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 그런데로 공장은 운영이 잘 돼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국악 공부가 우선이지요
군산에 있는 군산 국악원을 찾아 갔습니다
거기에는 김재 김난주씨가 창악선생님으로 있고 가야금선생님, 고수선생님이 계셨는데 고수선생님의 왼쪽 손이 절반은 없었어요
틈나는데로 북 공부도 하고 판소리 공부도하고 그러는 어느날 우리이쁜 공주를 낳았답니다
이름은 이선영
김난주씨는 좋은 청을 가지고 계신 분이었어요
그래서 김선생님한테서 심청가를 공부하였지요
완창이 아니고 좋은 대목만 골라서 공부를 하였지요
고수가 고수 공부을 왜 안했냐고 한다면 군산국악원 북선생은 내 마음에 내키지를 안해서..... 군산에서는 이미 명창들 수행 고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김난주 선생님도 자주 뵙고 공연도 하고 외출도 많이 하였담니다
그래도 군산에서는 공장도 잘 되고 공연도 자주 나가서 돈도 많이 벌고 잘하다가 어느 선주의 기계를 수리 하다가 사고가 생겨서 어려움을 당하고 객지를 타는구나하고 모두 챙겨서 고향으로 자리를 옮겨 버렸습니다
벌교로 와서 호남 농기계 간판을 걸고 농기계 수리 공장을 하였습니다
벌교에서도 국악 공연은 많이 했지요
순천에서 박점래(향산)명창이 계셨고 선농월명창 김송죽명창 박분임(미홍)명창 염금향명창 최진희명창 등 여러 명창들이 동부 육군을 누비면서 공연 및 마당놀이를 하였지요
순천에서는 박봉술명창의 바로 위의 형 박봉구선생님이 순천에서는 활동을 하시고 나는 벌교에서 주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때는 임준옥선생님도 벌교에 와 계시고 임선생님은 북만 다루면 안되고 이론과 학문이 있어야한다고 나에게 주문을 하셨지요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 끝에 김성곤선생님을 찾아 갔습니다
선생님은 야속했읍니다
너는 북을 그 만치 다루는데 더 가르쳐 주어 봤자 내 제자가 될 수가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였읍니다
눈물을 머금고 집으로 돌아와 생각 끝에 전주에 계시는 송영주선생님을 찾아 갔습니다
송선생님은 저를 받아 주시면서 열심히 가르쳐 주셨지요
한달이나 다녔을까요
그날 몹시 추웠지요
전주 송선생님한테 공부를 하러 가는데 구례 밤치재에서 빙판에 미끄러져 타고 다니는 자동차 앞 범버하고 나이트가 부서져 버렸습니다
송선생님이 춥다 어서 들어 오너라 하시더니 방에서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겠읍니까
이론공부를 하러면은 여수에 박창을선생님 제자 정홍수씨가 계시는데 여기까지 다니면서 고생을 하느냐고 하시면서 나를 보고 여수로 가서 공부하라고 역시 지식인답게 알려 주셨습니다.
존경스러운 분이지요
그래서 나는 송선생님 지시를 받고 고맙읍니다 하고 순천으로 돌아왔읍니다
그 간에 벌교에서는 임준옥선생님은 연산리에서 후학를 지도하고 계셨고 박당귀선생님은 벌교 양노당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계셨지요
나는 임준옥선생하고 공부를 하면서 공부할 공간이 없어서 방천뚝 잔디 밭에서 공부을 하다가 다로가 잘 안되면 야 이 더러운 놈아 저기 보 밑에 가서 빠저 죽어 버러라 하고 북채로 억케을 두둘겨 폐는것이지요 그러나 나는 선생님이 에을 써서 가르켜주시는 임선생님이 고맙지요 어와청춘 단가 여봐라주부야 임서생님의 소리을 어떻게 흉내을 내겠읍니까 만은 열심히 노력하였지요
뜸 나는대로 박당귀선생에게서 소리공부도 하였지요 박선생님은 나가 자기소리을 다 받아서 명창으로 가기을 원했지요
그러나 나는 이미 박선생창은 좀 부족하다는 것을 께달았읍니다
그렀게 세월은 흘렀고 정미소을 차러서 두번이나 실패을하였읍니다
벌교 양노당을 갓더니 박미홍씨가 창악 선생으로 와게시지안겠읍니까 박미홍선한대서 춤도 배우고 소리도 배우고 재미잇는 생활을 보내면서 지내게 되였는데 여기서 저의 솔직한 고백을하겠읍니다 박미홍씨에게 선생님으로 대우을 하다가 우연히 사랑으로 변 하고 말았읍니다
그러는 동안에 저는 객지로 돌아 다니느라 예비군 훈런을 받지 못해서 순천 대대로 훈런을 일주일간 받아야 하는데 순천에서 먹고 잠잘자리가 없어서 불가피 박선생집으로 들러오게되였읍니다
그때는 임이 박선생과 사랑을 하고 있였지요 그런데 박선생 아버님이 그 유명한 박봉술 명창의 형님이시고 고수로써 유명하신 분이며 중앙무대에서 활동한명창이 지방공연을 내러오면 집고을 하신분이 이까요 나는 좋은 기헤로알고 북공부을하는데 육게월이 다 못되서 병완으로 별세을하시고 말았담니다
그러는도중에 나는 순천에있는 세진기업에 입사을 하여 열심히 일을 하다가 어러운고비가있어 중앙공업사로 자리을 옵겨 일을 하는데 공업일하는 것보다 운전수 수입이 더좋드라고요 그래 나는 차동차 면허을 취득하였고 이년후에 대형 일종 면허을 취득하여였읍니다
그러고는 주식회 세진기업 회장이신 조규순회장님 자가용 기사노르을 하였담니다
그후로 조회장님 추천으로 주식회사 동신교통 버스기사로 근무을하였지요 순천에 들어와서 언 삼십오년이상이라는 세월이흘렀는데 그러기 이전에 순천에 들러와서 제일먼저 1977년 6월 7 일자로 한국국악협회 전남도지회 순천시지부 회원의로 활동을 하였지요
그중에는 일반회원 감사 이사 부지부장 까지 약 삼십 오년 이라는 세월을 보내면서 가진활동을 다 하였담니다
그중에는 농악으로 기금을 모으기도 하였고 공연으로 기금을모우기도했담니다 그때만해도 순천에 게시는 월로 김동원회장님 조규순회장님 박채복회장님 김인모화장님 송흥호회장님 등등 여러 민물들께서 현금도 만이 희사 하시고 그게 게기가되여 2005년에는 순천국악협회 자금이 4천 5백만원이 모아지기도 했담니다 이때는 박채복 회장님은 순천국악협회 지부장을 맏다 만은수고을 하신분이고 다음에 김상현 회장님 정동준 씨이세분은 그야말로 순천 국악을위하여 노럭을만이하신분들임니다 정동준 지부장 뒤을 이여 조동겸이라는 분이 국악협회을 맏다서 일을 하면서 회원의 갈등은 물론 국악협회 자금 사천오백만이라는 돈을 다 탕진 하여버렀고 지금에순천국악협회가 안탑갑기가 그지얺읍니다 순천 팔마 전국 고수대회가 대통령상으로 승격하여 치루던 대회가 도지사상으로 하락하고말았읍니다
그렁저렁 허무한날은 지나가고 어느덧 10녀년의 동신교통 근무을 맡치고 뉴 삼우관광 회사에서 영업부장으로 제직해 있을때 나는 이러한 생각을 하게됨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는 무엇을 남길것인가 나는 생각 햇지요
그래도 국악에 열정을 다하였는데 그것이다 하고 북공부을 다시 시작하였읍니다
그래서 다시 광주에게시는 감남종 선생님을 다시 차자갔읍니다
그런데 감선생님이 만이편치가 안앆읍니다 공부을 못하고 나와서 길을 거러가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됨니다 이시대에는 북만 다루어서는 아이된다 생각 하엿읍니다
이론공부을 할러면은 여수에 정홍수씨가 있는데 여기까지 다이면서 고생을 하느냐 송영주 선생님이 정말로 고마우신 분이였읍니다
송선생님 지시을 받고 다음날 여수 정홍수 선생님을 차자갔읍니다
첫댓글 선생님의러브스토리까지~~ㅎㅎㅎㅎㅎㅎㅎㅎㅎ짜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