 또는 북평사(北評事) 등의 직책에 임명되었고, 의정부사인에 이르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몰려서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가는 도중에 단천군 마곡역을 지나다가 송나라 이사중(李師中)이 바른말 하다 귀양가는 당개(唐介)를 송별하면서 지은 시 한 수를 써놓고 갔는데, 함경도관찰사 이승건(李承健)이 이는 나라를 비방하고 왕을 기롱(譏弄)한 것이라고 조정에 고하였다. 마침내 연산군은 그가 원망하는 뜻을 가졌다 하여 서울로 압송, 국문 도중 죽었다. 홍귀달(洪貴達)이 그를 구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안동의 경광서원(鏡光書院)·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유고가 있다. 시·서·화에 능하였고, 그림은 매(梅)·죽(竹)을 잘 그렸다고 하나 전하는 유작은 없다. 현재 장식화풍으로 그려진 송학도(松鶴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1점이 그의 전칭작품으로 전하고 있다.
4)이홍준(李弘準)
호는 눌재(訥齋)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용제(慵齋) 이종준(李宗準)의 아우로 형제(兄弟)간이다.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일세(一世)에 빛났다. 천성향약(川城鄕約)을 만들어 효제(孝悌)와 돈목(敦睦)으로 인도하여 많은 문학지사(文學之士)를 배출하다.
5)정유일(鄭惟一, 1533(중종 28)~1576(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중(子中), 호는 문봉(文峰). 본관은 동래(東萊), 이황(李滉)의 문인이였다. 1558년(명중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영천군수(榮川郡守)‧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71년 사인(舍人)으로 춘추관편수관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대사간, 승지,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주자학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주장,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중심으로 이황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따랐다. 《한중필록(閑中筆錄)》 《관동록(關東錄)》 《송조명현록(宋朝名賢錄)》 등을 저술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밖의 저서에 《문봉집》 등이 있다. 안동(安東)의 백록리사(栢麓里祠)에 제향되었다.
6)홍준형(洪俊亨, 1606(선조 39)~1666(현종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언겸(彦謙), 호는 매헌(梅軒), 아버지는 적(勣)이며 어머니는 기계유씨(杞溪兪氏)로 대기(大祺)의 딸이다. 작은 아버지인 진사 사려(思勵)에게 입양되었다. 1651년(효종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학행으로 천거되어 1658년 선릉참봉(宣陵參奉)이 되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섭렵하였으며 역학(易學), 의약학(醫藥學)에 조예가 깊었다. 백록리사(栢麓里社)에 제향되었다.
7)김성구(金聲久, 1641(인조19)~1707(숙종 33))
조선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해촌(海村), 봉화출신, 아버지는 용양위 부호군 추길(秋吉)이다. 1662년(현종3) 사마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전적, 무안현감, 직강, 지평, 수찬, 정언 등을 지냈다. 수찬 재직시 국가 재정에 관하여 각사(各司)의 비용과 내탕비(內帑費)를 줄여 진휼비에 보충하는 일과 경사(經史)를 열심히 강론하여 치도(治道)를 구하는 일 등 수천언의 소를 올렸고 정언재직시에는 당시 형조판서 남구만(南九萬)이 진휼비를 탕감했다고 고발하였다. 1679년(숙종 5) 장령재직시 남인이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지면서 논핵(論劾)되어 제주도 정의((旌義) 등의 벽지로 쫓겨났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자 복관되어 대사성·집의·헌납·좌승지·강원도관찰사·병조참지 등을 거쳐 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뒤 갑술환국으로 노론이 득세하자 향촌에 물러나서 서사(書史)를 즐기다가 일생을 마쳤다. 그는 관직생활에 있어서 공사를 분명히 하였다. 봉화의 백록사(柏麓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팔오헌집이 있다.
8)권두인(權斗寅, 1643(인조21)~1719(숙종45))
조선시대 학자, 자는 춘경(春卿), 호는 하당(荷塘), 본관은 안동(安東) 연이은 부모와 조부의 상으로 인해 35세때 비로서 진사시(進士試)에)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 학행으로 효릉참봉(孝陵參奉)이 되었다. 충재(冲齋)의 5대손으로 매헌(梅軒) 홍준형(洪浚亨)에게 수업하고 공조좌랑 영춘현감(永春縣監)을 역임
9)권두경(權斗經, 1654(효종 5)~1728(영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장(天章), 호는 창설재(蒼雪齋). 충정공(忠定公) 발(橃)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석충(碩忠)이며, 아버지는 유(濡)이고, 어머니는 예안김씨(禮安金氏)이며, 처는 김시온(金是榲)의 딸이다.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으로 이재(李栽) 등과 교유하였다. 1679년(숙종 5)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89년 문학으로 천거되고, 169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태릉참봉(泰陵參奉)·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직장(直長)·종부시주부를 거쳐, 형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700년 봄 정랑(正郞)에 승진되었으나 곧 이어 영산현감(靈山縣監)으로 부임하여 풍속을 크게 교화시켰다. 1710년 문과에 급제, 성균관직강·전라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그뒤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흰 무지개가 해를 관통하는 이변이 있자, 사직 상소를 올려 시정(時政)의 잘못에 대해서 논하였다. 1717년 영남에서 1만여인의 유생들이 상소를 올릴 때 그 상소문을 기초하였다. 1721년 경종이 즉위하자 고산찰방(高山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뒤 귀향하였다. 1723년(경종 3)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뒤 수찬이 되어 시정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문장이 뛰어났는데, 특히 시에 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산천의 형세, 인물의 출처(出處), 세대의 변혁, 동방군신(東方君臣)의 현부(賢否), 정치의 득실(得失) 등에도 예리한 안목이 있었다.
저서로는 창설집이 있고, 편저로는 퇴계선생언행록(退溪先生言行錄)과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이 있다.
10) 이광정(李光庭) 1674년~1756년)
경상북도 봉화군 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원주이며 관직은 동지중추부사로 조선후기의 문신이다.
[가계]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할아버지는 이시암(李時馣)이고, 아버지는 이후룡(李後龍), 어머니는 공주이씨로 이시철(李時哲)의 딸이다. 양부는 이선룡(李先龍)이다.
[활동사항]
이광정은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관찰사 재임 중 지방에 학문과 교화를 일으키고자 많은 선비를 뽑을 때 안동부훈도장(安東府訓都長)이 되었다. 하루는 안동부사 이보혁(李普爀)이 강론하는 자리에 왔었는데 이광정은 장횡거(張橫渠)의 「서명(西銘)」에 나오는 동족, 형제의 의리를 세심하게 설명하면서 이보혁을 매우 신랄하게 풍자하였다. 자리에 앉아 있던 문도들은 두려워 어쩔 줄 모르고 이보혁 또한 얼굴색이 변하였지만 이날 강론을 들은 자들은 모두 이광정을 칭찬하였다.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 조현명이 문학(文學)과 행의(行誼)가 산남(山南)의 제일이라고 천거하였다. 뒤에 김재로(金在魯)가 영백(嶺伯)으로서 조정에 들어가 또 천거하여 1735년(영조 11)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런데 이광정은 부임하자마자 역대 임명 기록부를 열람하다가 화담 서경덕(徐敬德)과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 그 자리를 사양한 사실을 알고는 “두 선생은 높은 학문으로도 부임하지 않았네/ 높은 곳에 있는 외로운 강직함은 내 얼굴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내일 아침에 자리를 걸어놓고 동남쪽으로 내려가리라/ 강과 바다의 가을바람은 소매에 가득하니 춥기만 하다.”라는 절구 1수를 읊은 후에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1741년 갑오년 이후 새로 창설한 서원의 철폐 명령이 내려진 데 반대하여 의소(擬疏)를 지었다. 이듬해부터는 류운룡(柳雲龍)의 『겸암집(謙庵集)』, 이덕홍(李德弘)의 『간재집(艮齋集)』, 이후경(李厚慶)의 『외재집(畏齋集)』, 조임도(趙任道)의 『간송집(澗松集)』, 조종도(趙宗道)의 『대소헌일고(大笑軒逸稿)』, 권벌(權橃)의 『충재집(冲齋集)』 등을 교감하고 서문을 지었다.
1753년 당시 재상이던 조영국(趙榮國)은 이광정은 문장과 학술에 중망이 있었음에도 여러 차례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교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6품직 하사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1756년 봄 존호(尊號)를 올린 일로 다시 가선대부계(嘉善大夫)의 품계에 가자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같은 해 4월 봉화현(奉化縣) 법전(法田) 어은곡(漁隱谷)의 계사(溪舍)에서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이광정은 어려서부터 『좌전(左傳)』, 『국어(國語)』, 『한서(漢書)』, 『사기(史記)』, 굴원(屈原) 등의 문장 읽기를 좋아했는데, 나이가 든 후에는 “어릴 때 망령되게도 문장에 뜻을 두어서 잡서들을 열심히 찾아보았지만, 어디에 이르렀는지 후회만 된다.”라고 탄식하고는 마침내 찬술하는 것을 그만두고 홀로 거처하면서 육경(六經)만을 강마하였다.
『소학(小學)』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학문이란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을 미루어서 집안과 나라에 미치는 것일 뿐이다. 『소학』 한 책이 곧 그 근원이니, 마음을 방자하게 하여 성명(性命)을 뽐내면서 말하는 것을 후학들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눌은집(訥隱集)』이 있고, 그 밖에 『칠공자전(七公子傳)』이 따로 전한다. 문집은 이광정의 손자 이종훈(李宗勛)과 문인들이 가장초고(家藏草稿)를 수집·편집하고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과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교정을 거친 후 후손 이사훈(李師勛) 등이 부록을 첨가하여 1808년(순조 8) 마침내 간행하였다.
[묘소]
묘소는 봉화현 대조산(大鳥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행장은 문인 이상정이, 묘지명은 간옹(艮翁) 이헌경(李獻慶)이, 묘갈명은 채제공이 찬술하였다. 내성현(奈城縣, 봉화군 봉화읍 일대에 있던 옛 고을)에 있는 백록리사(栢鹿里社)에 배향되었다.
눌은(訥隱) 광정(李光庭) 선생 행장(行狀)
눌옹 이공 행장〔訥翁李公行狀〕 대산 이상정 찬
공의 휘는 광정(光庭), 자는 천상(天祥)이며, 성은 이씨(李氏)로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중세에 봉례랑(奉禮郞) 벼슬을 지낸 거(琚)라는 분이 아들 여섯을 낳아, 이때부터 집안이 번성하여 커졌고 대대로 유학을 가업으로 삼았다. 이중 네 번째 지파(枝派)로서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부(赴)라는 분이 공의 8대조이다. 증조부 휘 택(澤)은 생원으로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는데, 문학과 절행(節行)이 있었다. 이분이 광해조(光海朝)에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남쪽으로 내려와 안동(安東) 내성현(乃城縣)에 터를 잡고 살았다. 조부 휘 시암(時馣)은 문과에 급제하고 도사(都事)를 지냈으며 예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문장으로 세상에 명망이 있었고 호가 만문(晩聞)이다. 부친 휘 선룡(先龍)은 통덕랑으로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모친 진성 이씨(眞城李氏)는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는데, 사인(士人) 이시철(李時哲)의 따님으로 퇴계 선생 형님의 후손이다. 생부(生父) 휘 후룡(後龍)은 통덕랑이다. 생모(生母) 공주 이씨(公州李氏)는 통덕랑 이유형(李惟馨)의 따님이요, 현감 이정견(李庭堅)의 증손녀이다. 숭릉(崇陵) 갑인년(1674, 현종15) 6월 24일에 공을 낳았는데, 백부 참판공이 데려와 아들로 삼았다.
공은 나면서부터 자질이 남달라서 아이들과 장난하며 놀지 않고, 부모를 곁에서 모시며 대답을 반드시 공손하게 하니, 참판공이 기특하게 여기면서 “훗날 반드시 성덕군자(成德君子)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부를 시작하자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1년 만에 《증사(曾史)》를 읽었고 9세에는 《논어》를 외었다. 통덕공은 성품이 엄하여 자애롭다고 하여 가르침을 느슨하게 하는 것이 없었고, 조금이라도 깨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바로 회초리를 들었다. 공도 어버이의 뜻을 잘 알아 온종일 옛 경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으므로, 성동(成童)이 되기도 전에 명성이 자자하였다. 선생과 어른들이 공이 지은 글을 보고 모두 칭찬하며 감탄하기를 “이 글은 선진(先秦)의 문투이다.” 하였다. 어려서부터 《춘추좌씨전》과 《국어(國語)》와 장주(莊周), 사마천, 굴원, 송옥(宋玉)의 글을 매우 좋아하고, 세속의 글은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과거를 위한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과거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였으나 근심하지 않았다.
기묘년(1699, 숙종25) 가을에 진사에 입격하였다.
임오년(1702)에는 생모의 상을 당하였고, 을유년(1705)년에는 모친 정부인의 상을 당하였다. 상기(喪期)가 끝나고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자 하니, 참판공 형제가 공을 권면하기를 “가세(家勢)가 영락하여 떨치지 못하는데, 네가 어찌 문호(門戶)를 일으킬 계책에 힘쓰지 않는단 말이냐. 50세가 되어도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다면 그때는 네가 좋아하는 바를 좇아도 좋다.” 하였다.
계사년(1713) 겨울에 생부 통덕공이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 봄에는 부친 참판공이 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연달아 큰일을 당하고 나서는 더욱 세상에 나아갈 뜻이 없었으나, 어버이가 남긴 훈계 때문에 감히 과거 공부를 그만두지 못하였다. 기해년(1719)과 임인년(1722, 경종2)에 연달아 향시 합격자의 명단에 올랐으나, 번번이 성시(省試 복시(覆試))에는 합격하지 못하였고, 50세가 되자 마침내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갑인년(1734, 영조10)에 상이 여러 도(道)에 효렴(孝廉)을 천거하라고 명하니, 경상도 관찰사가 명을 받들어 공을 천거하였다.
을묘년(1735)에 풍원군(豐原君) 조현명(趙顯命)이 입대(入對)한 자리에서 공을 크게 칭찬하여 문학과 행의가 산남(山南)에서 으뜸이라고 하니, 상이 “영남은 우리나라의 추로의 고장〔鄒魯之鄕〕이니, 영남에서 으뜸가는 사람이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으뜸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다가 상국(相國) 김재로(金在魯)가 경상도 관찰사로 있다가 조정으로 돌아왔을 때, 영남의 인물 네 명을 아뢰면서 그중에 공을 맨 위에 올리고, “글에 능하면서도 과거를 접고 청렴하게 스스로를 지켜, 가르침은 서당에 남았고 행실은 향리에서 신망을 얻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지난해 효렴의 선비로 천거한 일을 아뢰니, 상이 “효렴으로 단천(單薦)이 되었으니 바로 벼슬에 임명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 마침내 후릉 참봉(厚陵參奉)을 제수하였다. 부임한 후 곧바로 전임자들의 서류를 열람하여,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이 이 직책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고 시 한 수를 읊기를 “두 어른의 높은 경지 오를 수 없으니, 백발 늙은이 외로운 직소에서 부끄러운 안색이라. 내일 아침 자리 걷고 동남으로 떠나리니, 강해의 가을바람 소매 가득 차가우리.〔二老高標不可攀 白頭孤直愧生顔 明朝挂席東南去 江海秋風滿袖寒〕” 하였다. 마침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병진년(1736)에 장릉 참봉(莊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공이 약관의 나이였을 때, 꿈속에서 단종(端宗)을 모시고 성삼문(成三問), 하위지(河緯地) 등 신하들과 함께 노닐었는데, 꿈에서 깨어나서도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하였다. 그 뒤 오래지 않아 단종이 복위되면서 경과(慶科)를 베풀었고, 공이 사마시에 입격하였으니, 마치 벌어진 일이 꿈과 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이에 마침내 장릉의 직소에 부임하였다.
무오년(1738, 영조14)에 규례대로 혜릉 봉사(惠陵奉事)로 승진하여, 숙배(肅拜)하러 가는 길에 단양의 구담(龜潭)을 지나면서 정징군(丁徵君 정시한(丁時翰))이 살았던 옛집을 바라보며 시를 읊기를 “7월 가을에 물이 불어, 구담에 푸른 파도 일어나네. 임을 상징하는 유적이 있어, 감히 노 저어 지나가지 못하네.〔七月秋水盛 龜潭生綠波 徵君遺躅在 不敢掉舟過〕” 하였다. 그길로 단양의 산수를 두루 유람하고 돌아왔다.
임술년(1742)에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고, 정묘년(1747)에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계유년(1753) 겨울에 이조 판서 조영국(趙榮國)이 아뢰기를 “이광정(李光庭)은 문장과 학술로 큰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전후로 여러 번 나라에서 불러도 모두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산림에서 글을 읽고 생도를 가르치는데, 지금 나이가 70이 넘었습니다. 자격(資格)에 따르지 말고 6품직으로 올려 임명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공(趙公)이 언자(言者)들의 주장으로 이조 판서 자리를 떠났다.
이듬해(1754) 봄에 익위사 익위에 제수되었다. 여름에 네 전(殿)의 존호(尊號)를 올린 일로 기로(耆老)들에게 은전을 베풀어 통정대부로 자급이 올랐다. 이해 겨울에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을해년(1755) 가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옮겨 제수되었다. 공은 익위사의 청직(淸職)을 분수에 넘치는 은혜로 여겼는데, 기로의 직에 제수되자 사람들에게 “내가 이제야 내 자리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병자년(1756, 영조32) 봄에 또 존호를 올린 일로 추은(推恩)을 입어 가선대부로 자급이 오르고,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3대에 영화(榮華)가 미쳤다. 여러 노인과 함께 태백산에 들어가서 한 달 남짓 머물렀다. 4월 1일 무진일에 어은(漁隱)의 집에서 고종(考終)하였으니 수(壽)가 83세였다. 9월 기미일에 봉화현(奉化縣) 대조산(大鳥山) 태향(兌向)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공은 타고난 성격이 순박하고 인품이 온화하였으며, 몸에 비루하고 패려한 기운을 지니지 않았고 마음에 남을 해치거나 이기려는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진솔하게 성의를 다하여 털끝만큼의 교만과 거짓도 없었다. 평소의 언행이 공손하여 마치 말을 잘 못하는 듯하였으나, 남을 대할 때는 덕스러운 기운이 흘러 사람들이 공을 좋아하였다. 이치와 의리가 갈리는 일에 대해서는 의연히 스스로의 지조를 지켜 남이 빼앗지 못하는 바가 있었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이 효성스러워, 집이 가난하여 봉양을 잘 할 수 없어 항상 근심이 얼굴에 드러났지만, 친구와 고을 수령의 도움을 받아 맛난 음식과 따뜻한 옷을 항상 챙겨 드렸다.
금씨(琴氏) 집안에 출가한 고모가 봉성(鳳城) 북지(北枝)에 살고 있어서 공이 늘 왕래하였는데, 개 한 마리가 공을 따라다녔다. 하루는 어버이에게 밥 지어 드릴 양식이 떨어지고 공은 병이 났는데, 심부름 보낼 노비(奴婢)도 없었다. 그래서 개에게 “네가 내 편지를 북지에 가져다 줄 수 있겠느냐?”라고 하니, 개가 꼬리를 흔들며 앞으로 나오는 것이 마치 말을 알아듣는 듯하였다. 마침내 공이 편지를 써서 개의 목에 걸어 주니 개가 바로 금씨의 집으로 달려갔고, 금씨가 개의 목에 걸린 편지를 보고 재빨리 양식을 보내어 급한 상황을 넘겼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공의 진실한 효성이 이처럼 동물도 감동시켰다.”라고 말하였다.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옷을 벗지도 않다가, 병이 나은 다음에야 평소의 생활로 돌아왔다. 매년 부모의 제삿날에는 온종일 침통해하였고, 살아 계실 때 봉양을 지극히 못한 것과 돌아가신 후 제사를 지극히 하지 못하는 것을 평생의 괴로움으로 여겼다.
공은 남과 이야기할 때, 상대방이 알 수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하였으며, 자신이 아는 것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배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공부에 힘쓰도록 권면하였고, 농부를 보면 부지런히 밭 갈고 힘써 거두는 일을 말하였으며, 유람하는 선비를 만나면 산수의 빼어난 경치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남의 착한 일을 보면 칭찬하기를 마치 다하지 못하는 것처럼 하고, 남의 나쁜 짓에 대해 들으면 천연스럽게 마치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친척과 친구의 상(喪)을 당하면 늙고 병이 들었을 때에도 매번 소식(素食)을 하였는데, 때로는 며칠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자제들이 입맛을 돋우는 음식을 억지로 권하면 “나는 차마 먹지 못하겠다. 비록 먹어도 목에서 넘어가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사서(史書)를 읽다가 충신과 의사(義士)가 어려움을 만나 목숨을 바치는 대목에 이르면, 비탄(悲歎)을 억지로 참다가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였고, 효자와 열부(烈婦)의 아름다운 행실과 높은 절개를 들으면, 그때마다 감탄하여 마지않았으며, 어떤 때는 이런 이야기를 편지에 써서 권면하고 경계하기도 하였다.
공은 출세에 욕심이 없었다. 젊어서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어떤 문사(文士)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 문사가 경인년(1710, 숙종36)에 영남의 향시(鄕試)를 관장하게 되었다. 공이 이 소식을 듣고는 향시를 피하여 곧바로 경시(京試)에 나갔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문사가 어떤 이에게 “내가 영남으로 내려올 때, 인재를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 첫 번째로 이 아무개를 꼽았는데, 응시자 명단을 훑어보아도 그의 이름이 없으니, 어찌 이리도 박복한가.”라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젊었을 때 함부로 문장에 뜻을 두어 제가(諸家)의 잡서(雜書)에 몰두하느라, 육경의 글이 옷감과 곡식처럼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늙었으니 후회한들 어쩔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날카로움을 드러내지 않고 소박하고 우아하게 글을 쓰면서, 문장과 이치가 모두 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다른 사람이나 집안의 행장(行狀)과 지문(誌文)을 반드시 공에게 의지하게 되어 원근에서 달려와 청하여 시렁과 상자에 글이 넘칠 지경이었으나, 공이 결국 부탁을 들어주니 사람들이 모두 만족하였다.
공은 찬술을 한다고 자처하지 않았으며, 경서의 의리에 대해서는 선배들이 이미 정해 놓은 논지(論旨)를 신중하게 지켰다. 말세에는 학자들이 의리를 실제로 터득하는 데 힘쓰지 않고 단지 글 뜻을 변론함으로써 강학(講學)한다는 이름만을 취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그래서 일찍이 “학문이란 집에서 생활하고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데 있는 것이니, 여기서부터 집안과 나라에까지 미루어 가야 한다. 《소학》이 바로 그 근본이니, 마음이 급하여 단계를 건너뛰고 성명(性命)에 대해 고담준론하는 것은 몸을 다스리는 급선무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현령 권정웅(權正雄)이 처음 벼슬하여 동몽(童蒙)의 사장(師長)이 되었을 때, 공이 편지를 보내어 《소학》을 가르치라고 권하였으니, 이는 어린아이들로 하여금 뿌리를 북돋아 가지에 이르게 하고, 추구하는 방향에 잘못이 없기를 바란 것이었다. 만년에는 《역경(易經)》을 좋아하여, 《고역(古易)》을 베껴 쓰고 끊임없이 소리 내어 읽기를 때로는 한밤중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공이 탄식하기를 “젊어서는 독서의 재미를 몰랐다가 지금에야 그 맛을 알게 되었으니, 만일 앞으로 십수 년 동안 공부할 수 있다면 결코 지금처럼 형편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천성이 겸허하여 자신의 문장을 항상 스스로 모자라다고 여겼고, 반드시 남에게 잘못된 점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언젠가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량이 좁아서, 터득한 것이 조금이나마 있으면 그런대로 자족하여 남에게 더 배우기를 구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학문의 규모와 수준이 점점 좁아지고 낮아졌으니, 차면 이지러뜨리고 겸손하면 보태 주는 이치와 있으면서 없는 것같이 하고 찼으면서 빈 것같이 하는 가르침이야말로 학문하는 자가 경계하고 반성해야 할 점이다.”라고 하였다.
조공 현명(趙公顯命)이 경상도 관찰사로 있을 때, 선비를 선발하여 스승으로 세움으로써 온 도민(道民)을 권려하고자 하여, 예를 차려 공을 모셔서 본부(本府)의 도훈장(都訓長)으로 삼았다. 공이 제생(諸生)들을 모으고 성리학의 책들을 강의하자, 상당히 흥기되어 젖어들었다. 부사(府使) 이공(李公) 아무개도 강의하는 자리에 있었는데, 공이 제생들에게 〈서명(西銘)〉에 있는 ‘동포형제(同胞兄弟)’의 뜻을 진지하고 간곡하게 강의하니, 제생들이 숙연히 경청하였고 이공 또한 낯빛을 바꾸었다. 그때 흉년이 드니, 이공은 이 가르침을 잘 본받아서 백성을 구휼하였다. 장릉 참봉(莊陵參奉)이 되어 동쪽 땅으로 떠날 때, 이공이 공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남을 깨우치는 데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학하는 자리에 모시지 못하는 것이 정말 애석합니다.” 하였다.
영월(寧越)은 산골짜기 후미진 곳으로, 본시 학문의 전통이 없는 곳이었다. 공이 장릉(莊陵)에 머물게 되자 많은 선비들이 문하에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공이 각자의 재주에 따라 가르치면서 성의를 가지고 정성을 다하니 근처 여러 고을의 재주 있는 자들 중에 소문을 듣고 이르는 자가 매우 많았고, 몇 년이 지나자 나아갈 바를 아는 자도 몇 사람 있었다. 호서(湖西)의 학자 강주우(康柱宇)가 공의 직소를 방문하여 학문에 나아가는 순서를 묻고서, 또 “여러 선생의 말로는 태극(太極)의 테두리 안에 청(淸)과 탁(濁)이 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이 답하기를 “산남(山南)의 고루한 선비가 본시 학문이 없으니 어찌 태극의 오묘한 이치를 알겠습니까. 그러나 일찍이 태극 속에는 원래 어떤 사물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맑게 되고 탁하게 되는 이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괜찮겠지만, 곧바로 청과 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니, 강주우가 바로 승복하였다.
영월 부사 조명택(趙明澤)이 조용히 공에게 말하기를 “시골의 선비는 벼슬에 나아가기가 몹시 어려운데 공이 이미 벼슬을 시작하였으니, 한 고을의 수령이 되어 자손을 위한 계책을 세우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공께서 뜻이 있으면 우리가 마땅히 힘을 다하겠습니다.” 하였다. 공이 병이 심하고 나이가 다 되어 나아갈 뜻이 없다고 사양하니, 조명택이 감탄하며 “공은 지금 세상의 선비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음식과 의복과 거마(車馬)에도 절도를 지켰으며, 항상 말하기를 “음식을 많이 먹으면 정기(精氣)가 손상되고 고기를 많이 먹으면 위장이 손상된다.” 하였다. 여러 끼 죽도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고 사는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기도 하였으며 평생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걸치지 않았으니, 보통 사람이면 견딜 수 없을 만한 일이 이따금 있었지만 공은 태연하게 대처하였다. 천성으로 연민의 정이 많아, 비록 짐승이라도 죽는 소리를 들으면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한번은 장로(長老) 몇 사람과 함께 각화사(覺華寺)에서 머물렀는데, 그때 마침 큰 눈이 내렸다. 중이 “꿩이 막 산에서 내려와 집 모퉁이에 있습니다.”라고 하니, 소년이 가서 꿩을 잡았고 그것을 저녁 음식에 올리려 하였다. 공이 꿩을 앞에 놓고 쓰다듬다가 갑자기 창밖으로 날려 보내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공이 태연히 말하기를 “저 꿩도 생물인데 곤란한 지경을 틈타 요행으로 잡는 짓을 차마 할 수 없다.” 하였다.
공은 평소 자연 경치를 사랑하였다. 중년에 녹문(鹿門)의 산수가 마음에 들어 가족을 다 데리고 그곳에서 숨어 살고자 하였는데, 하당공(荷塘公 권두인(權斗寅)), 창설공(蒼雪公 권두경(權斗經)) 등이 극력 만류하는 바람에 떠날 수가 없었다. 나이가 60이 되니 세속에서 생활하는 일이 더욱 싫어져, 녹문정사(鹿門精舍)를 지어 두세 명의 학도와 함께 거처하면서 그곳에서 《주역》을 읽었다. 얼마 뒤 정사(精舍)가 불에 타 버리자, 집안을 이끌고 척주(陟州)로 들어가 이휴휴(李休休)가 옛날 살던 곳으로 갔으나, 가난하여 그곳에 정착할 수 없었다. 만년에 어은(漁隱)의 경치 좋은 곳에 터를 잡아 몇 칸의 집을 짓고, 날마다 시를 읊으며 즐겁게 지냈는데, 8년을 여기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 옛날의 도(道)가 행해지지 못하자 순후한 풍속이 점점 사라져, 세상에서는 바야흐로 악착스레 자신만을 내세워 풍속이 날로 야박해졌다. 그러나 공만은 지금 세상에 살면서 옛일을 생각하여, 우하(虞夏)의 시절을 그리워하고 은주(殷周)의 성대(盛代)를 꿈꾸었으며, 선진(先秦)과 양한(兩漢)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다. 드러내어 문장을 지으면, 호방하고 웅장하며 충만하고 강건하여 우뚝이 동방 대가의 수준이었다. 그러면서도 도덕과 인의를 지향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문사(文士)의 들뜨고 방만한 글은 완전히 배제하였다. 이 때문에 밖으로 드러난 의용(儀容)이 안색은 따뜻하고 몸은 편안하며 기상은 화순하고 정신은 맑았다. 번거롭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검소한 생활을 편하게 여겼으며, 작록(爵祿)을 가벼이 여기면서 한적하게 지내는 것을 좋아하였다. 자손에게는 근후하고 신중하며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의리를 좋아하라고 가르쳤고, 후학을 지도하는 데는 《소학》을 기본으로 삼았으며, 치도(治道)를 말할 때는 《주례(周禮)》를 법도로 삼았다. 상(象)을 보고 점을 치는 데에 이르러서는 오직 깊은 산속에 들어가 은거하지 못할까를 염려하였으니, 이것은 또 《주역》의 영허소식(盈虛消息)의 이치를 터득한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단지 여사(餘事)인 공의 문장만을 보고서 공의 평생을 다 말하고자 하니, 사람을 알아보는 소견이 천박하다 하겠다.
부인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사인(士人) 김한익(金漢翼)의 따님이고, 후취 봉화 금씨(奉化琴氏)는 사인 금덕화(琴德華)의 따님인데, 두 분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3남 2녀를 두었으니, 일찍 죽은 아들 지(持)와 사인 남응소(南應召)에게 출가한 딸은 전부인의 소생이고, 아들 확(擴)과 주(拄), 그리고 현령 권정웅(權正雄)에게 출가한 딸은 후부인의 소생이다.
지는 아들 종훈(宗勛)ㆍ숭훈(崇勛)ㆍ승훈(承勛)ㆍ응훈(應勛)을 두었는데 숭훈은 일찍 죽었고, 두 딸은 김정섭(金鼎燮)과 김시직(金始稷)에게 출가하였다. 확은 아들이 하나인데 아직 어리고, 딸은 박처원(朴處元)에게 출가하였다. 주는 아들 사훈(師勛)을 두었고, 두 딸은 장지증(張志曾)과 김충련(金忠鍊)에게 출가하였다. 권 현령(權縣令)은 아들 권사을(權思乙)이 있고 종훈은 아들이 둘 있으나 아직 어리다.
나는 향리의 후생(後生)으로, 다행히 한두 차례 문하에 가서 공의 모습을 우러러보았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을 빼앗기어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의 일이 변하고 세월이 빠르게 흘렀으니, 공의 높은 풍도를 앙모(仰慕)하여 따르고자 하여도 따를 도리가 없음을 한탄하게 된다. 이번에 공의 맏손자 종훈 씨와 문생(門生)들이 공의 유문을 교감하는 일을 맡기고, 또 유사(遺事) 한 책을 가지고 와서 공의 행장을 써 주기를 부탁하였다. 스스로 생각해 보면 보잘것없는 몸이 무엇 하나 잘하는 것이 없는데, 어찌 감히 말을 엮고 일을 순서 지어 공의 덕을 조금이라도 그려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탁이 더욱 간곡하여 끝까지 사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의 유집(遺集)을 교감하는 일을 마치고서 바로 공의 언행(言行) 가운데 크게 드러난 것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입언(立言)하려는 군자들이 상고할 수 있게 하였다. 삼가 행장을 쓴다.
訥翁李公行狀
公諱光庭。字天祥。姓李氏。原州人。中世有奉禮郞琚。生六子。寔繁以大。世以儒行業其家。第四派副司直赴。於公爲八世。曾祖諱澤。生員贈司僕正。有文學節行。光海朝。廢擧南下。卜居于安東之乃城縣。祖諱時馣。文科都事贈禮曹參議。以文章名世。號晩聞。考諱先龍。通德郞贈戶曹參判。妣眞城李氏。贈貞夫人。士人時哲之女。退溪先生之兄孫。生考諱後龍。通德郞。妣公州李氏。通德郞惟馨之女。縣監庭堅之曾孫。以崇陵甲寅六月二十四日生公。參判公取而子之。生有異質。不與羣兒嬉戲。侍親側唯諾必謹。參判公奇之曰。異日必爲成德君子也。及就學。聰悟過人。期歲讀曾史。九歲。誦論語。通德公性嚴不以慈愛弛敎。少有不通。輒施夏楚。公克體親意。終日不離墳籍。未成童。蔚然有聲譽。先生長者見其所著文。嘖嘖歎曰。此先秦口氣也。自少酷愛左國莊馬屈宋之文。不近世俗文字。尤不喜擧子業。以故屢躓於場屋而不恤也。己卯秋。中進士。壬午。丁生夫人憂。乙酉。遭貞夫人喪。旣服闋。欲廢擧。參判公兄弟勉之曰。家世流落不振。何不黽勉爲門戶計。五十而不成名。可從爾所好也。癸巳冬。通德公卒。明年春。參判公又下世。旣荐罹巨創。益無意需世。顧以遺戒不敢廢。己亥壬寅。連中解額。輒不利省試。年五十。遂不復應。甲寅。上命諸路擧孝廉。嶺伯擧公以應命。乙卯。豐原君趙顯命入對。盛稱公文學行誼爲山南第一。上曰。南國是我朝鄒魯。旣是南州第一人。可謂當今第一人也。旣而金相國在魯。以嶺伯還朝。陳嶺中四人而以公爲首曰。能文廢擧。淸疎自守。敎存黨塾。行孚鄕里。仍白前年薦孝廉事。上曰。孝廉單薦。不可不卽爲收錄。遂除厚陵參奉。旣赴。直閱任案。見徐花潭,成聽松除是職不起。吟一絶曰。二老高標不可攀。白頭孤直愧生顔。明朝挂席東南去。江海秋風滿袖寒。遂謝病歸。丙辰。除莊陵參奉。公弱冠時。夢侍端廟。與成河諸臣從遊。旣覺。涕淚在目。已而。端廟復位設慶而公中司馬。事若有冥會者。至是遂赴直。戊午。例陞惠陵奉事。將赴肅。道過龜潭。望丁隱君舊居。有詩曰。七月秋水盛。龜潭生綠波。徵君遺躅在。不敢掉舟過。遂遍遊丹陽山水而歸。壬戌。除繕工監役。丁卯。除翊衛司洗馬。皆不赴。癸酉冬。趙吏判榮國啓曰。李光庭以文章學術有重望。前後徵辟。皆不起。讀書山林。敎授生徒。今年踰七十矣。請勿循資格。超叙六品職。上允之。未幾。趙公以言者去位。翌年春。除翊衛司翊衛。夏。上四殿尊號。覃恩耆老。加通政資。冬。授龍驤衛副護軍。乙亥秋。移授僉知中樞事。公以桂坊淸銜。爲分外濫恩。及授老職。語人曰。吾乃今得吾職矣。丙子春。又以尊號推恩。資嘉善授同中樞。推榮三世。約與諸老入太白山。留月餘而歸。四月初一日戊辰。考終于漁隱之溪舍。壽八十三。用九月己未。葬于奉化縣大鳥山向兌之原。公資性淳古。德宇冲和。鄙倍之氣。不設於身。忮克之私。不萌于心。任眞推誠。無一毫矯僞。平居恂恂。若不能言。而其接人。德氣薰然可親。至理義剖判處。則毅然自守。有人不可奪者。公事親孝。家貧無以爲養。常憂形於色。賴親友邑宰相救助。甘毳常無闕。琴氏姑在鳳城北枝。公常往來。有一狗隨之。一日。親糧不繼而公適病。無僮指可使。語其狗曰。爾能傳吾書北枝否。狗掉尾而前。若解意者。遂爲書係其頸。狗直走琴氏家。琴氏得頸書。亟致糧以濟急。聞者咸曰。公之誠孝能感異類如此。親癠色不滿容。衣帶不解。疾已然後復初。每當親忌。終日恤恤。以生不致養。沒不致享。爲終身之痛。公與人言。以彼之可及者而未嘗以己之所有加之。對學子。必勉進學業。見農夫。語勤耕力穡。遇遊士。道山水遊觀之勝。見人之善。揚之如不及。聞人之不善。褎然若不知也。親戚朋友之喪。雖老病輒行素。或至屢日。子弟強進草木之滋。乃曰。余不忍也。雖食亦不下咽也。讀史至忠臣義士遇難辦命處。掩抑悲歎。或至流涕。聞孝子烈婦懿行卓節。輒嗟賞不已。或筆之於書。以寓勉戒。公恬於進取。少時遊泮宮。與一文士相善。庚寅。文士掌選嶺南。公聞之。直赴京試。取困而歸。文士語人曰。吾下嶺南。恐失人才。欲以李某爲首。遍閱無其名。何其福薄邪。公嘗曰。少時妄有意於文章。馳騁於諸家雜書。不知六經之文如布帛菽粟。今晩矣。悔之無及。遂韜鋒斂鍔。沈淳典雅。以詞理俱到爲主。人家狀誌文字。必以公爲歸。遠邇奔趨。庋箱盈溢。而左右應酬。人人皆滿其所欲。公不以撰述自居。如經書義理。謹守先輩已定之論。病世之學者不務實得而徒以辨論文義賭得講學之名。故嘗曰。學在居家事親敬長之間。由是推諸家國可也。小學一書。卽其本原。馳心超躐。高談性命。非治身之急務也。權縣令正雄始仕爲童蒙師。公與書勸講是書。使小子輩。培根達枝。庶不誤趨向也。晩年喜易經。手寫古易。誦讀不輟。或至夜分。歎曰。少時不知讀書之趣。今乃知其味。若假以十數年之工。必不至如今滅裂也。性謙虛。於文章。常自視欿然。必詢疵病於人。嘗曰。東人量狹。粗有所得。懣然自足。不求益於人。故其間架步趨漸窄而趨下。虧盈益謙。有若無實若虛之訓。當爲學者警省處耳。趙公顯命按嶺節。選士立師。以風勵一方。禮致公爲本府都訓長。公聚諸生講性理諸書。頗有作興之漸。知府李公某。亦在講座。公對諸生講西銘同胞兄弟之義。亹亹懇惻。諸生悚然傾聽。李公亦動色。時當歉歲。李公頗以法律繩下。及出東厓。李公語公曰。君可謂長於諷諭者矣。惜乎不能置諸講筵也。寧越僻處嶺峽。素無文獻。公在莊園。士子多登門請業。公隨才講授。誠意懇至。傍近數邑之工聞風而至者甚衆。數年之間。稍有知趨向者。湖西學者康柱宇訪公於直所。問進學次第。且曰。聞諸師。太極圈中有淸濁。信乎。公曰。山南鄙儒。素無學術。何足以識太極之奧。雖然。嘗聞太極中本無一物。謂之有淸濁之理則可。直謂之有淸濁則吾所未曉也。康果服。越倅趙明澤從容語公曰。鄕士晉塗甚艱。公已筮仕。可做一縣。爲子孫計。公若有意。吾輩當致力矣。公謝以病甚年至。無意進取。趙歎曰。公非今世士也。公於飮食服御。亦有節度。常曰多食損精。多肉損胃。饘粥或至屢匱。居處不蔽風雨。平生不御華美。往往有人不能堪者而處之晏如也。性惻怛。雖畜物。聞將死之聲。則不忍食其肉。嘗與數三長老。棲覺華寺。適大雨雪。僧言華蟲方下山在屋角矣。少年往捕之。將以供夕廚。公置前而撫之。忽放之窓外。傍人皆愕然。公徐曰。彼亦生物。不忍乘其困阨而幸之也。公雅好泉石。中年得鹿門山水。欲盡室棲遯。被荷塘,蒼雪諸公所力挽。不能自引去。及年且耆艾。益厭世俗俯仰。築鹿門精舍。與二三學徒居之。讀易其中。旣而舍失火。欲挈家入陟州。以從李休休故居而貧不能致身。晩而卜漁隱水石築數楹。日嘯咏以自娛。居八年而終。嗟呼。古道不復。淳風漸漓。世方齷齪自好。日趨於薄隘。而公獨今居而古稽。遊心於虞夏之際。玩意於商周之盛。而非先秦兩漢之書則不讀也。發而爲文章。渾浩雄偉。蒼蔚奇健。屹然爲東方大家數。而未嘗不反之於道德仁義。絶去文士浮放之辭。以故其符彩之著於外者。色溫而體舒。氣和而神淸。厭繁華而安澹泊。輕爵祿而樂幽閒。敎子孫則以謹厚周愼。疎財而好義。導後學則以小學爲基本。而語治道則以周禮爲法度。至其觀象玩占。惟恐入山之不深。則又得於大易盈虛消息之義。世之人。徒得其文章之緖餘而欲以盡公之平生。則淺之爲知人也。配光山金氏。士人漢翼之女。後配奉化琴氏。士人德華之女。俱贈貞夫人。有子三男二女。男持先卒。女適士人南應召。卽前夫人出。子擴,拄。女適縣令權正雄。卽後夫人出。持有子宗勛。崇勛夭。承勛,應勛。女適金鼎燮,金始稷。擴有一子幼。女適朴處元。拄有子師勛。女適張志曾,金忠鍊。權縣令有嗣子思乙。宗勛有二子幼。象靖以鄕里後生。幸得一再及門。瞻望德宇。蓋不覺心醉而吝釋。顧今人事換貿。歲月飄忽。俛仰高風。有欲從末由之歎。乃其嗣孫宗勛氏與其門生諸君。辱授以遺文勘校之役。且以遺事一冊。責以紀德之狀。自惟淺劣。無所短長。何敢屬辭比事。以摸擬其萬一。顧其責益勤。有不敢終辭者。旣卒業遺集。仍撰次其言行大致。以俟夫立言君子者之攷信焉。謹狀。
칠공자전(七公子傳)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 지음
옛날 주(周)나라가 번성할 때에는 지극한 인덕(仁德)의 물이 출렁거려 넘치는 것과 같았고 안 밖의 치화(治化)가 흥하게 행해져서 과처(寡妻)와 형제에 이르기 까지 본보기가 되고, 집과 나라를 거느렸다. 마땅히 이 때는 하늘이 준 것인가, 주나라 문왕의 손자와 본손과 지손이 백세(百世)에 미쳤으며 시인이 이를 읊어서 [기린의 발자취가 진진(振振)하도다]고 하였다.
슬프다! 기린이여 공자(公子) 공성(公姓) 공족(公族)을 말하면 모두 선(善)의 화(化)함이 진진함이 기린과 같도다. 순 임금이 기(夔)에게 명하여 樂을 맡게하고 [王子를 가르치기를 곧고도 따뜻하고 너그럽고도 단단하고 간략하고도 거만하지 말게하고 굳세고도 사나움이 없게하라]고 하니 왕실의 子弟나 다못 범민의 준수한 자가 모두 대학에 들어가서 학업을 닦았다. 직(稷:周의 祖) 계(契:商의 祖)는 당(唐)에 있고 주공(周公) 소공(召公)은 周에 있었고 모(毛) 괵필(虢畢) 위(衛)는 모두 어진 公子라 서로 좌우에서 왕실에 참여하였다. 려왕(厲王)때에 이르러 나라를 잃으니 공화(共和)의 정치가 마침내 이루어졌고 (周公 召公 정사를 행하여 共和라 불렀다.) 선왕(宣王)이 나라를 적덕(積德)으로 개기(開基)하여 종손 지손이 매우 번성하여 현인을 뽑아 능히 이와 더불어 천직을 함께 하도록 하니 동성(同姓)과 이성(異姓)의 분별이 없었다.
광묘(光廟:世祖)가 정난(靖難)하자 여러 왕자를 억제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무릇 왕자는 종실의 식록(食祿)을 분봉(分封)하여 다시 벼슬하지 못하게 하고 五世가 된 뒤에 비로소 평민들과 함께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 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公子 王孫은 손을 묶어 자취를 감추어 시사(時事)에 참여하지 않으며 비록 높은 재국(才局)이 특이 하여도 그 재능을 나타낼바가 없었다. 이에 한적하고 궁벽한 곳에 살며 음율이나 성악을 다스리거나 차마(車馬)를 장식하고 투계(鬪鷄)나 주구(走狗) 같은 노름에 취하여 노래 부르고 사냥다니며 그 몸을 감추었다. 혹 조금 자신을 닦는 이는 널리 경적(經籍)을 연구하고 문묵(文墨)으로서 스스로 즐기거나 시인이나 묵객(墨客)들과 함께 노래와 술로써 즐기며 세상 일에서 멀리 떨어저 억울하게 잠기고 말았다. 왕왕이 미움받고 꺼리게 되면 곧 시골 사람이나 야부(野夫)나 다름없이 스스로 논 밭에서 농사 지음으로서 천명(天命)을 마치는 사람도 있었다.
슬프도다! 저 우산군종(牛山君踵)은 태종의 별자(別子)인 근녕군농(謹寧君襛)의 아들로서 온녕군정(溫寧君裎)의 후계(後繼)가 된 분이시다. 온녕군은 근녕군의 동모형(同母兄)이다. 세조가 정난하여 종실이나 백관의 무릇 질녹(秩祿)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는 철권(鐵券 : 勳功을 적은 冊)을 주게 되어서 모두다 서명하였는데 근녕군이 혼자 서명하지 않았다. 공자를 낳으니 공자가 현명하고도 좋은 명예가 있었고 이에 여섯 아들을 낳으니 용성군원(龍城君援)은 자(字)가 문연(文淵)이고 무풍정총(茂豊正摠)은 자가 백원(百源)이며 재주가 뛰어나고 기위(奇偉)한 기상이 있어 서사(書史)를 읽기를 좋아하고 시문을 잘 지으며 음율을 해득하여 고(鼓)나 금(琴)을 즐겼다. 참판 김유(金紐)가 그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아름답도다! 궁의 꽃이 맑은 하늘에 란만(爛漫)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사(廬舍)를 서호(西湖)위에 짓고 구로주인(鷗鷺主人)이라 자칭하며 항상 고깃배를 타고 다녔다. 그때의 사람들이 모두 사모하여 여러 명사가 뒤 이어 강가에 오니 곧 맞이하여 서로 함께 세상을 잊었으며 오는 사람이 뜻에 맞지 않으면 곧 노를 저어 돌려 떠나가 버렸다. 시인이 지은 [왕손이 배를 잡아 당김을 아는도다.]라는 시가 있다. 한산정정(韓山正挺)은 자가 이직(而直)이며 영매(英邁)하여 호기(豪氣)가 있고 천 사람 보다 뛰어났다. 품고있는 생각이 소랑(疎朗)하여 음율을 알고 琴을 잘 하엿다. 별장을 양화도(지금 당인리)에 두어 서호주인(西湖主人)이라고 자칭하며 여러 명사들과 더불어 날마다 술과 시 읊기로서 락을 삼으니 앉아 노는 사람이 항상 가득 찼으며 여가가 있으면 팔에 매를 얹고 개를 데리고 토끼를 쫓아서 쾌(快)함을 취하니 一世의 사람들이 모두 그의 기개(氣慨)를 사모하였다. 화원정간(花原正揀)은 자가 공택(公擇)이다. 금천정변(錦川正卞)은 자가 이열(而悅)이다. 청양정건(靑陽正揵)은 자가 공간(公幹)이다. 公子의 부자 형제가 모두성(盛)한 문명이 있어 모두 일시의 명인들과 함께 놀았다.
연산군무오(燕山君戊午:1498년)사화가 일어나자 여러 君子가 모두 도망가고 쫓기고 죽이고 귀양보낸 바 되었다. 참소하는자가 말하기를 [七公子가 모두 그 黨이다]하니 여러 당인(黨人)의 적(籍)에 함께 엮이고 갑자(1504)년에 당인의 죄를 더 주자 칠공자를 멀리 떨어진 섬에 귀양보내고 병인(1506)년 6월에 같은 날에 사사(賜死)되였다. 이장곤(李長坤)이 이 말을 듣고 이를 위하여 흐느껴 울었다. 그 해 가을 중종(中宗)이 반정하여 무릇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그 억울함을 씻고 칠공자도 땅을 주어서 장사 지내고 正의 벼슬을 모두 도정(都正)으로 올리었다. 찬문(贊文) 짓기를 [내가 野史를 읽고 七公子의 父子가 同日에 죽었음을 슬퍼하고 그 遺事를 그 子孫들에게 구하였으나 그 자세한 것을 능히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하고 기록에 말하기를 [百源이 兄文淵 弟而直 公擇 而悅 公幹과 함께 모두 가히 사람들이 그 기이한 기질을 품고 있음을 생각하였으나 그 때 세상에
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시와 술로써 山水間에 놀며 막히고 답답함을 통하였다.]하고 시에 말하기를 [太宗家의 계통은 줄기에 매이며 德을 품음이 오직 편안하도다. 나이가 大學에 갈만하면 德行을 생각하는 도다. 이로써 맡은 바 職에 힘을 다 하나니 어찌 王家의 울이 되지 않겠는가, 줄기는 共和와 더불어 아울러 아름답도다.]고 하였다.
속담에 이르기를 [큰 나무가 뒤집혀 질 때는 가지나 잎을 먼저 싹 배었다. 秦나라의 公子가 同日에 욕되게 죽으니 호해(胡亥:秦太皇의 아들)가 망국하였다.]하니 칠공자가 죽은지 얼마 아니되어 燕山君이 폐위(廢位)되었다.
오호라 禍의 지내온 일이 탄식스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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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공자전은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선생께서 연산군무오(燕山君戊午:1498년)사화에 연루되어 우산군(태종대왕 제7남 온녕군의 아들)과 우산군의 아들 6형제 (용성군, 무풍군, 한산군, 화원군, 금천군, 청양군) 즉 7부자(7공자)분이 같은날 죽임음 당한 것을 야사를 통하여 알게 되어 자손들에게 당시의 자세한 기록을 구하고져 하였으나 다만 [기록에 백원(무풍군)이 兄 문연(용성군), 弟 이직(한산군), 공택(화원군), 이열(금천군), 공간(청량군)과 함께 모두 가히 사람들이 그 기이한 기질을 품고 있음을 생각하였으나 그 때 세상에 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시와 술로써 山水間에 놀며 막히고 답답함을 통하였다.]고 기록됨을 보고 [훌륭한 왕자 왕손들이 어찌 왕가의 울타리가 되지 않겠는가 아! 화의 지내온 일이 탄식스럽도다.]하고 이를 슬피 여겨 탄식하여 기록한 찬문으로,
주(周)나라 때는 덕으로 기초를 닦아 공자(公子) 공성(公姓) 공족(公族)을 왕실의 좌 우에 참여토록 하여 종손 지손이 번성하여 백세(百世)를 성대하게 누렸으나,
진(秦)나라는 公子를 욕되게 죽게하니 진태황의 아들 호해때 나라가 망하였다는 옛 일을 견주어 기술하였다.
세조가 정난(김종서, 황보인 등 많은 인물을 제거하고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난)을 일으킨후 왕자 왕손을 억제하기 어려움을 염려하여 무릇 왕자는 종실의 식록(食祿)을 분봉(分封)하여 다시 벼슬하지 못하게 하고 五世가 된 뒤에 비로소 평민들과 함께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 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公子 王孫은 손을 묶어 자취를 감추어 시사(時事)에 참여하지 않으며 비록 높은 재국(才局)이 특이 하여도 그 재능을 나타낼바가 없었다. 이에 한적하고 궁벽한 곳에 살며 음율이나 성악을 다스리거나 차마(車馬)를 장식하고 투계(鬪鷄)나 주구(走狗) 같은 노름에 취하여 노래 부르고 사냥다니며 그 몸을 감추었다는 세조의 왕자, 왕손에 대한 잘못된 일에 대하여 지적함과, 아울러 연산군에 이르러서는 이것 마저 염려되어 드디어 무오(1498년)사화를 일으킨후 갑자(1504)년 (陰)6월 5일에 무풍군을, 병인(1506)년 (陰)6월 24일에 우산군, 용성군, 한산군, 화원군, 금천군, 청양군 6부자를 사사한후 폭군 연산군은 오래동안 왕위를 누리지 못하고 그해 가을에 폐위되고 중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무릇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그 억울함을 씻어주었으며, 칠공자도 땅을 주어서 장사 지내게하고 정의 벼슬에서 도정의 벼슬로 높여 주어 신원 되었다.
* 칠공자전을 지으신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선생은 여러 문헌에 기록하기를 경상북도 봉화에서 출생하였으며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이다. 할아버지는 이시암(李時馣)이고, 아버지는 이후룡(李後龍),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이시철(李時哲)의 딸이다. 양부는 이선룡(李先龍)이며, 갈암 이현일(李玄逸)과 밀암 이재(李栽)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남인의 대표적인 문장가로 알려져 있다. 권벌(權橃)의 충제집(冲齊集), 겸암집(謙庵集)등 많은분들의 문집을 교감하고 서문을 지었다. 1696년(숙종 22)진사가 되었으며, 영조 때에 참봉, 감역 등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후로도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사양하고 후진을 가르치는데만 전념하였다. 1753년 당시 재상이던 조영국(趙榮國)이 이광정은 문장과 학술에 중망이 있었음에도 여러차례에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교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6품직 하사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1756년 봄 존호를 올린 일로 다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에 가자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같은해 4월 봉화현 법전 어은곡(漁隱谷)에서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나셨으며 묘소는 봉화군 대조산(大鳥山)에 있으며 봉화읍 백록리사(栢鹿里社)에 배향되었다. 83세(1674~1756)라는 장수를 누리면서 많은 시문을 지었으나 62세 되던 1735(영조 11)년에 평소 거처하던 녹문정사(鹿門精舍)의 화재로 많은 시문이 불에 탔다. 저술로는 눌은선생문집(22권 11책) 목판본을 안동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칠공자전이 따로 전한다. 楓井에서 한시대의 인물로는 동암(東巖:속), 상산(商山:玾), 운주(雲洲:瑎), 청곡(淸谷:瑾)公보다 20여년 후이며, 월포(月浦:仁溥), 명청(明淸:仁積), 락호(樂乎:개)公과 동년배이시며 교감이 있음을 동향(同鄕)으로 현손(玄孫)대에 이르러 양가의 혼인(婚姻)등이 밝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