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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장소 |
내용 |
비고 |
08:00 |
잠실역 주변 |
서울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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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 |
각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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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 |
고산정 제월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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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0 |
애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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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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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 |
우암 송시열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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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채운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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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연풍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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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
원풍리 마애석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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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문경새재 제1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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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 |
조령 제3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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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연풍 출발 |
연풍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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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
잠실역 주변 |
서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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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강사(오덕만 선생 011-417-7481)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旅路에서 즐기는 詩 感想 ]
偶 吟 ( 우 음 ) 그냥 한번 읊어 봄
-신몽삼 (辛夢參) 1648(인조26) ~ 1711(숙종37)
心有是非知己反(심유시비지기반) 내 자신 옳고 그름 돌아볼 줄 알아야 하고
口無長短及人家(구무장단급인가) 남의 장단 이러니저러니 말하지 말아야지.
消除惡念霜前葉(소제악념상전엽) 서리 앞에 잎 지듯이 나쁜 생각 떨어내고
培養善端雨後茅(배양선단우후모) 비온 뒤에 띠 자라듯 착한 마음 길러야지.
귀먹으니 편하구나
- 윤추(尹推) 1632(인조10)~1707(숙종33)
* 내가 성격이 거칠고 말이 많아서 늘 이것을 고치려 했으나 못 고치고 있었는데 귀가 먹은 뒤로는 저절로 말없는 사람이 되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에 시 두 수를 지어 자신을 조롱한다.
言寡方知自耳聾(언과방지자이롱) 내가 말이 왜 줄었지?
耳聾誠有寡言功(이롱성유과언공) 아하, 귀 먹어서 그렇구나.
人雖語大吾安聽(인수어대오안청) 사람들의 큰 목소리 내 귀엔 작은 소리
我亦聲微彼不通(아역성미피부통) 내 목소리 역시 작아 남들도 멀뚱멀뚱.
默默謙謙終日坐(묵묵겸겸종일좌) 입 닫고 말없이 온종일 앉아 있으니
廖廖寂寂一堂空(료료적적일당공) 고요하고 한적하여 빈집인 듯 느껴지네.
平生駁雜多尤悔(평생박잡다우회) 성격이 박잡하여 평생 후회 많았는데
天奪其聰幸此翁(천탈기총행차옹) 하늘이 이제서야 늙은이 귀를 막았구나.
人皆勸我使治聾(인개권아사치롱) 사람들이 너도나도 귀 치료를 권하지만
吾曰吾聾亦有功(오왈오롱역유공) 귀머거리로 지내는 게 나에겐 더 좋은 거요.
衆口諼效聞亦厭(중구훤효문역염) 시끌시끌 많은 말들 안 들리니 너무 좋아
同心聲氣默猶通(동심성기묵유통) 마음 같은 사람끼린 말 없이도 통한다오.
旣難聽語還無語(기난청어환무어) 들리지 않은 뒤로 나도 말이 줄었으니
非是逃空却喜空(비시도공각희공) 말많던 늙은이가 적막함이 좋아졌네.
此理方知知者少(차리방지지자소) 이런 이치 아는자 세상에 몇 안 될거야
競相提耳笑愚翁(경상제이소우옹) 사람들은 소곤소곤 이 늙은이 흉을 보네.
윤추는 자는 자서(子恕)이고, 호는 농은(農隱), 농와(農窩), 농와(聾窩), 청송재(靑松齋)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입니다. 윤선거(尹宣擧)의 아들이고 윤증(尹拯)의 아우입니다. 윤추는 74살 때(1705년, 숙종31)에 귀가 먹어 남들의 말이 잘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시는 1705년에 지은 것으로 그의 문집 <농은유고(農隱遺稿)> 실려 있습니다.
산세가 아름다운 괴산
괴산은 남한간의 상류인 달천과 백두대간인 한남금북 정맥이 갈라져 있는 곳으로 깨끗한 천혜의 자연경관을 미래의 자원으로 삼고 있는 곳이다.
그 속에 푸른 산과 맑은 물의 정기를 이어받은 우리는 조상의 빛난 얼을 계승하고 미래를 꿈꾸며 살고 있다.
남으로 백두대간이 빚어 놓은 명산과, 그 속에서 발달된 화양동, 선유동, 쌍곡계곡 등이 선경을 이루고, 발 닿는 곳마다 명승지가 아닌 곳이 없어 괴산을 찾았다 떠나는 발길을 무겁게 하는 그런 곳! 그 곳이 괴산이다.
특히 괴산군은 전체면적에서 산이 76%를 차지하고 있는 그 산세가 아름다워 많은 부분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많은 산중에 의미 있고 산세가 수려한 35개의 명산을 엄선하여 등산로를 개발하여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충청북도 대부분의 지역과 마찬가지로 괴산은 삼한시대 마한의 땅이었다. 삼국시대 초기 백제에 속했다가 고구려에 편입되어 잉근내현이라 불렀다. 신라땅이 된 후로는 괴양현이라 하다가 고려 때 괴주가 되었으며 조선 태종 3년부터 괴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속리산 국립공원 구역의 북쪽 끝 보개산 기슭에 자리잡은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2년(515) 유일 스님이 연못 속의 불상을 건져 모시고 창건한 절이라 전해진다. 문경으로 넘어가는 이화령 아래, 연풍 면소재지인 행촌리에는 조선시대 연풍현 관아의 동헌 건물이 암아 있는데 조선 최고의 화가 가운데 한사람인 단원 김홍도가 여기서 3년 동안 현감을 지냈다. 같은 연풍면의 원풍리 찻길가 바위벽에는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이불병좌상이 새겨져 있다.
각연사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法興王,514-539)때 유일대사(有一大師)가 세웠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각연사 「創建由來記」에는 “법흥왕 때에 어느 대사가 쌍곡리에 절을 지으려고 木手를 시켜 나무를 다듬고 있는데 까마귀 떼가 날아와서 나무조각을 물고 날아가길 자주하므로 이상하게 생각한 대사가 그 까마귀떼를 따라가보니 깊은 산골에 있는 연못 속에 나무조각을 떨어뜨려 연못을 살펴보니 그 속에 석불이 앉아있어 그 곳에 절을 세우고 ‘覺有佛於淵中’하였기 때문에 절이름을 覺淵寺라 했다”하고 고려 혜종(惠宗,944-945)연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三世如來及觀音改金記」에는 ‘此所以通一大師 伽藍’이라 하여 고려 光宗때의 고승인 통일대사(通一大師)가 창건했다고 했다.
한편 「大雄殿 上樑文」에는 ‘金傅大王之願刹’이었다 하고 隆慶(1567-1572), 順治(1644-1661), 康熙(1662-1722) 연간에 중수하였다고 한다.
각연사에는 비로자나불좌상, 통일대사탑비, 비로전, 대웅전, 통일대사부도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통일대사부도
이 부도는 고려 초기의 큰스님이었던 통일대사(通一大師)의 사리탑으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이후의 부도양식을 따르고 있는 아름다운 부도는 상·하대의 연꽃무늬와 귀꽃 등을 조각한 수법으로 미루어 통일대사비와 같은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도는 높이 2.45m인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 부도이다. 지대석 위에 하대기석을 놓고, 하대석 위에 중대석 괴임대를 얹고, 각 변에 우주(隅柱)만 모각된 중대석과 아래 3단 받침과 측면에서 홑잎의 앙련(仰蓮)을 두르고 위에 갑석형을 돌린 1단의 괴임을 만든 상대석을 놓았다. 탑신석은 1변의 너비 16cm 높이 44cm로 각 면에 우주와 앞 뒤 면에 문비(門扉)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아래에 4단 받침이 있으며 부드러운 처마에 곡선의 합각(合角)이 뚜렷하고 8면의 전각부(轉角部)에 귀꽃을 장식하였지만 일부가 파손되었다. 상륜부(上輪部)에는 높이 10cm의 노반석(露盤石)만이 남아 있다.
통일대사탑비
이 비는 고려 광종(光宗) 때의 고승인 통일대사의 부도탑비로 알려져 있으며 제자인 석총훈(釋聰訓) 등이 고려 제4대 광종 9년(958)에 건립한 것이다.
비는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고 있는 완형이나, 해서(楷書)로 새겨진 비문은 대부분 마멸되어 260자 정도만이 남아있다. 화강암 1매로 된 귀부의 편장(偏長) 6각 귀갑문 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으며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두의 각부 조각은 웅장하다. 비좌(碑座)는 측면에 안상(眼象)을 조식하였으며 윗면에 복련(伏蓮)을 돌리고 받침을 조출하여 비신(碑身)을 받치고 있다.
용각이수(龍刻螭首)는 아랫면에 낮은 각형 2단의 받침과 사분원의 몰딩이 비좌와 대응하며 앙련(仰蓮)도 같은 수법이고, 4면의 용틀임이 웅장한 정상에는 보주(寶珠)가 완전하다.
화강암으로 조성한 귀부와 비신, 이수 등 각부의 양식수법은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 초기에 걸친 작풍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석조귀부
이 귀부는 각연사 위쪽 경작지에 있는데, 현재 비신(碑身)과 이수(姨首)가 결실되어 그 성격을 알 수 없으나 각부의 조각기법이 우수한 수작이다.
귀부는 받침석과 한 돌로 조각되었으며 받침석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다. 4개의 다리는 힘차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고 발톱은 날카롭다. 좌우대칭으로 표현된 귀갑문은 4각형과 6각형의 변형된 형태이며, 안에는 타원형이 변형된 꽃무늬를 장식하였다.
목과 귀두(龜頭)는 별석(別石)으로 만들어 끼우도록 한 것으로 지금은 유실되고 없다. 목과 등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연화문 모양을 조식하였다.
비좌(碑座)는 장방형으로 아랫부분에 화려한 구름무늬를 조식하고, 구름무늬 위에는 안상(眼象)을 표현하였는데 정면과 후면에 각 4개, 좌우 측면에 2개씩 조각되었다.
이 귀부는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신체와 귀갑문의 형태 및 귀갑 내부장식, 비좌의 구름무늬와 안상, 귀두를 따로 만들어 끼운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고려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각연사 대웅전은 사각형의 석축기단 위에 정남향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지붕 다포집이다.
주초는 다듬지 않은 덤벙초석이며 기둥에는 가벼운 배흘림이 있다. 내5·외2출목으로 두공을 주간에 3구씩 올렸다. 정면 3칸에는 모두 빗살합문을 달아 출입토록 하였으며 측면 앞쪽 칸에도 빗살문을 달았다. 정면 평주 위에는 대두를 장식하여 이례적이다. 건물 내부에는 장엄한 닫집을 달았는데 천개 각부를 후대에 보수하였으나 원형이 잘 남아 있으며 마루는 우물마루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건축물이나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어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살필 수 있다.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융경(隆慶,1567-1572), 순치(順治,1644-1661), 강희(康熙, 1662-1722)년간에 보수한 바 있지만, 지금의 대웅전은 조선 영조(英祖) 44년(1768)에 중건된 건물이며 최근에는 1979년에 보수하였다. 대웅전 안에는 주불로 석가여래(釋迦如來), 약사여래(藥師如來) 그리고 통일대사소상(通一大師塑像)이라고 구전되는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을 모시고 있다.
비로전
각연사 비로전은 보물 제433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舍那佛坐像)을 봉안하고 있는 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정남향하였다.
초석은 본래의 원형주좌와 신방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위에 원주를 올렸다. 건물구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내·외 2출목 다포양식이다. 기둥에는 가벼운 배흘림이 있고, 정면 3칸에는 빗살합문을 달았다. 기둥 위에 얹은 창방과 평방은 축부를 연결하였으며, 그 위에 내·외 2출목의 두공을 주간(柱間)에 2구씩 배열하고 있다. 마루는 우물마루이다. 조선후기의 건축물이나 전체적으로 단아하며 당시의 기법을 잘 보이고 있다.
창건년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23년 중수할 때 대들보 초꼬지에서 발견된 종이에 崇禎紀元後三戊子春 順治十二年乙未 光武三年乙亥 大正十五年重修라 한 것으로 미루어 지금의 건물은 조선 인조 26년(1648)에 중건되어 효종 6년(1655), 광무 3년(1899), 그리고 1927년에 보수한 것으로 보여지고, 최근에는 1975년에 중수하였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비로전에 봉안되어 있는 광배(光背), 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불상으로 신라말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불상의 하나이다.
화려한 8각대좌 위에 당초무늬와 구름무늬 그리고 연화좌(蓮花座)상의 삼존불 등 9화불이 현란하게 새겨진 광배를 배경으로 앉아 있는 이 불상은 대좌나 광배와 잘 조화되게 아담하고 오밀조밀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육계가 불분명한 머리, 계란형의 단아한 얼굴에 알맞게 묘사된 이목구비, 조용한 미소 등에서 단정한 선사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며,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자세와 지권인(智拳印)을 한 손에서 이루어지는 삼각형구도의 체구는 우람하거나 격정적인 모습이 아닌 안온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신라 최성기의 전형적인 불상처럼 긴장된 활력과 세련된 기교는 줄었지만 일면 단아하면서 일면 화려해진 조각양식을 보이고 있어서 선적인 독특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고산정 제월대
고산정은 괴강(槐江)이 내려다보이는 제월대 옆에 있는데, 조선 선조때의 명현(名賢) 서경(西坰) 유근(柳根)이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있을 때 이 곳의 풍광을 사랑하여 선조 29년(1596) 만송정(萬松亭)과 고산정사(孤山精舍)를 짓고 광해군때 낙향하여 이곳에 은거하였다.
숙종조에 편찬된 괴산군읍지(槐山郡邑誌)에 孤山精舍 在郡東八里 乙亥年 爲火燒盡이라 하여 고산정사가 숙종 21년(1695)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했으며, 이후의 기록에 고산정사의 재건과 관련된 언급이 없어 지금 ‘고산정’이라 부르는 건물은 만송정을 개칭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단층 목조기와집으로 사면 모두를 개방하고 평난간을 둘렀다. 정자에는 이원(李元)이 쓴 ‘孤山亭’이란 현판과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선조 39년(1606)에 쓴 ‘湖山勝集’이라는 편액, 그리고 명나라 사신 웅화(熊化)가 광해군 1년(1609)에 쓴 ‘孤山精舍記’가 있으며 고산정사기는 명문으로 이름이 높다.
애한정
애한정은 임진왜란 때 백의(白衣)로 왕을 의주까지 호가(扈駕)하여 그 공으로 별좌(別座)에 올랐다가 광해군 때 낙향한 박지겸(朴知謙)이 광해군 6년(1614)에 지은 학재(學齋)이다.
이 후 현종(顯宗) 15년(1674)에 그의 손자인 박연준(朴延俊)이 군수 황세구(黃世耉)의 도움을 받아 새로 짓고, 숙종 38년(1712), 숙종 44년(1718), 영조 51년(1775), 그리고 1979년에 중수하였다. 초기의 건물은 아래쪽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작은 건물이었던 듯한데, 후대에 중수하면서 위쪽에 정면 6칸, 측면 2칸반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 정자에는 「愛閑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안에는 광해군 6년(1614)에 애한정주 박지겸이 지은 ‘애한정기(愛閑亭記)’와 ‘애한정팔경시(愛閑亭八景詩)’를 비롯하여, 현종 15년(1674)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애한정이창기(愛閑亭移創記)’와 ‘제애한정기첩후(題愛閑亭記帖後), 숙종 38년(1712)에 조천(鳥川) 정당(鄭棠)이 지은 ‘애한정중수기’, 숙종 44년(1718)에 송병선이 지은 ‘애한정중수기’, 순조 20년(1820)에 박의화가 지은 ‘애한정게판기’등 많은 각판이 있다.
동몽선습비
조선의 선비로서 학문의 기초를 다지는 학습서로 그리고 몸가짐을 바로하는 수양서로 누구나 읽은 책이 있으니 바로 동몽선습(童蒙先習)이다.
조선시대 곳곳에 서당(書堂)을 세워 그곳에서 청소년의 기초교육을 맡으니 천자문(千字文)으로 문자를 익힌 후에 동몽선습을 읽어 문리를 터득하고 학자로서의 기본소양을 다지니 그야말로 선비의 필독서요 우리나라 최초의 교과서(敎科書)인 셈이다.
책의 내용은 만물중에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오륜(五倫)이 있기 때문이라 하고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을 그에 관련된 고사(古事)와 경전(經典)의 구절을 인용하여 초학자들에게 알맞도록 해설을 부치고 이어 총론(總論)에서 오륜이란 사람이 행하여야 할 자연적인 규범으로 사람의 모든 행실이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 하고, 특히 효(孝)는 백행(百行)의 근원이 된다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도와 절차를 밝히고 있다. 다음은 중국의 역사를 현인(賢人) 중심으로 기술하고, 국가의 흥폐(興廢) 존망(存亡)하는 까닭이 인륜(人倫)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함에 처음엔 임금이 없더니 신인이 있어 태백산아래 내려오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고, 국호(國號)를 조선이라 하니 이분이 단군(檀君)이다 하여 자주적 역사관을 보이고 그후의 삼국과 후삼국, 고려, 조선의 역사를 간략히 기술하였다. 권말(卷末) 부기(附記)에서는 선비로서의 자제 가르침의 정도와 삶의 자세를 상세히 기술하여 선비의 수신(修身)과 처세(處世)의 도를 제시하였다.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이 화양동(華陽洞)에서 이 책의 발문을 쓰면서 지금 공부하는 어린이들이 제반 명칭이나 경계를 대략적으로 인식하여 마침내 깨달음에 도달함은 반드시 이 책에서 얻은 것이니 그 공로가 크다 하였고, 영조대왕(英祖大王)은 글은 비록 간략하나 기록한 것은 넓고, 책은 비록 작으나 포용한 것은 크다고 칭송하면서 서문(序文)을 부쳐 간행하여 세상에 널리 펴니 이 책의 중요성을 누구나 인식하고 있음을 대변한다.
저자인 박세무(朴世茂)는 1531년 식년(式年) 문과에 급제후 승문원(承文院) 사관으로 직필로 이름을 떨치고 안변부사(安邊府使), 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지내고 예조판서에 추증되고 괴산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배향된 인물이다. 일찍이 벼슬에 뜻이 없어 이곳 괴산에 머물면서 1549년 이 책을 저술하였으니 선비의 고을에서 선비필독의 교과서가 탄생되었음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동몽선습이 간행된 유지에 기념비를 세워 이곳이 선비의 고장임을 확인하고자 함이다.
우암 송시열 유적
청천 우암 송시열유적은 화양동계곡 안에 있는 화양서원터(華陽書院址)와 만동묘터(萬東廟址)를 중심으로 암서재, 읍궁암, 애각사적, 묘소와 신도비 등 송시열과 관련된 사적들로 구성되었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은거하였던 곳에 세워진 서원으로써 조선시대 학자들의 결집장소였으며, 만동묘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원군을 보내준 중국 명나라 황제 신종(神宗),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써 유지가 잘 남아있다.
암서재는 송시열이 만년에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읍궁암은 효종(孝宗)의 승하로 북벌이 좌절되자 효종의 기일마다 이곳에 올라 통곡하였다고 전한다.
이 외에도 화양동에는 충효절의(忠孝節義), 비례부동(非禮不動) 등 많은 애각사적이 산재해 있어 송시열의 북벌애국사상과 민족자존정신이 깃든 유적의 성격과 조선성리학의 중심지로서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고 왜곡된 사적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화양서원 묘정비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肅宗) 22년(1696)에 문정공(文正公) 좌의정(左議政)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창건되던 해에 사액(賜額)을 받고 숙종 42년(1716) 어필(御筆)로 편액(扁額)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賜額書院) 중에서도 가장 이름 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제수전(祭需錢)의 봉납을 강요하는 화양묵패(華陽墨牌)의 폐단으로 좌의정 김좌근(金佐根)의 주청으로 철종(哲宗) 9년(1858)에 폐쇄되고 고종(高宗) 7년(1870)에 건물이 헐리었다.
묘정비는 숙종 42년(1716)에 건립되었으며,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 찾아 다시 건립하였다.
이 비는 높이 210cm, 폭 75cm, 두께 30cm로 넓이 150cm의 화강암 대석 위에 세워져 있다. 비문은 윤봉구(尹鳳九)가 지은 것이다.
만동묘
만동묘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유교(遺敎)에 따라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가 숙종 29년(1703)에 건립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견한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던 곳이다.
경술국치 이후 1917년 일제가 만동묘의 제사를 금지하고 이를 반대하는 유림을 구속하였으나 유림에서는 춘추계를 조직하여 몰래 제사를 지냈는데 일제는 1937년에 이들을 체포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훼손하더니 1942년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렸다.
묘정비는 가로 142cm 세로 117cm 높이 38.5cm의 사각형 대석(臺石) 위에 너비 76.5cm 두께 45cm 높이 229cm의 비신(碑身)과 가로 126cm 세로 97cm 높이 43cm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일반형 석비이다. 1942년 이후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후 찾아 다시 세웠다. 건립당시 정면 1칸 측면 1칸의 비각이 있었으나 파괴되었던 것을 2003년 복원하였다.
암서재
1666년 8월에 암서재를 신축하였다. 암서재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만년에 정계에서 은퇴하여 화양동에 은거할 때 학문을 닦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국립공원인 화양동 계곡의 제4곡 금사담옆 절벽위에 위치하는데 주위 바위 사이에는 노송이 울창하고 밑으로는 맑은 물이 감돌며 층암절벽이 더할 수 없는 경치를 엮어내고 있다.
대지 약 20평 정도의 목조기와 집으로 2칸은 방이고, 1칸은 마루로 되어있는데 여기에 현판 5점이 걸려있다.
앞에는 암반사이에 일각문이 세워져 있으며, 일제 말에 후손들이 수리하였고, 1970년에 다시 보수하였다.
문인 권상하(權尙夏)가 쓴 암서재기에 尤庵先生於丙午年間築精舍於溪南이라 하고 있어서 1666년 8월 암서재를 신축하고 이곳에 거주한 것을 알 수 있다.
채운암
채운암(採雲庵, 彩雲寺로도 불린다)은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화양천을 건너 마주보이는 첨성대 안쪽계곡에 있었다.
고려 충열왕 3년(1277)에 도일선사가 창건하고 ‘수도암’이라 하였는데, 조선 광해군 2년 혜식선사가 중창하고 ‘채운암’이라 개칭하였다. 또한 현 위치에는 효종 4년(1655) 혜일선사가 ‘환장사(煥章寺)’를 창건하였다. 그후 한말 왜병들의 방화로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전소되었고, 건너편에 있던 채운암이 1948년 홍수로 매몰되자 그 요사채 일부를 이 곳에 옮겨 환장사와 채운암을 합쳐 증축하고 채운암이라 이름하였다 전한다.
한편 민진원(閔鎭遠)의 단암만록(丹巖慢錄)에는 “숙종조의 상신(相臣) 민정중(閔鼎重)이 사신으로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숭정의종황제(崇禎毅宗皇帝)의 어필 ‘非禮不動’의 휘호를 가지고 귀국하여 송시열(宋時烈)에게 주니 송시열이 화양동에서 이 글씨를 거암(巨岩)에 새기고 그 옆에 승(僧)을 모아 암자를 이룩하여 그 이름을 환장사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채운암에는 복장기를 가진 목조여래좌상이 대웅전 본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대웅전
전하는 바에 따르면 채운암은 본래 화양천 건너편 첨성대 안쪽 계곡에 1277년(고려 충렬왕 3년) 도일선사(道一禪師)가 수도암을 창건하였는데, 그후 1619년(조선 광해군 2년) 혜식선사(慧識禪師)가 중건(重建)하고 채운암이라 하였다고 한다. 현 위치에는 1655년(효종 4년) 혜일선사가 절을 짓고 환장사(煥章寺)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1896년(고종 33년) 의병이 봉기할 때 일본관헌이 난입하여 불을 질러 소실되고 대웅전 3칸만 남았다. 이후 1948년 대홍수로 채운암이 파괴되자 1949년 그 요사 일부를 현 위치에 이건하고 채운암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중수시 발견된 묵서(墨書)에 “도광육년병술(道光六年丙戌)”(1826)의 상량(上樑) 기록이 발견되었다.
한편 민진원(閔鎭遠)의 단암만록(丹巖慢錄)에는 “명나라 숭정황제(崇禎皇帝)의 어필 「비례부동(非禮不動)」을 보관하기 위하여 암자를 짓고, 환장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이며, 1980년을 전후하여 창호, 단청 등을 보수하였다.
목조여래좌상
채운암 목조여래좌상은 대웅전의 중앙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을 조각한 것이다.
이 불상은 나발의 머리위에 두툼한 육계가 표현되었고 상호(相好)는 원만하며 백호(白毫)와 양 미안(眉·眼), 비량(鼻樑), 구순(口脣) 등이 정제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돌려있다. 법의는 양쪽어깨에 걸친 통견이며 가슴에 군의대가 보인다. 길게 흘러내린 법의는 양쪽 무릎을 덮었고 의단의 일부는 양쪽 손목에 걸쳐 옆으로 펼쳐지면서 흘렀다.
채운암 목조여래좌상은 대웅전의 중앙에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을 조각한 것이다.
이 불상은 나발의 머리위에 두툼한 육계가 표현되었고 상호(相好)는 원만하며 백호(白毫)와 양 미안(眉·眼), 비량(鼻樑), 구순(口脣) 등이 정제되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돌려있다. 법의는 양쪽어깨에 걸친 통견이며 가슴에 군의대가 보인다. 길게 흘러내린 법의는 양쪽 무릎을 덮었고 의단의 일부는 양쪽 손목에 걸쳐 옆으로 펼쳐지면서 흘렀다.
연풍향교
연풍향교는 조선 중종(中宗) 10년(1515) 경에 창건되어 여러차례 중수되었고, 6.25동란시 명륜당과 동·서재가 소실된 것을 1978년 대성전을 중수하고, 1979년 명륜당 등 건물을 재건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후묘(前學後廟)식으로 안담장에 내삼문을 두어 구획하고 있는데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단층목조이고, 5성 22현을 지방유림이 춘추로 향사하고 있으며,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이다. 이밖에 교직사가 있다.
대성전의 정면에는 공자를, 중앙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위패를 모시고,
동벽에 주희(朱熹·중국), 주돈이(周敦 臣頁·중국), 설총(薛聰), 안유(安裕),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김집(金集), 송준길(宋俊吉)을 서벽에 정호(程顥·중국), 정이(程 臣頁·중국), 최치원(崔致遠), 정몽주(鄭夢周),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정인후(鄭麟厚), 성혼(成渾), 조헌(趙憲), 송시열(宋時烈), 박세채(朴世采)등 22현을 종향하고 있다.
연풍향청
향청은 본래 조선초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유향소(留鄕所)였으나, 성종 20년(1489)에 향청이란 이름으로 개칭하고 지방관의 감독 하에 운영되었던 자문기관이다. 주된 역할은 풍기를 단속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면장(面長), 풍헌(風憲), 약정(約正) 등을 추천하며 조세, 요역의 부과분배 등의 자문에 응했다. 향청의 수장을 좌수(座首) 또는 좌장이라 하고 그아래에 좌별감(左別監), 우별감(右別監), 창감(倉監), 방감(房監) 등을 두었다.
연풍향청은 1910년 경술국치후에는 천안헌병대충주관구연풍분견소(天安憲兵隊忠州管區延豊分遣所), 괴산경찰서연풍주재소(槐山警察署延豊駐在所), 괴산경찰서연풍지서(槐山警察署延豊支署) 등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1963년 3월 부터는 천주교(天主敎) 연풍공소(延豊公所)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1995년 보수전까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통칸으로 된 팔작지붕 초익공식의 목조기와집이었으나 1995년 보수시 부식된 기둥을 교체하고 창호, 초석 등을 수리하였으며, 고증에 따라 온돌방 2개소를 원형보수하고 홑처마를 겹처마로 바꾸었다.
이화령 (梨花嶺)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와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의 경계에 있는 고개고개. 높이 548m. 소백산맥의 조령산과 갈미봉과의 사이에 있다. 동쪽 사면은 조령천(鳥嶺川), 서쪽 사면은 연풍천(延豊川)의 하곡으로 이어진다. 그 이전에는 국도가 새재[鳥嶺(조령)]로 통하는 험난한 산로(山路)뿐이었으나, 신국도 3호선이 이화령을 통과함으로써 주변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잠·엽연초 등 특용작물의 수송도로로 이용된다. 충청북도의 충주권(忠州圈)과 경상북도 북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탈바꿈하여 옛 조령에 이어 새로운 교통요충지가 되었다. 이 고개 밑으로 이화령터널이 개통되었다.
원풍리 마애불좌상
넓적하면서도 힘 있는 얼굴에 가늘고 긴 눈, 넓적한 입 등의 조각수법은 평면적으로 양감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지만, 얼굴 전반에 미소가 번지고 있어 완강하면서도 한결 자비로운 느낌을 준다. 신체 또한 반듯한 어깨, 평평한 가슴 등으로 형식화 되었으며, 통견의 법의주름은 무딘 선각으로 표현되었다. 광배에는 화불이 5구씩 조각되었고 채색과 장식의 흔적이 남았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말기 범어사(梵魚寺)의 고승인 여상조사(呂尙祖師)가 조성, 또는 고려때 나옹대사(羅翁大師)가 조성한 것이라고도 하나 고려중기인 12C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불상을 나란히 조각한 것은 법화경의 사상을 반영한 석가·다보 이불병좌상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이다.
조령 (鳥嶺)
경상북도 문경시(聞慶市) 문경읍과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사이 소백산맥에 있는 고개. 높이 642m. 새재 또는 문경새재라고도 한다. 옛날 서울로 올라가는 관문이었으며 군사적 요지였다. 조선시대 축성한 제1·2·3관문과 부속성벽으로 된 사적 제147호의 문경관문이 있는데, 수문장이었던 신충원(辛忠元)이 단독으로 이루어 놓은 중성(中城;지금의 제2관문)을 시작으로 숙종 때 잇따라 세워진 이들 관문은 양쪽 산의 골짜기, 즉 서쪽의 마폐산(馬閉山, 940m)·조령산(1017m)을 연결하는 산릉(山稜)과 동쪽의 부봉(釜峰)·주흘산(主屹山)을 연결하는 능선 사이의 조령천 계곡에 있다. 이 밖에 진(鎭)과 군창(軍倉)의 터가 지금도 남아 있으며, 옛날에는 우거진 송림과 박달나무로 유명하였다. 조령에서 남쪽 약 7㎞ 지점에 있는 이화령(梨花嶺)이 개통됨에 따라 새재는 사적지로 남게 되었으며, 1981년 이 일대 5.3㎢가 문경새재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문경새재(聞慶鳥嶺)
백두대간의 조령산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 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니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 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지릅재와 이우리재(伊火峴)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의 관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곳은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 민요(새재아리랑)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新舊)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받았다는 교귀정터가 남아 있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標石) "산불됴심" 비가 남아 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장군, 동학과 의병이 남긴 사담(史譚)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등산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문경관문(聞慶關門)
이 관문은 고려 태조가 경주를 순행차 고사갈이성을 지날 때 성주 흥달이 세 아들을 차례로 보내어 귀순하였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관문은 영남지방과 서울간의 관문이며 또한 군사적 요새지이다. 삼국시대에는 이보다 동쪽의 계립령(鷄立嶺)이 중요한 곳이었는데, 고려 초부터는 이곳 초참(草站)을 혹은 새재라고 하므로 조령이라 이름하고 중요한 교통로로 이용하였다. 조선 선조25년(1592) 임진왜란때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가 경주에서 북상해오는 카토오 키요마사의 군사와 이곳 조령에서 합류했을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이었다. 이 때 조정에서는 이곳을 지킬것이라 생각햇지만 신립장군은 때가 늦었으므로 충주로 후퇴하였다. 그 후 충주에서 일어난 의병장 신충원이 오늘날의 제2관문에 성을 쌓고 교통을 차단하며 왜병을 기습하였다.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재확인 되자 군사시설을 서둘러 숙종 34년(1708)에 이르러서야 3중의 관문을 완성하였다. 문경에서 충주로 통하는 제1관문을 주흘관(主屹官), 제2관문을 조동관(鳥東關) 혹은 조곡관(鳥谷關), 제3관문을 조령관(鳥嶺關)이라 이름 한다.
문경 제 1. 2. 3관문 및 부속성벽
사적 제147호,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문경새재 도립공원 내에 위치
* 제 1관문(주흘관) : 숙종 34년(1708년) 설관, 홍예문 높이 3.6m, 폭 3.4m, 길이 5.4m
조선 숙종 34년(1708)에 축성하였으며 초곡성 또는 영남 제1관으로 불리고 있으며 정면3칸 측면2칸, 협문2개,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3.6m, 폭3.4m, 길이5.4m이다. 좌우 석성은 높이4.5m, 폭3.4m, 길이188m이고 부속산성은 높이1~3m, 폭2~4m, 길이 동측500m, 서측400m로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 제 2관문(조곡관) : 선조 27년(1594년) 축성. 동측벽 400m, 서측벽 100m 높이 2m, 폭 2~3m
조선 선조 27년(1594)에 축성 하였으며 중성, 조동문, 주서문으로 불리고 있다. 선조27년에 충주 수문장 신충원이 단독으로 축성한 곳으로 중성이라고도 하며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구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제3관문)과 초곡성(제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곳에는 조동문만 설치하였다. 그 후 1907년에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하고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부르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누각은 정면3칸, 측면2칸, 좌우협문2개, 8작 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 3.6m, 폭 3.56m, 두께 11cm, 좌우성벽높이 4.5m, 폭 3.3m, 길이 73m 좌우에 부속된 산성 높이 2m, 폭 2.3m 길이 동측 400m, 서측이 100m이다.
* 제 3관문(조령관) : 숙종 34년(1708년) 축성. 조령관 지붕위에 떨어진 빗물은 남쪽은 낙동강물, 북쪽은 남한강으로 유입된다. 동측벽 400m, 서측벽 400m 높이 2~3m, 폭 2~3m
조선 숙종 34년(1708)에 축성하였으며 문경새재 고갯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하여 선조 초에 쌓고 숙종 34년에 축성하였으나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 탄 것을 1976년도에 홍예문 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했다. 누각 정면3칸, 측면2칸, 좌우 협문2개,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3.88m, 폭 2.9m, 길이 6.12m, 좌우 석성의 높이 4.5m, 폭 2~3m, 길이 185m, 부속산성의 높이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이다
* 신립과 조령관문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로 경상도를 연파하고 한양으로 향한다. 그들 역시 영남대로를 따라 거슬러 오던 참이었다. 조선의 조정은 신립 장군에게 왜군을 격퇴할 것을 명한다. 신립은 어디서 적을 막을 것인가를 고민한다. 제일감으로 떠오른 것이 새재다. 새재는 넘는 길을 제외한 주변의 산세가 가파르고 험해 새재에 든든한 방어막을 구축하고 험한 산 위에서 공격을 한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다. 신립이 새재로 향하던 어느 날 밤, 꿈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탄금대에서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치고 싸운다면 능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신립은 꿈속에 나타난 여인의 말을 따른다. 그러나 신립이 이끄는 군사는 노도처럼 밀고 오는 왜적을 막아내지 못하고 탄금대에서 전멸하고 만다. 이 싸움을 두고 훗날의 사가(史家)들은 새재에 방어막을 쳤더라면 속절없이 당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새재에 3개의 성을 쌓고 문을 만들었다. 조령 1, 2, 3관문이 그것이다. 성문은 모두 남에서 치고 올라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북쪽에서 잠그게 만들었다.
[공부 합시다]
한반도의 산세
베스트 셀러 ‘태백산맥은 없다’ 라는 서적이 있다. 그렇다, 맞는 말이다, 태백산맥은 본시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 한반도의 산세를 구분하는데 있어 지금까지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워온 산맥의 개념은 우리의 옛 선인들께서 분류하시던 본래 고유 우리 산세의 개념이 아니다. 하기에 우리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워왔던 산맥이라는 개념은 잘못되어 있다.
우리의 초,중,고교를 비롯하여 심지어는 대학에서까지 우리나라의 산세는 모두 백두산으로부터 맥을 이루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워왔던 산맥들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 중간이 강으로 끊기어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이 산세의 흐름이 강으로 끊기어 있다면 이를 어찌 산맥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산맥은 물을 건널 수 없는 것은 철칙이려니 이를 산맥이라 말하는 것은 너무나도 크나큰 오류이다. 교과서에는 한반도의 산세를 장백산맥, 적유령산맥, 묘향산맥, 평안산맥, 함경산맥, 마식령산맥, 광주산맥, 태백산맥, 차령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 등으로 분류하여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본시 우리나라의 고유 지리학에는 산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이 같이 한반도의 산세를 분류함에 있어 산맥이라는 개념으로 정립되기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동경제국대학 이학박사이며 지질학자인 고또분지로(小藤文次郞)라는 자가 1900년부터 1902년까지 불과 채 2년도 되지 않는 단기간에 거쳐 우리나라의 지형을 연구하면서 붙여 놓은 단어로서 땅속의 지질학적 구조선을 기준으로 그렸기 때문에 땅위의 지형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실례로서 고또분지로가 한반도의 산세를 조사함에 있어 지방의 토인들에게 이 고개가 무슨 고개냐 묻는 고로 차령이라 대답하자 차령이 위치한 산세라 하여 차령산맥이라 명칭 하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한 가지 실례로서 차령이란 단어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알아보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오리 이원익대감이 보은지방의 목민관으로 발령을 받고 부임길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부임지의 아전들이 청주목과 보은군의 경계지점까지 마중을 나왔다. 아전들의 안내를 받으며 한참을 가다보니 대단히 험난하고 높은 고개가 나타났다. 아전은 처음부터 신임 사또의 기세를 눌러놓기 위한 심산으로 『사또- 이 고개는 연(평교자)을 타고 넘어가시게 되면 교자군들이 지치는 관계로 고개 아래에서 하루를 유하시고 가셔야 되옵니다. 』 하고 말하였다.
오리선생은 한시라도 빨리 임지에 도착하여 밀린 업무와 송사를 처리하여야 하겠기에 『그래, 그렇다면 걸어서 넘지.』 하고는 연에서 내려 앞서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가 뒤를 돌아보니 아전놈이 히쭉 히쭉 웃으며 따라온다.
<아하.... 이놈이 나를 놀리고 있구나.> 생각하고는 벽력같은 소리로『네 이놈, 내가 걸어서 넘으면 네놈은 기어서 넘어야 할 일 이거늘, 내가 걷는다고 네놈도 같이 걸어서 넘는다면 말이 되느냐, 당장 기지 못 할꼬.』 하며 일갈호성으로 호령하였다.
유래로 목민관들은 아전배들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 목민관으로서의 자질이 평가되었다.
내직에서만 근무를 하다 외직으로 처음 발령을 받은 신출내기 목민관들은 이렇듯 아전배들을 잘 다루지 못해 큰 곤혹을 치르고는 하였다.
영조실록에는 내직에서 백전노장이라 할 수 있는 사도세자의 장인 홍봉한이 목민관으로 부임하여 아전배 들을 능히 다루지 못해 큰 곤혹을 치르다가는 다시 내직으로 발령을 받는 기록이 보이며, 심지어는 장군이었던 변종인이 신고식이라는 명분으로 하사관들에게 심한 구타를 당한 사실이 임금에게까지 보고되었던 기록을 볼 수 있다.
시쳇말로 요즈음 신출내기 장교들은 노련한 하사관들의 밥 밖에는 안 되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조선조의 관제나 품제는 대단히 체계적이고 단계적이며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제도에는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다만 제도상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아전들에게는 일체 녹봉을 지급치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녹봉이 없는 아전들은 걸핏하면 일괄사표 내지는 파업이라는 실력행사로 목민관에게 압력을 가 하였다. 또한 아전들 역시도 먹고는 살아야 하였기에 그 수입원으로 민초들을 뜯어먹고 살았던 것이려니 그 폐해는 극심하기 짝이 없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이 같이 녹봉을 받지 못하는 아전들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오리대감이야 말로 여러 외직을 두루 거친 누구보다도 경험이 풍부한 백전의 노장이었다. 아전들은 어떤 식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쯤은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아전 놈은 혼비백산하여 그 높은 고개를 기어서 넘었다. 기어서 넘다보니 팔꿈치와 다리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음으로 피발로 고개를 넘었다 하여 피발령이라 하였으며 후에 한문애호가들에 의하여 피혈자를 써서 血嶺이라 하였다.
한참을 가다보니 또 하나의 엄청난 고개가 나타났다. 아전놈은 다시 또 이 엄청난 고개를 기어 넘을 생각을 하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아래 마을에서 수레를 빌렸다. 수레에 오리대감을 태워서 넘었다 하여 수레티재라 하였으며 후에 역시 한문애호가들에 의하여 수레차자를 써서 車嶺이라 하였다
우리의 옛 선인들께서는 한반도의 산세 흐름을 분류함에 있어 백두산에서부터 시작되어 지리산까지 1625Km에 이르는 대장정의 산세 흐름을 백두대간이라 하였고, 한반도의 최북단 장백산을 기점으로 하여 가로로 길게 획을 그은 산세를 장백정간이라 하였으며, 백두대간 1625Km 대장정의 등골을 따라 내리다가 분맥으로 형성되는 13개의 정맥으로 구분을 하였다.
이 같은 1대간, 1정간, 13정맥의 모든 산줄기는 어느 한 곳도 끊김이 없이 모두 산세의 흐름으로 이어져 있다.
우리나라 정통 산줄기의 분맥을 알기 쉽도록 만든 지리서로는 조선 후기 영조 때 실학자인 여암 신경준(1712-1781)의 산경표와 고산자 김정호(?-1864)의 대동여지도가 대표적이다.
대동여지도나 산경표를 비롯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집대성된 우리의 정통 지리도에는 1대간, 1정간, 13정맥과 거기서 또 다시 분맥되어 지맥을 이루는 산세의 흐름이 뚜렷하게 잘 나타나 있다.
이러게 훌륭한 지리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정통산세의 흐름은 무시되고 일인들에 의해 그들의 식민지 통치와 일본기업들의 국내시장침투, 자원수탈 등의 목적으로 만든 지리도가 아닌 지질도를 현재까지도 그대로 교과서에 수록하여 가르치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최북단으로 우뚝이도 솟아오른 영봉이 자리를 잡고 한반도를 굽어보고 있으니 그 산을 일러 바로 백두산이라 한다. 백두산의 정상에는 天池라는 크디큰 못이 있어 물살이 넘실대니 그 물살이 북으로 흘러나니 송화강을 이뤘고, 동으로 흘러서는 두만강 이뤘으며, 서쪽으로 흘러서는 압록강이 되었다.이 같은 민족의 영산 백두산은 이 세상에서 태양이 가장 먼저 떠올라 온 누리에 퍼진다하여 또 다른 이름으로 한밝산이라 하였다.
우리나라 한반도의 모든 산세는 이 한밝산으로부터 시작된 백두대간을 타고 이어진다. 하기에 한밝산은 우리나라 삼천리 방방곡곡 모든 산들을 조종하는 태조산이로니 그곳에서 품어내는 정기는 곧 바로 한민족 우리 겨례의 명명한 얼이요 혼백이요 기상이다. 풍수지리학 형국론으로 풀이를 하자면 한반도의 형국은 표효하는 호랑이의 형상이다. 고로 백두대간은 표효하는 호랑이의 등뼈에 해당된다.
이렇게 한반도의 최북단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되어 최남단 지리산까지 세로로 길게 획을 그은 백두대간의 등골을 따라 내리다가 분맥으로 형성하는 13정맥의 산세에 따라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한북정맥,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 낙남정맥이라 분류하였다.
13정맥의 산 흐름을 각각 이같이 이름하여 분류한 의미는 예를 들어 청천강의 북쪽으로 위치하여 흐르는 산세의 맥이라는 의미로 청북정맥이라 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산세의 맥을 청남정맥, 임진강 북쪽과 예성강 남쪽 사이에 위치한 산세 맥을 임진북예성남정맥. 낙동강의 동쪽으로 세로 질러 남쪽을 향하여 흘러내린 산세라 하여 낙동정맥이라 하고 낙동강의 남쪽으로 위치한 산세라 하여 낙남정맥이라 하였다.
이러한 의미의 1대간, 1정간, 13정맥은 모두 주맥으로 어떤 것도 도중에 한 곳도 끊기지 않고 바다까지에 이르고, 이러한 산맥 양쪽에는 산줄기를 따라 흐르는 강을 끼고 있다.
이 같은 1대간, 1정간, 13정맥에서 다시 가지를 친 산줄기를 지맥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지맥의 산줄기는 아무리 크고 긴 산줄기라 할지라도 바다까지 이르지 못하고 강이나 하천을 만나서 끝나고 있다.
1大幹 1正幹 13正脈
1, 白頭大幹(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해 원산(圓山) 두류산, 마대산, 원산(元山) 두류산, 백봉, 매봉산, 속리산, 영취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한반도를 세로 지르며 뻗은 제일 큰 산줄기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도상거리 1625Km로 한반도의 모든 물줄기를 동서로 갈라놓는다.
현재 남북으로 분단된 상태에서 남한 쪽의 백두대간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향로봉까지 690Km가 된다 한다.
요즈음 산악인들 사이에서 백두대간 종주 열풍이 불고 있다.
남북한이 분단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실제적으로 북한 쪽의 백두대간 구간은 종주를 해볼 수가 없고, 남한 쪽의 전 구간을 종주 하는데는 보통 60일에서 70일 정도 걸린다고 한다.
도상거리라 함은 축척지도를 곡선자로 거리 측정한 것으로 오차가 있을 수 있으며, 산악인들에 의하면 실제 산행거리는 도상거리의 대략 2배정도 된다고 한다
장백정간과 13개의 정맥은 모두 백두대간에서 분맥하여 산세의 맥을 형성한다.
2, 長白正幹(장백정간)
백두대간의 원산 두류산에서 시작되어 궤상봉, 관모봉, 고무산, 백사봉, 송진산 등 함경북도 내륙을 서북향으로 관통하여 두만강 하구의 섬 녹둔도 앞 서수라에서 멈춘 산줄기다.
3, 落南正脈(낙남정맥)
백두대간의 끝자락 지리산 영신봉에서 시작하여 옥산, 무선산, 봉대산, 천황산, 대곡산, 무량산,성지산, 영봉산, 대곡산을 거쳐 마산의 무학산, 김해 낙동강 하구의 분산에서 끝나는 산줄기다.
북으로는 낙동강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섬진강을 보내고 진주 남강을 이끌고 끝에서는 낙동강과 접한다.
4, 淸北正脈(청북정맥)
백두대간의 마대산에서 서쪽으로 분맥한 산줄기가 낭림산에서 청천강을 사이에 두고 두 줄기로 갈리는데 청천강 이북의 산세가 서쪽으로 향하여 갑현령, 적유령, 구현, 대암산, 삼봉산, 우현령, 동림산, 단풍덕산, 비래봉, 천마산, 법흥산 등 평안북도 내륙을 관통하고 신의주 앞 바다 압록강구 하구 미곶산에서 끝나는 산줄기다.
5, 淸南正脈(청남정맥)
낭림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청천강 이남으로 묘향산, 알일령, 용문산, 서래봉, 강룡산, 만덕산, 광동산, 청룡산, 오석산을 거쳐 서해와 접하는 대동강 하류 광량진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다.
6, 海西正脈(해서정맥)
백두대간의 원산 두류산에서 한 산맥이 서남쪽으로 뻗어 가다가 화개산에서 예성강을 사이에 두고 두 줄기로갈리는데 예성강 이북의 산맥이다. 곡산 대각산과 언진산, 오봉산, 천자산, 멸악산, 운봉산, 해주 수양산, 장연 불타산을 거쳐 서해 장산곶까지 뻗은 산줄기다.
7, 臨津北禮成南正脈(임진북예성남정맥)
임진강 북쪽과 예성강 남쪽의 산줄기로 화개산에서 개연산, 학봉산, 수릉산, 성거산을 거쳐 개성의 송악산까지 이어지고 서해와 접하는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처인 개성의 진봉산까지 뻗은 산줄기다.
8, 漢北正脈(한북정맥)
백두대간의 추가령 근처 백봉에서 시작하여 한강 북쪽으로 백암산, 적근산, 대성산, 백운산, 운악산, 축석고개, 도봉산, 북한산, 노고산, 고봉산을 지나 서해와 접하는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처인 교하의 장명산까지 뻗은 산줄기다.
9, 落東正脈(낙동정맥)
백두대간의 매봉산에서 백두대간과 헤어져 백병산, 응봉산, 통고산, 백암산, 주왕산, 단석산, 가지산, 취서산,부산 금정산을 거쳐 부산 앞 바다 다대포의 물운대까지 뻗은 산맥이다. 낙동정맥은 낙동강 동쪽에 있으면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10, 漢南錦北正脈(한남금북정맥)
백두대간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하여 청주의 상당산성을 향하여 동쪽으로 돌아 좌구산, 보현산을 거쳐 죽산의 칠현산까지 이어진 산줄기다.
이곳 칠현산에서 산세는 또 다시 두 줄기로 갈라지는데 서북쪽을 향하여 흐르는 산세를 한남정맥이라 하고, 서남쪽을 향하여 흐르는 산세를 금북정맥이라 하는 바 백두대간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하여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이어주는 산세라 하여 한남금북정맥이라 하는 것이다.
11, 漢南正脈(한남정맥)
칠현산에서 서북으로 향하여 칠장산, 백운산, 성륜산, 보개산, 수원의 광교산, 안양의 수리산, 소래산, 성주산, 계양산, 가현산을 거쳐 강화도 앞 문수산까지 뻗은 산줄기다.
12, 錦北正脈(금북정맥)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향하여 뻗은 산맥으로 금강 북쪽에 있다하여 금북정맥이라 한다.
칠현산, 안성 서운산, 천안 흑성산(성거산), 국사봉, 광덕산, 차유령, 청양 일월산, 오서산, 보개산을 세운후 한 줄기는 계속남진하여 흐르고 한줄기는 성주산을 세운 후 역으로 돌아 북쪽으로 흘러 40km가량을 올려쳐서 예산의 덕숭산(수덕산), 용봉산, 가야산을 세우고 태안반도로 건너가 팔봉산을 세운 후 안흥진 앞바다에 떨어지는 산줄기다.
13, 錦南湖南正脈(금남호남정맥)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이르기 직전 영취산에서 시작하여 장안산, 수분현,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 부귀산을 거쳐 영취산까지 이어진 산맥이다.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이며 주화산에서 금남정맥과 곰재(곰치)에서 호남정맥으로 갈린다.
14, 錦南正脈(금남정맥)
금강 남쪽에 있는 산맥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주화산(모래재 터널 북쪽 0.6Km 지점)에서 시작하여 운장산, 왕사봉, 대둔산, 천호산, 계룡산, 널티, 망월산, 부여 부소산, 조룡대로 달려 금강에서 끝나는 산줄기다.
15, 湖南正脈(호남정맥)
한반도의 산세를 이같이 한강의 북쪽에 위치하는 산세를 한북정맥, 한강의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세라 하여 한남정맥, 금강의 북쪽에 위치한 산세의 맥을 금북정맥, 백두대간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되어 한남정맥과 금북정맥 두 줄기로 갈라지는 지점인 안성의 칠현산까지를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이어주는 산세라 하여 한남금북정맥, 역시 금강의 남쪽지점 전주의 곰치에서 시작되어 북향하여 금강 아래로 흐르는 산세를 금남정맥이라 하고 역시 전주 곰치에서 시작되어 호남평야의 동쪽으로 세로 질러 남쪽을 향하여 뻗어 내린 산세라는 의미로 호남정맥, 백두대간의 영취산에서 시작되어 금남정맥과 호남정맥 두 줄기로 갈라지는 전주의 곰치까지를 금남호남정맥, 낙동강의 동쪽으로 세로 질러 남쪽을 향하여 흘러내린 산세라 하여 낙동정맥이라 하고 낙동강의 남쪽으로 위치한 산세라 하여 낙남정맥이라 하였다.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여행프로그램 [別有風景]
한비야 씨는 여행이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진행되었던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정기답사를 2009년 9월, 102차로 끝내고 송파문화원의 '테마가 있는 문화탐방'이라는 강좌로 변경되다보니 우리 회원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부터 새롭게 여행 프로그램을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프로그램 이름을 고민하다가 이백의 시 <산중문답>에
問爾何事棲碧山(문이하사서벽산)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불답심자한)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이란 詩가 떠올랐습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을 별유풍경(別有風景)으로 바꿔보니 보통 볼 수 없는 특별히 좋은 풍경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별유풍경(別有風景)을 구경하러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말이죠.
여행일정은 종전과 같이 매월 4째 주 화요일에 진행되며 접수 및 신청은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02-3401-0660)으로 하셔야 합니다. 1회 참가 시에 회비는 4만원이며, 3개원 단위로 신청을 하실 경우에는 10만원입니다. 강사는 오덕만 선생님이 진행하실 계획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회차 |
일자 |
탐방주제 |
탐방지 |
6 |
9월28일(화) |
산삼과 산약초가 유명한 고장 함양 |
학사루 → 함양상림 → 함양석조여래좌상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안의광풍루 → 용추사 → 심원정 → 농월정 → 동호정 → 군자정 → 거연정 |
7 |
10월26일(화) |
청정한 자연과 향토문화가 어우러진 괴산 |
각연사 → 미륵산성 → 우암송시열 관련 유적 → 산맥이옛길 |
8 |
11월23일(화) |
풍요롭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충절과 예학의 고장 논산 |
관촉사 → 계백장군묘소 → 돈암서원 → 개태사 → 상계사 → 성삼문묘 → 견훤왕릉 → 강경젓갈시장 → 명재고택 |
회 비 : 3개월(100,000원), 1개월(40,000원)
회비입금: 국민은행 836301-04-002170(예금주: 오덕만)
접수처 :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담당: 오유정 02)3401-0660)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193-17 광진빌딩 2층 ☏ 3401-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