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의 수도. 이탈리아 중부 라티나현의 현도이다. 영어명 Rome. 면적 1507.6㎢, 인구 265만 5970(2000). 이탈리아 도시 중 가장 넓으며, 인구밀도는 1㎢당 1904명으로 이탈리아에서 제 1 위이다. 시내에 면적이 0.44㎢인 바티칸시국(市國)이 있으며 가톨릭교의 중심지로 고대 로마시대부터 계속되는 오랜 역사를 지닌 <영원한 도시>이다.
자연 지중해의 일부를 이루는 티레니아해로 흐르는 테베레강이 시내를 가로지르며, 시역(市域)은 하구에서 약 25㎞ 상류의 평야와 구릉지대에 펼쳐져 있다. 로마 발상지인 테베레강 왼쪽 연안(동쪽)의 구시가는 캄피돌리오·팔라티노·아벤티노·에스퀼리노·퀴리날레·첼리오·비미날레 등의 해발고도 50m 내외의 7개의 언덕으로 둘러싸인 홍적대지(洪積臺地)로 된 구릉지대에 있다. 최고지점은 몬테마리오의 139m, 동쪽으로 아펜니노산맥, 북동쪽으로 사비네언덕, 동부에 알바노언덕을 끼고 있다.
기후는 지중해성이므로 온난하며, 여름은 기온은 높으나 습도가 낮고, 겨울은 -4℃ 이하로 내려가는 일은 적으나 트랜스몬타나라는 북풍 때문에 사나워지기도 한다. 강수량은 9∼12월에 가장 많고 연강수량은 653㎜이다. 월평균기온은 1월이 8.1℃로 가장 낮고 7∼8월은 24.5℃로 가장 높다. 연평균기온은 16.1℃이다.
고대 전설에 의하면 로마는 BC 753년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다른 설도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BC 1000년 초에 이미 팔라티노언덕에 라틴인이, 또 퀴리날레언덕과 에스퀼리노언덕에 사비니인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에 의해 로마시가 형성된 것은 BC 7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건국 이후 7대에 걸쳐 왕에게 지배되었고 최후에 몇 대의 에트루리 아인왕조의 지배를 거쳐 공화정이 되었다.
따라서
로마시는 처음부터 에트루리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로마시 그 자체도 정식으로는 에트루리아계의 의식(儀式)에 의해 설계된 시벽(市壁)으로 둘러싸인 특정공간을 가리키며(이것은 후에 확대되었다), 시민의 생활공간이 그 밖으로 확대되어도 그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정무관의 관할도 시내와 외지로 나누어지며 시내에서는 특별한 경우(예컨대 개선식) 외에 무장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시 중앙의 광장을 <포로 로마노>라고 말하며 시민생활의 중심을 이루어 민회는 대체로 이곳에서 열렸으나 무장 민회인 병원회(兵員會)는 시외의 <마르스의 들>에?? 열렸다. J. 카이사르의 말년 이후에 광장이 몇 개 신설되었는데, 그 폐허는 현재 포리 임페리알리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로마의 지중해세계 지배의 확립과 함께 로마시는 전지 중해세계의 정치적 중심이 되었고 각국의 사절은 다투어 로마원로원을 알현하기 원하였으며 해외로부터의 약탈품이 로마시를 장식하였다. 이리하여 <로마여신>은 해외 각지에서 종교적 예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공화정 시기의 이탈리아 농업경제의 불건전한 발전으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의 많은 농민이 몰락하자 로마시에 몰려들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었다. BC 2세기 말엽 이후, 국가는 그들에게 염가(후에 무상으로)로 일정량의 곡물을 배급했는데 BC 1 세기에 그 수급자는 32만 명에 달하였다. 이는 제정기에도 계속되었는데 수급자 수는 카이사르 이후 15만 명, 제정 초기에 20만 명, 고대 말기에 12만 명으로 제한되었다.
또 정치가들은 제정기의 황제까지 포함하여 시민의 인기를 얻기 위해 전차경기(戰車競技)·검투사경기·연극 등을 개최하였다. 로마의 지배확대는 거대한 부의 유입을 가져와서 로마시는 웅장한 신전과 바실리카 등으로 장식되었고 제정기에는 많은 목욕장·도서관 등도 세워졌다. 일반시민은 여전히 허술한 아파트에서 살았으나 상수·하수·도로 등이 완비되어 생활은 풍요로웠다. 특히 BC 312년에 아피아수도(水道)가 설치된 이후 로마시에 수도시설이 완비된 것은 유명하다.
한편 해외 각지에서 로마로 수송된 많은 노예가 계속 해방되어 로마시민이 되었으므로 로마시의 주민 중 외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점점 높아져 제정기에 들어서자 100만 명이 넘었다. 그리하여 로마시 총인구 가운데 순수한 로마인은 실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에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으나 로마는 새 수도보다 격이 높았고 로마원로원의원도 새 수도의 원로원의원보다 격이 높았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후부터 서로마황제는 밀라노·라벤나 등에 있는 경우가 많고 로마시에 머무르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로마원로원은 위신을 잃지 않았으며 동서 양제국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고귀한 사람으로 이루어졌는데, 로마시장관과 근위도독(近衛都督) 등도 나란히 제국 최고의 관직이었으며, 일정수의 로마시민은 곡물이나 빵을 계속 무료배급받았다.
또 로마의 주교는 콘스탄티누스대제의 물품기증에 의해 부유하게 되어, 이 시대부터 로마시의 기독교화가 비약적으로 진행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교회당으로서 현존하는 것에 산 피에트로대성당·산 조반니 인라테라노교회 등이 있다. ?瀏?나 전통이 오래된 로마, 특히 원로원에서는 기독교화에 반대하는 세력도 강하였다. 이미 3세기 후반에 아우렐리아누스황제는 로마시에 견고한 성벽을 쌓았는데도(이것은 현재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서고트왕 알라리쿠스는 410년, 반달국왕 게이세리쿠스는 455년에 로마시를 점령·약탈하였다. 그리하여 로마는 6세기에 인구 몇 만인 소도시로 바뀌었다
제국의 멸망 이후 이민족의 침입으로 도시 로마는 큰 피해를 입었고 인구도 감소하였다. 제국의 멸망과 함께 원로원도 기능을 잃었고, 겨우 교회만 질서유지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재위 590∼604)시대에 교황의 위신이 높아지기는 하였으나 교회도 실제로 도시를 통치할 정도의 힘은 없었으며, 그 후에도 동로마와 랑고바르드계 스폴레토공 등의 개입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다.
교황 레오 3세가 프랑크와의 제휴를 추진, 800년에 카롤루스대제에게 제관을 내린 것도 도시귀족의 세력을 제압함과 동시에 동로마제국으로부터의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962년 오토 1세의 대관으로 신성로마제국이 성립되자 로마는 황제권과 교황권의 대립무대가 되었고, 여기에 도시귀족의 대립이 얽혀 불안정한 상황이 계속되었다.
성직서임권 투쟁시대에는 황제 하인리히 4세가 로마를 공위하였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간신히 산탄젤로성[聖天使城(성천사성)]으로 피신하여(1083) 노르만군의 원조로 복귀할 수 있었다. 이 시대부터 시민의 자치조직이 형성되었는데 북이탈리아의 코무네(자치도시)와 같은 안정된 도시국가를 이루지는 못했다.
로마는 상업·수공업도 활발하지 못하여 교황청·성직자·순례에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코무네의 확립에 다다를 정도의 기반이 다져지지 않았다. 캄피돌리오언덕 서쪽, 테베레강 연안 저지대에서 영세민이 변변치 않은 상공업으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으나, 곳곳에 도시귀족의 저택이 솟아 있었다.
특히 올시니가(家)와 콜론나가(家)는 도시의 지배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싸웠다. 아비뇽교황청 시대에는 항쟁이 다시 격화되었고, 로마시 호민관 콜라 디 리엔초가 지도했던 코무네운동(1347)도 실패로 끝났다. 로마가 활기를 되찾은 것은 콜론나가 출신의 마르티누스 5세(1417 즉위) 이후, <르네상스교황>이 교회국가의 재건에 노력하여 로마를 그 수도에 어울리도록 조영에 힘을 기울이게 된 후부터이다.
16세기에 로마는 피렌체에 이어 르네상스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한때는 2만 명 정도로 감소했던 인구도 5만 명으로까지 회복했다. 1527년에는 카롤루스 5세 황제군의 일부에 의한 <로마의 약탈>이 있었으나 반종교개혁의 중심인 바로크 도시로서 부활하였다. 로마는 교회국가의 수도였으므로 18∼19세기의 개혁과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통일운동)의 움직임에서 보수쪽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1798∼99년에는 프랑스혁명의 영향 아래, 1849년에는 사상가 G. 마치니의 지도에 의해 로마공화국이 이루어졌으나 모두 단기간에 끝났다. 1861년 이탈리아왕국이 세워진 후에도 로마는 독자적인 입장을 유지하였고, 왕국군의 로마정복으로 병합이 실현된 것은 1870년이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바티칸에서 두문불출하며 왕국정부와의 교섭을 거부하였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1929년 B. 무솔리니 정권과 피우스 11세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고 바티칸시국이 성립했을 때이다. 1871년, 로마는 이탈리아왕국의 수도가 된 이후 급속히 발전하였다.
1936년에는 인구가 100만 명을 넘어 교통·주택 등의 도시문제가 심각해져 무솔리니 정권도 많은 토목공사를 일으켰으나 고도(古都) 로마를 근대도시로 변용시킬 수는 없었다. 제 2차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의 공격 때 무방비도시를 선언하여 귀중한 문화재는 전화(戰禍)를 모면할 수 있었다.
산업 로마는 소비도시의 성격이 강해서 산업은 교외에 존재하는 중소규모의 기계·자동차의 차체 및 철도차량·자전거·오토바이·섬유·식품가공 등의 공장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시내에는 피혁제품·은세공·보석·상감(象嵌)·모자이크세공·조각·주금·제본·패션관계 등 소규모의 전통적 수공업이 성하다. 농지는 로마시역에 꽤 넓게 펼쳐져 있으나 조방(粗放)방목지가 많다.
농산물의 대부분은 라티나의 농업집산지와 피우미치노의 간척지에서 이루어지는 집약적 농원에서 산출되며, 그 밖의 이탈리아 각지에서 공급되고 있다. 로마의 노동인구 대부분이 관공서관계·건설업·수공업·상업??서비스업 등에 종사하고 있다.
특히 로마의 가장 중요한 산업인 관광서비스업은 <영원한 도시> 로마의 역사적 유산과 바티칸시국의 존재로 말미암아, 국내외로부터 관광객·순례자가 연간 1000만 명 이상이 찾아와 호텔과 상점 등의 관광관련산업이 활기를 띰으로써 로마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다.
시가 로마는 그 발상지인 테베레강 왼쪽 연안에 있는 7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구시가지와 황제 L.D. 아우렐리아누스(재위 270∼275)의 시대에 만들어진 시벽 바깥쪽의 넓은 신시가지로 되어 있다. 테베레강 오른쪽 연안에 가톨릭의 총본산이며 교황청 소재지인 바티칸시국, 2세기에 하드리아누스황제가 무덤으로 만들었으나 그 후 교황의 주거지, 감옥으로 변천을 거듭, 현재는 무기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산탄젤로성, 최고재판소 등이 있다.
구시가는 시내 교통의 집결지인 베네치아광장을 중심으로 많은 도로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베네치아광장 남쪽에 이탈리아왕국의 초대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있다. 무명전사의 무덤이 있는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건물을 로마시민은 <세계 최대의 타이프라이터> 또는 <크리스마스케이크>라 부르고 있다. 그 건물의 배후에 로마발상지로 유명한 7개 언덕 중 하나인 캄피돌리오언덕이 있다.
베네치아광장 서쪽에는 일찍이 B. 무솔리니가 관저로 사용하며 발코니에서 민중의 환호에 응했던 베네치아궁전이 있는데 현재는 미술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광장에서 북쪽으로 향해 길이 1500m의 코르소거리가 타원형의 포폴로광장까지 뻗어 있다. 이 광장에는 아우구스투스황제가 헤리오폴리스에서 가지고 온 오벨리스크가 서 있고, 로마의 북문이 되는 포폴로문이 있다. 코르소거리에는 로마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은 콜론나광장이 있는데, 거기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에 의한 게르만원정의 오벨리스크(높이 30m)가 서 있다.
그 광장에 접하여 총리부(總理府)인 키지궁전이 있다. 콜론나광장에서 동쪽으로 트리토네거리를 지나면 <해왕(海王) 트리톤의 샘>이 있는 바르베리니광장에 이른다. 이 광장 가까이에 국립미술관인 바르베리니궁전이 있다. 그 부근의 바르베리니광장에서 보르게세공원으로 나가는 핀차노문까지를 베네토거리라고 한다. 이 길은 로마 제일의 번화가로서 호텔·항공회사·카페가 늘어서 있다. 보르게세공원은
17세기?? 만들어졌는데, 보르게세가(家) 출신의 추기경 수집품을 중심으로 한 보르게세미술관과 마장(馬場) 등이 있다. 이 공원은 로마의 중심에 있는데 광대한 부지에 녹음이 우거져서 시민의 산책·휴식장소이다. 바르베리니광장에는 시스티나거리가 있는데 이 거리에 이르는 곳에 트리니타 데이 몬티교회가 있다.
앞쪽의 에스파냐계단을 내려가면 <작은 배의 분수>가 있는 에스파냐광장에 이른다. 이 광장에서 코르소거리에 이르는 길이 콘도티거리이며 의류와 장신구를 파는 고급상점이 늘어서 있다.
베네치아광장에서 남동쪽으로 포리임페리알리거리가 이어지며, 그 오른쪽에 고대로마의 정치·경제의 중심지이며 공회장이었던 포로 로마노 유적이 있다. 그 거리의 도착지점에 거대한 원형극장 콜로세움이 있다. 그것과 나란히 여러 개선문의 원형이 되었던 콘스탄티누스대제의 개선문이 있는데, 315년에 막센티우스황제를 격퇴시킨 일을 기념하여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카라칼라 목욕장의 유적이 있는데 여름밤에는 이곳에서 야외 오페라가 열린다. 또 그 근처에 국제연합기구인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본부가 있다. 베네치아광장에서 북동쪽으로 나초날레거리를 지나면 중앙에 분수가 있는 공화국광장, 즉 에세드라광장에 이르고 더 나아가면 테르미니역에 이른다. 에세드라광장에 면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목욕장 유적에 세운 로마국립미술관, 즉 테르메미술관이 있다.
베네치아광장에서 북서쪽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거리를 지나면 바티칸시국에 이른다. 그 사이에 천체의 7신을 모신 로마신전으로서 BC 27년에 세워지고 그 후 개축되어 609년에 기독교교회로 되었던 판테온, 또 17세기에 만들어진 바로크시대 로마의 대표적 광장인 나보나광장이 있다. 그곳에는 G.L. 베르니니가 제작한 세계의 4대강(다뉴브·나일·갠지스·라플라타)을 의미하는 4개의 조상(彫像;하천분수)이 있다.교회당에는 바티칸시국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326년 창건, 르네상스양식), 그 밖에 로마 시내에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교회(432년 창건, 바로크양식), 산타 마리아 마졸레교회(432년 창건, 파사드는 네오클래식양식), 산 로렌초폴리 레 물러교회(4∼13세기, 바실리카) 등이 있다.
또 로마에서 이탈리아반도 남쪽 끝의 브린디시까지 이어지는 아피아가도(BC 312년 건설)에는 당시의 포석도 남아 있는데, 그 가도의 산 세바스티아노문에서 10㎞ 정도 지점인 산 칼리스트에 카타콤베라는 큰 지하묘지가 있다.
이곳은 기독교도가 박해를 피했던 장소이기도 하며 현재는 순례지의 하나이다. 시의 남쪽 10㎞ 지점에 부도심(副都心) 에우르(EUR;로마만국박람회의 약칭)가 있다. B. 무솔리니시대 말기인 1942년에 만국박람회장으로서 건설이 시작되었으나, 제 2차세계대전 후에는 부도심으로서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정비되었다. 이곳에는 후생부·ENI(전국탄화수소공사) 등의 정부·공사 기관, 로마문명박물관, 1960년의 제17회올림픽대회를 위해 세워진 스포츠궁전 등 로마시내에서 볼 수 없는 현대건축물이 있다
문화시설 1303년 창립된 로마대학은 볼로냐대학(11세기 창립) 다음가는 오랜 역사를 가지며 이탈리아 최대규모인 13개 학과를 갖추고 있다. 그 밖에 가톨릭대학 의학과, 교황청관할의 여러 대학(그레고리아나·라텔라네제·안젤리코·안토니아노 등), 미술아카데미·산타체칠리아음악학교·수복(修復)전문학교·연극학교·무용학교 등 많은 고등교육기관이나 전문학교가 있다.
또 린체이아카데미(이탈리아아카데미의 후신) 외에 세계 여러 나라가 학술연구·소개기능을 하는 아카데미를 로마에 두고 있다. 박물관과 미술관도 많은데 에트루리아인의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빌라줄리아미술관, 그리스 로마의 조각 등을 소장한 로마국립미술관, 르네상스시대의 회화 등 풍부한 소장품의 보르게세미술관, 국립회화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의 근대·현대미술의 풍부한 소장품을 자랑하는 국립근대미술관 등이 있다.
도서관에는 국립도서관, 국립공문서관, 로마대학 안의 알렉산드리나도서관 외에 미술사·중세사·근대사·현대사 등의 전문적 도서관이 많이 있다. 그리고 바티칸시국에도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술관·박물관·도서관이 있다.
음악·연극을 위해 1671년에 창설된 로마국립가극장을 비롯하여 많은 콘서트홀과 극장이 있다. 또 이탈리아 영화제작의 메카라고도 할 수 있는 로마교외의 치네치타에서는 많은 이탈리아영화의 걸작이 제작되었다. 테베레강 오른쪽 연안에는 5000명 가까운 직원이 일하는 이탈리아방송협회(RAI)가 있어 텔레비전·라디오 방송을 하고 있다.
스포츠시설로서는 1960년의 로마 올림픽대회의 메인스타디움이 폴로 이탈리코에 있어 축구시합 등이 활발히 개최된다. 테베레강 연안에는 많은 사설 스포츠클럽이 있다
주민 이탈리아왕국이 1871년에 수도를 로마로 정했을 때 인구는 22만 명이었는데 그 후 출생률상승과 이탈리아 각지에서의 인구유입으로 1981년에는 약 13배인 284만 명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인구유입 감소, 출생률저하로 과거와 같은 급격한 인구증대는 없다.
주민의 산업별 인구구성은 농업 약 3%, 공업 약 20%, 수송·금융 등 약 56%,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은 약 20%이다. 로마에 체재하는 외국인은 약 10만 명이다. 로마인의 기질은 대폭적인 인구유입 등으로 인해 잃었다고는 하나 테베레강 오른쪽 연안의 트라스테베레지역에는 왕성한 생활력과 밝고 서민적인 분위기 등 로마인의 특징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교통기관 시내와 근교를 연결하는 주요한 교통기관은 시전철(市電鐵)·시버스공사(ATAC)와 로마전철회사(ACOTRALEFER)가 경영하는 버스와 시전철이다. 지하철은 테르미니(종착역) 경유인 교외의 치네치타와 바티칸시국에 가까운 오타비아노 사이, 테르미니와 부도심 에우르(EUR;로마만국박람회)의 라우렌티나 사이의 2노선이 있다. 시가지와 주변 근교를 연결하는 도로로 <올림픽 순환도로>가 있고, 국내 주요지로 통하는 도로에는 이탈리아를 남북으로 뻗은 고속도로 <태양자동차도로>가 있는데 로마-나폴리, 로마-피렌체를 연결하고 있다. 철도망은 제 2 차세계대전 직후에 완성한 테르미니역을 기점으로 간선이 이탈리아 각지로, 또한 국제열차가 유럽 각지로 뻗어 있고 가까운 도시와의 연락선도 부설되어 있다. 공항은 남서쪽 약 36㎞의 피우미치노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