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목회자부부기도세미나(거문도)
전국에 있는 목회자에게 찬양과기도 및 강사들의 귀한강의와 거문도에 경관을 관광하고 성화를 감상하면서 목회에 재충전과 하나님나라에 확장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충성된 일군으로 세우기 위해 이 세미나에 초청합니다. 부부가 함께 참여함으로 은혜나누기를 원합니다.유에녹목사 드림(거문교회)
인터넷주소=http://cafe.daum.net/PrayerProject
☀일시:2013년 8월12일~15일
(여수여객선 터미널 소집, 12일오전1시부터 ~ 15일오전 거문항 출발오전 10시30분까지)
♱장소: 거문교회/본당 (전남 여수시 삼산면 거문길 46-5)
☏TEL.061-665-8151 FAX 061-666-0901
HP.010-8613-8151. HP.010-9665-7418. HP.010-4158-8050
⚖회비:25만원/1인,3박4일/선비/숙박/식사/관광 농협계좌 06012178150
☕등록: 전화 및 인터넷 http://cafe.daum.net/PrayerProject/선착순 등록 마감일 7월25일
☸나라도항:2시30분 출발(나라도항에 2시까지 도착해야 합니다.)⇨주차무료/☏061-835-5111
☸여수항:1시40분 출발(여수항에1시까지도 도착해야 합니다.)⇨주차1일5000원/☏061-663-0116
✈김포공항(출발7시5분,7시:20분,9시:45분)⇨여수공항도착/1시간(운항시간)
코레일 열차/용산출발(8시20분)⇨여수도착-(11시52분)
강사소개
김영한박사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수학,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및 신학박사 학위, 1978년 숭실대 교목실장과 교수로 봉직 1998년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을 설립 초대원장과 2대, 3대, 5대, 6대 원장직을 수행 등 34년간교직 헌신 1982년 기독교학술원, 1996년 한국개혁신학회, 1998년 한국기독교철학회 등을 창립 한국복음주의신학회 및 한국해석학회 등 각 신학회에서 다양한 학술활동 현재 기독교학술원 원장,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신학위원장 및 한국기독교철학회 회장, 개혁주의이론실천학회인 샬롬나비 회장으로 활동
정기환박사
연세대교육대학원 졸업
백석대학교 대학원 졸업
사단법인 기독학술원 이사장
글로벌 평생교육원 원장
백석신학대 교수
웨스터민터신학교학장
캐나다 크리스천대학교 교수
세계원주민선교회 회장
(사)민족복음화운동본부 학술원장
전원중앙교회 담임
최흥진박사
전남대학교(B.A.)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Th.M.)
Yale university & Divinity School 연구
계명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Th.D.)
동광교회 협동목사
호남신학대학교수,신약학
전신애장로
순천세광교회장로
강의교재/김영한
(2013년 8월 12일 거문도 거문교회 목회자 세미나)
개혁주의와 오늘날 목회자의 영성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머리말: “영성”에 대한 새로운 정의 필요성
1) 영성이란 신비적인 체험만이 아니다. 율법적 자기 수련만이 아니다. 사회봉사나 불의 비판 행위만이 아니다. 지성적인 종교적 명상만이 아니다. 이것들은 영성의 부분일 수 있으나 영성의 본질은 아니다. 영성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동행이다. 그것의 열매는 공의, 인자, 겸허다.
2) 개혁주의 전통의 교회는 역사적 신앙고백서와 함께 심오한 성경적 신학적 유산을 가졌다.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경건(pietas)이라는 말을 주로 쓴다. 그 이유는 영성이라는 말은 인간의 능력을 함양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쓰지 아니함. 그리하여 교회사의 전통과 소통하고 연결하는 연구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현재적 사역에 내면적으로 연결하며, 불신자들의 쉴 수 없는 마음이 하나님 안에 안식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것이 영성의 쇠퇴에 직면한 구미 개혁교회가 갖는 포스트모던 현상이다.
3) 영성(spirituality) 인플레이션 현상:
로마 가톨릭의 영성: 영성이라는 말을 즐겨쓰고 수도원 전통과 영성신학을 발전시킴.
해방신학의 영성, 민중신학의 영성; 억압자를 해방하는 정신.
불교와 힌두교의 영성: 니르바나와 브라만을 추구하는 정신.
오늘날 더넓은 에큐메니칼, 신앙 간의 대화(the wider ecumenical and interfaith conversation today) 에서는 이 단어를 “영성”이라고 부른다.
개혁교회도 이러한 대화에 참여하기 위하여 “영성” 용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영성이란 개인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의 성령의 현재적 사역에의 경청이요 반응이다.
매우 포괄적이다. 이에는 삼위일체 하나님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교회는 모두 기독교라는 범주에 넣을 수 있다. 개신교, 성공회, 천주교, 정교회, 곱트교 등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동서방의 모든 기독교.
오늘날 한국의 개신교 근본주의는 세대주의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기교파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하는 신앙적 독선주의에 빠져있음. 그 예로 WCC 개최 반대 운동.
4) 개혁주의 영성의 특성: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신앙적 삶의 내면적 측면을 “경건”(piety)이라고 불렀다.
전인적(全人的, wholistic) 영성은 단지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이성과 의지의 차원이 균등잡힌 영성의 상태를 말한다. 이성의 차원은 지식과 앎, 감정의 차원은 열정과 느낌, 의지의 차원은 도덕성과 성결을 말한다. 말씀, 성령, 성결이 조화되는 것이 전인적 영성이다.
I. 오늘날 목회적 영성 유형
1) 은사주의 유형:
오순절 교단의 목회, 신사도 교회의 목회, 초자연적 능력을 강조.
능력전도와 치유사역을 통한 목회. 성령의 현재적 사역 강조.
말씀 연구와 성결한 삶 등한시
일상적 사회적 관계, 창조의 질서를 무시하는 경향
2) 사회참여적 유형:
인권 옹호, 저 소득층의 사회복지, 사회적 갈등의 해결에 들어서는 것을 그 사명으로 안다.
저임금에서 시달리는 근로자들, 소외계층의 복지, 다문화 이주민들의 권익을 위하여 사회참여자유주의자들의 모형 처럼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세상적 나라와 일치시키는 오류. eschatological proviso(종말론적 단서)를 유보. 민중교회의 정의구현의 한계.
3) 교리주의적 유형:
전통보수교회의 목회, 교리중심의 설교와 목회,
성령의 역할 보다는 교리의 역할을 더 중요시. 교리는 있으나 성결의 삶의 능력 결여.
워필드, 핫지 등 정통개혁신학자들의 은사 중지 내지 소멸설(the doctrine of cessation): 하나님의 존재는 믿으나 오늘날 하나님의 직접 개입을 부인하니 이신론적 경향에 빠짐.
4) 종교혼합적 유형:
종교다원주의 영성, 기독교의 구원 및 타종교의 구원을 동시에 인정.
2010년 KNCC의 4대강 살리기 기도문에 종교혼합 기도문 (아멘 아미나비타불!)게재
1991년 호주 캔베라 WCC의 “새 영성” 주제의 7차 총회에서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성직자들이 모여서 종교혼합예배를 드렸다. 한국의 여성 신학자가 초혼제를 연출하여 물의를 일으킴. 그러나 이것은 성경과 기독교 교리에 상충됨.
5) 통전적 유형:
개혁주의 유형, 말씀과 성령의 균형. 지성과 감성의 균형, 현실과 미래를 균형.
길선주의 새벽기도 영성, 최근능, 김익두의 전도의 영성. 한경직의 청교도 영성.
은사주의 유형의 강점: 성령의 현재적 사역 인정.
이용도, 박재봉, 이성봉 목사의 부흥의 영성,
단점: 기복주의화, 성결부재. 은사의 상업화.
사회참여 유형의 강점: 기독교의 공공성 선양에 노력
김재준, 함석헌의 사회참여.
단점: 신앙을 하나의 도덕성으로 간주.
교리주의 유형의 강점: 사도신경에 기반한 신앙의 토대 중요시.
박형룡과 박윤선의 정통주의.
단점: 바리새적 정죄와 독선, 실천 부재.
II. 개혁주의 영성의 내면적 특성
개혁주의 영성이란 넓은 의미에서의 개혁주의를 말한다: 종교개혁에서 시작하여 “개혁”이라는 이름이 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에 따라 개혁된 교회를 지칭한다. Eugene Osterhaven, The Spirit of Reformed Tradition, 125
따라서 좁은 의미에서 “장로교”라는 개혁파만이 개혁주의가 아니다.
종교개혁적 정신에 기초한 영성을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개혁주의 영성라고 말함.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하나님의 성회까지도 종교개혁전통을 계승할 때
우리는 종교개혁의 유산 아래 공통성을 발견한다.
개혁신앙의 전통은 하나님의 선행적인 은총(prevenient grace)에서 출발한다. 이 선행적 은총사상은 어거스틴과 루터와 칼빈의 영성에서 나타난다.
선행적인 은총의 결과가 자연인의 이성과 양심. 선행은총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자유의지를 회복.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구원에 이를 수 없다. 특별은총(그리스도의 구원은혜)이 필요하다.
특별은총은 그가 택하신 자에게 주시는 특별한 제한적인 은총이다.
(사랑과 정의의 통전적 영성)
하나님은 사랑의 존재일뿐 아니라 공의의 존재이시다. 정의 없는 신은 마르시온의 하나님이며, 사랑 없는 신은 페니키아인의 몰록 신이지 성경이 증언하는 참되신 하나님은 아니다.
미가 선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을 증언한다: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함이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선한 것이며”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다(미6:8).
사랑 없는 정의는 살벌하며, 냉혹하며, 무자비하며, 처벌위주의 공포적 사회를 산출하며, 정의 없는 사랑은 온정에 흐르고 부패하고, 무질서하고, 정실(情實)적 무법(無法)사회를 산출한다.
1. 사랑(인자)의 영성
독일의 순교 신학자 본회퍼(D. Bonhoeffer)에 의하면 참된 제자의 삶이란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사는 존재(being for others, Sein für andere)이다. "교회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본회퍼는 피력한다: “교회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이다.”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trans. Eberhard Bethge (London: Collins/Fontana, 1953), 166
교회는 세상의 불의와 죄에 싸우면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으로 변혁시켜야 한다.
영국의 복음주의 사상가 루이스(C. S. Lewis)에 의하면 고대 헬라 저술가는 사랑에 대한 4가지 유용한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스토르게(storgé, 특별히 가족 안에서의 사랑), 필리아(philia,우정), 에로스(eros, 이성 간의 사랑,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 간의 사랑) 그리고 아가페(agapé, 자비 혹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다. C. S. Lewis, The Four Loves (London: Collins, 1963), William Barclay, The New Testament Words (London: SCM Press, 1964), 17-18
신약성경 기자들의 용어선택은 특징적이었다. 스토르게와 에로스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필리아는 필레오(philein, 소중히 여기다)에서 온 것으로 일반적으로 따뜻함, 애정과 관련되어 있다. 필리아는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히13:1)처럼 연결된 복합어 속에서 나타난다. 필레오는 약 24회 정도 나나난다, 그러나 이 개념은 초대교회의 사상을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
필리아의 본질은 동등한 사람들 간의 개인 대 개인의 사랑이다: “필리아의 본질은 차별적인 사랑이다, 일부만 선택되고 대다수는 배제된다. ...아가페는 필리아의 본질인 차별적 사랑을 부인하지 않는다... 아가페는 차별적 사랑을 보편적으로 끌어 올린다.... 아가페는 평등과 불평등, 동정과 반감, 우정과 무관심, 욕구와 혐오 사이의 분리를 없앤다.” P. Tillich, Love, Power and Justice, 118-119
신약저자들은 아가페를 선택적으로 사용하였다. 아가페(agapé)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 낮은 자를 다른 사람들 위로 끌어 올리고, 낮은 자를 높이는 높은 자의 높은 자의 사랑”이다. E. Stauffer, “agapao,” in: Theological Dictionary of NT, ed. G. Kittel & G. Friedrich, trans. G. W. Bromiley, 1:36-37
바울은 인류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희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이 아가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아가페(헌신적 사랑)는 “함께 고통을 받는다”는 연민(compassion, Mitleid)이다. 보살핌(caring)의 태도가 있다: 의사는 냉담하고 환부를 찢고 깁고, 약을 투여하는 단지 기술적 치료자를 넘어서 보살피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배려심 없는 치료는 환자와의 정서적 연대감 없는 행위이다. 이러한 연민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의해서만 제대로 평가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연민을, 인간의 궁핍함을 보시고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반응으로 본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연민을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그분이 만난 궁핍한 사람들과 진정 함께 고통받으셨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모든 인간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고(욥30:25, 골3;12, 히13:3, 벧전 3:8)한다.
기독교의 아가페(agape) 윤리의 중심에 놓여 있는 사랑이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고 하나님의 영원한 공동체에 참여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것, 즉 감정으로 참여하는 아가페”이다. 성령은 자신을 내어주고자 하는 충동(아가페), 긍휼히 여기는 가족의 관심(스토르게), 우정을 즐기려는 진한 욕구(필리아)와 하나님의 영원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 간의 참된 교제(에로스)를 결합.
아가페 사랑은 단순히 신학적 성찰이나 사변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로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마음을 열고 있을 때 선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것은 “선행적인 은총”(previnient grace)이다.
사례(事例): 재미교포 목회자 지용훈은 교회 앞마당에서 뉴욕 맨해튼까지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선포한 여정을 담은 그)의 저서 『나는 뉴욕의 거리 전도자』(규장, 2010년)에서 다음같이 복음전도에 임재하시는 성령(사랑의 영)에 관하여 간증하고 있다. “어느 날 거리에서 전도를 하고 있는데 어떤 한국 여자 집사님께서 다가오더니 나에 대해 궁금해 했다. 목사라고 하니까 그 분이 반문했다. ‘목사님도 전도하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복음을 알고 누리는 목사가 전도 안 하면 누가 전도하는거지?’ 그때 결심했다. ‘앞으로 내가 어떤 사역을 하고 어떤 위치에 올라간다 해도 나의 영성을 순수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이 거리 전도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리라.’”(지용훈, 『나는 뉴욕의 거리 전도자』, 규장, 2010년). 그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성령(사랑의 영)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의 인생은 복음전도의 삶으로 바뀌어 뉴욕 거리의 전도자가 되었다.
지용훈의 신앙(사랑의 영)체험은 미국의 19세기의 시카고의 복음전도자 무디((Dwight L. Moody)가 경험한 성령 체험을 연상케 하고 있다. 무디는 어느 날 오후 뉴욕시의 월 가(Wall street)를 걷고 있었다. 무디(D. L. Moody)는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의 실재에 압도되어 혼자 있을 만한 처소를 얻기 위하여 친구집으로 달려 갔다고 한다. 그는 거기서 두시간 동안 하나님의 한량없는 사랑의 물결이 자기를 향해 계속해서 밀어담침을 경험하였다. 성령께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그의 영에게 증거하였다. 무디는 사랑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것이 그의 목회 사역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다. 그 사건은 무디로 하여금 전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게 하였다(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5권 / 414쪽).
이러한 사랑을 경험함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발에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용서와 사랑의 경험을 가진 자가 용서와 사랑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은 향유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울면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여인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7:44).
2. 정의의 영성
불의에 대하여 진노하시지 않으신 하나님은 성경적 하나님이 아니다: 1930년대 리처드 니버(Richard Niebuhr)는 1930년대 지배적이었던 사회복음주의(Social Gospel)의 신학적 윤리에 대하여 다음같이 선언하였다: “진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죄 없는 인간을 십자가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심판없이 천국으로 인도했다.” H. Richard Niebuhr, The Kingdom of God in America (Chicago: Willett Clark, 1937), 375
사랑과 정의가 통전될 때 여기서 나타나는 것이 평화와 화목이다. 기독교적 영성은 편파적 영성이 아니다: 민중이라는 그 지위 때문에 그대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영성은 민중만이 아니라 동시에 열린 시민도 대표한다.
미가 선지: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미3:8)
미국의 침례교 목사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은 1960년대 미국의 하층민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저항하였다. 그는 인종차별이라는 사회악을 제거하기 위하여 저항하였다. James P. Hanigan, Martin Luther King Jr., The Foundations of Nonviolence (Lanham,Md,: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4), 116
킹은 불의에서 정의로 나아가고 “사랑받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하여 비폭력적 저항 말하자면, “양심에 의한 비폭력” James P. Hanigan, Martin Luther King Jr., The Foundations of Nonviolence, 2-4
을 시민운동의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정의는 인간 이성에 사로 잡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사로 잡히는 것이다. 종교 개혁자 루터(Luther)는 1517년 보름스(Worms)에서 열린 제국 의회에서 다음같이 양심에 입각한 정의를 선언한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혔다. 나는 아무 것도 철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슬리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에 서 있다. 그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시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청교도목사, 리처드 십스(Richard Sibbes)는 양심을 우리가 하는 행동들을 주목하고 기록하는 서기(書記)이며, 하나님의 법정이라고 규정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재판을 하시는 하나님의 홀이다. 그리고 양심은 모든 역할을 행한다. 양심은 기록하고 증거하고 고소하고 심판하고 처형한다.” Richard Sibbes, Works (James Nichol: Edinburgh, 1862), III: 210f.
3. 평화의 영성
개혁주의 영성은 화평과 화목을 추구한다. 이 세상의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삶의 선함을 즐기고 향유하는 인정한다. 본회퍼는 현세의 지복(至福)을 인정한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신보다 더 종교적으로 굴거나 그렇게 하려고 해서는 않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무지와 오만불손으로 그 지극한 복을 망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trans. Eberhard Bethge (London: Collins/Fontana, 1953), 56
결단코 도피주의적이거나 염세주의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세상에 봉사하면서 기꺼이 상처받고 쓰러지는 것을 감당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마르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은 평화의 저항을 하였다: 그는 두려움, 미움, 폭력 혹은 부조리 속에서는 오직 비폭력만이 사람들로 하여금 법에 대한 경외심을 일깨울 수 있다고 보았다. Martin Luther King, Jr., Stride Toward Freedom: The Montgomery Story (New York: Harper & Row, 1964), 192
킹은 인권 투쟁은 궁극적으로 악한 권세요,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며, 인간 적대자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적대자와의 화해로 나아갈, 갈등의 원천에 대한 승리임을 선언하였다. Martin Luther King, Jr., Stride Toward Freedom: The Montgomery Story, 84
비폭력은 새로운 고통의 씨앗을 뿌려지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리하여 비폭력은 미움의 사슬을 끊어 버리기 때문에 희생자와 범법자 사이의 화해를 유도하는 최선의 길이다. 이러한 킹의 비폭력의 사상은 고통의 가능성까지도 수용하는 기독교적 아가페의 이상을 구현하는데 근접한다. 사실 킹 자신은 비폭력은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의지와 관련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Martin Luther King, Jr., Stride Toward Freedom: The Montgomery Story, 85-87
4. 청빈의 영성
하박국 선지의 영성이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아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바벨론 군대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한다는 환난과 곤경과 재난의 메시지를 전하는 어려운 시기 속에서도 하박국은 청빈의 영성으로서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
주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3절) 라고 청빈한 마음이 천국을 소유하는 기본이라고 말씀하셨다. 8복의 설교 가운데 가장 첫째의 복으로 선포하셨다. 여섯째복도 첫째 복과 통하는 것이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목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절):
프랜시스는 소유욕을 버렸을 때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누구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으로 다가왔다. 자연을 약탈이나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는 자연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제시된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릴 때(무, 無)와 모든 것을 상속받는다(전, 全)은 통한다:
명예욕을 버릴 때 이웃이 진정한 이웃으로 다가온다. 경쟁이 치열한 오늘날 사회 속에서 소유욕과 명예욕에 지배될 때 우리의 이웃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나의 경쟁자요 나의 적으로 나타날 뿐이다. 한경직 목사는 청빈한 삶을 보여주었다. 그는 통장이 없었고, 등기로 된 자기 집도 없었다.
5. 겸손의 영성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6:8). 그리스도의 자기 낮추심(kenosis)에 하나가 되는 삶.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딤전1:15b)라고 고백했다.
“내 탓이오”: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나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가 겸손의 기본이다.
III. 개혁주의 영성의 외면적 특성
1) 말씀의 영성
예레미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렘 23: 29). 예레미아는 다시는 재난의 선포를 하지 않으려고 결심했으나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강권하심으로 다시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였다: 이 진리는 자유케 하는 진리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의 기도: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이 진리가 우리의 죄를 알게 하여 우리를 성화시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
어거스틴은 밀라노 정원에서 고민에 사로 잡혀 있다고 로마서 13:12-14절에 회심한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취하지 말고 음란과 호색하지 말고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13절),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루터는 롬1:17에 압도되어 종교개혁의 길을 열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함과 같으니라”
에드워즈는 딤전 6:15-16: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15절),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에 깊은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주권에 압도된다
2) 십자가의 영성
번영과 기복의 영성은 기독교를 하나의 행복과 기복과 번영의 종교로 만들어 버린다.
한국의 무당종교가 그러하며, 미국산 번영의 복음이 그러하다. 자본주의식 복음: 하나님께 투자하는대로 수십배로 돌려 받는다는 복음이다. 로버트 슐러(R. Schuller)와 조엘 오스틴(J. Osteen)의 복음이 그러하다. 예수님은 구속자가 아닌 삶의 교사나 스승으로 부각.
바울이 가르치는 영성은 나의 도덕적 수련이나 지적 명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영성: 사도 바울의 영성: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새로운 자아의 형성: 실존 철학이 말하는 현존재가 아니다: (거기 있음there-ness). 십자가의 영성은 아담과 이브의 원조의 동기에서 되돌아서는 길: 독립성을 포기하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의 태도: 더 이상 독립성의 자아가 아니라 “말씀과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의 거기 있음”이다. 독립하고자 하는 옛 자아가 주고 날마다 그리스도가 내 속에 사는 삶.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증언하였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러한 십자가 영성에 기반한 그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하였다. 세상의 영광에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의 멸시적인 것에서 하나님을 추구한다. 그는 바울의 말씀(고전1:18-22)을 인용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21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22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23절),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24절)
3) 거룩한 세속성의 영성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에서 거룩한 세속성을 말한다. 세속적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공하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는 것이며, “삶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 우리는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의 손에 맡겨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해야 한다.”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trans. Eberhard Bethge (London: Collins/Fontana, 1953), 125
기독교 영성은 현실을 떠나서 골방이나 수도원이나 산속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 있듯이 기독교 영성은 우리 삶의 현실 한 가운데서 실천된다.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말하는 바 같이 궁극이전의 것(the penultimate)과 궁극적인 것(the ultimate)의 긴장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현존세계와 영원한 실재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인식하면서 사는 영성이다. 본회퍼는 이것을 주님이 가르쳐주신 제자도의 영성이라고 보았다. 우리는 철저히 세상에 속한 자로 살지만 우리의 눈은 여전히 궁극적 실재인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 궁극이전의 현실은 궁극적인 현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으로 받아들인다.
거룩한 세상성의 영성이란 이 세상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보없이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Bonhoeffer, Ethics, trans. Neville Horton Smith (New York: Macmillan, 1965), 142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비판적으로 변혁적으로 살아가는 태도이다. 진정한 개혁주의적 영성이란 본회퍼의 말처럼 세상 속에서 섭리하시고 구속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는 것이다. Bonhoeffer, Ethics, trans. Neville Horton Smith (New York: Macmillan, 1965),133
영국의 청교도들을 “세속 속의 성자”(the worldly saints)라고 하였다.
4)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면전)의 영성
이러한 개혁주의 영성은 코람 데오(coram deo, 하나님 면전)의 영성이다.
통전적 영성을 개혁신학자들은 "코람 데오"라는 용어로써 표현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현존 경험을 강조하였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왕상17:1, 18:15). 엘리야의 말은 생애 중에 겪었던 최대의 위기상황 (갈멜산의 바알신과의 대결)을 종합적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참 종교의 본질이다.
목동 다윗의 신앙고백: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자기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1-24).
루터와 칼빈은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를 경험한 하나님의 사람들:
구원의 확신을 위한 루터의 투쟁: “비록 내가 흠잡을 데 없는 수도사로 살았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 가장 불온한 양심을 가진 죄인임을 깨달았다. 나는 나의 만족함이 그를 기쁘게 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루터는 하나님 면전에 서 있는 그의 의식을 표현하기 위하여 coram deo 라는 라틴어 단어를 사용. 이것은 종교개혁자들과 그의 동료들의 “하나님 면전” 의식.
칼빈에 있어서 “하나님 면전”이란 그의 신학의 근본: “모든 신학이 이 획신에서 유래되고 이 것들은 마치 분수대의 물처럼 다시 이 확신으로 돌아간다” Eugene Osterhaven, The Spirit of Reformed Tradition, 130.
하나님 면전 의식은 개혁주의 전통의 심장이다. 칼빈의 “하나님 면전” 확신은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형상, 창조, 직업, 복, 영적 투쟁, 기도, 고난, 말씀과 성례, 구원에 대한 이해에서 두드러 진다. 본회퍼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에 늘 가까이” 나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 안에(en christo) 있을 때 가능하다: "그리스도만이 사람을 선하게 만드실 뿐 아니라 강하게도 하신다“.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trans. Eberhard Bethge (London: Collins/Fontana, 1953), 131
맺음말 : 말씀, 성령, 성결: 목회자 영성 훈련의 세가지 수단.
목회의 바른 길은 목회자의 영성이 바로 설 때 열린다. 교회부흥과 성장의 길은 말씀, 성령, 성결이다. 목회자가 다른 세속 직업인들과 달라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the presence of God)을 드러내는 자라는 특징이다. 목회자의 영성은 목회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다. 그것은 단순한 초자연적 능력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갖추어진 덕성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신사도 운동(New Apostolic churches)은 지나치게 초자연적 능력만을 강조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인권, 사회복지 운동은 사회정의 구현에만 치중하여 성령과 말씀을 통한 내면적 개혁을 등한시 한다. 개혁교회 목회자는 말씀과 성령과 삶의 성결 가운데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있게 조화시켜야 한다.
영국 웨일스의 칼빈주의 설교가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가 강조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the getting filled with the Holy Spirit)이다. Martyn Lloyd Jones, God the Holy Spirit, 1997, 이범진 옮김, 『성령 하나님과 놀라운 구원』, 부흥과 개혁사, 2007.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뜻을 따르고 성결의 삶 속에서 하나님 말씀을 높일 때 은혜로 주어진다. 무릎을 꿇고 성령의 임재를 기도하고 삶의 성결 가운데서 말씀에 대한 깊은 연구를 통하여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구속언약)의 진미를 알게될 때 설교의 능력이 나타나고 성령의 충만으로 나타난다. 그는 성령세례를 두가지로 나눈다. 중생세례(conversion baptism)와 능력세례(power baptism)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때 누구에게나 은혜로 주어지는 성령의 기본 감동과 세례가 있다. 그러나 성결의 능력과 복음전도와 승리의 생활을 위하여는 능력 세례(성령의 충만)를 받아야 한다. 오늘날 목회자에게는 회심과 중생이라는 도의 초보(칭의, 성령의 감화)에서 보다 깊은 은혜의 바다(성결, 즉 성령의 충만)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하여는 하나님 말씀 깊은 맛, 성령의 기름부으심, 삶의 성결로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개혁주의 목회자의 영성은 더 높은 성령의 열매(내면적 특성: 정의, 사랑, 평화, 청빈, 겸손의 영성)으로 농축(濃縮)된다. 이러한 개혁주의 영성은 외면적으로 말씀, 십자가, 거룩한 세속성, 코람데오의 영성의 특징을 갖는다.
강의 교재/최흥진
예수님의 기도(요한복음 17장)
최 흥 진(호남신학대학교 교수)
I. 여는 말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일반적으로 ‘대제사장의 기도’(the great sacerdotal prayer)라고 한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처음 불리어 진 것은 16세기 루터교 신학자인 키스테우스(David Chystaeus, 1531-1600)에 의해서이다. 17장의 기도를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부르는데 대한 실마리는 19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는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간구한다. 여기서 사용하는 ‘너희를 위해’와 ‘거룩하게 하오니’가 희생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이러한 의미를 강조해 이 기도를 ‘대제사장의 기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히브리서(2:11)나 고린도전서(고전 1:30)의 문맥에서 이 단어들은 속죄의 사역과 연결된다. 반면 아폴드(M. L. Appold)는 17절과 19절의 ἁγιάζω라는 단어에 희생적인 의미로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없다고 하며 이 장을 대제사장의 기도로 부르는 것에 반대한다. 〔Make L. Appold, The Oneness Motif in the Fourth Gospel (Tübingen: J. C. B. Mohr, 1976), 194-195.〕
그런데 17장에서 예수를 ‘대제사장’이라 했을 때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는 분으로서의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분이라는 의미가 강하다. R.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xiiii-xxi, The Anchor Bible (New York: Doubleday & Company, 1970), 747.
17장의 기도의 특징은 제자들을 향해 하는 권면 혹은 교훈적인 성격을 띤다. 그렇다면 17장의 기도를 통해 제자들에게 준 권면 혹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II.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기도
A. 17장의 문학적 특징과 구조
요한복음 17장은 그 구성에 있어서 당시의 문학적인 세계에서 즐겨 사용하던 죽어 가는 사람이 후손들에게 남기는 고별강화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Fernande F. Segovia, The Farewell of the Word: The Johannine Call to A bide (Minneapolis: Gortress, 1991), 5-20. R. Alan Culpepper, The Gospel and Letters, 83.
고별 강화를 죽음에 임박한 위대한 인물의 입에 두는 것은 기원 후 3세기까지 많은 종교 문헌의 공통점이었으며, 유대교와 성서 문학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러한 예들은 구약에서는 야곱이 자녀들에게 준 고별 강화와 축복(창 47:29-49:33), 여호수아의 고별강화(수 22-24장), 다윗의 고별강화(대상 28-29장), 신명기의 모세의 마지막 기도(32-33장) 등이며, 유대문헌 중 『12족장 유언서들』(The Testaments of the Twelve Patriarchs), 토비드(14:3-11)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약성서에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바울의 고별강화(행 20), 목회서신에 나오는 고별강화(딤후 3:1-4:8), 베드로 후서의 고별강화(1:12-15) 등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17장이 기도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N. Walker는 17장의 기도와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을 서로 비교하면서 요한이 주기도문을 알고서 그것을 토대로 자신의 상황과 관련시켜 17장의 기도를 구성했다고 주장한다. 〔N. Walker ''''''''The Lord''''''''s Prayer in Matthew and in John'''''''', NTS 28: 237-56〕
예수님은 세상에 남아 있을 제자들을 위해 아버지께 기도하시는데 일반적인 기도와는 달리 제자들을 향한 교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예수님의 기도 내용 대부분은 제자들에 대한 교훈과 그들의 미래에 관심이 있다. 요한복음 11장 41절 이하에는 요한복음의 예수의 기도가 다른 기도와 다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이미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의 계시자이며, 그것은 예수의 요청이 항상 들여지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께 간구할 필요가 없다. 예수는 단지 감사만을 할 뿐이다.
M. L. Appold는 17장이 단지 예전의 형식들이나 용어들을 모아 논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예전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거룩한 아버지여 라고 부르는 것 등). Make L. Appold에 의하면 17장은 단순히 복음서 기자의 창작물이 아니라 그들이 드리는 예배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17장은 단순히 개인적인 고백이라기보다는 예배 공동체의 신학적인 성장의 과정과 연결된다는 것이다.〔Make L. Appold, The Oneness Motif in the Fourth Gospel, 199〕 17장의 기도는 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한다. 요한 공동체는 예수가 승천하신 후에도 여전히 파라클레토스의 형태로 자신의 교회에 임재하시며 말씀하시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 말씀은 예배시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 설교 중에 새롭게 들려졌다. 17장은 요한 교회의 예배 경험과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예수의 생애를 반영함과 동시에 공동체의 생활과 믿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17장의 부분들이 공동체의 실제적인 기도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다.〔Ibid.〕
17장이 기도의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의 기도의 형식과 이의 기능을 살펴보는 것이 이 장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라 생각된다. 주후 1세기경 유대인의 종교생활에 있어 기도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주후 1세기의 유대인의 기도는 크게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규정된 법정의 기도(prescribed statutory prayer)이며, 다른 하나는 사적인 혹은 자발적인 기도이다. 규정된 법정의 기도는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한다. 아침, 오후 그리고 저녁이다.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관습은 이미 다니엘서 6:11에 기술되어 있다.
축복기도는 식사 전과 후에 한다. 이 매일 드리는 기도의 형태는 Shema Shema라는 용어는 히브리어 에서 온 것으로 신명기 6:4-7의 명령을 가리킨다.
와 Tephilla Tephilla는 히브리어 הלפת에서 온 것으로 소위 1세기말의 ‘18기도문‘(Eighteen Benedictions)으로 구성된 기도를 가리킨다.
로 구성되어 있다. 세마는 아침에 암송되었고 저녁에는 테필라와 같이 암송했다. 오후 기도는 오후의 희생제와 함께 드려졌으며 이 때는 테필라를 기도했다. Johan Ferreira, Johannine Ecclesiology, JSNT Supplement series, 160 (England: Sheffield Academic Press, 1988), 48-49.
17장의 기도는 청원과 여러 요구들 그리고 그 요구를 정당화하는 사실들의 암송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대인의 기도의 중요한 특징인 감사와 고백이 나타나 있지 않다. 대신 아버지께 대한 많은 간구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간구들은 명령형태의 직접적인 간구이다.
요한복음 17장의 구조는 크게는 세부분(1-5절, 6-19절, 20-26절)로 나눌 수 있으며 17장의 구조를 Hoskyns는 1-8절, 9-18절, 19, 20-26로, Dodd는 1-5절, 6-8절, 9-19절, 20-26절로 나눈다. Barrett는 1-5절, 6-19절, 20-24절, 25-26절, Bultmann은 1-5, 6-26, 그리고 Becker는 1-2절, 3절, 4-26절로, Boyles는 4-8절, 9-19절, 20-23절로 구분한다.
, 좀 더 세분하면 아래와 같이 다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a: 1-5, 세상 앞에서의 영화롭게 된다. 예수의 사역의 완성
b: 6-10.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준다.
c: 11-13. 제자들을 위한 기도
b'''''''': 14-19.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준다.
a'''''''': 20-26, 세상 앞에서의 영광; 제자들의 연합의 완성
세 부분으로 구분할 때 각각의 기도의 대상이 달라진다. 1-5절은 예수가 자신을 위해 간구하며, 6-19절은 그의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20-26절은 세상을 향한다. 이 세 부분을 영광의 주제가 연결시킨다(1, 5, 10, 22절). 기도의 중심 주제는 공동체의 일치와 연합임을 알 수 있다.
2. 17장의 기도의 중심 내용
이 기도는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과 미래의 신자들을 위한 것이다. 기도의 주된 내용은 세상에 남아 있게 되는 제자들을 악한 자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것과 그들의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키며, 그들이 하나가 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다(9-11절). 악한 자들로부터 그들을 지키며(15절), 진리 가운데 거룩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17절). 뿐만 아니라 믿게 될 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20절 이하). 이 간구들의 내적 동기는 예수님의 기도가 항상 응답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그의 기도를 항상 들어준다는 것을 아신다(11:42).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8:26). 그의 일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낸 아버지의 일이다(14:24). 그러므로 이 간구는 이미 대답을 예상하는 요구이다. 이미 대답이 주어진 간구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17장의 기도의 내용을 살펴보자.
첫 번째 단락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기도하신(1-5절). 이 기도의 내용은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이르렀다고 하는 것이다. 영광이 중심 주제이다. 영광은 제사복음서 전체의 중심 주제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의 지상의 사역과 관련하여서는 영광을 말하지 않고, 인자의 미래적 출현과 관련해서만 언급하며, 누가는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영광의 모습을 기술한다. 그러나 제사복음서에는 처음부터 ‘영광’(glorification)의 주제가 등장하며, 이 단어도 빈번히 사용한다. 곧 제사복음서는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1:14)라는 구절로 시작하며, 종결부분에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도마의 고백이 있다. 케제만은 도마의 고백은 단지 종결부분의 고백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걸친 사상이라 한다.(E. Käsemann, The Testament of Jesus, 7-8〕 제사복음서 기자는1-12장까지에서는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것으로 그리고 13장부터는 예수가 친히 영광을 받으셨다고 기술한다.
이 기도는 ‘아버지’를 부르면서 시작하는데, 5절, 21절, 24절에도 마찬가지이다. 이 기도는 아들의 역할이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라고 한 후 영생에 대해 정의한다. “영생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3절) 이 부분은 서론의 로고스 기독론(1:1-18)과 병행을 이룬다.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는 것(1:12)이 영생의 선물을 전하는 것이다(17:2).
. 이것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분리시키는 중요한 구절이다. 유대교와는 달리 기독교는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본 하나님만을 참된 하나님이라 한다. 아는 것은 지적으로만 아닌 것이 아닌 교제와 관계를 통해 아는 것을 뜻한다.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이며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 자체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결합과 사귐을 나누는 세계요, 그러한 삶이 곧 영생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미래적인 소망이 아니라 현재적인 실체이다. 이 선언을 통해 공동체는 자신들이 이미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인이라는 자긍심을 갖게 된다.
두 번째 단락(6-19절)에서 예수님의 기도는 그 자신을 위한 간구에서 그의 제자들을 위한 간구로 방향을 전환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그들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이기 때문이다(6절). 제자들은 예수님이 떠난 후에도 세상에 남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자들이기에 더 이상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제자들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의 기본 주제이다. 주목할 것은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은 그들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의 선한 본질이나 선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예수님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역의 결과로 하나님에게 속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진술은 교회로 하여금 자신들은 하나님이 세상으로부터 불러 내셨으며,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에게 속한 자라는 인식을 갖게 한다. Lesslie Newbigin, The Light has come, 228.
곧 자신들은 세상과는 화합하지 않는 구별된 존재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가 그에게 준 자들에 관해 간구하신다(9절). 예수님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 이유는 그들이 아버지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한 상황에 있었다. 곧 세상으로부터 고난을 받으며, 그 박해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한 교회에게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으며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 시켜 줌으로 이러한 고독감을 극복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씀하신 후, 계속해서 11절에 자신이 제자들을 떠나게 된다고 말씀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예수님은 더 이상 세상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아버지께로 가게 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머물러 있다. 하나님을 ‘거룩한 아버지’라 부르는데 하나님을 지칭할 때 ἅγιος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경우는 오직 여기에서 만이다. 하나님을 거룩한 존재로 부르는 것은 17절의 요구로 독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구절은 예수님의 죽음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교와 사역의 위치를 말해 준다. 예수님은 더 이상 ‘세상에서’ 활동하지 않고 단지 여기 그의 제자들 가운데 활동한다. 다가올 수난은 세상과의 궁극적인 대결이 될 것이나 예수님은 세상과는 분리되어 제자들 가운데 남아 있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그것은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처럼 하나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연합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 연합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성취된다. ‘이름으로’에서 전치사 ἐν은 도구적인 의미로 보면 ‘이름을 수단으로’라고 해석할 수 있고, 공간적인 의미로 보면 ‘이름 안에서’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구절에서는 두 의미를 다 포함한다. 그렇다면 이 간구는 말씀 안에서 그리고 말씀으로 연합하게 해 달라는 것이다. 교회의 연합은 간단한 친교의 연합을 넘어서는 고백의 연합을 포함한다. Ibid., 118.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을 통해 공동체를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선택된 자들을 보호하며,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간구한다, 그러나 멸망의 자식은 제외시킨다. 이는 외부의 박해만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도 그릇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이 멸망의 아들이란 표현은 신약성서 다른 곳에서는 한번 나타나는데, 이는 사탄을 가리킨다(살후 2:3, 8-9절).
예수님은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라”(13절)고 할 때 분사완료형을 쓰는 것은 기쁨이 교회의 지속적인 특징임을 지시해 준다. 15:11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말함은 그의 기쁨이 그들 가운데 있게 하기 위함이요, 그들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16:20-22에서 ‘제자들의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라’ 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다시 그들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16:24에서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얻게 될 것인데 이로써 그들이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보면 요한 교회의 기쁨은 계시자의 말씀 혹은 계시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Ibid., 119-120
. 예수님의 말씀이 참된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그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한다. “내가 비 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절). 예수님은 세상이 교회를 싫어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그들을 거두어가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악한 자들로부터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었다’고 한다. 반면 요한1서 2:13-14에 의하면 ‘신자는 악한 자들을 이기었다’.
예수님은 속해서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17-19절).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에 의해 거룩하게 해 달라는 간구이다. 요한복음에 있어서 거룩함, 혹은 인침은 죄가 없는 상태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분됨을 의미한다. 이 기도에서 공동체를 구별하는 목적은 세상으로 보내어지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거룩함을 상태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교회의 분리됨을 말한다.
이는 18절에 근거할 때 사명을 위해 그들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곧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선교와 관련이 깊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은 선교 사명을 감당하게 함으로 유지된다.
세 번째 단락은 20-26절은 미래의 신자들에 관한 예수님의 기도이다(20-26절). 브라운은 제자들의 말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될 자들의 그룹은 구성면에서 10:16과 11:52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부름의 대상이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들까지로 확대된다. 요한에 있어서 관심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지 민족적인 근거는 아니다고 한다 (R. E. Brown, The Gospel According to John, II, 774).
예수님이 미래의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 이유는 신자들이 하나 혹은 연합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가리키는 연합은 무엇인가? 교회의 연합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연합을 반영한다. 곧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이 교회의 하나 됨의 근거요, 모델이다.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 됨은 말씀의 연합이요, 사역들의 연합이다. 다른 말로 하면 본질이나 존재의 연합이 아니라 기능의 연합이다. 이는 보냄 받음의 연합이다. Ibid., 128.
설교적인데 그 목적이 있다, 세상으로 믿게 하려는 것이다(21절). R. Alan Culpepper, The Gospel and Letters of John, 221.
두 번째 목적절은 교회의 하나 됨 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그들이 아버지와 아들 안(ἐν ἡμιν)에서 하나 되기를 원한다는 진술이다. 여기서도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의 말씀과 사역으로 긴밀히 연결되어짐을 말한다.
세 번째 목적절은 아들의 요구의 마지막 이유이다. 곧 세상이 아버지가 아들을 보냈음을 믿게 하고자 함이다. 연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이 믿게 하기 위함이다. 세상으로 공동체를 보냄으로 세상이 믿게 하려는 것이다.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는 선교사역을 위해 아버지와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연합 자체가 세상을 믿음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세상에 보냄으로 세상이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다. Howard-Brook, Becoming Children of God, 368.
17장의 기도의 주제는 몇 가지로 요약하면, 먼저는 보호의 주제이다. 예수가 떠난 후 세상에 남게 될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것인데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해 주며 악에 빠지지 않고 지켜달라고 한다. 또한 하나 됨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신자들의 하나 됨 간구한다. 신자의 하나 됨 근거요 모범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됨. 이 하나 됨을 원천으로 해서 믿는 자들과의 하나 됨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이 하나 됨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다는 말로 대치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음으로 해서 제자들이 사랑으로 하나 됨 이룬다. 그리고 이 하나 됨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데 까지 발전하다. 그러한 점에서 보호와 하나 됨 하나님을 알게 하며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게 됨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곧 교회는 예수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인식을 통해 세상의 핍박으로부터 보호를 확신하며 이 신앙고백을 통해 내적으로 하나가 되는 힘을 얻는다.
III. 닫는 말
대제사장의 기도로 불리어지는 요한복음 17장의 예수의 기도는 그 구성에 있어서 당시의 문학적인 세계에서 즐겨 사용하는 죽어 가는 사람이 후손들에게 남기는 고별강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별강화와의 차이점은 기도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과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간구라기보다는 제자들을 향한 교훈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데 있다. 그 기도의 중요 내용은 예수가 떠난 후 세상에 남게 될 기독교인들은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게 될 것인데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존해 주며 악에 빠지지 않고 지켜달라고 하는 것과 공동체의 하나 됨이다.
교회가 하나가 되며, 세상으로부터 보전되어야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신자 공동체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하며,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며, 신자들 상호간에 하나가 되어하는 이유는 세상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교훈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님과 신자의 하나 됨 본질상의 하나 됨이라기보다는 기능상의 하나 됨임을 알 수 있다.
당시 교회는 유대교로부터의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는 요한복음에는 출교라는 단어의 사용과 경건한 유대들이 회당예배에서 매일 낭송하는 18기도문의 열두 번째 기도문이 기독교인들에 대한 저주, 그리고 요한복음에 ‘유대인’란 단어의 적대적인 의미로의 사용 등으로 알 수 있다. 요한 기독교인들이 회당으로부터 박해를 받은 이유는 고 기독론, 비유대적 개종자들을 기독교가 수용한 것, 유대교의 위기와 기독교인수의 증가, 또한 66-70년 사이의 유대전쟁에 기독교인들이 가담하지 않는 것 등으로 보인다. 또한 내적으로는 요한 교회의 고 기독론의 수용으로 인해 구성원의 이해의 차이로 인해 분열의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요한 1서에는 이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갔다고 증언한다(2:19). 이러한 상황에서 요한 공동체는 신앙적인 회의와 갈등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에 쌓여 있었다. 17장의 기도는 이러한 구성원들에게 위로와 확신 그리고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요한은 교인들에게 이미 영생을 소유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저자나 출교 조치가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들이 세상에 속하는 회당으로부터의 배척을 받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으며, 하나님이 보호하시기에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제사복음서기자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선교의 사명을 제시한다. 교회가 세상에 속하지 않으나 세상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에 세상에 남아 있는 이유는 예수를 증거 함으로 세상으로 믿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요한의 교회는 그들이 직면한 위기를 소극적으로는 하나 됨과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확신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증거 함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요한 교회는 일치를 지향하는 공동체임과 동시에 선교를 지향하는 공동체임을 알 수 있다.
17장의 메시지는 오늘의 교회에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오늘의 한국교계의 주된 관심은 교회의 연합이 있었으며, 가시적인 성과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동안 분열을 계속해오던 한국교회에 연합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연합을 이루려는 첫째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고별강화에서 예수께서 연합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연합자체에 그 목적이 있지 않았다. 선교에 있다. 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해 연합되어져야 한다. 교회는 하나 되고 세상으로부터 구별되어 세상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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