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99-2
1417년(태종 17)∼1468년(세조 14). 조선 제7대왕. 재위 1455년∼1468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이유(李瑈). 자는 수지(粹之)
.세종의 둘째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이며, 모친은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
왕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사전편에 실린 세조실록을 여기에 옮겨본다.
광릉으로 들어서면 하늘을 향한 쭉쭉뻗은 수림이 터널을 이루고있어, 세조능까지 긴거리를 햇볕 한점 안받고
갈 수있는 지상 최대 낙원길이다.~~~~가슴이 확~트인다
가장걷고 싶은 길중 하나이다. 금년에도 4번째 걸어본 길!!!!
이곳 광릉 숲에는 2,800여 종류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으며 1,600여 종류의 동물들이 산다
입구에는 (광릉수목원)이라는 산림청 연구기관이 있어 임업연구원의 전신인 임업시험장이 생기면서 철저히 관리되고 있다.
세조는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明敏)하여 학문도 잘하였으며,
무예도 남보다 뛰어났다. 처음에 진평대군(晉平大君)에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쳐 봉해졌다.
그가 대군으로 있을 때는 세종의 명령을 받들어 궁정 안에 불당을 설치하는 일에
적극 협력하고 승려 신미(信眉)의 아우인 김수온(金守溫)과 함께
불서(佛書)의 번역을 감장(監掌)하고, 또, 향악(鄕樂)의 악보(樂譜)도 감장, 정리하였다.
1452년(문종 2)에는 관습도감도제조(慣習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았다.
이해 5월에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니 7월부터 그는 측근 심복인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함께
정국전복의 음모를 진행시켜 이듬해 1453년(단종 1) 10월에는 이른바
계유정난을 단행했던 것이다.
계유정난은 폭력으로써 정권을 탈취한 사건인데, 하룻밤 사이에 정국을 전복시키고
군국(軍國)대권을 한 손에 쥐고 자기 심복을 요직에 배치하여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조정 안에 있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밖에 있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 이징옥(李澄玉)마저 주살,
내외의 반대세력을 제거하였다. 1455년 윤 6월 단종에게 강박하여
왕위를 수선(受禪)하였다.
원래 이곳터는 신숙주가 근처 봉선사 쪽에 정자를 짓고 사후에 묘터로 쓸려고
했다는데 세조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이 산너머 부용산에 잠들어 있다.
이터도 찬탈당했을까!!!!!
2012년 8월 하순에 우리나라를 뒤 흔든 볼라벤 태풍! 하지만 이곳 광릉은
매서운 바람을 이겨내고 단 한나무만 넘어진 것을 목격했다.
특히 봄에서~ 가을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광릉은 조선시대 500여 년 동안 풀 한 포기 채취도 금지되었을 정도로 보호되어
산림이 울창하고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조 크낙새가 이곳에서 서식한단다.
.사진에서 보디시피 왕릉 26대 까지 돌고돌고 또 돌아 보았지만 이곳처럼 울창한 숲은 없다
특히 세조능역이나 정희왕후 릉역으로 올라가는 길에 배열된 아름들이 활엽수림이나, 수 백 년이 기본인 전나무가 장관이다
세조는 신하들을 통솔함에 있어 자기에게 불손하는 신하는 가차없이 처단하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신하는 너그럽게 대하였으니, 양산군(楊山君) 양정(楊汀)은
정난(靖難)의 원훈(元勳)으로서 북변(北邊)의 진무(鎭撫)에 공로가 많았는데도
세조에게 퇴위를 희망하는 불손한 말을 한 이유로 참형에 처하고,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세력을 믿고 방자하여 제 가신(家臣)을 놓아
사람을 살해까지 하였는데도, 자기에게 항상 순종한다는 이유로 주의만 시켰을 뿐
처벌하지 않았다.
세조는 왕권을 확립한 뒤 지방의 수신(帥臣: 병마절도사)은
그 지방출신의 등용을 억제하고 중앙의 문신으로 이를 대체시키자
이에 반감을 품은 함길도 회령 출신 이시애(李施愛)가 1467년에 지방민을
선동하여 길주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세조는 이 반란을 무난히 평정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수립하였다.
☜세조는 민정에 힘을 기울여 공물대납(貢物代納)의 금령(禁令)을 거듭 밝히고,
잠서(蠶書)를 우리말로 해석하고, 국민의 윤리교과서인 《오륜록(五倫錄)》을
찬수하게 하였으며, 또 문화사업에는 《역학계몽도해(易學啓蒙圖解)》‧
《주역구결(周易口訣)》‧《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금강경언해(金剛經諺解)》
‧대장경(大藏經)의 인쇄와 태조‧태종‧세종‧문종의 어제시문(御製詩文)의 편집,
발간 등을 들 수가 있으며, 외국과의 관계는 왜인(倭人)에게는 물자를 주어
그들을 무마, 회유시키고, 야인(野人: 女眞族)에게는 장수를 보내어 토벌,
응징시키고, 또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建州衛)의
이만주(李滿住)를 목베어 국위를 선양하기도 하였다.
, 중신들은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부원군(府院君)의 자격으로서 종전대로 조정의
정무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이와같이, 국가의 모든 정무는 세조 자신이 직접 중신과 서로 의논,
처결하게 되니 국왕의 좌우에서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의 임무는 한층 더 중요해졌고,
따라서 승정원의 기구는 점차 강화되어 이러한 추세하에서 1468년에는
원상제(院相制)의 설치를 보게 된 것이다.
이 원상은 왕명의 출납기관인 승정원에 세조 자신이 지명한 삼중신(三重臣: 신숙주‧
한명회‧구치관)을 상시 출근시켜 왕세자와 함께 모든 국정을 상의, 결정하도록 한 것이니,
이는 세조가 말년에 와서 다단한 정무의 처결에 체력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후사의 장래문제도 부탁하려는 의도에서 설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세조는 1468년 9월에 병이 위급해지자, 여러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왕세자에게 전위(傳位)하고는 그 이튿날에 죽었으니, 세조가 왕권의 안정에
얼마나 주의를 집중시켰는가를 알 수 있다.
정각을 사이에 두고 Y 형의 왕릉
이와같이 세조대의 정치는 그 실행면에서 하의상통보다는 상명하달에
치중하였기 때문에 정국 전체의 경색을 초래하여 사회 도처에 특권 횡행의
비리적 현상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러한 세조의 무단강권정치는
왕권강화면에서는 일단 긍정할 수도 있지마는, 정치발전면에서는 세종‧성종의
문치대화정치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진다.
시호는 혜장(惠莊)이고, 존호는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이며, 묘호는 세조, 능호는 광릉(光陵)이다.
정희왕후능 혼유석에 총탄 흔적이 있음
세조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울울창창 속에 있다 .
피바다에서 얻은 그의 후계자는 어떤곳에 잠들어 있을지 다음회를 기대하시라!!!
문석과 무인석의 귀의 차이를 보면 무인석의 귀는 당나귀 귀다.
북부지형인 만큼 6.25의 아픔을 받은 석마나 석양
애교스런 석호의 덧니
유네스코 등재이후 광릉숲길 2011년 10월23일 2번째 마라톤 대회도 열리고 있다.